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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향의 연혁]
제주(濟州)는 한반도(韓半島)의 남서(南西) 해상(海上)에 위치한 우리나라 최대의 섬(島)으로 일찍이 신라시대(新羅時代)부터 탐라국(耽羅國) 또는 탁라(乇羅)· 탐모라(耽牟羅)· 주호(州胡)· 섭라(涉羅) 등으로 불리우다가 1211년(희종 7) 제주(濟州)로 개칭(改稱)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가문의 유래]
고씨(髙氏)는 아득한 옛날 우리나라 부족사회시대(部族社會時代) 의 신화(神話)에서 유래(由來)한다.
고씨(高氏)는 고을나(髙乙那)를 시조(始 祖)로 하여 45世孫 자견왕(自堅王)까지 탐라군주(耽羅郡主)로 세습(世襲) 해 오다가 서기938年(고려 태조 21年) 자견왕(自堅王)의 태자(太子) 말로 (末老)가 고려(高麗)에 내조(來朝)하여 그가 곧 우리나라 고씨(髙氏)의 중 시조(中始祖)가 되었으며, 탐라국(耽羅國)의 주인으로 탐라고씨(耽羅髙氏)가 되었다.
그후 고려조(高麗朝) 충열왕(忠烈王) 21年(서기1295年) 4월에 탐라(耽羅)가 제주(濟州)로 개칭(改稱)되면서 탐라고씨(耽羅髙氏)가 제주고씨(濟州髙 氏)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이로서 고을라왕(髙乙羅王)이 세운 탐라국(耽羅 國)은 제45世 자견왕(自堅王)으로 3275年간 왕계(王系)로 내려온 것을 마 무리 짓고 태자(太子) 고말로공(髙末老公)이 성주왕자(星主王子)의 작(爵) 을 받아 탐라(耽羅)의 주인(主人)이 되어 대대로 이곳을 다스리게 되었다.
말로公의 아들 고유(髙維), 고강(髙綱). 고소(髙紹) 3형제가 모두 고려 (高麗)에서 과거에 급제하고 벼슬을 지냄으로써 본토(本土:육지)의 진출이 시작되었다.
그로 인하여 후손들은 말로(末老)를 중시조(中始祖)로 하고 시조(始祖)의 발원지(發源地)인 제주(濟州)를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오 면서 가문(家門)을 크게 번창시켰다.
고씨(髙氏)의 본관(本貫)은 문헌에 제주(濟州)를 비롯하여 장흥(長興), 개성(開城), 횡성(橫城), 연안(延安), 용담(龍潭), 담양(潭陽), 의령(宜寧), 고봉(高峰),옥구(沃溝), 상당(上 黨), 김화(金花), 면산(免山), 회령(會寧), 안동(安東) 등이 있는 것으로 전(傳)하고 있으나 모두가 동원(同源)이므로 오늘날에는 제주(濟州)를 단본(單本)으로 하여 중시조(中始祖)
○말로(末老)의 15世孫 인단(仁旦)을 파조(派祖)로 하는 성주공파(星主公派),
○13世孫 신걸(臣傑)을 파조(派 祖)로 하는 전서공파(典書公派),
○15世孫 득종(得宗)을 파조(派祖)로 하는 영곡공파(靈谷公派),
○11世孫 경(慶)을 파조(派祖)로 하는 문충공파 (文忠公派),
○10世孫 중연(仲연)을 파조(派祖)로 하는 장흥백파(長興伯 派),
○11世孫 인비(仁庇)를 파조(派祖)로 하는 화전군파(花田君派),
○13世孫 택(澤)을 파조(派祖)로 하는 문정공파(文禎公派),
○ 4世孫 공익(恭 益)을 파조(派祖)로 하는 상당군파(上黨君派),
○ 4世孫 영신(令臣)을 파조 (派祖)로 하는 양경공파(良敬公派) 등
9개 파(派)로 갈리었다.
그러나 제주 고씨(濟州髙氏)가 내륙(內陸)에 진출(進出)하여 명성(名聲) 을 떨치기 시작한 것은 성주공(星主公) 말로(末老)의 맏아들 유(維)가 처 음이다.
유(維)는 고려조(高麗朝)에서 남성시(南省試)에 장원(壯元)하여 벼슬이 문하시중(門下侍中), 우복야(右僕射 : 상서도성에 속한 정2품 벼 슬)에 이르렀고 그의 아들 조기(兆基)는 예종조(睿宗朝)에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인종(仁宗)때 시어사(侍御史)에 올라 이자겸(李資謙)의 일파(一派)로서 환관(宦官)과 결탁하여 권세(權勢)를 누리던 봉우(奉佑)를 탄핵하고 의종(毅宗)이 등극한 후정당문학(政堂文學)과 판호부사(判戶府事)를 거쳐 1149년(의종 3)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 : 중서문하성의 정2 품 벼슬)에 올랐으며 문(詩文)에 능하여 오언시(五言詩)의 신인(神人)으 로 명성을 떨쳤다.
제주 고씨(濟州髙氏)는 고려조(高麗朝)에서 9 상서(尙書) 12한림(翰林)의 현(名賢)을 배출하였고, 조선조(朝鮮朝)에서도 수많은 인재(人才)를 낳아덕(道德)과 문장(文章)으로 또는 학행(學 行)과 충효(忠孝), 의열(義烈) 등으로 역사를 수(繡) 놓아 탐라왕족(耽羅 王族)으로서의 긍지(矜持)를 세습(世襲)하며 문(名文)의 기틀을 다져왔다.
조선초기(朝鮮初期)에 제주고씨(濟州高氏)를 빛낸 인물인 영곡공파조(靈谷公派祖) 득종(得宗)은 전서공(典書公) 신걸(臣傑)의 孫子이며, 상장군(上將軍) 봉지(鳳智)의 아들로 1414년(태종 14)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급 제하고 대호군(大護軍)과 예빈시판관(禮賓侍判官 : 외국사절의 연향과 종실,재신의 음식 공괘를 관장하던 종5품 벼슬)을 거쳐 1427년(세종 9) 문과중시(文科重試)에 올랐다.
1438년(세종 20) 호조참의(戶曹參議)에 오른 그는 사신(使臣)으로 두차례 명(明)나라에 다녀왔고 통신사(通信使)로 일본에 가서는 천황의 서계(書 契 : 일본 정부와 교섭하던 문서)를 가지고 돌아오는 등 외교적인 공적을 쌓았으며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 지금의 서울시장)을 지냈고 문장(文章) 과 서예(書藝)에 일가(一家)를 이루었다.
한편 득종(得宗)의 아들 태필(台弼), 태정(台鼎), 태보(台輔), 태익(台 翼) 四형제가 모두 과거에 급제하여 주의를 놀라게 하였으며, 조선개국공신(朝鮮開國功臣) 여(呂)는 나라에 공(功)을 세워 고성부원군(高城府院君)에 봉해졌고, 화전군(花田君) 인비(仁庇)의 8世孫이며 사신(思信)의 아들로 형산(荊山)은 연산조(燕山朝)에 해주목사(海州牧使)와 병마절도사를 거쳐 중종반정 후 형조, 호조, 병조(兵曹)의 판서(判書)를 역임했으며 우찬성(右贊成)에 이르렀다.
국난(國難)으로 나라가 위급할 때 가문(家門)의 의맥(義脈)을 살려 충렬(忠烈)로 전쟁에 공을 세운 충렬공(忠烈公) 경명(敬命)은 제주고씨(濟州高氏)가 자랑하는 인물이다.
중종(中宗) 대 남화풍(南畵風 : 당나라 왕유를 비조로 하는 문인화파의 화풍)으로 호랑이 그림을 잘 그린 하천(霞川) 운(雲)으 孫子이다.
경명(敬命)은 부친 맹영(孟英)이 명종조(明宗朝)에 호조참의(戶曹參議)을 거쳐 대사간(大司諫)에 올랐다가 이 양(李 樑)의 일파로 몰려 유배당하는 불운을 맞고담양(潭陽)에 옮겨 살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늙고 병든 몸으로 의병(義兵)을 일으키고 나라 운수가 중도에 비색(丕塞)하여 섬 오랑캐가 밖에서 개떼 덤비듯 한다.
”로 시작되는 거의(擧義)의 격문(檄文)을 팔도(八道)에 돌려 구국(救國)의 염원으로일어난 의병을 이끌고 왜병(倭兵)과 싸우다 금산(錦山) 전투에서 크게 패하여 도망가자는 참모의 말을 뿌리치고 차남 인후(因厚)와 함께 의열(義烈)로죽음을 맞이했다.
시(詩)와 글씨, 그림에도 뛰어나 〈호남파 5대시인(湖南派五代詩人)〉으로 손꼽혔던 그의 맏아들 종후(從厚)도 복수군(復讐君)을 기병(起兵)하여 “불행한 때를 만나 집안의 화변이 망극하다.
불초고(不肖孤)는 초토(草土)에 앓고 누워 아직까지 이 왜적들과 함께 한 하늘을이고 살아있는 것이 참을 수가 없다.(중략)
”라는 통문을 돌리면서 여러 갈래로 흐트러진 의병(義兵)을 모아 영남(嶺南)으로 달려가 진주성(晋州城)을 지켰으나 성(城)이 왜병에게 함락당할 때 김천일(金千鎰), 최경회(崔慶會)와 함께 남강(南江)에 몸을 던져 순절하니 세상에서는 이들 삼장사(三壯士라 일컬었다.
경명(敬命)의 두딸 노씨(盧氏)부인고 안씨(安氏)부인도 정유재란 때 왜적을꾸짖으며 칼을 안고 엎드려 순절하였으니 이들 일(一家)의 절의(節義)은 높이 추앙되었다.
선조(宣祖)는 경명(敬命) 일가(一家)의 죽음을 슬퍼하며 광주(光州)에 사당(祠堂)을 짓게 하여 포충사(褒忠祠)로 사액(賜額)하고 경명(敬命)에게는 충렬공(忠烈公),종후(從厚)에게는 효열공(孝烈公),인후(因厚)에게는 의열공(義烈公)이라 시호(諡號)를 내렸다.
그 외 효륜(孝倫)의 아들로 최경회(崔慶會)의 부장(副將)이 되어 장수(長水),무주(茂朱), 금산(錦山) 등지에서 왜병(倭兵)과 싸워 전공을 세우고 진주성(晋州城)에서 장렬하게 순절하였고, 박 진(朴 晋), 황 진(黃 晋), 원 호(元 豪)와 더불어 임진왜란의 4대명장(四大名將)으로 손꼽이는 언백(彦伯) 은 604년(선조 37) 선무2등공신(宣武二等功臣)으로 제흥군(濟興君)에 봉해졌으나 광해군(光海君)에 의해 임해군(臨海君 : 선조의 첫째 서자)와 함께 죽음을 당했다.
이렇게 충효(忠孝)의 가통(家統)을 이어온 제주고씨는 우리 한 민족(韓民族)의 뿌리깊은 의열사상(義烈思想)의 본질을 밝혀주었으며,국난의 갈림길에서 서성거리다가 비겁하게 살다간 우둔한 자(者)들의 지표(指標) 가 되었다.
28세 29세 30세 31세 32세 33세 34세 35세 36세 37세 진(鎭) 제(濟) 주(柱) 광(光) 재(在) 재(在) 윤(潤) 병(秉) 렬(烈) 기(基) 38세 39세 40세 41세 42세 43세 44세 45세 46세 47세 현(鉉) 한(漢) 근(根) 연(然) 배(培) 석(錫) 순(淳) 정(楨) 혁(爀) 규(圭) 48세 49세 50세 51세 52세 53세 54세 55세 56세 57세 용(鎔) 연(淵) 동(東) 희(熙) 중(重) 호(鎬) 영(泳) 락(樂) 섭(燮) 재(載) 58세 59세 60세 61세 62세 63세 64세 65세 66세 67세 탁(鐸) 태(泰) 권(權) 찬(燦) 균(均) 은(銀) 구(求) 영(榮) 훤(烜) 준(埈) 68세 69세 70세 71세 72세 73세 74세 75세 76세 77세 련(鍊) 호(浩) 송(松) 형(炯) 증(增) 옥(鈺) 원(源) 병(柄) 훈(熏) 보(報) 78세 79세 80세 81세 82세 83세 84세 85세 86세 87세 용(鏞) 숙(淑) 림(林) 환(奐) 준(埻) 예(銳) 택(澤) 항(桁) 엽(燁) 요(堯) 88세 89세 90세 91세 92세 93세 94세 95세 96세 97세 일(鎰) 해(海) 경(㯳) 현(炫) 재(哉) 명(銘) 담(淡) 상(相) 형(熒) 타(垞) 98세 99세 건(鍵) 하(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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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容)
문(汶)
상(相)
모(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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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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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奎)
석(錫)
현(鉉)
영(永)
수(洙)
동(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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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魯)
경(坰)
균(均)
용(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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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燁)
조(照)
준(埈)
규(圭)
련(鍊)
건(鍵)
해(海)
하(河)
병(炳)
영(榮)
훤(煊)
현(炫)
택(타)
증(增)
윤(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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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植)
동(棟)
환(煥)
후(煦)
식(植)
기(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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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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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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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潤)
근(根)
훤(煊)
준(埈)
윤(鈗)
2000년 100,954가구 325,950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