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론은 긍정주의다. 그런데 마이너스 사고다. 이러면 헷갈릴 수 있다. 구조는 깔때기와 같다. 입구는 넓고 출구는 좁다. 깔때기 입구는 물을 받아들이므로 긍정주의고 출구는 좁으므로 마이너스 사고다. 넓은 입구와 좁은 출구 사이에 압력이 걸려 있고 구조는 압력을 조절한다.
긍정은 연결이다. 연결된 것을 단절하여 조절한다. 자동차의 연비운전은 브레이크 최대한 덜 밟는 것이다. 브레이크는 동력을 단절한다. 우주는 단절로 조절한다. 피부색, 성별, 신분, 국적, 종교, 성소수자 차별없이 받아들인 다음 이찍을 하나씩 쳐내는 것이 진보의 조절법이다.
모든 조절은 마이너스다. 플러스는 마이너스 구조 안의 상대적인 플러스다. 절대적인 플러스는 없다. 플러스는 관측자가 이동한 것이다. 관측기준을 통일하면 우주의 모든 조절은 마이너스다. 자동차가 연비운전으로 연비를 아껴서 이득이 플러스 된 것이 아니고 손해가 줄었다.
원인에 의하여냐, 결과를 위하느냐 관점 차이다. 개인이 희생해서 팀이 이득보는게 아니냐는 식의 견해는 피곤한 거다. 개인을 희생시켜서 집단의 이익을 꾀하는 것은 전체주의다. 개인이 팀을 위하여 골을 양보한 것이 아니고 개인의 점유율 이득에 의하여 팀이 승리한 것이다.
팀을 위해 골을 양보한 것이 아니고 어시스트 이득을 본 것이다. 같은 내용이지만 관측방향이 다르다. 개인의 이득이 모여 팀의 이득이 된다. 선수가 팀을 위하여 희생하려고 희생타를 치는 것이 아니고 타점을 올려 타점 이득을 보려고 희생타를 친 것이다. 다 연봉에 반영된다.
노벨문학상 받은 한강의 생각도 그렇다. 오월의 영령들은 적에게 굴복하지 않았다. 인간의 존엄성을 과시하여 적을 이겨먹었기 때문에 괘씸죄로 살해당한 것이다. 그들은 희생자가 아니라 승리자다. 같은 죽음이지만 바라보는 방향이 다르다. 사회압 조절장치는 원인 측에 있다.
동서고금의 모든 사상가들의 모든 아이디어는 집단을 보이지 않는 끈으로 묶어서 하나의 방향을 바라보게 만들어 구조의 효율성을 쥐어짜는 깔때기다. 그것을 사랑이라 하든, 자비라 하든, 구원이라 하든, 해탈이라 하든 본질은 같다. 궁극적으로는 물리학으로 설명되어야 한다.
구조론은 일단 모두 연결된 상태로 가정하고 거기서 어떻게 적절히 단절하여 이득을 수확하느냐에 주목한다. 묶으면 효율적이지만 그 관성력 에너지가 내가 원하는 지점에 도달하지는 않는다. 묶어서 얻은 이익을 적절히 풀어 내 주머니에 넣는다. 풀어내는 과정은 마이너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