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의 선행 공덕의 사례에서 예시를 든 열 가지 고사에 대한 실증 사례의 주인공이 각자 행한 일은 비록 서로 다를지라도, 모두 한결같이 善으로 귀결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같은 善이라도 이것을 다시 정밀하게 부연하여 설명하자면, 선에는 진짜선이 있고, 가짜선도 있으며, 단정한 선, 굽은 선, 남 몰래 베푼 陰德(음덕), 드러낸 陽德(양덕), 옳은 선, 그릇된 선, 한 쪽으로 치우친 선, 똑바른 선, 반쪽 선, 완전한 선, 큰 선, 작은 선, 어려운 선, 쉬운 선 등으로 분류해 볼 수 있다.
위에서 열거한 다양한 종류의 선의 차이를 마땅히 깊이 살피고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왜 그렇게 해야 하는가? 善을 행하면서도 이치를 속속들이 파고들어 깊이 연구하지 않으면 스스로 선을 행한다고 여기면서도 오히려 죄를 짓는 줄도 모르는 경우가 있게 된다. 그렇게 되면 헛되이 고심(苦心)하게 되거늘 어떻게 이익을 얻을 수 있단 말인가.
1. 어떤 것이 진짜 선과 가짜 선(眞假)인가?
옛날에 원나라 여러명의 儒生(유생)이 중봉화상(天目山高僧)을 친견(親見)하고 여쭈었다.
“불가(佛家)에서는 선악의 인과응보(因果應報)를 논할 때, 마치 그림자가 형체를 따라다니는 것 같다고 비유합니다. 그런데 지금 어떤 사람은 善하면서 그 자손이 흥성하지 못하고, 어떤 사람은 악을 저지르면서도 도리어 그 가문이 융성합니다. 그렇다면 부처님의 말씀하신 응과응보는 거론할 가치도 없는 것입니다.”
중봉대사께서 말씀하셨다.
무릇 세속의 인정(凡情)이 완전히 세척되지 않고 올바른 눈(正眼:法眼)이 아직 열리지 않았기에, 선을 악으로 잘못 여기고, 악을 가리켜 선이라고 우기는 경우가 왕왕 있소. 그러면서 자기의 시비(是非)가 전도(顚倒)된 것은 애석하게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하늘의 응보에 차질이 있다고 원망하는가?
그러자 유생들이 다시 여쭈었다.
어찌하여 선과 악이 상반되어 전도되는 지경에 이르게 됩니까?
이에 중봉 스님이 유생들에게 각자가 생각하는 선악의 상황을 차례로 한번씩 말해 보도록 시켰다. 한 유생이 이렇게 말하였다.
사람에게 욕하고 남을 때리는 것은 악이고, 사람을 공경하거나 사람에게 예를 갖추는 것은 선입니다. 그러자 중봉스님(대사)이 말씀하셨다.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오.”
또 한 사람은 이렇게 말하였다.
재물을 탐하고 함부로 취하는 것은 악이고, 정렴결백하게 본분(계율)을 지키는 것은 선입니다. 그러자 중봉스님이 말했다.
“반드시 그런 것도 아니오.”
이렇게 모든 유생들이 차례로 돌아가면서 각각 자기의 관점에서 선악을 구분해 말했지만, 중봉 스님은 한결같이 모두 ‘그렇지 않소’라고 대답했다. 그래서 유생들이 가르침을 청하자, 중봉 스님은 이렇게 일러 주었다.
“남에게 이로운 것은 선이고, 자신에게 이로운 것은 악이오. 남에게 이익이 된다면 남을 때리고 남을 욕하는 것도 모두 선이고, 자기에게 유익한 일이면 남을 공경하고 남에게 예의를 갖추는 것도 모두 악이오.”
이러한 까닭에 사람이 선을 행할 때, 남을 이롭게 하는 것이 공(公)이고, 공(公)이면 진짜(眞)이며, 자기를 위하는 것은 사(私)이고, 사(私)이면 가짜(假)이다. 또 양심에서 우러나와 진심을 다하면 참된 것이지만, 겉으로 형식과 모양만을 내는 관례를 따른 대충 넘기기는 가짜이다. 또한 바라는 것이 없이 선한 일을 하면 참된 것이지만(無爲), 바라는 것이 있어 억지로 선한 일을 하면 가짜이다(有爲). 이러한 갖가지 사항들에 대해 스스로 잘 살펴야 한다.
겉으로 봐서는 남을 위하고 대중을 위하는 것 같이 말은 번지르하게 잘한다. 자세히 살펴보면, 남의 눈을 속이고 마음을 속여, 보이지 않는 곳에서 엉뚱한 일을 벌여 사기를 치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래서 진짜 善과 가짜 善을 구별하는 것은 쉽지 않다. 특히 위정자들의 국민을 속이고 선전⋅선동과 내로남불을 일삼고 국민을 농간하여 정권을 잡는 데에만 혈안이 되어 있는 정치병자의 舊態依然(구태의연)한 행태는 국민들이 간과해서는 안된다. 그래서 慧眼(혜안)이 갖추어져야 정치병자들의 잘못된 관행을 바로 잡을 수 있고, 그들의 행태에 속아 넘어가지 않을 수 있다.
2. 어떤 것이 단정한 선이고 굽은 선(端曲)인가?
요즘 사람들은 근신(謹愼)하고 공손한 선비를 보면, 모두 한결같이 그를 선하다고 칭송하며 그를 본받으려고 한다. 그러나 성인은 차라리 거칠게 날뛰고(狂暴) 다듬어지지 않은 질박(質朴)한 자를 선택할지언정, 형식상 교양을 갖추어 근신하고 공경하는 선비들에 대해서는, 설령 한 동네 사람들이 모두 좋아할지라도 반드시 덕의 적(德之賊)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세속 사람들의 생각이고, 분명히 성인의 선악과는 상반된다. 이 한 가지 실마리만 미루어 짐작해도, 세속의 판단에 따라 취사선택하는 것은 그릇되지 않은 경우가 드물다. 천지 신명이 선에 복을 주고 음란함에 화를 내리는 일은, 모두 성인과 똑같은 시비선악의 판단 기준에 따르며, 세속의 취사선택과는 결코 함께 더불지 않는다.
따라서 善行을 쌓으려고 하는 자는 결코 세속의 이목(耳目)을 쫓아서는 안 되며, 오직 마음의 근원, 은밀한 곳으로부터 묵묵히 행해야 한다. 순수하게 세상을 구제하려는 마음이면 곧 단정한(端) 선이고, 만약 진실로 아무리 사소할지라도 세상에 아첨하려는 마음이 있다면 바로 굽은(曲) 것이다. 또 순수하게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이면 곧 단정한(端) 선이고, 터럭 끝만큼이라도 세상 사람에게 원망하고 불평하는 마음이 있으면 곧 왜곡된 선이다. 또 순수하게 세상 사람들을 공경하는 마음을 품으면 단정한 선이고, 터럭 끝만큼이라도 세상을 가지고 장난치고 희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굽은(曲) 것이다. 이러한 것들도 모두 마땅히 섬세하게 잘 분별하여 어떤 것이 단정한 선이고 굽은 선인가를 가려낼 수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