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다는 것은 연동시킬 줄 아는 것이다. 우선순위를 판단할줄 아는 것이다. 그것이 차원이다. 4차원을 잡으면 3차원은 따라온다. 중력을 조절하면 돌은 따라온다. 자기장을 조절하면 쇠붙이는 따라온다. 전압을 조절하면 전기는 따라온다. 수압을 조절하면 수돗물은 나온다. 권력을 조절하면 인간은 따라온다. 핸들을 조절하면 바퀴는 따라온다. 근원을 조절하여 말단을 통제한다.
우리는 존재의 절반만 보고 있다. 서로 연동시키지 못한다. 밸런스를 조절하지 못한다. 사람을 탓할 뿐 민주주의 핸들로 사회의 권력압을 조절하지 않는다. 엄마곰을 잡으면 새끼곰은 자연히 따라오는데 새끼곰을 건드렸다가 엄마곰한테 쫓긴다. 의사결정 메커니즘을 모르기 때문이다. 구조론은 변화의 입력에서 출력까지 메커니즘 전체를 추적한다. 완전히 다른 세계가 열린다.
주는 자와 받는 자가 있다.
에너지의 수렴방향과 확산방향이 있다.
사건과 사물이 있다.
성질과 물질이 있다.
집합과 원소가 있다.
동과 정이 있다.
공과 색이 있다.
도와 명이 있다.
음과 양이 있다.
존재론과 인식론이 있다.
자극과 반응이 있다.
결정자와 전달자가 있다.
전체와 부분이 있다.
발견과 발명이 있다.
진보와 보수가 있다.
머리와 꼬리가 있다.
연결과 단절이 있다.
변화와 불변이 있다.
추상과 구상이 있다.
지혜와 지식이 있다.
전제와 진술이 있다.
문법과 단어가 있다.
주체와 객체가 있다.
주인과 노예가 있다.
빛과 그림자가 있다.
둘은 하나다. 모든 둘씩 짝지어진 것은 같은 것을 인간이 다른 지점에서 본 것이다. 안다는 것은 이 중에 하나를 움직여 둘을 통제하는 것이다. 발명한다고 발견되는게 아니지만 발견하면 자연히 발명된다. 암모니아를 합성하는 방법을 발견하면 비료는 자연히 발명된다. 자연의 모든 대칭은 하나의 변화를 인간이 두 번 바라본 것이다. 변화의 전과 후를 보되 변화의 현재는 보지 못한다.
변화는 에너지 수렴에서 확산으로 가며 그 사이에 엔트로피가 증가한다. 간격이 좁혀지고 대신 속도가 빨라진다. 우주 안의 모든 힘은 미는 힘이다. 세상은 마이너스다. 그것은 하나의 방향이다. 화살표-> 하나를 대칭되는 두 단어로 말하므로 헷갈린다. 화살표는 방향과 순서가 있다. 정이 동을 이길 수 없고, 색이 공을 이길 수 없고, 양이 음을 이길 수 없고, 꼬리가 머리를 이길 수 없다.
빛은 있지만 그림자는 없다. 빛은 광자가 있지만 그림자는 광자의 맞은 편에 있어야 할 그 무엇이 없다. 그림자는 빛의 변화를 설명하는 방식일 뿐 독립적인 존재자가 아니다. 어떤 둘의 대칭은 교착되나 하나의 방향은 타개된다. 근원의 하나가 있다. 세상을 움직이는 지렛대다. 둘처럼 보이는 하나의 변화를 일관된 의사결정 메커니즘으로 이해하는 깨달음의 눈을 얻지 않으면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