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삿갓 遺墟地 및 紹修書院 서예 답사 ☞
<2006. 02. 03 (맑음) 경기대 미술 아카데미 한문 서예반
전부터 又峯 김 사헌 박사가 계획한 동계 서예 답사 날이다.
늦은 아침을 먹고 9시 가 지나 집에서 출발하였다. 학교 주차장에 도착하니 뜻밖에도 一濤 박 영진 선생님과 淸田 손 환일 박사도 동행하기 위하여 기다리고 있었다.
일행은 又峰 김수헌 박사. 埠林 석명권 선생, 如泉 고정자 선생, 南齊 김형숙 여사, 檀軒 박철홍 선생, 草民 이옥자 여사, 立正 이제 목 선생, 墨軒 이성재 선생, 德庵 최영숙 여사 등 열두 명이었다. 덕암과 묵헌 선생이 서울서 차량 고장으로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한 시간이 지체되어 열한 시경에 출발을 하였다.
우봉 박사 쏘렌토에 일도 선생 청전 선생 덕암과 묵혼이, 초민의 렉스턴에 나머지 7명이 나누어 타고 담헌이 운전을 맡아서 영동고속도로를 내달려 중부내륙고속도로 감곡 IC에 내려 국도를 타고 박달재 터널을 노래를 흥얼거리며 통과하여 시원하게 뚫린 제천시 외각을 돌고 단종애사의 비극이 담긴 영월 청령포를 지나 읍내 장터 슈퍼에서 먹거리를 준비하고 고씨동굴 앞에서 칡 국수에 감자떡으로 늦은 점심을 들고 다시 하동 내리 김삿갓 골 들돌 펜션(주인 이 연호 전화 016-9241-1661)에 대머리 주인의 따뜻한 안내를 받으며 여장을 풀었다.
강원도에서도 오지로 이름난 이 지역은 태백산맥과 소백산맥 양백 줄기가 갈라진 곳으로 충청도 강원도 경상도가 접한 좁고 깊은 골짜기에는 인가가 듬성하다 척박한 토지가 어린아이 옷자락처럼 널려 있는데 하늘은 맑고 여과되지 않은 찬바람이 상쾌하게 귓전을 스친다.
숙소는 주인 내외가 거처하는 본체와 별도로 방이 2개 딸린 별체 그리고 황토 방 등 3동으로 구성된 폔션으로 넓은 별체에 숙소를 정하고 이웃한 김삿갓 묘역으로 찾아갔다.
< 김삿갓 유허지 안내도 >
도로에 인접한 묘역에는 초입부터 유명한 김삿갓 시비가 발걸음마다 놓여 있고 민속 치례가 물씬 풍기는 조각들이 곳곳에 자리하고 있는 중앙에 크도 작지도 않은 잔디 봉분 아래 이조 후기 사회 세태를 풍자하면서 주유천하로 만년을 보낸 방랑 시인 김삿갓이 잠들어 있다.
< 소백 태백의 깊은 골 김삿갓 유허지 앞 강가에서 >
조부의 행적을 신랄하게 비판한 글로 고을 행시에 장원을 하였으나 어머니를 통하여 글로 비판한 대상이 조부인 김 일순이란 걸 알고부터 조상을 욕 한 죄인으로 삿갓을 쓰고 때로는 해 저문 주막거리에 한잔 술로 목을 축이고 어느 날은 서슬 퍼런 양반의 집을 거리낌 없이 찾아들어 작금의 부조리한 잔상을 한수의 글귀로 비판하면서 회한을 삼키고 고단한 삶을 살고 간 그의 생애가 아련한 그리움으로 남는다.
만년에 일가가 기거하던 적 거지는 1.5km 산 중턱에 자리하고 있었으나 날씨도 춥고 음산할 것 같아 관람을 포기하고 김삿갓 문학관을 찾아 천재 시인의 남긴 글귀를 음미하면서 세풍에 귀감으로 삼아야겠다고 다짐을 하면서 돌아오는 길에 조선 민속 박물관을 들렸다.
< 김삿갓 묘소 앞에서 >
< 민속 박물관 >
하늘 아래 오지에 이렇게 박물관이 세워지고 수많은 민화 민속품과 유물이 소장되어 있는 것에 새삼 감동을 받고 전시품을 찬찬히 둘러보면서 미흡한 홍보로 관람객이 많지 않은 것이 못내 안타까웠다.
숙소로 돌아와서 찬바람이 몰아치는 마당에서 일도 선생, 청전 박사, 우봉 박사님 들이 장작불을 지핀 석쇠 위에 삼겹살을 구워 내고 소주에 막걸리, 맥주에 양주로 심지어 중국 술까지 아우르는 주석이 무르익어 가는데 청전 선생의 “신라 赤城碑의 서체 특징과 그 서예 사적 위치”에 관하여, 우봉 박사의 “漢 隸와 魏, 蜀, 吳 삼국지 시대는 어떤 관계가 있나”에 대한 강의가 있은 후 반주 없는 생음악을 한 바퀴씩 돌리고 나니 취기도 어리고 잠도 와서 따뜻한 바닥에 극심한 외풍을 이불로 막고 깊은 잠을 청했다.
2006년 2월 4일 (음력 1월 7일)은 200년 만에 한번 돌아오는 雙春節이란다. 서늘한 한기에 잠을 깨어 보니 담헌이 이불도 덮지 않고 방바닥에 정신없이 누워 자고 있었다. 밖으로 나가 찬 공기를 마시고 동네를 살펴보니 대여섯 집의 민가가 흩어져 자리를 잡고 있으나 사람이 기거하는 곳은 한 집뿐이었다.
안채로 들어가니 일도 선생께서 새벽 4시에 기상하여 입춘 휘호를 쓰고 있는데 곧고 바른 자세에 거침없는 필치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맑은 정신이 들게 하였다. 동행한 제자들을 일일이 거명하면서 휘호를 쓰고 난 뒤 주인집 당호를 "聽白軒"으로 제명하여 하서 하시고 드디어 나의 호를 小白, 太白의 양백 줄기를 오르고 또 오르면 마침내 檀君 先組께서 민족국가를 창시하신 터전 神檀樹 아래에까지 뜻이 이를 수 있다는 원대한 희망과 靈皐 김삿갓이 영면한 언덕의 유서를 담아 “檀皐”로 작명하시고 친필 휘호를 내려 주셨다. 입문 한지 반년 남짓한 세월이 지났건 만 아직도 붓 잡는 법도 서투른 초보에게 분에 넘치는 행사임을 명심하여 열과 성을 다해서 배움에 정진할 것을 다짐하면서 축복해 주는 선배들에게 감사함을 표했다.
주인집에서 청국장과 깻잎 무침으로 아침 밤을 맛있게 들고 차량 통행도 없는 눈 쌓인 비포장의 위험한 충청도 단양 땅 영춘면 고치령 고개를 술이 덜 껜 단헌의 노련한 운전 솜씨로 무사히 넘어 경상도 영주 땅을 밟았다.
< 고치령 고개의 신당 >
< 백설에 쌓인 고치령 고개 >
영주시 단산면 백운호수를 뒤로하고 순흥면 소재지에 도착 조선 중종 37년(1542) 풍기군수였던 주세붕이 고려 말 주자학 도입의 巨孺 안향 선생의 고향에 사당을 세워 위패를 봉안하고 다음 해에 白雲洞書院을 창건하였고 그 후 명종 5년(1550) 퇴계 이 황 선생이 풍기군수로 재임 시 紹修書院이란 사액을 받게 된 조선조 최초의 서원에서 이조 5백 년 국가의 통치이념과 사회적 신분을 규정한 유교 정신을 체험하면서 일찍이 자연과학의 발전으로 문명 세계를 지배한 서양의 실용주의 사상과 대칭을 이루면서 살아온 조상들의 仁의 心性에 더불어 사는 지혜가 아쉬움으로 남는다.
< 백운동 서원 현판 >
소수서원과 이어진 곳에 오늘날 우리가 본 받아야 할 선비의 정신과 생활상을 이해하고 전달할 수 있는 산 교육장으로 활용하고 져 실제로 다양한 계층의 영주 선비들이 살았던 생활공간을 그대로 복원하여 건립한 선비촌은 어릴 적 시골에서 체험한 조상들의 생활 풍습을 한눈에 볼 수 있는 문화유산이었다. 순흥 도호부는 또 단종 복위 운동으로 숙청된 금성대군의 유배지이기도 하였다.
< 눈에 덮인 소백산을 뒤에 두고서 >
서원 관람을 마치고 순흥 채 묵집에서 휘호를 받은 기념으로 교수님 이하 일행의 점심 대접을 하였다. 순흥을 출발하고부터는 차량 운전을 남재가 맡았고 나무꾼과 신선의 대화를 희화한 합창으로 웃음의 꽃을 피우며 귀갓길에 올라 중앙고속도로 단양 휴게소에서 신라 시대에 백제 땅을 점령하고 유민들을 위무하기 위하여 세운 赤城碑를 관람하였다.
< 단양 赤城碑 >
<적성비 앞 기념>
건립 후 천년 세월이 흘러간 역사의 유물을 오늘 마주 대하고 보니 비문이 다소 마모되고 비석이 갈라 저 있을망정 그 시절 말하고 져하는 뜻은 오늘날의 위정자가 정적을 지지하는 국민을 위무하는 것과 변함없다는 사실을 새삼 느끼게 한다. 막히지 않은 중앙, 영동 고속도로를 갈아타고 여덟 시가 넘은 시간에 학교에 도착하여 남제의 차를 타고 집까지 왔다. 퍽 유익하고 재미있었던 여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