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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사성을 보듬는 절절한 서정시의 전범典範
- 민족고유의 정서까지 담아내는, 시대를 견인하는 시
소재호(시인, 문학평론가)
왕태삼 시인으로부터 자신의 시에 대한 평설을 주문받았다. 이 잔인한(?) 압박으로부터 몇 날 며칠을 끙끙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시가 너무나 훌륭하고 매우 감동스럽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에게 더 관심이 경도傾倒되는 심경으로 말미암아 시인과 시의 간극間隙에서 쩔쩔맬 수밖에 없었다.
시인이 거느리는 만상의 여울이 보이고, 시인이 일으키는 인간적 아우라와 이미지가 가득가득 지피며, 시인이 구상하는 사람 동네가 확연하게 비치는 것이다. 필자와의 오랜 교유에서 비롯되었으리라는 유추도 가능했지만, 그보다는 왕 시인이 행위 짓는 마디마디 삶의 고임이 인상 깊게 각인되었던 탓이리라!
그의 일상 행위, 그의 규범, 그의 윤리 등 온갖 원칙이 하나로 종합되는 격률格率의 구현에서도 또한 유래된 것이리라. 일은 세심하게 꾸리며, 행사는 조밀하게 엮어내는 모습에서도, 아니 사람을 대하고 사람과 훈훈하게 어울리는 경우에서도, 과람하여 넘치지 않고, 그렇다고 소홀하지 않는 품성이 자못 인간적이고 매우 정중하게 보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필자에 비하면 젊으나 젊은 시인이 어찌 이렇게도 돈후한 인생을 돌탑 쌓듯이 하여 그렇게 차곡차곡 품격을 높였을까? 그는 남의 말을 가만히 경청하며 남들의 수다를 정중히 받듦으로 해서 상대방으로 하여금 이내 부끄럽게 만들기도 한다. 현학적인 남의 자만을 가만히 웃기만 한다. 누군가가 마냥 호기를 부려도 그 앞에서 자세를 결코 흐트러뜨리지 않는다. 큰 어른의 품새다. 그의 진지하고 정중함으로써 쓸쓸하고 허무한 정서로 마음 흔들리는 사람들에게 오히려 천근 무게의 위안으로 대좌對坐할 뿐이다. 빙그레 웃고 소이부답笑而不答할 뿐이다.
현대 젊은 시인에게서 19세기 말 조선 동네의 포근한 인심이 읽힌다. 늘그막에 선 사람, 팔부 능선쯤에서나 묻어나는 인생 회한도 능히 감지되는 차분한 정리가 그에게서 읽힌다. 숨막히는 세기말적 혼돈의 시대에 가만히 인간주의를 견인하는 한 시인의 자태가 돌올突兀하다. 인자무적仁者無敵을 실행하고 있을레라. 이 땅에 자생하는 꽃이란 꽃은 다 심고, 그들과 속삭이되, 그 빛깔과 향기로 이름 지으며, 마침내 이 꽃 저 꽃 향기로 물들어, 인간의 언어가 저리 형상화되는, 고요한 삶을 누리는 것이 아니겠는가?
형제자매가 4녀2남으로 우애가 사뭇 돈독하고 부모 모심이 극진하여, 그 댁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이 이웃들의 부러움을 사고도 넘치는 것이다. 수신제가修身齊家하고 그렇게 진작된, 유년 시절 이래로 인간성 넘치는 일상이다가 시詩의 세계를 궁구하며 우주를 운운함에 이르지 않았겠는가? 부모님 말씀은 경經이 되고, 풍류가 되고, 시詩가 되고 마침내 학풍學風이 된 구례의 한 문화 가정은 동양적 유가儒家의 전범典範이었던 것이다.
왕 시인의 시에서 읽히는 것은 이상향의 실현이다. 석정의 시에서 ‘그 먼 나라’로 표방되는 이상향은 지금 여기가 아닌 ‘먼 훗날 먼 곳’을 상정하지만, 왕 시인의 시에서 얽고 얽히는 인연의 골짜기는 지금 바로 고향 동네인 셈이다. 남도 물줄기 굽이도는 아랫녘 구례땅, 구례의 산천인 것이다. 야트막한 선산 자락에는 조부모님과 선친의 유해를 모시고, 이곳 가까운 거리 작은 마을 하나 짓고, 돌담 그윽이 돌아돌아 고운 인심들 속살거리는 소리, 지금도 귓전에 맴도는 곳, 고택 그을음 앉은 채 거기 그대로, 현대의 스승인 과거가 빛나게 과거인 채로, 사서오경四書五經쯤은 능히 뗀 학자님 댁 솟을대문 그대로, 떡 벌어진 안채는 고풍스런 모습 그대로, 사람의 집들만 고즈넉할 터이다.
거기에서는 한 가닥의 갈등도, 한 뼘의 시샘도, 한 타래의 의심도 깃들지 않고 무엇 하나 부러움 없는 유일무이한 그 댁만의 별유천지일레라. 거기가 바로 왕 시인의 유토피아이고 시의 모태일 시 분명하다. 지리산의 기운이 섬진강 굽이로 풀리어 흐르는 곳, 매천 황현 선생의 기침 소리도 들리는 듯한 유서 깊은 곳, 아홉 번 절하고 아홉 번 예禮 갖춤으로써 비로소 한 동네가 민속의 가운데에서 우뚝한 것이다. 자연과 사람, 땅과 사람, 하늘이 곧 사람이라는 인내천人乃天 사상이 예서 발원한 게 아닐까? ‘스스로 그러한 대로’ 산맥 굽이치고 물 첩첩 내 이루는 무위자연無爲自然도 예서 지펴 오르지 않았을까? 절節이요, 정貞이요, 사뭇 풍류風流인 구례 땅에서 그 인상의 시인 후배 한 사람을 읽는다.
왕 시인의 자질과 품성을 누에고치에 견주어 본다. 나뭇잎으로 담백하게 생계를 청하다가 죽음보다 깊은 잠에 들어 우주를 꿈속에서 얽어내는, 잘록한 한 채의 정갈한 종교를 만난 듯이, 한 채 한 채의 사원 같은 시를 읊어내는 그런 시인과 조우해 보는 것이다. 그런 정채精彩의 시를 빚는 시인의 아침을 가슴으로 영접해 보는 것이다. 누에는 넉 잠을 잔다. 네 개의 세상을 건너 윤회하듯이, 산과 골짜기, 구릉과 내를 건너, 교향악이 몇 번 변주되고 마지막 당도하여 초원에 무지개 세우듯 청정한 섶에 올라 꿈꾸어 환영을 더듬다가 마침내 천리만리 서사를 풀어내는 명주실… 정한情恨을 담아 민족의 정서가 풍기어 나오는 시의 자락자락이 비단이 되던 것을… 가시섶에서 선녀의 치맛자락이 끄을리며 사뿐사뿐 발걸음 놓던 것을… 이승의 비명은 까마득하고, 삼십삼천의 하늘에 어리어 직녀가 짜고, 영롱 화려한 빛살의 은하 펼치듯 시는 운율에 얹혀 읊송되는 것이다. 한 편의 시가 한 채의 사원이라고 말씀하셨던 보들레르의 명언이 육화肉化된 듯이 왕 시인의 시는 그렇게 외외巍巍한 자태로 선다.
왕 시인의 시 속에는 천만 굽이의 따뜻한 정情의 핏줄이 흐른다. 인간의 존엄성 운운은 오히려 사치스런 말이다. 구순을 넘기신 왕 시인의 어머님은 아마도 모든 것을 초월하고, 자신도 초월하여, 초인다운 면모이려니와 가만가만 마음 풀어내는 인간의 정, 그 절대의 딱 하나 ‘인정 베풂’과 같은, 그런 정으로 유전한 정서의 시, 그런 정리의 시를 왕 시인은 베풀고 있다. 참 좋은 시를 만나며 필자는 영광을 느낀다.
“시인은 슬프고 고독한 사람이고, 음악가는 우울한 몽상가일지 모르지만, 그러한 경우에도 그 작품은 신과 별의 명랑성을 힘입고 있다.” - H.헤세.
검은 숫돌 속엔 빛이 들어 있다
우리집 숫돌은 배가 꺼지지 않았지만
철식이네 숫돌은 늘 배가 고파 있었다
뱃가죽이 홀쭉해 갈수록
그 집 암소는 황금들녘으로 자라고
친구 뒤꼭지는 밤톨처럼 단정했다
그의 여동생은 하얀 고봉밥을 닮아갔다
그게 궁금했다
나는 물음표처럼 서서 담장 너머 보았다
수평선에 아침해를 갈 듯
쓱삭 쓱삭 황새낫을 갈고 있었다
뉘엿뉘엿 들에서 돌아와선
지평선에 저녁해를 갈 듯 또 낫을 갈고 있었다
철식이네 아버지가
숫돌 위에 방울방울 타는 건
물이 아닌 그의 몸속에서 꺼낸 구슬땀이었다
쓱삭 쓱삭
어둠 속에서 빛을 캐는 집
철식이네 낮마당은 소금밭 밤마당은 별밭이었다
- 「숫돌」 전문
전원시풍인데 서정성이 곤히 깃들고, 서정시풍인데 서사성이 깊이 도사린다. 또한 풍자적이기도 하다. 의인화가 뚜렷하며 온갖 은유가 재주부린다. 역설법, 아이러니가 행행마다 또아리를 튼다.
숫돌은 매우 상징성을 띤다. 숫돌은 검은 빛깔인데 빛이 들어있다고 했다. 이 얼마나 다부진 아이러니인가? 숫돌은 자주 사용한 집과 덜 사용한 집과의 대비는, 생계의 부유와 빈한의 차로 비유된다. 작은 돌멩이 하나로 한 동네의 서사적 이야기를 풀어간다. ‘낫을 간다’는 것은 농촌의 일상을 잘 묘파한다. 낫 갈기를 멈춘 집은 푸른 달빛만 내리는 신화의 집일 터이요, 낫 갈기를 부지런히 연속하는 집은 태양의 빛이 넘쳐서 역사를 이루는 집일 터이다. 언어의 다의성多義性이 상징시의 면모를 띄운다. “나는 물음표처럼 서서 담장 너머 보았다”는 담장이란 경계를 넘나드는 이웃과의 교통이 재미있게 표현되고 있다.
우연히 들개가 지나갔어
마냥 꼬리치는 동네개는 아니야
네 발 달린 탁발승 같았어
소나기 속에서 눈보라 속에서
흠뻑 나타난 뜨거운 경악이었어
낯섦과 낯익은 미심한 눈초리를
긴장과 연민의 조마조마한 거리를
들숨과 날숨의 허기진 여백을
그땐 왜 몰라 봤을까
소년의 돌멩이에 쫓기던 그 들개를
따뜻한 왕국을 버린 시의 붓다를
지금쯤 어느 취한 도시의 골목을 순례할까
먼 산자락서
감자고랑을 뒤엎는 멧돼지가 아니라
콩순을 따먹는 천연 사슴이 아니라
사람에게 마음이 부러져도
다시 사람 주위로 절룩이는 그 들개
넌 집 나가 봤니 일명 미지의 보따리라고
오 내 거울 속엔 애완견 냄새가 아른거려
비단 목줄을 끊지 못한 채
황금의 뒤가 마려운 채
아직도 딸랑딸랑 방울소리가 풍겨
이제는 던져버릴 거야
삼시 세끼 그 고마운 개뼈다귀 주인을
침대를 내리는 들개가 되어
어둠을 가르는 번개가 되어
으르릉 푸른 천둥으로 울고 싶어라
가로등 없는 골목을 위하여
컹컹 구름에 잠든 달을 깨우고 싶어라
- 「네 발 시인」 전문
유럽에서 음유시인吟遊詩人이란 신분의 시인이 있었다. 고대 그리스의 서정시인이 각지를 떠돌며 시를 영창詠唱하면서 다닌 데에서 비롯되었지만, 중세 프랑스에서 일어난 서정시인의 일파이기도 했다. 몇 세기를 이어지던 음유시인의 향유 풍속은 모든 예술 분야 융성에 이바지한 바가 컸다고 한다. 딱딱한 인간 삶을 여유롭게, 낭만스럽게 진작시키는 전기가 되기도 했고, 왕손이나 귀족 집안을 서민층 가풍에 연대시키고 연계시키는 매개자의 역할도 했다고 한다.
이 시에서 떠돌이 들개는 떠돌이 음유시인에 부합시킨다. 또는 탁발승 같기도 하여 천대와 융숭한 대접 사이에서 유랑하는 김삿갓 시인인 셈이다. 위렌이란 사람이 말한다. ‘시란 아이러니의 화염’이라고, 또 호프만이란 사람은 ‘시는 모순의 불꽃’이라고 말한다.
「네 발 시인」에서 보여지는 온갖 사상事象은 저러한 시의 정의를 완전히 함축한다. “낯섦과 낯익은 미심한 눈초리를/ 긴장과 연민의 조마조마한 거리를/ 들숨과 날숨의 허기진 여백을” 대칭과 대척의 환경을 넘나드는 유랑자의 궁핍과 남루가 보이고, 두 가지 초점의 인간 시선을 만나게 된다. “따뜻한 왕국을 버린 시의 붓다를”, “사람에게 마음이 부러져도/ 다시 사람 주위로 절룩이는 그 들개”에서 인간에게 버림받아도 끝내 인간을 섬기며 시인의 본분을 다하리라는 결의도 시적 형상화로 잘 표현된다. 그러나 끝 연에서 뭉클한 시적 자아의 결기를 본다. “어둠을 가르는 번개”, “푸른 천둥으로 울고”, “구름에 잠든 달을 깨”운다는 시인의 의지 확대와 신념 확산을 바탕으로 우주화하는 시(시인)의 세계를 마주하며 섬찟한 전율을 느낀다. 참으로 고갱이 높은 시이다.
대나무는 자기를 비우며
층층
푸른 그리움을 쌓고 있었다
이리저리
푸른 아코디언처럼 몸을 비틀며
바람의 노래를 타고 있었다
내 마음도 대숲에 들어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털지 못한 고백을 부르고 싶다
때론 사랑의 가짜뉴스를
흘리는 서동왕자가 되고 싶다
죽녹원에 들면
죽도록
그대가 왜 장대비로 빗발치는지
내가 왜 파랑새로 젖어 우는지
마디마디 뼈저리게 알 수 있다
- 「죽녹원에서」 전문
대나무의 이미지를 잘 들어낸다. 의인화되어 감정이입의 수단을 잘 나타내기도 한다. 아코디언으로 비유되는 행이 매우 절창이다. “임금님 귀”와 “서동왕자”는 동화와 설화의 낯익은 이야기를 인용하면서 실감을 자아낸다. “죽녹원-죽도록”의 연계는 언어유희로서 퍽 재미있다.
“그대가 왜 장대비로 빗발치는지/ 내가 왜 파랑새로 젖어 우는지/ 마디마디 뼈저리게 알 수 있다”의 결구에서 참신한 이미지즘의 표정을 읽는다.
한겨울 새벽마다 발끝에 오는 사랑
장닭보다 온기로 먼저 깨우는 어머니
가난한 군불로 식어가던 꿈나라를
지피고 지펴주신 어머니 불꽃
아궁이 향기를 달고 사는
오늘도 굴뚝같은 구순 내 어머니
퇴근길 거리마다 깜박거리는 사랑
그믐날도 보름달로 떠오르는 어머니
사람이 먼저 라고 무거운 내 어깨를
다독이고 다독이신 어머니 노래
아가페 향기를 품고 사는
오늘도 쉴드치는 꿈속 내 어머니
- 「굴뚝같은 어머니」 전문
이 시에서 어머니는 동화 속 어머니이며 한국적 모성애의 표상이다. 연마다 행마다 비유되는 보조관념들의 함께 어울림이 매우 출중나다. 그러니까 소재의 선택이 절묘하다. “장닭”, “군불”, “굴뚝”, “보름달” 등등이 그러한 예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일상으로 사용하는 말 중에 ‘소원이 굴뚝같다’라고 하는 말이 있는데, ‘소원=굴뚝’은 그 은유가 비범하다.
일상언어가 시적이다. “굴뚝”의 상징성은 ‘소원의 성취’, ‘특별한 하늘의 은총’, ‘현상의 기적적 반전’ 따위의 의미를 함축한다. “굴뚝같은 어머니”는 결국 ‘별난 어머니’, ‘특별한 어머니 사랑’쯤으로 해독되는 어휘이다. 상투적 어휘인데도 그 상징은 ‘창조적 상징’으로 보아야 한다.
「밀화부리가 다녀간 이유」의 시에서도 ‘인습적 상징’이 아니라 ‘창조적 상징’이 돋보이는 행들이 많이 등장한다. “너의 먹이는 투명한 겨울햇살과 달빛”, “봄을 모르는 살찐 씨앗들”, “주먹돌같이 저승새”, “박쥐같이 낭창낭창 매달려”, “라이터돌 깨먹는 우레 소리” 등등은 상징미, 역설적 테크닉, 이미지풍의 회화성으로 시의 결기가 충만하다.
폭포는 씨줄을 모른다
날실이 날실이 허공을 뛰어내린다
너는 날개 없는 무명새
끝없이 높이를 거부하며 어제의 이름을 던진다
쉼표도 가감도 없이
스스로 내리는 저 하얀 파산선고
보라
저 주검에서
오르는 무량한 은빛 사리 떼를
수심 속 소용돌이치는 검푸른 혼돈을
고요히 고요히 무심의 잉태를 기다려
청룡흑룡은 한 마리 흰구름으로 우화할 터
폭포여
그 폭포를 버리고
산 돌아 들 돌아 바다로 가는 폭포여
아슬한 하얀 이소離巢새여
넌 둥지를 몰라라
부서질지언정 죽음의 턱에서도 얼지 않아라
폭포
쉼 없는 하얀 숨소리여
미련 없는 하얀 지우개여
일말의 노을도 없어라
한 줄의 저녁 일기장도 없어라
한 점 푸른 이끼도 없어라
오직 한 생애를 허공에 새길 뿐
넌 무늬를 모르는 무심한 폭포 심경인 것이다
- 「폭포 심경」 전문
이 시는 매우 웅변적 톤이다. 영탄법으로 의인법으로 장엄한 함성 같은 이미지를 띤다. 시공을 일시에 관통하는 폭포의 속성을 너무도 잘 묘사한다. 어찌 보면 관념적 사유의 주지시이나 “심경”에서 말해주듯이 경쾌한 리듬, 한 컷의 영화 신 같은 찰나의 정경의 클로즈업, 그러하면서도 동양적 무위자연無爲自然을 읊는다. 남향적男向的 대륙적 호연지기가 단연 돋보인다. 시적 형상화가 매우 절묘하다.
물가에 애기똥풀 배앓이하면
할미새 끄덕끄덕 여울에 운다네
무릎에 새끼손주 똥방뎅이 키워서
가슴에 손주똥물 물들어 산다네
할미새 긴 꼬리 노랑할미새
할비새 앞산 묻고 할미새 담배 묵고
나는 긴 꼬리 할미 타고 고향 떠났네
그래서 도시에도 할미새 산다네
단정한 매무새 가난한 할미새
콩나물처럼 구구단처럼 나는 자라고
엄마처럼 아빠처럼 할미새 울었네
할미새 긴 꼬리 노랑할미새
애기똥풀 군대 가고 고향에 왔다네
할미새 끄덕끄덕 밤새 운다네
지금도 먹이 물고 꿈속에 운다네
- 「노랑할미새」 전문
이 시는 곡을 붙여 노래로 만든다면 너무나 좋을 것 같다. 고려속요처럼 민속 민화처럼 의미심장하다. 깊은 의미가 아닌데, 설렁설렁 희화된 서사인데, 뼛속 깊이 슬픔이 우러난다. ‘자자 字字이 비점批點이요, 구구句句이 관주貫珠로다.’ 전설을 노래하는 것 같기도 하다. 현대시를 이처럼 고아하고 전아典雅하게 구조할 수 있단 말인가?
호르르 호르르르
보았다 귀로만 볼 수 있는 불새를
눈 감고도 가는 동네 개울가, 벌떡 쌍불을 켰다
낯선 불덩이새 한 마리, 용광로에서 막 태어난 듯
저 은사시나무 가지에 금붕어새
부리는 긴 장총 같아 빨간 피노키오새
눈으론 믿기지 않는 풍경이
저 붉은 경악이
내 잿빛 가슴에 불씨를 당긴다
내 흐릿한 안개 눈을 불사른다
수만리 바다 건너 이역 하늘을
태양에 절어 별빛에 절어
내 메마른 일상을 태워버린 방화새야
온몸이 뜨거워 심심 산천에 사는가
넌 다시 눈 깜박일 새, 호수를 질러
깊은 숲으로 사라진다 호르르 호르르르…
- 「호반새」 전문
왕 시인의 시를 숙독하노라면, 저 고렷적 순하디순한 흰옷 입은 전설의 노인이 보인다. 그리고 구례가 전설의 땅인 듯이 그 산천이 오버랩된다. 호반새가 전설의 나라를, 그 동네를 가로질러 날고, 그곳 내와 호수와 하늘이 호르르 보인다. 이쯤이면 시는 대번에 성공한 시이다. 전체로 한 가닥 흐르는 정서가 그냥 한 줄기 시냇물이다. 막힘이 없는 연달아 이미지가 영속된다.
과거와 현재가 만나서 미래로, 그 산고개로 넘어가는, 슬픈 아낙네 같다. 청상이 시집을 떠나 정처 없이 일상을 지우고 방랑의 길에 선, 그런 여정을 시작하는 우리네 민족 중의 한 많은 여인네 모놀로그 같다.
봄은 멀어도
한 그루 어린 매화로 입춘대길을 심던 아버지
막내 삼촌 장가간 날은
얼마나 배꽃 따라 하롱하롱 춤추셨던가요
당신의 으악새 슬픈 노래로
나는 새처럼 얼마나 울고 또 속았던 가요
내 유년에 최초 술 따라 주신 이여
포도나무 아래 막걸리 반 잔 공손히 따라주시고
냉큼 일어나 왕포도 안주 푹 따 입에 밀어주시던 아버지
지금도 한 번씩 내 입술을 깨무는 건
알알이 당신을 오물거리다 울컥 생각나기 때문이지요
아버지
- 「시인의 아버지」 부분
이 시도 절창이다. 장시라서 일부만 인용하였지만, 이 시 속에는 ‘구례’라는 이미지화한(시인에게 이상향인) 고을이 보이고 엄부嚴父라 일컫던 우리네 아버지의 또 다른 부성애가 묘파된다. “내 유년에 최초 술 따라 주신 이여/ 포도나무 아래 막걸리 반 잔 공손히 따라주시고/ 냉큼 일어나 왕포도 안주 푹 따 입에 밀어주시던 아버지” 아들에게 공손히 술 따라 주시는 아버지가 조선 천지에 또 어디 있단 말인가? 왕씨 집안은 사용하는 가재도구나 나무 열매까지 ‘왕’자가 붙는가 보다. 왕막걸리 왕사발에 안주는 왕포도이니 말이다.
‘왕 시인의 선친께옵서 천상 시인이셨다’, ‘아니 엄한 아버지이시며 자상한 훈장님이시었다’ 감히 표방하여 그리 칭송하고 싶다.
한라산은 이 땅의 뿌리를 알고 있다
백록담 물맛이 백두산 천지연 물맛과 같다는 것을
오늘은 남구름이 한 바가지 물 길어가고
내일은 북구름도 물 길어와
서로의 가문 물동이를 연년이 채워주며 산다는 것을
우리는 한 뿌리야 제주는 믿고 살았지
보릿고개야 천년만년을 넘었어도
해방 후 분단고개야 차마 눈감을 줄 몰랐어라
우뚝 한라산 깃발 아래 용암처럼 통일을 외쳤어라
육지보다 붉은 피가 돌아
광장에서 검은 총구 끝에서 수십만 동백꽃은 피어올랐다
이념에 쫓겨 산간으로 활화산으로 사슴의 무리도 쫓겨
죽어서도 껴안은 동굴 속 흰 늑골들 피멍든 손톱갈퀴들
그날부터 백록담은 하늘샘 비우고 눈물샘 된 거란다
골짝골짝 흰 넋을 길어 산까마귀 울음까지 길어
한라산 구름은 성자처럼 지금도 백록담을 오르는 거란다
아방 하르방 사라져 마을도 사라져 올레올레 젖은 수국꽃
구르고 싶어도 죽고 싶어도 올레올레 찾아올까
파란 여승처럼 살다 노을빛 색시로 지는 올레올레 수국꽃
제주도에 늦었지만 오길 잘했다
한여름 불볕에도 서릿발 내리는 4·3 평화공원
소리 없는 저승의 함성조차 방탄 유리함에 갇힌 평화공원
치 떨리는 꽃잎의 역사 앞에서
나는 하얀 손 없어 분향 없이 고개만 떨군다
나는 바다 건너 불구경꾼 관광객이었음을 고백한다
보트피플처럼 빠져나오신 옛 제주도 장인님이 떠올랐다
작은 돌고래 같던 몽글몽글 돌멩이 같던
내 장인의 청춘이 유기견처럼 떠돌고 있을 조천 마을
내 아내가 한 송이 섬색시였구나 탐라수국꽃이었구나
내 자식들도 동백꽃 피가 돌겠구나 오직 나만 없는…
별안간 한 조각 구름이
내 눈물샘을 훔치고 한라산 백록담으로 총총 사라진다
제주도에 늦었지만 한 방울 죄가 가벼워졌다
- 「제주도에 늦었지만」 전문
대 서사시이다. ‘백두에서 한라까지/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고 읊은 신동엽 시인의 「껍데기는 가라」의 시가 상기된다. “아방 하르방 사라져 마을도 사라져 올레올레 젖은 수국꽃/ 구르고 싶어도 죽고 싶어도 올레올레 찾아올까/ 파란 여승처럼 살다 노을빛 색시로 지는 올레올레 수국꽃” 슬픔이, 처연한 심경이 녹아들어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게 수국꽃을 노래한다.
할 이야기가, 해야 할 이야기가 너무 많아서 서귀포 앞 바다 물이랑만큼이나 많은데, 오히려 필자의 언필칭 잡된 언어가 부끄럽고 무안할 뿐이다.
한강 소설가의 「작별하지 않는다」에 접목되는 이미지가 불현 듯 클로즈업된다. 제주4·3사건이 광주5·18로 건너와 그 잔인한 서사들이 서정성으로 시인을 울먹이게 한 민족 수난의 징검다리 역사가 환하게 4·3평화공원에 펼쳐진다. ‘평화’라는 말을 저러한 곳에도 붙여야 쓰것는가? 오금 저리는 서사시를 만나 필자는 한참을 숙연히 고개 숙였다.
먼먼 할아버지는
박연폭포 아래 소리꾼으로 살다가
역성의 칼춤에 선죽교 지나 한강 건너
남으로 남으로 단풍 따라
섬진강 따라 구례로 내렸다지요
나의 장인님은
제주도 순한 돌고래처럼 살다가
이념의 총소리에
북으로 북으로 동백꽃 따라
바다 건너 오동도 순천 구례로 올랐다지요
목선 끝에 매달려 칠흑의 바다를 건너듯
우리는 실낱같은 바람이 맺어준 씨앗들
그래서 우리의 뿌리는 시퍼런 바람인 거야
또 먼먼 우리의 자식들은
어느 바람을 탈 민들레 홀씨가 될까
- 「바람의 씨앗들」 전문
바람의 씨앗은 인연 맺기의 씨앗이다. 바람은 윤회하면서 생멸하면서 또는 왈칵 반가운 민들레 씨앗을 옮겨온 신神인 것이다. 고려 왕씨 집안의 내력과 왕 시인 처가댁의 한 많은 내력이 시공을 넘어 한 타래 역사로, 한 접시 불 밝은 전설로 융합을 이루니 이에 시의 기능이 기적 같은 것이다.
“목선 끝에 매달려 칠흑의 바다를 건너듯/ 우리는 실낱같은 바람이 맺어준 씨앗들/ 그래서 우리의 뿌리는 시퍼런 바람인 거야” 신이 점지한 숙명에 기인하여 우리는, 우리의 뿌리는 시퍼런 바람이 되고 있는 시를 정중히 맞는다.
시인은 시적 변용을 부린다. 저러한 바람도 되지만, 시가 인간을 시적 인간으로 부린다. 「새」에서 “나 삼겹으로 밤새 배를 채우는 동안/ 넌 바람 마시며 하늘을 얻었구나”를 보면 나는 즉자卽自이고 새는 대자對自인 셈이다. 헤겔의 말씀이다. 새는 나의 상대성 이미지이지만 결국 시인의 ‘하늘 얻음’인 재귀 행위인 셈이다.
등나무와 칡꽃
똑 닮았다
무성한 보라꽃에 가슴 뭉클향
서까래 삭아 무너져도
사랑의 기둥만은 칭칭 붙들어 온 생애
반 바가지 빗물이면 햇살로 한 바가지
진한 갈등 속에도 짱짱한 온기의 집
모태 신앙의 집
단 한 번이자 나의 최초 영구 무상의 집
- 「부모」 전문
‘갈’과 ‘등’은 모순이란 말과 유사어로 쓰인다. ‘서로 등을 돌림’이요, 반과 역의 의미이다. 그런 이미지를 뒤집고, 똑같은 보라꽃 뭉클향이요, 함께 “사랑의 기둥만은 칭칭 붙들어 온 생애”로 형상화시킨다. 절묘한 패러독스이다. 미학을 주하는 글에서 대칭과 갈등은 한 조화 속으로 융합하는 것이 예술의 본령이라 했다. 왼쪽으로 감아 올라가고, 오른쪽으로 감아 올라가는 두 가닥의 넝쿨식물 속성을, 한 생애 어둠을 더듬어 온 부부에 빗대어 표현하였다. 우리 후예는 갈과 등이 지붕 얹는 “영구 무상의 집”에 거처한다 함이니 표현이 절묘하다.
한때는 아메리카 신도시 꽃집의 꽃
본명은 핑크 플리베인, 세련도 해라
오래오래 사랑 받다 주인의 눈빛이 시들어
스스로 유리문을 박차고 바람 타고 발굽 타고 온 밀항꽃
장미와 튤립의 찬란한 감옥의 성을 거부하며
변방에 폐허에 무명의 무덤가에
희망처럼 성지처럼 찾아가는 하얀 순례단
때론 가난뱅이풀로 망초대로
온 세상 주홍의 돌팔매란 돌팔매 다 거두어
박토마다 비탈마다 대속의 뿌리로 내렸어라
아직도 박해의 상처들 화전난민의 향기들
바다로 갔으면 이랑이랑 물비늘꽃 피웠을 텐데
지옥으로 갔으면 천국의 구름꽃 피웠을 텐데
가장 막막한 곳에 어두운 곳에
먼저 달려와 내일을 춤추는 촛불꽃이여
우리들의 보릿고개도 구원한 풍년꽃이여
슬픈 유배라도 강제이주라도
돌 틈마다 새 뿌리 내려 새 향기 피운 그곳이
세상의 성지임을 안다
우리들은 모두 귀화의 후예
나를 버리고 고향도 버리고
지금도 항구마다 하늘마다
또 다른 신화를 꿈꾸는 침묵의 하얀 실존들이 몰려오고 있다
- 「개망초 박해」 전문
개망초는 꽃이면서 꽃이 아닌 잡초이다. 잡초란 선택 받지 못한, 사랑 받지 못한 그대로 잡초이다. ‘슬픈 유배라도 강제 이주라도’ 당한 백성처럼 집단 유랑의 신세인 것이다. 사할린 강제 이주된 구한말 조선족쯤 되는 이미지를 구성한다.
유안진 시인의 「들꽃 언덕에서」란 시가 있다. “들꽃 언덕에서 깨달았다/ 값비싼 화초는 사람이 키우고/ 값없는 꽃들은 하나님이 키우는 것을/ 그래서 들꽃들은 하늘의 향기인 것을/ 그래서 하늘의 눈금과 땅의 눈금은/ 언제나 다르고 달라야 한다는 것도/ 들꽃 언덕에서 깨달았다.”
인간에게 버려진 꽃, 개망초꽃은 하느님이 가꾸신 꽃인 것이다. “돌 틈마다 새 뿌리 내려 새 향기 피운 그곳이/ 세상의 성지임을 안다// 우리들은 모두 귀화의 후예/ 나를 버리고 고향도 버리고/ 지금도 항구마다 하늘마다/ 또 다른 신화를 꿈꾸는 침묵의 하얀 실존들이 몰려오고 있다” 역설적이며 긴박한 아이러니가 촘촘하다. 시인의 눈은 잡초 다랑이에서 “성지”를 보며 “신화”를 꿈꾼다.
석정의 대숲은 바람의 언덕에 산다
먼 서해가 바라다 보이는
대숲은 검푸른 파도를 응시하며 오늘의 바람을 읽는다
바람에 살고 바람을 거부하는 대숲
수평선 바람엔 덩실 어깨춤추고
칼바람엔 한사코 한 마디 꺾이질 않는다
대숲은 어둠의 골짝에 모여 산다
인간의 털끝 하나 보이지 않는
대숲은 늘 푸르게 서서 멍든 짐승들을 품는다
오직 땅과 하늘만 보이는 대숲에서
그 상처들은 마디마디 어머니의 손길을 바른다
대숲의 푸른 눈물은
한라에서 백두 그 너머 아라사까지
우크라이나 대평원 해바라기까지 흐른다
경계도 없이 종점도 없이
푸르디푸른 억겁의 은하수까지 흐른다
석정의 대숲은 거리의 악사로 나온다
들숨 날숨으로 비둘기 광장을 연주한다
빈몸과 빈몸들 이리저리 비틀며
뿌리와 뿌리는 손 맞잡고 하늘 높이 행진한다
아무도 잠재우지 못할 절절한 석정의 대숲
그 대숲 발아랜 연년이 연년이
더 검푸른 죽순들이 총총 피어오르고 있다
- 「석정의 대숲」 전문
「석정의 대숲」은 민중의, 민초의 넋을 노래하고 있다. 시대의 어둔 바람에 시달리면서 결코 꺾이지 않는 절조를 읊는다. 본시 석정이 그랬다. 일제 압제 아래에서도 굴종을 허락하지 않았다. 대숲은 석정 개인이면서 한편 조선의 민중인 셈이다. 다 견디고, 다 이겨내고 대한민국은 다시 건장한 대숲이 되지 않았는가?
왕 시인은 석정문학회, 신석정기념사업회 실무를 다 맡아 해냈다. 오랜 세월 석정에게서 사숙私淑한 셈이다. 가끔은 왕 시인의 시 속에 석정의 정신이 번뜩인다. 평화와 자유를 구가하는, 이를 세계화하는 정신 말이다.
덥나이다
차운 돌 쪼아대던 그 정 소리 멈추시니
그대의 불꽃은 적벽강 서해로 흐르고
변산은 폭포 하나를 잃었나이다
피가 돌아 주인 잃은 돌여인에 피가 돌아
피가 돌아 돌짐승 돌부처에 피가 돌아
내변산 크낙새도 크억크억 피가 돌아
한평생 별똥만 쪼아대시다
그 숨은 빛 따라 별로 가신 오성 조각가시여
이승서 사무친 정
홀연 내려놓고 오르신 하늘 그곳은 어떠하더이까
사람이 보고파서 전화 여쭈면
쪼던 정 끊는 정 다 잊어버리던
단단한 풀잎 목소리여
이제 저 하늘서 우릴 편히 보고 계시나이까
정을 잃어버려 저 크낙새 별 되신 이여
먹구름 속에서 천둥을 캐듯
그대가 차운 돌 속에서
생명을 캐고 영혼을 쪼던 소리, 그 소릴 먹고
우리는 오래된 유골처럼 야금야금 허기져 자랐나이다
그러나 그대 빈자리에 다가갈수록
우리는 살찐 돌 귀먹은 돌로 커져만 가나이다
크낙새 별이시여
세상은 잠들어도 호랑가시 붉은 감옥에 홀로 들어
정 끝 정 끝마다 혼불을 당기신 이여
억겁의 시공을 날아 침묵을 날아
이 산천에 구르는 무명한 돌들을
어둠에서 빛으로 숨으로 표현으로 꺼내주신 이여
그 표현마저 영혼의 돌꽃으로 피어주신 이여
피가 돌아 먹구름 속에서 더운 피가 돌아
피가 돌아 우리들 얼음심장에 피가 돌아
달빛의 돌여인들이 한 걸음 두 걸음 걸어나가이다
이제 우리는 그대를 잃어버려 행복하나이다
하늘이 저 크낙새 별자리로 고이 모셔갔으니
우리는 그대를 잃어버려 그대를 찾았나이다
이승서 별 만나 별 마음 알게 되고
이승이 미완성 별나라임을 그대가 가르쳐 주었나이다
저 하늘성좌 크낙새 별 되신 이여
이곳 금구원조각공원에도 가을이 내렸나이다
그대가 빚어주신 국화머리돌여인, 그 돌국여인이
아침마다 황금의 언덕을 피어오르나이다
부디 그 돌국향 돌국향 영겁에 마시며 길이길이 평안하소서
곧 쏟아질 함박눈은
하늘서 보내는 그대의 흰 조각편지가 아니겠나이까
- 「크낙새 별 되신 이에게」 전문
‘김오성 조각가를 추모’하는 시, 추모시의 전범典範을 다시 상기시킨다. ‘행사의 시는 진정한 시가 아니다’는 일반적 인식을 확연히 벗어던진 장중한 시이다. 이에 평評과 설說을 감히 이을 수 없으나, 독자에게 숙독을 권하고자 다시 언급했을 뿐이다.
왕태삼 시인의 시는 편편마다 서사敍事를 하나씩 품는다. 그 서사는 절절한 민족의 수난사이기도 하고, 보통 사람들 한 맺힌 이야기이기도 하다.
서사가 절실하여 시는 벌써 서정시의 기풍을 띤다. 서사적 서정시이거나 서정적 서사시로서, 시적 변용을 거치며 우리들 심금을 울린다. 감동이 없는 시는 시가 아니라는 듯이 스스로는 안으로 울되 독자에게는 눈시울을 뜨겁게 만든다. 시가 거의 절편이다. 장차 큰 시인이 될 성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