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1940년(庚辰生) 음력 7월 18일 전라남도 나주읍 교동 외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金正安(김정안)씨이고 어머니는 南英愛(남영애)씨이다. 사람은 모습이 다르고 살아온 환경이 다르기에 누구나 자기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지인들을 만나면 자기가 살아온 한 시절의 이야기를 침이 마르도록 한다. 그러나 그 이야기도 문자로 남기지 않으면 그 사람의 기억속에 잠시 머물다 지워지고 만다. 나는 7살때에 어머니를 잃고 말았다. 한번 돌아가신 어머니는 다시는 볼 수 없어서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보고싶은 마음으로 슬픔에 젖어 살았다. 그래서 어머니와 함께한 시절은 돌아올 수 없는 꿈 같은 추억이 되었다. 그후 10살 때 찾아온 6,25 전쟁은 또다시 우리 가정의 뿌리를 흔들어 놓았다. 남침한 인민군에게 끌려가신 아버지는 죽음의 사선을 수없이 넘기고 기적적으로 살아오셨다. 그래서 나는 고아가 될 신세를 면하고 아버지의 큰 보살핌과 새로 들어온 새어머니의 그늘에서 눈치를 보면서 외롭게 성장하였다. 이렇게 고단한 나의 서글픈 세월이지만 그래도 잃을 수 없어서 일기에 남겨두었다. 이렇게 살아온 나의 어린 시절도 강물처럼 흘러간 세월을 따라 지나 가고 지금은 성인이 되어 발전된 대한민국의 좋은 환경에서 분수에 넘치도록 호사를 누리며 잘 살고 있다. 과거 역사를 돌아보면서 나의 조국을 해방시켜준 미국에게 감사하고, 자유라는 개념도 모르던 우리 민족에게 자유 민주주의 국가를 세워준 이승만 건국 대통령과, 세계 최빈국이란 가난한 나라를 경제 대국으로 만들어 준 박정희 대통령께 항상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장터 집 생활. 1947년 9월경 우리 가족은 외가에서 좀 떨어져 있는 나주 장터로 가는 골목길 삼거리에 있은 집으로 이사를 하였다. 그 집은 외가가 전에 살던 집이라고 하였다. 어머니는 병환 중이라 남순 이모가 집에 와서 부엌일을 도와주고 계셨다. 아버지는 그 집에서 광주로 출퇴근을 하셨다. 그 집은 골목 길에서 함석 문을 밀면 아래로 내려가는 돌 계단이 있었다. 길보나 낮은 지대에 있는 집이었다. 집 앞에는 넓은 텃밭이 있고 밭의 코너에는 옹달샘이 있었다. 집 마루를 올라가면 안방이 있고 왼쪽 작은 방 사이로 부엌이 있었다. 그 집 뒤에도 밭이 있었다. 어머니는 아프신 중에도 나에게 놀지 말고 공부를 하라고 야단을 쳤다. 우리 집 대문을 나오면 우측으로 큰 집이 있었는데, 나는 그 집에 있는 무화과 나무에서 그 집 아이와 같이 놀면서 잘 익은 열매를 따서 먹기도 하였다. 나주 장터는 5일마다 열렸다. 장터에는 온갖 먹거리와 생활 용품을 진열하여 구경거리를 만들어 주었다. 물건을 사려고 찾아온 사람들과 물건을 진열해 놓고 호객을 하는 분위기는 활기가 넘치었다. 그러나 장이 열리지 않는 날에는 빈 터만 남아 쓸쓸한 기분이 들었다. 엄마 없는 하늘아래. 1947년 11월 5일 저녁에 집 앞 텃밭에는 두개의 천막이 쳐지고 멀리 사는 친척들이 우리 집으로 찾아왔다. 부엌에서는 외가의 친척들이 음식을 준비하느라 부산하였다. 나는 우리 집에 무슨 잔치가 있는가 생각했다. 집안이 어수선한 중에도 나는 부엌 앞 작은 방에서 동생과 깊은 잠이 들었다. 누군가 잠을 깨워 보니 남순 이모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엄마한테 어서 가봐라.”했다. 나는 누나, 동생과 함께 어머니가 누워 계시는 방으로 갔다. 어머니는 검정 이불을 덮고 누워 콜록콜록 기침을 하고 계셨다. 우리가 방으로 들어가자 어머니는 모기소리 같은 목소리로 “이리 가까이 와서 앉아라.” 하셨다. 어머니의 목소리는 가냘프고 희미 했다. 어머니가 누워있는 이불 옆에 셋이 나란히 앉았다. 동생과 나는 엄숙한 분위기가 어색해서 둘이 눈이 마주치자 삐죽삐죽 웃었다. “광식이는 동생과 싸우지 말고 새엄마가 들어오면 말을 잘 듣고 공부 열심히 해라.” “경자야. 나 죽으면 저 철없는 동생들을 네가 잘 보살펴 주어라.” “새엄마가 들어오면 말 잘 듣고 집안 청소도 도와주고 공부도 열심히 해라.” 어머니는 말을 하시면서도 콜록콜록 기침을 하셨다. 목까지 차오른 가래를 머리 옆에 놓아둔 깡통에 뱉으셨다. 어머니의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죽음을 목전에 둔 안타까운 순간에도 자식들의 앞날을 걱정하는 어머니의 심정을 우리는 헤아리지 못했다. 어머니는 돌아가시기 직전까지도 우리에게 공부를 열심히 하라고 당부하시었다. “이제 나가서 아버지 오시라고 해라.” 우리는 그 순간이 어머니와의 마지막 대면이라는 것을 생각지도 못하고, 어머니께 마지막 이별의 인사도 않고 밖으로 나왔다. 그저 피곤하다는 생각으로 방을 나오자 건너 방에 들어가 다시 곤한 잠에 떨어졌다. 얼마나 잠을 잣을 까 “어이구 어이 구 우.” “언니 이.”하고 통곡하는 소리에 잠에서 깨었다. 어머니는 1917년 3월 27일에 태어나셔서 1947년 11월 5일 하오 2시 31세를 일기로 한 많은 세상을 떠나시고 말았다. 어렵고 가난한 나라의 격동기를 겪으시면서 집안 살림을 하시느라 고생만 하시다가 한 많은 삶을 마감하시고 말았다. 그 시절에는 의학이 미개하여 감기에 걸려도 병을 키우고 죽는 사람도 많았다. 어머니는 외가의 1남 3녀중 장녀로 태어나 부모님께 효도를 하시고 말 한마디도 불손하게 한 일이 없었다고 한다. 집 앞 텃밭에 설치된 천막에는 친척들과 낮 선 손님들이 모여 앉아 술과 음식을 드시고 계셨다. 스님이 어머니 방에 들어가 향을 피우고 어머니의 시신에 염을 하였다. 입관을 할 때에 친척들이 우리를 불러 어머니의 마지막 모습을 보라고 하였다. 천으로 감싼 어머니의 시신을 나무 관으로 옮겨 넣었다. 친인척 여인들은 이 장면을 보고 모두 오열을 토하고 애절하게 통곡을 하였다. 이모와 남순 이모는 “언니언니”하면서 슬프게 통곡을 하였다. 아버지는 관을 붓 들고 “어이구 어이 구우” 곡을 하셨다. 나는 어머니가 떠나시는 마지막 상황에서 슬픔도 모르고 이제는 엄마가 야단치는 일은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무심히 들었다. 삼일 장을 마친 후 대문 앞 좁은 골목길에 상여가 들어왔다. 상여가 나가는 날 집 앞 골목에는 동네 여인들이 자기 집 대문 앞에 나와 아이들과 같이 구경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들을 보자 창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를 보고 여인들은 혀를 차며 불상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는 상여의 뒤를 따라가면서 상여꾼의 슬픈 가락을 들었다. 상여 위에서 선창을 하는 목소리는 애절하였고, 상여를 멘 사람들은 “어-영차” “어기 영차” 하고 장단을 맞추었다. 상여는 집 앞 좁은 골목을 나와 상점들이 있는 넓은 길을 지나 길 양쪽으로 논과 밭이 있는 비포장길 오른쪽으로 갔다. 이따금 버스들이 상여 옆을 지날 때 버스 안에 있던 사람들이 차창으로 구경을 하였다. 공동 묘지에 이르자 상여를 도로변에 내려놓고 상여의 지붕을 걷어냈다. 장정들이 관을 들어내 어깨에 매고 끙끙거리면서 경사진 언덕을 올라갔다. 어머니의 묘지 우측에는 황토 벽이 있고 그 아래에 관이 들어갈 홈을 일꾼들이 미리 파 놓고, 스님은 목탁을 치면서 극락 왕생을 비는 예불을 하고 있었다. 예불이 끝나자 광목 끈을 양쪽에서 잡고 어머니의 관을 내렸다. 관 위에 덮은 빨간 바탕의 천에는 한자로 알 수 없는 큰 글자가 써 있었다. 관이 내려가자 상주를 불렀다. 아버지가 삽을 받아 흙을 떠서 관위에 뿌리고 삽을 주었다. 이어서 인부들이 삽으로 흙을 떠 관위에 던지자 금세 관은 흙 속에 덮이고 봉분을 두툼하게 올렸다. 어머니의 몸은 관과 함께 땅 속에 묻히고 말았다. 스님이 마지막 예불을 올리고 마무리 일은 인부들에게 맡기고 모두 하산을 했다. 집으로 돌아오니 손님들은 모두 가고 친척들만 기다리고 있었다. 이때부터 어머니가 없는 집은 왠지 빈집같이 썰렁하고 쓸쓸한 기분을 갖게 하였다. 그리고 하루 이틀이 흘러가자 철없는 나의 가슴에도 어머니 생각이 떠 오르고 슬픔이 찾아와 자주 눈물이 고였다. 집에 어머니가 없으니 어머니가 보고싶고 날이 흐를수록 슬픈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가 없으니 집이 빈집처럼 느껴졌다. 나는 다시 외가로 가고, 누나와 동생은 첫째 큰아버지 댁으로 갔다. 외할머니는 나를 보자 긴 담뱃대를 물고 “푸푸” 하시면서 한숨을 쉬셨다. 긴 담뱃대에 담배를 넣는 손이 자꾸 떨리고 있었다. “부모가 돌아 가시면 땅에 묻고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 대요.”. 이웃집 여인이 할머니를 위로 하는 말이었다. 이야기를 들으시면서 외할머니는 손목을 파르르 떠시면서 담뱃대에 성냥불을 부쳤다. 딸을 먼저 보낸 외 할머니의 슬픔을 나는 헤아리지도 못했다. 어머니 산소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아버지는 광주에서 하숙을 하시면서 직장에 다니셨다. 며칠 후 아버지가 외가에 오셨다. 아버지는 외가에서는 언제나 귀한 손님이었다. “아직 자리를 잡지 않았으니 당분간 광식이를 외가에 더 있게 해 주세요.” 하셨다. 아버지는 나에게 어머니의 산소에 가자고 하셨다. 이모는 대문까지 나와서 아버지를 전송하셨다. 아버지는 외가를 나와 큰길을 건너 긴 골목길을 뚜벅뚜벅 걸어가셨다. 때마침 골목길 어느 집 대문 앞을 지나 갈 때 한 여인이 골목길에 구정물을 들고 나왔다. 그 여인은 우리가 멀어질 때까지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버지의 긴 바바리 옷깃이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 30대의 아버지는 훤칠한 키에 멋이 있어 보였다. 어린 나의 마음에는 아버지가 하늘처럼 자랑스럽고 든든한 기둥처럼 느껴졌다. 긴 골목을 나오자 하천 옆길을 따라 좌측방향으로 걸었다. 비포장 국도를 걸을 때 화물차가 흙먼지를 일으키고 지나갔다. 산소에 이르자 이름 모를 수많은 묘지들 사이를 지나 어머니 산소로 갔다. 산 능선에는 무슨 병으로 죽었는지 알 수도 없는 죽은 사람들의 묘지들이 가득 했다. 무덤들은 말이 없고 초겨울 바람은 스산하게 불어왔다. 어머니의 묘지는 아직도 황토와 잔디가 엉성하게 덮여 있었다. 아버지는 들고 온 소주를 잔에 따라서 묘소 주변에 뿌리고 다시 잔을 올리고 재배를 하셨다. 아버지는 깊은 한숨을 내 쉬고 주변을 돌아보셨다. 아버지는 먼 하늘을 보고 넋을 잃고 서 계셨다. 그 모습이 외롭고 처량해 보였다. 며칠전만 해도 어머니는 한집에서 같이 생활을 하셨는데 지금은 땅속에 묻혀 볼 수가 없게 되었다. 푸른 하늘에는 하얀 구름이 무심히 떠 흘러가고 있었다. “이제 그만 가자.” 성묘를 하고 내려와 아버지와 나주 번화가에서 버스를 기다렸다. “자리가 잡히면 데리러 올 테니 외가에 좀더 있어라” 나는 아버지를 따라 가고 싶었지만 기어드는 목소리로 “네.”하고 대답을 하였다. 나도 모르게 금세 눈물이 고였다. 비록 외가이지만 어머니와 아버지가 없으니 슬프고 외로웠다. 그리고 우리 가족이 함께 모여 살던 집이 그리워졌다. 광주로 가는 버스가 오자 보이지 않던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모여들었다. 아버지는 버스에 오르시면서 어서 가라고 손짓을 하셨다. 나는 버스가 뽀얀 먼지를 일으키고 시야에서 멀어 질 때까지 버스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버지가 옆에 있을 때에는 힘이 솟다 가도 아버지가 없으니 고아가 된 듯 힘이 빠졌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자꾸만 흘러나왔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는 자꾸만 슬퍼지고 눈물이 나왔다. 외가에 들어가니 외할머니가 안방 앞 마루에 앉아 계셨다. “푸 우.” 하고 긴 한숨을 쉬고 담뱃대를 입에 물으셨다. “아버지는 가셨어?” 하고 이모가 물으셨다. “네.” “어머니 산소에도 갔다 오 고.” “네.”이모는 혀로 쯧쯧 하시고 부엌으로 가셨다. 나는 샘터로 가서 앞 산 능선위로 저물어가는 푸른 하늘을 보았다. 어머니가 보고 싶어 눈물이 나왔다. 이모의 꾸지람 어느 날 이모가 나를 불렀다. “너는 공부는 안하고 놀기만 하냐.”하시고 나를 꾸짖었다. 내가 그냥 서있자 부지깽이를 들고 나를 때릴 듯 뛰어오셨다. 나는 매를 맞지 않으려고 집 밖으로 달아났다. 항상 너그럽고 따뜻하시던 이모가 처음으로 화를 내고 야단을 치시니 더욱 슬픈 마음이 들었다. 나는 홀로 눈물을 흘리면서 마을 골목길을 어슬렁어슬렁 거닐다가 향교 정문 기둥에 걸터앉았다. 마을에는 저녁을 짓는 회색 연기가 피여 오르고 날은 점점 어두워졌다. 날이 어두워지자 밤 하늘에는 별빛이 초롱초롱 빛나고 있었다. “어머니, 어머니는 저 하늘 어디에 계시나요? 나도 죽으면 어머니를 만날 수 있나요?” 이런 생각을 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외가에서는 먹을 것, 자는 것, 마음에 부담 없이 편하지만 엄마와 같이 살던 우리 집이 더욱 더 그리워졌다. 가출을 하여 어디론 가 떠나고 싶은 생각도 들었지만 그럴 용기는 없었다. 밤이 깊어 지자 추위가 찾아왔다. 발길을 돌려 외가로 들어갔다. 늦은 밤이지만 이모가 방문을 열고 “어디 갔다 오냐? 어서 들어와 밥 먹어라.” 이모는 부드럽게 나를 맞아 주셨다. 할머니는 아무 말씀도 않으시고 담배만 피우고 계셨다. 이모가 밥상을 차려와 내 앞에 놓고, “어서 먹어라.” 하셨다. “먹기 싫어요.” 했다. “네가 미워서 그런 게 아니라, 너를 친자식같이 생각하니까 네 장래가 걱정이 되어서 야단친 거다. 그러니 마음 풀고 어서 밥 먹어라.” 하시고 수저를 집어 나의 손에 쥐어 주셨다. 나는 마지못해 수저를 받았다. 굵은 눈물 방울이 방바닥에 뚝뚝 떨어졌다. 할머니는 담배를 뻐끔뻐끔 피우시면서 푸푸 하고 깊은 한숨을 삼키고 계셨다. 밥을 먹은 후 이불 속에 모로 누워 어머니를 생각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낯 선 교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며칠 후 학교에 갔다. 교실에 들어가니 반 아이들이 낯설어 보였다. 반 아이들은 삼삼오오로 모여 깔깔 웃고 있었다. 나는 내 책상 앞에 앉아 어머니를 생각하였다. 교실 창문 너머로 어머니의 산소가 보였다. 아 저기에 어머니가 계시는 데. 한번 가신 어머니는 영영 돌아오지 않고 다시는 볼 수 없으니 슬픔이 마음에 젖어 들어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쉬는 시간이 되자 나는 슬픔을 가눌 수 없어서 누나의 교실 창가로 갔다. 창문에 걸터앉아 있던 학생이 나를 보고 “너 누구 찾아왔어?” “예. 김경자 누나요.” “경자야 네 동생이 찾아왔다.”누나는 교실 밖으로 나와 나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 있어?” “엄마가 보고 싶어. 엉엉.” 누나는 할 말을 잃고 금방 눈물이 고였다. 누나는 한참 후 “가서 공부하고 수업이 끝나면 이리 와라.”했다. 나는 교실로 돌아가 수업을 하고, 수업이 끝나자 누나와 같이 교문을 나왔다. 교문을 나가는 아이들의 발걸음이 활기차게 보였다. 누나와 학교 정문을 나와 우측 방향으로 걸어갔다. 그곳에서 가까운 곳에 큰아버지가 사는 금성 국민학교 관사가 있었다. 동생도 거기에서 누나와 함께 있었다. 큰집에서 저녁을 먹고 사촌들과 놀았다. 밤이 깊어 지자 나는 그곳을 나와 혼자 외가로 갔다. 엄마도 아빠도 없는 삶이 괴롭고 힘들었다. 어머니가 있을 때에는 공부를 하라고 야단도 치셨지만 어머니가 없으니 그런 모습도 볼 수가 없었다. 어머니가 보고 싶고 그립고 슬펐다. 나를 챙겨주고 살펴주는 사람이 없으니 어머니가 야단 칠 때가 그리워졌다. 이 세상에 어머니가 없다는 것을 생각하니 온 세상이 남의 집처럼 쓸쓸하게 느껴졌다. 나는 슬프고 외로운 마음이 들면 어머니가 계실지도 모르는 밤 하늘의 별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 어머니의 생전 모습을 떠 올려 보기도 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다시 볼 수도, 그 목소리도 들을 수도 없었다. 세월이 흘러 가도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은 변함이 없었다. 어머니의 생전 모습은 내가 죽는 날 까지도 영원히 지울 수 없는 그리움의 모습이 되었다. 어머니의 회상 셋째 큰어머니와 할머니가 외가로 어머니의 선을 보러 가셨을 때에 어머니는 화로 앞에 앉아 탕약을 끓이고 있었다며 그 모습이 허약해 보였고 좋은 모습은 아니었다고 회고하셨다. 그러나 참한 모습이 아름답게 보여서 아버지와 혼인을 시키기로 결정을 했다고 한다. 어머니는 건강하실 때 경대 앞에 앉아 참 빗으로 긴 머리를 내려 빗고 머리 끝을 감아 올려 옥 비녀를 꽂으셨다. 어머니는 머리를 감고 긴 머리에 동백기름을 바르면 청결하고 윤기가 있고 고결한 모습이 되었다. 친척들은 어머니의 깔끔하고 단정한 모습을 보고 평양 기생처럼 아름답다고 하셨다. 음식솜씨도 좋아서 맛도 좋고, 바느질 솜씨도 재봉틀로 꿰매듯이 좋았다고 한다. 어머니는 흰 저고리와 검정 치마를 평상복으로 즐겨 입으셨다. 외출을 하실 때에는 옥비녀를 꼽고 옥색 저고리와 남색 치마를 입으셨다. 부엌 살림과 집안 소품들은 항상 깔끔하게 정돈하셨다. 아버지와 언쟁을 하거나 다툰 모습은 한번도 볼 수 없었다. 아버지를 지극히 받들고 사랑하셨다.
아호 : 문봉(文峰),문예사조 신인등단,세종 문예 창작 대학원 수료, 세종문학회 회장역임, 서리풀 수필문학회 편집위원, 청안문이협회 고문, 청안 작품상 수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