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암 권철신은 조선의 헌법 경국대전이 보장하고 있었던 노비제도를 불법적으로 혁파한 조선 최고의 선각자요 전대미문의 세계적 근대 사상가였다.
천진암(天眞庵)에서 천진(天眞)은 신인 단군의 얼굴상 즉, 영정을 말한다. 천진암은 본래 단군 영정을 모시고 우리 민족의 신 하나님께 제사 지내던 민족 고유의 신앙 장소였다. 천진암은 광주시 퇴촌면 앵자봉 자락에 위치해 있다.
조선시대는 공식적으로 단군을 철저히 외면한 시절이지만 민간에서는 남몰래 전승되어 왔었다. 연희 전문학교를 세운 언더우드도 한국 고유의 하나님 사상의 존재를 인정한 바 있다.
현재 천진암은 한국 천주교회의 발상지라고 여겨지고 있지만 사실 한국 천주교는 한국 고유의 하나님 사상에 기초하여 생겨난 교회이며, 이런 사상적 배경으로 인해 한국 천주교회는 세계사에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게 선교사의 도움을 받지 않고 자생적으로 태어나게 된 것이다.
한민족 고유의 하나님을 일깨운 마태오 리치의 위대한 저술품 천주실의가 바로 그 매개체였다.
천진암에는 한국천주교회를 탄생시킨 5명의 성인이 잠들어 있다. 이벽, 이승훈, 정약종, 권일신, 권철신이 바로 그들이다.
천주실의를 가지고 와서 천진암 강학회를 새로운 학문의 세계로 인도한 광암 이벽이나 중국에 가서 최초로 세례를 받고 돌아온 만천 이승훈이 한국천주교회사 창립에 형식적 주도를 하였지만에 오히려 그들 뒤에서 감싸고 지도하면서 한국천주교 창립에 실질적인 힘을 실어주고 배경이 되었던 인물은 바로 녹암 권철신이다.
녹암은 야소(=예수)를 광신하지 안않기 때문에 천주교 신자로서는 비록 민밋한 인물일지모르지만 그는 노비제도를 본인 스스로 혁파해 버린 실천적 사상가라는 점에서 위대함이 더욱 빛나는 독보적 존재이다.
깨인 실학자였다는 다산 정약용 선생마저도 노비제도 혁파가 경국대전 위반임을 잘 알고 군소리 없이 노비제도를 인정하였다는 점과 비교할 때 더욱 그렇다.
또한 성경에도 노비가 등장하고 교회 안에도 노비제도 긍정론과 폐지론이 공존한다는 사실에 비추어 보면 그는 한국이 낳은 세계적 사상가가 아닐 수 없다.
이하는 수원시 학예 연구가 김준혁님의 글이다.
권철신(權哲身)은 1736년(영조 12)에 경기도 양근에서 태어나 정조가 돌아가시고 난 다음해인 1801년(순조1)에 신유사옥에 연루되어 66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본관은 안동으로 자는 기명(旣明), 호는 녹암(鹿菴)이었다. 그의 가문은 도도히 흐르는 한강을 기고 있는 경기도 양근(=버들나무 뿌리) 땅에서 대대로 살아온 명문가였다.
조선 창업의 주인공인 양촌 권근(정도전과 같은 문하생)으로부터 비롯된 그의 집안은 과거를 통한 출사로 가까이에서 국왕을 모시는 고관대작이 끊이지 않았으나 그의 조부대로부터 벼슬살이가 끊어졌다. 그 이유는 바로 그의 집안이 남인(南人)이었기 때문이다.
1694년(숙종20)에 있었던 갑술환국으로 노론이 재집권을 하고 남인이 권력으로부터 떨어져 나가면서 남인은 조정에 출사하지 못하는 당쟁의 폐단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그의 부친이었던 권암(權巖)이 노론과 소론에 대해 준엄한 논의를 펼쳤기에 더더욱 그의 가문은 다른 당파에게 있어서 기피의 대상이었다.
권철신이 처음으로 스승인 성호 이익을 만난 것은 1759년(영조 35)으로 그의 나이 24세였다. 반계 유형원에 이어 사회개혁과 위민정책을 연구한 실학의 대가이며 노비제 폐지를 지지하면서 그 방책의 일환으로 노비매매 금지를 제안하셨던 성호 이익을 스승으로 만난 것은 그의 행운일 뿐만 아니라 우리 역사의 기쁨이었다.
성호 이익은 만년에 얻은 제자 권철신을 누구보다 사랑하였다. 양반사대부임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바지를 걷고 논에 들어가 일을 했던 스승을 보면서 그는 인간의 평등과 그들을 위해 복무해야 하는 것이 학자임을 깨닫게 되었다.
이익이 세상을 떠나자 이익의 큰 제자였던 순암 안정복의 문하로 그의 동생이었던 권일신과 함께 공부를 하였다.
순암 안정복이 성호 우파라고 불리면서 원칙을 고수하였지만 그의 사제인 권철신에게는 자유로운 사고를 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줌으로써 그가 성호 좌파라는 또 다른 학맥을 형성하게 한 것이다.
어쩌면 성호 이익과 순암 안정복이라는 우리 역사상 가장 뛰어난 학자들의 도움이 아니었으면 권철신이라는 존재는 한강 주변의 작은 마을에서 독서만 하다 세상을 떠난 백면서생의 이름 모를 일개 유학자로 남았을지 모른다.
조선후기 실학의 완성자로 평가받는 정약용은 권철신을 누구보다 흠모하였다. 당시 한강을 끼고 있는 경기도 지역에 거주하는 남인들의 정신적 스승이었던 권철신에게 학문을 배운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다산 정약용이 자신보다 10배는 뛰어나다고 평가하는 그의 형 정약전은 정식으로 권철신에게 제자의 예를 갖춰 사제관계가 형성되었고 정약용 역시 그를 스승으로 섬겼다.
성호 이익의 실학을 정식으로 계승한 권철신은 정조시대 가장 뛰어난 경세치용(經世致用) 학파의 영도자로서 수많은 젊은 실학자들을 양산하고 있었다.
비단 남인계열의 젊은 실학자들만이 그의 영향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조선후기 문예군주이자 개혁군주인 정조 역시 그의 사상의 세례를 듬뿍 받은 인물이었다. 정조가 세손 시절에 세손시강원에서 정조의 학문을 가르친 스승이 다름아닌 권철신이었다.
따라서 정조는 권철신으로부터 경학과 역사 그리고 실학을 전수받음으로써 그가 훗날 주자 성리학만이 아닌 이단으로 취급받던 양명학, 도교, 불교, 서학도 널리 포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뒤이어 문효세자를 세자로 책봉하고 스승을 임명할 때 권철신을 임명하였지만 문효세자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아마도 문효세자가 조금 더 살았더라면 국왕과 세자 모두의 스승으로 조선 역사에 기록되었을 것이다.
결국 어떤 스승을 만나느냐가 사람의 인생을 좌우할 수 있는데 그런 측면에서 정조는 가장 이상적인 스승을 만난 것이고 더불어 권철신의 제자였던 정약용을 등용하고 아끼게 된 것이었다.
권철신은 그가 당대 최고의 학자이고 모든 이들의 우러름을 받는 존재여도 집안의 노비들에게까지도 존대말을 하는 보기드문 인품의 소유자였다.
정약용이 쓴 그의 묘지명을 보면 그의 집안에는 조카와 자식들이 함께 살았는데 한달쯤 같이 지내봐야 누가 조카이고 자식인지를 알 수 있다고 하였다. 그만큼 차별을 두지 않고 모두를 똑같이 사랑했기에 전혀 구별할 수 없었던 것이다.
더불어 그는 노비들과 비축된 곡식을 서로 나누어 사용하고 진귀한 음식이 생기면 비록 그 양이 얼마 되지 않아도 종들까지 나누어주니 온 나라 사람들이 그를 사모하였다.
그리고 그가 서학을 공부하고 난 후 자신의 집안 노비를 모두 면천하여 양인으로 만들어주는 조선 역사상 일대 파격을 단행하였다.
신분제가 사회와 국가를 통치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던 시절에 신분제에 대한 벽을 허물고 모두가 한 식구처럼 살아가자는 그의 생각은 감히 상상할 수 없는 것이었다.
신분제 철폐 단계에 이르렀던 그의 생각은 마침내 정조에게로 이어졌다. 정조가 즉위 직후부터 조선의 모든 노비를 없애 평등한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고 역설한 것은 그 스스로의 생각이 아닌 권철신으로부터 받은 평등정신의 발로였던 것이다.
훗날 갑오경장을 통한 사노비 철폐도 권철신의 신분제 혁파로부터 비롯된 것이라고 평가될 수 있다.
주자성리학을 공부하면서 양명학까지 사유의 세계를 넓힌 권철신은 성호 이익으로부터 마태오 리치의 위대한 서학(西學) 저작서인 천주실의를 접하고서 한국 고유의 하나님 사상을 떠올렸을 것으로 추정되며 그에 터잡아 서학을 심도 있게 공부한 것으로 보여진다.
1777년(정조 1) 천진암에서 강학회를 통해 서학을 신앙으로 받아들이게 된 권철신은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였다. 그간 주자성리학으로부터 탈출하여 보다 넓은 학문사상을 받아들이고자 했던 그에게 서학의 존재는 엄청난 기폭제와 추진체가 되어 주었다.
더불어 그가 지니고 있던 명망으로 인하여 주변 모든 이들이 서학을 신봉하면서 평등과 새로운 유토피아를 꿈꾸게 되었다.
그는 국왕 정조를 받들면서 서학이 말하고자 하는 평등의 대동세상을 함께 만들고자 했던 것이다. 그래서 정조시대 윤지충 권상연이 조상의 신주를 불태우는 사건이 발생하여 정약종 등이 사형을 당할때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다수의 역사가들이 그를 천주교 신자로만 이해하고자 하지만 오히려 그는 시대를 앞서간 혁명적 사상가였다.
권철신은 공개적으로 윤휴를 사모한다고 하였다. 윤휴는 숙종대 학자로 주자의 학문을 배격하고 경전에 대한 독자적인 해석을 단행한 인물로 송시열이 가장 존경하고 두려워하는 존재였다.
당시 모든 학자들이 주자의 학문만이 옳다고 하던 시절에 어찌 주자의 학문만 옳고 조선 학자들의 학문을 옳지 않냐며, 조선 학자들의 시각으로 공자와 맹자의 학문을 해석하였다. 이는 중국의 학문에 매몰되지 않겠다는 반사대주의(反事大主義)로서 일대 파란을 일으켰다. 그 결과 윤휴는 사문난적으로 몰려 끝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는데 이런 인물을 공개적으로 사모한다고 하였으니 권철신의 용기와 주체적 학문에 대한 열정은 그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것이었다.
권철신보다 한 연배가 높은 이병휴는 권철신의 예(禮)에 대한 자주적 해석을 그릇된 것을 개혁하고 古制를 회복하는 것으로 이야기하며 칭찬하였다.
더불어 안정복은 그가 학문을 함에 있어 정밀한 논리와 초절한 식견에 감탄한다고 할 정도였다. 권철신의 글이 처음에는 의문이 생기다가 마침내 의문이 풀어지는 ‘융회관통(融會貫通)’의 경지에 이를 정도가 되었다는 것이다.
순암 안정복은 권철신에게 의문이 적으면 진보도 적고, 의문이 많으면 진보도 많다는 주자의 말을 인용하면서 그가 보다 많은 의문을 통해 새로운 사상의 바다로 나가길 권유하였다.
어쩌면 권철신이 성호 이익의 학문을 이은 좌파라고 하는 영예를 받은 것은 순암 안정복의 영향이 컸던 것이다. 권철신의 학문은 성호에게서 순암으로 이어지다 마침내 스스로 깨달아 독보적인 존재로 나간 것이다.
권철신은 한국천주교회 창립의 든든한 사상적 배후가 된 핵심적 인물임과 동시에 조선후기 모순에 찬 사회에서 평등과 자주를 추구한 사회개혁가요, 중국의 학문이 최고가 아닌 조선의 학문을 열고자 한 시대의 주체적 진보 학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