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씨(姜氏)가 최초로 성을 가지신 분은 중국의 염제 신농(炎帝神農)이시다. 사기(史記)에 의하면 신농(神農)의 이름은 석년(石年)이고, 천수(天水)에서 출생하여 강수(姜水)에서 자랐기 때문에 성을 강(姜)이라고 정하였다고 한다. 천수(天水)땅은 현재 감숙성(甘肅省) 위천현(渭川縣)인데 한나라 때에는 천수(天水)라고 했고, 강수(姜水)는 현재 섬서성(陝西省) 기산현(岐産縣)을 말한다. 중국의 강씨(姜氏)는 원래 관향(貫鄕)을 천수강씨(天水姜氏)로 썼던 것을 수천년을 내려오는 동안 중조(中祖)를 실계(失系)한 연고(然故)로 각기 그 본(本)이 나누어져서 운남강씨(雲南姜氏), 광동강씨(廣東姜氏), 산서강씨(山西姜氏), 니련강씨(尼連姜氏), 유이강씨(維夷姜氏)등의 관(貫)을 쓰고 있으나 그 근본의 관향(貫鄕)을 물으면 전부가 천수강씨(天水姜氏)라고 대답한다. 우리 한국의 강씨 즉 진주강씨(晋州姜氏)는 서기 500년대에 고구려 병마도원수(兵馬都元帥) 강이식(姜以式) 장군을 시조로 모시고 관향(貫鄕)을 진주(晋陽, 晋山)로 정하여 천파일본(天派一本), 만지동근(萬枝同根)으로 동방의 대성(大姓)임을 자랑한다. 현재 관향을 금천(衿川 : 서울, 始興)으로 하는 인헌공(仁憲公) 휘 감찬(邯贊)파가 있으나 이는 인헌공(仁憲公)의 6대조로 추정되는 강여청(姜餘淸)이 신라때 금천으로 이거(移居)했다는 근거로 본관(本貫)을 금천(衿川)으로 하고 있는 국조실록(國朝實錄), 조선환여승람(朝鮮 與勝覽), 진주읍지(晋州邑誌), 보문(譜文)등 여러 문헌(文獻)을 고찰해 보면 진주강씨에서 분적(分籍) 되었음이 분명하다. 진주강씨는 시조 원수공(諱 以式) 이래(以來) 그 후예(後裔)가 번성(繁盛)하여 명문거족(名門巨族)임은 자타가 공지하는 바이나, 불행이도 천수백년(千數百年)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여러차례 병난(兵亂)과 혁명으로 인하여 시조 이하 선조들의 사적과 보문(譜文)이 소실(燒失)되어 정확한 사실은 알 수 없으나 현세에 산재한 사학(史學 : 西郭雜錄·大同韻海·丹齋全集 等)과 보문, 기타문헌을 토대로 한국 강씨의 유래를 알게 되었음을 심히 다행한 일이며, 또한 여러 선조님들의 많은 사료가 있어 후손들이 민족사 연구(硏究)에 일조가 되고 있음에 선조님들에 대한 고마움을 느끼는 바이다.
강씨는 원래 중국에서 시작된 성이라는 사실과 중국강씨(中國姜氏)에 대한 득관(得貫)에 대해서는 전술하였고 우리나라 강씨는 시조이신 고구려 때 병마도원수공 휘 이식(兵馬都元帥公 諱 以式)의 후손이며 통일신라 헌강왕(統一新羅 憲康王)때 태중대부판내의령(太中大夫判內議令)으로 재임 중이던 휘 진(諱 縉)께서 진양후(晋陽侯)로 피봉되셨는데 이때부터 강씨는 본관을 진주(晋陽, 晋山)로 정함에 따라 득관하게 된 것이다. 이후 이천년 가까이 지난 현재 우리 진주 강성만이 유일하게 갈라지지 않고 천파일본(千派一本)으로 지속되고 있음을 자랑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