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진족 추장, 속고내(速古乃) 토벌 무산사건은
조광조의 성리학 우선주의를 잘 드러낸다
https://youtu.be/FdABN5cPwf8?si=O5k2lcf6IzgSaHIq
속고내는 여진족 추장으로 중종 7년(1512)에 자신의 여진족 무리 400명을 이끌고 함경도 갑산 일대를 약탈하고 도망간 범죄자였다.
그러던 1518년 8월, 조선 정부는 "속고내가 함경도 인근에서 사냥을 한다"는 보고를 받았고 중종을 필두로 영의정 정광필, 병조판서 이장곤, 무신 유담년 등은 속고내 토벌을 논의하여 '몰래 기습하자'는 쪽으로 의견이 모였다.
그런데 마침 입궐했던 조광조가 "이 일은 가벼이 결정할 일이 아닙니다."라고 하자, 중종은 다시 신하들을 불러들여 의견을 물었다. 그런데 이때 조광조가 이렇게 주장하였다.
"여진족 추장 속고내에게 글을 보내어 꾸짖고, 그래도 말을 안 들으면 그 때 죄를 묻는 군사를 일으켜 성대하게 토벌해야 합니다."
이야기를 듣던 무신이하 일반 신하들 입장에선 어처구니가 없어서 돌부처가 웃을 노릇이었다.
정광필과 이장곤이 이렇게 반박했다. "말은 맞는 말인데 오랑캐가 득실거리는 변방에서 조광조가 하는 고매한 말은 통용되기 어렵습니다."
이처럼 완곡하게 제지하려 했으나, 중종과 조광조는 막무가내였다. 옆에서 듣다가 어이가 없어진 무신 유담년도 정광필과 이장곤과 같은 의견이었다.
"밭 가는 일은 종에게 물어보고
길쌈하는 일은 여종에게 물어 보라고 했습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북방의 일은 저희 무신들의 의견을 들으셔야 합니다."
그러나 중종이 조광조의 손을 들어줘 결국 속고내 생포 시도는 무산되고 말았다.
조광조의 주장을 정리하자면 이렇다. '속고내는 반역할 마음이 없는데 군사를 보내 기습하는 것은 안 될 말이며, 잡아보니 속고내가 아니면 그것대로 곤란하고, 속고내여도 기습하여 사로잡는 것은 도적의 짓'이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속고내가 죄를 지은 뒤에야 죄를 묻는 군사를 보내야지, 기습은 의리에 어긋난다는 논리였다.
성리학적 이상 정치를 추구한 독특한 견해로서 속고내(速古乃) 토벌 논의는 그의 비현실적인 성리학 우월주의를 잘 보여준다
조광조의 입장은 현실적인 군사·외교적 판단과는 거리가 있었고, 이는 그의 '비현실적 성리학 우월주의'를 보여주는 사례로 비판받기도 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조광조의 이러한 이상주의적이고 급진적인 개혁 사상은 노련한 훈구파의 반발을 샀고, 결국 기묘사화(1519년)로 인해 그가 몰락하는 한 원인이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