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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에 종족의 이름이 한결같지 않아 풍속은 아직도 점점 갈라지기만 하였다. 본래부터 살던 자는 범족(虎族)이고 새로와서 사는자는 곰족(熊族)이었다. 범족의 성품은 탐하기를 좋아하고 잔인하여 오로지 약탈을 일삼고, 곰족은 성품이 어리석고 고집이 세어 스스로 잘난체하며 화합과 협조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니 서로 통하지 않고 양보하지 않으니 서로 한 길을 가는 일이 없었다.
여기에 이르러 웅족의 군(君)이 환웅(桓雄)에게 신령스러운 덕이 있다는 말을 듣고 무리를 거늘이고 가서 말하기를 "원하옵기는 터전하나를 내려주시면 신계(神戒)의 맹세를 하겠나이다" 하였다. 환웅이 이를 허락하여 서로 접촉하게 하니 자식을 낳고 산업을 일으켰다. 그러나 범은 끝내 마음을 고치지 못하여 사해(四海)로 내쫓으니 환족(桓族)이 일어난 것이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개벽한 지 아직 멀지 않은 때인지라, 곳곳에 초목이 무성하고 날짐승이며 들짐승이 어지러이 섞여 있어 사람들의 괴로움이 매우 심하였고, 더욱이 사나운 짐승과 독충들도 때를 가리지 않고 다투어 사람들의 피해 또한 적지 않았다.
이리하여, 신시씨는 치우씨(蚩尤氏)에게 명하여 이를 다스리게 하였다. 치우씨는 진실로 만고에 있어 강인하고 용맹함의 조상이 되니, 천지를 움직여 휘두르는 힘과 바람·번개·구름·안개를 부리는 능력을 지니고 있으며, 또한 칼·창·큰도끼·긴창(5) 등을 만들어 이로서 초목과 금수며 벌레와 물고기의 무리를 다스렸다. 이에 초목이 차츰 걷히고 금수와 벌레며 물고기들이 깊은 산 속이나 큰 못 속으로 피하여 달아나 숨어 버려서 다시는 백성들이 살아가는데 해악이 되지 않았다. 이로서 치우씨는 대대로 병기 만드는 일을 맡았으며, 항시 나라 안을 편안하게 안정시키고 적을 토벌하는 일을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신시씨는 사람의 거처가 이미 완비되고 살아서 꿈틀거리는 사물들 또한 각기 그 마땅한 처소를 얻었음을 보고, 이에 고시씨(高矢氏)로 하여금 먹여 살리는 일을 맡도록 하였으니, 그것은 곡식을 주관하는 일이다. 이때는 곡식을 심고 거두는 일이 아직 갖추어져 있지 않았으며 불씨 또한 없던 때라, 백성들은 모두 풀의 푸성귀나 나무의 열매를 먹고 신선한 피를 마시며 날고기를 먹었으니, 그 고초는 참아내기 어려웠다.
고시씨가 이에 점차 곡식을 심고 거두는 방법은 가르쳤으나, 여전히 불이 없는 것이 근심이 되었다. 하루는 우연히 깊은 산 속에 들어가니 높이 우뚝 솟은 나무들이 어지럽게 쓰러져 있는 것이 온 사방으로 보였는데, 앙상하고 말라버린 체로 메마른 가지들만이 남아 서로 어지럽게 얽혀져 있었다. 한참 동안 아무 말 없이 서 있으려니, 갑자기 숲으로 큰 바람이 불어와 모든 구멍들이 성난 목소리를 내뱉고 앙상한 가지들은 서로 밀치며 비벼대었는데, 마찰되어 일어나는 불길이 번쩍번쩍 빛나는 듯 언뜻 일어나다가는 도리어 사글어드는듯 하더니 이내 맹렬하게 타오르는지라, 깨달음이 있어 이르기를 [이것이로다! 이것이로다! 이것이 바로 불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로구나] 하였다. 돌아와서 마른 홰나무 가지를 비벼 불을 일으키려 하였으나 아직까지는 완전하지 못하였다. 다음 날 다시 숲속으로 가서 생각에 잠겨 배회하고 있으려니, 홀연히 한 마리의 줄무늬 범이 으르렁거리며 달려들기에, 고시씨가 벽력과 같은 소리로 꾸짖으며 돌을 날려 호되게 내려치니 바위 모서리에 빗맞으며 번쩍이면서 불길이 일어나기에, 이에 크게 기뻐하고 돌아와 다시 돌을 부딪쳐서 불을 얻게 되었다. 이로부터 백성들은 음식을 익혀 먹을 수 있게 되었으며, 주조하는 기술이 비로소 흥성하였기에 제작의 능률도 점차 나아지게 되었다.
또한 신지씨(神誌氏)로 하여금 글을 짓게 하였다. 무릇 신지씨는 대대로 임금의 명을 주관하는 직책을 맡으며 명령의 출납과 임금을 보좌하는 임무를 관리하였는데, 단지 한낱 혀에만 의지할 뿐, 일찍이 글로서 기록하여 보관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하루는 사냥을 나갔는데, 갑자기 놀라 달아나는 암사슴 한 마리를 보고 활을 당겨 쏘려 하였으나 순식간에 그 종적을 놓쳐 버렸다. 이에 사방을 수색하며 산과 들을 두루 지나 넓은 모랫벌에 이르러 비로소 어지럽게 찍혀있는 발자국을 보니 달아난 방향이 명확하게 드러나는지라, 머리를 숙인 채 생각에 잠겼다가 잠시간에 불현듯 깨달아 말하기를 [기록하여 두는 방법은 오직 이와 같을 따름이구나! 이와 같을 따름이야!] 하였다. 그 날 사냥을 마치고 돌아와 연거푸 깊이 생각하며 널리 만물의 모습을 관찰하다가, 며칠 지나지 않아 깨달음을 얻어 글을 만들어 내니, 이것이 태고 문자의 시작이다. 그러나 후세에 세월이 까마득히 오래되어 태고 문자는 사라져 존재하지 않으니, 생각건대 그 꾸밈새가 아직은 완전하지 못해서가 아닌가 한다. 듣건대 육진(六鎭)(6)의 땅이나 선춘(先春) 등지의 암벽 사이에 때때로 문자를 조각한 것이 발견되었다고 하는데, 범자(梵字)도 아니요 전자(篆字)도 아닌 것으로 사람들이 능히 알아먹지 못한다고 하니, 어쩌면 그것이 신지씨가 지은 옛문자가 아닌가 한다.
후세에 치우씨·고시씨·신지씨의 후예들이 가장 번창하여 융성하였다. 치우씨의 부족은 서남의 땅에 자리를 잡았고, 신지씨의 부족은 북동의 땅에 많이 정착하였는데, 오로지 고시씨의 후예들만이 동남쪽에 넓게 거처하다가 더욱더 이동하여 변진(辰弁)의 뭇 부족들이 되었으니, 후에 삼한(三韓)이라 일컬어지는 것은 모두 그의 후손들이다.
삼씨(三氏)의 후예들은 또한 아홉 갈래로 자세히 나누어지는데, 곧 견이( 夷)·우이( 夷)·방이(方夷)·황이(黃夷)·백이(白夷)·적이(赤夷)·현이(玄夷)·풍이(風夷)·양이(暘夷)의 무리들이 모두 같은 조상의 다른 가지일 뿐, 서로 그리 멀지는 않다. '이(夷)'자는 큰 활을 지칭하는 것이다. 치우씨가 칼과 창이며 큰 쇠뇌를 만들기 시작한 이후로 사냥하고 전쟁함에 있어서 이러한 것을 병장기로 삼으니 중토(中土)(7)의 뭇 부족들이 큰 활의 쓰임을 매우 두려워하였으며, 그 위풍을 듣고 간담이 서늘하곤 한 지가 오래되었기에 우리 민족을 일컬어 '이(夷)'라고 한 것이다.《설문해자(說文解字)》에 이르기를 [이(夷)는 '크다(大)'는 것과 '활(弓)'에서 유래하였으며, 동방의 사람을 말한다]라고 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중니가《춘추》를 짓기에 이르러 이(夷)의 이름을 마침내 융(戎)이나 적(狄) 등과 아울러 비속한 명칭으로 삼아 버리니 분할 따름이다. 뒷날 견이와 풍이는 따로 서남으로 옮겨가서 항시 중토의 여러 부족들과 서로 엎치락 뒷치락 세력을 다투었는데, 풍이는 바로 치우씨의 일족이다.(8)
이 보다 앞서 치우씨가 비록 날짐승과 들짐승 및 벌레와 물고기 등의 무리를 몰아내긴 하였지만, 사람들은 아직까지 흙굴에서 사는 까닭에 아래로부터의 습한 기운이 사람에게 해를 끼쳐 질병을 일으켰다. 게다가 짐승들을 한차례 휘몰아 내쫓으니 점차 스스로 물러나 피하고 숨어 버린 까닭에 잡아먹기에 불편하였다. 신시씨가 이에 치우씨로 하여금 사람이 거처할 만한 것을 짓게 하였으며, 고시씨에게는 소·말·개·돼지·수리·범 등의 짐승을 사로잡아 데려와서 가두어 기르게 하였으며, 또 주인씨(朱因氏)를 신임하여 그에게 남녀간에 장가들고 시집가는 법을 정하게 하였다. 무릇 지금의 사람들이 힘센 장사를 두고 '지위'라 함은 치우씨의 이름이 잘못 전하여 진 것이며, 밭갈고 농사짓거나 나무를 하고 짐승을 기르는 사람들이 밥을 먹을 때 '고시례'하며 축원하는 것은 고시씨를 일컫는 것이며, 혼인에서 중매를 서는 것을 '주인 선다'라고 말하는 것 또한 주인씨의 이름에서 남겨진 명칭이다.
이 때에 구환(九桓)이 모두 삼신으로 한 뿌리의 조상을 삼았으며, 소도(蘇塗)(9)를 맡아 다스리고, 관경(管境)을 맡아 다스리고, 책화(責禍)를 맡아 다스렸다, 무리와 함께 의논하여 의견이 하나로 모아져 화백(和白)을 이루고 아울러 지(智)와 생(生)을 함께 닦아 고을을 이루었다.
환웅천왕(桓雄天王)으로부터 5대를 지나 태우의환웅(太虞儀桓雄)이 있었는데 사람에게 가르치기를, 반드시 가만히 생각에 잠기므로 마음을 맑게 닦으며, 숨쉬는 것을 고르게 하여 정기를 보전하게 하였다. 이것이 곧 오래살며 늙지 않게하는 방술(方術)이다. 아들 열둘이 있었는데 맏 아들은 다의발환웅(多儀發桓雄)이며 막내가 태호(太 )이니 복희(伏羲)(10)라고도 한다.
밀기(密記)에서 말하기를
" 복희(伏羲)는 신시(神市)에서 나와 우사(雨師)의 직책을 세워 세습하였고 뒤에 청구(靑邱)와 낙랑(樂浪)을 거쳐 드디어 진(陳)으로 옮겨 수인(燧人)(11)· 유소(有巢)(12)와 함께 서토(西土)에 나라를 세웠다. 그 후손이 풍산(風山)에 나누어 살았으며 성을 풍(風)이라고 하였다.
갈고환웅(葛古桓雄)이 있어 염제신농(炎帝神農)(13)의 나라와 경계를 정하였다, 또 몇대를 이어오다가 자오지환웅(慈烏支桓雄)이 있었는데 신스러운 용맹이 있어 크게 뛰났다. 구리 머리에 쇠 이마를 하고 능히 큰 안개를 만들어 일으키고 여러 방법의 야금술로써 공물을 뽑아내고 쇠를 녹여 병기를 만드니 천하가 크게 두려워하였다, 세상에서는 이를 치우천왕(蚩尤天王)이라고 하였다. 치우(蚩尤)는 천둥과 비를 크게 일으켜 산하(山河)를 바꾸어 놓는다는 뜻이라 하였다.
치우천왕(蚩尤天王)이 염제신농(炎帝神農)이 쇠해가는 것을 보고 드디어 큰 계획을 품고 자주 서쪽에서 천병(天兵)을 일으켰다. 형제와 종실의 무리 가운데 장군으로 삼을 만한 사람 81명을 선발하여 부장(部將)으로써 모든 군사를 통솔케하고, 갈로산(葛盧山)의 쇠를 캐내어 칼이며 갑옷과 중기창과 가닥창을 비롯하여 큰 활과 호목나무 화살 등을 많이 만들어 모두 가지런히 하고는 탁록( 鹿)으로 출발하여 구혼(九渾)에 올라 연전연승하니, 그 형세가 마치 비바람과 같아서 세상의 만민은 두려워 엎드리고 그 위세는 천하에 떨치게 되었다.한 해 만에 무릇 아홉 제후의 땅을 빼앗고, 다시 옹호산(雍狐山)에 나아가 수금(水金)을 캐어 끈 달린 방패와 가지창 및 옹호창(14)을 제작하여, 새로 병사를 정비하고 양수(洋水)(15)를 떠나 파죽지세로 공상(空桑)에 이르렀다. 공상은 지금의 진류(陳留)로서 유망(楡罔)이 도읍하던 곳이다. 한 해 만에 다시 열두 제후의 나라를 합치니, 죽어 엎어진 시체는 들녘에 가득하기에 중토의 백성들은 간담이 서늘하여 달아나 숨지 않은 자가 없었다. 이때에 유망이 소호(少昊)(16)로 하여금 막아 싸우게 하니, 치우씨는 옹호창을 휘두르며 소호와 크게 싸우면서 또한 큰 안개를 일으켜 적병으로 하여금 혼미한 가운데 스스로 혼란케함에 소호는 크게 패하고 황망히 물러나 공상으로 들어가더니 유망과 함께 도망 나와서 되돌아 탁록으로 들어갔다. 치우씨는 이에 공상(空桑)(17)에서 황제의 지위에 오르고 병사를 되돌려 탁록의 들판을 에워싸고 공격하여 또 크게 패퇴시켰다.
이때에 헌원(軒轅)이란 자가 있어 유망은 패하여 달아나고 치우씨가 제위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고, 대신 임금이 되고자 크게 군사를 일으켜 치우씨에게 대항하여 싸웠다. 치우씨는 탁록에서 헌원과 크게 싸우며 병사를 풀어 사방에서 내려치니 참살시킨 자는 수도 없었으며, 다시 큰 안개를 일으켜 적군으로 하여금 마음이 흐려지고 손발이 떨리게 하니 (헌원은) 급히 달아나 겨우 목숨을 건지게 되었다. 이리하여 회대(淮岱)(18)와 기연(冀 )(19)의 땅을 모두 점거하였으며, 탁록에 성을 쌓고 회대에 자리잡아서 옮겨 왕래하며 천하를 호령하게 되었다.
치우천왕이 10년동안 헌원과 싸운 것이 73회나 되었다. 헌원이 이미 여러 번 패하더니 이에 다시 병사와 군마를 크게 일으키고 치우씨를 흉내내어 군사들의 갑옷을 널리 제작하였으며, 또한 지남(指南)(20) 수레를 만들어 놓고 더불어 싸울 날을 기다렸다.
이때 치우씨가 우러러 천체의 형상을 관찰하고 굽어 민심을 살펴보니 중토에 왕성한 기운이 점차 번성해지고 또한 염제의 백성들이 곳곳에서 굳게 단결하여 가볍게 모두 죽여 버릴 수 없으며, 더욱이 각각의 백성들이 그들의 군주를 섬기는데 무고하게 함부로 죽일 수 없음을 깊이 인식하게 되었다. 이에 물러나 돌아갈 것을 마음먹고 형제와 종실의 무리에게 힘써 크게 싸워 위세를 세움으로서 적이 감히 추격하여 습격할 마음을 먹지 못하도록 하게 한 뒤, 다시 헌원과 크게 싸워 한 무리를 도륙한 후에 비로소 물러나왔다. 이때 부장 가운데 치우비(蚩尤飛)가 불행히도 서둘러 공을 세우려다 진중에서 전사 하였는데,《사기(史記)》에서 이른바 [마침내 치우씨를 사로잡아 죽였다(21)]라고 한 것은 아마 이를 두고 한 말일 것이다. 치우씨는 이에 동쪽으로 회대의 땅에 할거하고 있으면서 이로서 헌원이 동쪽으로 나오는 길을 막고 있었으나, 그가 죽자 점차 물러서기에 이르렀다. 지금《한서.지리지(漢書.地理誌)》에 의하면 그의 묘가 동평군(東平郡) 수장현(壽張縣)(22)의 감향성( 鄕城) 안에 있다 하며 그 높이가 다섯 장(丈)이라 한다(23). 진(秦)나라와 한(漢)나라 때의 주민들이 한결같이 10월에 제사를 지내면 반드시 붉은 기운이 있어 한 폭의 진홍빛 비단과도 같이 솟아오른다고 하니, 백성들이 이를 일컬어 '치우기(蚩尤旗)'라 이름하였다.
치우씨가 비록 물러나 돌아왔지만 중토는 이로서 쓸쓸해지고 유망 또한 다시 그 제위(帝位)를 회복하지 못하여 염제의 유업은 이로서 영원히 무너지게 되었다. 이때부터 헌원이 대신 중토의 주인이 되었으니, 곧 황제(黃帝)이다. 그러나 치우씨의 형제들이 모두 유청(幽靑)(24)의 땅에 영원히 거처하며 그 명성과 위세가 계속되었기에 황제는 세상을 다 할 때까지 편안하게 베개를 높여 베고 누운 적이 없었다.
그 후 삼백여 년은 아무일 없이 단지 소호씨(少昊氏)와 더불어 싸워 이를 격파하였을 뿐이고, 신시씨의 뒤로 고시씨가 치우씨와 더불어 서로 계속하여 임금이 되었다.
신시역대기(神市歷代記)
배달(倍達)은 환웅(桓雄)이 천하를 정하면서 있은 호칭이다.
도읍한 곳을 신시(神市)라 하였는데 후에 청구국(靑邱國)(25)으로 옮겨 18세를 이어 전하니 1565년간이나 되었다.
1세 환웅천황(桓雄天皇)이라 하며 또는 거발환(居發桓)이라고도 한다.
재위 94년 수는 120 세 이다.BC3898년
2세 거불리환웅(居佛理桓雄)이라 한다. 재위 86년 수는 102세이다. BC3804년
3세 우야고환웅(右耶古桓雄)이라 한다. 재위 99년 수는 135세 이다.BC3718년
4세 모사라환웅(慕士羅桓雄)이라 한다. 재위 107년 수는 129세 이다.BC3619년
5세 태우의환웅(太虞儀桓雄)이라 한다. 재위 93년 수는 110세 이다.BC3512년
6세 다의발환웅(多儀發桓雄)이라 한다. 재위 98년 수는 110세 이다.BC3419년
7세 거련환웅(居連桓雄)이라 한다. 재위 81년 수는 140세 이다.BC3321년
8세 안부련환웅(安夫連桓雄)이라 한다. 재위 73년 수는 94세 이다.BC3240년
9세 양운환웅(養雲桓雄)이라 한다. 재위 96년 수는 139세 이다.BC3167년
10세 갈고환웅(葛古桓雄)이라 하며 또는 독노한(瀆盧韓)이라고도 한다.
재위 100년 수는 125세 이다.BC3071년
11세 거야발환웅(居耶發桓雄)이라 한다. 재위 92년 수는 149세 이다.BC2971년
12세 주무신환웅(州武愼桓雄)이라 한다. 재위 105년 수는 123세 이다.BC2879년
13세 사와라환웅(斯瓦羅桓雄)(26)이라 한다. 재위 67년 수는 100세 이다.BC2774년
14세 자오지환웅(慈烏支桓雄) 또는 치우천왕(蚩尤天王)이라 한다.
도읍을 청구국(靑邱國)으로 옮겼다. 재위 109년 수는 151세 이다.BC2707년
15세 치액특환웅(蚩額特桓雄)이라 한다. 재위 89년 수는 118세 이다.BC2598년
16세 축다리환웅(祝多利桓雄)이라 한다. 재위 56년 수는 99세 이다.BC2509년
17세 혁다세환웅(赫多世桓雄)이라 한다. 재위 72년 수는 97세 이다.BC2453년
18세 거불단환웅(居弗檀桓雄) 또는 단웅(檀雄)이라 한다. 재위 48년 수는 82세 이다.BC2381년
1) 천부경
천부경(天符經)
천부경은 천제 환국에서 말로만 전해지던 글이니, 한웅천왕이 하늘에서 내려온 뒤 신지 혁덕에게 명하여 녹도의 글로써 이를 기록케 하였다. 최고운 치원은 역시 일찌기 신지의 전문을 옛비석예서 보고 다시 이를 첩으로 만들어 세상에 전하게 된 것이다.
天符經 八十一字
一始無始一析三極無盡本
天一一地一二人一三一積十鉅無 化三
天二三地二三人二三大三合六生七八九運三四成環五七
一妙衍萬往萬來用變不動本
本心本太陽昻明人中天地一
一終無終一
천부경 팔십일자
일시무시일석삼극무진본
천일일지일이인일삼일적십게무괴화삼
천이삼지이삼인이삼대삼합육생칠팔구운삼사성환오칠
일묘연만왕만래용변부동본
본심본태양앙명인중천지일
일종무종일
2) 삼일신고
三一神誥(삼일신고)
삼일신고는 천부경과 함께 우리 민족의 2대 경전으로서 역시 대황조(한배검)의 가르침을 문자로 옮겨 놓은 것이다. 세상에 전해 오는 경의원문은 5장-천훈, 신훈, 천궁훈, 세계훈, 진리훈-으로 되어 있는데, 앞의 3장만이 원래 한배검의 말씀이요 뒤의 세계훈, 진리훈은 후세 사람이 앞의 3장에 대한 설명을 붙여 놓은 것이라 본다.
삼일신고에 담긴 내용은 바로 천부경의 핵심 사상과 그대로 직결되고 있어서, 천훈, 신훈, 천궁훈은 천부경을 풀어 놓은 글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즉 천훈, 신훈, 천궁훈은 주재주의 각기 다른 세 측면을 나타내고 있으나, 종국에는 모두 하나인 것이다.이러한 관점에서 삼일 사상의 의미를 되새겨 본다면 반드시 큰 깨달음이 있으리라 믿는다.
제 1 장
천훈-하늘에 대한 가르침
한배검에 이르시기를, 원보 팽우여, 푸르고 푸른 것이 하늘이 아니며,아득하고 아득한 것도 하늘이 아니니라. 하늘은 형태와 바탕됨이 없고, 끝도 없으며, 위와 아래, 동서남북의사방도 없으며, 텅 비어서 어디에나 있지 않은 곳이 없고, 무엇이나 포용하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제 2 장
신훈-신(하느님)에 대한 가르침
하느님은 위 없는 첫자리에 계시사 큰 덕과 큰 지혜와 큰 힘을 지니시어 하늘을 내시고, 무수한 우주를 주재하시며, 만물을 창조하시되, 티끌만한 것도 빠뜨리심이 없으며, 밝고도 신령하시어 감히 이름지어 헤아릴 길이 없느니라. 소리와 기운으로 원하고 빌면 반드시 친히 모습을 드러내시니, 저마다 지닌 본성에서 씨알을 구하라. 머릿골 속에 내려와 있느니라.
제 3 장
천궁훈-하늘 궁전에 대한 가르침
하늘은 하느님의 나라이니, 하늘 궁전이 있어서 온갖 착함으로써 궁전으로 오르는 섬돌을 삼고, 온갖 덕으로써 들어가는 문을 삼았느니라, 하느님이 계신 곳에는 뭇 신령과 모든 밝은 이들이 모시고 있으며, 그곳은 크게 복되고 상서로운 곳이요, 지극히 빛나는 곳이라.오로지 자성을 통하고 모든 공적을 이룬 사람이라야, 이 하늘 궁전에 나아가서 영원히 쾌락을 얻을지니라.
제 4 장
세계훈
너희들은 총총히 널린 저 별들을 보라. 그 수가 다함이 없으며, 크고 작고 밝고 어둡고 괴롭고 즐거움이 같지 않느니라. 한 분이신 하느님께서 이 모든 누리를 만드시고, 그 가운데 해누리를 맡은 사자를 시켜 칠백 누리를 거느리게 하시니, 너희 땅이 스스로 큰 듯이 보이나, 작은 한 알의 누리이니라.속불이 울리어서 바다로 변화하고 육지가 되어, 마침내 모든 허울을 이루었느니라. 한얼님께서 김을 불어 밑까지 싸시고 햇빛과 열로 쪼이시니, 기고 날고 탈바꿈하고 헤엄질치고 심는 온갖 동식물들이 많이 불었느니라.
제 5 장
진리훈
사람과 만물이 다같이 세 가지 참함을 받나니, 이는 성품과 목숨과 정기라. 사람은 그것을 온전히 받으나 만물은 치우치게 받느니라.참성품은 착함도 약함도 없으니, 이는 상철(으뜸 밝은이)로서 두루 통하며, 참목숨은 맑음도 흐림도 없으니 중철(중간 밝은이)로서 다 알며, 참정기는 두텁고 얇은 것이 없으니 하철(아래 밝은이)로서 잘 보전하니 참함을 돌이키면 다같이 하느님이 될지니라.사람들은 아득한 땅에 태어나면서부터 세 가지 망령됨이 뿌리 박나니, 이는 마음과 기운과 몸이니라. 마음은 성품에 의지한 것으로서 착함과 악함이 있으니, 착하면 복되고 악하면 화가 되며, 기운은 목숨에 의지한 것으로서 맑고 흐림이 있으니 맑으면 오래 살고 흐리면 일찍 죽으며, 몸은 정기에 의지한 것으로서 두텁고 엷음이 있으니, 후하면 귀하고 박하면 천하게 되느니라.참함과 망령됨이 서로 맞서 세 길을 지으니, 이는 느낌과 숨쉼과 부딪침이다. 이것이 굴러 다시 열여덟 경계를 이루나니라. 느낌에는 기쁨, 두려움, 슬픔, 성냄, 탐냄, 싫음이오, 숨쉼에는 향내, 술내, 추위, 더위, 마름, 축축함이요, 부딪침에는 소리, 빛깔, 냄새, 맛, 음탕, 닿음이니라.뭇 사람들은 착하고 악함과 맑고 흐림과 두텁고 엷음을 서로 섞어서 경계의 길을 따라 함부로 달리다가 나고 자라고 늙고 병들고 죽는 괴로움에 떨어지고 말지마는 밝은이는 느낌을 그치고, 숨쉬는 것을 고르게 하며, 부딪침을 금하여 한뜻으로 되어 가서 망령됨을 돌이키니, 곧 참이라. 크게 하느님의 기틀을 발하나니 자성을 통하고 공적을 완전히 이룬다 함이 바로 이것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