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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 7월 성곽과 궁실을 지었다.
6년 오이(烏伊)와 부분노(扶芬奴)에 명하여 태백산 동남에 있는 행인국(荇人國)을 쳐서 그 땅을 취하여 성읍으로 삼았다.
11년 갑오(BC 27) 10월 북옥저(北沃沮)를 정벌하여 이를 멸망시켰다.
12년 졸본(卒本)에서 눌현(訥見)(9)으로 도읍을 옮겼다.
14년 8월 왕모 유화가 동부여에서 승하하자 그나라 왕 금와는 태후 예로써 장사를 지내고 드디어 신묘까지 건립했다.
19년 4월 왕자 유리(琉璃)가 부여에서 그 모친과 같이 도망해 왔으므로 태자로 세웠다. 9월에 왕이 승하하니 용산(龍山)에 장사지냈다.
2대 유리왕(琉璃王) - 37년간 재위
1년(BC19) 이름은 유리(類利) 혹은 유류(孺留)로 주몽의 원자이고 모친은 예(禮)씨이다.
2년 7월 다물후(多勿侯) 송양(松壤)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였다.
14년 정월 부여왕 대소(帶素)가 사신을 보내어 수교를 하고 서로 질자(質子)를 교환하자고 청하였다. 태자 도절(都切)이 가지 않았다. 대소는 11월 군사 5만으로 졸본(卒本)을 침입했으나 많은 눈으로 군사가 만이 죽어 돌아갔다.
22년 눌현(訥見)으로부터 국내위나암성(國內尉那巖城)(10)으로 옮겼으니 또한 황성이라고도 한다. 성안에 환도산이 있는데 산 위에 성을 쌓고 일이 있으면 여기에 머물렀다.
23년(BC4) 왕자 해명(海明)(11)을 세워 태자로 책봉하였다.
31년 한의 왕망(王莽)이 우리의 군사로 흉노(匈奴)를 침략했으나, 군사가 도망하니, 우리장수 연비(延丕)(12)를 죽이고 우리의 변경을 자주 침략하였다.
32년 11월 부여에서 군사를 일으켜 침략하자 왕자 무휼(無恤)이 나아가 부여군을 섬멸하였다.
33년 왕자 무휼을 태자로 세웠다. 오이, 마리에 명하여 군사 2만을 이끌고 서쪽의 양맥(梁貊)을 쳐서 멸하고 한나라의 고구려현을 습격하여 취하였다.
37년 10월 두곡(豆谷)의 별궁에서 승하하여 두곡(豆谷) 동원(東原)에 장사지냈다.
10) 국내위나암성(國內尉那巖城) : 요원시내의 용수산산성(龍首山山城)으로 국내성(國內城)과는 다른 것이다.
3대 대무신왕(大武神王) - 26년간 재위
1년(AD18) 주류왕(朱留王)이라고도 하며 모친은 송(松)씨로 다물국 송양의 딸이다.
2년 백제민 1천여호가 항복해 왔다.
5년 2월 부여국 남쪽을 쳐서 왕을 죽였으나 이롭지 못하여 돌아왔다. 4월 대소(帶素)의 아우가 갈사수(曷思水)가에 이르러 나라를 세우고 왕이 되었다. 7월에 부여왕의 종제(從弟)가 옛도읍의 백성 만여 명을 데리고 고구려(高句麗)에 항복하자 고구려가 봉하여 왕을 삼고 연나부(椽那部)(13)에 안치하였다. 그리고 등에 얽힌 무늬가 있다하여 낙(絡)(14)씨로 성을 내렸다.
9년(AD26) 10월 개마국(蓋馬國)을 쳐서 그 왕을 죽이고 백성을 위로하였다. 12월 구다국왕(句茶國王)이 나라를 들어 항복해 왔다.
11년 한의 요동태수(遼東太守)가 침략했으나 성을 얻지 못하고 돌아갔다.
15년 왕자 호동(好童)(15)으로 인하여 옥저낙랑(沃沮樂浪)(16)을 기습하자 왕 최리(崔理)가 항복을 하였다. 12월 왕자 해우(解憂)가 태자에 봉해졌다.
20(AD37)년 왕이 낙랑(樂浪)(17)을 기습하여 멸하였으니 동압록 이남이 우리에 속했는데 해성(海城)(18)의 남쪽, 바다근처의 여러 성들만은 아직 항복하지 않았다.
27년 9월 광무제가 살수(薩水)(19)까지 이르는 침략이 있었다. 이후로 살수 이남은 한나라에 다시 속했다. 10월 왕이 승하하여 대수촌원(大獸村原)에 장사하였다.
4대 민중왕(閔中王) - 4년간 재위
1년(AD44) 이름은 해색주(解色朱)이고 대무신왕의 아우이다. 태자가 아직 어려 나라사람이 왕으로 추대하였다.
5년 왕이 승하하자 민중원(閔中原)의 석굴에 장사지냈다.
5대 모본왕(慕本王) - 5년간 재위
1년(AD48) 이름은 해우(解憂)이며 대무신왕의 원자이다. 왕자 익(翊)을 태자로 봉했다.
2년 한의 북평(北平 - 당산), 어양(漁陽 - 북경시), 상곡(上谷 - 창평), 태원(太原 - 산서성 태원)을 습격했으나 요동태수 채동(蔡 )이 신의로써 대우하여 다시 화친하였다.
6년 왕이 포악하고 어질지 못하여 11월 두로(杜魯)가 임금을 시해하였다. 모본원(慕本原)에 장사하였다.
6대 태조대왕(太祖大王) -93년간 재위
1년(AD53) 이름은 궁(宮)이며 유리왕(琉璃王)의 아들인 고추가(古鄒加) 재사(再思)의 아들이다. 모태후(母太后)는 부여 사람이다. 태자가 어리석어 사람들이 왕으로 추대하였다. 왕의 나이가 7세인 까닭에 모태후가 발을 드리우고 정사를 보았다.
3년 요서(遼西)에 10성을 쌓아 한군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4년 7월 동옥저(東沃沮)를 쳐서 토지와 성읍을 취하였다. 그 지경이 동으로는 창해에 이르고 남으로는 살수(薩水)에 이르렀다.
16년(AD68) 8월 갈사왕(曷思王)의 손자 도두(都頭)가 나라를 들어 항복하자 그를 우태(于台)에 명하였다.
46년 왕은 동쪽의 책성(柵城)에 행차하였다.
53년(AD105) 왕이 군사를 보내어 요동(遼東)에 쳐들어 가 6현을 탈취하였으나 요동태수 경기(耿 )에게 결국 패하였다.
66년 예맥(濊貊)과 같이 한나라의 현도(玄 )를 쳐서 화려성(華麗城)을 공취하였다.
69년 한의 침략이 있었으나 왕의 아우 수성(遂成)이 이를 막았다. 12월 마한(馬韓), 예맥(濊貊)의 1만여명의 기병을 이끌고 현도성(玄 城)을 포위하자 부여왕이 아들을 파견하여 한의 군사와 더불어 대항하니 패하였다.
94년 8월 서안평현(西安平縣)을 습격하여 대방령(帶方令)을 죽이고 낙랑태수의 처자를 사로잡아 왔다. 11월 왕이 늙어 곧 동복 동생 수성(遂成)에게 왕위를 선위(禪位)하고 별궁으로 물러났다.
7대 차대왕(次大王) - 19년간 재위
1년(AD146) 이름은 수성(遂成)으로 태조대왕(太祖大王)의 동복동생이다. 용맹하고 위엄은 있으나 어질지 못하였다. 태조께서 양위(讓位)하여 76세에 즉위했다.
3년 4월 왕이 태조대왕의 원자 막근(莫勤)을 살해하자, 그 아우 막덕(莫德)이 자살하였다.
20년 3월 태조대왕이 별궁에서 119세로 승하했다. 10월 명림답부(明臨答夫)가 왕을 시해하였다.
8대 신대왕(新大王) - 14년간 재위
1년(AD165) 이름은 백고(伯固) 혹은 백구(伯句)이며 태조대왕의 막내 아우이다. 즉위나이 77세 였다.
2년 명림답부(明臨答夫)를 국상에 삼았다.
8년 한의 대군이 향도를 앞세우고 쳐들어 왔으나 명림답부가 이를 물리쳤다.
12년 왕자 남무(男武)를 태자로 세웠다.
15년 9월 명립답부가 113세로 죽었다. 12월 왕이 승하해서 고국곡(故國谷)에 장사했다.
9대 고국천왕(故國川王) - 18년간 재위
1년(AD179) 이름은 남무(男武)이며 신대왕 백고의 둘째 아들이다. 장자 발기( 奇)가 왕이 되지 못함을 분하게 여겨 소노가(消奴加)와 함께 3만여 가구를 거느리고 공손탁(公孫度)에게 항복하고 비류수(沸流水) 상류에 거주하였다.
2년 부인 우(于)씨를 왕후(王后)로 세웠다. 왕후는 제나부(提那部) 우소(于素)의 딸이다.
6년 요동태수가 침입하여 왕자 계수( 須)를 보냈으나 패하자 친히 나아가 좌원(坐原)에서 섬멸하였다.
13년(AD191) 동부의 안류(晏留)가 을파소(乙巴素)(20)를 천거하니 재상으로 임명하였다.
19년 왕이 승하하여 고국천원(故國川原)에 장사하였다.
10대 산상왕(山上王) - 30년간 재위
1년(AD197) 이름은 연우(延憂) 일명 위궁(位宮)이며 고국천왕의 아우이다. 고국천왕의 형인 발기( 奇)가 왕이 되지 못함을 분하게 여기어 요동태수 공손탁(公孫度)의 군사를 빌려 쳐들어 오니 왕의 아우 계수( 須)가 나아가 막으니, 발기가 패하여 자결하였다. 그러므로 비류수가를 다시 회복하였다. 왕은 다시 우(于)씨를 왕후로 삼았다.
2년 환도성(丸都城)(21)을 축조하였다.
7년 8월 을파소(乙巴素)가 죽고 고우루(高優婁)를 국상(國相)에 명했다.
13년 9월 주통촌(酒桶村)의 여인과 관계하여 아들을 낳으니 이름을 교체(郊 )라 하였다. 10월 도읍을 환도(丸都)로 옮기었다.
17년 교체(郊 )를 태자로 봉했다.
21년(AD217) 8월 한의 평주(平州) 사람 하요(夏瑤)가 백성 1천여 호를 이끌고 와서 책성(柵城)에 살게 했다.
31년 5월 왕이 승하하여 산상릉(山上陵)에 장사하였다.
11대 동천왕(東川王) - 21년간 재위
1년(AD227) 동양(東襄)이라고도 하며 이름은 우위거(憂位居) 어릴때는 교체(郊 )이다.
2년 졸본(卒本)에서 시조묘(始祖廟)에 제사하였다. 3월 우씨를 왕태후(王太后)로 삼았다.
10년 2월 오(吳)나라 왕 손권(孫權)이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하였다. 7월 그 사신을 죽이고 목을 위(魏)나라로 보냈다.
16년(AD242) 요동 서안평(西安平)을 공격하여 깨뜨렸다.
19년 10월 신라(新羅)의 북변을 침범하였다.
20년 8월 위나라가 유주자사(幽州刺史) 관구검( 丘儉)에게 1만을 주어 현도(玄 )를 거쳐서 침략해 왔다. 처음 싸움에 이롭더니 나중 패하여 10월 환도성(丸都城)을 빼앗기고 남옥저(南沃沮)(22)로 피하였다. 밀우(密友), 유유(紐由)의 계책과 희생으로 위(魏)군을 물리치니 위군은 낙랑(樂浪)으로 도망하여 물러갔다.
21년 2월 환도성(丸都城)을 복구할 수 없어 평양성(平壤城)(23)을 쌓고 백성과 종묘사직을 옮겼다.
22년 2월 신라와 화친하고 9월 왕이 승하하자 시원(柴原)에 장사지냈다.
12대 중천왕(中川王) - 22년간 재위
1년(AD248) 중양(中襄)이라고도 하며 이름은 연불(然弗)이며 동천왕의 아들이다. 10월 연( )씨를 왕후로 삼고, 11월 왕제 예물(預物), 사구(奢句)등이 모반하다 죽었다.
7년 4월 국상 명림어수(明臨於漱)가 죽자 비류패자(沸流沛者) 음우(陰友)를 국상에 명하였다.
8년 왕자 약노(藥盧)를 태자로 세웠다.
23년 10월 왕이 승하하자 중천원(中川原)에 장사 하였다.
13대 서천왕(西川王) - 22년간 재위
1년(AD270) 서양(西襄)이라고도 하며 이름은 약노(藥盧) 또는 약우(若友)로 중천왕의 둘째 아들이다.
2년 서부(西部) 대사자(大使者) 우수(于漱)의 딸을 왕후(王后)로 삼았다.
11년(AD280) 10월 숙신(肅愼)이 침입하여 변방의 백성을 살해하자 왕이 달가(達賈)로 하여금 적군을 평정케 하였다. 단로성(檀盧城)을 빼앗아 추장을 죽이고 그 민가 600여 호를 부여 남쪽의 오천(烏川) 땅으로 옮겨 살게 하였다. 이때 큰 부락 17개 소를 항복 시키자 달가(達賈)를 안국군(安國君)에 봉하고 양맥(梁貊), 숙신(肅愼)(24)을 통괄하게 하였다.
23년 왕이 승하하자 서천원(西川原)에 장사하였다.
14대 봉상왕(烽上王) - 8년간 재위
1년(AD292) 일명 치갈(雉葛)이며 이름은 상부(相夫) 또는 삽시루( 矢婁)로 서천왕의 태자이다. 3월 왕이 달가(達賈)를 의심하여 죽였다.
2년 8월 연(燕)나라 모용외(慕容 )가 침략하자 신성(新城)(25)의 재상 북부소형(北部小兄) 고노자(高奴子)가 이를 물리쳤다. 9월 왕제(王弟) 돌고( 固)를 모반한다 하여 죄없이 죽였다.
5년 모용외가 침입하니 고노자를 신성의 태수로 삼았다.
9년 창조리(倉助利)가 군신들과 모의하여 왕을 폐하고 을불(乙弗)을 왕으로 맞이하였다. 왕은 두 왕자와 자살하였다. 봉산원(烽山原)에 장사하였다.
15대 미천왕(美川王) - 31년간 재위
1년(AD300) 일명 호양왕(好壤王)이며 이름은 을불(乙弗) 혹은 우불(憂弗)이며 서천왕의 아들 고추가(古鄒加) 돌고( 固)의 아들이다.
3년 9월 군사 3만으로 현도군을 치고 8천을 생포하여 평양으로 옮겼다.
12년(AD311) 8월 군사를 보내어 요동 서안평을 쳤다.
14년 10월 낙랑군을 공격하였다.
15년 정월 왕자 사유(斯由)를 태자로 삼았다. 남쪽의 대방군을 공략하였다.
20년 진(晋)나라 평주자사(平州刺史) 최비(崔毖)가 도망왔다. 이를 핑계로 모용외가 하성(河城)을 침범하였다.
21년(AD320) 12월 왕은 군사를 파견하여 요동을 공략하였다.
31년 사신을 후조(後趙) 석륵(石勒)에 보내어 고시( 矢)를 전했다.
32년 2월 왕이 승하하자 미천원(美川原)에 장사하였다.
16대 고국원왕(故國原王) - 40년간 재위
1년(AD331) 일명 국강상왕(國岡上王)이며 이름은 사유(斯由) 혹은 교(釗)이다.
4년 평양성(平壤城)을 증축하였다.
9년 연(燕)나라왕 모용황(慕容 )이 신성까지 침공하자 화친하니 돌아갔다.
12년(AD342) 2월 환도성(丸都城)(26)을 수리하고 국내성(國內城)(27)을 쌓았다. 8월 수도를 환도성으로 옮겼다. 11월 연의 모용황이 쳐들어와 미천왕 묘를 파해치고 5만여호와 왕모를 포로로하고 환도성을 불태운 후 돌아갔다.
13년 7월 평양 동쪽 황성(黃城)(28)으로 이주하였다.
15년 10월 연왕이 모용각(慕容恪)으로 하여금 침략하게 하여 남소(南蘇)를 빼앗았다.
25년(AD355) 왕자 구부(丘夫)를 왕태자로 삼았다. 12월 태자를 볼모로 연(燕)에 보내고 왕모(王母)를 귀국시켰다.
39년 9월 군사 2만으로 백제를 정벌하려 하였으나 치양(雉壤)(29)에서 싸워 패하였다.
41년 10월 백제왕(근초고왕)이 3만으로 침입하여 평양성(平壤城)(30)을 공격하여 왕이 맞서 싸우니 10월 23일 화살에 맞아 승하하니 고국원(故國原)에 장사하였다.
17대 소수림왕(小獸林王) - 13년간 재위
1년(AD371) 일명 소해주유왕(小解朱留王)이며 이름은 구부(丘夫)로 고국원왕의 아들이다.
2년 6월 진(秦)나라왕 부견(符堅)이 사신과 중 순도(順道)를 보내어 불상과 경문(經文)을 전해 주었다. 왕은 태학(太學)을 설치하여 자제를 교육하였다.
3년 율령(律令)을 반포하였다.
5년 처음으로 초문사(肖門寺)를 창건하고 순도를 머무르게 하고 이불란사(伊弗蘭寺)를 세워 아도(阿道)를 머물게 하였다. 7월 백제 땅 수곡성(水谷城)(31)을 쳤다.
7년(AD377) 백제(百濟)가 3만으로 평양성을 침공하였다. 11월 왕이 직접 백제를 쳤다.
8년 9월 거란(契丹)이 북변을 침공하여 8부락을 함락시켰다.
14년 11월 왕이 승하하자 소수림(小獸林)에 장사 하였다.
18대 고국양왕(故國壤王) - 7년간 재위
1년(AD384) 이름은 이련(伊連) 혹은 지지(只支)이며 소수림왕의 아우이다.
2년 6월 군사 4만으로 연(燕) 대방(帶方)의 용성(龍城 - 朝陽市)을 습격하여 요동, 현도(32)를 함락하여 남녀 1만을 포로로 잡았다. 11월 연의 모용농(慕容農)이 침공하여 요동(遼東)과 현도(玄 )를 회복했다.
3년 왕자 담덕(談德)을 태자로 세웠다.
7년 백제의 달솔(達率) 진가모(眞嘉謀)가 도압성(都押城)(33)을 쳐부수고 남녀 2백명을 포로로 하고 돌아갔다.
9년 신라(新羅)와 수교를 맺고 3월에 불법을 믿도록 하교하고 종묘를 보수하였다. 5월 왕이 승하하자 고국양(故國壤)에 장사하였다.
19대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 - 22년간 재위
1년(AD392)(34) 이름은 담덕(談德)으로 고국양왕의 아들이다. 7월 남쪽의 백제를 쳐서 10성을 빼앗고, 9월에 북쪽의 거란(契丹)을 정복하고, 10월에 백제의 관미성(關彌城)(35)을 함락시켰다.
2년 평양에 9사를 창건하였다.
4년 8월 백제와 패수(浿水)(36) 가에서 싸워 격파하고 8천을 포로로 잡았다.
6년 왕이 친히 백제를 토벌하여 여러성을 치고 백제 왕성을 점령하였으나, 백제왕은 탈출하여 항복하지 않고 끝까지 싸우려 하였다. 왕이 진노하여 아리수(阿利水)(37)를 건너고, 장수를 보내어 백제 임시수도인 성횡(城橫)-혹은 악성(岳城)-을 핍박하니 마침내 백제왕이 항복하고 영원히 변방의 신하가 될 것을 맹세하였다.
8년 원수를 보내어 숙신(肅愼)의 터전(38)을 돌아보게 하였는데, 가태라곡(加太羅谷)(39) 남녀 삼백명의 포로를 얻어 돌아왔으며 이때부터 숙신도 조공하고 고구려를 섬겼다.
9년 연왕 모용성(慕容盛)이 3만으로 침입하여 신성(新城), 남소(南蘇) 두성을 취하였다. 백제가 서약을 배반하고 왜적과 사통하여 신라(新羅)를 공격하니 신라왕이 사자를 보내 구원을 청하였다.
10년(AD401) 왕은 보기병 오만 병사를 보내어 신라를 구원토록 하였는데 종남거성(從男居城)을 지나 신라도읍에 이르러 왜적을 패퇴시켰다. 도망가는 왜구를 따라서 급히 추격하여 임나가라(任那加羅)(40)의 발성(拔城)까지 쫓아가니 임나가라는 항복하였다. 이후 고구려 본토 출신 안라인(安羅人)(41) 사람으로 지키게 하고 돌아왔다.
11년 왕이 군사를 보내어 숙군성(宿軍城)(42)을 공격하자 연의 모용귀(慕容歸)가 도망했다.
14(AD405)년 연이 요동성에 침입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17년 3월 북연에 사신을 보내어 종족의 은의를 배풀자 북연왕(北燕王) 고운(高雲)(43)은 시어사(侍御史) 이발(李拔)을 보내어 보답했다.
18년 왕자 거련(巨連)을 태자에 봉하고 7월 동쪽지방에 독산성(禿山城)등 6성을 축조하고 평양 민가를 옮겼다.
22년 10월 왕이 승하하였다.
20세 장수왕(長壽王) - 78년간 재위
1년(AD413) 이름은 거련(巨連)이며 광개토대왕의 아들이다.
15년(AD427) 도읍을 평양(平壤)(44)으로 옮겼다.
24년 위(魏)가 연(燕)을 공격하니 왕이 장군 갈로(葛盧), 맹광(孟光)을 보내 연을 도왔다.
28년 신라사람이 변방을 장수를 죽이니 왕이 분노하여 군사를 내니 신라 눌지왕(訥祗王)이 사신을 통해 사과했다.
56년(AD468) 말갈 군사 1만을 내어 신라국 실직주성(悉直州城)을 취하였다.
63년 3만의 군사로 백제의 한성(漢城)(45)을 함락하고 왕 부여경(夫餘慶 - 개로왕)을 살해한 후 8천을 포로로 하여 돌아왔다.
79년(AD491) 12월 왕이 승하하였는데 나이가 98세 였다.
21세 문자명왕(文咨明王) - 28년간 재위
1년(AD492) 일명 명치호왕(明治好王)으로 이름은 나운(羅雲), 장수왕의 손자이다. 부친은 고추대가(古雛大加)의 벼슬을 한 조다(助多)이다. 부친이 일찍 죽어 궁중에서 키우고 대손으로 정해졌다.
3년 2월 부여왕(夫餘王)과 그 처자가 나라를 바치며 항복해 왔다.
4년 백제의 치양성(雉壤城)(46)을 치자 신라가 백제를 도와 물러났다.
6년 신라의 우산성(牛山城)(47)을 공취하였다.
7년 정월 왕자 흥안(興安)을 태자에 세웠다.
12년(AD503) 백제(百濟) 달솔(達率) 우영(優永)이 5천의 군사로 수곡성(水谷城)(48)을 침입했다.
16년 고노(高老)에게 말갈(靺鞨)과 도모하여 백제의 한성을 치게 하였으나 이롭지 못해 물러났다.
28년 왕이 승하하였다.
22세 안장왕(安藏王) - 12년간 재위
1년(AD519) 이름은 흥안(興安)이며 문자명왕의 장자이다.
11년 백제와 오곡(五谷-황해도 서흥군)의 싸움에서 이기고 2천여명을 참살하였다.
13년 5월 왕이 승하하였다.
23세 안원왕(安原王) - 14년간 재위
1년(AD531) 이름은 보연(寶延)으로 안장왕의 아우다.
3년 왕자 평성(平成)을 태자로 삼았다.
10년 백제가 우산성(牛山城)을 포위하자 군사를 내어 이를 물리쳤다.
15년 3월 왕이 승하하였다.
24세 양원왕(陽原王) - 14년간 재위
1년(AD545) 일명 양강상호왕(陽崗上好王)으로 이름은 평성(平成)이며 안원왕의 장자이다.
3년 7월 백암성(白巖城)을 다시 축조하고 신성(新城)도 보수하였다.
6년 정월 백제가 도살성(道薩城)(49)을 취하였다. 3월 백제의 금현성(金峴城)(50)을 치자 신라가 이 틈을 타서 2개의 성을 공취하였다.
7년 9월 돌궐(突厥)이 침략하였으나 장군 고흘(高紇)이 이를 물리쳤다. 이 기회를 이용 신라가 10성을 공취하였다.
8년 장안성(長安城)(51)을 축조하였다.
15년 3월 왕이 승하하였다.
25세 평원왕(平原王) - 31년간 재위
1년(AD559) 일명 평강상호왕(平崗上好王)으로 이름은 양성(陽成)이고 양원왕의 장자이다.
28년(AD586) 도읍을 장안성(長安城)으로 옮겼다.
32년 10월 왕이 승하하였다.
26세 영양왕( 陽王) - 28년간 재위
1년(AD590) 일명 평양왕(平陽王)이며 이름은 원(元) 또는 대원(大元)이며 평원왕의 장자이다.
9년 말갈군사 1만으로 요서(遼西)를 침공하였으나 영주총관(營州摠管) 위충(韋沖)이 기습하여 퇴군하였다. 이에 수(隋)의 문제(文帝)가 왕세적(王世績)을 원수로 하여 수.육군 30만을 거느리고 고구려를 침략하였으나 강이식에게 참패하고 물러갔다.
11년(AD600) 대학박사(大學博士) 이문진(李文眞)이 옛 역사 유기(留記) 1백권을 정리하여 신집(新集) 5권을 만들었다.
14년 장군 고승(高勝)을 보내어 신라의 북한산성(北漢山城)(52)을 공격하였는데 신라왕이 직접 도우니 후퇴하였다.
19년 2월 신라의 북변을 기습하고 4월 신라의 우명산성(牛鳴山城)을 빼앗았다.
23년(AD612) 정월 수(隋)의 양제(煬帝)는 부왕 문제(文帝)의 원한을 풀고자 고구려를 침략하니 수.육군 1백13만 3천 8백이고 수송자만도 이 배가 되었다. 그러나 왕자 건무(建武), 도원수(都元帥) 강이식(姜以式)과 막리지(莫離支) 을지문덕(乙支文德)(53)의 활약으로 적은 살수(薩水)(54)에서 참패하여 돌아갔다.
24년 4월 수 양제가 다시 요수(療水)를 건너 침략하였으나, 요동성에서 굳게 항쟁하니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
25년 다시 수(隋)의 침략이 있었지만 왕이 화친하여 돌아갔다.
29년 9월 왕이 승하하였다.
27세 영류왕(營留王) - 24년간 재위
1년(AD618) 이름은 건무(建武) 혹은 성(成)이며 영양왕의 이복 동생이다.
7년 당에서 도교(道敎)의 법을 가져왔다.
12년 신라장군 김유신(金庾信)이 동변의 낭비성(娘臂城)을 침공하여 파하였다.
14년(AD631) 2월 동북의 부여성(夫餘城)에서 동남의 바다에 이르는 1천여리의 장성(55)을 16년만에 준공하였다.
25년 10월 연개소문(淵蓋蘇文)(56)이 왕을 시해하였다
28세 보장왕(寶藏王) - 26년간 재위
1년(AD642) 이름은 장(臧) 혹은 보장(寶藏)이며 건무왕의 아우 대양왕(大陽王)의 아들로서 연개소문(淵蓋蘇文)이 왕을 시해하고 왕위를 계승시켰다.
4년 당(唐) 태종(太宗)이 군사를 내어 고구려를 침략하니 요동성(遼東城)(57)이 무너졌으나 안시성(安市城)(58)에 이르러 성주(城主) 양만춘(楊萬春)이 굳게 항쟁하여 당군(唐軍)을 물리치니 태종은 한쪽 눈을 잃고 물러났다.
6년 당의 이세적이 요하를 건너 침공하니 우리성들이 이에 대항하였다.
13년(AD654) 10월 장군 안고(安固)로 하여금 말갈(靺鞨)과 함께 돌궐(突厥)을 쳤으나 신성(新城)에서 대패하였다.
14년 정월 아군이 백제, 말갈과 더불어 신라 북변의 33성을 공취하니 신라왕 김춘추(金春秋)가 당에 원병을 청하였다. 2월 당 고종(高宗)이 정명진(程名振)과 소정방(蘇定方)을 보내 공격하였다.
19년 11월 당의 설필하력(契苾何力), 소정방(蘇定方), 유백영(劉佰英), 정명진(程名振)이 길을 나누어 쳐들어 왔다.
20년 정월 당이 35군대(軍隊)를 수륙으로 나누어 침공하였다. 8월 소정방이 평양성(平壤城)(59)을 포위하였다. 9월 연개소문의 아들 남생(男生)이 정병 수만으로 압록수(鴨 水)(60)를 지켰으나 당의 설필하력(契苾何力)이 이를 물리치고 들어오니 아군 3만의 희생을 내고 남생은 겨우 목숨을 건졌다.
21년 정월 당의 방효태(龐孝泰)가 연개소문과 사수(蛇水)(61)에서 싸웠으나 전군이 몰살하였다. 소정방은 평양의 포위를 풀고 물러갔다.
25년 연개소문이 죽자 장남 남생이 막리지에 올랐다. 남생과 그 동생 남건(男建), 남산(男産)과 반목하여 남건이 남생을 붙잡아 가두고 남건이 스스로 막리지가 되자 남생이 국내성(國內城)으로 도망후 당으로 달아났다.
27년(AD668) 2월 부여성(夫餘城)이 함락되었다. 9월 평양성(平壤城)이 함락되어 왕과 함께 남건이 잡혔다.
이로써 고구려는 망하여 보장왕(寶藏王)의 연호는 없으며, 오직 원수 당나라 고종의 연호를 쓰게 되었다.
당 총장 2년(AD669) 왕의 서자 안승(安勝)이 4천여 호를 거느리고 신라에 투항하였다.
당 함형 원년(AD670) 4월 검모잠(劍牟岑)은 고구려를 다시 일으키고자 당에 모반하고 왕의 외손 안순(安舜)을 임금에 세우려고 하자 당 고종이 이에 군사를 내니 검모잠을 죽이고 신라로 도망하였다.
당 의봉 2년(AD677) 고구려의 남은 장수들이 각지에서 항쟁하자 항복한 보장왕을 조선왕에 봉하여 요동에 보내자 은밀히 말갈과 통하여 다시 일어서려 하니, 공주로 소환되어 당 영순(永淳)초에 승하하니 힐리( 利) 묘의 왼편에 장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