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지식교육의 내용 - 통합과 경험의 원리>
『동몽선습』에서는 지식과 행동이 별개일 수 없음을 강조하고, 지(知)는 곧 행(行)에 그 궁극적인 목적이 있음을 시사하면서, 학문은 몸과 마음의 실천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통합의 원리를 강조하고 있다. 『격몽요결』에서도 지행일치(知行一致)의 교육원리를 강조하고 있는데 제시해보면 다음과 같다. 학문이란 무엇이냐? 이것은 다만 남의 아비가 된 자는 그 아들을 사랑할 것, 자식된 자는 부모에게 효도할 것, 남의 신하된 자는 그 임금에게 충성을 다할 것, 부부간에는 마땅히 분별이 있어야 할 것, 형제간에는 의당 우애가 있어야 할 것, 나이 젊은 사람은 어른에게 공손히 해야 할 것, 친구 사이에는 믿음이 있어야 할 것 등이다. 이런 일들이 날마다 행하는 행동 사이에서 모두 마땅한 것을 얻어서 행해야 할 것이고, 공연히 마음을 현묘한 곳으로 달려서 무슨 이상한 효과가 나타나기를 넘겨다보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지금 사람들은 이런 학문이 사람들의 날마다 행동하는 데에 있음을 알지 못하고 공연히 이것은 까마득히 높고 멀어서 보통 사람으로서는 행하지 못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이 학문을 자기는 하지 못하고 남에게 밀어 맡겨 버리고서 자신은 스스로 이것을 만족하게 여기고 있으니 어찌 슬픈 일이 아니겠는가? <서문(序文)> 人生斯世에 非學問이면 無以爲人이니 所謂學問者는 亦非異常別件物事也라 只是爲父當慈, 爲子當孝, 爲臣當忠, 爲夫婦當別, 爲兄弟當友, 爲少者當敬長, 爲朋友當有信이니 皆於日用動靜之間에 隨事各得其當而已요 非馳心玄妙하여 希 奇效者也라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학문이 아니면 사람 구실 하면서 살아갈 수 없다. 이른바 학문이라고 하는 것은 정상에서 벗어나거나 <일상 생활과 벗어나> 별도로 존재하는 일이 아니다. 단지 아버지가 되어서는 마땅히 자식을 사랑하고 자식이 되어서는 마땅히 부모를 사랑하며 신하가 되어서는 마땅히 임금에게 충성하며 부부 사이에서는 마땅히 내외를 구별하고 형제간에는 마땅히 서로 우애하고 어린 사람이 되어서는 마땅히 어른을 공경하고 친구사이에는 마땅히 신의를 지키는 것이므로 모두 일상 생활 속에서 일에 따라 각각 그 마땅함을 얻는 것일 뿐이요 현묘(玄妙)한 곳에 관심을 집중시켜서 기이한 효력을 바라는 것이 아니다.
但不學之人은 心地茅塞하고 識見茫昧라 故로 必須讀書窮理하여 以明當行之路然後에 造詣得正而踐履得中矣리라 今人은 不知學問이 在於日用하고 而妄意高遠難行이라 故로 推與別人하고 自安暴棄하니 豈不可哀也哉아
다만 배우지 못한 사람은 마음이 욕심으로 가득 차 식견이 어둡게 된다. 그 때문에 반드시 독서를 통해 이치를 궁구함으로써 마땅히 행해야 할 도리를 밝힌 뒤에 조예가 올바름을 얻어서 실천함이 중도에 부합될 것이다. 요즘 사람들은 학문이 일상 생활 속에 있음을 알지 못하고 제멋대로 고원(高遠)해서 실천하기 어려운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때문에 <학문하는 일을> 다른 사람에게 미루어 버리고 스스로 포기함을 편안히 여기니 어찌 슬퍼할 만한 일이 아니겠는가!
余定居海山之陽할새 有一二學徒 相從問學하니 余慙無以爲師요 而且恐初學이 不知向方하고 且無堅固之志而泛泛請益이면 則彼此無補하고 反貽人譏라 故로 略書一冊子하여 粗敍立心飭躬奉親接物之方하고 名曰擊蒙要訣이라하여 欲使學徒觀此하고 洗心立脚하여 當日下功하고 而余亦久患因循하여 欲以自警省焉하노라 丁丑季冬에 德水李珥는 書하노라 내가 해산(海山 : 海州)의 남쪽에 거처를 정하자, 한 두 명의 학도(學徒)들이 서로 따라와 배우기를 요청하니, 내가 스승이 될 만한 자질이 없는 것이 부끄러울 뿐만 아니라 초학자(初學者)들이 학문의 올바른 방향을 알지 못하고 또 견고한 뜻없이 대충대충 배우고서 더 가르쳐주기를 요구하면 피차간에 도움됨이 없고 도리어 남의 비웃음을 살까 두려웠다. 그 때문에 간략하게 책 한 권을 써서 뜻을 세우고, 몸을 가다듬고, 어버이를 봉양하고, 사람을 대하는 방법을 거칠게나마 서술하여 이름을 《격몽요결(擊蒙要訣)》이라고 하여 학도들이 이를 보고 마음을 깨끗하게 씻고 새롭게 출발하여 그 날로 공부에 착수하게 하고 나 또한 오랫동안 그럭저럭 옛 것을 답습하는 태도를 근심했는데 이로써 스스로 경계하고 반성하고자 한다. 정축년(1577) 계동(季冬 : 섣달)에 덕수(德水) 이이(李珥)는 쓰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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