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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6.25 참전기
장령공 후 준채(駿采)
대종친회 고문
북한분단과 군 창설
1945년 8월 15일 일본천황의 항복선언으로 제2차 세계대전은 끝나고 우리나라가 해방되었다. 한국에 있던 일본군과 만주에 있던 관동군의 무장을 해제시키려고 미 〮 소 양군이 주둔하면서 설정된 북위 38도선이 경계선으로 굳어졌다. 따라서 1948년 8월 남쪽에는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되고, 1949년 9월 북쪽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세워졌다.
1946년 1월 남한에서 국방경비대의 창설을 계기로 1947년 1월까지 병력은 5천 명이었으나 잦은 폭동과 데모 진압과 치안유지의 목적으로 4월에는 1만명, 7월에는 1만5천 명으로 증원되었다. 명칭은 국방경비대와 해양경비대로 나뉘었다.
그러다가 정부수립과 동시에 국군으로 개칭되고종래의 8개연대를 5개여단으로 개편하던 중 여 〮 순 군반란사건이 일어났다. 그래서 반란진압과 공비토벌, 그리고 38선의 충돌로 인하여 1950년 봄 병력을 9만8천 명으로 늘렸고, 장갑차 27량, 곡사포 89문, 항공기 32대를 비치했으며, 소총은 일본군이 사용했던 38식이나 99식을 그대로 썼다.
국군의 지휘부는 일본 육군사관학교와 만주군관학교 출신자들이 주축이 되고 일본군 지원병 출신자들 일부가 8개연대의 연대장급 지휘관으로 활약했다.
북한은 1949년에 보병 4개 사단을 창설했는데, 50년 3월 제15사단의 창설을 끝으로 10개 보병사단, 13만5천명의 병력을 보유했다 그리고 6월에는 50년제 소련탱크 T-34 150대를 보유하는 기갑여단과 독립기갑연대 및 곡사포 60문, 항공기 196대를 보유하는 강군으로 발전했다.
2. 일요일 새벽을 깨운 총성
1950년 6월 25일 조용한 일요일 새벽4시부터 북한군의 기습 남침으로 서부와 중부전선이 아수라장이었다. 그런데도 우리 국방부에서는 기습에 대처할 아무런 대책을 취하지 못하다가. 오전 10시가 넘어 “군인들은 모두 긴급히 부대로 돌아가라”는 방송이 나와 어리둥절했다. 그러나 사람마다 발걸음이 조금씩 빨라졌을 뿐 아무런 영문도 알지 못했다.
태평양전쟁을 승리로 이끈 미 극동사령부가 있던 도쿄의 다이치빌딩의 주변도 조용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화폐가치가 오를대로 오른 상태에서 미군들은 달러를 들고 긴자거리를 비롯한 번화가에서 주말을 즐기고 있었다.
우리 군에서는 3분의 1이 농번기 휴가중이었고 각 부대의 트럭과 야포를 포함한 중화기들은 정비창에서 수리중이었다. 불과 3주전에 지휘관급 인사이동이 있어 육본의 국장과 사단장들은 새 보직의 업무도 파악하지 못했다.
게다가 24일 용산의 육군회관대다수지휘관들이 그 행사에 참석했다. 참모총장 채병덕 장군을 포함한 군 수뇌들이 미고문단소속 장교들과 파티가 있어 양주에 취했다가 밤늦게서야 자리를 떴다. 북한은 이런 호기를 미리 알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일요일 새벽 4시부터 남침을 개시하여 순식간에 38선을 무너뜨리고 10킬로미터쯤 진격해오고 있었다.
이런 엄천난 돌발사항이 전개되고 있었는데도 신성모 국방장관, 채병덕 참모총장, 장창국 작전국장 등과 연락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작전지휘부가 구성되지 못했고, 비상 국무회의도 열리지 못했다.
우리측의 이런 한심한 처지에서도 가장 분주하게 움직인 사람은 존무초 미국대사였다. 당시 미 고문단장이었던 로버트 준장은 예편을 앞두고 미국으로 돌아갔고, 참모장이었던 라이트 대령은 국방대학에 입학하기 위해 가족의 본국송환을 도우려고 일본에 가 있었다.
당시 미 고문단들은 군인이면서도 미 국무성소속의 외교관 신분이었기 때문에 무초대사가 사령탑역할을 하고 있었다. 무초대사는 전선 상황을 파악하고 오전 7시경 워싱턴과 도쿄에 한국전선의 돌발사태를 보고했다. 시차관계로 미 국무부는 토요일 21시 26분에 전문을 받고 즉시 백악관과 국방부에 핫라인을 구성하고, 유엔본부 트리그브리 사무총장에게도 연락했다.
도쿄의 극동군사령부에서는 이 전쟁이 전면전인 것을 예감하고 비상사태에 들어갔다. 주한 미 대사관의 보고와 워싱턴의 동향을 주시하면서 신속한 대응책을 강구하기 위해 워싱턴에 품신을 했다.
그동안 제1사단이 개성지구를 방위하다가 후퇴 중이었으나 아직 부대의 모습은 유지하고 있었고, 의정부와 포천지구에서 후퇴하던 제7사단과 지리산지구에서 공비 토벌하던 제5사단이 급거 전선으로 이동하여 정릉-미아리-청량리를 잇는 방어선을 구축했다.
적군은 서울방어선의 마지막 보루였던 미아3거리에 설치된 방어벽을 탱크로 무참히 무너뜨리고 길음교를 통과하여 도심으로 진입했다. 후퇴하던 국군은 국군은 한강변까지 밀려왔으나 28일 새벽 2시20분 한강 인도교가 폭파되어 민간들의 도강은 고사하고 군인들의 퇴로까지 막혀버렸다.
다행히 27일 오후부터 미제5공군 1326 경폭격기편대가. 날아와 28일 오전 몽산역 부근에서부터폭격이 시작되었는데 1사단이 후퇴 중 행주 나루터로 빠져나가다가 미공군 폭격기편대를 보고 일제히 만세를 불렀다고 한다..
백선엽 장군은 이때 29세의 젊은 나이로 준장에 진급하여 1사단을 지휘했다. 사단장이 부하들에게 격려하기를 미군이 참전해준다면 우리는 이길 수 있다. 우리가 지금 후퇴하지만 시흥에서 다시 집결하자. 만약 그것이 어려우면 지리산에서 다시 만나 게릴라로라도 싸우자고 다짐하며 결의했다.
맥아더 원수는 공군과 해군만으로 이 전쟁을 해결하기는 어렵다고 판단하고 미 국방성에 지상군의 사용권을 건의했다. 28일까지 서울은 완전히 점령당했고, 이승만 대통령은 스스로 서울을 빠져나가 대전으로 내려갔다. 군대는 산산조각이 났으며, 시민들은 뿔뿔이 헤어져 나라 전체가 갈피를 못 잡고 피난행렬만 길게 이어졌다.
당시 소련의 군사고문단장 라주바예프가 본국에 보낸 보고서에서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한 후 3일 동안 적을 추격하는데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았고 남쪽의 한강변을 강화할 수 있는 기회를 주게 되었다”고 보고 했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첫째는 서울을 점령한 3, 4사단이 한강을 넘을 수 있는 장비가 없었다. 둘째는 아마도 춘천쪽에서 점령해오는 2, 12사단과 합류할 기회를 기다렸을 것이다. 그리고 셋째는 서울만 장악하고 나면 남한 곳곳에서 인민봉기가 일어날 것이라 했던 남로당 박헌영의 주장을 액면 그대로 기대했을 것이다.
맥아더 원수는 인천상륙작전을 위해 그동안 일본에 군정군으로 남아 있던미 7사단을 빼오려고 준비하고 있었다. 그래서 팬타곤의 반대를 무마하려고 일본자위대 병력 10만 명을 편성해 놓고 한국전 추가투입을 계획했다.
펜타곤에서는 인천항의 조수간만 차가 심하여 이 작전은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고 결론을 내렸다. 브레드리 합동참모회의 의장도 상륙전은 이 시대에 너무 낡은 작전이라며, 적의 해안포 방어력과 정보수집 능력이 클 것으로 보아 이 상륙전은 패배할 것이라고 했다.
브레드리 장군은 8월 22일 코린스 육군참모총장, 셔만 해군참모총장을 도쿄로 보냈다. 상황판단을 위한 것이라 했지만, 맥아더를 설득하여 상륙전을 포기케하려는 것이었다. 상륙작전을 꼭 해야 한다면 인천보다 군산을 선택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하였다.
그러나 맥아더는 “해안 제압이 성공의 열쇠인데 상륙을 못한다면 작전은 실패할 것이지만 병력과 장비는 무사할 것이다 그럴 경우 미군은 하나도 다치지 않고 다만 작전을 책임진 원수의 명예만 땅에 떨어질 것이다. 나는 원수의 명예를 걸고 이 작전을 수행하겠다”라고 주장하였다.
군사전문가들은 인천상륙작전을 제1차 세계대전 때 터키의 갈리폴리상륙작전, 제2차 세계대전 때 프랑스의 노르망디상륙작전과 더불어 세계 3대 상륙작전의 하나로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갈리폴리상륙작전 때 연합군은 20만5천여 명, 노르망디상륙작전 때 전사자가 8975명이었는데, 인천상륙작전에서 전사자는 15일 9명, 16일 4명 모두 13명에 불과했다 한다.
3. 인천상륙작전 참가
1950년 8월 17일 나는 초등하교 교사직에 있으면서 당시 나이가 인민군에 끌려가기 좋은 20대 초반이라 부산까지의 피난행렬에 끼어들었다.20여일이 지난 귀 8월 17일 밤 동직원들의 안내를 받고 한국군 연병장에 집결, DDT세례를 받으며 대한민국 카투사(미 육군에 증원된 한국군) 1기로 입대했다.
19일 밤 10시경 일본선적의 상선 신코우마루(新興九)에 승선하여 칠흑같은 바다를 항해해갔다. 8월 22일 15시경 3일 만에 도착한 곳은 요코하마였착 늦은 밤 군마현 서소천(群馬縣西小泉) 니시고이즈미 미 육군 제7사단의캠프였다.여기서 군인의 인식표와 군복을 받아입고 카투사병정으로 훈련을 받았다.
맥아더극동사령부 참모장을 겸하고 있는 미 제10군단장 알몬드 소장이 지휘하는 제7사단 제48 105미리곡사포대대에 배속되어 약 3주동안의 제식훈련과 집총훈련 및 105mm 곡사포훈련과 야전포설치운영에 대한 훈련을 집중적으로 받았다.
9월 13일 7시 30분 요코하마에서 미 해군수송선 아렉산더호로 서해에 진입하여 선내에 대기하다 15일부터 미 10군단(미 육군7사단 24,845명(카투사6,673명) 한.미해병 각 1개사단, 한국군 제17연대 전투단으로 편성된) 69,490명이 부분적으로 인천상륙, 서울 수복전에 투입되었다.
9월 19일 곡사포부대는 아렉산더호에서 상륙선 LST로 옮겨 타고 칠흑같은 밤 월미도에 상륙해 함포사격을 대신해 서울수복전을 지원한 뒤 20일 밤 부천군 소라면으로 이동 수원비행장 탈환작전을 성공시켰다. 9월 21일 안양을 경유 수원 신둔동에 주둔하며 수원비행장 평정전을 마치고, 9월 22일 수원비행장으로 이동하여 계속 보병부대의 서울 수복전을 지원했다.
9월 24일의 추석날 밤 수원의 화홍문을 통과 관악산록의 과천에 진입하고 계속 서울 수복전에 투입되었으며, 26일 광주로 이동한 뒤 한강 도하작전을 개기로 드디어 서울 수복을 성공하게 되었다.
9월 28일 세종로를 기점으로 종로거리에서 서울 수복 축하퍼레이드가 거행되었다. 이때 맥아더사령관과 알몬드 10군단장의 권유로 중앙청의 태극기게양은 한국해병대 손으로 이루어지게 했다. 29일은 청량리 외곽 양주군 구리역 교문리까지 약 8km를 차량으로 행진했고, 30일에는 미제10군단 서울지구 평정임무를 워커 8군사령관에게 인계했다.
4. 38선넘어 북진
10월 1일 그동안 38선을 넘어 국군은 북쪽으로 진격했고 이날을 기리기 위해 현재 국군의 날이 제정되었다.. 10월 2일 송파로 이동했는데 여기서 “7사단은 원산에 상륙하여 평양을 좌회 공격하라”는 극동군사령부의 작전명령이 하달되었다.
10월 5일 새벽 3시30분경 31연대가 이천에서 부산으로 향했고, 4시간 뒤에 32연대가 뒤를 이어 갔으나 17연대는 후방에 대기했다. 6일에는 여타 10월 10일에는 여타의 군단병력이 현암동, 운남리, 수원, 이천, 충주, 문경, 함창, 상주, 김천, 왜관, 대구까지의 비포장 400km를 곡사포를 매단 트럭으로 밤새워 달렸다.
대구에서 부산까지는 기차로 이동했는데 선발 31연대가 02시경 문경에서 잔적들의 공격을 받아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는 후문이 있었다. 10월 7일 10군단은 현재 콘테이너부두로 변한 신선대로 이동하여 대기했다..10월 17일 7사단 상륙부대는 미 해군 수송선 엘드라드호에 재승선하여 해상에 대기하다 19일에 부산항을 출발 동해로 진입했다.
10월 20일 10군단장 알몬드 소장으로부터, “원산-함흥서쪽의 산악지대에는 적 잔당이 침투할 우려가 있고, 진격중인 한국군 수도사단 전방에는 적군이 배치되어 있으니 가용되는 모든 도로망을 활용하여 국경지대에 진출 평정전을 끝내고, 적 유격대의 침투에 대비하라”는 명령이 하달되었다.
미 제7기동함대사령관 스트루불 제독은 “영흥만 소해작전 미완상태이니 상륙전을 일시 중지하라”라는 명령이 시달되었다가 25일에 드디어 영흥만 소해작전이 완료되었음을 고시했다. 10월 25일 미 해병 제1사단은 원산 상륙 즉시 그리고 미 제7사단은 원산 동북 240킬로미터 지점인 이원에 상륙하는 즉시 풍산과 부전호를 거쳐 백두산 남쪽으로 진출하라는 작명이 하달되었다.
10월 26일 미 해병1사단의 원산상륙이 완료되었다. “7사단은 원산 동북 240km지점인 이원에 상륙하는 즉시 풍산과 부전호를 거쳐 백두산 남쪽으로 진출하라는 작전명령”이 하달되었다.
10월 27일 미 7사단 17연대는 19시에 기동함대 LST 7척에 분승하여 방어진에서 31, 32연대와 합류하고,. 28일에는 미 제7사단 26,641명(카투사 7,804명 포함)이 미 17연대는 동북 해상에서 북으로 항진하여 이원에 상륙함과 동시에 북청 및 혜산진으로, 32연대는 북청, 황수리, 풍산, 갑산, 삼수 축을 따라 신갈파지구로 이동하고, 31연대는 예비대로 잔류했다.
11월 1일 해상 대기 중이던 곡사포대대는 한발 늦게 이원군 이원면 인교리 모래사장에 상륙했고, 8일에 북청으로 이동했는데 이곳 북청은 조선조 때 거산도찰방이 설치돼 있던 교통의 중심지였다. 11월 12일 신포에서 함흥으로 이동, 13일에는 신흥군 영고면 경흥리로 이동해서 화력을 전개했다
19일에는 경흥리에서 북청으로 회군하여 덕성면 어운리로 이동하여, 장진호부근에서 중공군 제42군에 포위된 미 해병사단 구출작전을 지원했다.
11월 20일 풍산군 능이면 연두리로 이동했는데 갑산이 32km, 북청이 105km 혜산진이 82km의 거리였다.
11월 21일 도로 2,100m-2,500m로 평균기온이 영하30도 40도씨인 개마고대라 칭하는 풍산을 통과하여 혹한 중에 서쪽 신가파진에 진격하고 있는 32연대를 지원, 우측의 17연대는 이미 혜산진에 도착했고, 31연대는 황수원리에서 부전호 방향으로 진격했다.
4. 장진호전투
11월 22일 밤 11시경 우리 포대는 32연대와 갑산을 통과 삼수군 삼량면 남풍리로 이동 중 차량 전복사고로 2-3시간 혹한 속에 사투하다 본대와 합류했는데 2-3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여 후송 후 미귀하였다.
11월 24일 삼수군 호인면으로 이동했는데 이 지역은 극심한 냉수대로 피밥과 감자가 주식이었다. 산수-갑산은 옛 선비들이 귀양살이 하던 오지로 한 번 들어가면 죽어서 나오는 곳이라 했다.
11월 30일 다시 풍산군 풍산면 신풍하리, 예파리로 이동하였다. 1일 “31연대와 32연대에서 600명의 카투사 및 여타부대에서 차출된 2,400명을 더해 3,000명의 특공대는 장진호 동쪽을 점령하고 미 해병 1사단의 우측을 엄호 압록강으로 돌진하라”는 명령을 수행하던 중 중국군 제42군에 포위당해 우리 포대는 포위망의 돌파작전을 지원했으나, 이 전투단은 ○,○○○명 이상의 전사 또는 포로로 잡혔고, 31연대장 맥크린 대령의 지시로 32연대 1대대장 페이스 중령이 지휘중 전사, 미국 명예훈장 추서, 근일에 극소수의 카투사 희생자가 미국을 거쳐 60년 만에 말없이 귀환했다.
12월 3일 북청군 북청면 남리로 이동했고, 4일 홍원군 경운면 송령리로 이동했으며, 5일 함주군 동천면 원봉리로 이동했다.
12월 16일 흥남시 운중리로 이동했는데, 이때의 화력지원은 7사단 31연대 32연대 특공대가 장진호 부근에서 적에게 포위된 제1해병사단을 구출해내기 위해 최적지점을 찾기 위해서 수없이 동서남북방향으로 위치를 변경하면서 구출작전을 했다.
3. 흥남부두 철수작전
12월 19일 영하30도에서 40도에 이르는 혹한 속을 헤메다 장진호에 남겨진 전우들의 생사는 모른 채 몸이 얼어서 움직일 수 없게 된 우리는 흥남 철수작전에 합류하여 인천상륙이래 생명처럼 닦고, 조이고, 기름칠하고 많은 탄환을 토해내며 생명을 지켜주었던 105mm 곡사포는 우리와 함께 철수선언에 실리지 못하고 부두에서 3km도 안 되는 폐품 수집 창으로 이동 순식간에 고철덩이로 변해갔다.
전사들은 빈손으로 눈물과 눈물로 뒤범벅이 되었고 부두로 달려온 이 고장 피난민 대열에 우리가 끼어 아비규환이었다. 오후 7시경 승선으로 남행하는데, 무기수집소에서는 폭격기의 폭음과 불길이 계속 솟고 있었다. 10군단의 월동을 위해서 공급된 식량, 유류, 무기, 중화기, 탱크, 차량들이 불나방처럼 불 속으로 뛰어 들어 갔으니 한두 시간의 폭격으로 끝날 일이 아니었다. 지금 생각해도 촌각을 다투던 아슬아슬한 철수작전, 이로써 서부전선은 미8군이 그리고 북동부전선은 미10군단에 의해서 평정전을 마무리하려던 계획은 중국 제42군의 출현으로 좌절되었고, 이 후퇴 작전은 1951년 서울의 1.4후퇴작전까지 이어졌던 것이다.
1953년 7월 27일 3년 동안을 끌고 오던 민족수난전이 휴전이란 명분을 만들어 총성이 멈추었다.
1954년 2월 23일 육본에서 통역장교 후보생 시험에 응시하여 합격했다. 육군 고급부관학교 영어통역장교 후보생 제8기에 입교하여 교육을 마치고 육군통역장교 중위로 임관했으며, 부산 육군통신기지창으로 발령되어 복무하게 되었다. 그 후 미국 유학을 하였고, 62년 9월 육군본부 근무를 끝으로 군 생활을 접었다.
<수상내용>
1952. 7. 9. - 미육군7사단장 웨인스미스 장군의 감사장
1952.10. - 대한민국 대통령표창 기장(2회)
1953. 8. 9. - 6.25 및 유엔군 참전기장
1953.10.30. - 미육군 제45사단장 P.D. 긴더 장군의 도성훈장
1997. 3. 3. - 참전용사증서(대통령 김영삼)
2001. 6.20. - 미제7사단협회 명예회원 추대
2008. 9.29. - 국가유공자증 수여(대통령 이명박)
2011. 6.25. - 주한UN사 포병단장 감사장
2012. 6. 7. - 1953년 8월 3일 발급된 금성화랑무공훈장(국방부장관)
통일의 미래비전
애국의 길이란 통일의 미래비전을 제시해야 한다. 한반도선진화재단 박세일 이사장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한반도 통일의시대가 다가오고 있다. 근원적으로는 냉전의 종식으로 인한 동북아 신 국제질서형성이 그 배경에 있다. 도도한 세계역사의 큰 흐름을 타지 못하면 반영구적인 신 분단시대를 맞게 되고, 국제적으로는 동북아 신질서가 평화와 번영이 아닌 대립과 갈등으로 치닫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북한정권은 당초 마르크스 레닌주의의 토대 위에 세워졌다. 그런데 국제적 개방개혁의 큰 흐름을 타지 못했고, 오히려 김일성주체사상을 덧칠하여 유일사상세습체제를 확립했다. 당 규약에도 “당면목적은 공화국북반부에서 사회주의의 완전한 승리를 보장하고 민족해방과 민주주의혁명과업을 수립하는데 있으며, 최종목적은 공산사회를 건설하는데 있다”라고 하였다.
한편 우리의 통일정책은 이승만정권의 북진통일론, 윤보선-장면정권의 평화적민주통일론, 박정희정권의 선 건설 후 통일론, 전두환정권의 민족화합민주통일론, 노태우정권의 한민족공동체통일방안, 김영삼정권의 신한국창조통일론, 김대중정권의 햇볕과 낮은 단계 연빙통일론, 노무현정권의 교류와 협력통일론, 이명박정권의 중도실용주의통일론, 박근혜정권의 한반도 신뢰프로세스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북한 주체사상의 철학적 원조였던 황장엽 선생은 대한민국에 와서 북한민주화운동을 전개하며 이렇게 주장했다. “자본주의적 민주주의는 민주주의의 첫 단계에지나지 않는다. 개인중심민주주의를 사회정의의 원칙에 의하여 발전해나가면서 집단주의의 비중을 높여야 한다.” 고 했다. 그렇다! 황장엽 선생은 누구보다도 이데올로기를 꿰뚫어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필자는 평소 어디서나 다음과 같은 견해를 피력했었다. “이데올로기의 기점인 개인의 자주적인 민주주의와 사회의 협동적인 민주주의가 조성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데올로기의 초점인 국가의 정의적인 민주주의가 완성되어야 한다. 나아가 이데올로기의 정점인 세계의 평화적인 민주주의에 도달해야 하는 것“이라고 주창했던 것이다.
국가란 반드시 국력이 이념화되고 조직화되며 체계화가 이루어지는 강한 국가를 건설해야 한다. 특히 우리는 누구나 자성과 자각과 자혁하는 ‘3자정신’으로 수양하고, 주체성, 정통성, 순수성, 창의성, 우월성의 ‘5성인격’을 갖추어야 한다. 세계사의 큰 흐름에 도약하고 웅비할 수 있는 홍익인간 재세이화의 진리인으로서 참된 통일인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