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글은 한국학대학원 2026-1 '조선전기음악사'(김인숙교수님) 수업에서의 발제 내용의 일부입니다.
본 글은 『世祖實錄』 「樂譜」에 관한 기존의 해제 내용을 정리하여 공유하려는 목적에서 작성되었다. 대상은 韓國音樂學資料叢書 제20권 『世祖惠莊大王實錄樂譜』(『韓國音樂學資料叢書, 제20집 : 세종, 세조실록 악보』, 서울: 국립국악원, 1986.), 국립국악원 국악사전의 ‘세조실록악보’ 항목, 그리고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의 해당 악보에 대한 해제이다. 각 해제의 성격과 분량에 따라 본 글에서는 작성 방법을 항마다 다르게 하였다. 먼저 제I항은 이 문헌에 대하여 1986년 성경린이 작성한 한음자총의 해제의 구성을 그대로 유지한 채 해제의 내용만은 요약하였다. 또한 序 및 後序의 해석이 귀중하다 판단되어 본문에는 싣지 않았으나 이 글 마지막에 원문과 함께 별첨하였다. 정화순이 서술한 제Ⅱ항은 가장 최근의 해제이자, 앞서 언급한 한음자총에 비해 보다 다층적인 해석이 포함되어 있다고 판단되어 다소 길게 서술된 내용을 요약·정리하였으며, 제Ⅲ항은 조선왕조실록의 해제 내용이 짧기에 전문을 그대로 실었다. 글의 성격상 결론은 생략하였다.
Ⅰ. 韓國音樂學資料叢書 二十
1. 해제
1) 정의: 《世祖實錄》 전 49권 중 제48-49권까지 수록된 악보.
2) 기보 체제
(1) 중국의 律字譜를 버리고 宮上下譜 창안, 工尺譜를 新制雅樂譜에 竝記.
(2) 世宗朝의 井間譜 사용하였으나 一行 十六井間으로 하고 다시 이를 六大綱으로 區劃.
3) 풀리지 않은 과제: 「樂을 始作한 처음에 혹은 第一腔에서 始作하고 혹은 第二腔에서 나오고 혹은 第三腔에서 나오게 되니 音樂의 體勢가 그토록 되는 것이라」 (起樂之始, 或出於第一綱,或出於第二綱,或出於第三綱者,音樂之體勢使之然也。『세조실록악보』 서.)
4) 특징: 世宗朝 創製의 《定大業》·《保太平》을 宗廟의 祭樂으로 확정시킨 점.
2. 序와 後序 해석 (원문 및 해석 전문은 이 글 마지막에 별첨.)
(세조실록악보 서문의 해석은 이 자료가 유일하다. 김수현, 「실록악보 서문으로 본 세종·세조의 음악 실천과 이론」,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46호, 2021.)
3. 目次
1) 권48
2) 권49
Ⅱ. 국립국악원 국악사전
1. 정의: 조선조 제7대 세조의 재위 기간에 창작되었거나 개작된 음악들이 수록되어있는 악보.
2. 수록 순서: 1) 원구 신제아악보 2) 세조 9년(1463)에 제정된 종묘악과 원구악 3) 2곡의 창작곡
| ☞ ‘종묘와 원구 제례는 새해 초에 치루는 국가 대사로서 두 제례를 마치면 음복연을 베푸는 것으로 모든 행사가 종료된다. 그러한 사실로 미루어 후미의 2곡의 창작곡은 음복연에 쓰인 음악으로 보이고, 따라서 『세조실록악보』의 종묘·원구의 신제약정악보 이하는 세조 9년에 제정된, 종묘제례부터 음복연까지의 음악 일체가 수록된 것으로 보인다’고 해석하였다. |
3. 내용
1) 신숙주의 서문.
2) 1457년(세조 3)에 지은 것으로 추정되는 圜丘 新制雅樂譜.
| ☞ 세조대에 원구의 신제아악보가 창작되고, 기존의 《보태평》과 《정대업》을 개작하여 교묘악으로 삼은 사실이 중대사로 간주되어 『세조실록』에 편입시켰다고 해석하였다. |
(1) 원구제의 각 절차에 따른 악장과 악보.
(2) 각 절차에 4자 4구의 악장을 노래, 1자1음의 전형적인 아악형식 ⇒ 매 악장은 16자 16음.
(3) 표기: 원대에 유행하였던 아율통속보(雅律通俗譜)와 같이 율려자보와 공척보를 겸용.
(4) 모든 절차 협종궁으로 연주: 명나라의 大祀 악장에 의거.
(5) 1457년(세조 3)에 원단을 회복하였을 때 지어진 것으로 추정, 세조 9년에 신제 교묘악이 제정되면서 자연 폐기.
3) 1463년(세조 9)에 제정된 郊廟樂 즉 《원구제례악》·《종묘제례악》의 登歌・軒架之圖, 步太平·定大業之舞圖, 二舞舞考定 외.
| ☞ 새로 제정한 교묘악의 전모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전체 악보의 핵심이라고 밝혔다. |
(1) 후서 내용 요약.
| ☞ 후서에는 언급되지 않았으나 진찬, 철변두, 송신악을 지은 이는 세조임을 밝혔다. |
(2) 등가·헌가지도, 보태평지무도·정대업지무도: 신제 교묘악의 악기편성과 인원수, 舞者·舞器의 수와 배치 등 묘사.
(3) ‘이무무고정’ 이하: 신제 교묘악의 제도는 역대의 제도를 연구한 뒤 그것들을 참작하여 정해졌다.
➀ 二舞舞考定: 종묘와 원구의 각 절차에 따른 연주악대와 樂·舞를 언급하였다.
• 종묘와 원구의 진찬·철변두·송신에 음악만 연주하도록 정하였다.
• 기존의 문무를 〈보태평지무〉로, 무무를 〈정대업지무〉로 정하였다.
➁ 二舞郊廟通用: 〈보태평지무〉와 〈정대업지무〉를 교묘에 통용하도록 정하였다.
➂ 用文武舞節次: 초헌에는 《보태평지무》를, 아·종헌에는 《정대업지무》를 추도록 정하였다.
➃ 二舞進退無樂: 기존의 ‘문무퇴・무무진’에는 헌가가 《舒安之樂》을 연주하였으나 신제 교묘에서는 二舞가 진퇴하는 사이에 음악을 연주하지 않도록 정하였다.
➄ 升降·飮福無樂: 교묘의 승강과 음복에서 음악을 연주하지 않도록 정하였다.
➅ 宗廟用黃鐘宮, 圜丘用夾鐘宮, 社稷用林鐘宮: 종묘에는 황종궁을, 원구에는 협종궁을, 사직에는 임종궁을 연주하도록 정하였다.
➆ 樂舞佾數: 기존 문무무의 六佾은 매 佾이 8인이었으나 세종대에 제정한 〈보태평〉과 〈정대업〉의 매 일佾이 6인이었던 것을 인습하여 매 佾의 人數를 6인으로 정하였다.
➇ 冠帶·衣裳之制: 齋郞, 武工, 樂生 등 교묘악 담당자들의 복식 일체를 상세히 기술하였다.
4) 종묘·원구의 新製略定樂譜
| ☞ 신제 교묘악의 《보태평지악》과 《정대업지악》이 세종대의 《보태평》과 《정대업》을 ‘약정(略定)’하여 완성하였기 때문에 악보의 제목을 “新製略定樂譜”라 하였다고 해석하였다. |
(1) 모든 악보는 매 행이 16정간으로 <3・2・3・3・2・3정간>씩 구획하여 16정간 6대강.
| ☞ 세종대의 1행 32정간 12대강 보법에서는 1행이 1년, 12대강이 12월을 상징하였다면 세조대의 1행 16정간6대강의 보법은 기존의 1년 1행을 양[소양・태양], 음[소음・태음]으로 구분하여 각각 6개월씩 2행으로 나눈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두 정간보가 지닌 역리적 의미는 근본적으로 동일하다고 해석하였다. |
(2) 매 1행은 4~7소행으로 나누어 현악・관악・성악・장고・박 등을 오음약보로 기보.
(3) 목차
(4) 원구와 종묘의 공통점
➀ 절차 동일
➁ 연주 악곡의 악보 동일
(5) 차이점: 원구제사의 연주 악곡 규모가 소략함.
| 종묘악 | 원구악 |
| 진찬악, 철변두악, 송신악 | <豐安之樂><雍安之樂><興安之樂> | <隆安之樂>〈成安之樂〉〈寧安之樂〉 |
| 악조 | 淸黃鐘調 黃鐘爲徵 淸黃鐘調 黃鐘爲羽 | 夾鐘調 夾鐘爲徵 夾鐘調 夾鐘爲羽 |
| 三獻樂 | 초헌 | 《보태평지악》 11곡 전곡 | 《보태평지악》 중 <기명지악> 1곡 |
| 三獻樂아헌 | 《정대업지악》 11곡 전곡 | 《보태평지악》 중 〈선위지악〉 1곡 |
| 三獻樂종헌 | 《정대업지악》 11곡 전곡 | 《정대업지악》 중 〈탁정지악〉 1곡 |
☞ 원구악의 세 곡은 각각 종묘의 〈기명〉, 〈선위〉, 〈탁정〉의 선율에 다른 가사를 붙여 이룬 것이다.
☞ ‘애초에 정한 원구제의 음악 규모는 종묘제례와 같았다. 1464년(세조 10) 1월 14일에 세조가 친히 종묘에 제사를 지내고, 다음 날 이어서 원구제를 지내기에는 당시 건강상태가 좋지 않은 상태에 있었으므로 원구제의 의주(儀注)를 고쳐 가능한 한 간략하게 줄이기를 명한 결과, 삼헌악의 음악이 각 1곡으로 대폭 줄게 되었다. 이것이 권도인지 여부는 불분명하지만, 원구제는 본래 종묘제향을 지낸 뒤에 이어서 지내기 때문에 의식 주최자인 임금의 노고를 고려하여 이후로도 비교적 간략하게 지냈을 가능성이 있다.’고 해석하였다.
5) 창작곡 《創守之曲》과 《敬勤之曲》
(1) 곡 설명
➀ 창수지곡: 세종대 《정대업》의 <赫整>에서 유래한 “南呂宮 羽調”의 악곡.
➁ 경근지곡: 고려곡 《靑山別曲》에서 파생한 “林鍾宮 徵調”의 악곡.
(2) 창작 목적: 불분명.
| ☞ ‘그러나 두 곡에 사용된 ‘남려궁 우조’나 ‘임종궁 치조’의 악조들이 세종대부터 주로 宴禮樂으로 사용되어왔다는 점, 특히 《경근지곡》의 임금과 신하가 주고받는 내용을 고려하면 이 두 곡은 군신연회에 사용할 목적으로 창작한 악곡들로 추정된다. 여러 연회 가운데 특히 제례의식을 치른 뒤 베푸는 飮福宴에서 연주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해석하였다. |
(3) 『大樂後譜』(1757)에도 수록.
5. 의의 및 가치
1) 1463년(세조 9) 12월에 새로 제정한 교묘악의 전모가 수록되어있다. 그 내용은 이듬해 정월에 지낸 종묘·원구제에서 실현되었던 악무로서 당시 제후의 예로써 제정한 종묘악과 원구악의 제도를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사료가 되고 있다.
2) “考定”부분은 당시 종묘제례에서 문무와 무무가 진퇴하는 사이에 왜 음악을 연주하지 않게 되었는지, 종묘제례의 일무는 舞佾의 수가 왜 6인지 등등 《종묘제례악》의 제도가 《문묘제례악》과 다르게 상정된 원인을 파악하는 단서가 되고 있다.
3) 특히 종묘 악무는 이후로 지속적으로 연행되어 현행으로 이어져왔기 때문에 『세조실록악보』는 제후의 예로써 제정되었던 《종묘제례악》으로부터 현행 《종묘제례악》에 이르기까지 대한제국기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변화된 내용을 파악함으로써 현재에 적합한 《종묘제례악》의 올바른 제도를 수립할 수 있는 단서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사료적 가치가 매우 높다.
Ⅲ.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조선왕조실록 해제
《世祖實錄》《악보》는 《세조실록》 전체 49권 가운데 권제48, 49권 두 권에 실려 있다. 이 《악보》의 특징은 중국의 12律名을 사용하는 律字譜를 과감히 버리고 上下之法인 五音略譜를 창안한 데 있다. 오음약보에서 《세종실록악보》의 1행 32井의 井間譜가 1행 16정 6大腔의 腔譜로 변화되었다. 이러한 오음약보 체제는 아악에 필수적으로 사용되어야 할 음들을 기록할 수 없기 때문에 당시 중국에서 사용되던 工尺譜를 사용하여 이를 보충하기도 하였다. 이 악보는 《세종실록》《악보》의 《定大業》과 《保太平》을 종묘의 제악으로 확정시킨 것이 매우 특징적이다. 세조 때에 이르러 오음약보를 창안한 이유에 대해서는 《세조실록》《악보》 序에서 밝히고 있다. 그 곳에서 “우리 東國의 아악은 12율로서 악보를 만들고, 향악은 다만 肉譜로서 악보를 삼아서 疎數緩急의 차례를 빙거해서 전할 수 없었다”라고 그 개량 원인을 기술하고 있다. 하지만 오늘날 악보 해석에 있어서는 16정간 6대강의 강보에서 대강의 쓰임은 아직까지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으며, 다만 그것이 빠르기에 관련되어 있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강은 한 행에 기록된 3정간, 2정간, 3정간, 3정간, 2정간, 3정간의 6대강을 의미한다. 음악이 시작되는 강이 다름은 음악의 體勢에 따른 것이라 하지만 이에 대한 명확한 의미도 현재로서는 확실히 알 수 없다. 본 악보의 16정간 6대강 악보 체제는 이후 등장하는 《琴合字譜》, 《梁琴新譜》 등의 악보에도 계속적으로 사용되었다. 《세조실록》《악보》 체제는 이후 거문고 연주에서 자주 사용되는 합자보를 흡수하여 더 발전된 형태의 악보로 변화하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