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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순공(文純公) 시호(諡號) 시비(是非)와 종계변무(宗系辨誣) 전말(顚末)
☆ 계암공(溪巖公) 증작시(贈爵諡)에 따른 자극(刺戟)
1813년(純祖 13, 癸酉)에 계암(溪巖) 휘(諱) 영(坽)께 이조판서(吏曹判書) 겸(兼) 양관대제학(兩館大提學)의 증작(贈爵)이 내렸고, 다음해 1814년 갑술(甲戌)에는 탁청정공파(濯淸亭公派)가 오매불망(寤寐不忘) 갈구고대(渴求苦待)하던 역명(易名) 절혜(節惠)의 시명(諡命)이 이루어져 문정(文貞, 道德博聞曰文,淸白守節曰貞)의 시호(諡號)가 내렸다.
☆ 근시재공(近始齋公) 증작시(贈爵諡)를 위한 움직임
그것을 목도(目睹)하며 자극(刺戟)을 받으면서 고무(鼓舞)되어 종파(宗派) 또한 후조당(後彫堂)과 근시재(近始齋)의 증작(贈爵)과 시명(諡銘)을 고소원(固所願)하는 처지였다. 그래서 앞서 1812년(純祖 12, 壬申) 11월에 도산서원(陶山書院)의 유림(儒林)이 나서서 관찰사(觀察使)에게 근시재의 증작과 시명을 바라는 소지(所志)를 올린 바 있었다. 다음 해 정월에는 때마침 민정(民政)을 위해 순행(巡行)하는 암행어사(暗行御史)의 당도(當到)를 기회로 다시 같은 내용의 소지를 올렸었다. 같은 해 5월에는 의성(義城)에 머물고 있는 암행어사에게 또다시 소지를 올렸는데, 이 3건 일들의 기록은 모두 오천고문서(烏川古文書)에 실려 전한다.
종파(宗派)의 경우 후조당(後彫堂)께 문순공(文純公)의 시명(諡命)이 내린 것은 실로 그 단초(端初)가 근시재의 증작시(贈爵諡)를 청원(請願)하는 이들 소지(所志)였으므로 3건 문서 내용이 거의 동일한 것인지라 필자(筆者)는 일찍이 그 중의 1편을 번역하여 세상에 알린 바 있다.
근시재를 위한 시명(諡命)은 후술(後述)할 1825년(純祖 25년, 乙酉)에 이루어진 후조당의 사시(賜號)에 이어진 시비(是非)로 가로막혀 결과가 없었다. 그러나 그 사이 근시재의 증작(贈爵)은 전후(前後) 두 차례에 걸쳐서 이루어졌다. 제1차는 임진왜란(壬辰倭亂)이 끝난 다음 1594(萬曆 22, 宣祖 27, 甲午) 9月에 왕명(王命)을 근거로 1595년(乙未) 7월에 교첩(敎牒)으로 내렸는데 증작은 겨우 정육품(正六品) 수찬(修撰)이었다. 그 후 제2차는 상게(上揭)한 바 증작청원(贈爵請願) 소지(所志) 등을 거쳐 1893년에 교지(敎旨)로 내렸으며 실로 근시재 서거 후 300년 만인 일이었다. 이 때의 증작은 정경(正卿)의 반열(班列)인 정2품 이조판서(吏曹判書) 겸 양관대제학(兩館大提學)이었다.
그 두 건 교지(敎旨)의 실제 모습은 오천고문서(烏川古文書), 二, 『교지․교첩․차첩(敎旨․敎牒․差帖), [六○] 및 [六一], p. 9.』가운데에 보이며, 역시 필자의 글로 일가들에게 소개되었다. 다만 근시재 서거(逝去) 후 300여 년에 이루어진 이 이조판서 증작 연관으로도 그 과정을 담은 고문서가 반드시 존재할 것 같아 보이는데, 아직 종택(宗宅) 소장 고문서가 완전히 정리되지 않은 터이라 현재로서는 고거(考據)할 바가 없다.
☆ 후조당(後彫堂) 증작시(贈爵諡)를 위한 진로변경(進路變更)
위에서 보았듯이 1814년 갑술(甲戌)에 계암께 문정(文貞)의 시호가 내림을 보면서 자극을 받아 종파(宗派)는 당초 근시재를 목표로 추진했던 일을 바꾸어 후조당(後彫堂)을 위한 청작시소(請爵諡卲)로 전환이 된 듯 보인다. 부조(父祖)의 전문(傳聞)에 따르면 탁청정공파와 다름없이 후조당의 증작시를 순순히 성공하게 된다면 연이어 근시재의 증작시를 추구하되 문충(文忠)의 시호를 염원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후조당의 사시(賜諡)에 따른 이른바 문순시비(文純是非)의 회오리바람에 휩싸여 근시재의 시호(諡號)는 결국 꿈으로만 끝나는 것이 되었다고 한다.
☆ 도산서원(陶山書院) 유생(儒生) 중심 유소(儒疏) 실현(實現)
주지하듯이 문순공(文純公) 후조당(後彫堂)의 증작(贈爵)과 명시(命諡)를 이루고자 하는 안동(安東) 지역 유림(儒林)의 노력은 1815년(純祖 15, 乙亥)에 발의(發議)되어 1816년(純祖 16, 丙子) 정월(正月)부터 일읍(一邑)의 유생들에 의해 본격화되었다. 먼저 도산서원(陶山書院)에 참집(參集)하여 소장(疏狀)을 작성하고 상경(上京) 유생을 정하는 등 절차를 거치고, 이어 도내(道內) 유생들이 소수서원(紹修書院)에 모여 소수(疏首)를 정하고, 또 본손(本孫) 김상유(金商儒)로 하여금 한양(漢陽)의 태학(太學, 成均館)으로 보내어 그 사실을 알리는 등의 일을 추진하였었다.
☆ 소유(疏儒)의 상경(上京)과 정원(政院)에서의 복합(伏閤)
6월 15일에 도산서원에 모여 마지막 준비를 끝맺고, 7월 24일에 유생 이휘정(李彙楨), 김영헌(金永獻), 본손(本孫) 김윤교(金倫敎) 등이 치소(治疏)를 위해 상경(上京)하여 29일에 입성(入城)하였고, 8월 한 달 동안 좌상(左相)과 판서(判書)를 만나 상의(商議)를 하고 승정원(承政院) 앞에 꿇어 엎드려 궁궐(宮闕)에 아뢰는 복합(伏閤)을 거쳐 소개(疏槪)와 소장(疏狀)을 제출하는 등의 절차를 거쳤다. 이 내용은 오천고문서(烏川古文書) 460면 “二二, 記錄類·其他雜文, [一]”로 “후조당김선생청시소(後彫堂金先生請諡䟽)”라 한 자료에서 살필 수 있다. 그리고 1816년의 그 유소(儒䟽)는 오천세고(烏川世稿) 중 후조당선생문집(後彫堂先生文集)에서 볼 수 있다. 정원(政院) 앞에서의 복합(伏閤) 등 간난(艱難)하고 고통스러운 상소(上疏)의 과정을 담은 오천고문서의 글과 도산서원 유생이 작성한 유소(儒疏)에 대하여는 나의 번역(飜譯)으로 세상에 알려진 것도 있다.
☆ 유소(儒疏) 처결(處決)을 위한 양조(兩曹)의 회계(回啓)
이 유소(儒䟽)의 일차적인 처결은 다음해 1817년(純祖 17, 丁丑)에 이루어졌다. 곧 상소문(上疏文)이 이르게 되면 담당 관부(官府)의 관원들이 검토한 후 처결을 위하여 임금에게 올린다. 임금은 해당 관부에 그 처결을 위하여 묻게 되는데, 후조당(後彫堂)의 증작 상소 처결을 위한 임금의 물음에 대하여 예조(禮曹)가 아뢴 회계(回啓) 및 1817년(純祖 17, 丁丑)에 9월 이조판서(吏曹判書) 김이양(金履陽)이 올린 회계는 각각 다음과 같다. 곧 예조는 후조당에게 시호를 내리는 일이 참으로 합당하지만 독단으로 할 수 없는 일이므로 이조(吏曹)로부터 정경(正卿)을 내리도록 조처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라고 하는 아룀에 대해 윤허(允許)한다고 하였다. 또 이조 역시도 시호의 은전(恩典)을 내리는 것이 지극히 합당한데, 정경의 일은 해조(該曹)에서 독단으로 할 수 없으니 대신(大臣)들과 상의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라고 아룀에 대하여 또한 윤허가 있었다. 이처럼 예조와 이조의 계목(啓目)을 통한 임금의 윤허가 있었으나 증작(贈爵)과 시명(諡命)의 일은 금방 이루어지지 않고 그 후로도 5년 여 세월을 더 기다려야 했다.
☆ 부응교(副應敎) 이언순(李彦淳)의 당소(堂疏) 실현
신하(臣下)들이 올린 상소에 대해 그 옳고 그름을 밝혀 판가름을 해 주는 임금의 비답(批答)이 내린 처지로도 정작 후조당의 증작과 시명이 내리지 않음에 대하여 부응교(副應敎) 이언순(李彦淳)이 1822년(純祖 22, 壬午) 재차 신청작시소(申請爵諡疏)를 올렸는데, 세인(世人)들은 이를 가리켜 묘당(廟堂)에서 이루어진 상소라 하여 당소(堂疏)라 하였다. 이 당소에 대한 임금의 비답은 “[傳曰令廟堂稟處-전교(傳敎)해 가로되, 묘당으로 하여금 품의(稟議) 조처(措處)하도록 하라]”였음을 한국정신문화연구원(韓國精神文化硏究員) 간행 고전자료총서(古典資料叢書) 82-3인 오천세고(烏川世稿) 중 후조당선생문집(後彫堂先生文集) 부록(附錄)에서 본다. 이 당소 역시 필자의 번역으로 세상에 소개되었다.
☆ 당소(堂疏)의 처결 결과와 영의정(領議政)의 헌의(獻議)
이언순(李彦純)의 ‘신청작시소(申請爵諡䟽)’에 따라 1822년(純祖 22, 壬午) 3월에 영의정(領議政) 김재찬(金載瓚)이 올린 헌의(獻議)는 다음과 같았다. 곧 “유생들이 대궐에 이르러 간청한 것을 통해 백세(百世)의 공론(公論)임을 알 수가 있고, 앞뒤에 걸쳐 해당 관서에서 아뢴 회계(回啓) 역시 다르지 않으니 특별히 정경을 내리고 인하여 시호의 은전을 내리십시오”와 같았는데, 그 사실은 조선 말엽에 간행된 국조보감(國朝寶鑑) 속에도 역사로 기록되어 전한다. 이 헌의 관련 기록은 1822년(純祖 22년, 壬午) 윤삼월(閏三月) 25일자의 기록으로 왕조실록에 보인다.
그러한 결과로 1822년(道光 2년) 5월에 후조당께 먼저 자헌대부(資憲大夫) 이조판서(吏曹判書), 의인하씨(宜人河氏)께 정부인(貞夫人)의 증작이 이루어졌는데, 그 사실은 오천고문서에 실린 교지를 통하여 볼 수 있다.
☆ 1822(純祖 22年, 壬午) 후조당(後彫堂) 내외분 증작교지(贈爵敎旨)
敎旨
徵士金富弼贈資憲大夫吏曹判書兼知義禁府事成均館祭酒侍講院贊善
五衛都摠府都摠管者
道光二年五月二十九日
學問造詣早被先正臣李滉所推許菀爲嶠南之眞儒而至若七月入山之哭一生遯世
之跡與先正臣金麟厚俱是乙巳之完人
孝陵之純臣特施正卿之贈事承
傳
(施命之寶)
敎旨
宜人河氏 贈貞夫人者
道光二年五月二十九日
贈資憲大夫吏曹判書兼知義禁府事成均館祭酒侍講院贊善五衛都摠府都摠管金
富弼妻依法典從夫職
(施命之寶)
☆ 1825(純祖 25年, 丙子) 문순공(文純公) 시명(諡命)
이러저러한 곡절(曲折)과 과정을 겪은 후에 1816년(純祖 16年, 丙子) 정월 유소(儒䟽) 후 실로 만 9년이 걸려서 드디어 1825년(순조 25년, 을유) 후조당께 문순(文純, 道德博聞曰文,中正精粹曰純)의 절혜사(節惠事) 시명(諡命)이 내렸는데, 그 교지(敎旨)의 모습, 내용은 다음과 같다.
敎旨
贈資憲大夫吏曹判書兼知義禁府事成均館祭酒 世子侍講院贊善金富弼 贈諡文
純公者 道德博聞曰文 中正精粹曰純
道光五年四月 日
본래 시호(諡號)는 정이품(正二品) 이상의 관직을 지낸 사람의 생시(生時)의 학문이나 사행(事行)의 공과(功過)를 헤아려 사후(死後)에 국가가 내리는 것이 법이었다. 나라의 법전(法典)에서는 비록 정이품을 아니 지낸 유현(儒賢)에게도 학문 조예(造詣)와 지절(志節)이 탁이(卓異)하였던 선비에게는 내릴 수 있는 바였지만, 실상 초야에 은둔(隱遁)하여 살았던 학자가 그 시호를 받는 일은 그야말로 하늘의 별을 따듯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므로 무릇 선조(先祖)에게 국가로부터 시명(諡命)이 내리는 은전(恩典)을 역명(易名)이라고까지 일컬으며, 한 집안이나 문중은 물론 그 지역 사회까지 대단한 영예로 여겨 사시(賜諡)가 이루어지면 종중은 물론 지역사회까지도 큰 영예로 삼았던 것이다. 그 시장, 가장 또한 필자의 번역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후조당께서 문순(文純)의 시호를 받으신 소식이 향토에 알려짐과 함께 연이어 영안부원군 김조순(金祖淳)이 지은 시장(諡狀)의 글과, 그 시명을 바라서 본손(本孫)이 지어올린 가장(家狀)이 공개되기에 이르렀다.
☆ 사시(賜諡)에 따른 분황(焚黃)과 연시(延諡)
원래 사시(賜諡)가 이루어지면 후속하는 많은 의례(儀禮)가 있기 마련이었는데,
그 행사 중의 하나가 분황(焚黃)이었다. 나라가 사후(死後)인 어느 개인에게 시호를 내릴 때에는 함께 정경(正卿)의 증직(贈職)이 이루어지므로 그 추증(追贈)의 교지(敎旨)와 함께 황색(黃色)의 종이로 된 부본(副本)을 내리게 되는데, 그 자손이 추증된 이의 무덤 앞에 제수(祭需)를 마련해 나아가 제사를 올려 황색 종이의 부본을 불태우는 의례(儀禮)를 분황이라 일컬었다. 그밖에도 시호를 받들고 나온 선시관(宣諡官)을 그 본가에서 시호를 받는 이의 신주(神主)를 모시고 나와 의식을 행하고 배명(拜命)하는 연시(延諡)의 행례(行禮)가 또한 있었다. 그리고 연시를 하게 되는 본가가 죽은 이의 신주를 받들고 나아가 선시(宣諡)하러 나온 선시관(宣諡官)을 맞아 의식을 행한 다음 사자(使者)에게는 예폐(禮幣)를, 그 수종자(隨從者)에게는 행하(行下)를 베푸는 잔치를 가리켜 연시연(延諡宴)이라 하였다.
문순공 후조당의 경우 그 분황과 연시가 예답게 이루어졌으므로 그 고유문(告由文)들이 지금껏 남아 전하는데, 사시(賜諡)의 은전(恩典)이 그야말로 집안, 종중, 지역사회에 엄청난 반향(反響)을 일으킨 대사(大事)였으며, 아울러 그 글을 통하여 초야의 선비였던 후조당의 학문 조예나 지절(志節)이 태산처럼 우뚝하였음을 살펴볼 수 있었다.
☆ 연시(延諡) 연관 후조당 시호(諡號) 시비(是非)의 실제(實際)
그런데 이 후조당을 위한 연시(延諡)를 두고 사단(事端)이 생기게 되었다. 곧 나라가 후조당(後彫堂)의 시호(諡號)를 퇴계(退溪) 선생과 같은 문순(文純)으로 내린 데 대하여 곧 사문동시(師門同諡)임을 앙앙불락(佒怏不樂)하여 이씨(李氏) 일족 중 일부가 불만을 표하며 변고(變故)를 일으킨 것이다. 그들이 진성이씨 중 일부인 것은 연시(延諡)의 분황고유문(焚黃告由文)을 지은 분이 진성이씨 광뢰(廣瀨) 이야순(李野淳) 공임을 보아도 알 만한 사실이다.
이씨들이 가장 못마땅하게 여기는 바가 사제(師弟) 동시(同諡)임에 마음이 편치 못하다는 것이었는데, 그러나 당시의 여론(輿論)은 부자(父子)나 사제지간(師弟之間)에 시호(諡號)가 같았던 예가 없지 아니하였던 왕적(往蹟)이 있는 터였고, 문순(文純)의 아래 다시 문순(文純)이 남으로써 그 문순(文純)이 더욱 영예로울 수 있다[文純之下又文純,又光於文純]는 논의 등이 잇달아 거기에만 집착할 수 없는 처지였다.
후조당의 시장가(諡狀家)가 당시 세도정치(勢道政治)의 중심이었던 영안부원군(永安府院君) 김조순(金祖淳)인지라 감히 집적거릴 터수가 아니었다. 그래서 차선(次善)으로 택하여 공격(攻擊)할 바가 시장(諡狀) 작성의 토대(土臺)가 될 자료로 자손들이 지어 올린 가장(家狀)이었다. 이씨들은 그 가장을 분석하여 여러 처(處)를 지적하면서 두찬(杜撰)이요 무당(無當)하며 소거(所據)가 부족하다는 등으로 비판을 하였다.
연시(延諡)에 앞서 이씨들이 오천(烏川)으로 보낸 ‘단자(單子)’의 글에서 이는 곧 장차 서하인(西夏人)이 공자(孔子)의 논의(論議)를 의심하는 짓을 다시금 저지르는 일이라 하리라(則將見西夏人疑夫子之論,復行於今日矣)” 또 소위 이씨 변파록(卞破錄) 등의 글로 가로되 스승과 제자가 같은 시호를 받는 일은 불가(不可)하다 하고, 시장(諡狀)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였으며, 『개우풍(盖寓諷)이라 한 세 글자는 사실을 굽혀 협박하는 뜻을 드러내고 있다』라 하고, 붕우(朋友)로 사귀다가 이윽고 또 장유(長幼)로 지내다가라 한 데 대하여는 은연 중 서로를 견주려 한 것이라 하고, 선생이 강론(講論)할 적에 이따금 자신의 의견을 강력히 주장했다는 말은 스승의 훈도(訓導)를 받지 않았다는 것을 드러내 보인다 하였고, 위세(威勢)를 돋보이고자 세 글자를 모방하여 넣었다 하고, 퇴계 선생의 시(詩)가 후조당의 절조(節操)에 대하여 읊은 것이 아니라 하였고, 율곡의 편지에 대한 이야기는 지나친 과장(誇張)이라 하였고, 산운(山雲)의 시(詩)는 후조당의 지음이 아니라 습계집(拾溪集)에 실린 것이라 하는 등등이었습니다.(曰師弟之不可同諡也,曰太常之狀,未克稱情也,盖寓諷三字,顯有誣逼之意也,曰朋友之少長之說,隱然計較也,曰講論時侃侃守己,見爲不有師訓也,曰爲勢所長,至以三文字擬入也,曰退溪詩之非謂先生節也,曰栗谷書之壯撰也,曰山雲詩也戴於拾溪集也).
이씨의 언설에 대하여는 오천(烏川)의 제인(諸人)들은 조목조목 세세히 변무(卞誣)를 거듭하면서 여러 곳에서 다음과 같은 말로 대응하기도 했다. 『우리 후조공(後彫公) 학문 절의(節義)의 실제는 이미 변록(卞錄) 가운데 적은 것처럼 대현(大賢)의 문하 고제제자(高第弟子)이로다. 그 청풍(淸風) 탁절(卓節)이 백세(百世)를 흘러도 가릴 수 없음이라 곧 그 실리(實理)가 자현(自顯)하며, 공의(公議)가 끊어지지 아니하므로, 그것이 당초 저희들이 궁문(宮門)에서 부르짖어 일혜(壹惠)를 입기 바랐던 것이오이다. 하물며 그 발론(發論)을 시작한 사람이 이씨였습니다. 유소(儒疏)의 소두(疏頭)가 이씨요, 당소(堂疏)를 홀로 올린 사람이 이씨입니다. 이는 곧 타고난 천성을 지킴(秉彝)에서도 쉽지 아니한 일이라 할 것입니다(我後彫公學問節義之實,已載於卞錄中,而大賢門下高第弟子也,淸風卓節,百世不可掩者,則實理自顯,公議不泯,此當初吾黨所以齊籲九閽,冀蒙壹惠者也,而且况發論而始者李氏也,儒疏而疏頭者李氏也,堂疏而獨上者李氏也,此秉彛之不容易者也).』라 응수하엿다.
예안파 종택 소유이다가 국학연구원(國學硏究員)이 영구 수장(收藏)하게 되는 고문서들 가운데, 후조당의 시명(諡命) 연관 문서가 단위 문서로 줄잡아 40-50여 편인데, 1826년 소위 연시(延諡) 이후 이루어진 문건(文件)은 보는 바 그대로 대부분이 이씨와 오천(烏川) 일가들 사이에서 점철(點綴)된 시비(是非)와 연관되는 글이었다. 그러나 이후 여러 달 동안 갖가지 언설로 파시(破諡)에 이르기를 획책하였으나 결국은 성공하지 못하고 끝내 잠잠해지고 말았던 것이다.
이 무렵 이와 같은 시비(是非)의 논의(論議)로 쌍방(雙方)을 왕래한 주요 문건(文件)들로 이른바 이씨들의 후조당 연시후변파록(延諡後卞破錄)이 있었고, 오천(烏川)이 그에 답한 바 후조당 연시후변무록(延諡後辨誣錄)이라 하는 것이 있었다.
☆ 시명(諡命) 연관 낙천사(洛川社) 변고(變故)
도산서원(陶山書院)을 중심한 향리(鄕里)와 도내(道內), 서울의 태학(太學) 등을 통한 문순공의 개시(改諡) 내지는 파시(罷諡)의 획책(劃策)에서 성과가 없자 이씨들이 이어서 일으킨 분란을 세인(世人)들이 이른바 낙천사 변고(洛川社變故)라 한다.
일찍이 예안(禮安)의 유생들이 향토의 출신이면서 학문과 절의(節義)가 높았던 제현(諸賢)으로 퇴계(退溪) 선생의 조부 증판서(贈判書) 이계양(李繼陽) 공과 우리 선조 증참판공(贈參判, 휘 효로(孝盧. 1455, 端宗 2, 乙亥-1534, 中宗 29, 甲午) 두 분을 향현사(鄕賢祠)에 배향(配享)한 일이 있었다. 중간에 그 사당(祠堂) 건물(建物)에 변고가 생겨서 두 분을 낙천사(洛川社)에 옮겨 봉안(奉安)하였는데, 1826년(純祖 26, 丙戌) 당시에 벌써 두 분을 함께 모신 바가 수백 년을 경과하였고, 낙천사로 이안(移安)한 지도 벌써 38년째였다고 한다. 그 낙천사는 물론 주지하는 대로 후조당 등 우리들 선조들로서 도산문하(陶山門下) 제현(諸賢)들의 영령(英靈)을 모시는 곳이었다.
사제동시(師弟同諡)에 발노(發怒)한 이씨들은 급히 도내(道內)에 통문(通文)을 돌려, 퇴계 문집(文集)에 대하여 근거 없는 말을 퍼뜨리고, 후조당을 무욕(誣辱)하는가 하면 한 편으로는 시장(諡狀)을 지은 김조순(金祖淳) 공에게 글을 보내고, 또 한편으로는 성균관(成均館)에다 글을 올리는 등 후조당의 증작(贈爵)과 시명(諡命)이 파삭(破削)되도록 하고자 백방(百方)으로 획책(劃策)하였으나 결국은 뜻을 이룰 수 없게 되자 사문(斯文)의 죄인(罪人)이며, 불공대천(不共戴天)의 원수처럼 여기게 되었다.
그러다 드디어 이씨들은 낙천사에 함께 모신 이계양 선생의 위패(位牌)를 별도의 건물을 지어 분봉(分奉)할 일을 꾸미게 되었는데, 우리의 선조들이 누차 향중(鄕中)에 글을 띄워 그 부당함을 지적하여 말렸었다. 그러던 중 1826년(純祖 27, 丙戌) 11월 30일 야반(夜半)에 이씨들이 수백인을 동원하여 횃불을 들고 쳐들어와 봉안된 이선생의 위패를 탈취코자 하므로 우리 선조들도 그에 맞서 3일 동안 사당을 옹호하였다. 그러나 12월 초2일 아침 식사를 하는 틈을 타서 사당(祠堂)의 담을 넘어와 철봉(鐵棒) 등으로 혹은 벽을 허물고 자물쇠를 부수는가 하면 맞서는 우리 선조들에 대하여 주먹을 휘두르고 칼을 뽑으며 구타하고 끌어내는 등으로 다수를 상(傷)하게 한 뒤 결국은 위패를 탈취해 달아나기에 이르렀다.
이에 종중에서는 그 사정을 관아(官衙)에 고하고 신원(伸寃)하기를 도모하여 당년 12월에 거듭 3차례 고소장격인 소지(所志)를 올리고, 다음 해 정해년 2월에 또 정장(呈狀)하였는데, 그 문서들이 모두 오천고문서(烏川古文書)에 전한다. 또 종택 전래의 『先祖延諡後辨誣錄』이란 합집(合集) 문서들 가운데, ‘洛川呈英陽兼官初狀(丙戌 12月 初4日), 再呈兼管狀(初7日), 三呈兼官狀(17日)’ 등 이름으로 실리어 전하기도 한다.
이 3차례의 소송(訴訟) 때에는 마침 고을 원(員)이 타관서(他官署)와 겸임(兼任)의 영양현감(英陽縣監)이었기 때문에 귀찮기도 할 겸해서 전혀 해결해 줄 기미를 보이지 않았던 자취가 강하게 드러나 보이고 있다.
☆ 후조당(後彫堂) 근시재(近始齋)의 종계변무(宗系辨誣) 사건
문순공의 시호 파삭(罷削)을 획책한 바 이씨들의 노력은 일견(一見) 집요(執拗)하여 향현사(鄕賢祠)에 봉안된 노송정(老松亭)의 위패(位牌)를 탈취(奪取)하여 분봉(分奉)하는 정도로써 만족하지 않았다. 이어서 획책한 사건이 우리 족인(族人)으로 김정교(金庭敎)라는 이를 앞세워 시장(諡狀) 가운데에서 글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여러 부분을 근거 없이 비판하는가 하면, 근시재가 후조당의 후사(後嗣)라 한 바 곧 『無子以弟富儀子垓爲嗣』를 부정(否定)하면서 퇴계 선생 및 근시재 선생 문집 속의 여러 부분을 발췌하여 억설(臆說)을 창도(唱導)하고자 했다.
☆후조당 부자(父子) 종계변무(宗系辨誣)를 위한 예조소(禮曹訴)
이에 종중에서는 후조당이 근시재를 위하여 전계문(傳係文)을 작성하였던 융경(隆慶) 원년(1567, 明宗 22, 丁卯) 이후 260년 만에 다시 두 분 사이의 계후 입양 사실을 확인받고자 예조(禮曹) 및 예안현(禮安縣)에 소지(所志)를 올렸는데, 그 원문(原文)은 1982년 한국정신문화연구원(韓國精神文化硏究院) 간행한 『고전자료총서(古典資料叢書) 82-2, 광산김씨오천고문서(光山金氏烏川古文書), 七. 所志類, [八], p. 86-88.』에 실린 것을 볼 수 있다.
이 글의 번역은 1996년에 필자가 처음으로 하여 당시 개인홈페이지 및 예안파 초전(草田) 문중 홈페이지 올렸던 것인데, 최근 다른 이가 2009년에 그 글 일부를 초역(抄譯)한 것이 있지만 뜻을 잘못 짚은 풀이가 많이 보인다.
예안파 종중이 예조에 소지를 올렸던 결과의 판결은 그 제사(題辭)에서 보듯이 아주 명쾌하다.
『題辭:觀此家文蹟,則旣有曺夫人定倫之擧,所後之地則稱養父,所生之地則稱生父,世焉有不繼後而稱養父,向己不繼後而稱養父,向己子而生父者乎.況退陶先生之書,稱其父子者,非止一再,則今人雖自謂盡人之倫,孰有加於先生乎,然則翰林公之爲文純嗣,聖人復起不能易.今此曉曉之說,皆不合理之說,自當寢息,何之於上煩天聽乎向事.十三日. 禮曹(押) (禮曹之印, 方9cm 9個)』
『제사(題辭) 번역문(飜譯文): 이 집안의 문적(文蹟)을 살펴보니 이미 조부인(曺夫人)의 정륜(定倫)을 위한 거조(擧措)가 있었고 양자(養子)를 들인 처지(處地)를 양부(養父)라 칭하고, 낳은 바의 처지를 생부(生父)라 하고 있는데, 세상에 도대체 어찌 계후(繼後)를 하지 않았으면서 양부라 칭하며, 자기 자신에게 계후한 바도 없는데 양부라 칭하며, 자기가 낳은 아들에 대하여 [굳이] 생부라 하는 이가 있으리요. 하물며 퇴계 선생의 서간에서 ‘그 부자’로 일컬었음이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 요새 사람들이 사람의 윤리를 다한다고 해서 그 누구가 선생보다 더한 이가 있으리요. 그러므로 한림공(翰林公)이 문순공(文純公)의 후사(後嗣)가 된 것은 성인(聖人)이라 하더라도 바꿀 수가 없으리라. 요사이의 밝고 밝은 언설이 모두가 이치에 합당한 것은 아니지만, 먹고 잠자는 일을 가지고 어찌 위로 임금의 들으심을 번거롭게 하는가 할 일임.』
☆후조당 부자(父子) 종계변무(宗系辨誣)를 위한 정해년입지(丁亥年立旨)
이에 이어서 이룩한 큰 문중사가 바로 정해년(丁亥年, 純祖 27년)에 예안현(禮安縣)을 통하여 근시재(近始齋)가 문순공(文純公)의 후사(後嗣)임을 최후로 국가로부터 확인받고자 소송(訴訟)한 일이었다. 이 소송의 결과로 성급(成給)받은 판결문이 바로 종택(宗宅) 소장문서 정해년입지(丁亥年立旨)라는 것이다. 이 ‘정해년입지’는 종택 전래의 고문서 가운데 근시재에 대하여 읍청정(挹淸亭)이 당신을 생부(生父)라 하고, 후조당(後彫堂)은 또 당신을 양부(養父)로 지칭한 문서들을 중심으로 근시재와 후조당 사이의 후사 관계를 명증(明證)해 주는 문서였다.
정해년입지를 구성하는 기본 문서들은 오천고문서(烏川古文書) 등에서 대부분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서류들이었는데, 그 입지(立旨)를 구성하는 구체적 내용들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우선 입지 서두(序頭)의 글은 본손(本孫)이 그 입지(立旨)를 성급(成給)받고자 소지(所志)를 올리는 사유(事由)를 설명하고 있는데, 그 개략을 보이면 다음과 같다. 『저희들 9대조 문순공이 근시재께 가사전민(家舍田民)을 허급(許給)하는 전계문(傳係文)이 있으므로 그 후사(後嗣) 관계를 믿는 처지였는데, 이번 문순공(文純公) 명시(命諡)의 일로 김정교(金庭敎)라는 이가 무단히 분란(紛亂)을 일으켜 위로 천청(天聽)을 놀라게 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 일은 예조(禮曹)에 소지(所志)하여 변정(卞正)하였습니다만, 다만 본도(本道)에서 그 사실을 모르고 있겠기에 옛 서류들을 모아 확인을 받고자 하오니 성주(城主)께서 살피시와 그 입지(立旨)를 발급해 주시기 바랍니다.』
정해년입지를 이루는 중심격의 문서로 주지하는바 융경(隆慶) 원년(1567, 明宗 22, 丁卯)에 된 후조당의 전계문(傳係文)이다. 그것도 개인문서가 아니라 관부문서(官府文書)로 만들어진 것을 전제(轉載)한 모습이다. 곧 이 부분 문서는 먼저 『현내(縣內) 거주(居住) 생원(生員) 김부필(金富弼)이 나이가 어려 스스로 고장(告狀)할 수 없는 근시재를 대신하여 소지를 올리오니 현감(縣監)께서 처분(處分)해 주시기 바랍니다.』라 한 서두에 이어 『三歲前收養子老眉處成文』이란 제하(題下)에 『矣等結髮已久生子忘絶承祀無人則不孝之罪難乎免矣云云』으로 이어지는 명문(名文)의 전계문이 이어져 있다. 이 문서의 끝에는 재주(財主)의 서명(署名)이 있는데, 우리가 본 그대로 『自筆財主養父成均生員 金富弼, 財主養母晉州河氏』라 하였다. 어느 세상에 도대체 양자(養子)를 들이지도 아니한 형편에서 자신을 양부(養父), 양모(養母)라고 할 수 없는 것임은 불을 보듯 뻔한 것이다.
후조당은 이 전계문의 존재를 법적(法的)으로 확고한 것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 관부문서로 만들면서 당신의 글에 이어 부인(夫人) 진주하씨(晉州河氏)의 공함(公緘), 현접(縣接)의 생원(生員) 사촌제(四寸弟) 금응협(琴應夾), 김부륜(金富倫)의 증필(證筆) 초사(招辭)에 이어 현관(縣官)의 증필 등을 이은 다음에 그해(융경 원년, 1567) 12월에 예안현감(禮安縣監) 서명(署名) 발행의 입안(立案)으로 성급(成給)받았던 것이다.
관부(官府)의 확인을 거친 후조당의 전계문에 이어지는 문서는 그 전계문보다 7년 앞서 가정(嘉靖) 38년(明宗 14년, 1559) 2월 27일에 읍청정(挹淸亭)이 근시재(近始齋)에게 노비(奴婢)를 별급(別給)한 문서 2건이었다. 가정 38년이면 읍청정이 35세이고, 근시제가 5세 되던 해였다. 2건 중 앞엣 건은 오천고문서 가운데 심히 결락(缺落)된 모습으로 전하는 것인데, 그 내용을 간략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嘉靖三十八年己未二月二十七日,(缺)爲臥乎事段,汝亦生纔(三字缺),慈母見背,(三字缺)憫汝孤弱,躬親撫育,庶幾有所(缺)賴而(缺),又不幸奄(缺)母主孑孑孤立,予亦鰥居,勢難親育膝下,今當寄養聘母,將至遠離,情愛益切乙仍于,父邊傳來,婢彦今一所生,奴季守年九辛亥生,汝矣母邊傳來,奴鄭同良妻幷産所生,婢莫只年二十五乙未生等乙,別給爲去乎,後所生幷以子孫傳持,鎭長使喚爲乎矣,萬一別爲所有去等,此文字內用,告官辨正爲乎事:가정 38년 2월 27일에 別給하는 일이란 너가 태어나 열흘도 아니 되어 어머니의 상(喪)을 당하고 고아(孤兒)가 된 것을 긍휼히 여겨 내 스스로 무육(撫育)하고자 했으나……아버지가 외직(外職)에 계시던 중 하세(下世)하시어 어머니마저 외로이 혼자손이시고 나 또한 홀아비 처지라 형세가 슬하에서 친육(親育)할 처지가 아닌데, 빙모(聘母)를 봉양하고자 잠시 멀리 떠나야 하므로 사랑하는 정리(情理)가 더욱 절실(切實)해서 비(婢) 2명, 노(奴) 1명을 별급하노니,……』
이 문서의 서명(署名) 부분을 보면 ‘財主’는 읍청정의 자필(自筆)인데, 당신을 지칭하여 ‘父生員某’라고 하였다. 이어서 증인(證人)으로 6분의 서명과 착함(着銜)이 되어있는데, 삼촌숙(三寸叔) 생원(生員) 김부필(金富弼), 오촌숙(五寸叔)으로 생원 김부신(金富信), 생원 김부륜(金富倫), 생원 금응협(琴應夾), 유학 금응훈(琴應熏), 충의위(忠義衛) 김락춘(金樂春) 여러 분이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같은 날에 노비 별급이란 동일한 내용이면서 그 문서의 작성에서 상당히 작위(作爲)를 가한 듯 보이는 또 한 건의 별급문기가 작성되었고, 그것이 이른바 정해년입지 속에 포함이 된 것이다. 이 문서는 오천고문서에도 보이지 아니한다.
역시 그 내용을 약기(略記)하면 이 문서 또한 근시재에게 노비를 별급하는 일을 적은 문서였다. 곧 태어나 열흘이 못 되어 어머니를 여의고 겨우 한 살을 넘기자 할머니 또한 별세하여 외롭고 영락(零落)하기 비할 데 없어 거의 보전(保全)하기가 어려운 지경이었으나, 다행히 가형(家兄)께 보내 자라게 함으로써 슬하를 멀리 떠나 있으므로 사랑하는 정이 더욱 절실하여 노비를 별급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그 재주(財主)와 증인(證人)의 기록에서 일견(一見)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는데, 재주는 앞의 문서와는 달리 ‘自筆 生父 生員 金某“이고, 증인에서 양부(養父)일 후조당이 빠진 나머지 오촌숙 생원 김부신, 생원 김부륜, 충의위 김락춘, 생원 금응협, 유학 금응훈 다섯 분이었다.
같은 날 같은 내용의 문서 2건을 만들면서 한 곳에서는 ‘父某’라고 하였다가 다른 한 곳에서는 ‘生父某‘라고 하였으니, 계후(繼後)가 되도록 보낸 처지와 수양(收養)을 받은 처지를 확실히 하고자 일부러 2건 문서에서 체재(體裁)를 다르게 한 것 같아 보인다.
당신을 ‘生父’로 자처한 재주(財主) 읍청정의 노비(奴婢) 별급문서에 이어지는 문서는 놀랍게도 후조당을 양부(養父)로 표기한 문서였다. 오천고문서 중에도 보이는 ‘家傳草’라는 문서이다. 『養父天性孝友,志節淸亮,執心堅固,用意慈和……』로 시작되는 근시재의 미완성 작문인데, 오천고문서에서는 초두(初頭)의 작은 부분만 남은 상태로 기록되었다. 그러나 정해년입지 가운데 자료로 포함된 해당문서는 그보다 약간은 긴 글의 형태로 남아 전한다. 주지하듯이 이 글이 후대에 근시재선생문집(近始齋先生文集)으로 간행될 때 ‘伯考天性孝友 云云’으로 바뀌어 후손들이 길이 안타까워 하는바 된 내용이다.
이 문서의 중요한 포인트는 물론 ‘養父’라 칭한 부분일 것이다. 도대체 입양도 아니한 처지로 그 부모를 양부모라 하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정해년입지를 이루는 마지막의 고문서는 뜻밖에 관찰사(觀察使) 운암공(雲巖公)의 백모(伯母, 忠贊衛 敦勇校尉 諱 孝源公의 夫人) 오씨(吳氏)가 정덕(正德) 3년(燕山君 3년, 1508, 戊辰) 12월에 관찰공에게 노비(奴婢)와 전답(田畓)을 허여(許與)하는 문기(文記)이다. 주지하는 대로 교위공(校尉公)은 무후(無後)한 형편으로 서세(逝世)하였으므로 백모(伯母)는 그 가산(家産)인 노비, 전답을 모두 운암공에게 허여(許與)하고 나머지 노후를 봉양(奉養) 받으신 형편이었다. 가산의 허여 연유는 오씨가 자식이 없는 처지로 운암공이 태어나자 말자 1개월 쯤부터 오래도록 양육(養育)하여 비록 유모(乳母)가 따로 있었지만 당신 스스로 밤낮으로 안아 길렀으므로 그 친애의 정이 친자식이나 다름이 없기 때문이라 하였다.
이 문서가 입지 가운데의 한 문서로 첨입(添入)된 이유는 나름의 타당성을 가지는 것으로 보인다. 무후(無後)한 처지로 가산(家産)을 특히 친애(親愛)하는 후손에게 물려주는 일은 전대 운암공에게도 있었고, 후대 근시재에게도 있었다.
그런데 백모 오씨는 운암공을 위해 전계문을 작성하지도 않았고, 작성된 전계문을 관아에 올려 확인을 받아 벌률적 효력을 갖추도록 하지도 않았지만 후조당의 시대에는 그 일을 성심껏 알뜰히 처리하였다.
운암공도 생후 1개월 안 되어 오씨의 양육을 받았고, 근시재는 생후 7일부터 백부모에게 양육을 받았으며, 함께 백부모의 가산을 상속하였지만 그 처지는 크게 다르다는 걸 보이기 위한 표본으로 백모 오씨의 허여문기가 붙여진 것으로 보인다.
정해년입지를 구성하는 문서 중 한쪽은 생부, 혹은 양부를 밝혀 비록 예조에 소지를 올려 계후(繼後)를 확인받는 예사(禮斜)가 아니더라도 편법으로 후사(後嗣) 관계를 확인하는 근거가 되지만, 다른 한 쪽은 전혀 생양가(生養家)를 가리는 그런 조처가 없어 후사 관계를 확인할 수 없다는 것을 보이기 위한 배려(配慮)라고 믿는다.
☆영안부원군(永安府院君)의 후조당김선생 종계변무명증(宗系辨誣明證)
시호(諡號) 연관 시비의 대단원격(大團圓格)으로 이루어진 문서가 바로 여기서 살펴보고자 하는 바 시장(諡狀)을 지은 영안부원군(永安府院君) 김조순(金祖淳)의 글로 후조당김선생종계변무명증(宗系辨誣明證)이다. 이 글은 도광(道光) 10년(1830년, 純祖 30, 庚仁)에 작성된 것으로 탈초(脫草)하여 현대활자로 정리한 것이 1982년 [한국정신문화연구원(韓國精神文化硏究院), 고전자료총서(古典資料叢書) 82-2, 광산김씨오천고문서(光山金氏烏川古文書), 二二, 기록류․기타잡문(記錄類․其他雜文), <二>. P.463-465.]에 실려 있는데, 필자가 번역하여 소개한 바가 있다. 영안부원군은 이 글에 앞서 자신이 쓴 시장(諡狀)의 글을 비판한 영남사림(嶺南士林)에 영안답영남사림서(永安答嶺南士林書)라는 글을 보내어 후조당과 근시재의 종계(宗系)를 적극 변호한 바가 또한 있었다.
그 종계변무의 글은 1. 문순공부필후조당(文純公富弼後彫堂), 2. 한림공거상실적(翰林公居喪實蹟), 3. 동시제현기의지동(同時諸賢起義之同), 4. 가거신적(可據信蹟), 5. 권송암종계사실(權松巖宗系事實) 등 다섯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우선 맨 앞 후조당의 약전(略傳) 부분은 아주 짧은 글이면서 좀이 먹는 등으로 결락(缺落)된 글자가 많지만 남은 글들에서 대략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표출하고자 한 바였음을 추론할 수가 있다.
○ 문순공이 글로써 후사(後事)를 의탁(依託)하였으나 예조(禮曹) 입안(立案)의 예사(禮斜)를 받아두지 아니하였는데, 징사공(徵士公) 휘 부의(富儀) 호 읍청정(挹淸亭)께 단지 한 아들(一子) 뿐이었기 때문이다.
○ 양부(養父)의 거상(居喪)을 심상삼년(心喪三年)으로 하고, 생부(生父)의 상(喪)에 참최삼년(斬衰三年)으로 마친 것은 당시 통행되는 예법과는 다른데, 그러나 이는 예사(禮斜)를 받아두지 않았기 때문이고, 당시 제현(諸賢)의 의론이 그러했기 때문이다. 한림공은 스스로 종택(宗宅)으로 나아가 문순공(文純公)을 원묘(元廟)에서 받들었으며, 그 일을 종자(宗子), 종손(宗孫)으로 전하여 대(代) 진(盡)하도록 바꾸지 않았다. 대저(大抵) 문순공께서 예사를 받아두시지 않으셨음은 형제일자(兄弟一子)였으므로 사사로운 뜻을 펴시기 실로 난감하셨기 때문이었으며, 그래서 공권문서에서 기록되실 일에서도 사양(辭讓)하셨을 것이다.
○ 퇴계선생이 손자에게 쓴 편지에 “후조당이 그 아들을 시켜서”라 하였던 등등 신적(信蹟)으로 보아 한림공이 후조옹의 후사가 된 것은 명백하여 의심할 바 없다..
○ “김정교(金庭敎)가 그 문중에 죄(罪)될 일을 저질로 놓고서 모면하고자 한림공의 장적(帳籍)과 복제(服制) 등 일에 관하여 없는 일을 있는 일처럼 만들어 낼 계책으로 여기저기서 자료를 끌어다가 문순공이 무후하였던 증안(證案)으로 일컬었고 더욱이 관아에까지 송사(訟事)하여 여러 차례 천청(天聽)을 어지럽게 하였으니, 궁극적으로 그 죄상(罪狀)은 권희일(權希馹)보다 더할 것인데, 희일의 경우 그 죄값을 받았지만 김정교는 여태껏 몸을 마음대로 굴리면서 백일지하에서 먹고 숨 쉬며 멋대로 날뛰고 있는데 천리(天理)가 과연 이와 같을 수가 있겠는가”라 하였다.
이 무렵에 영안부원군의 이 글을 모본(模本)으로 한 오천(烏川)의 후조당 종계변무록(宗系辨誣錄)이란 책자가 간행된 것으로 보인다.
☆ 후조당 가장변파록(家狀辨破錄)과 후조당 선생 연시후변무록후편(延諡後辨誣錄後篇)
1825 을유(乙酉)에 문순공 후조당의 사시(賜諡)가 이루어지고, 이듬해 병술년 (丙戌年) 봄부터 이루어지는 연시(延諡)를 기화(奇貨)로 이씨들이 일으킨 사제동시(師弟同諡)의 불만(不滿)은 서울의 태학(太學)은 물론, 도내(道內) 및 향토(鄕土)로부터 큰 반향(反響)이 없어 다음해 정해년(丁亥年)부터는 비교적 잠잠해 진 처지였다. 그 동안 낙천사 변고, 문순공과 근시재의 종계변무 등을 획책하여 보았으나 세상의 여론이 꼭 그들의 편만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심중(心中)에 깊이 갈무리된 두 문중의 원념(怨念)은 그리 쉽사리 치유(治癒)되지가 않아 38년의 오랜 시간이 흐른 1862년(哲宗 13年, 壬戌)에 이르러 이씨측에서 이른바 후조당 가장변파록(家狀辨破錄)이란 책자를 내기에 이르렀다. 그 중심 내용은 병술년 당시의 이씨들의 주되는 비판점이었던 가장(家狀) 속 부분 글들에 대한 재론(再論)이었다. 이에 맞서 오천에서도 후조당 선생 연시후변무록후편(延諡後辨誣錄後篇)이란 책자를 간행혔는데, 역시 병술년 당시에 하였던 답변 내지는 대응(對應)이 주가 된 내용이었다.
이하에서는 장절(章節)을 바꾸어 위와 같은 전말(顚末)을 구체적으로 살필 수 있는 종택 소장 고문서를 중심으로 그 동안 필자가 정리하였던 바 크고 작은 글들을 20여 편 골라 편집하여 후손들의 참고에 자(資)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한다. 이 글들의 합집(合輯)이 혹시 누군가의 손에 의해 한 권의 작은 책자(冊子)로 이루어질 날을 고대하여 보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