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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 太始紀 신시씨가 임금이 되어 신(神)으로서 가르침을 베풀며, 타고난 떳떳한 성품을 보존케하고 두루 보살펴 배불리 먹이고 양육하며 무성하게 불어남을 모두 받아들이니, 천하의 백성과 사물은 이로서 번성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때는 개벽한 지 아직 멀지 않은 때인지라, 곳곳에 초목이 무성하고 날짐승이며 들짐승이 어지러이 섞여 있어 사람들의 괴로움이 매우 심하였고, 더욱이 사나운 짐승과 독충들도 때를 가리지 않고 다투었기에 사람들의 피해 또한 적지 않았다. 신시씨는 곧 치우씨(蚩尤氏)에게 명하여 이를 다스리게 하였다. 치우씨는 진실로 만고에 있어 강인하고 용맹함의 조상이 되니, 천지를 움직여 휘두르는 힘과 바람·번개·구름·안개를 부리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으며, 또한 칼·창·큰도끼·긴창 등을 만들어 이로서 초목과 금수며 벌레와 물고기의 무리를 다스렸다. 이에 초목이 차츰 걷히고 금수와 벌레며 물고기들이 깊은 산 속이나 큰 못 속으로 피하여 달아나 숨어 버려서 다시는 백성들이 살아가는데 해악이 되지 않았다. 이로서 치우씨는 대대로 병기 만드는 일을 맡았으며, 항시 나라 안을 편안하게 안정시키고 적을 토벌하는 일을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神市氏旣爲君長, 以神設敎, 存其彛性, 周護飽養, 聽其繁衍, 天下民物, 於是漸盛. 但此時, 開闢不遠, 隨處草木荒茂 鳥獸雜處, 人民艱困殊甚, 且猛獸 毒蟲不時衝動, 人民被害不少. 神市氏, 卽命蚩尤氏治之. 蚩尤氏, 實爲萬古强勇之(租)[祖], 有旋乾轉坤之力, 驅使風 雷 雲 霧之能, 又造刀 戟 大弩 巨斧 長槍, 以之而治草木 禽獸 蟲魚之屬. 於是草木開除, 禽獸蟲魚, 僻處深山大澤, 不復爲民生之害矣. 是以, 蚩尤氏世掌兵戎制作之職, 時常鎭國討敵, 未嘗少懈.
신시씨는 사람의 거처가 이미 완비되고 살아서 꿈틀거리는 사물들 또한 각기 그 마땅한 처소를 얻었음을 보고, 이에 고시씨(高矢氏)로 하여금 먹여 살리는 일을 맡도록 하였으니, 그것은 곡식을 주관하는 일이다. 이때는 곡식을 심고 거두는 일이 아직 갖추어져 있지 않았으며 불씨 또한 없던 때라, 백성들은 모두 풀의 푸성귀나 나무의 열매를 먹고 신선한 피를 마시며 날고기를 먹었으니, 그 고초는 참아내기 어려웠다. 고시씨가 이에 점차 곡식을 심고 거두는 방법은 가르쳤으나, 여전히 불이 없는 것이 근심이 되었다. 하루는 우연히 깊은 산 속에 들어가니 높이 우뚝 솟은 나무들이 어지럽게 쓰러져 있는 것이 온 사방으로 보였는데, 앙상하고 말라버린 체로 메마른 가지들만이 남아서 서로 어지럽게 얽혀져 있었다. 한참 동안 아무 말 없이 서 있으려니, 갑자기 숲으로 큰 바람이 불어와 모든 구멍들이 성난 목소리를 내뱉고 앙상한 가지들은 서로 밀치며 비벼대었는데, 마찰되어 일어나는 불길이 번쩍번쩍 빛나는 듯 언뜻 일어나다가는 도리어 사글어드는듯 하더니 이내 맹렬하게 타오르는지라, 깨달음이 있어 이르기를 [이것이로다! 이것이로다! 이것이 바로 불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로구나] 하였다. 돌아와서 마른 홰나무 가지를 비벼 불을 일으키려 하였으나 아직까지는 완전하지 못하였다. 다음 날 다시 숲속으로 가서 생각에 잠겨 배회하고 있으려니, 홀연히 한 마리의 줄무늬 범이 으르렁거리며 달려들기에, 고시씨가 벽력과 같은 소리로 꾸짖으며 돌을 날려 호되게 내려치니 바위 모서리에 빗맞으며 번쩍이면서 불길이 일어났다. 이에 크게 기뻐하고 돌아와 다시 돌을 부딪쳐서 불을 얻게 되었다. 이로부터 백성들은 음식을 익혀 먹을 수 있게 되었고, 주조하는 기술이 비로소 흥성하게 되었으며, 제작의 능률 또한 점차 나아지게 되었다.
神市氏, 見人居已完 蠢物各得其所, 乃使高矢氏, 專掌 養之務, 是爲主穀. 而時, 稼穡之道不備, 又無火種, 民皆就食草蔬木實, 鮮血, 茹生肉, 殆不堪其苦. 高矢[乃氏](氏, 乃)漸敎稼穡之方, 猶以無火爲憂. 一日, 偶入深山, 只看喬林荒落, 但遺骨骸老幹枯枝, 交織亂叉. 立住多時, 沈吟無語, 忽然大風吹林, 萬竅怒號, 老幹相逼, (揆)[擦]起火光, 閃閃 , 乍起旋消乃猛然, 省悟曰: [是哉! 是哉! 是乃取火之法也.] 歸取老槐枝, (揆)[擦]而爲火, 功猶不完. 明日, 復至喬林處, 徘徊尋思, 忽然一個條紋大虎, 咆哮躍來, 高矢氏大叱一聲, 飛石猛打, 誤中巖角, 炳然生火. 乃大喜而歸, 復擊石取火. 從此, 民得火食, 鑄冶之術始興, 而制作之功, 亦漸進矣. 또한 신지씨(神誌氏)로 하여금 글을 짓게 하였다. 무릇 신지씨는 대대로 임금의 명을 주관하는 직책을 맡으며 명령의 출납과 임금을 보좌하는 임무를 관리하였는데, 단지 한낱 혀에만 의지할 뿐, 일찍이 글로서 기록하여 보관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하루는 사냥을 나갔는데, 갑자기 놀라 달아나는 암사슴 한 마리를 보고 활을 당겨 쏘려 하였으나 순식간에 그 종적을 놓쳐 버렸다. 이에 사방을 수색하며 산과 들을 두루 지나 넓은 모랫벌에 이르러 비로소 어지럽게 찍혀있는 발자국을 보니 달아난 방향이 명확하게 드러나는지라, 머리를 숙인 채 생각에 잠겼다가 잠시간에 불현듯 깨달아 말하기를 [기록하여 두는 방법은 오직 이와 같을 따름이구나! 이와 같을 따름이야!] 하였다. 그 날 사냥을 마치고 돌아와 연거푸 깊이 생각하며 널리 만물의 모습을 관찰하다가, 며칠 지나지 않아 깨달음을 얻어 글을 만들어 내니, 이것이 태고 문자의 시작이다. 그러나 후세에 세월이 까마득히 오래되어서 태고 문자는 사라지고 존재하지 않으니, 생각건대 그 꾸밈새가 아직은 완전하지 못해서가 아닌가 한다. 듣건대, 육진(六鎭)(1)의 땅이나 선춘(先春) 등지의 암벽 사이에 때때로 문자를 조각한 것이 발견되었다고 하는데, 범자(梵字)도 아니요 전자(篆字)도 아닌 것으로 사람들이 능히 알아먹지 못한다고 하니, 어쩌면 그것이 신지씨가 지은 옛문자가 아닌가 한다. 1.【六鎭】: 조선 세종때 북쪽 변방을 지키기 위해 세운 여섯 개의 군 주둔지로서, 경원(慶源)·경흥(慶興)·부령(富寧)·온성(穩城)·종성(鐘城)·회령(會寧)이다.
又使神誌氏作書契. 盖神誌氏, 世掌主命之職, 專管出納獻替之務, 而只憑唯舌, 曾無文字記存之法. 一日, 出行狩獵, 忽驚起一隻牝鹿, 彎弓欲射, 旋失其(跡)[踪]. 乃四處搜探, 遍過山野, 至平沙處, 始見足印亂鑽, 向方自明, 乃俯首沈吟, 旋復猛省曰: [記存之法, 惟如斯而已夫! 如斯而已夫!] 是日, 罷獵卽歸, 反復審思, 廣察萬象, 不多日, 悟得 成文字, 是爲太古文字之始矣. 但後世年代邈遠, 而太古文字泯沒不存, 抑亦其組成也, 猶有不完而然歟. 嘗聞, 六鎭之地及先春以外岩石之間, 時或發見雕刻文字, 非梵非篆, 人莫能曉, 豈神誌氏所作古字歟? 고시씨 역시 대대로 곡식을 주관하는 직책을 맡았으며, 후세에 치우씨·고시씨·신지씨의 후예들이 가장 번창하여 융성하였다. 치우씨의 부족은 서남의 땅에 자리를 잡았고, 신지씨의 부족은 북동의 땅에 많이 정착하였는데, 오로지 고시씨의 후예들만이 동남쪽에 넓게 거처하다가 더욱더 이동하여 변진(辰弁)의 뭇 부족들이 되었으니, 후에 삼한(三韓)이라 일컬어지는 것은 모두 그의 후손들이다. 삼씨(三氏)의 후예들은 또한 아홉 갈래로 자세하게 나누어지는데, 곧 견이( 夷)·우이( 夷)·방이(方夷)·황이(黃夷)·백이(白夷)·적이(赤夷)·현이(玄夷)·풍이(風夷)·양이(暘夷)(2)의 무리들이 모두 같은 조상의 다른 가지일 뿐, 서로 그리 멀지는 않다. '이(夷)'자는 큰 활을 지칭하는 것이다. 치우씨가 칼과 창이며 큰 쇠뇌를 만들기 시작한 이후로 사냥하고 전쟁함에 있어서 이러한 것을 병장기로 삼으니 중토의 뭇 부족들이 큰 활의 쓰임을 매우 두려워하였으며, 그 위풍을 듣고 간담이 서늘하곤 한 지가 오래되었기에 우리 민족을 일컬어 '이(夷)'라고 한 것이다.《설문해자(說文解字)》(3)에 이르기를 [이(夷)는 '크다(大)'는 것과 '활(弓)'에서 유래하였으며, 동방의 사람을 말한다]라고 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중니가《춘추》를 짓기에 이르러 이(夷)의 이름을 마침내 융(戎)이나 적(狄) 등과 아울러 비속한 명칭으로 삼아 버리니, 분할 따름이다. 뒷날 견이와 풍이는 따로 서남으로 옮겨가서 항시 중토의 여러 부족들과 서로 엎치락 뒷치락 세력을 다투었는데, 풍이는 바로 치우씨의 일족이다. 2.【九夷】:《爾雅·釋地》에는 [동방의 종족인 아홉 夷族과 북방의 종족인 여덟 狄族과, 서방의 종족인 일곱 戎族과, 남방의 종족인 여섯 蠻族을 통틀어 四海라고 일컫는다]라하여, '九夷'에서 '아홉'이라는 숫자는 단지 다른 종족에 비해 종족의 갈래 등이 많음을 의미하였는데, 뒤에 이를 동이의 아홉종족으로 정형화 하기에 이르렀다.《논어·자한편》의 疏에는 [동방에 구이가 있는데, 玄 , 樂浪, 高驪, 滿飾, 鳧臾, 索家, 東屠, 倭人, 天鄙 등이 그것이다]라 하였다. 3.《설문해자》의 이(夷), 만(蠻), 융(戎), 적(狄). 1) 夷 [說文] 東方之人也從大從弓(동방의 사람을 말한다. '大'에서 유래하였으며, 또한 '弓'에서 유래하였다). [注] (상략) 羊部에 이르기를 [남방의 종족을 지칭하는 '蠻' 또는 ' '은 곤충( )에서 유래된 글자이며, 북방의 종족을 지칭하는 ' '은 벌레( )에서 유래된 글자이며, 서방의 종족을 지칭하는 '羌'은 양(羊)에서 유래된 글자이며, 서남의 종족을 가리키는 ' 人'과 '焦僥'는 평범한 사람(人)에서 유래된 글자들이다]라고 하였다. 이는 대개 그 땅에 순응하고 있는 것으로서 자못 그 땅의 이치에 따르는 품성을 지니고 있는데, 오직 동방의 夷만이 '크다(大)'는 것에서 유래되었으니 대인(大人)이라 할 만하다. 이인(夷人)의 풍속은 어질다고 하는데, '어질다'함은 곧 장수를 의미하므로 '군자의 나라'·'불사의 나라'라는 이름이 있게 된 것이다. 생각건대, 하늘은 크고도 존귀하며, 땅도 크고도 존귀하며, 사람 역시 크고도 존귀한 것이다. 크고도 존귀함을 나타내는 '大'자는 사람의 형상을 본 뜬 것인데, '夷'자의 전체(篆體)가 '大'자에서 유래된 것인 까닭에 '夷(동방)'가 '夏(중화)'와 더불어 다르지 않다. '夏'라 함은 중국사람을 말한다. '弓'에서 유래되었다는 것은 숙신씨가 호시 또는 석노와 같은 것을 헌납한 것을 말한다. (하략) 2) 蠻 [說文] 南蠻(남방의 종족을 말한다). [注] <직방씨>에서는 '여덟 부류의 남방종족'이라 하였으며,《시경·이아》에서는 [아홉 부류의 이인(夷人) . 여덟 부류의 적인(狄人) . 일곱 부류의 융인(戎人) . 여섯 부류의 만인(蠻人)]이라 하고는 이들을 일컬어 '사해(四海)'라 하였다.《왕제》에서 말하기를 [남방을 일컬어 '蠻'이라 한다] 하였으며,《시경·소아》의 각궁에서 [오랑캐 같은 행동을 하니]라 하고는, 그 모전에 가로되 ['蠻'이란 남방의 만인(蠻人)을 말한다] 하였으며,《시경·소아》의 채사에서 [어리석게 준동하는 형땅의 오랑캐]라 하고는, 그 모전에 가로되 [형만이란 형주의 만인을 말한다]하였다. [說文] 從 (뱀의 종류로서 ' '에서 유래되었다). [注] '蠻'자가 '벌레( )'에서 유래되었으며, 그로 말미암아 '蠻'이 뱀의 한 종류임을 말하는 것이다. 뱀이란 벌레를 말하는 것이고 '蠻'이나 ' '은 모두 사람을 지칭하는 것인데, 그 글자가 '벌레'에서 유래한 까닭에 해당 부수의 끝에 놓이게 된 것이다. 이것은 ' '이 부의 끝에 놓이고 '狄'이 犬부의 끝에 놓이고 '羌'이 羊부의 끝에 놓이는 등이 같은 것이다. 3) 戎 [說文] 兵也(병장기를 말한다). [注] (상략)《시경·소아》에 [그럴 때는 우릴 돕지 않는다네(烝也無戎)]라 하였는데, 그 毛箋에 이르기를 ['戎'이란 '相(돕다)'을 말하는 것인데, 그 파생된 뜻에서 변방민족을 뜻하는 서쪽 오랑캐가 되었다]고 하였다. (하략) 4) 狄 [說文] 北狄也(북방의 종족을 말한다). [注] 적적(赤狄)은 이전에 중국에서 섞여서 정착하여 살던 북방종족의 일종일 뿐이다.《설문해자》의 蟲부에서는 남방의 종족을 '蠻'이라 하고 동남방을 ' '·'越'이라 하였으며, 大부에서는 동방을 '夷'라 하고, 羊부에서는 서방을 '羌'이라 하였고, 부에서는 북방을 ' '이라 하였는데, 곧 북방의 ' '이란 필시 북적(北狄)을 말한 것이다. '狄'과 ' '은 모두 북쪽에 있으나 ' '은 동북쪽에 있었고 '狄'은 정북쪽에 있었음을 말한다.《석지》에 가로되 [아홉 부류의 이인(夷人), 여덟 부류의 적인(狄人), 일곱 부류의 융인(戎人), 여섯 부류의 만인(蠻人)]이라 하였는데, 이들을 일컬어 사해(四海)라 하였다. 여덟 부류의 만인(蠻人)은 남방에 있었으며, 여섯 부류의 융인(戎人)은 서방에 있었으며, 다섯 부류의 적인(狄人)은 북방에 있었다. 이순이 가로되 [다섯 부류의 적인(狄人)이라 함은 그 첫 번째를 일컬어 월지(月支)라 하며, 두 번째가 예맥(穢貊)이며, 세 번째가 흉노(匈奴)이며, 네 번째가 비우( 于)이며, 다섯 번째를 일컬어 백옥(白屋)이라 한다]고 하였다.《왕제》의 명당위에서는 모두 [동방의 이인 . 남방의 만인 . 서방의 융인 . 북방의 적인]이라 하였다. [說文] 本犬 (본래 개의 한 종류이다). [注] 이것은 '蠻'·' '이 본래 뱀의 한 종류이며, ' '이 본래 벌레의 한 종류이며, '羌'이 본래 양의 한 종류인 것과 같은 예이다. [說文] 狄之爲言淫 也('狄'은 '음란하다 괴벽하다'라는 말이 된다). [注] 이것은 [공자가 이르기를 ' '은 나쁘다는 것을 말한다 하였으니, ' '이란 곧 악함이다]라고 한 것과 같은 예이다. '惡'과 ' ' 및 ' '과 '狄'은 모두 첩운으로 글자의 뜻을 새겼다.《풍속통》에 말하기를 [적인(狄人)들은 에비와 자식간에, 또는 제수와 시숙간에 같은 동굴 속에서 생활하면서 따로이 구별하지 않으니 '狄'이라 함은 편벽됨을 말한다. 그 행위는 도리에 어긋나 편벽되며 그 종류에는 다섯 부류가 있다]고 하였다. 생각컨대 ' '은 지금의 '僻'자이다. 뒷날 견이와 풍이는 따로 서남으로 옮겨가서 항시 중토의 여러 부족들과 서로 엎치락 뒷치락 세력을 다투었는데, 풍이는 바로 치우씨의 일족이다.. 현재 중국의 남부지방 귀주성(貴州省) 등에 거주하고 있는 소수민족인 묘족(苗族)은 '치우씨(蚩尤氏)'를 종족의 시조로 여긴다. * 묘족의 분류와 연원은 오랜 옛적의 '구려(九黎)'·'삼묘(三苗)'·'남만(南蠻)' 등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우리 나라(중국)의 장강 중하류와 황하 하류 일대에는 아주 오랜전부터 매우 많은 인류들이 생활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누대에 걸친 번식과 힘든 노동을 통하여 지금으로부터 약 5,000여 년 전에 점차 부락연맹을 형성하게 되었다. 그 부락연맹을 '구려(九黎)'라고 부르는데 치우(蚩尤)를 수령으로 하고 있었다.《국어(國語)》의 <초어(楚語)>에서 [구려는 치우의 무리이다] 하였다.《서(書)》의 <여형석문(呂刑釋文)>과《여씨춘추》의 <탕병(蕩兵)> 및《전국책》<진(秦)>에서 고유(高誘)의 주석 등에 모두 '치우'가 구려의 임금임을 말하고 있다. 그들은 우월한 지리적인 조건에 의지하여 부단히 근면하며 개척하여 생산력을 높임으로서 사회 경제가 발전하였으며, 조국 동방의 강대한 부락으로 일약 자리잡게 되었다. 그와 같은 시기에 황제(黃帝)가 수령으로 있는 또다른 하나의 부락연맹이 황하 상류의 희수(姬水)에서 일어나 황하의 하류를 향하여 발전하고 있었는데, 구려의 치우와 충돌이 발생하여 결국에는 탁록( 鹿)에서 구려와 전쟁을 치르게 되었다. 구려는 전쟁에서 패한 후 그 세력이 크게 쇠약해졌으나 여전히 장강 중하류 일대의 광활한 지역에 자리잡고 있었다. 《묘족간사(苗族簡史)》제1장 族源, 貴州民族出版社 1985년. * 묘요계苗 系 ― 이전의 역사학자들은 옛날의 삼묘三苗가 곧 지금의 묘족苗族이라 하였으나 현대 학자들은 많이들 그것을 부인한다. 지금의 묘요는 곧 춘추 이후의 남만南蠻인데, 한漢 때는 무릉만武陵蠻, 그리고 육조六朝 시기에는 형옹주만荊雍州蠻 등의 명칭이 있었으며 송 시기에 비로소 요 라 불려지고, 원 시기에 또 묘苗라는 명칭이 있게 되었다. 청 대에 이르러 더우기 '묘족苗族'이라는 명칭으로 서남 지역 각 성의 토착민족들을 통괄하였었다. 현대 학자들은 많이들 서남의 민족을 셋으로 나누어 분석하는데, 오로지 명칭과 작은 갈래에 있어서만 약간의 차이가 있다. 묘苗와 요 는 실제로 하나의 민족이기에 합쳐서 일컫는 것이다. 그들의 주거지가 예전에는 장강 유역이었으나 지금은 물러나와 호남湖南, 귀주貴州, 광서廣西, 광동廣東 등의 산지에 거처하고 있다. 林惠祥 著《중국민족사》제1장 중국민족의 분류 * 묘족(苗族) 개괄. [분포 지역] 귀주성(貴州省), 호남성(湖南省), 운남성(云南省), 광서장족자치구(廣西壯族自治區), 사천성(四川省), 광동성(廣東省). [인구] 5,021,175명. (1982년 통계자료에 의한 수치이며, 장족(藏族) 1,338만, 회족(回族) 722만, 위구르족(維吾爾族) 596만, 이족( 族) 545만에 이은 다섯번째의 중국 소수민족이다.)
高矢氏, 亦世掌主穀之職, 而後世蚩尤 高矢 神誌之苗裔, 繁衍最盛. 蚩尤氏之族, 則占居西南之地; 神誌氏之族, 則繁殖於北東之地; 獨高矢氏後裔, 廣處東南, 轉流爲辰弁諸族, 後之所謂三韓者, 皆其孫也. 三氏苗裔, 又細分九派, 卽 夷 夷 方夷 黃夷 白夷 赤夷 玄夷 風夷 暘夷之屬, 皆異支同祖, 不甚相遠. 夷之爲言, 大弓之稱也. 盖自蚩尤氏作刀 戟 大弩以後, 狩獵征戰, 賴以爲武, 中土諸族, 甚畏大弓之用, 聞風膽寒者久矣. 故謂我族曰夷.《說文》所謂: [夷, [人人大]人人弓, 東方之人]者, 是也. 乃至仲尼《春秋》之作, 而夷之名, 遂與戎狄幷爲腥 之稱, 憤哉! 後世 夷 風夷, 分遷西南, 恒與中土諸族, 互相 , 風夷則卽蚩尤(氏)之一族也.
이 보다 앞서, 치우씨가 비록 그렇게 날짐승과 들짐승 및 벌레와 물고기 등의 무리를 몰아내긴 하였지만, 사람들은 아직까지 흙굴에서 사는 까닭에 아래로부터의 습한 기운이 사람에게 해를 끼쳐 질병을 일으켰다. 게다가 짐승들을 한차례 휘몰아 내쫓으니, 점차 스스로 물러나 피하고 숨어 버린 까닭에 잡아먹기에 불편하였다. 신시씨가 이에 치우씨로 하여금 사람이 거처할 만한 것을 짓게 하였으며, 고시씨에게는 소·말·개·돼지·수리·범 등의 짐승을 사로잡아 데려와서 가두어 기르게 하였으며, 또 주인씨(朱因氏)를 신임하여 그에게 남녀간에 장가들고 시집가는 법을 정하게 하였다. 무릇 지금의 사람들이 힘센 장사를 두고 '지위'라 함은 치우씨의 이름이 잘못 전하여 진 것이며, 밭갈고 농사짓거나 나무를 하고 짐승을 기르는 사람들이 밥을 먹을 때 '고시례' 하며 축원하는 것은 고시씨를 일컫는 것이며, 혼인에서 중매를 서는 것을 '주인 선다'라고 말하는 것 또한 주인씨의 이름에서 남겨진 명칭이다. 先是, 蚩尤氏, 雖然驅除鳥獸 魚之屬, 而人民猶在土穴之中, 下濕之氣逼人成疾. 且禽獸一經窘逐, 漸自退避藏匿, 不便於屠食. 神市氏, 乃使蚩尤氏, 營造人居; 高矢[氏], 生致牛 馬 狗 豚 雕 虎之獸而牧畜; 又得朱因氏, 使定男女婚娶之法焉. 盖今之人謂匠師曰智爲者, 蚩尤氏之訛也; 耕農樵牧者, 臨飯而祝高矢者, 高矢氏之稱也; 婚娶之主媒者曰朱因者, 亦朱因氏之遺稱也.
이때는 신시씨가 세상에 내려온지 이미 수천 년이 되었으니, 백성과 사물들은 더욱 많아졌고 땅의 경계는 더욱 넓어졌다. 이에 다시 형벌과 질병 및 선악을 주관하고 백성들을 보살펴 이끌 수 있는 직책을 설치하고, 금수와 가축의 이름으로 벼슬을 이름하였으니, 호가(虎加)·우가(牛加)·마가(馬加)·응가(鷹加)·노가(鷺加)(4) 등의 명칭이 있게 되었다. 무릇 소와 말 그리고 개와 돼지 등의 무리는 모두 당시에 백성들이 기르는 것으로서, 이에 의지하여 생업을 삼았던 것이며, 범과 매 및 해오라기 등은 나라안에 서식하는 새와 짐승들이니, 이로서 관직의 성격을 나타낸 것이다. 후세 부여국(夫餘國)에도 여전히 이러한 풍속이 전해져 역시 금수와 가축의 이름으로 벼슬을 일컬었다 하는데, 이를 모두 빠짐없이 적을 수는 없다. 4.【加】 * 夫餘의 官名 '加'를 '家'자의 잘못된 번역으로 보거나 남자의 존칭으로 보아 '커'로 읽어야 한다는 견해도 있었으나, 高句麗語의 皆 및 新羅語의 翰·干 등과 일치하는 것으로서, 본래는 部族長을 의미하였는데, 뒤에 王 또는 大官의 칭호로 되었다는 견해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滿蒙系統의 汗(Han·Kan)·可汗(Gahan·Kagan)과 같은 말로 이해된다. 夫餘傳의 '加'는 部族長이나 官名에 모두 쓰이고 있는데, 이는 원래 부족장을 의미하는 말인 '加'가 국가 형성의 초기과정에서 族的 紐帶感이 강한 單位政治體의 大小族長勢力이 연맹적 결속의 단계를 거쳐 집권적 국가의 지배신분층으로 결집되어 가면서, 점차 중앙의 官名으로 변천되어 감을 보여 주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한편 馬加·牛加· 加·狗加에 대하여는 일찍부터 윷 말판의 도·개·걸·윷에 대응되는 명칭으로 본 견해가 있어 왔는데, 이와는 달리 馬加의 馬는 '마리· '의 表音으로 보아 新羅의 麻立干과 같은 계통의 官名으로 보고, 牛加의 牛는 '우·위'의 音譯으로 보아 고구려의 于臺(優臺)와 같은 官名으로 보는 경우도 있다. 《중국정사조선전역주》徐榮洙 注. * [按, 加字當爲家字之誤. 猶今蒙古謂, 典羊之官曰和尼齊, 典馬者曰 齊, 典駝者曰特默齊, 皆因所牧之物以名其職. 正如《周禮》羊人犬人及漢狗監之掌. 范蔚宗不解方言, 好奇逞妄, 殊爲 謬(생각건대, 加자는 마땅히 家자의 오자일 것이다. 그것은 마치 지금의 몽고에서 양을 관장하는 벼슬을 '화이제'라 하고, 말을 관장하는 자를 '마이제'라 하고, 낙타를 관장하는 자를 '특묵제'라 하는 것과 같이, 모두 맡은 사물에 기인하여 그 직위를 이름한 것이다. 바로《주례》의 '양인'과 '견인' 및 한나라 때의 구감의 직위와 같다. 범엽이 방언을 이해하지 못하고, 더욱이 기이한 것을 좋아하며 망령된 것에나 만족을 느끼는 까닭에 매우 그르친 것이라 할 것이다).] 《滿洲源流考》권18 국속3 注.
此時, 神市氏之降世, 已數千載, 而民物益衆, 地域愈博. 於是, 復置主刑 主病 主善惡及監董人民之職, 以獸畜名官, 有虎加 牛加 馬加 鷹加 鷺加之稱. 盖牛 馬 狗 豚之屬, 皆當時民衆養生之料, 而賴以爲業者也; 虎與鷹 鷺者, 境內棲息之鳥獸, 而以表官職之[性也. 後世夫餘國, 猶傳此俗, 亦以獸畜名官, 此不可 述焉.
신시씨가 이미 가르침을 세워 백성을 거느리니 백성들은 모두 서로 도우며 흡족히 여겼다. 이에 태백(太白)의 꼭대기에 오르고 대황(大荒)의 들녘에 이르러 천지를 바라보니 쓸쓸하고 고요할지언정 그 기운의 틀은 쉼이 없었다. 해와 달은 정신없이 달음박질치면서도 곧고 밝음은 변하지 않았으며, 봄과 가을은 차례대로 잇대어 가고 만물은 쉬지 않고 자꾸만 쫓아 돌아갔다. 이에 천지의 깊고도 묘한 이치는 숫자에 의지하여 그 변화를 살펴볼 수 있음을 미루어 깨닫고, 사람들이 의지하여 따를 만한 법칙을 새로 만드니, 이것이 곧 역리(易理)의 근원이다. 당시에는 요동의 심양 및 유연(幽燕)(5)의 땅이 이미 우리 민족들이 농사짓고 유목하던 곳이었다. 복희씨(伏犧氏)(6)가 마침 이때에 풍족(風族)에서 태어나서 숫자에 의지하여 변화를 바라보는 이치에 대하여 자세히 익힌 뒤, 서쪽으로 중토로 나아가 수인씨(燧人氏)의 세상을 이어 황제가 되어 사황(史皇)의 도움과 하도(河圖)의 상서러움을 얻어서 팔괘(八卦)를 그리니, 중토 역리(易理)의 원조가 되었다. 무릇 음과 양이 줄고 늚에 대한 이치는 우리로부터 발원하였으나 마침내 저들 나라의 쓰임이 되었는데, 근세에 와서 우탁(禹倬)(7)이《역(易)》을 전한 까닭으로 도리어 위대한 공로자가 되었다 하니, 조물주의 헤아리기 어려운 뜻은 또한 괴이하다 할 것이다. 복희씨는 스스로 능히 희생(犧牲)을 잘 길들이고 복종케 하여 그 위엄이 승냥이와 표범에까지 이르렀기에 '복희(伏犧)'라는 이름이 그로 연유한 것이며, 풍족에서 태어난 까닭으로 '풍'을 성씨로 삼았다. 용(龍)으로 벼슬을 기록한. 것 또한 호가(虎加)나 마가(馬加)라고 일컬음과 같은 유형에서 근원한 것이다. 5.【幽燕】: 유주(幽州)를 포함하는 옛 연(燕)나라의 땅을 말하는 것으로, 대략 요서와 하북지방을 가리킨다. 6【太昊 伏羲氏】: 상고 시대의 제왕. 복희를 또는 복희(伏 ), 복희( ), 복희(宓犧), 포희(包犧), 포희( 犧)라고도 한다. 풍(風)씨 성이다. 처음으로 팔괘(八卦)를 짓고 서계(書契)를 만들었으며, 사냥하고 고기 잡으며 목축하는 것을 백성에게 가르쳤다. 진(陳)에 도읍하여 재위 115년에, 뒤로 15대를 전하여 무릇 1,260년 동안 이어졌다고 한다. 7.【禹倬】: 고려 26대 충선왕 때의 학자. 관직에서 물러나 역학을 연구하였다. 송나라에서 정주학(程朱學)에 관한 책이 들어왔을 때 한 달 동안 밖에 나가지 않고 연구하여 이를 해득했다고 한다.
神市氏, 旣立敎御民, 民皆協洽. 乃登太白之 , 臨大荒之野, 觀天地寂然而氣機無息, 日月奔馳而貞明不易, 春秋代序而萬物循回, 乃推天地玄妙之理, 倚數觀變而創成人民依從之則, 是乃易理之原也. 當是之時, 遼瀋.幽燕之地, 已爲我族耕農游牧之所. 伏犧氏, 適以是時, 生於風族之間, 熟知倚數觀變之道, 乃西進中土, 代燧人之世而爲帝, 又得史皇之輔 河圖之瑞, 畵成八卦, 爲中土易理之元祖. 盖陰陽消長之理, 發源於我而卒爲彼國之用, 近世禹倬, 以傳《易》之故, 反爲偉功, 造翁難測之意, 盖亦怪哉! 伏犧氏, 自能馴伏犧牲, 威降豺豹, 伏犧之名, 因於是也, 生於風族, 以風爲故姓也. 以龍紀官者, 亦原於虎加 馬加之類也.
신시씨가 세상을 다스린지 더욱 오래되니, 치우·고시·신지·주인씨 등이 모두 같이 사람간의 삼백 예순 여섯 가지 일을 다스려, 남녀와 부자 및 군신간의 일이며, 의복과 음식 및 궁실의 일은 물론, 머리카락을 땋고 머리를 덮는 일에 관한 법도를 차례차례 풍속으로 이뤄가게하였기에 하늘이 덮고 있는 곳이면 모두 그 교화에 물들어 갔다. 제도로서 다스림이 점차 두루 미치고 다스림과 가르침이며 예절과 의례 등도 점차 따라서 조금씩 갖추어져 가니, 처음에는 아는 바가 없이 제 멋대로 날뛰며 풀로서 몸을 가리고 나무 열매를 먹던 사람들이 비로소 사람된 도리로서의 윤리에 접어들게 되었다. 오호라 그 위대함이여! 神市氏御世愈遠, 而蚩尤 高矢 神誌 朱因諸氏, 幷治人間三百六十六事, 男女 父子 君臣 衣服 飮食 宮室 編髮 盖首之制, 次第成俗, 普天之下, 悉化其沾. 制治漸敷, 而政敎禮儀逐漸稍備, 初之于于 草衣木食者, 始入人道之倫矣. 嗚呼偉哉!]손필본에는 '官職之' 이후 '性也∼偉哉'의 총 358자가 빠져 있다.
무릇 우주의 밖은 성인이 그대로 간직해 둘 뿐 의론하진 않고, 우주의 안은 성인이 대체의 강령만 의론할 뿐 그 근원까지는 논의하지 않는다 하였다.《춘추》의 <경세편>에, 앞선 성군의 뜻은 성인이 명분품절만 의론할 뿐 그에 대한 자세한 시비를 논변하진 않았다 하였다. 천지자연의 원기가 처음으로 나눠지고 만물이 무성하게 자라난 것은, 곧 내가 뭇 노인네들에게 듣기로 신시씨가 세상에 내려옴에 백성과 사물이 점차 번성하고 제도로서 다스림이 점차 두루 미쳐서 사물을 다스리는 일과 가르쳐 육성하는 일이 비로소 이루어졌다 하였으니, 이것을 내가 어찌 쪼개고 나누어 밝힐 수 있을 것인가. 무릇 우주 밖의 아주 오랫적 세상에 대해서는 성인들도 아직 하나하나 상세히 나누어 놓지 않았는데, 후손이 어찌 그 일부분일지언정 헤아릴 수 있겠는가. 당요(唐堯)(8)와 우순(虞舜)(9) 및 하(夏)·은(殷)·주(周)의 삼대 및 진(秦)·한(漢)·수(隋)·당(唐)과 같은 것은 중토의 역대를 말하는 것이며, 험윤( )과 훈육( ) 및 형만(荊蠻)과 월상(越裳) 등의 무리는 상고 시대의 중국 변방 민족을 가리키는 것이다. 한나라 무제 때 처음으로 서역과 통하여 월지(月氏)(10)·안식(安息)·엄채(奄蔡)·언기(焉嗜)·우전(于 )(11)·계빈( 賓) 등의 나라들이 비로소 서적 가운데 나타나게 되었는데, 이러한 많은 민족들은 목축을 하며 물과 풀을 좇아 오가고 머리를 풀어 늘어트리거나 벌거숭이 몸을 한 부류들이다. 대진(大秦)(12)과 같은 나라는 멀리 서해의 서쪽에 있으면서 영토는 사방 수천 리에 사백여 성을 거느리고 있으니, 작은 나라로서 지배를 당하는 것이 수십 개나 된다고 한다. 돌로 성곽을 쌓고 역말의 객사를 열지어 설치하였으며, 사람들은 모두 목덜미까지만 머리를 기르고, 수놓은 옷을 입으며, 덮개가 있는 수레를 타고 거처하는 곳을 출입하며, 성읍은 그 주위가 백여 리로 궁실은 모두 수정으로 기둥을 하는 등, 별스럽고 진귀한 풍속과 기이한 보물과 재화의 산출에 이르기까지 모두 자세히 말할 수가 없다고 하니, 그 번성하고 부강한 기풍은 그저 미루어 볼뿐이다. 한나라 장화(章和) 연간에 반초(班超)가 감영(甘英)을 보내어 조지(條支)를 경유하여 대진과 통교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고, 환제(桓帝) 연희(延熹) 연간에 이르러 그 나라의 주인인 안돈(安敦)이 사신을 파견하자 비로소 통교하게 되었다. 후세 당나라 시대에 이르러 또한 당항(黨項)·토번(吐蕃)·파사(波斯)·대식(大食) 등의 나라가 있어 혹은 번갈아 앙락을 침범하거나 상선을 보내와 통상을 하였는데, 붉은 머리칼에 푸른 눈을 가진 큰 몸뚱이와 큰 키의 무리들로서 드물게는 궁정에까지 출입하였다. 송나라 시대에는 제거시박사(提擧市舶司)(13)라는 벼슬이 있었는데 오로지 서역과의 교역 업무만을 전담하였다. 근대의 명나라 만력(萬曆) 연간에 이마두(利瑪竇)(14)라는 자가 있어 광동으로부터 북경으로 옮겨왔는데 수리(數理)와 역법(曆法)에 관한 책을 가지고 있었다고, 사신으로 갔던 무리 가운데 북경에서 돌아온 어떤 사람이 간혹 그 예기를 전하였다. 대저 그 나라는 옛날의 대진과 같이 서역의 서쪽에 있으나 예로부터 내려오는 여러 나라와는 사뭇 다르다 하니, 오호라! 천하는 넓고도 넓으며 사람이 생겨난 지는 오래고도 오래구나. 후세에 과연 외눈박이 거인의 나라가 있어, 다시 동남쪽으로부터 와서 이 세상과 통교를 할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8.【唐堯】: 옛 성인으로 제곡(帝 )의 둘째 아들이다. 이(伊)에서 태어나 기(耆)로 옮겼으므로 이기씨(伊耆氏)라고 하고, 처음에 도(陶)에 피봉되었다가 후에 당(唐)으로 옮겼으므로 도당씨(陶唐氏)라고도 일컬어지며, 호는 요(堯)이다. 역사가들은 당요(唐堯) 또는 방훈(放勳)이라 일컫는다. 그의 형 지(摯)를 이어 제위에 올라 덕스러운 정치를 베풂에, 백성들이 강구가(康衢歌)와 격양가(擊壤歌) 등을 지어 불렀다. 아들 단주(丹朱)가 어리석어 이인(夷人)인 순(舜)에게 임금 자리를 물려주었다. 재위 98년이었다고 한다. 9.【虞舜】: 옛 성인으로 성씨는 요(姚)이다. 처음에는 견무( 畝)에 머무르며 효도를 다하니 그 곳의 백성들이 많이 따랐다. 당요(唐堯)가 그를 발탁하여 섭정을 시켰더니 사흉(四凶)[환두(驩兜), 공공(共工), 곤( ), 삼묘(三苗)]을 제거하고, 일을 잘 처리하는 여덟 현인(八元)[백분(伯奮), 중감(仲堪), 숙헌(叔獻), 계중(季仲), 백호(伯虎), 중웅(仲熊), 숙표(叔豹), 계리(季 )]과 사물에 잘 화합하는 여덟 현인(八愷)[창서(蒼舒), 퇴애( ), 도인( ), 대임(大臨), 방항(尨降), 정견(庭堅), 중용(仲容), 숙달(叔達)]을 등용하여 천하를 크게 다스렸다. 섭정 30년에 제위의 선양을 받으니 유우씨(有虞氏)라 일컬어지게 되었다. 호를 순(舜)이라 하며, 역사가들은 우순(虞舜) 또는 중화(重華)라 일컫는다. 후에 남쪽으로 순행을 하다가 창오(蒼梧)의 들녘에서 돌아가시니 임금의 자리에 있은 지 18년만이었다. 아들 상균(商均)이 어리석어 우(禹)에게 자리를 전하였다. 10.【月氏】: 秦·漢 시대 중앙아시아에서 활약한 민족으로 중국 史書에 氏·和氏 등으로도 나타나고 있다. 月氏는 春秋 時代 末부터 戰國 時代 末까지 蒙古고원의 西半을 지배하여 東方의 東胡민족과 內蒙古 방면에서 접경하고 있던 큰 세력이었지만, 秦 末 흉노의 침입에 의해 격파당하고 그 일부만이 남쪽으로 내려와서 甘肅과 靑海의 두 省의 중간 산악지대로부터 黃河 상류지역에 잔존하였다. 월지는《漢書》에 유목민족이라 기록되어 있지만 農耕·遊牧·狩獵을 병행한 森林民族으로 보는 설도 있다. 唐代에는 月氏都督府가 설치되었다. 11.【于 】: 중앙아시아 T rim 盆地의 南邊에 있는 나라로서 漢·唐의 史書에는 于 國으로 되어 있는데, 西域南道의 代表國이었다. 그 외에도 烏纏·于遁·于殿·屈丹·喚那·壑旦 등의 異字 異稱이 있으며, 元代에는 ·斡端·五端·忽炭 등으로도 쓰여졌다. 于 은 崑崙山에서 북쪽으로 흐르는 Yurung Kash川과 Kara Kash川에 걸친 大 오아시스國으로, 많은 부락이 散在하여 果樹裁培 및 농경으로 생활하였다. 河床에서 채취되는 軟玉이 특산품으로 중국과 이란 및 이라크 등지에 수출되어 于 國을 부유하게 하였으며, 東西交涉과 더불어 이 나라를 西域의 유수한 문화국으로 만들었다. B.C.2세기에 중국에 처음으로 알려질 즈음 이미 于 國은 번영기에 있으면서 東西貿易의 중계시장으로서 각 방면의 문화를 받아들여 다채로운 문화가 꽃피고 있었다. 조로아스터敎가 유행하여 많은 佛寺가 건립되었다. 7세기에는 唐朝의 지배를 받아 이 나라에 沙毗都護府가 설치되어 安西四鎭의 하나가 되었다. 12. 대진국을 비롯한 서방에 대한 북애의 기록은《삼국지》권 30, 위서 30 <오환선비동이전> 제30의 평론(評論)에 주석으로 인용된《위략·서융전(西戎傳)》의 내용과 일치하고 있으니 아마도 그 기록을 참고하였을 것이다. 13.【提擧市舶司】: 掌蕃貨海舶征 貿易之事, 以來遠人, 通遠物. 元祐初, 詔福建路於泉州置司(외국의 화물 및 외국과 통하는 바닷길의 선박, 그리고 그에 따르는 조세와 전매 및 무역 등에 관한 일을 비롯하여 외국인의 관할, 외국 물품의 유통 등을 관장한다. 원우 연간 초에 복건로에 조서를 내려 천주에 해당 관직을 설치하였다.) 《송사》권 167, 지(志) 제120 직관(職官) 7. 14.【利瑪竇】Matteo Ricci(A.D. 1552∼1610) 명나라에 와 있던 이태리 제스이트파 선교사.
夫六合之外, 聖人存而不論, 六合之內, 聖人論而不議;《春秋·經世》, 先王之志, 聖人議而不辯. 鴻 肇判而萬物滋生, 則余聞諸耆老, 神人降世而民物漸繁, 制治漸敷[政而](而政)敎始成, 則余徵諸斷簡破編. 夫六合之外, 洪荒之世, 聖人曾不詳辨區區, 後生安得以窺其一斑哉! 至如唐虞三代 秦 漢 隋 唐者, 中國歷代之謂也; 荊蠻 越裳之屬, 則上古戎狄之稱也. 漢武之世, 始通西域, 月氏 安息 奄蔡 焉嗜 于 賓諸國, 始現於載籍中; 多民, 隨畜牧, 逐水草往來者, 及被髮裸身之類. 及若大秦之國, 遠在西海之西, 地方數千里, 領四百餘城, 小國役屬者數十, 以石爲城郭, 列置郵亭, 人皆 頸而衣(文)[紋]繡, 乘輜 出入所居, 城邑周(圍)[ ]百餘里, 宮室皆以水精爲柱, 以至殊俗珍風 奇寶異貨之産, 不可 述, 盖想見其殷富盛(疆)[彊]之風矣. 漢.章和中, 班超遣甘英, 由條支欲通大秦而不果, 及至桓帝.延熹中, 其主安敦遣使始通. 降至唐代, 又有 項 吐蕃 波斯 大食之國, 或交侵 洛, 或航通商舶, 而赤髮綠睛 巨幹長軀之徒, 罕至出入宮庭. 宋代, 有提擧市舶司之職, 專管西域買遷之業. 近代, 明.萬曆中, 有利瑪竇者, 自廣東轉入北京, 有數理曆法之書, 使行之從燕還者, 或傳其說. 盖其國, 與古之大秦同在西域之西, 與古來諸國逈殊云. 噫! 天下廣矣, 生民之來久矣. 未知, 後世果有巨人一目之國, 復自東南來, 通於此世否.
무릇 풍속이 다르고 법도가 틀린 나라가 하늘 아래 별처럼 늘어서 있고 바둑돌처럼 퍼져 있다가 시대가 흐르고 사물이 교환되면서 점차 서로 통하게 되는 것이니, 생각건대 신시씨의 시대에 앉아서 세상을 얘기하면서 이 세상에 엄채나 안식이며 천축이나 대식과 같은 나라가 있었음을 어찌 알았겠는가. 그러한 즉 고시씨 세대에 이른바 '한가운데를 잡아 그 교화가 천하에 두루 미치니, 해와 달이 내려 비치는 곳과 비와 바람이 닿는 곳마다 복종치 않는 자가 없었다'라고 한 것은 아마도 스스로를 훌륭하게 여긴 말일 것이다. 내가 남몰래 냉소하면서도 애석해 하는 것은, 근세의 학자들이 한나라의 서적에 얽매여 유교의 술수에 빠지고 흐리멍덩해져 '바깥 오랑캐(外夷)'라는 말을 스스로 달갑게 받아들여서 걸핏하면 '화이(華夷)'의 논리를 입에 올리는 일이다.
盖異風殊道之國, 星羅碁布於普天之下, 時移物換而逐漸交通. 想於神市氏之世, 坐而論之, 則安知世間有奄蔡 安息 天竺 大秦之國耶. 然則, 高辛氏之世, 所謂[執中而遍天下, 日月所照, 風雨所至, 莫不[服]從]者, 盖亦自好之(說)[言]也. 余 (蚩)[嗤]之可惜, 近世學者, 拘於漢籍, 溺於儒術, 然以外夷自甘, 動稱華夷之說.
내가 어느 성대한 잔치 자리에서 손님이며 벗들과 함께 모였는데, 모두 뛰어난 말솜씨로 그럴싸한 말들을 하는 무리들이기에 내가 취기를 빌어 팔뚝을 걷어올리고 탄식하며 이르기를 [그대들이 모두 '화이(華夷)'를 말하는데, 우리가 어찌 중화가 아닐 것이며 중원이 도리어 오랑캐가 됨을 그대들이 어떻게 알겠는가!(15) 또한 '이(夷)'라 함은 '크다'는 것과 '활'이라는 의미에서 유래하여 동방의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서, 오랜 옛적 우리 조선이 무예가 강성하여 세상에 이름을 드날린 때문에 중원의 선비들이 그 풍문을 듣고 두려워하여 그렇게 이름한 것인데, 이(夷)가 어찌 융(戎)이나 적(狄)과 같은 천한 이름이겠는가!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사람들이 모두 굳세고 날래며 품성 또한 강직하고 올바르기에 평소에도 예의와 양보를 좋아하여 중원에는 '동방 군자의 나라'라는 말이 있게 되었는데, 우리나라가 어찌 그 근본이 융·적 등의 무리와 같다는 말인가! 압록강 바깥 사방 1만 리의 땅은 예전에 우리의 성인과 앞선 백성들이 어려움으로 일구어 온 땅인데, 어찌 본시 한나라 놈들의 물건이겠는가! 공자의 시대에 주(周) 왕실이 이미 쇠퇴하여 바깥 민족들이 번갈아 침범하니 여왕( 王)이 견융(犬戎)에게 패하여 죽게 되었고, 그 밖에 북융(北戎)이며 형만(荊蠻)과 산융(山戎) 등 끊임없는 무리들이 침략하여 핍박하길 마지않았으며, 우리민족 또한 이때에 위엄을 중토에 떨쳤었다. 때문에 공자가 왕의 다스림이 널리 미치지 못함을 개탄하고 여러 나라가 번갈아 침범함을 한탄하며 뜻이 있어서《춘추》를 지었기에, 중화를 받들고 오랑캐를 내친다는 말이 이때 비로소 쓰여지게 되었다. 만약 공자가 우리나라에서 태어났더라면 오히려 중토를 가리켜 오랑캐의 땅이라고 어찌 말하지 않았겠는가] 하니, 모든 사람들이 비웃기도 하고 혹은 놀랍게 생각하기도 하였으며 적지 않게는 사뭇 수긍하는 자도 있었으나, 결국에는 모두 쾌히 응하지 않기에 내가 상을 박차고 일어나니, 사람들이 모두 광기가 매우 심하다고 말하였다. 탄식할 노릇이다. 예전에 만주에 허물이 있다 하여 조정에서 화친이니 배척이니 하며 의견이 분분하였는데, 이 또한 주나라 왕실을 높이는 것을 소중히 여기는 까닭이기에 나는 그것이 옳은 것인지 알지 못하겠다. 만일 내가 또 다시 동년배들에게 이 말을 끄집어낸다면 그네들은 응당 크게 놀라긴 하여도 별로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며, 아마도 장차 친구로 끼워 주지도 않을 것인데, 그렇다고 어찌 저들의 말만을 이상하다 하겠는가. 기자(箕子)가 교화를 베풀었다는 것은 믿으면서, 한무제가 조선을 쳐서 멸망시켰다는 것은 믿으면서, 당고종이 고구려를 평정하였다는 것은 믿으면서, 오히려 우리의 선조들에게 충분히 자부할 만한 빛나는 무훈이 있었음은 왜 알지 못하는가. 내가 슬퍼하는 것은, 세속의 인식이 제멋대로 변한 점은 살피지 않고, 중니가 높이고 깎아 내린 것 만을 가지고 스스로를 그르치고 있다는 점이다. 15. 중국이 비록 일부 계층에 의해서이긴 하지만, 역사에서 자신들의 중원 지역을 변방으로 보고 여타 지역을 내지(內地)로 본 적이 한 차례 있었으니, 바로 인도에서 전래된 불교가 한창 번성하던 시기에 승려들이 인도를 내지(內地)로 본 경우가 그것이다.
余於盛筵, 賓朋齊會, 皆雄談峻論之輩, 余因醉揚臂而呼曰: [君等皆云華夷, 焉知我非華而中原之爲夷耶! 且夷者, 從大從弓, 東人之稱, 太古我朝鮮, 以武强鳴於世, 故中原之士, 聞風懼之, 夷豈是戎狄之賤名耶! 國自上古, 人皆强勇質直, 雅好禮讓, 中土有'東方君子之國'之稱焉, 我國豈本戎狄之類哉! 鴨水以外, 縱橫萬里之地, 是乃我往聖先民, 艱苦經營之地也, 豈本是漢家物耶! 孔子之世, 周室旣衰, 外族交侵, 王敗死於犬戎, 其他北狄 荊蠻 山戎無終之屬, 侵 不已, 我族亦以是時, 威振中土. 故孔子, 慨王政之不敷, 恨列國之交侵, 有志而作《春秋》, 尊華攘夷之說, 於是乎始立. 若使孔子, 生於我邦, 則寧不指中土而謂戎狄之地乎!] 滿座冷笑或驚怪, 不小縱有然之者, 竟不快應, 余蹴床而起, 人皆謂淸狂殊甚, 可(難)[歎]. 前者, 滿洲之有 , 廟議紛 斥和者, 亦以尊周爲重, 余不知其可矣. 若余復出此言於 輩, 則渠等應必, 大驚小怪, 殆將不齒, 豈怪彼輩言. 箕子之化則信, 漢武之討滅則信, 唐高之平定則信, 而殊不知, 我先民却有赫赫武勳之有足誇耀者耶! 余悲, 世俗不察其變漫, 以仲尼尊攘之意, 自誤焉.
무릇 신시씨가 처음 내려온 세상은, 산에는 길이나 굴이 없었고 못에는 배나 다리가 없었으며, 날짐승과 들짐승은 무리를 이루고 있었고 풀과 나무는 무성히 자라났다. 백성들은 금수와 함께 거처하며 만물과 더불어 어울리니, 금수는 굴레를 매어 같이 노닐 수 있었고, 새나 까치의 보금자리는 기어올라가 엿볼 수 있었다. 주리면 먹고 목마르면 마심에 때에 따라 그 피와 고기로 하였으며, 옷감을 짜서 옷을 해 입고 밭을 갈아 음식을 먹으며 편함에 따라 있는 그대로 지내니, 이것이 바로 이른바 덕이 가득한 세상이다. 백성들은 살아가면서도 그 행하는 바를 느끼지 못하였고, 나아가면서도 그 가는 곳을 의식하지 않았으니, 그 행위는 당당하고 그 시야는 한결 같았다. 배불리 먹고 기뻐하며 배를 두드리고 노닐며, 해가 뜨면 일어나고 해가 지면 쉬니, 대저 하늘의 은혜가 널리 미쳐 궁핍함을 알지 못한 것이리라. 후세에 내려와 백성과 사물이 더욱 번창해지며 소박함에서 점차 멀어지고, 아등바등 힘쓰며 쉬지 않고 노력하게 되니 비로소 생계를 근심거리로 삼게 되었다. 밭을 가는 자는 이랑을 놓고 다투고, 고기를 잡는 자는 구역을 놓고 다투는데, 다투어 얻지 못하면 장차 궁핍함을 면치 못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된 후에 활이며 쇠뇌를 만드니 날짐승과 들짐승은 달아나 버렸고, 그물을 만들어 설치하니 물고기와 새우들은 숨어 버렸다. 이에 칼과 창이며 갑옷과 병사가 생기게 되고, 너와 내가 서로 공격하여 이를 갈고 피를 흘리며 간과 뇌를 꺼내어 땅에 바게 되었으니, 이것 또한 하늘의 뜻이라면 원망하지 못할 것이다. 내가 일찍이 보건대, 어린아이가 막 태문(胎門)을 나서며 곧 '응애(救我), 응애(救我)(16)'!라고 부르짖는 것은 대개 음식을 구하는 것이며, 막 걷게 되어 곧 서로 토닥거리며 '쎄다( 打), 쎄다( 打)'! 할 줄 아는 것은 강함을 추구하고자 하는 까닭이다. 내가 이로서 다투고 싸우는 것이 면하기 어려운 것인 줄 알게 되었다. 16.【救我! 救我!】: 갓난아이가 태어날 때 처음으로 보이는 반응은 단지 울음을 우는 것 뿐이다. 북애노인은 그러한 울음 소리를 듣고 어려운 세상에 태어나며 최초로 드러내는 투쟁과 추구의 몸짓으로 보았으며, 그 소리를 한자로 옮기는 과정에서 소리 글자와 함께 그러한 시각을 뜻 글자로의 의미도 함축시켜 표현한 것이 바로 '救我'일 것이다.
夫神市肇降之世, 山無蹊隧, 澤無舟梁, 禽獸成 , 草木遂長. 民與禽獸居, 族與萬物幷, 禽獸可係 而(遊)[游], 鳥鵲之巢可攀援而 . 飢食渴飮, 時用其血肉, 織衣耕食, 隨便自在, 是謂至德之世也. 民居不知所爲, 行不知所之, 其行塡塡, 其視顚顚, 含哺而熙, 鼓腹而(遊)[游], 日出而起, 日入而息, 盖天澤洽化, 而不知窘乏者也. 降至後世, 民物益繁, 素樸漸離, , 勞勞孜孜, 始以生計爲慮. 於是焉, 耕者爭畝, 漁者爭區, 非爭而得之, 則將不免窘乏矣. 如是而後, 弓弩作而鳥獸遁, (綱)[網] 設而魚鰕藏, 乃至刀 戟 甲 兵, 爾我相攻, 磨牙流血, 肝腦塗地, 此亦天意之固然而不可怨者也. 余嘗觀, 夫小兒 [出胎門, 便 救我救我者, 盖求其哺也; 손필본에 '出胎∼也 '의 16자가 빠져 있다. ]至行走, 便會 打 打者, 欲其求强也. 余於是乎知, 爭戰之不可免也. 무릇 월지나 대진의 무리에 대해서 내가 그 상세한 바를 알지 못하나, 한(漢)나라와 왜(倭) 같은 것은 인접한 나라로서 날개와 같이 좌우에 있고 우리나라는 그 가운데에 끼여 있어서 예로부터 갈마들어 다툼이 가장 빈번하였으니, 이는 필연적인 형세이다. 신시씨가 세상을 다스린지 이미 오래되니 백성과 사물이 번성하여 가면 갈수록 넓게 퍼졌다. 백성과 사물이 번성하여 넓게 퍼질수록 덮고 입으며 마시고 먹는 일과 생전에 봉양하고 죽은 후에 장사지내는 일 등에서 모두 그 소비가 눈에 뛰게 늘었다. 이러한 까닭에 처음에는 화락하기만 하다가 점차 다급하게 되어 가니, 무릇 다급하게 무엇을 구하고 찾다 보면 다투고 싸우는 순서를 어찌 밟지 않겠는가. 대저 유소씨나 수인씨는 서방의 임금이요, 신시씨와 치우씨는 동방의 임금과 신하이다. 세상을 다스리던 초기에는 각각 한쪽에 웅거하고 있었는데, 땅의 구역이 사뭇 다르고 인가(人家)는 서로 통하지 않았으니 백성들은 자기들만 있는 줄 알고 다른이들이 있음을 인식하지 못했던 까닭에 수렵하고 채벌하는 일 외에는 별다른 힘든 일이 없었다.
夫, 月氏 大秦之屬, 余不知其詳, 至若中國與倭, 接隣之國也, 翼在左右而我國介處其間, 從古交爭最繁, 是亦必然之勢也. 神市氏[御世之](之御世)已遠, 而民物之生愈往愈博. 民物之生愈博而, 所以彼服 飮食 奉生 送死之具, 愈見其耗. 是以, 始之熙[熙]者, 漸至忙忙, 夫忙忙求索者, 豈非爭亂之(偕)[階]歟. 及夫有巢 燧人者, 西方之君也, 神市 蚩尤者, 東方之君臣也. 御世之初, 各據一方, 地域逈殊, 人烟不通, 民知有我而不識有他, 故狩獵採伐之外, 曾無險役.
수천 년을 내려온 뒤 세상의 형세는 이미 변화하였으며, 게다가 중국은 천하의 보고(寶庫)로서 기름진 벌판이 천리에 뻗어 있고 화창한 바람 기운은 널리 퍼져 있으니, 우리 민족 가운데 서남쪽으로 나누어 옮겨간 자들은 대단히 탐을 내어 더욱더 나아갔으며, 중토의 백성들 역시 꾸역꾸역 모여들게 되었다. 이리하여 자기편끼리는 도와서 무리를 이루고, 다른 편은 그저 원수로 삼아 창과 방패로 서로 충동질을 하니, 이것이 바로 만고에 있어서 전쟁의 시작이다. 처음 염제(炎帝)의 세대에 중토는 점차 백성이 번성하여 많아졌으며, 곡식을 일구고 삼베를 자으며 약과 침을 쓰는 기술 또한 점차 갖추어져 갔다. 이로서 여러 세대를 전하여 유망(楡罔)에 이르니, 정치에 있어서는 단속하기 급급하고 제후들은 두 마음을 지녔으며 민심은 흩어져 세상의 도는 어렵기만 하였다. 우리 치우씨는 백성의 무리와 함께 황하의 이북 땅에 할거하고 앉아서 안으로 용맹스러운 병사를 기르고 밖으로 시대의 변화를 지켜보다가 유망의 정치가 쇠잔하였음을 보고 이내 병사를 일으켜 출정하였다. 형제와 종실의 무리 가운데 장군으로 삼을 만한 사람 81명을 선발하여 부장(部將)으로써 모든 군사를 통솔케하고, 갈로산(葛盧山)의 쇠를 캐내어 칼이며 갑옷과 중기창과 가닥창을 비롯하여 큰 활과 호목나무 화살(17) 등을 많이 만들어 모두 가지런히 하고는 탁록( 鹿)으로 출발하여 구혼(九渾)에 올라 연전연승하니, 그 형세가 마치 비바람과 같아서 세상의 만민은 두려워 엎드리고 그 위세는 천하에 떨치게 되었다. 한 해 만에 무릇 아홉 제후의 땅을 빼앗았다. 다시 옹호산(雍狐山)에 나아가 수금(水金)을 캐어 끈 달린 방패와 가지창 및 옹호창을 제작하여, 새로 병사를 정비하고 양수(洋水)를 떠나 파죽지세로 공상(空桑)에 이르렀다. 공상은 지금의 진류(陳留)로서 유망이 도읍하던 곳이다. 한 해 만에 다시 열두 제후의 나라를 합치니, 죽어 엎어진 시체는 들녘에 가득하기에 중토의 백성들은 간담이 서늘하여 달아나 숨지 않은 자가 없었다. 이때 유망이 소호(少顥)(18)로 하여금 막아 싸우게 하니, 치우씨는 옹호창을 휘두르며 소호와 크게 싸우면서 또한 큰 안개를 일으켜 적병으로 하여금 혼미한 가운데 스스로 혼란케함에, 소호는 크게 패하고 황망히 물러나 공상으로 들어가더니 유망과 함께 도망 나와서 되돌아 탁록으로 들어갔다. 치우씨는 이에 공상에서 제위에 오르고 병사를 되돌려 탁록의 들판을 에워싸고 공격하여 또 크게 패퇴시켰다.《관자(管子)》에 이른바 [천하의 임금이 창을 들고 한번 크게 노하니 엎어진 시체는 들판에 가득하였다]라고 한 것은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이다. 17.【 矢】: 木으로 만든 화살. 는 낙엽교목인 牡荊과 흡사하며, 주로 백두산과 그 북방 지역의 소나무 숲속에 자생하는 나무이다. 겉 모양은 가시나무와 같고, 잎은 느릎나무와 비슷하며, 나무의 재질이 습기에 영향을 받지않고 단단하면서도 곧아 화살대를 만드는데 적합하다. 18.【少昊 金天氏】: 상고 시대의 제왕. 황제(黃帝)의 아들. 소호(少 )로도 쓰며 이름은 지(摯)이다. 태호 복희씨의 법을 닦았기에 소호라고 하며, 쇠의 덕(金德)으로 임금이 되었기에 금천씨라 하며, 궁상(窮桑)에 영지를 가졌기에 궁상씨라고도 하며, 청양(靑陽)에서 나라를 일구었기에 청양씨라고도 하며, 죽어서 운양(雲陽)에 장사를 지냈기에 또한 운양씨라고도 한다. 곡부(曲阜)에 도읍하였으며, 재위는 84년이라고 한다.
降至數千載之後, 而世局已變, 且中國者, 天下之寶庫也, 沃野千里, 風氣恢暢, 我族之分遷西南者, 垂涎而轉進, 中土之民, 亦湊集而萃會. 於是焉, 黨同 異而干戈胥動, 此實萬古爭戰之始也. 初炎帝之世, 中土之漸民至盛阜, 穀 麻 藥 石之術, 亦已稍備. 及累傳至於楡罔之世, 而爲政束急, 諸侯携貳, 民心離散, 世道多艱. 我蚩尤氏與其民衆, 虎踞河朔, 內養兵勇, 外觀時變, 及觀楡罔之衰政, 乃興兵出征. 選兄弟宗黨可將者八十一人, 部領諸軍, 發葛盧山名之金, 大制劒 鎧 矛 戟 大弓 矢, 一幷齊整, 乃發 鹿而登九渾, 連戰連捷, 勢若風雨, (仗)[伏]萬民, 威振天下. 一歲之中, 凡拔九諸侯之地. 更就雍狐之山, 發水金而制芮 戈及雍狐之[戟, 再整兵而出洋水, 殺至空桑. 空桑者, 今之] 손필본에 '戟∼今之'의 17자가 빠져 있다. 陳留, 楡罔所都也. 一歲之中, 更兼十二諸侯之國, 殺得(仗)[ ]伏尸滿野, 中土之民, 莫不喪膽奔竄. 時, 楡罔使少顥拒戰, 蚩尤氏揮雍狐之戟, 大戰少顥, 又作大霧, 使敵兵昏迷自亂, 少顥大敗, 落荒而走入空桑, 與楡罔出奔反入 鹿. 蚩尤氏乃於空桑卽帝位, 回兵圍攻於 鹿之野, 又大破之.《管子》所謂[天下之君, 頓戟一怒, (仗)[ ]伏尸滿野]者, 是也.
이때에 헌원(軒轅)(19)이란 자가 있었는데, 유망이 패하여 달아나고 치우씨가 제위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고, 대신 임금이 되고자 크게 군사를 일으켜 치우씨에게 대항하여 싸웠다. 치우씨는 탁록에서 헌원과 크게 싸우며 병사를 풀어 사방에서 내려침에 참살시킨 자는 수도 없었으며, 다시 큰 안개를 일으켜 적군으로 하여금 마음이 흐려지고 손발이 떨리게 하니, (헌원은) 급히 달아나 겨우 목숨을 건지게 되었다. 이리하여 회대(淮岱)(20)와 기연(冀 )(21)의 땅을 모두 점거하였으며, 탁록에 성을 쌓고 회대에 자리잡아서 옮겨 왕래하며 천하를 호령하게 되었다. 대개 이때의 중토 사람들은 단지 화살과 돌의 힘에 만 의지할 뿐 갑옷의 쓰임이나 가치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였으며, 치우씨의 법력이 높고도 강한 것에 놀라서 간담이 서늘해져 매번의 싸움마다 번번이 참패하였다.《운급헌원기(雲 軒轅記)》에 [치우씨가 처음으로 갑옷과 투구를 만들었는데, 이때의 사람들은 이를 알지 못하고 구리 머리에 쇠로 된 이마로 여겼다]라고 한 것을 보면 그 낭패가 매우 심하였음을 상상하여 볼 수 있을 것이다. 치우씨가 더욱 군대의 위용을 가다듬고 사방을 쳐나가며 십년 동안 헌원과의 싸움을 칠십여 차례나 하였으나, 장수는 피로한 기색이 없고 병사는 물러서지 않았다. 후에 헌원이 이미 여러 번 패하더니 이에 다시 병사와 군마를 크게 일으키고, 치우씨를 흉내내어 군사들의 갑옷을 널리 제작하였으며, 또한 지남(指南)(22) 수레를 만들어 놓고 더불어 싸울 날을 기다렸다. 이때 치우씨가 우러러 천체의 형상을 관찰하고 굽어 민심을 살펴보니 중토에 왕성한 기운이 점차 번성해지고, 또한 염제(23)의 백성들이 곳곳에서 굳게 단결하여 가볍게 모두 죽여 버릴 수 없으며, 더욱이 각각의 백성들이 그들의 군주를 섬기는데 무고하게 함부로 죽일 수 없음을 깊이 인식하게 되었다. 이에 물러나 돌아갈 것을 마음먹고 형제와 종실의 무리에게 힘써 크게 싸워 위세를 세움으로서 적이 감히 추격하여 습격할 마음을 먹지 못하도록 하게 한 뒤, 다시 헌원과 크게 싸워 한 무리를 도륙한 후에 비로소 물러나왔다. 이때 부장 가운데 불행히도 서둘러 공을 세우려다 진중에서 전사한 자가 있었는데,《사기(史記)》(24)에서 이른바 [마침내 치우씨를 사로잡아 죽였다]라고 한 것은 아마 이를 두고 한 말일 것이다. 치우씨는 이에 동쪽으로 회대의 땅에 할거하고 있으면서 이로서 헌원이 동쪽으로 나오는 길을 막고 있었으나, 그가 죽자 점차 물러서기에 이르렀다. 지금《한서·지리지》(25)에 의하면, 그의 묘가 동평군(東平郡) 수장현(壽張縣)의 감향성( 鄕城) 안에 있으며, 그 높이가 다섯 장(丈)이라 한다. 진(秦)나라와 한(漢)나라 때의 주민들이 한결같이 10월에 제사를 지내면 반드시 붉은 기운이 있어서 한 폭의 진홍빛 비단과도 같이 솟아오른다고 하니, 백성들이 이를 일컬어 '치우기(蚩尤旗)'라 이름하였다. 이 어찌 영웅의 혼백이 범상한 사람들과 사뭇 다르기에 천년이 지나고도 오히려 사라지지 않음이 아니겠는가. 19.【黃帝 軒轅氏】: 상고 시대의 제왕. 소전씨(少典氏)의 아들. 성은 공손(公孫)이며, 희수(姬水)에서 자랐기에 또한 희(姬)를 성으로 삼는다. 헌원의 언덕에서 태어났기에 헌원씨라고 부르며, 유웅(有熊)에 나라를 세웠기에 유웅씨라고도 부르며, 토덕(土德)으로 임금이 되었고 흙은 누런색인 까닭에 황제라고 부르게 되었다. 애초에 신농씨로부터 여덟 대를 전하여 유망(楡罔)에 이르자 유망이 폭악무도하여 동방의 치우씨에게 쫓겨나자 황제가 다시 치우씨를 몰아내고 제위에 올랐다. 대요(大撓)에게 명하여 갑자(甲子)를 짓게 하였으며, 창힐(倉 )에게 명하여 육서(六書)를 짓게 하였으며, 영륜(伶倫)에게 명하여 율려(律呂)를 정하게 하였으며, 예수( 首)에게 명하여 산수(算數)를 정하게 하였다. 또한 기백(岐伯)에게 자문하여 내경(內經)을 지어 처음으로 의약 처방의 길을 열었다. 그의 아내 나조(螺祖)는 또한 누에를 치고 실을 잣는 것을 가르쳐 의상의 제도를 처음으로 열었다고 한다. 100년을 재위에 있었다고 한다. 20.【淮岱】: 회하(淮河)와 대산(岱山 卽 泰山)의 사이를 말하므로, 지금의 산동성 중부 이남에서 하남성의 동부 및 강소성과 안휘성의 중북부 일대를 가리킨다. 21.【冀 】: 기주(冀州)와 연주( 州)를 말한다. 기주는 지금의 하북성 형수(衡水)의 남서쪽에 위치한 기현(冀縣)을 가리키며, 연주는 산동성 곡부(曲阜)의 서쪽 연주( 州)를 가리키니, 기연의 지역이라 함은 하남성과 산동성의 북부 및 하북성의 남부인 황하강 하류 일대를 말한다. 22.【指南車】: 중국 고대에 일정한 방향을 가리키도록 만든 수레. 수레의 바퀴와 수레 위의 신선상(神仙像) 사이에 톱니를 이용한 일정한 장치를 설치하여 수레가 비록 회전을 하더라도 신선상의 손은 항상 일정한 방향을 가리키도록 되어 있다. 23.【炎帝 神農氏】: 상고 시대의 제왕. 강수(姜水)에서 태어 났기에 강을 성씨로 한다. 처음으로 쟁기를 만들어 백성들에게 농사일을 가르쳤다. 불의 덕(火德)으로 임금이 되었기에 염제(炎帝)라고도 하며, 열산(烈山)에서 일어났기에 열산씨라고도 한다. 재위시 온갖 약초를 맛보아 그로서 질병을 치료하였으며, 저자를 열어 재화의 유통을 처음하였다. 애초에는 진(陳)에 도읍하였다가 후에 노(魯)로 천도하였으며, 120년을 재위에 있었다고 한다. 24.《사기》<오제본기(五帝本紀)> 제1 * 蚩尤作亂, 不用帝命. 於是黃帝乃徵師諸侯, 與蚩尤戰於 鹿之野, 遂禽殺蚩尤. 而諸侯咸尊軒轅爲天子, 代神農氏, 是爲黃帝. 天下有不順者, 黃帝從而征之, 平者去之, 披山通道, 未嘗寧居…(치우가 난을 일으키니 황제의 명령이 시행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황제가 군사와 제후를 모아 치우와 탁록의 벌판에서 싸움을 벌여 마침내 치우를 사로잡아 죽였다. 그러자 제후들이 모두 헌원을 받들어 천자로 삼아 신농씨를 대신하게 하니, 이로서 황제가 되었다. 천하에 순종하지 않는 자가 있음에 황제가 그에 따라 그들을 정벌하여 평정시킨 자들은 제거하였으나, 산을 헤쳐서 길을 내어도 편안하게 기거하지 못하고……). 치우씨를 사로잡아 살해하였다고 한 뒤에 거듭 '천하에 순종하지 않는 자가 있음에'라 하였으니 여전히 저항의 세력이 존재하였음을 말하고 있다. 25. '치우(蚩尤) 사당'에 대한《한서》와《후한서》의 <지리지(地理志)> 기록 * 東郡 … 壽良, 蚩尤祠在西北 上. 有 城(동군 … 수량현은 치우의 사당이 그 북서쪽 제( )의 위에 있다. 구성이 있다). 《한서》권 28 상, <지리지> 제8 상. 동군(東郡) 條. * 東平國 … 壽張 春秋曰良, 漢曰壽良, 光武改曰壽張. 有堂聚, 故聚屬東郡.〔《地道記》曰: [有蚩尤祠, 狗城.]《皇覽》曰: [蚩尤 在縣 鄕城中, 高七丈.]〕(동평국 … 수장현은 춘추 때는 량(良)이라 하였으며, 한나라 때는 수량이라 하였는데, 광무제 때 수장으로 이름을 고쳤다. 당취가 있는 까닭에 동군에 귀속되어 있다.〔《지도기》에 이르기를 [치우의 사당이 있으며 구성이 있다] 하였다.《황람》에 이르기를 [치우의 무덤이 현의 감향성 안에 있는데 높이가 일곱장이다]라고 하였다.]) 《후한서》지(志) 제21, <군국(郡國)> 3. 동평국(東平國) 條.
時有軒轅者, 聞知楡罔敗走而蚩尤氏爲帝, 欲代以爲君, 乃大興兵, 與蚩尤氏拒戰. 蚩尤氏, 大戰軒轅於 鹿, 縱兵四蹙, 斬殺無算, 復作大霧, 令敵軍心慌手亂, 奔竄逃生. 於是, 淮岱 冀 之地, 盡爲所據, 乃城於 鹿, 宅於淮岱, (遷徙往來, 號令天下.) 한영본에 '遷徙往來, 號令天下'의 8자가 빠져 있다. 盖是時, 中土之人, 徒憑矢石之力, 不解鎧甲之用又値, 蚩尤氏法力高强, 心驚膽寒, 每戰輒敗,《雲 軒轅記》之所謂[蚩尤始作鎧甲 兜 , 時人不知, 以爲銅頭鐵額]者, 亦可想見, 其狼狽之甚矣. 蚩尤氏益整軍容, 四面進擊, 十年之間, 與軒轅戰七十餘回, 將無疲色, 兵不退. 後軒轅, 旣屢敗, 乃復大興士馬, 效蚩尤氏而廣造兵甲, 又制指南之車, 期日會戰. 時蚩尤氏, 仰觀(天)[乾]象, 俯察人心, 深知中土旺氣漸盛, 且炎帝之民, 所在固結, 不可勝誅, 各事其主, 不可漫殺無(事)[辜]. 乃決意退還, 使兄弟宗黨, 務要大戰而立威, 使敵不敢生意追襲, 復與軒轅大戰, 混殺一(陳)[陣], 然後方退. 此時, 部將, 不幸, 有急功陣沒者,《史記》所謂[遂禽殺蚩尤]者, 盖謂是也. 蚩尤氏, 乃東據淮岱之地, 以當軒轅東進之路, 及至其沒, 漸至退 矣. 今據《漢·地理誌》, 其墓在東平郡.壽張縣. 鄕城中, 高五丈. 秦.漢之際, 住民猶常以十月祭之, 必有赤氣, 出如疋絳, 民名謂蚩尤(氏)旗, 豈其英魂雄魄, 自與凡人逈異, 歷千歲而猶不泯者歟. 치우씨가 비록 물러나 돌아왔지만 중토는 이로서 쓸쓸해지고, 유망 또한 다시 그 제위(帝位)를 회복하지 못하여 염제의 유업은 이로서 영원히 무너지게 되었다. 이때부터 헌원이 대신 중토의 주인이 되었으니, 곧 황제(黃帝)이다. 그러나 치우씨의 형제들이 모두 유청(幽靑)(26)의 땅에 영원히 거처하며 그 명성과 위세가 계속되었기에 황제는 세상을 다 할 때까지 편안하게 베개를 높여 베고 누운 적이 없었다.《사기》에 이른바 [산을 헤쳐서 길을 내어도 편안하게 기거하지 못하고, 탁록에 도읍만 정하고서 이리저리 옮겨 다니니 항상 거처하는 곳은 없었으며, 군사와 병졸들로 진영을 호위하게 하였다]고 한 것은 그 전전긍긍해 하는 마음을 역력히 볼 수 있다.《상서(尙書)》의 <여형편(呂刑編)>에 또한 [예로부터 내려오는 교훈에 '치우씨가 오직 처음으로 난을 일으켰다'고 하였으니……]라고 말한 것은 그 위세를 두려워하여 대대로 그 교훈을 전하고자 함이 분명하다. 26. 【幽靑】: 유주(幽州)와 청주(靑州). 지금의 요서와 하북성 및 산동성 일대를 가리킨다.
蚩尤氏, 雖然退歸, 中土以是蕭然, 楡罔亦不得復位, 炎帝之業, 以是永墜矣. 自是, 軒轅代爲中土之主, 是爲黃帝. 而蚩尤氏兄弟諸人, 乃永據幽靑, 聲威自是不 , 黃帝氏亦不得自安, 終其世, 未嘗安枕高臥.《史記》所(云)[謂][披山通道, 未嘗寧居, 邑于 鹿之(河)[河]阿【河→阿】:《사기(史記)》의 <오제본기(五帝本紀)> 원문에 의거하여 河를 阿로 수정한다. 正義에서 阿자에 대해 주석하기를 [廣平曰阿. 鹿, 山名, 已見上. 鹿故城在山下, 卽黃帝所都之邑於山下平地(넓고 평탄한 것을 '아'라고 한다. 탁록은 산 이름으로 이미 윗글에 나타나 보인다. 탁록의 옛 성이 그 산 아래에 있으니 곧 황제가 산 아래의 평지에 도읍을 정한 것이다)]라 하였다. , 遷(徒)[徙]往來無常處, 以師兵爲營衛]者, 盖其戰競之意, 歷歷可觀. 而《尙書·呂刑》亦云[若古有訓, 蚩尤惟始作亂] 彼之畏威, 而世傳其訓, 亦甚明矣.
그 후 삼백여 년은 아무일 없이 단지 소호씨(少昊氏)와 더불어 싸워 이를 격파하였을 뿐이니, 단군 원년에 이르기까지 전후하여 무릇 궐천년(闕千歲)이 된다. '궐(闕)'이란 '만(萬)'을 가리키는 것이다. 요즘 아주 오래 되었음을 말할 때는 반드시 '궐천년'이라 말한다. '궐천년'이란 아마도 신시씨가 세상을 다스리기 시작한 이후로 1만 1천년이 흘렀다는 것이니, 진실로 우리나라가 가장 긴 연대를 지녔다 함이 그러한 까닭에서이다. 혹은 신시씨의 뒤로 고시씨가 치우씨와 더불어 서로 계속하여 임금이 되었으니, 그 앞뒤를 합하여 보면 1만 1백년이 되며, 게다가 단군이 다시 나라를 일으킨 것이라 말하는데, 이러한 얘기 역시 이치에 가까울 것이다. 대저, 오랜 옛적의 일은 너무 오래고 멀어서 상세하게 알 수 없을 따름이다.
其後, 三百餘年無事, 只與少昊氏戰, 破之, 以至檀君元年前後, 凡闕千歲. 闕者, 萬之稱也, 今之稱久遠者, 必曰闕千歲. 闕千歲者, 盖神市氏之御世, 至萬千歲, 寔爲我國最長年代, 故也. 或曰神市氏之後, 高矢氏與蚩尤氏, 相繼爲君, 前後合算, 爲闕百歲, 而檀君復立云, 此說亦近理. 大抵, 太古之事, 鴻荒(潤)[ 闊]遠, 不可得而詳矣.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