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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 |
연대 |
내용 |
전기 |
50~100만년전 |
하나의 석기를 다용도로 사용했다(一石器多用途). 주먹도끼(兩面核石器, hand ax), 뾰쪽찍개. 찍개(외날찍개, 打截器, chopper), 양면찍개(양날찍개, 兩面打截器, chopping tool), 긁개(搔器, scrapper) |
중기 |
10~4만년전 |
여러 석기를 만들어 용도별로 구별해서 사용했다(一石器一用途). 긁개(搔器, scrapper), 밀개(삭기, end-scrapper), 찌르개(尖頭器, point), 돌칼(石刀), 송곳(錐) |
후기 |
4~1만년전 |
돌에다 쐐기 같은 것을 대고 형태가 같은 여러 개의 정교한 석기를 제작했다(同種石器 大量生産). 잔석기(細石器)와 이음도구(모음연장, 複合道具). 슴베찌르개. 창(槍). 활(弓) |
2. 대표적 유적지
시기 |
유적지 |
내용 |
전기 |
평양 상원(詳原) |
검은 모루동굴(洞窟), 용곡리 동굴:화석으로된 사람뼈 출토 |
연천 전곡리(全谷里) |
주먹토기(Acheulean style) | |
제천 점말 동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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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양 금굴 |
70만년 유적지로 가장 오래됨. 외날 긴찍개, 흰날 주먹도끼. Acheulean(아슐) 및 Levallosian(르발로와) 석기 발견, 동물화석 발견 | |
파주 적성면 |
주월리(舟月里), 가월리(佳月里) | |
충남 공주 석장리(石壯里) |
좀돌날석기의 몸돌 부분 처음 발견, 불땐 자리(爐址)와 기둥 등이 있는 집터 | |
중기 |
함북 웅기 |
굴포리(屈浦里), 부포리(鮒浦里) |
평양 상원 용곡리(龍谷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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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남 덕천 승리산(勝利山) 동굴 |
homo sapiens(古人, 슬기인) 화석 | |
평양 역포구 대현동(大峴洞) |
homo sapiens(古人, 슬기인) 화석 | |
강원 양구 상무용리(上舞龍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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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연천(漣川) 남계리(楠溪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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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양평 병산리(屛山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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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공주 석장리(石壯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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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제천 명오리( 鳴梧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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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단양 수양개(垂楊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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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빌레못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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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
함북 웅기 |
굴포리(屈浦里), 부포리(鮒浦里) |
평남 덕천 승리산(勝利山) |
homo sapiens sapiens(슬기슬기인) 뼈화석 출초 | |
평양 만달리동굴(萬達里洞窟) |
homo sapiens sapiens(슬기술기인) 뼈화석 출초 | |
충남 공주 석장리(石壯里) |
집자리 | |
충북 청원 두루봉동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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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단양 수양개(垂楊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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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단양 상시리(上詩里) |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homo homo sapiens, 슬기슬기인. 新人) 머리뼈 화석 출토 | |
강원 양구 상무용리(上舞龍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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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양 금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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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북 종성 동관진(潼關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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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보은 장내리(長內里) |
3. 구석기 시대의 생활
가. 거주지
구석기인들은 동굴(평양 상원 검은 모루동굴, 충북 청원군 두루봉동굴), 바위그늘(충북 단양 상시리), 강변의 언덕 또는 평지(충남 공주 석장리 집자리)에 막집을 짓고 살았으며 기둥을 세워 만든 움막집에서는 8~10명 정도 가족이 살았을 것이다.
나. 식생활
주로 짐승을 사냥하거나(狩獵) 물고기를 잡거나(漁撈) 나무열매를 채집(採取와 蒐集)하여 먹고 불을 발견한 이후에는 음식을 익혀 먹었다.
다. 도구
돌을 깨뜨려 만든 뗀석기와 짐승의 뼈를 가공한 골각기 등의 연장을 사용하였고 사냥, 요리, 공작용으로 제작되었다.
라. 사회
구석기사회는 계급이 없는 평등사회였으며 가족단위(氏族社會)로 이동하면(移動社會) 사는 무리사회(群社會, horde)를 이루었다.
마. 예술
충남 공주 석장리 움막 문앞에 석상, 사람, 새, 사슴 등이 새긴 선각화(線刻畵) 등 구석기인들은 예술활동을 보여주는 유물이 발견되었고 예술활동은 사냥의 번성을 비는 주술적 의미가 있었다.
Ⅱ. 신석기문화
1. 신석기 시대
한반도의 신석기 시대는 약 8000년전부터 시작했다.
시기 |
연대 |
내용 |
출토 |
전기 |
BC 8000~BC4000 |
원시민무늬토기(原始無文土器), 덧무니토기(隆起文土器), 눌러찍기무늬(押印文土器) |
웅기 굴포리 서포항, 부산 동삼동, 평북 만포동, 강원 오산리, 의무 미성리, 경남 통영 상로대도, 제주도 고산리, 고성 문암리, 여수 송도와 안도, 신안군 흑산도 |
중기 |
BC 4000~BC2000 |
빗살무늬토기(櫛文土器) |
웅기 굴포리 서포항, 평남 청호리, 서울 암사동, 하나시 미사동, 부산 동삼동, 봉산 지탑리, 대동군 청호리 |
후기 |
BC 4000~BC1500 |
납작빗살무늬토기(平底櫛文土器), 물결무늬토기(波狀文土器), 번개무늬토기(雷文土器), 타래무늬토기(渦文土器, 螺旋文土器) |
청진 농포동(農圃洞), 온천 궁산리(弓山里), 봉산 지탑리(智塔里), 부천 시도(矢島), 춘천 교동(校洞), 굴포리 서포항(西浦港) |
2. 대표적 유적지
시기 |
유적지 |
내용 |
전기 |
부산 동삼동(同三洞), 다대포(多大浦)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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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북 웅기 굴포리 송평동(松坪洞) 서포항(西浦港)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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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 양양 오산리(鰲山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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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한경면(翰京面) 고산리(高山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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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암사동(岩寺洞)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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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통영 상로대도(上老大島)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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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여수 돌산읍 송도(松島)와 남면 안도(安島)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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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도 봉산 지탑리(智塔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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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북 의주 미송리(義州美松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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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북 만포동(滿浦洞)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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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고성 문암리(文岩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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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하남시 미사동(美沙洞)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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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남 대동군 청호리(淸湖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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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북 청진 농포동(農圃洞)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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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남 온천 궁산리(弓山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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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부천 시도(矢島)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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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 춘천 교동(校洞)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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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 서생포(西生浦)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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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공주 석장리(石壯里) |
3. 신석기 시대의 생활
가. 거주지
신석기인들은 원형 또는 방형으로 땅을 넓게 파서 지은 움집(竪穴住居, 土幕, 庴幕)을 만들어 살았다. 움 가운데 취사장 역할을 하였을 화덕이 있었고 화덕장소 옆에는 저장구덩이 있었고 4~5명이 살 수 있는 크기였다.
나. 식생활
구석시대와 마찬가지로 사냥, 고기잡이, 채집생활을 하였고 더하여 농경생활(조, 피, 수수 등)을 하고 목축(돼지 사육)도 시작되었다.
다. 유물
⑴ 토기
식선기시대의 토기는 전기에는 원시민무늬토기(原始無文土器), 덧무니토기(隆起文土器), 눌러찍기무늬(押印文土器), 중기에는 빗살무늬토기(櫛文土器) 그리고 후기에는 납작빗살무늬토기(平底櫛文土器), 물결무늬토기(波狀文土器), 번개무늬토기(雷文土器), 타래무늬토기(渦文土器, 螺旋文土器)가 제작되어 사용되었다.
⑵ 간석기(磨製石器)
돌괭이, 돌삽, 돌보습, 돌낫, 화살촉(石鏃), 창(石槍), 갈돌판(갈돌, 갈판, 碾石, 磨石)
⑶ 기타
낙시도구(그물추(石錘), 작살(杈)), 조그마한 동물 토우(土偶, 암사동), 흙으로 만든 작은 얼굴(土面, 오산리), 조개껍데기 가면(貝面, 동삼동), 가락바퀴(紡錘車), 바늘통과 뼈바늘(骨針)
라. 사회
10가구 정도가 취락을 형성하여 씨족을 바탕으로 부족사회를 형성하였으며 족외혼을 통해 보다 큰 부족을 형성했다. 지배자와 피지배관계가 없는 평등사회였으며 정착생활을 하였다.
마. 종교
animism(精靈信仰) |
자연현상에 영혼이 있고 풍요를 비는 의미에서 태양과 불 숭배 |
shamanism(巫覡信仰) |
인간과 영혼을 매개하는 무당과 주술을 믿는 사상으로 고조선의 단군 |
totemism(토템思想) |
씨족의 기원을 특정 동식물과 연계해서 숭배한 것으로 단군신화의 곰,호랑이 |
영혼불멸사상(靈魂不滅思想) |
사람은 죽어도 영혼은 없어지지 않는다는 사상으로 영혼숭배(靈魂崇拜), 조상숭배(祖上崇拜) |
제2절 청동기 시대와 고조선
Ⅰ. 청동기 시대의 생활
1. 시기
신석기시대말인 기원전 2000년경에 중국의 요령(랴오닝), 러시아의 아무르 강과 연해주 지역에서 들어온 덧띠새김무늬 토기문화가 앞선 빗살무늬토기문화와 약 500년간 공존하다가 점차 청동기시대로 들어간다. 이때가 기원전 2000년경에서 기원전 1500년경으로 한반도에 청동기시대가 본격화된다.
2. 청동기시대의 생활
가. 거주지
집터는 대체로 직사각형으로 움집의 깊이가 낮아져 점차 지상으로 바뀌는 모습을 보이며 움집 중앙의 화덕은 한쪽으로 옮겨지고 저장구덩(貯藏穴)도 따로 설치하거나 한쪽 벽면을 밖으로 돌출시켜 만들었다. 주춧돌을 이용하기도 했고 목책(木柵)과 환호(環濠)로 외부침입에 대비하였다. 주거용 외에 창고, 공동작업장, 집회소, 공동의식장소 등도 있었다.
나. 유적지
강원 양양 지경리, 충남 부여 송국리
다. 유물
⑴ 청동제품
비파평동검(琵琶形銅劍, 遼寧式銅劍), 거친 무늬거울(多鈕粗文鏡), 청동검(靑銅劍), 화살촉(靑銅鏃), 청동창(靑銅戈), 청동방울(靑銅鈴), 방패형동기(防牌形銅器)
⑵ 토기
덧띠새김무늬토기(각목돌대문토기, 刻目突帶文土器), 미송리식토기, 붉은간토기(홍도(紅陶), 적색마연토기(赤色磨硏土器), 단도마연토기(丹塗磨硏土器))
⑶ 기타
반달형돌칼(半月形石刀), 바퀴날도끼(달도끼, 환상석부, 環狀石斧), 홈자귀(有溝石斧) 등
라. 무덤
고인돌(支石墓, dolmen), 돌널무덤(石棺墓), 돌무지무덤(積石塚)이 있어고 말기에 독무덤(甕棺墓)과 널무덤(木棺墓)도 생겨났다. 선돌(立石, menhir)과 함께 거석문화를 형성하는 고인돌(支石墓, dolmen)은 전국 각자에 분포하고 있으며 그 방식은 탁자식(卓子式, 北方式), 기반식(基盤式, 南方式) 및 개석식(蓋石式)외에 묘역식고인돌(墓域式支石墓)이 있으며 2000년 고창, 화순, 강화고인돌은 UNESCO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마. 경제생활
종래 수렵, 어로, 채집생활외에 조, 피, 수수, 기장, 콩, 보리 등 밭농사 중심의 농업이 이루어 졌으며 일부 저습지에서 벼농사가 시작되었다.
바. 사회변화
생산경제의 발전과 사회진보로 인해 사회는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으로 분화되고 사유재산 제도로 빈부격차가 생겨나고 선민사상을 바탕으로 주변 지역을 정복하여 군장국가(성읍국가)가 생겨났다.
사. 예술
종교나 정치적 요구를 반영하여 암각화로 울산 반구대 바위그림(巖刻畵)와 고령 양전동 바위그림(巖刻畵) 등이 있다.
Ⅱ. 고조선의 등장
1. 고조선사회의 성장
가. 단군신화 (檀君神話)
⑴ 위서(魏書)에 실린 단군신화
환인(桓因)의 서자(庶子) 환웅천왕(桓雄天王)이 하늘아래에 내려가 다스리기를 원해 환인은 천부인(天符印-청동검, 청동거울, 청동방울) 3개를 주며 하늘아래에 내려가 홍익인간(弘益人間-인간을 널리 유익하게 함)하라고 하였다.
환웅은 무리 3천명을 거느리고 태백산 마루터 신단수(神檀樹)아래에 신시(神市)를 열었다.
그곳에는 범과 곰이 함께 살고 있었는데 사람이 되기를 원해 三. 七기도(21일동안)를하니 환웅은 곰과 범에게 100일동안 굴속에서 햇빛을 보지말고 마늘과 쑥만 먹고 지내라 했는데 성질이 급한 범은 뛰쳐나오고 무사히 견딘 곰은 사람이 되었으니 바로 환웅과 결혼한 웅녀(熊女)였다.
환웅과 웅녀사이에 태어난 단군(檀君)은 즉위하여 평양성(왕검성)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조선이라 하고 1500년간 다스리다가 기자(箕子)가 와서 장당경(藏唐京)으로 옮겨갔다가 다시 아사달(阿斯達)로 돌아가서 숨어 살다가 산신(山神)이 되어 1980세가 되었다.
<2000년전에 단군왕검이 있어서 아사달에 도읍하여 나라를 열어 조선이라고 하였는데 이때가 고(高-중국의 요나라)때 일이였다>
⑵ 단군신화의 기록
단국신화(檀君神話)가 나와 있는 책은 삼국유사(三國遺事, 1281년 일연(一然, 普覺國師)), 제왕운기(帝王韻紀, 1287년 이승휴(李承休)), ⑶ 세종장헌대왕실록지리지(世宗莊憲大王實錄地理志, 1454년), 응제시주(應製詩駐, 1462년 권람((權擥)),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 1476년 신숙주, 노사신등),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1481년 노사신(盧思愼)ㆍ강희맹(姜希孟)ㆍ서거정(徐居正) 등), 신동국여지승람(1531년 이행(李荇)・윤은보(尹殷輔)・신공제(申公濟) 등), 동국통감(東國通鑑, 1485년. 서거정(徐居正)등), 동국지리지(東國地理志, 1615년 한백겸(韓百謙)), 동사(東事, 1667 허목(許穆. 남인))¹, 동국통감제강(東國通鑑提綱, 1672년 홍여하((洪汝河, 남인)), 동사강목(東史綱目, 1778년 안정복(安鼎福)), 동사(東史, 1803년 이종휘((李種徽 소론))², ⒀ 아시조선(兒時朝鮮, 1927년 최남선(崔南善)),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 1948년 신채호) 등이 있다.
⑶. 단군신화의 의미
단군신화는 천강신화(天降神話)로서 선민사상(選民思想)과 우월성을 과시하고 있으며 풍백(風伯), 우사(雨師), 운사(雲師 : 구름→번개, 벼락) 3사로 보아 농업사회와 국가(형벌)의 성립되었으며 토착부족(곰)과 이주부족(환웅)의 결합으로서 단군왕검(檀君王儉)은 제정일치(祭政一致, theocracy)의 사회에서 단군(檀君)은 제사장(祭司長)을 왕검(王儉)은 정치적 수장(政治的 首長)을 의미하였다. 한편 황해도 구월산에는 삼성사(三聖祠)가 있어 환인(桓因, 태양신(太陽神, sun god)), 환웅(桓雄, 천왕(天王)) 및 환검(桓儉). 천군제사장(天君祭司長))을 모시고 있다.
나. 고조선의 발전
⑴ 고조선의 성립
고조선은 아사달(阿斯達)<왕검성(王儉城,)>을 중심으로 발달하였으며 동기를 배경으로 성장하였다.
⑵ 고조선의 성장
고조선은 BC 3세기경 부왕, 준왕 등이 왕위 세습이 나오고 상, 대부, 장군과 같은 관직이 분화를 알 수 있으며 중국의 전국 7웅 연(燕)과 대치하였으며 BC 284년경 연나라 진개(秦開)가 침입하여 요동군 설치하기도 하였고 철기(명도전, 반량전, 오수전)가 유입되었다. 그리고 한반도 남부에 고조선 유이민 유입되어 세형동검(細形銅劍) 등장하였다.
2. 위만조선
가. 위만의 집권
위만이 1000여명을 이끌고 망명하여 국경수비 임무를 맡다가 준왕을 내좆고 왕이 되었다(BC 194~180). 위만조선은 진번, 임둔 등 복속하였다.
나. 한나라와의 충돌
위만조선이 남방의 진국과 한나라의 중계무역 이익을 독점하자 한무제가 침공하여 1년만에 왕검성 함락(BC 108)되어 우거왕(右渠王)은 살해되고 끝까지 저항하는 성기(成己)의 노력은 실패하였다.
3. 한의 군현
가. 한사군 : 낙랑군, 진번군, 임둔군(BC 108년) 현도군(BC 107년)
나. 진번군, 임둔군을 폐하고 낙랑군(진번 15현중 7현), 현도군(+임둔군) 관할에 둠(BC 82년)
다. 현도군 만주 흥경 방면으로 이동(BC 75년)
라. 공손씨 옛 진번땅에 대방군 설치(AD 204년경)
마. AD 313년 고구려 15대왕 미천왕 낙랑 축출, 백제 13대왕 근초고왕 대방군 314년 축출
바. 낙랑 토호 왕조(王調) 반기를 낙랑태수 궁준(弓遵)이 평정((BC 36년)
4. 고조선사회
가. 8조금법에 나타난 고조선 사회
한서 지리지 연조(漢書 地理志 燕條)에 3조가 나와 있다.
① 살인자는 즉시 사형에 처한다(相殺, 以當時償殺).
② 남의 신체를 상해한 자는 곡물로써 보상한다(相傷, 以穀償).
③ 남의 물건을 도둑질한 자는 소유주의 집에 잡혀들어가 노예가 됨이 원칙이나, 자속(自贖:배상)하려는 자는 50만 전을 내놓아야 한다(相盜, 男沒入爲其家奴, 女子爲婢, 欲自贖者人五十萬).
나. 환단고기에 나타난 8조금범
① 사람을 죽이면 그 즉시 죽음으로 갚는다(相殺以當時償殺) :
② 사람을 상해하면 곡식으로 갚는다(相傷以穀償)
③ 도둑질하는 자는 남자는 재산을 몰수하여 그 집의 종이되고 여자는 계집종을 삼는다(相盜者男沒爲其家奴女爲婢)
④ 소도(성역)를 훼손하는 자는 둔다(毁蘇塗者禁錮)
⑤ 예의를 잃은 자는 군에 복무시킨다(失禮義者服軍)
⑥ 게으른자는 부역에 동원시킨다(不勤勞者徵公作)
⑦ 음란한 자는 태형으로 다스린다(邪淫者笞刑)
⑧ 남을 속인자는 잘 타일러 방면한다(行詐欺者訓放) 자신의 잘못을 속죄한 자는 비록 죄를 면해 공민이 될 수 있지만 이것을 수치스럽게 여겨 시집가고 장가들 수 없었다(欲自贖者雖免爲公民俗猶羞之嫁娶無所讐)
이리하여 백성이 마침내 도둑질하지 않았고 문을 닫고 사는 일이 없으며 부인은 정숙하여 음란하지 않았다. 전야와 도읍을 개간하고 음식을 그릇에 담아 먹었으며 어질고 겸양하는 교화가 이루어졌다. (삼한관경본기 번한세가 상)
다. 의미
① 사람의 생명과 사유재산보호
② 노비제 옹호
③ 범죄를 수치로 여김
④ 여성의 정절 중요시
⑤ 화폐사용
라. 고조선사회의 변화
한사군 설치이후 법조항이 60여개로 증가하여 풍속이 각박(刻薄)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