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회 사천 역사문화연구회 선진리성 답사를 다녀와서
강 애 란
2015년 8월29일 사천역사문화 연구회원들의 첫모임이 선진리성에서 있었습니다. 한여름 폭염도 고개를 숙이기 시작하고 가끔 시원한 바람도 불어서 걷기 좋은 날씨였습니다. 이 날은 일본의 강압에 의해 국권을 빼앗긴 지 105주년 되는 경술 국치일이기도 했지요.
유적지 답사 첫 행사였음에도 일반 회원들과 학생들이 많이 참가한 것에 대해 고마움을 전하고
우리 연구회를 만들게 된 계기와 목적에 대해서 김을성 회장님의 간략한 인사말이 있었습니다.
“회칙 제 2조에도 명시 되어있듯이 이 회는 사천의 역사문화와 향토사의 조사 연구를 통하여 역사의 가치와 애향심을 고양하고 선양 발전과 우리 지역의 등록된 문화재를 보호하고 지역민에게 알리는 것을 그 목적으로 발족되었다”는 내용입니다.
연구회의 첫 발간책자는 국립진주박물관에서『내 고장 역사탐방 시즌 4.사천유물 특별전』과 함께 열린 제 12기 박물관대학의 강의 교재를 재발행한 것입니다.
이번 답사는 이은식 (삼천포 중앙고등학교 교장)선생님의 선진리성의 역사적 배경에 대해 강의를 들은 후 현장을 찾았습니다. 역사란 우리 시각으로만 바라볼 것이 아니라 사건과 관련된 나라들이 자신들 입장에서 기록한 역사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회원들은 선생님과 성안으로 들어가 임진왜란 때 천수각이 있던 자리에 세워진 충령비(忠靈碑)앞에 다가섰습니다. 1950년 6.25전쟁 발발 시부터 1958년 지리산 공비토벌작전 종료 시까지 대한민국 영공수호를 위해 임무 수행중 산화한 66명의 호국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한 전적기념비입니다. 영웅 이순신장군의 구국 이념과 뜻을 같이 했기에 선진리성에 세웠다고 합니다.
5분 정도 걸어가 귀 모양 조각상이 있는 이총 기념비 앞에 섰습니다. 이곳은 조.명 연합군의 어이없는 패전으로 수많은 군사들과 우리 백성들의 참사를 기억하게 하는 현장입니다.
사진 촬영하시던 무영스님도 1992년에 박삼중 스님이 일본 내에 있는 이총에서 흙을 담아와 이곳에 묻고 그들의 넋을 기렸다고 합니다 . 그리고 조.명군총(경상남도 기념물 제80호)을 둘러보고 바로 옆에 덕승관(德勝館)(조.명군총 기념관)에 들어갔습니다. 선진리성 전투에서 저지른 왜군의 만행과 이순신 장군의 거북선 첫 출전 승전지인 사천해전에 대해 전시한 자료들도 살펴보았습니다.
회원들과 함께 걸어 나오다 이 아무개 (삼천포 중앙고교3)학생과 몇 마디 나누었습니다.
그는 예전에 이곳에 와보기는 했지만 오늘 답사를 통해서 우리 역사문화를 좀 더 생각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역사 교사가 꿈이라는 그는 앞으로 친지들과 이곳에 오면 선진리성과 벚꽃축제에 대해 예전과는 다르게 설명할 수 있겠다고 말했습니다.
다음은 경상남도 문화재 자료 제 274호로 지정된 선진리성을 중심으로, 이은식 선생님이 준비하신 답사 자료입니다.
선진리성을 중심으로
이은식 (삼천포 중앙고등학교 교장)
1. 선진리성은 통일신라시대 말이나 고려 초에 토성을 축조하였다고 보며, 현재 왜성의 모습을 하고 있다. 선진리성을 발굴 조사하였을 당시 발굴된 유물이 통일신라시대 말 혹은 고려 초에 사용되었던 유물이었기 때문이다. 이 지역은 바다를 통해 고려시대는 개성, 조선시대는 한양으로 물자를 수송하는 주요한 장소로 이용되었고 군사적인 목적으로도 주요한 지역이기 때문에 지명도 통양창通陽倉, 通羊倉 , 동양창東洋倉, 법질도法叱島, 신채新寨, 선소船所, 선진船津 화계花溪 등으로 불렀다.
이 토성도 통일신라 말기나 고려 초기에 쌓은 것으로 추측되는데, 임진왜란 당시, 이 토성 위에다 모리 길성(毛利吉城)이 1597년 10월 하순부터 12월26일 까지 축조하여 왜성으로 사용하기 시작하였고 그 다음 해에 도진의홍島津義弘이 성을 견고하게 하기 위하여 다시 돌을 쌓았다.
현재 남아있는 모습이 선진리성 전체가 아니다. 이미 오랜 기간 동안 파괴되고 변형되어 지금은 선진성의 일부가 남아 있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에 보면, 성은 토성이고, 둘레는 3086척(土築周三千八十六尺)으로 기록되어 있다. 참고로 사천읍성은 5500척 정도이다. 주척周尺의 척도이다.
참고로, 통양창은 조선 태종 때 폐쇄되었고 현재 구호에 해창이 있었는데, 뒤에 해창이 없어져서 그 지역을 구해창이라 불렀다. 영조 때 가산창이 있어서 조운을 담당하였다.
왜성에서 중심이 되는 건물은 천수각(전수각, 텐슈카쿠)이다. 우리나라 성의 장대(將臺)와 비슷한 성격을 가진 건물로, 높게 지어 적의 동태를 살피기 용이하고, 성 안을 살피기도 하며, 작전회의도 하고, 지휘를 할 수 있기에 용이한 곳이다. 성을 대표하는 건물이기도 하다. 진주성에는 서장대, 북장대, 남장대 등 여러 곳에 장대가 있는 것을 볼 수 있으나 왜성의 천수각은 각 성마다 천수각을 만들지 않으나 만들면 하나의 천수각만 만든다. 그러나 우리나라 장대처럼 개방형이 아니고 외부 폐쇄적이며 정교하다.
* 선진리성 측량도 생략함*
2. 임진왜란과 선진성 전투
정유재란에 있었던 선진성 전투는 조명연합군의 치욕적인 전투였다.
당시 사천지역 전투는 선진성과 사천읍성의 부분적인 전투가 아니라, 진주성, 망진성, 영춘성, 곤양성, 사천성, 선진성이 서로 연계되어 있는 전투였다. 선진성을, 중국의 역사서 명사(明史)에는 사천의 신채新寨라고 기록하고, 일본은 사천왜성泗川倭城으로 기록하고 있다. 사천읍성은 명사(明史)에서는 구채舊寨라 기록하고 , 일본의 기록에는 고관古館, 고환古丸으로 기록되어 있다. 선진성 전투는 1598년 10월1일 오전 6시경에 시작되었다. 전투는 조명연합군의 참패였다. 명나라 군대가 먼저 공격해 들어갔는데, 화약담당부대의 실수로 화약에 불이 붙어 자멸하다 시피 하였기 때문이다. 이 전투로 명나라 장군 2명이 책임을 물어 사형을 당했다.
일본기록에는 당시 전투에 참여했던 군사가 조명군사 3만7천여명, 일본군사 8천여명, 조선왕조실록에는 조명군사 8천여명으로 되어있다.
** 사천왜성과 선진성 전투 지도 생략함**
선진성에서 승리한 도진의홍島津義弘은 다시 전선을 이끌고 노량진으로 향하였다. 소서행장부대가 이순신 장군의 수군 때문에 순천에서 꼼짝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구원하기 위해 전선 500여척을 이끌고 노량에서 이순신 전함과 해전을 벌렸다가 전함이 거의 파괴되었다.
그러나 이순신 장군도 이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만약 선진성 전투에서 화약이 폭파되는 실수가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일제 강점기 시대, 일본은 선진성 승리를 기리기 위해 이곳에 벚꽃을 심었다.
3 .조명군총(朝明軍塚)
조명군총은 선진성 전투에서 전사한 조선군사와 명나라 군사의 무덤이다. 왜는 죽은 적의 코나 귀를 베어 사망자 수를 세었다. 그리고 20칸 정도의 구덩이를 파서 묻었다. 이 무덤이 지금까지 전해져 오는 조명군총인데, 과거에는 당병무덤으로 알려져 왔다가 1985년 도지정기념물로 지정되어 이름도 조명연합군 전몰위령비라 하였다.
매년 음력 10월 1일에 사천문화원 주관으로 추모제를 지내고 있다.
4.이총(耳塚)
조선에서 왜군이 전리품으로 귀나 코를 잘라 본국으로 보내자 왜는 교또 토요꾸니 신사에 묻고 이를 이총이라 하였다. 1992년 이미 사라지고 없어진 육신이지만 이총에 있는 흙이나마 가져와서 조명군총 옆에 두고자 하여 사천문화원과 삼중스님이 일본에서 흙을 채취하여와서 이곳에 묻고 이총이라 하였다.
5. 2015년
선진성 전투는 우리나라 중국 일본이 얽혀진 역사다. 임진왜란에서는 적으로 만났으나 지금에서는 상호 선린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래서 사천시에서는 중국의 한 도시와 연계하여 선진성을 중심으로 역사문화를 교류하는 장으로 삼고자 노력하고 있다. 또한 선진성을 기점으로 문화관광의 촉매제로 운용하고자 연구하고 있다. 과거의 적이었던 일본과도 이제는 더불어 공영하는 문화권이 되도록 새로운 장을 열려고 한다.
참고자료 1) 사천선진리성, 정의도, 임진왜란과 선진리성 2003, 사천문화원
2) 정유재란과 사천성 전투, 국제 일본문화연구센터 카사야 카즈히코 교수,
임진왜란과 선진리성, 사천문화원 2003.
- 끝 -
일본의 조선 침략
임진왜란 1592년 4월 13일 침략
정유재란 1597년 8월 20일 재침략
선진성 전투 1598년 10월 1일
경술 국치일 1910년 8월 29일
.
첫댓글 수정할 부분 있으면 댓글 부탁합니다.^^
강애란회원님
함께하는 사천인이 많이 참여했으면 합니다.
발족하고 처음 행사이므로 더많은 사천인이 답사를 하도록할게요.
다음답사때에는 사천사람들은 물론 더많은 분들이 참여 하도록 다같이 노력 합시다.
김을성
선생님 좋은글 감사합니다.
경술국치일의 내용이 앞의 내용에 들어가면 더 좋을듯 합니다.
이날 저도 우연하게 그 내용을 알고 더 뭉클했었는데 ㅋ
이심전심 ...
말안해도 통하는건 마음을 보고있기 때문입니다. ()
위에서 셋째줄로 옮기고 읽어보니 괜찮습니다. 꾸벅^^
이렇게 다시 정리해서 올려주시니 그날 있었던 일이 다시 머리에 떠오릅니다.
광복70년을 기념해 연구회의 첫 답사지가 선진리성이라 더욱 뜻깊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게요...사천에 살면서 몇 군데 유적지 다녀봤지만 돌아서면 흩어지는 기억들 뿐이었는데,
이번 답사는 좋은 분들과 함께 한 덕분에 좀 더 오래 남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