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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소리
이유
털털털…….
요란한 소리를 뱉어내며 돌아가는 세탁기 소리를 차단하려고, 뒷배란다 문을 닫고 고리까지 잠근다. 조금은 약해진 소리지만 쯪쯪쯪 하는 것 같은 세탁기 돌아가는 소리는, 예민한 내 신경을 극도로 자극한다. 몇 달 전부터 세탁기 통 돌아가는 소리가 요란하다. 서비스센터 직원은
“세탁기 수명은 매일 사용한 것으로 간주해 보통 5년인데 오래 쓰셨네요.”
하면서 명함을 놓고 간다. 나는 그 명함을 볼 때마다 신형 드럼세탁기가 눈앞에서 아른거린다.
뒷배란다의 소리를 피해 앞배란다로 나간다. 금귤나무 열매가 영하의 날씨에도 황금 열매를 매달고 있다. 처음 내 집에 들어왔을 때는 오십 센티의 키에 금귤나무임을 증명하듯 금귤이 서른 개나 달려있었다. 나는 그 열매들을 보면서 피노키오에 나오는 금돈이 주렁주렁 달린 동화 속의 나무를 떠올렸다. 열매가 달린 나무를 볼 때마다 노란 황금 열매가 집안 가득 행복을 채우고 있는 것 같아 풍요로움을 느꼈다. 금귤나무는 몇 해 동안은 물만으로도 열매를 주렁주렁 매달았다. 그러나 해마다 열매에게 양분을 내어주던 나무가 속으로 말라가는지 점점 열매의 수가 줄어들더니 올해는 두 개 밖에 열리지 않았다. 점점 늙어가는 나무를 볼 때마다 거름을 주어야 한다는 생각은 했지만 화초를 제대로 가꿀 줄 모르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일주일에 한 번 잊지 않고 물을 주는 것이 전부이다.
복도에서 아이들이 계단으로 뛰어 내려가는 소리가 들린다. 현관문을 바라본다. 고장 난 것처럼 좀처럼 벨이 울리지 않는 문이다. 그녀와 제주도에 가기로 약속되어 있지만 그녀는 오지 않는다. 전화도 없다. 불쑥 자기 편리한 시간에 드나들던 그녀였는데, 오후 네 시가 넘어도 소식이 없다. 나는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 이유를 따질 수 있는 입장이 아니다. 그것이 그녀와 나와의 관계이다.
‘집에 무슨 일이 있는 걸까? 혹시 어디 아픈 걸까?’
조급한 마음이 들 때마다 혹시 그녀가 오나 앞배란다로 나가서 주차장을 내려다보는 것만이 그녀에 대한 내 마음의 표시이다.
불이 한 집 두 집 켜지기 시작하는 아파트, 낮 동안 비어 있던 주차장에는 차들이 들어차기 시작한다. 종일 동동거리고 다니다가도 집으로 돌아오는 시간은 평화로워 보인다. 그녀가 귀가 하여 잠들어야할 자리는 분명 이곳이 아니다. 그러나 나는 자주 주차장을 살핀다.
털털털…….
세탁기가 마지막 물기를 짜내고 있는지 요동친다. 통에 쇠줄이 감긴 듯한 소리가 내 목을 조여 온다. 소리가 멈추자 세탁기에서 빨래를 꺼낸다. 바지와 윗도리가 꼬일 대로 꼬여 털어도 잘 풀리지 않는다. 팔이 아프도록 털어서 옷걸이에 건다. 빨아야할 것들이 몇 가지 안 되는 나는 일주일에 두 번 세탁기를 돌린다. 그때마다 세탁기 돌아가는 소리를 들으며 드럼세탁기를 떠올린다.
맞은편 아파트 입구에 일주일에 한 번 오는 에쿠스는 항상 같은 요일 같은 시간에 온다. 차가 있는 동안만 불이 켜지는 그 집은 남자가 나가면 조금 후에 젊은 여자가 나온다. 난 그들이 왜 이 아파트에 가끔 오는지 궁금해 하지 않는다. 내가 그 집 아래층으로 이사 가서 조용히 살 수 있었으면 하는 생각을 한다.
문을 조금 열자 찬 공기에 실려 자동차 매연 냄새가 확 몰려든다. 큰 도로에서 나는 자동차 소리는 더 맹렬해진다. 깊은 산속에 틀어박히지 않는 한 나는 그 모든 소리와 함께 살아야 한다. 그것이 소리에 예민한 내가 사는 동안 견뎌내야 하는 나만의 고통이다. 위층에서 분주하게 돌아다니는지 발소리가 쿵쿵 울린다. 가끔 바닥에 물건이 내동댕이쳐지는 소리, 아이들에게 악을 쓰는 여자의 소리가 내 신경을 자극한다. 짜증이 섞인 여자의 날카로운 목소리는 가끔 나를 위로하기도 한다. 혼자 사는 나는 다른 사람으로 인해 짜증낼 일이 별로 없다. 그녀의 소리를 들으며 내 삶이 더 평화롭다고 단정을 짓기도 한다. 악을 쓰며 살 바에는 차라리 혼자 사는 게 낫다고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기도 한다. 그러나 모든 소리가 잠든 새벽에는 무서울 정도의 적막이 몰려온다. 가시지 않는 외로움, 마흔을 넘기고도 결혼을 하지 않은, 엄밀히 따지면 하지 못한 나는 세상에 나 혼자 버려진 느낌으로 잠을 이루지 못한다. 그럴 때마다 그녀가 더 간절히 생각난다. 하지만 그녀는 내 집에서 한 번도 묵어간 적이 없다.
그녀는 아파트에 올 때마다 습관적으로 이사하라는 말을 한다.
“이 아파트는 도로변에 있어서 너무 시끄러워. 조용한 오피스텔로 이사하지 그래.”
이곳의 소란스러움을 이유로 들었지만 실제 그녀의 심사를 불편하게 한 것은 그녀의 남편 사무실이 가까운 곳에 있기 때문이다. 그녀가 이곳에 올 때마다 위층 아이들이 쿵쿵거린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돌아와 한참 놀 시간이다. 한창 뛰어놀 아이들을 집안에 가두어 놓으니 아이들 발을 묶어놓지 않는 한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위층 여자는 아래층에 혼자 사는 나를 볼 때마다
“아이들이 없어서 아이들 소리가 더 시끄럽게 들리죠?”
신경을 긁는다. 나는 결혼도 했고 아이들도 있으니, 결혼도 못하고 애도 없는 네가 참아야지 별 수 있느냐는 투로 들려, 나는 그 여자와 마주치는 것을 싫어한다. 밖으로 나가려다가도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면 그녀의 목소리가 사라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나간다. 위층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가 신경을 곤두세워 당장이라도 올라가 소리를 지르고 싶을 때는, 술을 마시고 잠을 잔다. 그것만이 내가 위층과의 충돌을 막는 방법이다. 낮 동안 밖에 나가 생활하다가 밤늦게 들어와 피곤한 몸으로 잠에 곯아떨어진다면 정말 행복하겠다 싶을 때도 있다. 하지만 그러지 못하는 것이 내 생활이다.
욕조에 뜨거운 물을 반쯤 받는다. 손발로 통하는 혈관이 막혀버린 듯 손과 발이 시리다. 몸속에서 바람 소리가 들린다. 나는 그녀를 기다리다가 지친 날에는 항상 이런 소리를 들어야 했다. 이럴 때는 반신욕을 한다. 그녀는 손발이 차가운 나에게 냉혈인간이라고 놀리곤 했다. 나는 웃으며
“손발이 차가운 사람이 마음은 더 따뜻한 법이야.”
대꾸를 했지만 내가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다.
바닥에서부터 차오르는 물소리로 모든 소리가 빨려 들어간다. 머그컵에 커피 믹스를 넣고 뜨거운 물을 붓는다. 우윳빛 컵 위로 수증기가 올라오는 것이 보인다. 수증기가 올라가는 소리를 듣는다면 아마 몸속에서 빠져나오는 바람소리 같을 것이다. 오디오를 틀고 볼륨을 조절한다. 욕조에 들어가 앉는다. 몸을 움직일 때마다 들리는 물의 소리, 물의 압력이 몸에 감지된다. 따뜻한 물에 하반신을 담갔지만 온몸에서 들리는 차가운 바람소리는 쉬 가시지 않는다. 화장실 유리가 아래에서부터 점점 희뿌연 해지기 시작한다. 거울에 비추인 화장실의 풍경이 서서히 눈앞에서 지워지는 것을 보며 머릿속에 있는 잡다한 생각들을 지운다. 몸이 나른해지면서 음악소리만 남는다.
아버지가 죽은 후 난 가족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다. 아버지의 빈자리는 커다란 바람구멍으로 남았고, 나는 그 구멍에서 나오는 바람소리로 늘 가슴이 시리다. 아버지는 미웠지만 어쨌거나 내 인생의 버팀목이었다. 그러던 아버지는 내가 학교에 있을 때 안방에서 혼자 쓸쓸히 숨을 거두었다. 아버지가 이승의 문턱을 넘고 있을 때, 아버지의 여자는 남자를 따라 갔다. 열다섯 살이었던 나는 아버지가 죽을 때까지만 기다려 달라고 했다. 그러나 아버지의 여자는 아버지가 죽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라고 했다. 아버지는 그녀에게 내가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만 돌봐달라고 부탁했다. 그것이 아버지가 그녀에게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그녀가 아버지의 청을 들어주었더라면 그녀는 두 다리를 잃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그녀는 남자를 따라가던 날 교통사고로 두 다리를 잃었다. 나는 서류상 그녀의 보호자였지만 나는 그녀와 결별했다.
아버지는 나와 그녀 사이의 다리였다. 아버지의 다리가 무너지고, 그녀의 두 다리가 무너지자 그녀는 나에게 오는 다리를 잃었다. 나는 그녀가 내게 오지 못하게 아홉 평 임대아파트로 옮겼다. 그녀는 나를 따라오지 못했다.
내 몸 안에서 들리는 바람소리를 듣기 시작한 것은 그 무렵부터이다. 바람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면 온몸이 오들오들 떨리며 아버지의 다리가 보인다. 나는 한 동안 그렇게 보냈다. 이불을 뒤집어써도 보일러 온도를 높여도 몸 안에서 들리는 바람소리는 가시지 않았다. 그 때 내가 터득한 방법이 반신욕이다.
내가 내 생활에 제법 익숙해질 즈음 한 번은 그녀가 찾아왔다. 난 집에 있으면서도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현관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그녀와 나 사이의 팽팽한 긴장이 흘렀다. 계속 울리던 벨소리에 지쳐 내가 문을 열기 직전에 그녀는 돌아갔다. 그녀는 ‘독한 년’이란 말을 내뱉고 사라졌다. 그녀의 휠체어를 밀고 나타난 남자가 누구일까 궁금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죽던 날 그녀를 데리고 간 남자는 그날 죽었다고 들었다. 남자는 그녀와 휠체어를 차에 싣고 떠났다.
그 때 몸속에서 거센 바람소리가 소용돌이 쳤다. 그녀는 내가 일곱 살 때 아버지를 따라 우리 집으로 들어온 여자이다. 그 여자가 들어오자 어머니는 집을 나갔다. 나에게 공부 열심히 하고 있으면 데리러 온다던 어머니는 오지 않았다. 나는 내가 공부를 못하면 어머니가 나를 데리러 오지 않을까봐 어린 나는 친구들과 놀고 싶은 것을 참아가며 미련하게 공부만 했다. 그래서 나에게는 친구가 없다. 그래도 어머니는 끝내 나를 데리러오지 않았다. 어머니가 나를 데리러오지 못한다는 사실을 안 것은 중학교 2학년 여름방학 때였다. 낯선 사람이 아버지를 찾아와 어머니의 부고를 알렸다. 어머니가 아버지 곁을 떠난 것이 아니라 그 여자가 어머니를 쫓아낸 것이라는 것을 안 것도 그 무렵이다.
나는 그때부터 밖으로 떠돌았다. 아버지도 그녀도 내게 충고를 한다거나 걱정을 한 적은 없다. 그것은 나와 그녀, 아버지와 나 사이의 충돌을 피하는 하나의 방법이었다. 내가 무슨 짓을 하던 아버지와 그녀는 간섭하지 않았다.
화장실 벽에 걸린 시계를 본다. 삼십 분이 흘렀다. 오소소한 한기 대신 이마에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혀있다. 욕조에서 몸을 일으키고 물기를 닦는다. 아래층 여자가 아이를 씻기는지 하수구에서 악을 쓰는 여자의 소리와 아이 우는 소리가 들린다. 욕조 구멍을 막고 있던 고무마개를 들어올린다. 하수구로 나가는 물보다 욕조에서 나오는 물이 더 많은 탓에 화장실 바닥에 욕조의 물이 차오르다가 곧 빠져나간다. 양 손바닥으로 거울을 닦아 거울의 눈을 만든다.
아버지의 장례식을 치르고, 두 달 만에 그녀가 입원해 있다는 병원으로 그녀를 찾아갔다. 의사가 병원에 있어봤자 병원비만 들어가니 퇴원하는 것이 좋다고 했다. 나는 그녀와 한 집에 살면서도 그 후로 그녀를 보지 않았다. 그녀의 목소리는 커질 대로 커져 내게 소리를 질렀다. 손에 잡히는 물건을 마구 집어던지며 욕을 해댔다. 나는 그녀가 내뱉는 소리가 듣기 싫어 아버지 집에서 나왔다. 그러나 그 소리들은 내 귀에서 멀어지지 않고 잠을 잘 때도 책을 읽을 때도 항상 귓속에 머물러 있었다. 나는 그 소리들을 멀리 보내려고 수면제를 먹었다.
수면제는 내 몸속에서 나는 소리들을 말끔히 잠재웠다. 조용한 암흑세계로 빨려 들어가는 아늑함은 무척 편안했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수면제의 양이 늘어나 두 알을 삼켜도 귀에서 들리는 잡음으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나는 소리가 가장 적은 새벽에 잠자리에 들었으나 내 몸의 모든 촉수는 소리를 향하고 있었다.
소리는 단지 소리일 뿐이라고 무시하려 애쓰면 애쓸수록 소리는 내 몸에 상처를 내고 있었다. 소리가 없는 세상으로 가는 방법을 궁리한 적도 있다. 소리가 없는 세상에서 사는 꿈을 꾸기도 했다. 그러나 소리가 소리를 잠재울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후 부터 소리를 멀리하는 방법을 찾았다. 수면제를 먹어도 잠을 자도 사라지지 않는 소리는, 그보다 더한 소리와 부딪히는 것이다. 소리와 부딪히는 동안은 내 몸속에서 나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말 없는 나를 그녀가 좋아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그녀가 말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녀와 나는 그렇게 서로 원하는 꼭짓점에서 만났다. 그녀는 내 앞에서 항상 잡다한 얘기로 끊임없이 수다를 떨며 애교를 부렸다. 그녀는 수다를 끝까지 들어주는 나를 좋아했다. 그녀가 말이 없을 때는 서로의 몸을 애무하거나 키스를 할 때였다. 그녀는 그녀가 원하는 곳을 부드럽게 애무해 주고 만져주는 것을 좋아했다. 나 또한 그녀의 손길이 감미로웠다. 그러던 그녀가 어느 날부터인가 말수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나는 이유를 묻지 않았지만 그녀가 내 곁에서 조금씩 멀어지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녀와의 여행을 원했던 것이다.
수화기를 들어서 귀에 대본다.
“뚜~~~”
살아있다.
현관문을 열고 밖에 나가서 벨을 눌러본다.
“띵동~”
살아있다.
현관문에 붙어있는 전단지들을 떼어 들어온다. 마트 할인상품 중에 드럼세탁기가 유난히 돋보인다.
맞은 편 아파트의 불이 한 집 두 집 꺼지기 시작한다. 나는 창밖의 세상과는 무관한 척 커튼의 주름을 옮긴다. TV소리를 줄이고 마감 뉴스를 본다. 한 달째 집 밖을 나오지 않은 노인이 있어서 가보았더니 노인이 죽어 있었다는 보도가 나온다. 앵커의 목소리가 착잡하게 들린다. 나는 그녀는 그렇게 쉽게 죽으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하며 손가락으로 리모컨을 연거푸 누르다가 영화 채널에서 고정한다.
날이 밝았다. 잠을 잔 기억이 없다. 협연 연습이 있는 날이라 드럼 스틱이 담긴 가방을 메고 집을 나선다. 사람들은 죽을 자신이 없으면 나름대로 자신에게 맞는 방법으로 세상에 적응하면서 살아간다. 내가 드럼을 연주하기 시작한 것은 아버지를 땅에 묻은 이후이다. 나는 내 몸속에서 나는 소리를 잠재우기 위해 더 큰 소리를 내야했다. 그녀와 결별을 선언하고 아버지 집을 나왔지만 그것으로는 부족했다.
연습실 문을 열었다. 지하의 퀴퀴한 냄새가 코를 자극한다. 빛이 들어오지 않는 연습실이지만 이곳이 없었다면 나는 아마 미쳐버렸을지도 모른다. 처음 연습실에 들어왔을 때
“남자? 여자?”
긴 머리를 뒤로 묵은 단장이 물었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무도 더 묻지 않았다.
드럼 앞에 앉아 의자의 높이를 조절한다. 스틱을 잡고 잠시 손목을 푼다. 단원들은 각자 연습 중이다. 베이스 드럼 페달 위에 발을 올려놓는다. 내가 협연 시작을 알리는 스틱을 네 번 두드리는 것을 신호로 협연이 시작되었다.
‘바르샤’를 찾은 지 다섯 달 만에 정식으로 밴드 구성원이 되었다. 내 집을 자유롭게 드나들던 그녀는 ‘바르샤’ 보컬이었다. 그녀는 나보다 한 살 위였지만 깜찍한 외모 때문에 나보다 어려 보였다. 나는 그녀에게 나이를 밝힌 적이 없다. 연습이 끝나면 그녀는 나를 따라왔다. 아홉 평 아파트였지만 그녀와 내가 지내기에는 부족함이 없는 공간으로 그녀와 내가 가까워진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던 그녀가 내게 청첩장을 주었다. 그녀가 결혼하면서부터 그녀와 나는 부자연스러운 관계가 되었다. 그녀는 결혼을 하고서도 내게 자주 왔다. 나는 그녀의 결혼에 대해 한 번도 이의를 제기한 일이 없다. 그녀의 발길이 뜸해지기 시작한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녀가 내게 오고 안 오고는 전적으로 그녀의 선택이었다. 그녀는 복잡한 일이 있을 때마다 나를 찾아왔다. 내가 그리워서 온 적도 있었겠지만 대체로 그녀는 자신의 수다를 들어줄 사람이 필요할 때 나를 찾아왔다. 그녀는 내 집 비밀번호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내가 외출하고 없을 때도 그녀 편한 시간에 와서 쉬었다. 나는 그녀에게 오라 하거나 오는 시간을 정해주지 않았다.
그녀가 쓰던 작은 화장대와 화장품이 그대로 있다. 나는 화장품을 바르지 않는다. 내 칫솔 통에 그녀가 쓰던 분홍 손잡이의 칫솔도 있다. 나는 그녀가 속옷차림으로 화장 하는 모습을 보기 좋아했다. 나는 그녀의 귀여운 행동이 싫지 않았다. 그녀는 언젠가는 나를 찾아오리란 것을 안다. 여행을 떠났다 돌아온 사람처럼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 하리란 것도 안다. 나는 그러한 그녀를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대할 것이라는 것도 안다.
스틱을 든 내 손이 멈추어 있다. 협연은 끝났다. 나는 조용히 스틱을 정리하여 가방에 넣는다.
집으로 향하다가 마트로 발길을 돌린다. 가전제품 코너에서 드럼세탁기를 둘러보다가 가격이 가장 저렴한 세탁기에서 발길을 멈춘다. 사지 않는다.
숙녀복 매장을 한 바퀴 빙 돌아본다. 여자 옷을 만져본다거나 입어본다거나 하는 따위의 행동은 나에게 낯설다. 그녀가 입으면 예쁠 것 같은 하얀 실크 블라우스에서 눈길이 멈춘다. 매장 직원이 다가오며
“뭐 찾으시는 것 있으세요?”
묻는다. 나는 됐다는 표시로 손을 들어 보이고 돌아선다.
여행사 간판이 눈에 들어온다. 그녀와의 제주도 여행을 위해 준비했던 항공권이 생각나 그대로 공항으로 향한다.
제주 공항은 여전히 번잡하다. 관광안내소에서 올레길 안내도를 챙겨 1코스를 선택하고 버스에 오른다.
1시간 정도 달려 시흥리에 도착했다. 아직 겨울이지만 제주도의 바람에서는 봄 냄새가 났다.
숙박 장소는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정년퇴직을 하고 온 남자, 정리해고를 당한 젊은 청년, 취업 준비를 하고 있다는 휴학생, 재 창업을 위한 중년 남자. 이렇게 4명이 같은 장소에서 머물게 되었다. 나는 운이 좋은 편이라는 생각이 든다. 혼자 온 사람들이 올레꾼들을 만나지 못하면 3일 동안 혼자 걸어야한다고 했다.
첫날 날이 밝기 전부터 걸었다. 말미오름을 걸을 때는 바람이 심하게 불었다. 나는 바람에 떠밀리지 않으려고 애를 쓰며 걷는다. 바람은 나를 쓰러뜨리지 못했다. 올레꾼들은 아무도 나를 이상하게 보지 않았다. 묵묵히 자신들 앞에 펼쳐진 제주의 흙길을 한 발 한 발 걸을 뿐 내가 사내인지, 계집인지 궁금해 하지 않았다. 말 없는 내게 왜 왔는지도 묻지 않았다. 멀리 성산 일출봉과 우도가 보인다. 제주도의 아름다운 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두 해전 우도에서 하얀 산호사 모래 속에서 보석처럼 아름다운 산호 조각을 골라 손바닥에 놓고 탄성을 지르던 그녀의 모습이 떠오른다. 나는 투명한 에메랄드빛 바다색과 잘 어울리던 그녀의 모습을 눈앞에서 지우려 애쓰지 않는다.
다음 날은 종달리를 향해 걸었다. 올레는 제주의 산길, 바닷길, 오름, 마을길을 돌아볼 수 있도록 코스가 정해져 있었다. 나뭇가지에 매어 놓은 파란색 리본과 길에 새겨진 푸른 화살표를 따라 걸어야 했다. 노란색 화살표는 역방향을 표시하고 있었다. 돌담 너머에 있는 감귤나무에 황금빛 귤이 주렁주렁 달려있다. 담장을 대신한 동백나무는 집주인의 아름다운 맘씨를 꽃처럼 보여주고 있다. 한쪽에서는 농부들이 겨우내 땅 속에서 얼지 않고 남아있는 당근과 무를 수확 중이다. 수확 하던 농부가 올레꾼들에게 당근을 하나씩 주었다. 옛 제주 사람들이 걸어서 다니던 좁은 길을 복원한 것이 올레라는데 마치 S자 형태를 따라 마을을 구석구석 도는 듯한 느낌이었다. 대문이 없는 제주도는 담장의 형태가 집 밖에서 집안이 훤히 보이지 않게 설계되어 있어서 옛 선조들의 지혜를 느끼게도 하였다. 거세게 들리던 제주도의 바람소리도 제주의 아름다운 경치에 묻혀 더는 심난하지 않았다.
마지막 날은 시간의 여유가 있어서 일행 모두는 올레 쉼터에서 커피와 오징어를 나누어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모두 처음 만난 사람들이지만 올레를 위해 모였다는 하나의 이유만으로 금방 친구가 될 수 있었다. 정년퇴직을 하고 온 남자가
“인생은 어렵게 생각하면 한없이 어렵지만, 쉽게 생각하면 또 어려울 것이 없는 것이 인생이에요. 이순의 나이를 넘기고 보니 인생 별거 아니더군요. 왜 그렇게 아등바등 살았는지 후회가 되더군요. 너무 고민하지 말고 마음 가는대로 사세요. 어떻게 살든 후회는 남는 법이니까요.”
묵직한 그의 말이 귀에 남는다. 나는 그의 말을 되새기며 아름다운 해안을 걷는다. 걷는 동안은 내 몸속에서 나는 바람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겨울이라 해가 짧아 아침 일찍부터 해질녘까지 걸어 코스를 완주하였다. 시간당 3Km의 속도로 걸었는데 제주의 경치를 구경하는 데는 지장이 없었다. 일행은 다음에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고 제주 공항에서 헤어졌다. 재 창업을 준비한다는 남자가 나에게 전화번호를 건네주며 꼭 연락하라고, 기다리겠다며 헤어지는 것을 무척 아쉬워했다. 나는 그에게 내가 여자라는 것을 말한 적 없다. 그는 3일 내내 내 뒤에 바짝 붙어 걸으며 이런 저런 얘기를 했다. 나는 그러는 그가 싫지 않았다. 계획하지 않은 사람들과의 만남이 선명한 영상으로 가슴에 남았다.
현관에 붙어있는 전단지를 떼고 비밀번호를 누르며 혹시 그녀가 안에 있을까 생각한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빈집의 익숙한 공기가 나를 감싼다. 맞은 편 아파트의 그 집에 불이 켜져 있다. 그 집 앞 주차장에 에쿠스가 있다.
욕조에 물을 받는다. 뜨거운 물속에 몸을 담그고 발을 주무른다. 수증기가 뿌옇게 차오르면서 거울이 눈을 감기 시작한다. 나도 눈을 감는다.
사람들이 나를 마구 흔들어 깨운다.
‘이봐 총각, 아니 처녀, 엄마가 돌아가실 것 같아요. 빨리 가 봐요.’
‘엄마요? 엄마는 벌써 돌아가셨는데요?’
‘이그, 그 엄마 말고, 지금 엄마.’
‘저 한텐 엄마가 없어요.’
‘뭔 소리여~ 엄마가 처녀 얼굴보고 간다고 아직 못 가고 있어요. 황천 가는 사람 기다리게 하면 못 써요. 빨리 가요.’
‘싫어요. 난 그 여자 몰라요. 제 엄마가 아니에요.’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빨리 가 봐요.’
사람들이 몰려들어 나를 떠메고 간다.
‘싫어요. 싫다고요. 싫어! 싫어!’
욕조 물소리에 눈을 떴다. 이마에는 굵은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혀있다. 욕조에서 나와 물기를 닦고 샤워가운을 걸친 채 그녀에게 전화를 건다. 그녀가 받는다.
“안 죽었네?”
그녀는 내 전화를 받고 운다. 한참을 울던 그녀가
“사내처럼 살지 말고, 나이 더 먹기 전에 결혼해. 여자는 결혼을 해서 남자하고 살아봐야 진짜 여자가 되는 거여.”
여느 어머니들처럼 말한다. 그녀의 목소리가 듣기 싫지 않았다. 내 몸속에서 들리던 바람소리도 들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