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5.11.24~2016.01. 27 기간 동안 10주에 걸쳐 daum.net 스토리 펀딩에 [명리, 운명을 읽다] 10화 가 연재되었었습니다. 스토리 펀딩은 130% 목표달성으로 완료되었습니다. 성원해주신 많은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1화 음악평론가 강헌, 명리학을 만나다
살다 보면 절실하게 구원이 필요할 때가 꼭 다가옵니다. 구원까지는 아니더라도 따뜻한 위로나 쿨한 위안이라도 옆에 있어주었으면 할 때가 있습니다. 저에게도 구원이 절실했던 순간이 있었습니다.
사망률 98%, 대동맥박리
이전까지 비교적 평온했던 제 삶에 순식간에 밀어닥친 엄청난 불행이었습니다. 마흔세 살이 되던 해의 초여름 어느 밤, 늦게 혼자 남은 사무실에서 갑자기 쓰러졌습니다. 마침 핸드폰을 두고 퇴근한 대학원 제자가 핸드폰을 찾으러 오지 않았더라면 그대로 저는 불귀의 객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 친구가 쓰러진 저를 발견한 덕분에 곧바로 응급실로 옮겨졌지만, 이미 대동맥이 70센티미터나 찢어진 '대동맥박리’라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당시 사망률은 98%. 응급 수술은 진행됐지만 담당 집도의는 살 가망이 없다 판단하고 수술을 포기하였습니다. 그리고 수술실 밖에 망연자실 기다리던 식구와 지인들에게 장례 준비를 하는 것이 좋겠다고 했습니다. 그 뒤로 의식을 잃은 채 중환자실에서 23일을 누워 있다가, 문득 그냥 깨어났습니다. 모두들 기적 같은 일이라며 놀라워했습니다.
기약 없는 요양 생활의 시작, 명리학을 만나다
기적같이 깨어났지만 담당 의사는 1년 반에서 2년 정도 이상은 버티기 어려울 것이라며 천천히 삶을 정리하는 마음을 갖는 게 좋겠다고 했습니다. 걷지도 일어서지도 못하는 몸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었습니다. 느닷없이 쓰러져 죽는 것도 허망하지만 죽는 날이 오늘일까 내일일까 기다리는 마음도 할 짓이 아니었습니다. 책을 읽을 수도 그렇게 좋아했던 음악도 듣기 어려웠습니다. 차라리 처음 쓰러졌을 때 그냥 죽어버렸으면 좋았을 걸 하는 생각이 매일 같이 나를 지배했습니다.
전라남도 해남 두륜산 자락의 조용한 시골집에서 기약 없는 요양 생활을 시작한 지 한 달쯤 지났을까. 무언가 번쩍하고 오랫동안 잊고 있던 한순간이 어제의 일처럼 불쑥 떠올랐습니다. 고등학교 3학년, 대학 입시에서 떨어지고 얼마 안 되어 친구 집에 놀러 갔다가 친구 아버지가 제 사주를 봐준 일입니다.
“이번 대학 입시는 떨어졌지만 내년에는 그 학교와 그 과에 다시 붙을 거다. 걱정 마라. 여러 일을 하겠지만 결국은 글로 먹고살 거다. 그런데 그 힘이 약해 40대 초반이면 사그러든다. 40대 초반, 정확히 만으로 42살에 죽을 고비가 온다. 그런데 죽지는 않을 거다. 그리고 결혼을 세 번 할 것이다.”
‘결혼을 세 번 한다니...’, 아직 고등학교를 졸업도 못한 고3이 받아들이기에는 충격적이고 허무맹랑한 이야기였습니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가 죽을 고비를 넘기고 해남 산골 마을에 들어앉은 40대 초반 너무도 선명하게 떠오른 것입니다. 공교롭게도 당시에 저는 한번 이혼했고 재혼 상태였습니다. 그것은 죽을 날을 받아놓고 살아가는 무기력한 일상에 찾아온 엄청난 충격이었고 ‘정말 인간의 운명은 정해져 있는지’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 길로 서울에 있는 후배에게 서점의 역술 코너에 있는 책들을 모조리 보내달라고 했고 닥치는 대로 읽었습니다.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몰랐지만 그냥 되는 대로 읽었습니다. 딱히 할 일도 없었고 의사 말대로 ‘어차피 죽을 거 궁금한 거나 알아보고 죽자’라고 생각했습니다.
나를 찾아가는 내비게이터, 명리학
원래 저는 종교를 갖는 것조차 비웃었던 사람입니다. 종교라는 것은 의지박약에 주체적이지 않은 사람들이 의존하는 일종의 아편과 같다고 여겼습니다. 점이나 굿은 더 말할 것도 없었죠. 그런데 오늘 죽느냐, 내일 죽느냐 하는 이 마당에 명리학 책을 죽어라 파고 있으니 스스로 우스꽝스럽기도 했습니다. ‘인간, 참 별거 아니네.’ 그때 제 심정이 그랬습니다. 책을 들여다볼수록 그런데 참 흥미로웠습니다. 마치 내 앞에 내가 앉아 있는 것처럼 내 모습이 잘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동안 내가 얼마나 나 자신에 대해 무지했는지, 아니 관심조차 없었는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났습니다. 의사가 말한 시간은 이미 훌쩍 지났는데 저는 여전히 살아 있었습니다. 살아 있다는 건 다시 삶을 계속 이어가야 한다는 뜻이었습니다. 해남에서의 요양 생활을 청산하고 서울로 돌아왔습니다. 사람들도 다시 만나기 시작했습니다. 혼자 골방에서 공부하던 명리학을 사람들과 나누기 시작했고 대학로 벙커원에서 명리학 강연도 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사람 팔자, 참 알 수가 없다’, ‘나름 진보적 지식인을 자처하는 놈이 웬 사주팔자 놀음이냐’ 하는 비아냥거림도 꽤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냥 쭉 밀어붙였습니다. 왜냐하면 적어도 저에게는 명리학이 돈 몇만 원 내고 보는 시장통의 기복적인 잡설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어두컴컴한 골방에서 은밀하게 도사를 만나 그 말 한마디 한마디에 자신의 운명을 한탄하는 푸닥거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내면적인 문제, 타인과의 관계의 어려움에 대한 해결책을 찾기 위해 많은 시간과 비용을 지불합니다. 그렇다고 문제가 단숨에 해결이 되던가? 하나의 실마리를 간신히 풀어 놓으면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 삶의 문제가 눈앞을 가로막습니다. 제가 쓰러졌을 때 명리학을 선택한 것은 이것이야말로 인간의 문제를 인간, 그것도 다름 아닌 나 자신이 스스로 극복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준다고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명리학은 우주의 보편타당한 본성을 통해 불완전한 인간의 삶을 아름답고 조화롭게 승화시키기 위해 존재합니다. 생로병사의 고통 앞에서 모든 인간은 평등합니다. 그 고통을 어떻게 이기고 극복할 것인가를 명리학은 말해줍니다.
자신의 운명은 자신이 판단하라
흔히 ‘멘붕(멘탈 붕괴)’이라는 표현을 많이 씁니다. 멘탈이 붕괴될 만큼 괴로운 사람이 그만큼 많아졌다는 의미입니다. 사회는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지는데 사람들의 상처와 고통은 점점 커져만 갑니다.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신과를 찾고 점을 보러 다니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런다고 문제가 해결될까요? 저는 차라리 그 시간에 자신이 직접 공부해서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판단하고 새로운 길을 찾아보는 시간을 갖는 쪽이 훨씬 효율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명리학은 인간이 행복해지는 방법을 찾는 데 아주 유용한 학문이며, 많은 사람들이 명리학을 통해 스스로의 삶을 주체적으로 재구성한다면 우리가 사는 세상은 지금보다는 더 행복해지고 더 정의로워질 거라고 믿는 마음, 그것이 제가 줄기차게 만인의 명리학자화를 부르짖는 이유입니다.
첫댓글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판단하고 새로운길을 찾는학분으로서의 명리학 명쾌하군요
늘 양보하고 퍼주고 손해보는데도 결국에 제가 제일 나쁜년이 되어있고 저를 동네 방네 나쁜소문 퍼트리고 헐뜯는 사람이 당당한게 너무 이상해서ㅡ아무리 조심해도 몇번 되풀이되니 지금부터 명리학으로 저를 알아가 보려합니다
아
절체절명한 순간에 명리가 동아줄이 되었군요
감동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