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는 목마름으로
김지하
신새벽 뒷골목에
네 이름을 쓴다 민주주의여
내 머리는 너를 잊은 지 오래
내 발길은 너를 잊은 지 너무도 너무도 오래
오직 한 가닥 있어
타는 가슴 속 목마름의 기억이
네 이름을 남몰래 쓴다 민주주의여
아직 동 트지 않은 뒷골목의 어딘가
발자국 소리 호르락 소리 문 두드리는 소리
외마디 길고 긴 누군가의 비명 소리
신음 소리 통곡 소리 탄식 소리 그 속에 내 가슴팍 속에
깊이깊이 새겨지는 내 이름 위에
네 이름의 외로운 눈부심 위에
살아오는 삶의 아픔
살아오는 저 푸르른 자유의 추억
되살아오는 끌려가던 벗들의 피 묻은 얼굴
떨리는 손 떨리는 가슴
떨리는 치떨리는 노여움으로 나무 판자에
백묵으로 서툰 솜씨로
쓴다
숨죽여 흐느끼며
네 이름을 남몰래 쓴다.
타는 목마름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
1연에서 순수와 자유의 생명이 탄생하는 시간인 '신새벽'과 이것이 감추어지고 그늘진 공간인 '뒷골목'의 의미 구조가 첫행에 표현됨으로써 민주주의의 새 아침을 기다리는 신념이 드러나 있다. 가슴 속에 목마른 기억으로만 남아 있는 민주주위라는 이름을 이른 새벽 뒷골목에서 남 몰래 써야 한다는 시적 상황 속에 당시의 현실이 선명하게 집약되어 있다.
제 2연은 여러 가지 소리의 중첩을 통해 이 시대의 공포와 고통을 날카롭게 드러낸다. '발자욱 소리'에서부터 '탄식 소리'에 이르기까지 아무런 구체적 사건의 서술이 없지만, 오히려 소리들 사이에 있는 무서운 사태가 독자들의 상상 속에서 생생하게 떠오르오록 한다. 이 작품의 화자는 위화 같은 험한 상황에서의 분노와 비통함으로 흐느끼면서 뒷골목의 나무 판자에 '민주주의여 만세'라고 쓴다. '뒷골목'에서 '숨죽여 흐느끼며/남 몰래/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 만세를 쓸 수밖에 없는 이 대목은 그 어떤 산문적 서술보다 뚜렷하게 당시의 정치적 현실을 증언하면서, 그것을 넘어서고자 하는 비장한 결의를 보여 준다. 독재 권력이 민주주의를 압살하려는 현실,많은 민주인사들의 체포,구금이 이어지는 상황을 1.2연에서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3연에서는 그렇게 암울한 상황 속에서도 민주주의에 대한 갈망이 타오르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그러나 차마 입밖으로 외치지 못하고 '뒷골목'이나 '나무판자에' '남 몰래''숨 죽여' 쓸 수 밖에 없는,그래서 속으로 삼킬 수 밖에 없는 지식인의 고뇌 또한 엿볼 수 있다.곡이 붙여져 노래로도 널리 알려진 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