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논문은 정토선(淨土禪)의 원리와 수행법을 연구한 논문이다. 정토선(淨土禪)은 중국의 관정(寬淨) 법사(이후 관정으로 줄임)가 1987년 싱가포르에서 처음 펴낸 정토선 원리(淨土禪精義)에서 펼친 수행법으로, 그 뒤 미국, 대만, 한국에서 여러 차례 발행되어 보급되었다.
1. 정토선(淨土禪)이란 용어는 이미 원나라의 천여 유측(天如惟則, ?~1354)이 쓴 정토혹문(淨土或問)에 처음 나온 뒤 명청시대에도 쓰였던 용어였다. 정토교리사(淨土敎理史)에서는 정토선ㆍ염불선(念佛禪)ㆍ선정쌍수(禪淨雙修)가 거의 같은 뜻으로 쓰였다.
2. 정토선은 오로지 ‘나모아미따불(南無阿彌陀佛)을 염불하되 두 편으로 나누어, 먼저 한 편이 2번 소리 내서 염불하고, 다음은 남은 편이 2번 염불할 때 주의 깊게 그 소리를 듣는 아주 간단한 수행법이다.
① 이렇게 염불을 계속하면 귀속이나 몸속에서 염불소리가 들리는데 ‘자성염불(自性念佛)’이라 한다. ② 몸속에서 염불소리가 들리면 더 이상 소리 내서 염불하지 않고 몸속에서 나는 염불 소리를 주의 깊게 듣는다. 몸속에서 나는 염불소리를 주의 깊게 들으면 만 가지 생각이 하나로 모아지는 일념(一念) 상태에 들어간다. ③ 한 생각으로 집중된 상태에서 염불을 계속 들으면 어느 단계에서 염불소리조차 사라지고 무념(無念) 상태에 들어간다.
①의 단계는 ‘정토(淨土) 단계’로, 자성염불을 목적으로 열심히 염불을 하는 단계이다. 열심히 염불했으나 자성염불이 되지 않는 사람은 그 염불한 공덕으로 극락에 가서 더 수행하는 것이다. ②③의 단계는 ‘선(禪)의 단계’로, 자성염불이 정토와 선을 가르는 기준이 되고, 선의 단계로 들어가는 시작이 된다. 선의 단계는 일념단계와 무념단계가 있다.
정토선을 다른 수행법에 비해 두 가지 수승한 점이 있다. 첫째, ① 염불에서 자성염불 단계, ② 자성염불에서 일념(一念) 단계, ③ 일념에서 무념(無念) 단계라는 3단계의 로드맵이 뚜렷하다. 둘째, 다른 수행법은 법력이 높은 스승이 있어 증득한 상황을 수시로 점검해 주지 않으면 위험한데 반해 정토선은 3단계가 모두 한마디 염불소리로 일관되어 있기 때문에 스스로 확인할 수 있어 쉽고 안전하다.
3. 정토선은 다른 수행법에 비해 다음과 같은 3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 칭명염불(稱名念佛)을 하면서도 귀로 듣는 것을 강조한다는 것이다. 이 염불법은 관세음보살이 일러주신 것으로 능엄경(楞嚴經)의 이근원통법(耳根圓通法)이 기본 원리가 되기 때문이다.
둘째, 지금까지 불교학에서는 몸을 쓸모가 없는 것으로 여겼지만 정토선에서는 마음을 닦는 것도 몸 안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몸으로 깨닫는 것(身覺)은 ‘물질을 깨닫는 신물각(身物覺)’, ‘신을 깨닫는 신신각(身神覺)’, ‘자성을 깨닫는 신성각(身性覺)’이 있는데, 앞에서 본 무념상태가 되면 신성각(身性覺)을 이룬 것이다.
셋째, 수행을 통해 신성각을 얻은 현인(賢人)들이 「인간정토를 이룩하는 원리」를 제시하였다. 신성각을 이룬 사람들은 현재 과학자들이 부르는 물질적인 우주인 현실우주ㆍ상대우주ㆍ감각우주를 벗어나 지각우주(知覺宇宙)라는 비물질적 우주, 곧 절대우주(絶對宇宙)에 접근이 가능해지고, 그렇게 되면 마음이 물질을 바꿀 수 있게 되어 핵문제나 인구문제 같은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정토선(淨土禪)은 중국의 관정(寬淨) 법사(이후 관정으로 줄임)가 1987년 싱가포르에서 처음 펴낸 정토선 원리(淨土禪精義)에서 밝힌 수행법으로, 그 뒤 미국, 대만, 한국에서 여러 차례 발행되어 보급되었다. 정토선의 원리와 수행법은 출판된 지 아직 30년이 안 되었기 때문에 역대 수행법에 비해 역사가 짧다. 그렇지만 한국에서는 저자인 관정이 1997년부터 2004년까지 8년 동안 14차례 방문하여 전국적으로 수 십 차례 그 법을 폈고, 아울러 여러 단체에서 7~8 차례에 걸쳐 책이 나왔기 때문에 이에 대한 학술적 검토와 평가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정토선 원리(淨土禪精義)는 관정(寬淨)이 1997년 2월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하여 서울 능인선원, 구룡사 같은 절에서 강연을 마치고 귀국한 뒤, 1997년 4월 10일 발행된 <관정법사 개시> 정토선 정의(총 106쪽)가 처음 번역되어 나온 뒤 꾸준히 발행되었다.
뿐만 아니라 한국에 14차례 방문하는 동안 전국적으로 100차례가 넘은 법문을 통해 정토선이 꽤 널리 알려지고 실제로 이 염불법을 수행하는 불자들도 많았다.
필자는 1992년부터 주로 관법(觀法) 수행을 해오다가 2008년부터 정토수행을 겸하기 시작할 때 정토선과 인연을 맺어 정년퇴직을 한 뒤 2009~2012년 3년 동안 산사에 들어가 직접 정토선 수행을 해 보았다. 아울러 그 3년간 정토삼부경과 관정 법사의 저작집을 번역하여 우선 2014년 아미따경(맑은나라, 2014, 전자책)과 관정 저작집인 정토와 선(맑은나라, 2014)을 출판하였다.
이 논문은 관정의 저작집 번역과 정토선을 닦은 경험을 바탕으로 정토선의 원리와 수행법이 어떤 특징을 가진 것인지를 밝히는 것이 연구목적이다.
Ⅱ장에서 정토선의 정의와 유래를 살펴본다. 정토교리사(淨土敎理史)에 나타난 여러 논설 가운데 정토선(淨土禪)을 쓴 용례를 보고 염불선(念佛禪)과 선정쌍수(禪淨雙修)의 관계도 비교 검토한다.
Ⅲ장에서는 구체적으로 정토선 수행법을 검토 분석해 본다. 정토선도 다른 염불법과 같이 칭명염불(稱名念佛)을 한다. 그러나 소리를 내서 염불하는 것보다 더 중요시하는 것이 듣는 것이다. 이것이 정토선의 첫 번째 특징이다. 이러한 특수한 염불법은 관정이 관세음보살로부터 직접 전해 받은 것이라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처럼 듣는 것은 바로 능엄경에 나오는 관세음보살의 이근원통법(耳根圓通法)이라는 원리에 바탕을 둔 것이다. 그래서 이 장에서는 능엄경 이근원통법의 원리를 분석하여 어떻게 정토선 염불에 적용되고 있는지를 살펴본다.
Ⅳ장에서는 정토선(淨土禪)과 신성각법(身性覺法)을 본다. 정토선의 두 번째 특징은 바로 몸에서 나는 염불소리인 자성염불(自性念佛)이다. 마음을 닦더라도 몸을 이용해서 닦아야 한다는 신각(身覺)을 주장한다. 이 장에서는 몸으로 깨닫는 것(身覺)이 구체적으로 무엇이고 정토선은 이런 몸으로 깨닫는 법을 어떻게 응용하는지를 자세하게 살펴본다.
Ⅴ장에서는 정토선 수행의 유토피아인 「인간정토를 이룩하는 원리」를 살펴본다. 불교의 수행은 ‘깨닫기 위해’, 또는 ‘불국토를 이룩하기 위해’ 한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수행이란 현실을 떠나 있는 것으로 비치거나, 불국토를 이룩한다고 해도 경전의 구절을 인용하는 정도의 막연한 불국토이다. 그러나 정토선에서는 몸으로 깨닫는 법(身覺) 가운데 가장 높은 단계인 ‘몸으로 자성을 깨닫는(身性覺)’ 단계를 이룩한 수행자들이 어떻게 인류의 위기를 구할 수 있는지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이 세 번째 특징이다. 이 장에서는 이러한 우주적 깨달음에 대해 자세하게 분석한다.
Ⅱ. 정토선(淨土禪)과 염불선(念佛禪)
정토선(淨土禪)의 정의와 유래.
정토선 원리(淨土禪精義) 첫머리에 정토선을 이렇게 정의하였다.
‘정토선(淨土禪)’은 바로 정토종(淨土宗)과 선종(禪宗)의 알짬을 모아 하나로 만든 것이다. 아울러 수행이란 측면에서 보면, 정토선의 수행방법은 더 이상 줄일 수 없을 만큼 간단하게 만들어져 오로지 ‘나모아미따불(南無阿彌陀佛)’이란 거룩한 이름 한 마디만 쓰기 때문에 과거 선종과 정토종의 번거로운 수행체계와는 완전히 다르고, 또 말법시대 중생들의 근기(根機)에 알맞아, 그 효과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뛰어나다.
정토 수행과 선 수행을 합쳐 새로운 수행체계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토선(淨土禪)이란 용어 자체는 관정(寬淨)이 처음 만들어낸 것은 아니고 이미 원나라의 천여 유측(天如惟則, ?~1354)이 쓴 정토혹문(淨土或問)에 처음 나온다.
그 염(念)이 붇다를 떠나지 않게 하면 붇다가 염(念)을 떠나지 않아 서로 감응이 되어 눈앞에서 붇다를 뵙게 된다. 극락(樂邦)의 (아미따) 붇다를 뵙게 되면 시방의 모든 붇다를 뵙게 되는 것이요, 시방의 모든 붇다를 뵙게 되면 자성천진(自性天眞)의 붇다를 뵙게 되는 것이요, 자성천진 붇다를 뵙게 되면 대용(大用)이 눈앞에 나타난다. 그리고 나면 중생구제의 바람(悲願)을 받들어 모든 중생을 널리 교화한다. 이것을 ‘정토선(淨土禪)’ 또는 ‘선정토(禪淨土)’라고 부르니, 영명(永明) 선사가 말하는 ‘선이 있고 정토가 있으면 마치 뿔난 범처럼 살아서는 중생이 스승이 되고 다음 생에는 붇다나 조사(祖師)가 된다.’는 것이다.
내용을 보면 영명선사의 선정쌍수(禪淨雙修)를 일컬어 정토선이라고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천여유측 선사의 이러한 관점과 정토선이란 용어는 그 뒤 명ㆍ청시대 저작에 자주 등장한다. 그 가운데 주굉(袾宏)이 교정한 정토자량전집(淨土資糧全集)에서는 ‘종토선종(淨土禪宗)’이라는 작은 제목까지 붙여 설명하고 있다.
정토선종을 논함(論淨土禪宗)
영명선사에 따르면 ‘선이 있고 정토가 있으면 뿔 달린 호랑이처럼 살아서는 중생의 스승이 되고 다음 생에는 붇다나 조사가 된다’고 해서 두 가지를 서로 겸하는 것이 빼어나다고 했다. 그러나 중봉 대사(中峯大師)께서는 ‘선과 정토는 이치는 비록 하나지만 공(功)은 견줄 수 없으니 닦는 사람은 한 가지 문에 깊이 들어가는 것이 빼어나다’고 해서 두 가지를 겸할 수 없는 것처럼 말씀하셨으니 어떤 것이 옳단 말인가? 아! 이제 연지(蓮池) 선사의 말씀을 보지 않을 수 없다. 대사께는 ‘겸한다는 것은 두 가지 뜻이 있어, 발로 두 척의 배를 함께 오르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지만 원통(圓通)이란 겸하는데 가로막는 것이 없으니 어찌 불가능하겠는가?’ 라고 했는데, 이 말에 따르면 정토와 선을 겸할 수 있다는 것이 따질 것 없이 뚜렷하다. 더구나 석기선사(石機禪師)가 지은 연사석의론(蓮社釋疑論)에서는 정토가 먼저라고 말씀하신 것을 보면 정토가 먼저라는 이야기는 바로 참선이 그 다음이라는 것이라는 것이다. 지금 비록 서로 겸할 수 있다고 하나 앞뒤를 아는 것이 도에 가까운 것이니 중봉께서 공(功)은 견줄 수 없다는 말을 어찌 의심할 수 있겠는가?
이 논문에서는 정토와 선을 함께 닦지만 어떤 것이 더 우선이냐 하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있다. 그에 대해서는 연사석의론(蓮社釋疑論)을 인용하여 결국은 정토가 우선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연사석의론(蓮社釋疑論)에서 논하였다.
‘참선이 제일이라고 하기도 하고 염불이 먼저라고도 하는데 결국 어떻게 마음을 써야 하나도 잃지 않게 됩니까?’
<답> 참선은 나고 죽는 것을 깨달으려 하는 것이고, 염불도 나고 죽는 것을 깨달으려 하는 것이니 나고 죽는 것을 깨닫지 못하면 둘은 실속 없는 명성(虛名)이다. 대체로 생사문제란 바로 내가 지금 참선이나 염불을 하려는 마음이 아닌가? 만일 깨달음을 알 수 있다면 어떤 법이 안 된다고 하겠는가? 선종은 마음이 없는 곳을 찾으면 조사의 자리에 오르는 것이고, 연종(蓮宗)은 마음과 붇다를 모두 여의면 상품(上品)에 오르는 것이니, 이것으로 증명되는 것은 두 종이 다를 것이 없다. 다만 연종을 닦는 사람은 사바세계에서는 부처님 만나기 어렵기 때문에 (상대) 경계는 강하고 알아차릴 수 있는 것은 얕아 윤회하게 되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래서 발원하여 아미따불을 가까이 모시면 마치 어린 아이가 어머니 가까이 있으면 끓는 물과 타는 불에 대한 걱정이 없게 되는 것과 같이 된다. 선종 역시 발원을 하게 되는데 (불법이 있는) 중국(中國)에 태어나 바른 믿음으로 출가하기를 바란다. 다만 힘이 없는 것을 두려워할 뿐 힘이 있다면 아난다가 말하듯 ‘오탁악세에 먼저 들어간다.’는 것이 된다. 지장보살이 말씀하시길 “지옥이 텅 비지 않으면 붇다가 되지 않겠다.”고 한 것은 그런 힘을 갖추었기 때문인 것으로 무엇 하러 극락에 가겠는가? 다만 우리들은 부끄럽게도 요행히 거룩한 가르침을 만났지만 하나쯤 알고 반쯤 깨닫고는 마침내는 힘이 약해지기 때문에 만일 정토에 태어나 아미따불을 가까이 모시시지 않으면 아이들을 모두 뜨거운 물과 불에 잃게 되어 구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먼저 정토에 태어나는 것을 구하지 않을 수 없다.
정토선(淨土禪)이란 낱말은 그 밖에도 명ㆍ청 시대 여러 정토 관계 저서에서 볼 수 있다.
① 명 우익대사(蕅益大師) 선정(選定), 정토십요(淨土十要) 권6.
② 명 덕청(德淸) 찬(撰), 민산노인몽유전집(憨山老人夢遊全集) 권4,
「법어(法語)」, ‘시서인정공전수정토(示西印淨公專修淨土)’.
③ 명 개형(開詗) 편(編), 설관선사어록(雪關禪師語錄) 권12,
「운서사옹찬(雲棲師翁贊)」.
④ 청 제능(濟能) 편집(纂輯), 각호집(角虎集) 하권, 「고금존숙(古今尊宿)」.
⑤ 청 팽제청(彭際淸) 찬(纂), 염불경책(念佛警䇿), 「정토혹문(淨土或問)」.
⑥ 청 장사성(張師誠) 저(著), 경중경우경(徑中徑又徑) 권3,
「입원법(立願法)」, ‘결정문(決定門)’.
⑦ 청 팽희속(彭希涑) 술(述), 정토성현록(淨土聖賢錄) 권4
「왕생비구(往生比邱)」 3-3 ‘유칙(維則)’.
이러한 저서에서는 대부분 이미 앞에서 보았던 영명선사나 유측(維則)을 소개하면서 정토선(淨土禪)을 언급하였지만 새로운 논리는 없기 때문에 특별히 살펴보지 않았다.
2. 염불선(念佛禪)과 선정쌍수(禪淨雙修)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정토와 선을 함께 닦는 정토선(淨土禪)이란 용어가 원나라 이후에 나타나지만 선과 정토를 함께 닦는 수행법은 이미 당나라 때부터 널리 성행하였다.
당나라 개원(開元, 713~741) 초기 혜일(慧日, 680~748)이 인도에서 돌아와 염불왕생의 긴요함을 주장한 뒤 참선하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이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즉 5조 문하의 선십(宣什)과 같은 이들은 남산염불선종(南山念佛禪宗) 한 파를 창시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정토와 선을 함께 닦는 것을 염불선(念佛禪)이라고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정토선(淨土禪)과 염불선(念佛禪)의 차이는 전자는 종파의 이름인 ‘정토종+선종’을 가지고 만든 이름이고, 후자는 두 종파의 수행방법인 ‘염불+선’을 가지고 이름을 만든 것일 뿐 그 뜻하는 바는 같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염불선(念佛禪)이란 낱말은 당나라 담연(湛然)의 지관보행수요기(止觀輔行搜要記), 송나라 종효(宗曉)의 낙방유고(樂邦遺稿), 원나라 보도(普度)의 여산연종보감염불정교(廬山蓮宗寶鑑念佛正教), 명나라 원굉도(袁宏道)의 서방합론(西方合論), 청나라 주극복(周克復)의 정토신종(淨土晨鐘)처럼 각 시대에 광범위하게 나타난다.
6조 문하에서도 남양혜충(南陽慧忠)은 행해겸수(行解兼修)를 주장하였으며 법안종의 적손인 영명연수 시대에 이르러서는 공유상성(空有相成)의 이치를 천명하여 크게 선정쌍수(禪淨雙修)의 중요함을 고취하였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일종의 선풍을 일으켰다.
여기서 우리는 정토선ㆍ염불선과 함께 선정쌍수(禪淨雙修)라는 낱말이 쓰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영명(永明) 연수(延壽, 904~975, 北宋) 조사께서 말씀하시되, ‘선이 있고 정토가 있으면 뿔 달린 호랑이 같다.’ 고 하였고, 세상에서 불법을 배우는 사람들 역시 ‘선정쌍수(禪淨雙修)’하는 위없는 법문(法門)이라 하지 않았는가?
앞에서 영명연수의 수행법을 정토선(淨土禪)이라고 했는데, 여기서는 같은 내용을 선정쌍수(禪淨雙修)라고 했다. 명나라의 자료에는 고상운서연지대사탑명(古杭雲棲蓮池大師塔銘)에 나온다.
또한 고승대덕들의 인연 가운데 아주 긴요한 말들을 엮은 것이 선관책진(禪關策進)으로, 아울러 그것을 새겨 참구할 비결로 가르치니 모두 선정쌍수(禪淨雙修)를 드러낸 것이다.
청나라에서는 선정쌍수(禪淨雙修)라는 낱말이 정토전서(淨土全書)를 비롯하여 여러 자료에 나타난다.
앞에서 정토선이란 용어의 정의를 볼 때 영명 영수의 수행법이 ‘정토선(淨土禪)’이라고 했는데 여기서는 ‘선정쌍수(禪淨雙修)’라고 한 것을 보면 같은 내용을 후대에 ‘정토선’ 또는 ‘선정쌍수’라고 불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중국 정토교리사에서 정토선ㆍ염불선ㆍ선정쌍수가 모두 가까운 뜻으로 쓰였다는 것을 볼 수 있다.
3. 염불선의 수행방법
좀 더 구체적으로 들어가 염불선의 수행방법에 따른 분류를 보면 한보광은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1) 관념염불법(觀念念佛법)
① 관념염불법 ② 선정쌍수법 ③ 전향존불법(傳香存佛法)
2) 염불공안법(念佛公安法)
관념염불법(觀念念佛法)은 그 목적이 염불삼매(念佛三昧)에 들어 견불(見佛)하는 것이며, 염불공안법(念佛公案法)은 선정삼매(禪定三昧)에 들어 견성(見性)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두 가지 방법에서 말하는 궁극적인 목표인 견불(見佛)이나 견성(見性)은 모두 같은 경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의 제9 진신관(第九眞身觀)에서는 “모든 부처님을 보기 때문에 염불삼매(念佛三昧)라고 하느니라. 이렇게 관하는 것을 일체 부처님의 몸을 관한다 라고 이름하며, 부처님의 몸을 관하기 때문에 또한 부처님의 마음을 보는 것이니라. 부처님의 마음이란 큰 자비이므로 무연자비(無緣慈悲)로써 모든 중생을 섭취하시느니라.”라고 하고 있다. 따라서 견불(見佛)은 바로 염불삼매(念佛三昧)로서 이루어지며, 견불(見佛)은 견불신(見佛身)이며, 이는 견불심(見佛心)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견불신(見佛身)과 견불심(見佛心)은 둘이 아니며, 이는 바로 견불(見佛)과 견성(見性)을 같이 보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중생은 모습과 마음이 다르지만, 부처님은 모습과 마음이 둘이 아니기 때문에 불신(佛身)은 바로 불성(佛性)과 같은 것으로 이해된다.
이 갖가지 염불법에 대해서는 한보광의 논문에서 자세히 분석하였기 때문에 여기서는 다시 논하지 않기로 하고 이 논문에서 검토할 정토선수행법과 관련이 있는 전향존불법(傳香存佛法)에 대해서만 간단히 보기로 한다.
향을 전해 준다(傳香)는 말은 처음에 대중이 모여 참회의식을 하는 것과 같은 것인데 김화상(金和上)문하에서 하는 것과 같다. 법을 전해주고자 할 때는 향을 전해주어 스승의 믿음을 주는 증표로 삼았다. 화상이 손으로 주면 제자가 다시 화상에게 주고, 화상이 다시 제자에게 주는 식으로 3번 하는데 사람들이 모두 이와 같이 하였다.
또 존불(存佛)이란 말은 정식으로 법을 줄 때 먼저 법문(法門)의 도리와 수행의 취지(意趣)를 설하고, 그 다음에 ‘한 자 염불(一字念佛)’을 하는 것을 말한다. 처음에는 소리를 내서 염불하고, 나중에는 조금씩 낮춰 겨우 들릴만한 작은 소리(微聲)로 하다가 소리를 내지 않고(無聲) 붇다를 보내(送佛) 생각(意)에 이르게 한다. 생각에 (붇다가) 뚜렷하게 새겨지지(意念) 않으면 다시 (붇다를) 보내 마음에 새겨지게(心念) 하여 생각마다(念念) 그 (붇다의) 모습이 남아있으면(存想) 붇다는 늘 마음속에 있는 것이요, (마침내) 무상(無想)에 이르면 어찌 도를 얻지 않겠는가?
전향은 법을 전하는 의식을 말하는 것이고, 염불선 수행법은 존불법(存佛法)에서 자세하게 언급하고 있다. 존불법의 단계를 간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1) 법문의 도리와 수행 취지를 설한다.
2) ‘한 자 염불(一字念佛)’을 한다.
① 소리 내서 염불한다(引聲由念).
② 소리를 조금씩 낮추어 겨우 들릴만한 작은 소리(微聲)로 염불한다.
③ 소리를 내지 않고(無聲) 붇다를 보내(送佛) 생각(意)에 이르게 한다. 생각에 (붇다가) 뚜렷하게 새겨지지 않으면(意念麤) 다시 보내 마음에 새겨지게(心念) 한다. ④ 생각마다(念念) 그 붇다의 모습이 남아있으면(存想) 늘 마음속에 있는 것이다.
⑤ 마침내 무상(無想)에 이르면 도를 얻게 된다.
이 존불법은 크게 염불(念佛) 단계(①~②)와 선(禪) 단계(③~⑤)로 나눌 수 있다. 우선 염불단계에서는 큰소리로 염불하다가 점점 작은 소리로 한다. 그리고 선단계에 들어가서는 소리를 내지 않고 생각과 마음에 붇다의 모습을 새기는 관상염불을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생각 생각에 그치지 않고 이어지면 붇다 모습이 늘 마음에 존재하는 존상(存想)단계가 된다. 그리고 그런 상태가 계속되면 마지막에 그 모습마저 없어지면(無想) 일체 상념이 없어져 도를 이룬다는 수행법이다.
이 수행법은 다른 수행법에 비해 꽤 자세하게 그 과정을 보여주고 있어 앞으로 정토선 수행법을 이해하는데 크게 도움이 되리라고 본다.
Ⅲ. 정토선 수행법
1. 정토선 수행법
1) 정토선의 염불법
정토선 염불은 기본적으로 두 번씩 염불을 하는 것이다.
① “사람들을 2반으로 나누어 염불하되, A반이 아미따불을 2번 염불하면, B반은 소리 없이 염불(黙念)하며 듣고, 이어서 B반이 아미따불을 2번 염불하면, A반은 소리 없이 염불(黙念)하며 듣는다.
② ‘정토선’ 수행방법은 사람들을 2반으로 나누어 염불하거나, 또는 2사람이 염불하는 것입니다. A반이 (나모아미따불을) 2번 염불하면, B반은 주의를 기울여 듣고, B반이 2번 염불하면 A반이 주의를 기울여 듣습니다.
우선 위의 두 인용문에서 두 가지를 관심 있게 보아야 한다. 첫째는 염불을 하는 것이고, 둘째는 다른 사람이 염불할 때 주의를 기울여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염불법에 한 번 염불을 계속해 나가는 법과 4회 염불, 5회 염불 같은 염불법이 있는데 정토선에서는 2회 염불이 기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정토선 염불이 다른 염불에 비해서 가장 특징적인 것은 인용문 ②에서 강조한 것과 같이 ‘주의를 기울여 듣는 것’이다.
이처럼 두 번 염불하고 두 번은 속으로 염불하며 주의 깊게 듣는 것은 혼자 염불할 때도 마찬가지다.
다만 혼자서 염불할 때도 대처할 방법이 있는데, 스스로 먼저 ‘나모아미따불(南無阿彌陀佛)’을 2번 염불하면서 주의를 기울여 듣고, 소리가 그치면 이어서 마음속으로 소리 나지 않게 2번 염불하는 식으로 끊임없이 반복하면 됩니다.
정토선 원리(淨土禪精義)에 보면 관정 법사는 이런 염불법은 자신이 고안한 것이 아니고 극락에 갔을 때 관세음보살이 직접 가르쳐 준 법이라고 한다. 스스로 극락세계에 갔을 때의 기록을 정리한 서녘 극락세계 여행기(西方極樂世界遊記)에는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나는 그 기회를 틈타 관세음보살께 가르침을 청하고, 가르침을 주시길(開示) 간절히 빌며 물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염불하는 것이 가장 좋고, 수행하여 가장 빨리 이룰 수 있습니까?”
그러자 관세음보살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선(禪)과 정토(淨土)를 함께 닦으며(禪淨雙修), 한마음으로 염불하고, 염불하면서 참선하는 것을 ‘정토선(淨土禪)’이라 한다.”
저는 바로 그 법을 전수해 주실 것을 청하며 여쭈었다.
“정토선을 어떻게 닦아야 할지 가르쳐 주십시오.”
관세음보살께서 고개를 끄덕이시면서 이렇게 전수해 주셨다.
“사람들을 2반으로 나누어 염불하되, A반이 아미따불을 2번 염불하면, B반은 소리 없이 (속으로 따라서) 염불(黙念)하며 듣고, 이어서 B반이 아미따불을 2번 염불하면, A반은 소리 없이 (속으로 따라서) 염불(黙念)하며 듣는다. 이렇게 수행하면 힘들지 않고, 또 염불이 끊어지지 않는다.
이근(耳根)은 가장 영민하기 때문에 (계속 들으면) 귓속에서 저절로 염불소리가 나게 되는데, 바로 마음이 염불하는 것이다. 마음과 (염불하는)입이 하나가 되면 불성이 스스로 드러나게 되고, 고요해지면 선정(定)이 생기고, 선정에 들어가면 지혜(慧)가 생기느니라.”
관세음보살은 이 2회 염불법이 두 가지 장점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① 두 번 하고 다른 사람이 할 때는 소리를 내지 않고 대뇌이며 듣기만하기 때문에 힘들지 않는다.
② 이렇게 절반만 힘을 들여도 되기 때문에 염불이 끊어지지 않고 계속될 수 있다.
그 다음에 이 염불법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이근원통법(耳根圓通法)을 통해 선정과 지혜를 닦는 방법이 바로 정토선 염불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2) 정토선 수행의 방법과 원리
관정은 앞에서 본 관세음보살의 이근원통 염불을 보다 자세하게 발전시켰다.
이근(耳根)은 가장 총기가 뛰어나기 때문에, 염불할 때 느리고 소리는 맑고 깨끗하게 하면, 염불이 익숙해질 때쯤 귀에서 염불소리가 들리거나 자기 몸속에서 저절로 염불을 하게 됩니다.
이때 여러분은 도대체 자기 몸속 어느 부분에서 염불소리가 들려오는지 주의를 기울여서 들어 보아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여러분은 더 이상 소리 내서 염불할 필요가 없고, 그 다음부터는 다니거나(行) 머물거나(住) 앉거나(坐) 눕거나(臥) 따지지 말고 언제나 그 한마디 염불을 주의 깊게 들어야 합니다. 이때 들리는 염불을 ‘자성염불(自性念佛)’이라 합니다.
보다 더 깊은 경계는 아침저녁으로 선(禪) 수행을 할 때, 이 ‘한 생각(一念)’을 조금씩 더 닦아서 ‘무념(無念)’(선은 바로 이 무념이 마지막 목표이다)을 이루면, 온몸이 모두 비어 지극히 고요해지고(空寂), 한 생각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처럼 한 생각도 일어나지 않으면 단박에 법신(法身)이 나타나서 부모로부터 태어나기 이전의 본디모습(本來面目)을 되찾게 되는 것입니다. 이 경계에 다다르면 저절로 한마디 아미따불을 새길(念) 필요도 없게 됩니다.
이상의 내용을 간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① 두 번 소리 내서 염불하고 두 번은 소리 내지 않고 염불한다.
자신이 소리 내고 염불할 때 자신의 염불소리를 주의 깊게 듣고,
남이 염불할 때도 그 소리를 주의 깊게 듣는다.
② 이렇게 염불을 계속하면 귀속이나 몸속에서 염불소리가 들린다. 이때 들리는 염불을 ‘자성염불(自性念佛)’이라 한다.
③ 몸속에서 염불소리가 들리면 더 이상 소리 내서 염불할 필요가 없고, 몸속에서 나는 염불 소리를 주의 깊게 듣는다.
④ 몸속에서 나는 염불소리를 주의 깊게 들으면 만 가지 생각이 하나로 모아지는 일념(一念) 상태에 들어간다. 이것이 관세음보살이 이야기한 정(定)이다.
⑤ 한 생각으로 집중된 상태에서 염불을 계속 들으면 어느 단계에서 염불소리조차 사라지고 무념(無念) 상태에 들어간다. 이것은 관세음보살에 이야기한 지혜(慧)이다.
여기서 ①~②의 염불(念佛) 단계이고 ③~⑤ 단계는 선(禪) 단계이다. 그렇기 때문에 ‘정토선(淨土禪)’ 바로 선(禪)과 정토(淨土)를 함께 닦는 것(禪淨雙修)으로, 두 가지를 합해서 하나로 만든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관정은 무념 상태가 되면 모든 수행이 목표로 하는 본디모습(本來面目)을 보게 된다고 했다.
이것은 참으로 매우 깊고 미묘한 일입니다. 이렇게 몸 안에서 스스로 하는 염불이 끊어지지 않고 오래 되어 조금씩 익숙해지면, 저절로 만 가지 생각이 하나로 모아지면서 심령(心靈) 속의 잡념과 헛된 생각(妄想)을 빨아들이고, 차지하고, 고쳐 만들고, 씻어내고, 낫게 하고, 깨끗하게 하여 하나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면 눈 깜짝할 사이에 여러분의 영혼(법신 : 法身)이 뚜렷이 나타나고, 부모로부터 태어나기 이전의 본디모습(本來面目)을 되찾게 됩니다.
이 한마디 붇다 이름이 여러분의 심령(心靈)에 생긴 온갖 질병을 낫게 할 수 있고, 여러분이 여러 겁 동안 쌓아 온 갖가지 잡념ㆍ업장ㆍ시비ㆍ허망 같은 것을 없애버리고 참되고 영원한 법신(法身), 곧 본디모습으로 바꾸어 줍니다.
이처럼 염불을 통해서 선의 목표를 달성하는 방법은 앞에서 본 전향존불법(傳香存佛法)과 비슷한 단계를 거친다. 그러나 두 가지 점에서 전향존불법(傳香存佛法)과는 뚜렷한 차이를 가진다.
첫째, 전향존불법은 사실상 선수행법으로 염불을 방편으로 사용한 것에 반해 정토선에서는 염불 단계 자체가 정토수행법으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전향존불법에는 극락에 대한 발원이나 회향이 없는데 반해 정토선에서는 정토와 선 모두 극락과 관련지어 있다.
정토종에서 “붇다를 마음에 새기고(念) 붇다를 간직하고 잊지 않으면(憶) 반드시 붇다가 된다(念佛憶佛 必定成佛)”고 한 말이 바로 이런 원리입니다. 설사 붇다가 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더할 수 없이 큰 이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만 가지 생각을 모두 거두어 한 가지 생각(一念)으로 모으면, 목숨이 다할 때 한마음 흐트러지지 않게(一心不亂) 염불할 수 있어, 아미따불의 인도를 받아 업(業)을 지닌 채 서녘(극락세계) 연못에 가서 태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서녘 극락세계의 수행은 즐거움만 있고 괴로움은 없으며, 또 영원히 (3계로) 떨어지지 않고, 수행하여 도달한 지위에서 절대로 물러나지 않게 됩니다. 모든 수행과정이 처음부터 끝까지 다 ‘극히 평안하고 즐거운(極樂)’ 상태에서 지내게 되고, 곧바로 깨달아 나지도 죽지도 않는 무생법인(無生法忍)를 얻으며, 꽃이 피면 (아미따)붇다를 뵙고 (극락에) 머무르게 됩니다.
수행자 여러분이 어떻게 노력하는가에 따라 수행기간은 길거나 짧아질 수 있지만, 다만 끈기 있게 꾸준히 이어가면, 자연히 스스로의 몸에서 해탈하여 몸이 막히거나 거침이 없게 됩니다. 그 때가 되면 여러분의 법신(法身)은 온 허공에 한껏 차서 가득하고, 법계에 두루 미치게 되며, 여러분의 보신(報身)은 곧 서녘 연못의 상품상생으로 태어나 바로 연꽃이 피고 아미따불을 뵙게 됩니다.
이 내용에서 자성염불을 해서 선 단계로 들어가지 못하는 근기를 가진 사람도 염불(念佛)을 열심히 하면 극락에 가서 안전하게 수행하여 결국은 깨달음을 얻는다고 했다. 이 내용에서는 일심불란하게 염불하여야 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한국에 와서 법문한 자료를 보면 정토선 염불을 하는 사람은 누구나 다 극락에 갈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만약 계속해서 공부했지만 깨달음이 없는 경우는 다만 한마음(一心)으로 염불하여, 목숨이 다할 때 아미따불의 안내를 받아 서녘 극락세계 9품 연못(九品蓮花池)에 화생하여[이것은 업을 가지고 가서 태어나는 것(帶業往生)으로] 연꽃 위에서 다시 더 닦아 깨닫고 붇다가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정토선(淨土禪)을 배우면, 배운 사람 수만큼 서녘 (극락)세계에 갈 수 있으니, 만 명(萬人) 닦으면 만 명이 다 간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미따불께서 뒷받침해 주는 후견인으로 계시니 붇다가 되거나 도를 이루지 못할까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정토선은 늙은 사람ㆍ중년ㆍ어린아이 같은 3가지 근기에 두루 꼭 들어맞습니다. 또 (정토선 책 속의 표에 따라 수행하면) 힘들이지 않고 가볍게 배워 바로 서녘(극락)세계에 다다라, 연꽃에 화생하고 꽃이 피면 붇다를 뵙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선 단계에서 무념상태를 이루어 이승에서 깨달음을 얻는다고 해도 ‘법신(法身)은 온 허공에 한껏 차서 가득하고, 법계에 두루 미치게 되지만 보신(報身)은 곧 서녘 연못의 상품상생으로 태어나 바로 연꽃이 피고 아미따불을 뵙게 된다.’고 해서 모두 정토, 곧 극락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으로 다른 선정쌍수와 아주 다른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 깨달음을 얻은 사람은 법신과 보신 계념을 통해 우주 법계와 극락을 자유자재로 노닐 수 있다는 것을 밝힌 것이다.
둘째, 전향존불법은 인위적으로 염불 소리를 점점 작게 하고, 붇다를 생각과 마음에 새기는 것에 반해 정토선에서는 염불을 통해 몸속에서 저절로 염불소리가 나오는 자성염불을 통해 일념과 무념단계를 추구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정토선’ 법문의 가장 중요한 핵심은 ‘자성염불(自性念佛)을 통해 마음을 밝혀 자성을 깨닫는 것(明心見性)’이라는데 있다.
2. 이근원통(耳根圓通)과 자성염불(自性念佛)
1) 능엄경 25가지 삼매에 드는 법
관세음보살이 “이근(耳根)은 가장 영민하기 때문에 (계속 들으면) 귓속에서 저절로 염불소리가 나게 된다.”고 해서 정토선의 핵심인 자성염불이 이근(耳根)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뚜렷하게 하였다. 이것은 바로 능엄경에서 말하는 관세음보살의 이근원통(耳根圓通)이다. 따라서 정토선을 이해하려면 능엄경의 이근원통을 이해해야하기 때문에 그 내용을 간추려 보기로 한다.
능엄경에서는 원통을 이루기 위해 반드시 삼매(三昧)에 들어가야 한다고 하였으며, 삼매에 들어가는 25가지 길을 소개하고 있다.
능엄경에 보면, 먼저 부처님이 아난에게 18계와 7대를 설명하시고, 이어서 법회에 참석한 제자들과 보살들이 차례로 25가지를 통해서 삼매에 들어간 경험을 이야기한다. 그런데 25가지 가운데 두 가지를 순서에서 빼 맨 마지막에 놓는다. 즉 7대 가운데 6대로 설명했던 <견ㆍ문ㆍ각ㆍ지>를 맨 마지막으로 빼서 대세지보살의 염불삼매로 연결했으며, 6근 가운데 이근(耳根)은 아주 뒤로 옮겨 다른 장(章)을 설치하였다. 이것은 이 두 가지 수행법이 대단히 중요하다는 것을 뜻한다. 관세음보살의 이근원통을 따로 빼내 하나의 장을 설치한 것은 능엄경이 관세음보살을 얼마나 중요하게 내세우는지 알 수 있다. 여기에 능엄경을 주요 경으로 삼고 있는 한국 불교에서 관세음보살이 차지하는 위치를 알 수 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서방정토에서는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아미타부처님을 좌우에서 모시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두 보살을 능엄경에서는 모두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관정의 극락세계 여행기를 보면 관세음보살님이 정토선(淨土禪)을 가르쳐 주시면서 “사람들이 두 반으로 나누어서 염불하는 것을 말한다.” 고 했으며, “귀의 감각기관은 가장 영감이 뛰어나기 때문에 귀 안에서 스스로 염불을 하게 되는데, 이것은 곧 마음으로 염불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고 하였다. 이렇게 보면 정토선은 대세지보살의 염불원통(念佛圓通)과 관세음보살의 이근원통(耳根圓通)을 결합한 최상의 수행법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2) 능엄경 이근원통의 원리와 수행
능엄경에는 관세음보살이 이근원통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세존이시여! 제가 강가강의 모래(恆河沙)만큼 많은 헤아릴 수 없는 깔빠(劫. kalpa) 이전의 옛날을 생각해 보면 그 때 한 붇다가 세상에 나타나셨는데 이름이 관세음(觀世音)이었습니다. 저는 그 붇다 때문에 깨닫겠다는 마음(菩提心)을 냈고, 그 붇다께서는 저에게 ‘문사수(聞思修)를 가지고 싸마디(samādhi,, 三摩地)에 들어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➊ 처음에는 (귀로) 들으면서(聞中) (바라보는) 흐름에 따라 들어가 (聲塵이란) 대상을 벗어나고(入流亡所), 대상과 흐름이 고요해져(所入旣寂) 움직이고 멈춘다는 2가지 상이 전혀 생기지 않게 되었습니다(動靜二相了然不生).
➋ 이렇게 조금씩 정진하여 듣는 것(聞)과 들리는 것(所聞)이 다하고, 듣는 것이 다했다는 생각에도 머물지 않아(盡聞不住),
➌ 깨달음과(覺)과 깨달음의 대상(所覺)이 다 공(空)하고, 공(空)과 깨달음(覺)이 더할 수 없이 원만하여 공(空)과 공의 대상(所空)이 죄다 없어졌습니다. 생기고 없어짐(生滅)이 다 없어지니 적멸(寂滅)이 앞에 나타났습니다.”
듣고 생각하고 닦는다는 문ㆍ사ㆍ수(聞思修)는 3가지 지혜(三慧)라고 하는데 우바새계경(優婆塞戒經),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 성실론(成實論), 집이문족론(集異門足論), 대비바사론(大毘婆沙論), 구사론(俱舍論), 불지경론(佛地經論) 같은 논서에서 많이 다루었다. 내용을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① 듣는 지혜(śrutamayī prajñā, 聞慧) : 경전이나 선지식의 말씀을 들어 무루(無漏)의 지혜가 생길 수 있기 때문에 ‘들어서 이루는 지혜(聞所成慧)’라고 한다. 이것은 성문이 이룬 지혜이다.
② 생각하는 지혜(cintāmayī prajñā, 思慧) : 보고 들은 도리를 생각(思惟)하여 생기는 무루(無漏)의 지혜로 연각(緣覺)이 이룬 지혜이다.
③ 닦는 지혜(修慧(bhāvanāmayī prajñā) : 실제로 닦아서 생기는 무루(無漏)의 지혜로 보살이 이룬 지혜이다.
이런 분류와 함께 듣는 지혜는 생각하는 지혜를 낳고, 생각하는 지혜에 따라 닦는 지혜가 생겨나 번뇌를 끊고 니르바나를 깨닫기 때문에 앞의 두 가지는 돕는 인연(助緣)이고 마지막 수혜(修慧)가 정지(定智)로서 의혹을 끊고 진리를 깨닫는 작용을 한다고 한다.한편 대승보살의 위계로는 10주(十住) 단계에서는 듣는 지혜를 얻고, 10행(十行) 단계에서는 생각하는 지혜를 얻고, 10회향(十廻向) 단계에서는 닦는 지혜를 얻는다고 했다.
이런 삼혜론과는 달리 수능엄경요해(首楞嚴經要解)에서는 3가지 지혜(三慧)에 대해서 다른 해석을 하고 있다.
3가지 지혜를 가지고 원통에 들어간다는 것은 귀를 통달하게 하는 것(達耳)이 문(聞)이고, 마음을 뚜렷이 드러나게 하는 것(著心)이 사(思)이며, 습(習)을 다스리는 것이 수(修)다. 3가지가 원명하게 하면 이것이 3가지 지혜를 말한다.
➊ 흐름에 들어가 (듣는) 대상을 벗어난다는 것(入流亡所)은 소리라는 대상(聲塵)을 따라가지 않고 문득 법의 흐름에 들어가 그 들어가는 대상조차 벗어나는 것이다. 음성의 성질은 움직임과 멈춤(動靜) 때문에 드러나기 때문에 들어가는 대상(入所)이 이미 고요해지면 움직이고 멈추는 것이 일어나지 않는다. 이것이 듣는 지혜(聞慧)다.
➋ 이미 귀가 통탈하게 되면 다시 마음을 생각하되, 마치 물이 불어나는 것처럼 흙이 늘어나는 것처럼 듣는 것(能聞)과 들리는(所聞) 정경을 모두 없어지게 하여 듣든 것이 다했다는 마음(盡聞之心) 마저도 다시는 머물지 않게 되면 참된 깨달음(眞覺)과 하나가 되는 것이니, 이것이 생각하는 지혜(思慧)다.
➌ 이미 마음에 대한 생각이 끝나면 습(習)으로 돌려 깨달음(覺)과 깨달아지는 것(所覺)이 모두 묘공(妙空)과 하나 되게 하여 공(空)과 각(覺)이 둘이 아니게 되면 이른바 더할 나위 없이 원만하다(極圓)고 하는 것이고, 공한 것과 공이 되는 것도 다시 설자리가 없어지면 바로 도가 다하게 된다(盡道). 이것이 닦는 지혜(修慧)다.
그리고 난 뒤 태어나 없어지고(生滅) 없어졌다 태어나는(滅生) 정경(情境)이 다 없어지고, 참으로 고요하고(眞寂) 참으로 사라진(眞滅) 원통의 몸통(体)이 눈앞에 나타나는데, 이것이 곧 싸마디(三摩地)에 드는 것이다.
이상의 수능엄경 이근원통법과 수능엄경요해의 해설을 종합해 보면 모두 3단계로 나뉘어 설명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➊ 듣는 단계(聞) : 들어서 귀가 통달하는 단계.
➋ 생각하는 단계(思) : 듣는 것(聞)과 들리는 것(所聞)이 다하고(듣는 주체와 객체가 다 없어지고), 듣는 것이 다했다는 생각에도 머물지 않는(盡聞不住) 단계.
➌ 닦는 단계(修) : 깨달음(覺)과 공(空)의 주체와 객체가 다 없어지고 나고 죽음이 없어져 (生滅滅) 적멸이 눈앞에 나타나는 단계.
이와 같은 이근원통법은 능엄경의 25원통장의 결론에서 붇다가 문수보살에게 ‘25가지 가운데 어떤 것이 가장 훌륭한가?’라고 묻자 ‘관세음보살의 이근원통법이 가장 쉽고 훌륭하다.’고 대답한다.
【붇다】나는 지금 아난다를 깨닫게 하고 싶다. 25가지 수행법 가운데 어떤 것이 아난다의 근기에 알맞겠느냐? 아울러 내가 열반한 뒤 이 (사바)세계 중생이 보살수행을 하여 위없는 도를 이루려면 어떤 방편문(方便門)이 쉽게 이룰 수 있겠느냐?
【문수】싸마디(三摩提)를 얻으려 한다면 실제로 ‘듣는(聞)’ 수행법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 눈은 담장 밖을 보지 못하고, 입과 코도 또한 그러하며, 몸은 (대상과) 맞닿아야 알 수 있고, 마음과 생각은 어수선하여 실마리가 없는 것이지만 (듣는 것은) 담으로 막혀 있어도 소리와 그 울림(音響)을 들을 수 있습니다. (이처럼) 귀는 멀거나 가깝거나 모두 들을 수 있어 (다른) 5가지 기관(五根)이 갖추지 못한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두루 통하는 진실(通眞實)입니다.
【붇다】 대중이여! 아난이여! 여러분은 거꾸로 뒤집힌 듣는 능력(聞機)을 되돌려 (바로 잡아) 자성(의 소리)을 되받아 듣고 또 듣는다면(反聞聞) 그 성품은 위없는 도를 이루게 될 것이니, 원통이란 실제 이와 같은 것이다. 이것은 수많은 붇다들이 열반의 문에 이르는 외길이어서 과거의 모든 여래도 이 문으로 이미 이루셨고, 현재의 모든 보살도 지금 각기 원만하고 밝은 이 문으로 들어가며, 미래 수행하는 사람도 이 법에 의지할 것이다. 나도 또한 그 가운데서 깨달았으니 관세음 혼자만이 아니다.
【문수】이 방편이 이루기 쉬운 것이기 때문에 아난과 말세(末劫)에 빠진 중생들을 가르치는데 뛰어나고, 오직 이 이근(耳根)으로 수행해야만 원통을 얻는 것이 다른 것보다 뛰어나기 때문에 진실한 마음으로 이처럼 권합니다.
여기서 붇다는 “듣는 능력(聞機)을 되돌려 (바로 잡아) 자성(自性의 소리)을 되받아 듣고 또 듣는다면(反聞聞) 그 성품은 위없는 도를 이루게 될 것이다.”고 해서 귀(耳根)을 통해서 자성의 소리를 계속 듣게 되면 도를 이룬다고 강조한 것이다.
3) 능엄경의 이근원통과 정토선
위에서 본 바와 같이 능엄경에서는 25가지 원통법 가운데 근기가 약하고 말세에 태어난 중생에게는 소리를 들어서 통달하는 이근원통법이 가장 훌륭한 수행법이라는 것을 여러 차례 강조한다.
이와 같은 이근원통법을 관세음보살이 염불과 선을 통해서 아주 간편하게 수행할 수 있는 방법을 열어 보인 것(開示)이 바로 정토선(淨土禪)이다. 앞에서 본 관세음보살의 정토선 가르침을 다시 한 번 보고 문사수(聞思修) 이근원통법과 비교해 보기로 한다.
“이근(耳根)은 가장 영민하기 때문에 (계속 들으면) 귓속에서 저절로 염불소리가 나게 되는데, 바로 마음이 염불하는 것이다. 마음과 (염불하는)입이 하나가 되면 불성이 스스로 드러나게 되고, 고요해지면 선정(定)이 생기고, 선정에 들어가면 지혜(慧)가 생기느니라.
능엄경
능엄경요해
정토선
➊ 듣는다(聞)
귀 통달(達耳)
염불 → 자성염불(自性念佛)
➋ 생각한다(思)
마음 닦음(著心)
자성염불 → 일념(一念)
➌ 닦는다(修)
습을 평정(治習)
일념(一念) → 무념(無念)
➊의 단계에서 자기 염불과 상대방의 염불을 계속 들으면 귀는 영민하기 때문에 그 귀가 통달(達耳)하게 되고, 귀가 통달하면 귀에서 염불소리가 난다. 이것은 바로 마음이 염불하는 것인데, 관정은 이것을 자성염불이라고 했다.
➋ 마음이 염불을 하기 때문에 이 단계에서는 입으로 염불을 하지 않는다. 이때부터는 마음을 닦는 것(著心)으로 모든 잡념을 버리고 몸속에서 나는 염불소리에만 집중한다. 그리하여 마음과 그 염불소리가 하나가 되면(一心) 선정(定)에 들게 되는데 이것이 일념(一念) 단계가 된다.
➌ 일념 단계에서 더 집중하여 몸속에서 나는 한 마디 염불소리를 계속 듣게 되면 염불소리가 점점 작아지면서 어느 날 그 염불소리마저도 들리지 않고 완전히 무념(無念) 상태가 된다. 그렇게 되면 나고 죽음이 없어져 (生滅滅) 적멸이 눈앞에 나타나게 된다.
무념상태에 대해 정토선 원리에서는 이렇게 이야기 한다.
‘무념(無念)’(선은 바로 이 무념이 마지막 목표이다)을 이루면, 온몸이 모두 비어 지극히 고요해지고(空寂), 한 생각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처럼 한 생각도 일어나지 않으면 단박에 법신(法身)이 나타나서 부모로부터 태어나기 이전의 본디모습(本來面目)을 되찾게 되는 것입니다. 이 경계에 다다르면 저절로 한마디 아미따불을 새길(念) 필요도 없게 됩니다.
여기서 ➊의 단계는 염불이고, ➋➌의 단계는 선이 되는데, 선의 단계에서도 모두 염불을 방편으로 삼기 때문에 이것이 염불을 위주로 하는 염불선이고, 선정쌍수이며, 정토선이다. 모두 염불을 이용하되 ➊에서는 입으로 염불하고 귀로 들으며, ➋에서는 자성염불에 집중하여 염불만 또렷하게 들리고 다른 망상이 뜨지 않게 하고, ➌에서는 또렷한 염불소리가 점점 작아지는 상태를 놓치지 않고 관하면 마침내 그 소리마저 끊어진 무념에 이른다.
➋➌의 단계에서 흔들리지 않고 계속 지켜보면 바로 지관법(止觀法)이 되고 관념염불법이 되며, 속에서 나는 염불소리가 너무 신기해서 ‘속에서 염불하는 놈이 누구인가?’라는 의혹이 자연히 생겨 그 의심을 놓치지 않으면 염불공안법(念佛公安法)이 된다. 그러나 이런 복잡한 생각 없이 오로지 몸속에서 나는 염불소리를 끝까지 지켜보기만 하면 되는 것이기 때문에 쉬운 수행법이다. 그렇기 때문에 첫머리에서 보았듯이 ‘정토선의 수행방법은 더 이상 줄일 수 없을 만큼 간단하게 만들어져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관정은 부처님 말씀을 인용해 이렇게 강조하였다.
“이 법문은 과거 불교에서 전해 오던 5화8문(五花八門) 8만4천 법문의 총 결정체라고 말할 수 있으며, 심령(心靈)을 다스릴 수 있는 종합처방약이라고 할 수 있다. 말법시대에 도를 이루고 성불하려면 오로지 이 한 가지 법문으로만 깊이 들어갈 수 있으며, 또 수단과 방법도 간단하다. 이 법문이 아니면 제 아무리 하늘을 뒤덮는 솜씨가 있다고 하더라도 3가지 세계(三界)를 벗어나기 어려우니라.” (이 법은 우둠바라꽃처럼 만나기 어려우니 읽는 이들께서는 부디 스스로 소중하게 여기시길 바랍니다.)
Ⅳ. 정토선(淨土禪)과 신성각법(身性覺法)
1. 각종 수행법에 있어서 정토선의 위치
불교에는 수많은 수행법이 있기 때문에 어떤 수행법을 선택하느냐 하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이런 측면에서 관정은 지금까지 나온 수행법을 간추려 소개하고 그 것을 바탕으로 각종 수행법에서 정토선의 위치가 무엇이며 왜 정토선을 선택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우선 지금까지 나온 수행법들을 어떻게 정리하였는지 보기로 한다.
1) 생각을 쓸어 없애는 법(掃念法 : 알아차리는 법)
심령을 닦을 때 “때때로 부지런히 털고 닦아내(時時勤拂拭) 티끌이 달라붙지 못하게 해야 한다(勿使惹塵埃)”고 했는데, 어떻게 털고 닦아내라는 것인가? 이는 곧 때때로 회광반조(廻光返照)하여, 생각이 일어나는 것을 두려워 할 것이 아니라 알아차리는 것이 늦은 것을 두려워해야 한다는 것이다. 생각이 일어나자마자 그것을 바로 알아차리면 그 순간 사라지기 때문이다.
2) 내버려 두는 법(任由法)
헛된 생각이 일어나면(妄想) 맞이하지도 배웅하지 않는 것입니다. 마치 여관 주인처럼 한쪽에 앉아, 장 씨가 오든, 이 씨가 오든, 오면 오고 가면 가도록 내버려 두고 상관하지 않는 것으로, “청산은 늘 움직이지 않는데 흰 구름만 홀로 오가누나(靑山永不動 白雲自往來)” 하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다.
알아차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간섭하지 않고 내버려 두는 수행법을 말한다.
3) 미리 차지해 버리는 법(占領法)
이 방법은 (어떤 것으로) 심령을 미리 차지해 빈틈을 없애버려 헛된 생각(妄想)이 그 문으로 들어 올 수 없도록 마음을 한곳에 집중시키는 것인데, 다음 4가지로 나뉜다.
① 관상법(觀想法) : 눈을 감고 자기가 좋아하는 사물의 모습(想)을 관(觀, 마음으로 바라보다)하므로 해서, 그 사물이 심령을 온통 독차지하여 헛된 생각(妄想)이 생기지 못 하도록 하는 것.
② 화두참구법(參話頭法) : 화두를 하나 골라서 참구(參究)하는 법인데, 참구할수록 더욱 재미가 붙어서 심령에 끊임없이 화두가 이어지게 되면 헛된 생각도 일어날 틈이 없어지는 것.
③ 염불법(念佛法) : 오로지 한 마디 ‘나모아미따불’만 염불하여 만 가지 법이 한 생각으로 모아지도록 다스리는 것.
④ 신성각법(身性覺法) : 만 가지 생각을 한 가지 생각으로 돌아가게 다스려, 몸 안에서 일어나는 ‘환각과 착각’을 없애고, 마음을 자유자재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신성각(身性覺)’이다. 이것은 신각(身覺)으로 모든 헛된 생각(妄想)을 녹여 즉시 소멸되기 때문에 생각이 뒤따라 일어나지 못하고 참마음이 단박에 나타나는데, 이것을 “나고 죽음을 뛰어넘으면 고요한 열반이 나타난다(生滅已滅 寂滅現前).”고 하는 것이다.
관정은 앞에 나온 여러 수행법 가운데 마지막 미리 차지해 버리는 법(占領法), 그 가운데서도 ③ 염불법과 ④ 신성각법(身性覺法) 두 가지를 잘 이용해야 빨리 도를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한다.
불교에서는 어떤 법문이든지 마지막 목적은 바로 수행자들이 ‘심령이 무념이 된 상태(心靈無念)’를 이루는데 있습니다. 여러분이 그렇게만 되면, 시방의 불국토를 여러분 마음먹은 대로 노닐 수 있고 자유자재로 돌아다닐 수 있을 것입니다. 거꾸로 만일 마음속에 헛된 생각(妄念)이 남아 있으면 어떤 법문도 여러분을 건질 수 없습니다. 오로지 심령이 무념(無念)하게 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염불과 좌선을 함께 닦는 정토선(淨土禪) 한 가지 길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보면 정토선이란 염불과 신성각(身性覺) 수행법을 합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부분은 다음 절에서 자세히 다루기로 하고, 여기서는 그 이전의 수행법들은 어떤 한계가 있는지 보기로 한다.
2. 기존 수행법과 정토선의 차이
관정은 정토선의 장점을 이야기하기 전에 기존 수행법의 한계에 대해서도 하나하나 언급하고 있다.
1) 생각을 쓸어 없애는 법(掃念法)
6가지 감각기관(六根)이란 문(門)을 통해서 대량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티끌’이 온갖 뒤집힌 헛된 생각(妄想)을 만들어 내서 털어내는 것보다 더 많이 들어오기 때문에 아무리 털어도 없어지지 않기 때문에 궁극에 이를 수가 없다.
2) 내버려 두는 법(任由法)
이 법은 오로지 공(空)이라는 것만 있지 참모습(眞如)의 본바탕(實性)을 닦아내지 못하고, 또한 한 쪽으로 치우친 ‘아무 것도 없는 것(空白)’이고 ‘참된 공(眞空)’의 바탕체(理體)가 아니다.
관정은 위의 두 수행법은 주로 견분(見分)을 이용하고 상분(相分)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기 때문에 한계가 있다고 보았다. 견분과 상분이란 우리의 인식을 구성하는 식(識)의 작용을 말하는 것으로, 상분(相分)은 눈ㆍ코ㆍ귀ㆍ혀ㆍ몸ㆍ생각이 사물을 인식할 때 인식하는 상대(相對), 곧 저쪽 편을 말하고, 견분(見分)은 그 대상(相分)을 인식하는 이쪽 편의 작용을 말한다. 상분이나 견분이나 모두 8식(알라야식, 阿賴耶識)에서 나온 것으로, 상분은 사람의 몸과 마음(6식과 전5식)을 만드는 씨(種子)와 태어날 곳을 만드는 씨를 통틀어 말하는 것이고, 그 대상을 생각하여 헤아리는 작용을 하는 견분은 7식(마나스식, 末那識)이 도맡아서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쪽만 다스리는 견분만 다스리는 것은 한계가 있다고 본 것이다.
3) 미리 차지해 버리는 법(占領法)
① 관상법
아주 많은 종파에서 헛된 생각(妄想)을 없애는데 관상(觀想)법을 쓰고 있다. 밀종(密宗)ㆍ유식종(唯識宗)ㆍ천태종(天台宗)ㆍ정토종(淨土宗)의 수행자들이 많이 쓰고 있는데, 수행인들에게 그들이 좋아하는 모습(想)을 관(觀 : 마음으로 보다)하라고 가르치는 것으로, 경전에서 말하는 “마음을 한 곳으로 모으면 못해 낼 일이 없다(制心一處 無事不辦)”고 한 것과 같다. 그러나 말법시대의 중생들은 대부분 근기가 낮아 관(觀)할 때 만들어 낸 바로 그 상(相)이 가로막고 있기 때문에 참마음을 볼 수가 없다.
② 화두(話頭)를 참구(參究)하는 수행법
선종(禪宗)에서 많이 쓰는 방법으로 원칙적으로 아주 정확하다. 만 가지 생각(萬念)을 한 생각(一念)으로 바꾸어 놓는 것으로, 근기가 높은 사람은 그 한 점을 통해 참마음 자리를 찾아 깨우칠 수 있다. 보기를 들어, “(달마)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이 무엇인가?(什麽是祖師西來意)” 라는 한마디 화두를 참구한다고 해서 이것이 바로 참마음이 아니라 이 화두를 통해서 참마음을 끄집어내려는 것이다. 그리고 “염불하는 놈이 누구냐?(念佛者是誰)”는 화두도 화두가 아니라, 여기서 화두를 참구해 내려는 것이다. 그러나 말법시대의 중생들은 연장(工具)을 일꾼(工人)으로 봐버리기 때문에, 어떤 놈이 나오는지 참구해 내기가 아주 어렵다.
4) 정토선의 핵심
그렇다면 앞에서 본 여러 수행법의 한계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관정은 마음을 닦는 것도 자기 몸 안에서 찾아야 하는데 수행하는 몸은 쓸데없는 것으로 보는데서 문제가 있다며, “염불하는 놈이 누구냐?(念佛者是誰)”라는 보기를 들어 쉽게 설명하고 있다.
“염불하는 놈이 누구냐?” 이것은 원래 아주 좋은 화두다. 그러나 ‘아미따불’ 몇 마디 새기고 멈춘 다음 참구한다고 해서 ‘의정(疑情)’을 일으킬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염불하면서 동시에 참구해야만 몸 안에서 ‘염불하는 놈’을 뚜렷하고 분명하게 봐낼 수 있다. 그런 다음 이 ‘염불하는 놈’이 누구인가? 곧 몸 안에 있는 ‘이 존재’를 다시 참구할 수 있어야지 비로소 하나의 성과를 거둘 수 있다.
불교에 관한 학문에서는 몸을 하나의 냄새나는 가죽 주머니ㆍ가죽자루ㆍ고깃덩어리ㆍ산송장 따위로 보면서 마치 아무 쓸모가 없는 것처럼 여기고 있으니, 마음을 닦는다는 것도 어차피 이 몸 안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을 어찌 알겠는가? 한 번 생각해 보자.
① 물질로 이루어진 몸이 어떻게 염불을 할 수 있을까?
- 반드시 ‘염불할 수 있는 존재’가 따로 있는 것이다.
② 몸(물질)은 본디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어야 한다.
- 반드시 어떤 ‘움직이게 만드는 존재’가 있는 것이다.
③ 몸이 어떻게 혼잣말로 중얼거리고, 말하고, 웃고 할 수 있을까?
- 반드시 어떤 ‘말을 할 수 있는 존재’가 있는 것이다.
이 세 가지 사실은 물질인 몸속에 진실로 ‘참마음(영혼)’이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참마음’은 또 어디에 있을까? 어떻게 그것을 찾아낼 수 있을까?
이 몸 안의 ‘염불 할 수 있는 존재’에 마음을 집중하고, 한편으로 염불하고 한편으로 참구하면, 속에서 바로 ‘의정(疑情)’이 생길 것이다. 그리고 오래 가면 바로 이 ‘누구(법신)’ 라는 존재가 드러날 것이다.
의정은 헛된 생각(妄想)에 쓰이는 화학약품으로, 썩어 가는 것을 신기한 것으로 변화시키고, 번뇌를 지혜로 바꿀 수도 있다. 우리가 이 피와 살로 된 덩어리 안에서 갖가지 헛된 생각(妄想)이 일어나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것을 느끼면, 바로 이 ‘몸으로 깨달은 것(身覺)’을 던져 넣어 반드시 의정을 만들어 내야 한다. 왜냐하면 물질로 된 몸에는 헛된 생각(妄想)을 바로 보물(도를 깨닫게 만드는 보물)로 바꿔 만드는 ‘이런 존재’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심령이 끝없이 맑아져 지난 생각이 이어서 일어나지 않을 때, 이른바 ‘나고 죽음을 뛰어넘으면 고요한 열반이 나타난다.’는 경계가 되는 것이다.
여기서 관정의 아주 독특한 ‘몸으로 깨닫는 것(身覺)’에 관한 논리가 시작된다. 다음 절에서 자세히 보기로 한다.
3. ‘몸으로 깨닫는 것(身覺)’과 ‘몸으로 자성을 깨닫는 것(身性覺)’
그렇다면 몸으로 깨닫는 것(身覺)이란 무엇인가? 관정은 몸으로 깨닫는 것을 다음 3가지로 나누어 설명한다.
1) 몸으로 물질(物)을 깨닫는 것(身物覺)
몸으로 물질을 깨닫는 물각(物覺)은 일반 세상에 속하는 것들로, 여기서 얻고자 하는 것은 사람 사는 세상에서 이름을 내는 것(功名)ㆍ이익ㆍ재산과 지위(富貴)ㆍ영화를 누리는 것들이다.
무릇 지구상에 존재하는 물질의 소리를 듣거나 모습을 보고 깨닫는 것을 ‘신물각(身物覺)’이라고 한다. 과학자들은 물질을 연구할 때 바로 이 ‘신물각’을 응용하여 전자ㆍ원자ㆍ핵에너지 같은 것을 발견하여 수 천 수 만 공장의 거대한 바퀴들이 끊임없이 돌아가면서 밤낮으로 생산을 해 내며, 손을 펴도 다섯 손가락도 보이지 않는 어두운 밤을 대낮처럼 환하게 밝혀 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해로운 점은 히로시마와 나가사끼에 원자탄을 떨어뜨려 하루아침에 수십만의 산목숨을 잠깐 사이에 모두 잿더미로 만들어 버린 것을 들 수 있다.
2) 몸으로 신(神)을 깨닫는 것(神身覺)
몸으로 신을 깨닫는 신각(神覺)은 하늘나라(天界)에 속하는 것들로, 바로 도교(道敎)에서 추구하는 선도(仙道)다. 경계가 비록 높다고는 하지만 아직 집착이 있는 것들이다.
신신각(身神覺)’은 도가(道家)의 금욕을 통해 정(精)을 단련하여 기(氣)로 변하게 하고(練精化氣), 기를 단련하여 충족되면 음식이 생각나지 않는 신이 되고(練氣化神), 신(神)을 단련하여 허공에 들어가 자유자재 되면 완전히 무위로 돌아간다(練神還虛)는 것을 말하는데, 심령에 집착하는 바가 있기 때문에 오로지 하늘나라인 28개 하늘(天)안에서만 활동할 수 있을 뿐 3가지 세계를 벗어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다시 아집(我執)과 법집(法執)을 없애는 ‘공(空)’을 닦아야지 비로소 3계를 벗어날 수 있다.
신각(神覺)이란 바로 신의 세계이기 때문에 맨눈(肉眼)으로는 볼 수가 없는 것으로, 바람이나 전기 같은 것도 신질(神質)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바람은 큰 나무나 집도 밀어 넘어뜨릴 수 있지만 우리는 바람의 형체를 볼 수 없으며, 전기도 역시 마찬가지다.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큰 쑤메루산(須彌山)ㆍ네 큰 임금 하늘나라(四王天)ㆍ서른셋 하늘나라(忉利天)같은 것을 왜 우리 지구에서는 볼 수가 없는가 묻는데, 그것들은 모두 신질(神質)에 속하기 때문이다.
3) 몸으로 자성을 깨닫는 것(身性覺)
몸으로 자성을 깨닫는 성각(性覺)은 불교에서 수행자들이 응용하는 ‘신각(身覺)’이다. 이것은 참선으로 도를 깨닫는 값을 매길 수 없는 보배로, 몸과 마음속에서 세차게 굽이쳐 흐르는 헛된 생각(妄念)의 물결을 다스리는 데는 신성각(身性覺)이 아니고선 제압할 수 없으며 큰 성과가 나타나지 않는다. 헛된 생각(妄想)이 용솟음쳐 올라올 때 이 ‘신각(身覺)’을 내리 던져 넣으면, 단박에 연기가 없어지고 안개가 흩어지듯 끝없는 하늘이 맑게 갠다.
선을 닦는 사람들이 가장 범하기 쉬운 잘못이 바로 이 ‘신성각(身性覺)’을 쓸 줄 모르고, 우리의 몸은 4대(四大)가 임시로 합쳐진 ‘냄새나는 가죽자루’며, 나고 죽는데 아무런 역할도 할 수 없다고 보는 것이다. 그들은 이 신각(身覺)이 헛된 생각(妄想)을 없애는데 가장 신비한 효험이 있는 줄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우리 모두가 다 같이 인정하는 것처럼 사람은 만물 가운데 가장 으뜸이며, 그 사람의 몸도 만물 가운데 가장 으뜸가는 지각(覺)을 가지고 있다.
‘신성각(身性覺)’은 사람이 본디부터 갖고 있는 본바탕(性質)을 깨닫게 하는 신각(身覺)으로, 3계를 벗어나 온 허공과 법계에 두루 미치고, 불국토를 마음대로 노닐 수 있다. 그러므로 신각(身覺)은 우선 몸부터 닦기 시작해야 된다. 몸을 떠나 달리 복을 구하는 것은 인간세상의 나고 죽는 법(生滅法)이므로 복을 구해 봤자 쓸모가 없기 때문에 몸 안으로부터 닦아 들어가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불성을 찾아내야 한다.
거룩한 이름인 ‘나모아미따불’은 염불을 통해 (얻은) 한 생각(一念)으로 만 가지 생각(萬念)을 다스려, 먼저 자기 심령에 간직된 모든 질병을 없애고 참되고 영원한 심령을 얻은 뒤, 오래 닦으면 저절로 법신이 나타난다. 그래서 곧바로 ‘나모아미따불’ 염불마저 사라지면(無念), 심령이 무념에 이르게 되고 바로 해탈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우리 법신은 동서남북 어디서나 자유자재로 노닐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심령에 한 생각이라도 남아 있으면 한 생각(一念)이 존재하기 때문에 아직은 거침없이 자유로울 수 없다. 그리고 염불하여 한마음으로 흩어지지 않는(一心不亂) 경지에 들어간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염불한다는 한 생각(一念)이 남아 있기 때문에, 마지막 목숨이 다할 때 아미따불의 인도를 받아서 서녘 극락세계 9품 연꽃에 가 태어나 다시 닦아야지 비로소 연꽃이 피어나면서 붇다를 뵐 수 있다.
Ⅴ. 정토선 수행의 유토피아 「인간정토를 이룩하는 원리」
정토선 수행의 목적은 두 가지다. 먼저 염불을 열심히 했으나 자성염불이 되지 않는 사람은 염불의 공덕으로 극락에 가서 더 수행하여 도를 이룬 뒤 돌아와 중생을 구제하는 것이다. 그리고 만일 자성염불이 되면 더 열심히 하여 일념과 무념단계를 이루어 몸으로 자성을 깨닫는 신성각(身性覺)을 이루는 것이다. 그런데 관정은 이처럼 신성각을 이룬 사람들은 살아있는 현실에서 적극적으로 인류와 우주를 위해 공헌해야 한다는 구체적인 「인간 정토를 이룩하는 원리」를 제시하였다.
우리가 수행하는 목적은 우리도 깨달아 붇다처럼 중생을 구제하는 것이다. 그런데 모든 수행법에서 ‘수행해서 무엇 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아주 막연한 대답만 있고 구체적인 중생 구제방법이 없어 그 대답이 마음에 와 닿지 않는다. 많은 수행자들과 불자들이 불국토를 만들자고 외친다. 그렇다면 ‘어떻게 불국토를 만들고 어떤 불국토를 만들자는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도 구체적인 대답을 듣기도 어렵다. 그러나 관정의 정토선 수행법에서는 이에 대한 뚜렷한 비전을 제시하고 있다는 것이 정토선의 가장 큰 특징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불교에서 수행을 통해서, 발전하는 과학에도 불구하고 위기로 몰린 인류를 구하는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한 수행법은 글쓴이도 이전에 본적이 없기 때문에 이 장에서 좀 구체적으로 보기로 한다.
1. 과학과 신물각(身物覺)의 한계
관정은 현대 과학의 한계를 과학자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相對性理論)을 설명하는 데서 시작한다.
“만약 3분의 1그램의 물질을 써서 모두 에너지로 바꾼다면 1,000톤의 물을 김(蒸氣)으로 만들 수 있고, 1그램의 물질을 에너지로 만들면 100만 톤 무게의 물체를 바다 표면에서 알프스 꼭대기까지 끌어올릴 수 있다.”
아인슈타인의 주장을 바탕으로 우리가 ‘에너지’를 가지고 지구를 새롭게 만들고 세상의 모든 것을 고치는데 잘 쓴다면 그 창조력은 한도 끝도 없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울러 지난날 소설가들이 글로 그려냈던 신화적인 일과 물건들이 대부분 현대 과학자들이 발명하고 만들어내 실제 있는 일로 만들었다는 것도 사실이라고 인정한다. 구름과 안개를 타고 다니고(騰雲駕霧), 바람과 비를 불러오고(呼風喚雨), 산을 옮겨 바다를 메우고(移山倒海), 1,000리 밖까지 소리를 전하는(千里傳音) 이야기는 모두 비행기와 망원경 발명 같은 과학의 힘으로 현실이 되고 있다. 다시 말해 인류가 상상했던 것들이 실제 이루어지는 것으로 관정은 이것을 불경에 나오는 이른바 “한 마음 생겨나면 온갖 것들이 생겨난다(心生種種法生)”는 법으로 표현하였다.
그러나 아무리 과학이 발전해도 한계가 있으며 과학의 발전과 함께 증가하는 핵처럼 인류를 위협하는 부정적인 요소가 더욱 극대화되고 있어 그런 과학의 힘으로는 인류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오늘날 지구가 받는 가장 큰 위협은 핵 재난과 인구가 불어나는 것입니다. 핵 재난은 한번 폭발하면 며칠 사이에 인류는 한꺼번에 멸망합니다. 처음 원자탄 실험이 성공했을 때 당시 영국 수상 처칠 경은 “세계의 종말이 다가왔구나!”라고 탄식했다고 합니다. 그래도 여러분들은 처칠의 견해가 너무 비관적이라며, 「설마 세상에 있는 모든 것 가운데 가장 뛰어난 인류가 속절없이 앉아서 죽기만 기다리기야 하겠는가?」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현재 미국과 소련 두 초강대국이 오랜 동안 「군축회담(軍縮會談)」을 벌이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미국 쪽에서는 만일의 사태에 대응하기 위해 수백억 달러에 달하는 큰돈을 「별들의 전쟁 프로젝트」라는 명목으로 책정해 놓고 있습니다. 이것은 처칠의 걱정이 결코 쓸데없는 걱정이 아니라는 것을 뒷받침 해주고 있습니다.
국제적인 분위기는 변화가 심해 미리 헤아릴 수가 없고, 더군다나 원자탄과 핵무기의 제조법은 이제 절대비밀이 아닙니다. 핵무기는 앞으로 몇몇 소수 강대국만 보유하기는 불가능하며, 머지않은 앞날에 제3세계 나라들도 모두 이처럼 파괴력이 굉장히 큰 무기를 보유하게 된다는 것은 두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이 책은 1980년대 중반에 쓰였는데 30년이 지난 현재 미국과 러시아 같은 강대국 외에도 인도, 파키스탄, 북한, 이란 같은 나라들이 핵무기를 개발하고 있어 세계정세는 훨씬 더 위험한 상태로 가고 있다.
한편 인류의 미래를 위협하는 보기로 인구증가문제를 들고 있다.
인구 압력 문제입니다. 미국인구학회가 공식적으로 발표한 바에 따르면 현재 전 세계의 인구가 55억에 가깝고, (그 가운데) 지난 20년 동안 증가한 인구가 10억에 이른다고 합니다. 이것은 아주 놀랄만한 숫자로, 오늘날 온 세계 인구증가 추세를 보면 앞으로 다시 10년이 지나면 온 세계 인구가 아마 65억에 이를 수 있습니다. 인구가 증가하면 식량이 부족해지게 되고, (그렇게 되면) 적게는 사회질서 유지에 영향을 주고, 크게는 국제적 안녕까지 영향을 미치게 될 것입니다.
관정이 이 주장을 한 지 30년이 지난 2015년 4월 현재 미국 인구조사국(US Census Bureau)이 운용하는 세계인구시계가 가리키는 지구 인구는 72억 3,640만이 넘고 있다.
위의 핵문제와 인구문제는 관정이 30년 전에 이야기할 때에 비해서 현재의 세계는 조금도 더 나아지거나 개선되지 않고 오히려 예견대로 악화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렇다면 이런 문제는 왜 해결되지 못하는가? 이에 대해 관정은 이렇게 주장하였다.
아인슈타인의 이론에 따르면 지구상에 있는 똥ㆍ흙ㆍ기왓장ㆍ돌멩이를 포함해서 하나하나가 모두 가치 있고 값진 보물입니다. 그렇다면 과학자들은 왜 아직 「만물이 모두 보물」인 이상을 이룩해 내지 못하고 있을까요? 가장 중요한 원인은 과학자들의 인지능력이 「신물각(身物覺)」 수준에 머물러 있고, 가장 뛰어난 지혜의 능력인 「신성각(身性覺)」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주의 깊은 신비가 그지없고 가없다는 사실은 누구보다도 과학자들이 더 분명하게 알고 있습니다. 바다 가까이 있는 사람만이 바다의 위대함과 물과 하늘이 맞닿아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과학자들은 높이 쳐다보고 멀리 바라보기 때문에 인류가 맞닥뜨리고 있는 온갖 재난들이 이미 코앞에 닥쳐왔다는 것을 모두 알고 있으며, 아울러 과학적 지식의 발전만으로는 문제들을 철저하게 해결할 수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류가 현재 가지고 있는 지능인 「신물각(身物覺)」만 가지고는 겉만 다스리지 근본적인 문제는 다스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장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우주 통제실을 헤치고 우주의 큰 지혜와 능력을 얻어내야만 비로소 순리대로 풀릴 수 있습니다.
결론은 신물각(身物覺)이 아닌 신성각(身性覺)을 이룬 현인들이 나타나 이 문제를 풀어야 한다는 것이다.
2. 「신성각(身性覺)」이 이룰 수 있는 구체적인 해결 방안.
그렇다면 신성각으로 어떻게 인류를 구제한다는 것인가?
우주는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지만 절대로 변하지 않는 영원한 본바탕(本體)이 있다. 만일 신성각을 이루어 우리 심령이 이 변함없는 본바탕으로 들어갈 수 있다면, 즉시 우주 통제실을 충분히 다룰 수 있을 것이고, 우주에 대한 온갖 깊은 신비를 손바닥 들여다보듯 하여 이사무애(理事無碍)에서 사사무애(事事無碍)까지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현재 과학자들이 부르는 물질적인 우주인 현실우주ㆍ상대우주ㆍ감각우주를 벗어나 지각우주(知覺宇宙)라는 비물질적 우주, 곧 절대우주(絶對宇宙)에 접근이 가능해지고 그렇게 되면 마음이 물질을 바꿀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현재의 과학자들은 상대우주에 머물기 때문에 아직 만물의 근원적인 현상을 만들어 낼 수 없다는 것이다.
우주란 하나의 더할 수 없이 큰 심령(心靈)입니다. 남보다 먼저 앞을 내다보는 몇몇 과학자들이 이 사실을 이미 발견했던 것 같습니다. 이 「큰 심령」은 당연히 우주의 온갖 사물인 물질우주(物質宇宙)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곤륜산(崑崙山)이나 태평양은 우리가 볼 때, 어떠한 이유로도 그 존재를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들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물질의 원자(原子)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하나하나의 원자단위는 다시 전자현미경으로도 보이지 않는 「역능(力能)」이 뭉쳐진 것입니다. 이 「역능」은 심령에 딸린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심령이란 「지능(知能)」과 「역능(力能)」이 뒤섞인 「에너지(能)」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과거 몇 몇 앞을 내다보는 과학자들은 우주를 하나의 더할 수 없이 큰 심령(大靈)이 움직이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았는데, 아주 정확한 것입니다. 불교의 가르침에서도 “마음으로 물질을 바꿀 수 있으면, 곧 여래와 같다”고 했습니다. 심령(참마음)은 바로 우주만물의 통제실이기 때문에 마음은 막힘없이 물체를 바꿀 수 있는 것입니다.
신성각을 이루어 우주의 비밀스런 통제실(참마음)이 발견되면, ‘참마음(眞心)’에서 나오는 큰 지혜와 능력이 장래 다음과 같은 8가지의 지혜와 창조를 이루어내 인류가 직면한 위기를 막을 수 있다며 그 구체적인 보기를 들고 있다.
1) 과학자들이 ‘피핵침(避核針, 피뢰침과 같은 물건)’과 ‘피핵탑(避核塔)’을 발명해 낼 것이다. 이 시설의 효능은 원자에너지를 빨아들여 핵폭탄이 폭발하지 못하도록 만들며, 「별(星球)」을 만들어 핵에너지를 빨아들이도록 해, 세계에 있는 핵이나 원자는 생산적인 방면에서만 이용되도록 하고, 인간을 파괴하는 어떤 활동도 못하게 통제할 것입니다. 현재 물의 흐름이나 전기의 흐름을 통제하는 시설들이 계속해서 나오고 있어, 핵에너지의 파괴력을 빨아들이는 기계도 생겨날 것이다. 이 기계는 핵폭탄이나 중성자탄이 분열할 때 생기는 방사선을 남김없이 흡수하게 될 것이다.
2) 버뮤다해역(Bermuda Island : 대서양에 있는 영국령의 섬들)이나 일본의 마귀해(魔鬼海)와 같은 지역에서 발생하는 불가사의한 현상들이 갈수록 자주 일어나고 있어, 수많은 비행기와 배들이 이곳 가까운 바다 지역을 통과할 때 갑자기 어디론가 자취도 없이 사라져 버릴 가능성이 있다. …… 미궁과학(迷宮科學)이라는 분야가 있어서, 앞으로는 까맣게 높고 먼 하늘에서 날아오는 비행접시ㆍ비행기ㆍ미사일ㆍ로켓ㆍ인공위성 같은 비행물체들 가운데 그 목적이 바르지 못한 것들은 모두 이 미궁(迷宮)에 빨려 들어가게 될 것이라고 한다. 머지않은 장래에 세계 곳곳마다 이러한 미궁이 생길 것이다. 비록 과학자들의 연구에 의하여 발명된다고 하지만 우주통제실(바로 통하는 참마음) 떠나서 만들어질 수는 없을 것이다.
3) 한 발 더 나아가 마르고 깨끗한 흙과 모래를 가지고 과자와 빵을 만들 수 있게 되는데, 이것은 신화가 아니다. 과학자들은 우리들에게 누른 모래와 빵의 기본 알갱이(粒子)가 본질적으로 조금도 다르지 않다고 말했다. …… 앞으로 반드시 심령이 무념(無念)한 사람과 과학자들이 우주통제실(참마음)에서 이 분야를 이룩해내는 지혜를 얻어낼 것이다.
4) 머지않은 장래에 과학자들이 수자원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게 되어, 고원(高原)에서도 오랜 가뭄 걱정 안 하도록 물 나오는 샘이 말라 없어지지 않고, 사막에도 시냇물이 흐르며, 바다에도 민물(淡水)이 생기게 될 것이다. …… 과학자들이 분석해 낸 달 겉면의 흙은 80%가 규소, 20%가 칼슘, 그밖에 적은 분량의 티타늄과 쇠(鐵)가 들어있다고 합니다. 규소와 칼슘을 화씨 800도까지 데우면, 바로 달 흙에서 산소분자가 떨어져 나오게 되고, 다시 산소(O)에 수소(H)를 결합하면 물(H₂O)에 대한 걱정이 없어진다고 한다.
만약 달에서 동정호(洞庭湖)나 아마존강을 만들어 낼 수 있다면, 고비사막ㆍ한해(瀚海)ㆍ사하라사막 같은 곳에도 빠얀카라산(巴颜喀拉山)남북기슭에 있는 것과 같은 큰 물줄기를 대량으로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며, 성공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5) 현재 「우주방사능」이라는 것이 있어, 앞으로 지구에 있는 사막지대를 며칠 사이에 기름진 땅으로 바꾸어 과일나무를 심고, 강과 못을 만들며, 고층 건물을 짓는 등, 사람의 그림자도 없는 아득한 사막을 일구어 인간낙원으로 만들 수 있다고 한다. 모래와 돌멩이는 모두 진흙이 굳어져서 된 것이기 때문에, 모래를 원래대로 되돌려 본디모습(本來面目)으로 돌이키면 된다는 것이다. 우주방사능은 …… A라는 물건을 B라는 물건으로 변화시킬 수 있고, A라는 동물을 B라는 동물로 바꾸어 버릴 수도 있다고 한다. 이런 우주방사능은 우주에 마치 유령처럼 존재하고 있으나 아직 그것을 모아서 이용할 수 있는 기구가 전혀 없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의 참모습을 알고자 한다면 오직 심령이 무념(無念)한 사람만이 그것을 장악하여 찾아내고 이용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