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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사(三省祠)
위치 : 현도면 죽전리 6번지 삼성골 건립 2004. 11
순흥안씨 양공공(良恭公) 휘 조동(祖同)의 고손자인 세현공(世賢公) 후손은 죽전리 삼성골(三省洞)과 모약골(舞鶴洞)에 살고 있는데 삼성골 소종중에서 세운 사당이다.
세현공의 아들 통덕랑(通德郞) 구(龜), 손자 윤조(允祖), 증손 장사랑(將仕郞) 탁(琸), 고손 의정(義貞), 6세 신립(信立), 7세 대려(大梠), 8세 명익(命翊), 9세 지택(知宅), 10세 태수(台壽), 11세 응성(應成), 12세 처빈(處彬)까지 배향하여 음력 10월 6일과 8일에 향사를 올리고 있다.
모약골파 7세 대운(大橒) 이하의 향사도 원할 경우 와서 올릴 수 있다.
통덕랑 순흥안공 휘린 묘갈명 병서
위치 : 우록3구 갈골 이장산
옛 문의면의 서쪽 노동(갈골)에 있는 주봉의 동북쪽 언덕에 높이 네 자 되는 무덤이 있는데 곧 통덕랑 순흥 안공 휘 린의 묘소이다. 그 시조를 논한즉 고려 상호군 휘 자미가 순흥에서 기틀을 창건하시고 세 번 전하여 휘 향 시호 문성이 도학을 열어 밝히셔서 문묘에 제사를 모시게 되었고 문순과 문숙과 문혜공이 대대로 이어져 나왔으니 이를 삼군사문의 가문이라고 일컫는다.
문혜공의 아들인 양공공 휘 조동은 봉의대부 예문관부제학이었는데 숭인의 재화에 크게 부르짖고 순절하였으니 이 분이 곧 파조이신데 공에게 오세조가 된다. 고조의 휘는 인강인데 수의교위 중군사조이시고, 증조의 휘는 우효인데 사과이시며, 조부의 휘는 철중으로 수의부위사맹이시고, 부친의 휘는 세현이신데 통정대부로서 진천현감을 지내셨고, 모친은 숙인으로 단천허씨 륜의 따님이시다.
공은 여기에서 태어나시고 여기에서 장사지내셨으니 생각건대 이것은 진실로 공이 남긴 가르침이다. 벼슬은 5품을 받았으나 영예와 빛남을 기뻐하지 않으시고 굳게 동쪽 언덕을 지켜서 스스로 숲과 샘을 사랑하였으니 오직 이것으로써 선조를 계승하고 후손을 넉넉하게 하며 수신제가와 효성스럽고 우애 있음을 평생의 행하고 다스리는 근본으로 삼았다.
이와 같은 공의 덕의 의로움으로써 가정의 가르침을 이어받은 것은 마땅히 후세에 전해져야할 것이지만 기나라와 송나라처럼 문헌이 전해지지 않아 증명할 수 없으니 아마도 이것은 전란이 여러 번 겹쳐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하노라. 아아 애석하도다.
부인인 공인 경주김씨는 쟁의 따님이다. 세 아들을 두었는데 윤희는 예안김씨에 장가들어 아들 곤과 붕을 낳았고, 윤조는 숙부인 구에게 출계하였다. 봉조는 예안김씨를 맞아 아들 홍과 안을 낳았다. 곤의 아들은 응주와 응구가 있으며 딸은 이인길에게 시집갔다. 붕의 아들은 응두이고 홍의 아들은 응천이며 안의 아들은 응복인데 나머지는 번잡하여 기록하지 않는다.
하루는 후손 준호, 승준, 원모, 원근, 순근 등이 나를 대전의 집으로 찾아와 말하기를 선조의 묘역이 세월이 오래됨에 따라 다 닳고 갈라져서 이제 장차 고치고 수리하려고 하는데 동족께서 옛 족보에 의거하여 서술하여 후손들이 오늘을 미루어 생각할 수 있게 한다면 다행이겠습니다 라고 하였다.
그것은 백 세 동안 이어온 한 집안의 우의이니 어찌 감히 글을 못한다고 해서 사양할 수 있겠는가. 전하는 말씀에서 대략 기록하고 또 문서를 살펴서 기록하여 이에 명을 짓노라. 명에 말한다.
높도다 저 주봉이여.
오직 공의 묘소로다.
능히 선조의 가르침을 따라서
출세하여 드날림을 일삼지 않았으며
선조를 봉양하고 후손에 드리워서
효성스러움과 우애가 이어져 전하며
진실로 숲과 샘을 지켰으니
그 덕을 아는 자가 드물다.
십여 세대를 이어오며
후손들이 매우 많게 되었으니
이것을 곧은 옥돌에 새겨서
길이 만년토록 보존하리라.
신미년 정월 하순에 후손 승춘이 삼가 찬하고 아울러 쓴다.
通德郞 順興 安公麟 墓碣銘 幷序
舊文義西蘆洞 冑峰坐艮之原 有崇四尺而封若堂 斧者 乃通德郞 順興安公 諱 麟之幽藏也 論其始祖 則高麗上護軍 諱 子美 創基順興 三傳 諱 珦 諡文成 倡明道學 腏祀聖廡 文順 文淑 文惠 繼世聯綿 稱三君四文之家 文惠子有 良恭 諱 祖同 奉議大夫 藝文館副提學 崇仁之禍 大呼殉節 寔爲派祖 於公五世也 高祖 諱 仁剛 修義校尉中軍司正 曾祖 諱 友孝 司果 祖 諱 哲童 修義副尉司猛 考 諱 世賢 通政大夫 行鎭川縣監 妣淑人 丹川許氏 倫女 公之生於斯 葬於斯 想是良公遺旨也 則官受五品而不喜榮耀 固守東崗而自愛林泉 惟以承先裕後 修齊孝友 爲生平行治之本 以若公之德之義 承習庭訓者 宜有家傳於後 而杞宋莫徵 恐是兵燹之屢經故歟 噫其可惜也 齊恭人慶州金氏錚之女 擧三子 允禧娶禮安金氏 生子鵾鵬 允祖出后父龜后 奉祖娶禮安金氏 生子鴻鴈 鵾子應龜應桂 女適李仁吉 鵬子應斗 鴻子應天 鴈子應福 餘煩不錄 日其后孫 俊鎬 承俊 元模 元根 淳根 訪余大田僑舍曰 先祖墓儀 世久磨泐 今將改修 族其依譜而述之 以爲後孫之追想 今日 則幸矣 其在百世一室之誼 豈敢以不文辭 諸畧記所傳之說 又接牒而錄之 仍爲之銘
銘曰
屹彼冑峰
維公幽藏
克追先旨
不事立揚
奉先垂後
孝友繼傳
固守林泉
知德者鮮
歷十數世
雲仍兟兟
鐫此貞珉
永保萬年
歲辛未元月下浣 族裔 承春謹撰竝書
통덕랑 순흥안공 휘구비문
위치 : 죽전3리 삼성골
통덕랑(通德郞) 안공 휘 구(安公 諱 龜)는 순흥인(順興人)으로서 고려 흥위위보승별장(高麗 興威衛保勝別將) 휘 자미(諱 子美)의 13世孫이요 성리학(性理學)을 도입(導入)하사 유교(儒敎)를 흥왕(興旺)시켜 문묘(文廟)에 배향(配享)되신 문성공(文成公) 휘 유(諱 裕 後諱 珦)의 10世孫이요 이조(李朝)로 국체변혁시(國体變革時) 숭인문화(崇仁門禍)를 당하여 순절하신 양공공(良恭公) 부제학 휘 조동 (副提學 諱 祖同)의 6세손이요 진천현감(鎭川縣監)의 교지(敎旨)를 받고서도 선조(先祖)의 충절(忠節)을 사모(思慕)하여 불사(不仕 벼슬하지 않음)하시고 식죽이완상(植竹而玩賞 대나무를 심고 감상)하시어 죽전리(竹田里)라는 지명이 생기게 하신 휘 세현(諱 世賢)과 단천허씨간(丹川許氏間) 탄생(誕生)하신 차자(次子)로서 조(祖)는 수의부위사맹(修義副尉司猛) 휘철동(諱 哲童)이오 증조(曾祖)는 사과(司果) 휘 우효(諱 友孝)요 현조(玄祖)는 우군사정(右軍司正) 휘 인강(諱 仁剛)이오 배 공인(配 恭人) 밀양박씨지묘(密陽朴氏之墓)는 개영치(開榮峙 갱치) 후록(後麓)에 해좌(亥坐)로 별장(別藏)모셨는데 자(子)는 형 휘 린(兄 諱 麟)의 차자(次子) 휘 윤조(諱 允祖)를 맞아 손(孫)에 삼형제(三兄弟)를 두었으니 장(長)이 장사랑(將仕郞) 휘 탁(諱 琸)과 차(次) 휘 박(諱 珀)과 삼(三) 휘 서(諱 瑞)를 두어 증현(曾玄) 이하(以下) 불록(不錄 다 적을 수 없음)이나 자손(子孫)들이 죽전(竹田) 대박(大朴), 삼성(三成) 등지(等地)에 번연총거(蕃衍叢居 번창하여 한 곳에 모여 삶)하는 중 종재(宗財)로 표갈(表碣)을 세우게 되매 그 내력(來歷)을 기록(記錄)치 않을 수 없어서 비재천학(非才薄學)으로 찬양(贊揚)의 글을 꾸미지 못하고 다만 보첩(譜諜)에 의해서 높으신 음덕(隱德)과 청백(淸白)만을 찬술(撰述)하여 선조(先祖)의 유덕(遺德) 기리는 데 그칩니다.
단기 4313년 경신 2월 15세손 승갑 근찬 종손 승준 근서(檀紀 4313年 庚申 2月 日 15世孫 承甲 謹撰 15世 宗孫 承俊 謹書)
장사랑공 휘 탁 비문(將仕郞公 諱 琸 碑文)
위치 : 우록3리 갈골 이장산
고남산(高嵐山) 아래 갑좌(甲坐)의 언덕은 곧 이십삼세조이며 장사랑(將仕郞)을 지내신 휘 탁 부군(諱琸府君)과 부인 단인 공산이씨(端人公山李氏)의 묘소이다. 우리 순흥안씨는 고려에 상호군(高麗上護軍)이셨던 휘 자미(子美)로부터 시작하여 4대 뒤에 휘 향(珦)이고 처음의 휘는 유(裕)이며 호는 회헌(晦軒)이고 시호는 문성(文成)이신 분이 성리학(性理學)을 처음으로 크게 밝히고 학문을 일으키며 장학금을 설치하셔서 가르치고 기르며 어진 이를 양육하여 공자(孔子)의 사당(祠堂)에 배향되시고 동방 도학(東方道學)의 조(祖 시조)라 일컬으니 이분이 공의 십이대조이다.
무진(戊辰)년 숭인문(崇仁門)의 화(禍)에 크게 부르짖고 순절하신 휘 조동(祖同)이고 시호는 양공(良公)이며 봉의대부 예문관 부제학(奉議大夫藝文館副提學)을 지내신 분이 팔세조이다.
진천현감(鎭川縣監)을 제수받았으나 덕을 숨겨 나아가지 않으시고 산림(山林)에 자취를 감추고 자손을 가르치시며 전원에 대나무를 심어놓고 거문고와 책으로 스스로 즐기시어 죽전(竹田)이라는 마을 이름이 생기게 하신 휘 세현(世賢)이 증조이시고 통덕랑(通德郞)을 지내신 휘 귀(龜)가 할아버지이시다.
큰아버지 휘 린(麟)의 차남으로서 출계하신 아버지는 휘 윤조(允祖)이시며 어머니는 예안김씨(禮安金氏)인데 윤조(潤祚)의 따님이시다. 아들은 휘 의정(義貞) 이고 손자는 휘 신립(信立)이며 증손에 휘 대려(大梠)와 대운(大橒)이 있는데 삼성(三省)과 무학(舞鶴)의 두 파로 처음 나누어져 자손이 번창하여 모두 모여 살아 마을을 이루었다.
아아 선조께서 굽히지 않고 절의만 숭상하여 비록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으나 뛰어나고 지조있는 행위와 효성과 덕의 감화가 이웃 고을까지 만세토록 전하는 공의 산소 앞에 비석이 없음을 개탄한 나머지 돌을 세워 표시할 때 불초는 듣고 아는 것이 소박하여 위대한 공과 업적을 낱낱이 칭찬하여 드러내지 못하고 다만 족보의 세계에 의하여 전말만 간략하게 기록하여 백세 뒤를 준비하노라
단기 4315(1985)년 임술년 정월 13세손 승갑 근찬
將仕郞公 諱 琸 碑文
高嵐山下 甲坐之原은 迺我十三世祖 將仕郞諱琸府君과 配端人 公山李氏 衣履之藏也라 我順興之安이 高麗上護軍 諱子美로 四傳諱珦初諱裕號晦軒 諡文成께서 性理學을 倡明興學置贍學錢訓育養賢하사 聖廡에 腏祀東方道學之祖라 稱하니 寔公의 十二世祖요 戊辰年 崇仁門禍에 大呼殉節하신 諱祖同諡良恭 奉議大夫藝文館副提學이 八世祖요 鎭川縣監을 除授받고 隱德不就林泉에 遯跡子孫을 敎誨하고 田園에 種竹하야 琴書로 自娛하시어 竹田이란 村名이 생기게 하신 諱世賢이 曾祖요 通德郞 諱龜가 祖요 伯考諱麟의 次男으로서 出系하신 考는 諱允祖시며 妣禮安金氏는 父潤祚의 女이시다 子諱義貞 孫諱信立 曾孫에 諱大梠大橒하야 三省舞鶴兩派로 始分 雲仍이 繁衍 叢居成村하였으니 噫라 先祖不屈의 節義만 崇尙 비록 不就宦路 하였으나 卓操之行과 孝德感化가 隣邑까지 萬世傳하시는 公의 墓前에 顯刻이 없음을 慨歎한 나머지 竪石以表之할새 不肖聞識이 素朴하여 偉功業績을 一一이 贊揭치 못하고 다만 依據譜牒世系顚末만 略記하여 備后百世하노라
檀紀 4315년 壬戌年 正月日 十三世孫 承甲謹撰
선전공 순흥안공 휘 처눌비문(宣傳官 順興安公 諱 處訥碑文)
위치 : 죽전리 3구 상성골
상대에 어진 선비가 있어 가풍을 굳건히 일으키고 후대에 슬기로운 자손들이 연달아 배출되어 스스로 몸을 세워 가문을 크게 현창한 집안을 세인들은 명문가라 이르나니 그러한 집안의 하나가 바로 순흥안씨(順興安氏)의 가문이다.
고려의 상호군(上護軍) 휘 자미(子美)를 시조로 모시는 이 순흥안씨는 동방유학(東邦儒學)의 태두로 만인이 추앙하여 성무(聖廡 공자를 모시는 사당)에 배사(配祀 배향)된 4세 회헌(晦軒) 문성공(文成公) 휘 향(珦)에 이르러 가문이 크게 빛났다.
선전관(宣傳官) 휘 처눌(處訥)은 이 가문에서 성균생원 휘 헌(憲)과 의인(宜人) 충주강씨(忠州康씨) 사이에 2남 중 장남으로 태어났으니 이곳 현도면에의 입향조(入鄕祖)이신 봉의대부 예문관부제학 양공공(奉議大夫 藝文官副提學 良恭公) 휘 조동(祖同)은 육대조가 되시고 수의교위행우군사직(修義校尉行右軍司直) 휘 인강(仁剛)은 오대조가 되시며 사과(司果) 휘 우효(友孝)는 고조가 되시고 수의부위사맹(修義副尉司猛) 휘 철동(哲童)은 증조가 되시며 천문학습독(天文學習讀) 휘 세량(世良)은 바로 조고가 되신다.
구차히 부귀공명을 좇지 않고 곧은 지조와 높은 풍도로써 명리를 초탈하면서 숭조돈종(崇祖敦宗 조상을 섬기고 문중을 돈독히 함)을 중히 여기는 가문에서 태어난 공은 일찍이 무과 선전관을 역임한 경력으로 보아 덕망과 곧은 행실로 후세에 수범(垂範)이 될 일이 많았을 터인데 그 공의 사행(事行 업적)이 세대가 멀고 잦은 병화로 증빙할 문헌이 흩어져 없어지고 묘갈마저 오랜 풍상으로 자형의 마륵(磨泐 마모)가 심하여 상고할 길이 없음이 안타깝다.
다만 전해 오는 말에 따르면 고매한 성격과 두터운 우의(友誼)로 수신제가(修身齊家)하면서 치사(致仕 나이가 많아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 남) 후에는 향리에 은거하여 가통(家統)을 이으며 살았다고 한다.
이를 효즉(孝則 효성으로 본받음)한 자부(子婦) 공인(恭人) 오씨(吳氏)는 젊은 나이에 부군과 사별하는 아픔이 채 가시기도 전에 임진왜란을 당하매 가통의 계승과 자손의 보존에 대한 일념으로 난을 피하기 위해 남복(男服)으로 변장 족보를 품고 어린 세 자제들을 이끌어 선향(先鄕)인 소백산으로 들어가 8년만에 고향으로 돌아 왔으니 이 같은 공인 오씨의 행적으로 미루어 공이 가풍의 보존에 온갖 심혈을 기울였음을 짐작하게 한다.
배위(配位) 영인(令人) 경주이씨(慶州李氏)와의 사이에는 사옹원주부(司饔院主簿)를 지내고 요절한 효자 개(玠)가 있고 손에는 연경(延慶) 희경(希慶) 승경(承慶)의 삼형제가 있으며 양위(兩位)는 이곳 청원군 현도면 죽전리 삼성동 안산(案山) 자구문(紫口門) 사좌(巳坐)에 합폄(合窆 합장)되어 있다.
위선지념(爲先之念)이 투철한 승봉(承鳳), 승진(承鎭) 양공이 나를 찾아와 이미 크기 마륵된 묘비를 새로이 세우기로 후손들이 뜻을 모았다는 전언과 함께 글을 청하매 그 간절한 정성을 내 어찌 거절하랴. 다면 내 거친 글이 그 내용을 헤아려 모두 담지 못함이 안타까울 따름이로다.
사기 2007년 정해(丁亥) 2월
은진후인(恩津後人) 충남대학교 명예교수 문학박사
송백헌(宋百憲) 짓다
통정대부 증 군자감 정순흥안공휘희경비문(通政大夫 贈 軍資監正 順興安公諱 希慶碑文)
위치 : 우록 1리 큰말
고려의 상호군 휘 자미를 비조(鼻祖 시조)로 모시는 순흥안씨(順興安氏)는 이래 8백여 유년의 오랜세월에 수많은 명장현상(名將賢相)과 효자열부를 배출한 근역(槿域 우리나라)의 명족으로 면면한 전통을 이어 왔으매 어찌 그 가문이 빛나지 않으랴.
조선 선조조(宣祖朝)의 군자감정(軍資監正) 휘 희경(希慶)은 이 명가에서 사옹원 주부(司饔院主簿) 휘 개(玠)와 공인 낙안오씨(樂安吳氏) 사이에 삼남 중 차남으로 태어났으니 동방유학(東邦儒學)의 태두로서 만인으로부터 추앙받은 회헌(晦軒) 문성공(文成公) 휘 향(珦)은 12대조가 되시고 이곳 청원군 현도면에의 입향조(入鄕祖)이신 봉의대부 예문관부제학 양공공(奉議大夫 藝文官副提學 良恭公) 휘 조동(祖同)은 8대조가 되시고 수의교위행우군사직(修義校尉行右軍司直) 휘 인강(仁剛)은 7대조가 되시며 수의부위사맹(修義副尉司猛) 휘 철동(哲童)은 5대조가 되시며 천문학습독(天文學習讀) 휘 세량(世良)은 바로 고조가 되시고 성균생원 휘 헌(憲)은 증조가 되시며 선전관(宣傳官) 휘 처눌(處訥)은 바로 조고가 되신다.
공은 유년기에 선군 주부공을 여의고 임란(壬亂 임진왜란)의 참화를 몸소 겪는 낙척(落拓 불우함)한 삶을 살았다. 모부인(어머니) 공인 오씨는 젊은 나이에 부군과 사별하는 아픔이 채 가시기도 전에 임진왜란을 당하매 가통의 계승과 자손보존에 대한 일념으로 난을 피하기 위해 남복(男服)으로 변장, 족보를 품고 연경(延慶), 희경(希慶), 승경(承慶) 등 어린 세 자제들을 이끌어 선향(先鄕)인 소백산으로 들어가 난을 피했다.
피란 중 초근목피로 연명하는 인고(忍苦)의 생활 속에서도 가문의 보존과 자손의 교육에만 심혈을 기울이다 난이 평정된 8년만에 고향에 돌아와 정착했으니 후손들이 대대로 이 땅에서 번창해왔음은 실로 공인의 노고에서 말미암음이 아니겠는가.
유년부터 자품(姿稟 타고난 성품)이 높고 맑으며 성행이 효우인애(孝友仁愛)함을 지녔던 공은 이 어려운 과정에서 형제들과 합심하여 모부인을 극진히 도우며 주경야독(晝耕夜讀)을 게을리 하지 않았음은 물론 이후에도 항상 기쁜 얼굴로 받들어서 양지(養志)와 양체(養體)의 봉양(奉養)을 고루 하였다.
말년에는 수직(壽職)으로 통정대부 군자감정(通政大夫 軍資監正)의 벼슬이 내려지는 은전을 입고 향년 82세로 타계하여 이곳 현도면 죽전리 자구문(紫口門) 조고조후 사좌(巳坐)에안장하고 배위 숙부인(淑夫人) 공주이씨(公州李氏)는 우록리 백자동(栢子洞) 간좌(艮坐)에 안장하였다.
슬하에는 증공조참의(贈工曹參議) 극효(克孝) 통덕랑(通德郞) 극제(克悌)와 극렴(克廉)의 삼남이 있다. 당초에 공의 묘전에는 평생의 행적을 담은 묘갈이 있었고 집안에는 전해오는 문헌이 있었으나 세월이 흐름에 따라 묘갈은 이미 마륵(磨泐 마모)이 심하여 자형을 판독하기 어렵고 서책마저 잦은 병화(兵禍)로 인멸(湮滅)되어 고증할 길이 없어졌다.
후손들은 이를 민망히 여겨 새로이 묘비를 세우기로 하고 문중을 대표하는 병훈(柄勳) 승보(承輔) 양공이 나를 찾아와 글을 청하매 그 위선지념(爲先之念)에 감복하여 내 거친 글이나마 전해오는 이야기를 대강 추려서 여기 몇자의 글을 엮는다
사기 2007년 정해(丁亥) 2월
은진후인(恩津後人) 충남대학교 명예교수 문학박사
송백헌(宋百憲) 짓다
낙안오씨 장덕비문
위치 : 우록1리 큰말
부인의 성은 오씨요 관은 낙안이니 장사랑 산두의 여이고 사옹원주부 안공 휘 개의 처이다. 천성이 서일하고 깊고 고요하여 사람의 뜻을 거슬림이 없더니 슬프다!
부군이 불행이도 일찍 죽고 삼남은 다 어린고로 밤낮으로 무육하여 앞날의 가정사를 꾸려나가리라 기대 했더니 마침 선조조의 임진왜란을 만나 위난이 급한지라 남복을 입고 삼자를 소에 싣고 보첩을 품에 품고 소백산에 들어가 8년이 지나 돌아와 명철하게 보신하였으니 애라 공인의 심지가 광결하고 처리가 득당하니 마땅히 복록을 누려야할 것인데, 무슨 일로 나라의 운수가 불길하고 난리가 계속되여 부평같은 외로운 몸으로 이런 환경에 이르렀던가.
경남의 소백산은 순흥에 인접되고 뿌리가 굳은 발상지지이다. 어찌 다른데 구하리오. 시기를 보아 용단을 내려 급보로 70리를 걸어 인을 택하여 처신하고 의리를 잡아 행신하며 손수 나무하고 근근히 살아가도 태연히 자득하고 겸연히 스스로 다스려가며 깊이 감춰 들어나지 아니하니, 부인의 지감은 지면자를 기다리지 아니하여도 알만하다. 어쩌면 그의 신념이 이렇게 독실할 수 있으며 비록 대장부라도 처변지지에는 가장 어려운 것인데 이같이 탁연자로 할 수 있을까.
얼마 후 천년으로 일생을 마치니 문의 서방 우록 명지묘산 임좌병향에 안장하니 공으로 더불어 상하분이다. 삼남에 상은 연경이요, 차는 휘경이니 통경대부 증군자감정이요 이는 승경이라. 내외손증을 다 기록하지 못한다.
어느날 안군교갑이 그 사연을 초를 초잡아 가지고 나에게 수윤하기를 청하니 과감히 문졸로 사양치 못하고 삼가 그 원고에 의하여 대강 대요만 서술하고 장덕지문에는 다른 날에 알만한 군자를 기다릴 뿐이다.
을유맹춘하한에 산양 오희국 지음
증가선대부공조참판오위도총부 부총관부사순흥안공 상로비문(贈嘉善大夫工曹參判五衛都摠府 副摠管府使順興安公 尙老碑文)
위치: 죽전3리 삼성골
고려의 상호군 휘 자미를 비조(鼻祖 시조)로 모시는 순흥안씨(順興安氏)는 이래 8백여유년의 오랜 세월에 수많은 명유현상(名儒賢相)을 배출한 근역(槿域)의 명문거족으로 면면한 전통을 이어왔다.
이 가문에서 증공조참판(贈工曹參判) 휘 상로(尙老)는 가선대부(嘉善大夫) 증공조참의(贈工曹參議) 휘 극효(克孝)와 증정부인 경주김씨(慶州金氏) 사이에 태어났으니 동방도학지종(東方道學之宗)으로 추앙받아 성무(聖廡 공자를 모신 사당)에 배사(配祀)된 회헌(晦軒) 문성공(文成公) 휘 향(珦)은 14대조가 되시고 고려의 찬성사(贊成事)로 순평군(順平君)에 봉해진 시호 문순공(文順公) 휘 우기(于器)는 13대조가 되시며 진현관대제학(進賢館大提學)으로 순흥군(順興君)에 봉해진 문숙공(文淑公) 휘 목(牧)은 12대조가 되시고 이곳의 입향조(入鄕祖)이신 봉의대부 예문관부제학 양공공(奉議大夫 藝文官副提學 良恭公) 휘 조동(祖同)은 10대조가 되시며 수의교위행우군사직(修義校尉行右軍司直) 휘 인강(仁剛)은 9대조가 되시고 천문학습독(天文學習讀) 휘 세량(世良)은 6대조가 되시며 선전관(宣傳官) 휘 처눌(處訥)은 조고가 되시고 사옹원주부(司饔院主簿) 휘 개(玠)는 증조가 되시며 통정대부(通政大夫) 증군자감정(贈軍資監正) 휘 희경(希慶)은 바로 조부가 되신다.
곧은 지조와 높은 풍도로서 명리를 초월하면서 숭조돈종(崇祖敦宗 조상을 섬기고 종중을 돈독히 힘)을 중히 여기는 빛나는 가문에서 태어난 공에게는 후세에 길이 남길만한 훌륭한 덕행이 많았을 터인데 벼슬로 증가선대부공조참판오위도총부 부총관부사(贈嘉善大夫工曹參判五衛都摠府副摠管府使)에 증직되었다는 사실만이 전해져 올 뿐 이후 잦은 병선(兵燹 전쟁으로 인한 화재)으로 문헌이 인멸되고 묘갈마저 오랜 세월의 풍마세우(風磨洗雨 비바람에 마모됨)로 자형을 판독하기 어려울 지경에 이르러 안타깝다.
다만 공은 고매한 성품으로 수신제가하고 일생을 선영을 지키면서 독서에 전념하였다고 가문에 전해온다. 하지만 일우지전봉(一羽之知全鳳 깃털하나로 봉황을 미루어 짐작)이라는 옛말처럼 능히 공의 인품을 이로써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서거 후에는 배위 증정부인 공주이씨(公州李氏)와 함께 이곳 청원군 현도면 죽전리 삼성동 후록(後麓 뒤의 기슭) 장척(長脊 긴 줄기) 습독공(習讀公) 조하(兆下負) 묘좌원(卯坐原)에 합봉하였고 그 슬하에는 여천(如天)과 여수(如峀)와 정헌대부동지중추부사(正憲大夫同知中樞府使) 여순(如峋)의 삼남이녀가 있는데 그 아래 많은 내외손을 여기에 다 기록할 수 없다.
위선지념(爲先之念)이 남다른 후손 성균관 전인(典仁) 병훈(柄勳)과 병찬(柄瓚)이 나를 찾아와 크게 마륵(磨泐 마모)된 묘비를 새로이 세우기로 자손들의 뜻을 모았다는 전언과 함께 글을 청하여 그 간절한 정성에 감복하여 내 거친 글로써 여기 몇 자를 적는다.
사기 2008년 무자(戊子) 2월
은진후인(恩津後人) 충남대학교 명예교수 문학박사
송백헌(宋百憲) 짓다
성균관 전학 순흥안공 종호비문
위치 : 하석리 노봉 안산
공의 휘는 종호(琮鎬)요, 자는 몽학(夢鶴)이요, 우은(友隱)은 호이다. 성은 안(安)이니 계파는 순흥에서 나왔으며 고려 상호군 휘 자미(子美)가 시조요. 그 증손자이면서 도학의 으뜸으로 문묘에 배향하신 회헌(晦軒) 문성공(文成公) 휘 향(珦)의 22대손이요. 봉의대부(奉議大夫) 예문관부제학(藝文館副提學) 양공공(良恭公) 휘 조동(祖同)의 18대손이요. 천문학습독(天文學習讀) 휘 세량(世良의) 14대손이요. 정헌대부(正憲大夫) 동지중추공(同知中樞公) 휘 여순(如峋)의 칠대손이다.
고조의 휘는 필재(弼載)요. 증조의 휘는 양수(養壽)요. 조부의 휘는 석렬(奭烈)이니 문묘직원(文廟直員)이요. 부친의 휘는 교하(敎夏)요. 호는 문곡(文曲)이니 효성스럽고 우애 있으며 순수하고 독실하였으며 집안을 다스림에 치밀하였다. 모친은 유인 은진송씨(恩津宋氏) 낙인(樂仁)의 딸이다. 어진 덕이 있었으나 후사가 없어서 공이 겨우 3세에 후사로 세워졌다.
부친의 휘는 교은(敎殷)이요. 모친은 청송심씨(靑松沈氏) 상준(相俊)의 딸이다. 공은 을묘 11월 6일에 태어났는데 용모가 아름답고 품행이 단정하며 독실하게 배우고 힘써 행하더니 경인년 6․25 사변을 당하여 어렵고 힘든 과정을 겪으면서도 다행히 온전하였다.
명예와 이익을 구하지 않았으며 시와 책으로 스스로 즐겨 오직 정성으로 선조를 받들었다. 어버이를 효성으로 섬기고 종족간에 화목하였으며 벗에게 신의 있는 것을 평생 몸에 지니고 있었으니 향리에서 칭송하였고 유림에서 존중하여 성균관으로부터 전학에 발탁되었다.
병자(丙子) 3월 8일에 집에서 돌아가시니 향년 80이라. 청원군 현도면 하석리 노봉(魯峰洞) 안산(案山) 문암(門岩) 강암산(剛嚴山) 조부와 부친의 묘소 아래인 남쪽 언덕에 장사를 지냈다.
부인은 단인(端人) 문화유씨(文化柳氏)니 문묘직원(文廟直員) 필영(苾永)의 딸이다. 공보다 5년 먼저인 경술 9월 14일에 출생하여 단정하고 한결같으며 정성스럽고 장엄하고 오직 덕을 행하더니 6남을 낳고 공보다 4년 뒤인 을묘(己卯) 10월 26일에 졸하니 향수 90이라. 묘는 공에 부좌하였다.
장남은 병훈(柄勳)이니 부인은 보성오씨이고 효도로 한국방송공사장에게 대상을 받았고, 차남은 병선(柄璇)이니 부인은 전주이씨(全州李氏)이고 3남은 병기(柄璣)이니 부인은 경주김씨(慶州金氏)이고 4남은 병진(柄璡) 5남은 병권(柄權)이니 부인은 함안조씨(咸安趙氏)이고 막내는 병규(柄珪)이니 부인은 전주이씨(全州李氏)이다. 손자와 증손은 번거로워 다 기록할 수 없다.
오호라. 공이 이름있는 조상의 후예로 발자취를 이었으나 시절이 예스럽지 못하여 품고 있는 것을 펼치지 못하고 온전히 집안을 다스리고 자식을 교육하며 문학으로 교우하고 이리저리 다니며 시를 읊다가 숲과 샘의 사이에서 몸을 마치니 사람들이 세상에 쓰이지 못했음을 안타깝게 생각했으나 형세가 진실로 그러했음이라.
그러나 후손이 창대하고 효성이 있으니 생각건대 공이 음덕을 받음이 까닭이 있도다. 돌아가신 뒤 해가 지나 아들 형제들이 그 덕행과 명성이 오래되면 오래될수록 더욱 없어질 것을 두려워하여 장차 묘소에 의물을 갖추어 나타내고자 하여 가장(家狀 집에서 정리한 약력)을 정리하여 나를 찾아와 비석에 쓸 글을 청하였다.
내가 비록 글을 지을 줄 모르나 한 집안의 우의로서 마침내 사양하지 못하여 가장에 의해 기록하고 인하여 명을 지으니 명에 말한다.
순흥 안씨 화려한 문벌이
고려말에 크게 나타났도다
문성공이 종묘에 배향되시고
양공공이 순절하셨네
수백년래에
벼슬이 이어져 빛났네
우록과 지정은
공이 은거하던 곳이요
강엄의 기슭은
선조의 언덕이라
노고산 현암은
뒤에까지 드리워 앞을 돌아보고
상당과 계룡은
왼쪽에서 돕고 오른쪽에서 보호하네
사방의 산수가
신령함이 모인 길한 조짐이라
공이 선조의 음덕을 받아
자손이 효성스럽고 창대하네
비석이 높고 높으니
천추에 빛나도다
기묘년 섣달 상순에 족질 승춘은 삼가 짓고 서문을 쓴다
경진 2월 일립
成均館典學 順興安公 琮鎬碑文
友隱 安公墓碣銘 竝書
公의 諱는 琮鎬요, 字는 夢鶴이요, 友隱은 號也라. 姓은 安이니 系出順興하여 高麗 上護軍 諱 子美가 爲初祖요. 三傳에 以道學之宗으로 聖廡配祀하신 晦軒 文成公 諱 珦의 二十二代孫이요. 奉議大夫 藝文館副提學 良恭公 諱祖同의 十八代孫이요. 天文學習讀 諱 世良의 十四代孫이요. 正憲大夫 同知中樞公 諱 如峋의 七代孫也라. 高祖 諱는 弼載요. 曾祖 諱는 養壽요. 祖 諱는 奭烈이니 文廟直員이요. 考 諱는 敎夏요. 號는 文曲이니 孝友純實하고 治家縝密하다. 妣는 孺人 恩津 宋氏 樂仁의 女라. 賢而無嗣하여 公纔三歲에 立而爲后하다. 生考 諱는 敎殷이요. 妣는 靑松 沈氏 相俊의 女라. 公이 生於乙卯 十一月 六日하니 形貌美晳하고 品行이 端正하며 篤學力行이러니 當庚寅 南北之訌하여 備經險阻에 幸而得全하여 不求名利하고 詩書自好하며 惟以奉先以誠하고 事親以孝하며 睦於宗族하고 信於朋友로 爲生平佩符하니 鄕里稱賞하고 儒林推重하여 自成均館으로 擢典學之任하다. 丙子三月八日에 終於正寢하니 享壽 八十이라. 葬于淸原郡 賢都面 下石里 魯峰洞 案山 門岩 剛嚴山 祖考兆下 枕丙之原하다. 配는 端人 文化柳氏니 文廟直員 苾永之女라. 先公 五年 庚戌 九月 十四日生하여 端一誠莊하고 惟德之行이러니 生六男하고 後公 四年 己卯 十月 二十六日 卒하니 享壽 九十이라. 墓는 祔公左하다. 男長 曰 柄勳이니 娶 寶城吳氏하고 以孝로 受大賞於韓國放送公社長하고 次曰 柄璇은 娶 全州李氏하고 次曰 柄璣는 娶慶州金氏하고 次曰 柄璡 次曰 柄權은 娶咸安趙氏하고 季曰 柄珪는 娶全州李氏하다. 孫曾은 繁不盡錄이라. 嗚呼라. 公이 以名祖後裔로 承趾遺武而時丁不古하야 未展其蘊抱하고 全務治家敎子와 文學交友하고 逍遙觴詠타가 終於林泉하니 人惜其未能需用於世나 勢固然矣라. 然이나 以後繼之昌而孝焉으로 想公之受蔭有以也로다. 沒後歲移에 胤子昆季가 懼其德音이 日遠而愈泯하여 將表隧儀할세 修狀抄하고 謁余以牲石之文하니 雖不文이나 誼在一室에 終不固辭하여 依狀而錄之하고 因爲之銘하니 銘曰 興州華閥이 顯于麗末이라. 文成이 配聖하고 良恭이 殉節이라. 數百年來에 簪組繼赫이라. 友鹿池亭은 公之薖軸이요. 剛嚴之麓은 先世之阡이라. 老姑 懸岩은 垂後顧前하고 上黨鷄龍은 左翼右保라 四圍山水가 鍾靈吉兆라. 公受先蔭하여 子孝孫昌이라. 貞珉이 屹屹하니 千秋耿光이로다.
歲己卯蜡月上澣 族姪承春 謹撰幷序
庚辰 二月 日立
成均館典學 順興安公 琮鎬之墓
配端人文化柳氏祔左 丙坐
증가선대부 공조참의 순흥안공 극효비문
위치 : 하석리 시항
공의 휘는 극효(極孝)요. 성은 안(安)이니 순흥인(順興人)이다. 시조는 고려 상호군(上護軍 ) 휘 자미(子美)요 그 증손자인 휘 향(珦)은 도학의 시조로 공자의 사당에 배향하니 세칭 회헌선생(晦軒先生)이다. 이로부터 세분의 군(君)과 네분의 문(文)이 서로 이어 나타나 드디어 우리나라의 이름난 가문이 되었다.
휘 조동(祖同)은 시호 양공공(良恭公)이요. 예문관부제학(藝文館副提學)이니 고려가 망함을 당하여 망한 나라의 백성으로서 순절하였다. 휘 세량(世良)은 호가 만희당(晩喜堂)이요. 관직은 천문학습독이니 목천으로부터 현도면 우록리로 이주하여 지정말(池亭村)에 연못을 파고 정자를 지어 시와 책으로 스스로 즐기니 이 분이 공의 5대조이다.
고조의 휘는 헌(獻)이니 성균생원이요 증조의 휘는 처눌(處訥)이니 무과로 선전관(宣傳官)이요. 조부의 휘는 개(玠)니 사옹원주부(司饔院主簿)요. 조모는 공인(恭人) 낙안오씨(樂安吳氏)인데 소시 적에 남편을 잃고 세 아들을 기르다가 임진왜란을 당하여 남장을 하고 세 아들을 업고 족보를 품고서 소백산으로 들어가 8년 후에 돌아오니 자손들이 지금까지 여기에 사는 것이 실로 이 분의 노고를 꺼리지 않은 덕분이다. 부친 휘는 희경(希慶)이니 통정대부 증군자감정(通政大夫 贈軍資監正)이요. 모친은 숙부인 공주이씨(公州李氏)다.
공은 태어나면서부터 특이한 자질이 있어 염치있고 삼가며 공손하고 품위 있었다. 두 아우와 함께 즐거워하고 기뻐하여 주위에서 많은 칭송이 있었다. 수직으로 가선대부공조참의(贈嘉善大夫工曹參議)에 추증되었다.
장지는 현도면 하석리 대청호변 시항(矢項) 남쪽의 언덕이다. 부인은 셋이니 진천송씨(鎭川宋氏), 경주김씨(慶州金氏) 광산김씨(光山金氏)이다. 모두 부덕이 있어서 다 정부인에 추증되었다.
송씨와 광산김씨묘는 명지터(明池基) 남향에 있다고 하는데 표석이 없어 찾을 수 없고 경주김씨의 묘는 우록 백자동(栢子洞) 간원(艮原)에 상석이 있고 오직 송씨만 공에 부좌하였다.
6남 5녀를 두니 장남은 팽로(彭老)요 차남은 창로(昌老)요 명로(命老)는 용양위부호군(龍驤衛副護軍)이요 상로(尙老)는 증가선공참(贈嘉善工參)이요 삼로(三老) 원로(元老)이다. 딸은 김도신(金道信), 채진구(蔡振龜), 박세장(朴世章), 이팽로(李彭老), 오상국(吳尙國)에게 시집갔다. 나머지는 많아서 다 쓸 수 없다.
오호라 공이 태어난 자질의 아름다움과 가르침을 잇고 익혀서 평생의 행적이 후대에 많이 전하는데 세월이 여러 번 변하여 문헌이 증명하지 못하고 묘소의 비석도 세월이 오래되어 닳고 갈라져 갈수록 더욱 송구하도다.
이때에 종중의 의논이 한가지가 되어 장차 돌을 준비하여 수리할 때 후손인 일호, 상선, 병옥이, 가장(집에 전해내려 오는 내력)을 가지고 나를 집으로 찾아와 비석에 기록할 것을 청하니 평소에 아는 것이 적어 감히 감당할 수 없으나 종족간의 우의로 거절하기도 또한 어려우므로 가장에 의거하여 졸렬함을 잊고 대략 서술할 뿐이라.
세신사 복월 하완 족예 승춘 근찬 10대손 병훈근서 단기 4335년 임오2월 세움(歲辛巳 復月 下浣 族裔 承春 謹撰)
贈嘉善大夫工曹參議 順興安公極孝碑文
公의 諱는 極孝요. 姓은 安이니 順興人이라. 始祖는 高麗 上護軍 諱 子美요 三傳 諱 珦은 道學之祖로 聖廡에 配祀하니 世稱 晦軒先生이라. 自是로 三君四文이 相繼而作하야 遂爲東國著閥이라. 有諱 祖同은 諡良恭이요. 藝文館 副提學이니 當麗屋社하야 罔僕自靖하고 有諱 世良은 號 晩喜堂이요. 官天文學習讀이니 自木川으로 移居于賢都面 友鹿里하야 池亭村에 鑿池作亭하고 詩書自娛하니 寔公之五代祖也라. 高祖 諱는 獻이니 成均生員이요 曾祖 諱는 處訥이니 武科로 宣傳官이요. 祖 諱는 玠니 司饔院主簿요. 祖妣는 恭人 樂安 吳氏니 少時에 失所天하고 撫育三子라가 當壬辰亂하야 着男服하고 駄三子 懷家譜하고 入小白山하야 經八年而還하니 子孫之于今 奠居于斯者 實恭人不憚勞苦之力焉이라. 考 諱는 希慶이니 通政大夫 贈軍資監正이요. 妣는 淑夫人 公州 李氏라. 公이 生有異質하야 廉謹恭雅하고 與二弟로 湛樂怡怡하야 多有隣頌이라 壽職으로 贈 嘉善大夫 工曹參議하다. 葬于 賢都下石里 大淸湖邊 矢項負壬原하고 配는 有三하니 鎭川 宋氏 慶州 金氏 光山 金氏라. 皆有婦德하야 俱贈貞夫人하다. 宋氏 及光山金氏墓는 明池基壬坐云而 無表未尋하고 慶州 金氏墓는 友鹿栢子洞艮原에 有床石하고 惟 宋氏 祔壇公左하다. 有 六子五女하니 長은 彭老요 次는 昌老요 命老는 龍驤衛副護軍이요 尙老는 贈 嘉善工參이요 三老 元老며 女는 適 金道信 蔡振龜 朴世章 李彭老 吳尙國이요 餘는 不錄이라 噫라 公이 生質之美와 承習之訓으로 生平行績이 多有傳於后而 桑海累變에 文獻이 無徵하고 墓儀도 歲久磨泐하니 去而益悚이라. 於是에 宗議詢同하야 將伐石改修할새 後孫 一鎬相璇柄玉이 袖狀抄하고 訪余關寓하야 請記碑陰하니 素以識淺으로 不勘當이나 忝在族誼에 拒之亦難이라. 玆依狀而 忘拙略敍云爾라.
歲辛巳 復月 下浣 族裔 承春 謹撰 十代孫 柄勳謹書
檀紀 四三三五年 壬午二月日竪
정헌대부 동지중추부사순흥안공 휘 여순비문
위치 : 죽전리 3구 삼성골
부군의 휘는 여순(如峋)이요 자는 여창(汝昴)요 호는 녹헌(鹿軒)이시다. 우리 안씨 계파는 순흥에서 나와 고려 상호군(上護軍) 휘 자미(子美)가 시조요 회헌(晦軒) 문성공(文成公) 휘 향(珦)의 15대손이고 문과 봉의대부 예문관부제학(奉議大夫藝文館副提學) 시호 양공공(良恭公) 휘 조동(祖同)의 11대손이고 천문학습독공(天文學習讀公) 호 만희당(晩喜堂) 휘 세량(世良)의 7대손이다.
여러 후대의 고조는 사옹원주부공(司饔院主簿公) 휘 개(玠)시고, 증조는 증 통종대부군자감정공(贈通政大夫 軍資監正公) 휘 희경(希慶)이시고, 조부는 증가선대부(贈嘉善大夫) 공조참의공(工曹參議公) 휘 극효(克孝)시고, 부친은 증가선대부 공조참판겸 오위도총부부총영공(贈嘉善大夫工曹參判兼 五衛都摠府 副總管公) 휘 상로(相老)시고, 모친은 정부인으로 공주이씨(公州李氏) 광길(光吉)의 따님이신데 영조조 기묘에 아들을 낳으시니 벼슬은 정헌대부동지충추부사(正憲大夫 同知中樞府使)시고, 헌종 을해(憲宗己亥) 6월 14일 졸하시니 향년 81이다.
부인은 정부인인데 남원양씨(南原梁氏) 유하(遊河)의 따님이다. 장남 극검(克儉)은 덕을 감추어 빛나지 않아 부지런하고 검소하게 집안을 다스려 전하는 가업을 잃지 않았고 언양김씨(彦陽金氏) 원중(元重)의 따님과 혼인하여 4남을 두니 사섬(思暹), 사철(思喆), 사홍(思弘), 사희(思禧)며 내외 증현은 다 쓸 수 없다.
오호라 부군은 용모가 아름답고 성품과 법도가 정직하고 끊은 듯하여 널리 배우고 힘써 행하며 도를 들음이 매우 빨라 직책에 나아감에 강직하고 과감하며 명석하고 민첩하여 정치를 함에 정밀하고 엄격하면서도 용서함이 있어 도리를 다하였다.
산소는 우록 안산(案山) 삼성동(三省洞) 뒷자락(後麓) 장등(長燈) 부친의 산소 아래 동쪽에 부좌하였다. 두 산소의 비석이 세월이 오래 되어 닳고 갈라져 자세히 기록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다행히 신미년 종계의 자리에서 종중의 의론이 일제히 나와 정성을 다하고 힘을 합하여 비석과 문관석상을 새로운 돌로 바꾸고 이에 금년 봄에 준공하여 대략 선조의 아름다운 덕을 나타내니 후손된 자들이 마땅히 이어야 할 일이니 힘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내가 졸렬한 글과 난삽한 말로 선조의 덕을 서술하여 감히 기록하노라.
壬申 夬月 暮春 上澣
성균관전학 7대손 종호 근찬
正憲大夫 同知中樞府使 順興安公如峋碑文
府君 諱는 如峋이요 字는 汝昴요 號는 鹿軒이시니 我安이 系出順興하여 高麗 上護軍 諱 子美 爲上祖也요 晦軒 文成公 諱珦之 十五代孫야요 文科至奉議大夫 藝文館副提學 諡良恭 諱 祖同之 十一代孫也요 天文學習讀公號晩喜堂 諱世良之七代孫也라. 累傳之하니 高祖 司饔院 主簿 公 諱 玠시고 曾祖 贈通政大夫 軍資監正 公 諱 希慶이시고 祖 贈嘉善大夫 工曹參議 公 諱 克孝시고 考贈嘉善大夫 工曹參判 兼 五衛都摠府 副總管公 諱相老시고 妣 貞夫人 公州 李氏 光吉之女 男英祖朝己卯生이시고 官은 正憲大夫 同知中樞府使시고 憲宗己亥 六月 十四日 卒하시니 享年이 八十一이라 配 貞夫人 南原 梁氏 遊河之女라. 男曰 克儉은 隱德不輝하여 勤儉治家하며 不失 箕裘之業하고 娶 彦陽 金氏 元重之女하여 生 四男하니 思暹 思喆 思弘 思禧며 內外曾玄은 繁不盡錄이라 嗚呼라 府君이 形貌美晳하고 性度直截하사 博學力行하고 聞道甚早하시니 莅職에 剛果明敏하고 爲政에 精密嚴恕하시어 務盡道理하시다 衣履之藏은 友鹿案山 三省洞 後麓 長燈考兆下에 負卯祔左 雙墳이 墓儀가 歲久澌泐하야 不可詳記故로 幸詣辛未宗契席에서 宗議齊發하니 殫誠合力하야 碑碣及文官石床을 改修新石하고 玆今春에 竣工하야 略表先祖懿德하니 爲后孫者 宜是繼述之事니 可不勉哉며 可不愼哉아 余以 拙文澁語로 敍述先德하야 敢爲之記焉하노라
壬申 夬月 暮春 上澣
증통정대부 승정원좌승지 순흥안공 사광비문
위치 : 우록1리
오직 이곳 청주 서쪽 현도면 우록촌은 산자수명하고 지형이 가득 차서 가히 큰 인물의 은거지가 될 만하다. 고남산이 수려하고 주봉(冑峯)이 솟은 밑에 간좌곤향(艮坐坤向)으로 우뚝한 묘소가 있으니 바로 순흥안공(順興安公) 휘 사광(思光) 자 사길(思吉)의 옷과 신을 묻은 자리(산소)이다.
공은 고려조에 상호군(上護軍) 휘 자미(子美)로 시조를 삼았고 증손 문성공(文成公) 휘 향(珦)은 도학의 조종으로 공자의 사당에 배향하고 계속하여 문순(文順), 문숙(文淑) 문혜(文惠), 양공공(良恭公)이 나서 공훈과 관작이 함께 높았으니 드디어 동국(東國 우리나라)의 큰 가문이 되었다.
양공공이 휘 인강(仁剛)을 낳았으니 수의교위중군사직(修義校尉中軍司直)이요, 그 증손인 휘 세량(世良)은 천문학습독(天文學習讀)이니 공에게는 9세조이다. 고조의 휘는 극제(克悌)니 통덕랑(通德郞)이요, 증조의 휘는 붕로(鵬老)요, 조부의 휘는 여악(汝岳)이니 다 덕을 감추어 벼슬하지 아니하고, 부친의 휘는 취익(就益)이니 증통정대부사복시정(贈通政大夫司僕寺正)이요, 모친은 숙인 고성이씨(固城李氏)이니 사인(士人) 덕인(德仁)의 따님이다.
영조(英祖) 을유년(乙酉年)에 공을 낳으니 어려서부터 지기(志氣)가 범인에 뛰어나 위로는 선조의 유훈을 지키고 아래로는 자손의 영화를 누리어 가법을 준수하고 샘과 바위에서 휘파람 불고 시를 읊다가 모년 5월 11일 천수를 마치니 통정대부승정원 좌승지(通政大夫 承政院 左承旨)를 증직(贈職)받고, 부인은 증숙부인 경주김씨(贈 淑夫人 慶州 金氏)니 휘 수갑(壽甲)의 딸로 정숙한 예의와 규범이 여사의 풍도가 있었다. 무자년(戊子)에 나셔서 모년 3월 24일에 돌아가시니 묘는 합부(合祔)하였다. 삼남을 두었으니 장남은 곤재(坤載)요, 차남은 박재(博載)요, 삼남은 형재(燮載)니 증가선호참(贈嘉善戶參)이고, 곤재의 아들은 양삼(養三)이요, 박재의 아들은 양규(養奎), 섭재의 아들은 양일(養一)이니 가선대부 호조참판겸 동지중추부사(嘉善大夫 戶曹參判兼 同知中樞府使)인데 이로 인하여 3대가 추증이 되었다.
차남은 양오(養五)이고, 딸(사위)은 진주(晉州) 유준혁(柳俊赫)과 청주(淸州) 한문수(韓文洙)와 보성(寶城) 오화수(吳華秀)인데 이하는 생략한다. 오호라 공의 일생을 돌이켜 보건데 우러러 조상을 섬기고 자식을 기름에 부끄러움이 없고 순리를 간직하고 편안히 돌아갔으므로 유감이 없으니 가히 복이 있고 착한 사람이라 이르겠도다.
후손들이 돌을 장만하여 의범을 나타낼 때 보첩(족보)과 유지(遺誌)로 나에게 비석의 글을 간곡히 청하니 문중의 우의로 도저히 사양치 못하여 대강 요언(要言)에 의거하여 쓰다보니 혹시나 부족하거나 넘치는 죄를 범하지 않는가 두렵다.
세임진납월하한
단기 4326년 癸酉3월 族裔 承春 謹撰, 6대손 承玉 근서
敎淵 鍾淳 柄台
贈通政大夫承政院左承旨順興安公思光碑文
오직 이곳 淸州西쪽 賢都面 友鹿村은 山紫水明하고 扶輿가 磅礴하여 可히 碩人의 簻軸之地가 될만하다. 高嵐山이 秀麗하고 冑峯이 솟은 밑에 艮坐坤向으로 우뚝한 墓所가 있으니 바로 順興 安公 諱 思光 字 思吉의 衣履之藏이다. 公은 高麗朝에 上護軍 諱 子美로 肇系之祖를 삼았고 曾孫에 文成公 諱珦은 道學之宗으로 聖廡에 腏祀하고 繼續하여 文順 文淑 文惠 良恭公이 나서 勳業과 官爵이 幷峙하니 드디어 東國의 巨罰이 되었다. 良恭이 諱仁剛을 낳았으니 修義校尉中軍司直이요 三傳諱世良은 天文學習讀이니 公에게는 九世以上이라 高祖 諱는 克悌니 通德郞이요 曾祖 諱는 鵬老요 祖諱는 汝岳이니 다 隱德不仕하고 考諱는 就益이니 贈 通政大夫 司僕寺正이요 妣는 淑人 固城 李氏이니 士人德仁의 따님이다. 英祖 乙酉年에 公을 生하니 어려서부터 志氣가 凡人에 뛰어나 위로는 先祖의 遺訓을 지키고 아래로는 子孫의 영화를 누리어 家法을 遵守하고 泉石에 嘯詠하다가 某年五月 十一日에 天年을 마치니 通政大夫 承政院 左承旨를 贈職받고 配는 贈 淑夫人 慶州 金氏니 諱 壽甲의 女이다. 貞淑한 儀範이 女史의 風度가 있었다. 戊子에 生하셔서 某年 三月 二十四日에 卒하시니 墓는 合祔하였다. 三男을 두었으니 長은 坤載요 次는 博載요 次는 燮載니 贈嘉善戶參이요 坤載男은 養三이요 博載男은 養奎요 燮載男은 養一이니 嘉善大夫 戶曹參判兼 同知中樞府使인데 이로 因하여 三代가 追贈이 되었다. 次는 養五이고 女는 晉州 柳俊赫과 淸州 韓文洙와 寶城 吳華秀니 以下는 省略한다. 嘻라 公의 一生을 돌이켜 보건데 仰事俯育에 부끄러움이 없고 存順沒寧에 遺憾이 없으니 가히 福善之人이라 이르겠도다. 그 後昆들이 伐石表儀할새 譜牒과 遺誌로 나에게 賁阡之文을 懇曲히 請하니 花樹之誼에 都底코 사양치 못하여 대강 要言에 依據하여 쓰다보니 或시나 欠溢의 科罪를 犯하지 않는가 두렵다.
歲 壬辰臘月下澣
단기 4326년 癸酉3월 族裔 承春 謹撰, 6대손 承玉 근서
敎淵 鍾淳 柄台
증가선대부 호조참판 순흥안공섭재비문
위치 : 우록리 매차울
조선국의 문의현 서쪽의 우록리 매동(매차울) 뒷기슭 동북방에 무덤이 있는데 오직 나의 증조 참판공 휘는 섭재이시고 자는 화서이시며 호는 한송당이신 분의 산소이다.
우리 안씨는 계통이 순흥에서 나왔는데 첨의중찬 문성공 휘 유의 18세손이시고 예문관부제학 양공공 휘 조동의 14세손이시다. 그 뒤로 대대로 관직이 이어져 조 휘 취익은 증통정대부 사복시정이시고 고 휘 사광은 증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이시며 비는 증숙부인이신데 경주김씨 수갑의 따님이시고 병인년에 공을 낳았다.
공은 하늘로부터 받은 재질이 뛰어나 집안 살림을 꾸리고 사물을 접함에 뜻을 거느려 진심을 다하지 않음이 없었으며 절대로 꾸미는 일이 없었다. 기상이 높으시고 식견과 도량이 높고 밝으시며 사물에 통달하고 깨우치셨다.
의리를 굳게 잡으시고 지조가 단정하고 깨끗하였으며 취하고 버림에 구차하지 않으셨다. 항상 호수와 바다 같은 기상이 있으시고 명예와 벼슬자리에는 뜻에 탐탁하게 여기지 않음이 있으셨다.
그 몸은 펴져 굽히지 않으시고 그 뜻은 드날려 꺽이지 않으시니 이로써 선비와 벗들이 높이 여겨 공경하고 사랑하였다. 몸과 마음이 하는 일이 깨끗하여 흠이 없으시고 높은 문장과 뛰어난 글씨는 예로부터 또한 드물었다. 하물며 또 효도와 우애가 겸하여 지극하고 더욱 어버이 섬김에 돈독하니 이런 까닭에 지방관이 전하여 임금에게 들리게 하니 특별히 가선대부 호조참판을 추증하였다.
무오년 12월 10일에 돌아가셨다. 부인은 정부인에 추증된 부안 임씨로 상청의 따님이다. 군자를 섬김에 덕에 어긋나지 않았으며 을해 정월 18일에 돌아가셨다. 묘는 시동리 보화(보화골)동 뒷산 정남향의 언덕에 있다.
아들 둘을 두었는데 장남은 양일이고 가선대부 호조참판 동지중추부사에 추중되었으며 차남은 양우이다. 내외의 증손과 현손은 다 기록할 수 없다. 아아 공은 큰 재주와 큰 그릇으로 세상에 크게 베풀지 못하고 오래 산림에 계셔서 백층이나 되는 바위에 살아서 그 포부를 하나도 펴지 못하였으니 사람들이 다 한탄하였다.
부군은 평소에 행하신 것과 실천하신 것이 백세토록 법도를 드리웠으니 글로써 드러내 나타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논의를 일으켜 비석을 세우고 묘석에 새겨서 후손들에게 보여 영원히 사모하는 뜻을 갖게 할 뿐이다.
병오 사월 하한 증손교갑 근찬
신해 이월 일립
贈嘉善大夫戶曹參判順興安公燮載碑文
朝鮮國 文義西友鹿里 梅洞後麓負艮之原 若斧而封塋者 惟我曾祖考 參判公 諱 燮載 字和瑞 號寒松堂 府君衣履攸藏也 我安系出順興 僉議中贊文成公 諱 裕之十八世孫 藝文館副提學 良恭公 諱 祖同之十四世孫也 其後世有冠冕 祖 諱 就益 贈通政大夫 司僕寺正 考 諱 思光 贈通政大夫 承政院左承旨 妣贈淑夫人 慶州金氏 壽甲之女 以丙寅生公 天賦挺特 處家接物 無不率意任眞 絶無矯飾 氣宇軒昻 識度高明 通曉事物 堅執義理 志操端潔 取舍不苟 常有湖海氣 其於聲名祿位 意有所不屑 其身信而不屈 其志揚而不挫 以是士友推重而敬愛焉 身心事爲 瀅然無瑕 高文偉筆 古亦罕有 而況又孝友兼至 尤篤於事親 是以方伯 轉以上聞 特贈嘉善大夫 戶曹參判 以戊午 十二月十日歿 配贈貞夫人 扶安林氏 尙靑之女 事君子無違德 以乙亥正月十八日卒 墓在時東里 寶貨洞後麓 子坐之原 擧二男 男長養一 贈嘉善大夫 戶曹參判 同知中樞府使 次男 養五 內外 曾玄 不能盡記 嘻 公以宏才偉器 不得大施於世 長往山林 巖棲百層 其所抱負 一未展布 人皆恨之 府君平日 素履實蹟 垂範百世 而不可無文以表著 故發論樹碑 鐫于墓石 以示後孫 永慕之意焉
丙午 四月 下澣 曾孫敎甲 謹撰
辛亥 二月 日立
통덕랑 순흥안공 극제비문
우록1리 백자동(큰말)
부군의 휘는 극제이고 호는 삼락재이다. 성은 순흥 안씨이고 통덕랑에 올랐는데, 고려 상호군 휘 자미가 시조이시고 삼전하여 휘 향이 도학으로 공자의 사당에 제사로 모시게 되었으며 이어서 문순과 문숙과 문혜공이 세상에 빛났다.
휘 조동은 예문관 부제학으로 망복의 의리를 지켰으며 본조에 들어와서는 휘 헌이 성균관 생원이었으니 이분이 부군의 고조이시다. 증조 휘 처눌은 선전관이시고 조부 휘 개는 사옹원 주부이시고 부친 휘 희겸은 통정대부 군자감정이시고 모친 숙부인 공주 이씨는 계공랑인 만춘이 그 부친이시다. 두 아들을 두었는데 공은 둘째이시다.
장남의 휘는 극표인데 공조참의이시다.
공은 성품이 너그럽고 두터우며 세상에 숨어사는 것을 즐겨하여 숲과 샘 사이에 자취를 감추시고 맑고 깨끗하며 욕심이 적으시며 명예와 이익을 추구하지 않으셨다. 부지런하고 검소하여 집안을 다스렸으며 집안에 전해오는 업을 잃지 않으셨다.
자식과 손자를 교육하며 시경과 예기에서 전하는 것을 삼가 지키고, 친척을 어루만져 그 화목함을 지극하게 하였으며, 벗들을 대접할 때 흡족하기를 힘썼다. 돌아가시자 고남산 아래 우록리 중촌 백자동(큰말) 오른쪽 기슭인 침자원에 장례를 지냈다.
부인 공인 전주 이씨는 부덕이 순수하고 갖춰져 있어서 여사의 풍모가 있었는데 묘는 공의 묘소에 부좌하였다. 아들 넷을 두었으니 장남은 봉로인데 함양 이씨와 장수 황씨를 부인으로 삼았고 둘째는 항로인데 남원 윤씨를 부인으로 삼았고 셋째는 응로인데 진원 박씨를 부인으로 맞았으며 넷째는 붕로인데 전주 이씨를 부인으로 맞았다.
오호라 부군은 천성이 높은 관직으로 마음에 두지 않았으며, 다만 조상을 잇고 후손에게 물려주는 것을 힘써서 그 후예가 힘입어서 계단 아래에 거하는 자들이 부군이 내린 것이 아님이 없었다.
돌아가신 뒤 수 백년이 지나서 묘도가 오히려 없어졌으니 어질지 못함이 무엇이 이보다 심하겠는가. 다행이 금년 겨울에 종중의 의론이 일제히 일어나서 대략 의물을 갖추어서 그 내용을 기록하여 뒤에 오는 사람들이 예를 갖출 것을 마련해 놓을 따름이다.
단기 4319년 병인 대한절에 9대손 기호는 삼가 짓고 9대손 준호는 삼가 쓴다
정묘 2월 일립
석인 찬조명단 경호 철호 의호 교연 승래 승빈 승철 승각 상필
通德郞順興安公諱克悌碑文
府君 諱 克悌 號三樂齋 姓安順興人 階通德郞 高麗上護軍諱子美 爲上祖 三傳 諱 珦 以道學腏祀聖廡 繼以文順 文淑 文惠 奕世蟬娟 有諱 祖同 官藝文館副提學 守罔僕義 入本朝 諱 獻 成均生員 寔府君之高祖也 曾祖 諱 處訥 宣傳官 祖 諱 玠 司饔院主簿 考 諱 希慶 通政大夫 軍資監正 妣 淑夫人 公州李氏 啓功郞 萬春 其考也 擧二男 公居二 長 諱 克孝 工曹參議 公性寬厚 遯世樂之 晦跡林泉 淸淨寡慾 不求名利 勤儉治家 不失箕裘之業 敎育兒孫 謹守詩禮之傳 撫親戚極其雍睦 接士友務盡款洽 及卒葬于高嵐山下 友鹿里 中村 栢子洞 右麓下 枕子原 配 恭人 公州李氏 婦德純備 有女史風 墓祔 生四男 長鳳老 娶咸陽李氏 長水黃氏 次鶴老 娶南原尹氏 次鷹老 娶珍原朴氏 次鵬老 娶全州李氏 嗚呼 府君之天性 不以顯爵 有干於心 只以承先貽 後爲務 孱裔之賴 居階下者 莫非府君之賜也 沒後數百稔 墓道尙闕 不仁孰甚 幸玆今冬 宗議齊發 略表儀物 而錄其梗槪 以備來人之矜式焉
檀紀 四千三百十九年 丙寅大寒節 九代孫 基鎬謹撰 九代孫 俊鎬謹書
丁卯 二月 日立
石人 贊助名單 京鎬 哲鎬 義鎬 敎淵 承來 承斌 承喆 承珏 相弼
문묘직원순흥안공석렬비문
위치 : 하석리 노봉
난공자가 말하기를 임금과 스승과 아버지는 한결같이 섬겨야 한다고 하였는데 문당 안선생은 내가 한결같이 섬긴 스승이시다. 옛날 문의현 서쪽 현도 하석리 노봉 문암 강엄산 선영의 뒤 북쪽에 무덤을 만든 것이 고 문묘 생원이신 선생의 묘소이다.
계파는 순흥에서 나왔으며 호는 문당이시고 휘는 석렬이시며 자는 경무이시다. 철종 임술년에 태어나셨다. 고려 신종조에 상호군이신 휘 자미가 시조이시고 회헌 선생 휘는 향이시고 첨의중찬이시며 시호는 문성공이신데 성학을 처음으로 밝히셨으며 문묘에 배향되었다. 공자의 76세 손인 세습 연성공 공령이 선생에게 안자라는 존칭을 주었다.
휘 조동은 예문관 부제학으로 시호는 양공공이신데 16대조이시다. 천문학습독공인 휘 세량은 12대조이신데 가선대부 공조참의에 추증되었으며 휘 극효는 7대조인데 가선대부 공조참판에 추증되었다. 휘 상로는 6대조인데 정헌 동지중추부사이시고 휘 여순은 5대조이다. 여러 번 이어져 고조는 휘 취검이시고 증조는 휘 사철이시고 조부는 휘 필재이시고 부친은 휘 양수이신데 무술년에 태어나셨다.
공은 덕을 숨겨 빛내지 아니하시고 부지런하고 검소함으로 집안을 다스리셨다. 모친은 해주 오씨로 갑오생이시고 태수의 따님이시다. 아들을 낳았는데 용모가 단정하고 풍채와 정신이 빼어나고 밝았으며 재주가 범인을 초월하였다. 나이가 13~15세에 이르자 경사자집을 관통하지 아니함이 없어서 조예가 일찍 이루어졌으며 사림에서 높이고 허락하였다.
희라. 당시에 섬 오랑캐의 침략을 당하여 예의와 윤리와 강령이 땅을 쓸듯이 없어지고 어둡고 깜깜했으나 선생께서는 가르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재주에 따라 사람을 가르쳐 각각 그릇을 이루게 하였으니 문도들이 거의 수천명이나 되었다.
우리 유학에서 잇고 서술하는 공로가 어찌 작다고 말할 수 있으리요. 위대함이 또한 아름답도다. 선생은 정축년 7월 1일에 돌아가셨으니 향년 76이시다. 부인 단인 동래 정씨는 풍조의 따님이신데 무오년에 태어나서 갑자년 11월 25일에 돌아갔으니 향년 67이시다. 묘는 공의 무덤 오른편 서북쪽에 있다.
천성이 단정하고 한결같았으며 깊이 있고 고요하며 가풍을 이루었다. 아들 셋을 두었는데 장남은 교하이고 다음은 교은과 교주이다. 손자와 증손과 현손은 번거로워 다 기록하지 못한다.
하루는 손자 종호가 장차 돌을 준비하여 세우고자 나를 찾아와 글을 부탁하여 표창하고자 하니 내가 그 정성과 효성에 감격하여 드디어 사양하지 못하고 간략히 서술하여 명한다.
문산은 높고 높으며
금강물은 남실남실하네
선생의 풍도는
산처럼 높고 물처럼 길어라
문채(文彩)로 교화된 강산에
섬 나라 오랑캐가 쳐들어왔어도
우리 유학을 잇고 서술함을
오직 공이 행하실 수 있었으니
학문을 쌓으시고 문장을 씨 뿌렸네
평생에 하신 일이
문도가 수천명이었네
책상을 지고 발꿈치를 이었으니
선생의 학덕이
태산과 북극성처럼 바라보이네
무덤으로 모신 곳은
석문의 길한 언덕이라
길인이 점을 쳐 길하니
하늘이 길하고 상서로움을 내리셨네
덕으로써 자손에게 남긴 것이
그늘처럼 무궁하리로다
문당 안선생이 입으로 불러서 시를 짓고 문생에게 보이심
한 번 만나 친해져서 맑은 구름이 집안 가득 단란하니
아득히 조용히 앉아서 푸른 산봉우리를 마주하네
뜰에 높은 손님을 맞이하여 때떄로 서로 말하고
책상에 기이한 책을 꽂아 놓고 문득 펼쳐보네
긴 대숲 사이 오솔길이 열리니 마땅히 나막신이 미치고
맑은 시내 옥같이 깨끗하니 갓을 튕길 수가 있네
화수회가 이루어지니 연꽃 옷이 많고
우리 가문이 편안히 거처할 까닭이 있도다
광복후초계유중추 문묘전교 부안후인 문생 임원철 근술
불초손 종호 차필서
文廟直員順興安公奭烈碑文
欒公子有言曰 君師父事之如一 文堂安先生 我事一之先師也 舊文治 西賢都 下石里 魯峯 門巖 剛嚴山 先塋後 負丙而封省 故文廟直員 先生衣屨之藏 系出順興 號文堂 諱 奭烈 字敬武 哲宗 壬戌生也 高麗 神宗朝 上護軍 諱子美 爲上祖 晦軒先生 諱珦 僉議中贊 諡文成公 爲倡明聖學 從祀文廟 孔子 七十六世孫 世襲衍聖公 孔令 貽先生尊稱安子 有諱 祖同 藝文館 副提學 諡良恭公 十六代祖 天文學習讀公 諱 世良 十二代祖 贈嘉善工曹參議公 諱 克孝 七代祖 贈嘉善工曹參判公 諱 尙老 六代祖 正憲同知中樞府使 諱 如峋 五代祖也 累傳之而高祖 諱 就儉 曾祖 諱 思喆 祖 諱 弼載 考 諱 養壽 戊戌生 隱德不輝 勤儉治家 妣海州吳氏 甲午生 泰守之女 生男 容貌端正 風神秀明 才華超凡 年至十三五 經史子集 未不貫通 造詣夙就 士林之推詡矣 嘻 時當島吏之侵 禮義倫綱 掃地昏黑 先生敎授不倦 隨才治人 各自成器 門徒幾至數千 斯文繼述之功 豈云小哉 偉亦休哉 先生 丁丑七月一日卒 享年七十六 配端人 東萊 鄭氏 豊朝之女 戊午生 甲子 十一月二十五日卒 享年六十七 墓公兆右側巽坐 天性端一淵靜 有形家風 生三男 長敎夏 次敎殷敎周 孫曾玄繁不盡錄 日令抱琮鎬 甫將伐石樹阡 謁余爲文 而表章之 余感其誠孝 遂不辭 而略敍爲之 銘曰
文山矗矗 錦水溶溶
先生之風 山高水長
文化江山 島夷侵攻
繼述斯文 惟公能行
績學種文 生平事行
門徒數千 負笈接踵
先生學德 山斗如望
衣屨之藏 石門吉岡
吉人占吉 天降吉祥
以德遺孫 如蔭無窮
光復 後 初 癸酉仲春 文廟典校 扶安後人 門生 林原喆 謹述
不肖孫 琮鎬泚筆書
安文堂先生口號示門生
傾蓋晴雲滿戶團
悠悠默坐對靑巒
庭迎高客時相話
案揷奇書動輒看
修竹逕開宜屨及
淸溪玉潔可冠彈
成花樹會多荷衣
有以吾家爰處安
光復後初癸酉仲秋 文廟典校 夫安后人門生林原喆謹述
不肖孫琮鎬泚筆書
직원 순흥안공 교창 비문(直員 順興安公 敎昌碑文)
위치 우록 1구
고려시대 주자학을 중국으로부터 전례한 문성공 안향(안유) 21대 손으로 부 익열(翼列), 모 진주유
씨 나이에 차남으로 1881년(임오) (음) 12월 2일 우록리 출생하시었다.
호는 만운(晩雲), 자녀로는 부인 밀양박씨 사이에 아들 진호(鎭鎬), 성호(聖鎬), 필호(弼鎬), 3형제를 두고 사위 영흥민씨 완식(完植)이다. 1964년 8월 25일 83세를 일기로 생을 마치셨으며, 우록 1구 고봉재 선영에 안장되어 계시다.
어려서부터 면학에 전념하시어 학문에 조예가 깊으셨으며, 일제에 탄압 항거하시어 주민인권 보호에 앞장서 오셨다. 1937년 (음) 8월부터 1940년 (음) 7월까지 3년간 문의향교 직원(현재 전교-典校)을 역임하시면서 유교사상 전파에 힘쓰셨고 특히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을 실천함에 유림들의 모범이 되셨다. 그 후 서당에서 후진양성에 힘쓰셨고 충효사상을 고취하시는데 힘쓰셨다.
친척과 화목하라는 가훈에 의거 효를 바탕으로 부모와 조상에 효성이 지극하시어 주위로부터 효자라고 칭송이 자자하시었으며 조상의 묘석 제작에도 공로가 많으셨다고 전해오고 있다.
1968년 (음) 2월
오희국 글
순흥안공 우성 휘 성호비문(順興安公又省諱晟鎬碑文)
위치 : 우록3리 갈골 이장산
오호라 ! 선비가 세상을 만나고 만나지 못 하는 것은 운명이도다. 광세제민(匡世濟民)의 큰 뜻을 품고 성학(聖學 성인의 학문 즉 유학)을 돈독(敦篤)히 연찬(硏鑽 깊이 연구)하며 공경(恭敬)과 겸손(謙遜)으로 자신을 다스렸어도 올 바른 세상을 만나지 못해 끝내 그 뜻을 펴지 못하고 초부어옹(樵夫漁翁 나무꾼과 어부 즉 평범한 사람)으로 그 종적(蹤迹)을 감춘 이가 있으니 그가 바로 우성공(又省公)이다.
순흥 안공 휘 성호(順興安公 諱晟鎬)는 시조(始祖)인 고려조(高麗朝) 상호군공 휘 자미(上護軍公 諱子美)의 26세손으로 서기1898년 무술년(戊戌年) 3월18일 충북 청원군 현도면 죽전리(忠北 淸原郡 賢都面 竹田里) 삼성동(三省洞 삼성골)에서 부친 휘 교진공(父諱敎震公)과 모친 보성오씨(母寶城吳氏)의 5남 1녀중 장남(長男)으로 태어나 서기1957년 정유년(丁酉年) 12월 29일 60세로 졸(卒 돌아가심)하였고 부인 보성오씨(配寶城吳氏)는 1895년 을미(乙未) 5월 9일에 부친 휘 연후공(父諱連後公)의 장녀로 태어나 1966년 병오(丙午) 윤 3월 13일 72세로 졸하였다.
공의 22대조 할아버지(祖考) 문성공 휘 향(文成公 諱珦)은 우리나라에 성리학(性理學)을 전래(傳來)하여 유학(儒學)을 크게 떨쳤고, 12대조고(祖考) 양공공(良恭公)은 훌륭함이 조후 휘 향(祖父 諱珦)과 같다고 하여 고려(高麗) 우왕(禑王)에게 조동(祖同)이란 이름을 받고 우왕이 폐위(廢位)당하자 자진(自盡)하여 절개를 지켰다.
14대조고(祖考) 휘세현공(諱世賢公)은 이조(李朝)에서 제수(除授)한 진천현감(鎭川縣監)을 뿌리치고 대나무 심어 고려조(高麗朝)에 대한 절개를 지켰다 하여 그곳이 죽전리(竹田里)가 되었고, 조(祖 할아버지)는 덕제공 휘 윤기(德薺公 諱閏基)이다.
공은 곧고 순후(醇厚)하고 너그러운 천품으로 자신을 갈고 닦으며 다른 사람과 다투지 아니하고 마음이 평탄하고 활달하여 본분과 기개를 잃지 않았다.
공의 호 우성(又省)은 증자(曾子)가 하루 세 번 반성(反省)한다는 말에서 취한 것이고, 자(字)는 대경(大京)이다. 공은 우록매동(友鹿 梅洞 우록리 매차울) 의 안동서숙(安洞書塾)에서 흔몽교동(訓蒙敎童)으로 후학(後學) 지도에 정성을 다 하다가 사람과 세상을 이롭게 하고자 한의사면허(韓醫師免許)를 취득한 다음 수많은 인명을 구제하며 마음의 병은 점술(占術)로도 치료하였다.
공의 장남 승갑(承甲)은 독립운동을 한 우국지사로 고향발전에 공이 많아 현도면 주민이 현도복지회관 앞에 기적비(記績碑)를 세우고 그의 호를 따 낙산장학회(諾山獎學會)도 설립하여 뜻을 기리고 있으며 은진송씨(恩津宋氏)와의 사이에 충청대학(忠淸大學) 교수 용근(龍根), 봉춘(鳳椿), 학상(鶴相)의 3남 및 4녀를 두었고, 장손자 용근은 보성오씨(寶城吳氏)와의 사이에 남 희신(熙信)과 희일(熙一)을 두었다.
공의 차남 승두(承斗)는 화순최씨(和順崔氏) 사이에 남 심근(深根)과 여(女)를 두었고, 공의 (女)는 초등교육자(初等敎育者)인 밀양 박경수(密陽 朴慶洙)와의 사이에 4남을 두었다.
공은 평소에 많은 시(詩)를 지었는데 산일(散逸)하여 다 전하지 않으나 다행히 장자 승갑(承甲)이 필사본(筆寫本)으로 간행한 유고문집에 시율(律詩) 백여수와 공의 장례에 인근 석학명사(碩學名士)들이 지은 만사(輓詞) 65수가 실려 있다.
공의 시는 대우(對偶)가 뛰어나고 표현이 섬세(纖細)하며 곡진(曲盡)하여 참으로 높은 시도(詩道)를 이루었고 만사는 과거의 장례문화에 대한 소중하고 수준높은 자료이라 많은 사람에게 읽히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던 중 마침 장손자 용근의 부탁으로 1999년 효일문화사(曉日文化史)에서 우성시고(又省詩稿) 및 만어집(輓語集)이라는 이름으로 유고(遺稿)를 국역(國譯) 출판하여 공이 품고 있던 바를 후손들에게 전하게 되었으며 그를 인연으로 장손자 용근이 본 비문(碑文)도 청하므로 미력하여 사양하다가 평소 흠모(欽慕)하던 공의 덕과 발자취를 기려 간략(簡略)히 서한다.
서기 2002년 임오(壬午)
대전대학(大田大學) 겸임교수(兼任敎授) 문학박사(文學博士)
이규춘 근찬(李奎椿謹撰) 장손자 용근 세움(龍根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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