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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렴 전설
양공공 할아버지 산소 밑에는 북창 정렴이 살았던 [북창네]라는 동네가 있다.
조선 인종이 죽고 문정왕후 아들 명종이 즉위하자 정렴의 아버지 정순붕은 문정왕후(여인천하의 전인화) 오빠 윤원형(여인천하의 이덕화)의 편이 되어 1545년 을사사화(乙巳士禍)를 일으켜서 명종에게 걸림돌이 되는 100여명을 숙청하여 우의정까지 올랐다. 윤원형은 소실 난정이(여인천하의 강수정)를 시켜 정부인을 독살하고 난정이를 정부인으로 삼고 친형도 귀양보내 죽였다.(기묘록보유 정순붕전, 고봉집 논사록, 석담일기 명종대왕, 연려실기술 명종조고사본말 을사사화, 윤원형이 쫓겨나서 죽다)
정렴은 노산리 진주유씨 유인걸(柳仁傑)의 사위인데 이조판서 유인숙(柳仁淑)은 유인걸의 동생이므로 정렴의 처삼촌이다. 정순붕은 사돈인 이조판서 유인숙을 죽이고 재산과 노비를 빼앗았다. 그래서 정렴은 눈물을 흘리며 아버지를 말렸으나 정순붕은 듣지 않고 아들인 정렴도 죽이려고 하였고 양자로 간 정렴 동생 정현(鄭礥)도 아버지와 합세하여 정렴을 죽이려고 하였다(연려실기술, 을사전문록, 해동잡록 정렴).
북창정렴과 노산리 이조판서 유인숙과의 관계
유문통(柳文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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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인숙(柳仁淑) 유인첨(柳仁日詹) 유인걸(柳仁傑) 유인귀(柳仁貴) 정순붕(鄭順朋)
(이조판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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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희증(柳希曾) | | | | |
유희안(柳希顔) 유희전 유희순 女김응서 女북창정렴
유희맹(柳希孟) (柳希荃) (柳希荀) (金應瑞) (北窓鄭磏)
유희민(柳希閔)
女청화수(淸化守, 세종대왕 손자)
그래서 정렴은 세상을 탄식하며 처갓집 동네 장산(獐山, 노산리)으로 피신해 은거하면서 도를 닦고 학문을 연마하다 1549년에 죽었다. 그래서 노산리에는 정렴이 살았던 북창네(정렴의 호)라는 동네가 있고 50여년 뒤에 문의현 선비들은 정렴이 문의현 장산(獐山 노산리. 양공공 산소 밑)에서 은거하다가 죽었다고 하여 노봉서원을 세우고 정렴을 배향하였다.
정렴은 아들 지복(之復)과 지림(之臨)을 두었는데, 둘 다 아들을 낳지 못하여 지복은 사촌동생의 아들을 양자로 두었다. 지림은 딸만 낳았는데 안동 권정기(權正己)에게 시집갔다. 지림의 산소는 노산리 용뱅이에 있다. 권정기는 이조판서 권극례(權克禮)의 아들로 노산에 살았다. 권정기의 손자가 하석리 효자각에 모셔져 있는 권회(權恢)인데 후손인 하석 2리의 안동권씨들이 정지림을 외손봉사하여 세향 올려 왔다. 정지림은 벼슬을 하지 못하였는데 할아버지 정순붕이 무고하게 을사사화를 일으켰다고 하여 조정에서 자손들의 과거를 금지시켰기 때문이다(기묘록보유 정순붕전).
노산리 북창네
북창정렴아들 설학공 정지림 비석
(1) 용호비결은 조선선도와 동의보감의 바탕
정렴이 어려서 중국에 갔을 때 봉천전(奉天殿)에서 만난 중국 도사가 조선의 선도를 깔보자, “우리 나라는 삼신산(三神山)이 모두 있어서 낮에도 도사가 승천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장생불사하기도 하는데 이런 일은 우리나라에서는 늘상 있는 일이라 신기한 일이 아니다.”
말하였다. 그러자 중국도사가 놀라면서
“그런 일이 어떻게 있을 수 있겠는가?”
그러자 정렴이 황정경(黃庭經)과 음부경(陰符經)을 꺼내서 옷을 가르키니 기운이 불타는 모양으로 차례차례 하늘로 올라갔다. 그러자 중국도사는 공손히 물러갔다(동국명현록).
용호비결은 정렴이 어려운 중국 도서(道書)에 의존하여 공부하지 않도록 조선선도를 새롭고 쉽게 쓴 책이다. 용호비결은 가장 오래되고 최초인 선도 책이면서 중국 이외의 지역에서 처음 쓰여진 책으로 선도 수행자들의 기본 교재가 되었다. 그리고 용호비결의 조선 의학사상은 허준(許浚)의 동의보감(東醫寶鑑) 원리에 큰 영향을 미쳤다. 동의보감은 정렴의 막내 동생 고옥(古玉) 정작(鄭碏)도 참여하여 양생술 이론을 제공하였다.
정렴은 고질병 있는 사람들을 많이 고쳤다. 정렴이 말하기를
“의(醫)란 사람 뜻에 달려 있는 것이니 마땅히 음양과 춥고 더움을 살펴서 증세에 따라 약을 써야 하는데 의사라는 사람들이 진편(陳編 옛날부터 내려오는 처방)에만 매달려서 생각이 편협하여 변통을 알지 못하여 오히려 증상을 거역하는 처방을 하여 효과를 보지 못하고 있다.”라고 하였다(동국명현록).
아무리 좋은 약과 방법을 써도 낫지 않던 고질병환자를 보고 정렴은 띠풀 한 줌을 갈아 볕에 말려서 복용시 키자 그 사람은 병이 았다고 한다(동야운집).
정렴의 의술은 널리 알려져서 어의로 인종도 진맥하였다(조선왕조실록).
(2) 단학을 창시
정렴은 몸이 약하였는데 몸을 튼튼하게 하기 위하여 단전호흡법인 단학(丹學)을 만들었는데 단학을 수련하는 사람들은 정렴이 지은 용호비결(북창비결)을 교과서로 하고 있다.
어느 날 정렴이 집에서 연단(修丹)을 하며 화후지법(火候之法)을 익히고 있을 때 손님이 찾아왔다. 손님은 몸이 찬 사람인데다 추운 겨울이라 추위까지 더하여 고통을 참을 수 없었다. 그러자 정렴은 창고에서 철편을 꺼내 겨드랑이에 끼고 연단을 하여 따뜻하게 하여 손님에게 주었다. 손님은 철편을 겨드랑이에 끼웠는데 철편은 난로와 같이 뜨거워서 땀을 비오듯 흘렀다(동야운집).
(3) 신의 능력을 지닌 정렴
정렴은 나면서 글을 알고, 대낮에도 그림자가 없고 어릴 때부터 신(神)과 통하고, 가까이는 동리 집안의 사 소한 일부터 멀리 사이팔만(四夷八蠻) 밖 바람 소리와 개소리ㆍ새소리까지 귀신처럼 잘 알고, 모든 술법을 알았다(오주연문장전산고, 조선왕조실록 선조 28년(1595) 1월8일, 동해이적).
장유가 정렴을 위해 지은 글에 “한 번 산에 들어가 며칠 동안 마음을 가다듬고 수양한 다음 내려올 때면 산 아래 100리 간에 일어난 일을 자기 눈으로 직접 본 것처럼 훤히 알아 맞혔다.”고 하였다. 성수익(成壽益)은 정렴은 풍모부터 다른 신인(神人)이라고 하였다.
정렴은 총명하여 한두 번 글을 읽으면 모두 외었고, 자라서는 천문ㆍ지리ㆍ음악ㆍ의약ㆍ복서ㆍ산수ㆍ한어(漢語)에 달통하여 배우지 않고도 잘 하였다. 그래서 어렸을 때 아버지를 따라 중국에 가서 중국인과 통역 없이 말을 하자 모두 놀라며 “천하의 기이한 재주다.” 하였다(동해이적).
정렴의 신기(神氣)는 세 살부터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특히 소리로 표현하는 음률(音律), 병든 자의 생과 사를 좌우하는 의약(醫藥), 천기를 내다볼 수 있는 천문지리, 복서술(卜筮術)등에 심취하여 이십여 세에 이미 학문이 최고에 이르렀다. 그래서 그림자 없는 귀신이라는 소리를 들었다(동각잡기 선원보록, 연려실기술 명종조의 유일, 을사전문록 정렴전, 포저집 북창고옥집 발문, 해동잡록 정렴, 계곡선생집 서 북창고옥 두 선생의 시집, 기언 청사열전, 송기수, 동국명현록).
(4)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예언
정감록으로 알려진 정렴이 지은 ‘북창비결’에서는 말세가 되면 ‘서남쪽의 독이 궁궐에까지 미칠 것”이라고 했는데 제주도와 전라남도에서 일어난 동학란과 이재수의 난을 예언한 것이다.
그리고 ‘쥐의 아비 시체가 온 나라에 누워 있고, 뱀의 형 집 연기가 천리 밖에서 날 것이다.’라고 한 것은 쥐의 해 일년 전 용해에 일어난 임진왜란과, 쥐의 해 병자호란을 예언한 것이다.
환란이 닥치면 ‘여덟 줄의 백성이 다섯 달 동안 시체로 쌓일 것인데 그 때 소나무와 잣나무를 심을 것이요, 제비와 기러기가 오고가는 시절이다.’하였는데 ‘소나무와 잣나무’는 임진왜란 때 명나라군을 이끌고 온 이여송(松)과 이여백(栢) 형제를 말하고 ‘제비와 기러기가 가고 오는’ 것은 병자호란 이후 포로와 사신들의 연행길(燕行 중국길)이 잦아진다는 예언인데 모두 맞았다.
(5) 다른 나라 말을 배우지 않고도 유창
정렴은 열네 살 때 사신인 아버지를 따라 중국에 가서 중국말을 배우지 않았는데도 중국 사람들과 거침없이 대화를 하였다. 또한 유구국(琉球國: 오끼나와) 사신이 찾아오자 유구국 말로 대화를 하니 유구 사신은 정렴을 보자 놀라서 절을 하고 말하였다(장유).
“고국에서 점을 치니 진인(眞人 신이 된 사람)을 만날 것이라고 했는데 당신이 그 분이오.”
하였다. 예로부터 '진인은 그림자가 없다.'고 하였는데 정렴은 그림자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구 사신은 정렴에게 간청하여 주역(周易)을 배웠다. 이때 소문을 듣고 각국 사신들이 찾아와서 정렴에게 말을 걸었는데 정렴이 각나라 말로 각각 응대하자 모두 경탄하고 천인(天人)이라고 하였다(삼현주옥, 동야운집).
어떤 사람이 정렴에게, “새와 짐승의 소리를 알아듣는 이가 있듯, 다른 나라의 말소리도 알아듣는 일은 있을 수 있지만 말까지 할 수 있다는 것은 이상하오.” 하자 정렴은 “나는 듣는 것뿐 아니라 말도 할 수 있게 된지 오래요.”라고 하였다. (연려실기술, 명종조의 유일, 北窓集, 임하필기 문헌지장편, 지화집)
(6) 앉아서 200리 밖의 일을 아는 정렴
정렴은 산에 들어가 선가(禪家)의 육통법(六通法)을 연마하여 사흘 만에 산 아래 백 리 바깥의 일을 앉아서 아는 경지에 이르렀다. 그래서 산에 있을 때 산 밑에 있는 사람들에 대하여 “아무개 집에서는 지금 무슨 일을 한다.” 하여 사람들이 확인해 보면 그 말이 맞았다(동각잡기 선원보록, 해동잡록 정렴, 동해이적, 장유, 송기수, 동해이적, 동국명현록, 동야운집).
어느 날 정렴네 집에서 종을 시골로 심부름 보냈는데 돌아올 때가 지났는데도 오지 않자 정렴에게 어찌된 일인지 알아보라고 했다. 정렴이 잠시 생각하더니 말하였다.
“그 녀석이 고개를 넘어오다가 양반 행차에 불경하여 붙들려서 맞고 있는 중이요.”
종이 돌아오자 집안 사람들이 사실인가 확인하였더니 종이 “맞습니다.” 하였다. 온 집안사람들은 탄복하였다(을사전문록 정렴).
정렴이 14살 때 아버지를 따라 중국에 가서 신통한 능력을 보이자 술법을 잘 하며 객관(客館)에서 품팔이로 땔 나무를 나르는 사람이 말하였다.
“선생은 만물에 신통한데 도덕경(道德經)에 ‘문을 나가지 않고도 천하의 일을 다 안다.’고 한 말이 선생을 이르는 말인가 합니다.”(기언 청사열전)
(7) 동생이 후손을 이을 것을 예언
정렴은 6형제 중 장남이었는데 셋째 동생인 정첨(鄭 石詹) 부인인 제수 구씨(具氏)를 유별나게 존중하였다. 사람들이 이유를 물었다.
“우리 집안은 모두 제수씨의 자손이 될 것인데 어찌 존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정렴 말 대로 형제들은 정첨 외에는 자손을 두지 못하여 모두 정첨의 아들을 양자로 들여서 대를 이었다(송기수, 유어우몽인).
(8) 소주잔이 커질 것을 예언
판서 홍성민(洪聖民)은 어렸을 때 정렴과 함께 술을 마셨는데 그 때 사기로 만든 소주잔은 규정에 따라 매우 작게 만들어져 있었다. 정렴이 홍성민에게 잔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이것은 작은 잔에 불과하지만 점점 커져서 큰 종이 될 것인데 나는 자네가 대비하는 것을 보지 못할 것이다.” 라고 하였다.
그 후 세상이 소주마시는 것을 숭상하게 되어 소주잔이 커져서 큰 종을 사용하게 되어 작은 사기 소주잔은 아예 만들지 않게 되었다(유어우몽인).
(9) 수중 명당
정렴의 삼촌이 죽자 아들인 사촌이 아버지 묘자리를 부탁하였다. 정렴이 사양하다가 정해주기는 하였으나 묘자리에 물이 나왔다. 그래서 묘를 쓰지 않으려고 하였으나 정렴은 거기에 묘를 쓰라고 고집하였다.
그러면서 정렴이 큰 돌을 몇 개 채워 넣고 좋다고 산소를 쓰라고 하자 억지로 장례를 마쳤는데 내키지 않은 사촌집 사람들의 원망이 컸다. 그러나 후손들은 산소 안에 채워 넣은 돌의 수만큼 자손들이 문과에 급제했다. 이것은 수중명당(水中明堂)으로 무덤 안에 넣은 돌의 수만큼 후손들이 출세를 하는 대혈(大穴)이었던 것이다.(한국구비문학대계, 海東異蹟)
(10) 구렁이의 복수
정렴은 조카들이나 다른 아이들은 귀여워하면서도 자기 자식들을 귀여워하지 않아서 아내의 불평이 심했다. 그런데 어느 날 자식들이 울면서 갑자기 모두 죽어버렸다. 부인과 사람들이 살펴보았더니 그것은 커다란 구렁이들이었다. 정렴은 결혼 전에 길을 가다 우연히 구렁이를 죽인 적이 있는데 그 구렁이가 복수하려고 자식들로 둔갑하여 태어났다. 정렴은 이런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아이들을 귀여워하지 않았고 스스로 정체를 나타내서 죽도록 수를 써 놓은 것이다.
정렴은 자손이 아들 대에서 끊겼다. 그래서 이런 전설이 생겼는데, 아버지가 아들을 죽이려고 한 것에 대하여 비통해 하며 가족의 의미를 상실하여 스스로 대가 끊기도록 하였다고 한다.
(11) 수명 연장
정렴의 친한 친구(정승을 지낸 尹斗壽라고 함)가 병에 걸려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는데 백약이 무효였다. 그의 아버지는 정렴이 신통하다는 것을 알고 정렴을 찾아와 울면서 물었다.
“여보게, 내 아들이 얼마나 더 살 수 있겠는가?”
“명이 다하여 40살을 넘길 수 없습니다.”
친구 아버지는 정렴의 손을 잡고 울면서 매달렸다.
“여보게, 자네라면 무슨 방법이 있을 것이 아닌가. 제발 내 아들을 살려 주게.”
정렴이 친구 아버지를 측은하게 바라보며 한참 생각하다가 말하였다.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려면 제 수명에서 10년을 떼어 주어야 합니다.”
“그래도 괜찮겠는가? 방법을 알려 주게.”
“제가 시키는 대로 하십시오. 밤 삼경에 남산에 올라가면 검은 옷을 입은 스님과 빨간 옷을 입은 스님이 있을 터인데, 아드님 수명을 연장하여 달라고 애원하면 화를 내며 쫓아낼 것인데 물러나면 안 되고 지팡이로 쳐도 피하지 말고 맞으면서 천만번 빌고 또 비십시오. 그러면 될 것입니다.”
친구 아버지는 정렴이 시키는 대로 밤에 남산 꼭대기에 올라가자 정렴 얘기대로 스님 둘이 있자 시킨 대로 울면서 사정을 하였다. 그러자
“지나는 길에 잠시 쉬는 틈인데 누가 알고 이런 일을 시켰는가? 어쨌건 그대의 아들은 수명이 그 뿐이므로 어떻게 할 도리가 없으니 돌아가게.”
그러나 물러나지 않고 바짓가랑이를 잡고 계속 애원하자 스님이 지팡이로 치면서 떨어지라고 하였으나 죽기를 각오하고 매달리며 애원하였다. 한참을 때려도 물러나는 기색이 없자. 검은 옷을 입은 스님이 빨간옷을 입은 스님을 보고 말하였다.
“이것은 필시 정렴이 시켜서 한 일이라 괘씸하지만 이 자의 정성이 지극하므로 정렴의 수명을 10년 줄여서 이 자의 아들에게 주면 어떨까.”
“그러면 될 것이네.”
검은옷을 입은 스님이 소매에서 책을 꺼내어 빨간옷을 입은 스님에게 주자 빨간 옷을 입은 스님은 달빛에 붓으로 수명을 고쳐 적고 말하였다.
“그대의 아들은 지금부터 10년을 더 살 것이니 돌아가되 정렴에게 다시는 천기를 누설하지 말라고 전하라.”
하며 두 스님은 홀연히 사라졌다.
검은 옷을 입은 남두육성(南斗六星)의 정기이고 빨간옷을 입은 스님은 북두칠성(北斗七星)의 정기였다.
정렴은 천기를 누설한 죄로 44살까지 밖에 살지 못하였다. (동야운집, 한국구비문학대계, 海東異蹟)
(12) 새와 짐승의 말을 알아들음
정렴은 새와 짐승이 하는 소리를 알아듣고 산 아래 사람이 하는 일을 알고 “그 집에서 무슨 일을 한다.” 하면 맞았는데 선도(禪道)의 도술이다(국조기사).
정렴이 잔칫집에 갔는데 새들이 그 집 술은 무덤가에서 거둔 밀로 빚었다고 지저귀었다. 정렴이 그 얘기를 하자 원님은 사람을 미혹시킨다고 정렴을 잡아갔는데 새가 원님이 사생아라는 것을 알려 주자 정렴이 귓속말로
“새가 원님이 사생아라고 하는데 사람들 앞에서 말씀드릴까요?”
원님은 그 사실이 알려질까 염려하여 정렴을 풀어주었다.
정렴이 산을 지나는데 까마귀가 ‘대육대육(大肉大肉)’하며 모여들었다. 정렴이 듣자니
“사람 시체를 먹자는 소리인데, 사람이 이런 데서 까마귀밥이 되면 오죽 비통하겠나. 훠이 훠이.”
정렴은 까마귀를 쫓으면서 보니 칼에 찔려 죽은 사람이 있었다. 그때 사람들이 몰려오면서 시끄러워졌다.
“여기 사람이 죽어 있는데 저 사람 밖에 없으니 저자가 죽인 것이 분명하다.”
정렴은 살인 누명으로 끌려갔다. 정렴이 판관에게 말하였다.
“저는 새가 하는 소리를 알아듣는 능력이 있어서 까마귀 소리를 듣고 죽은 사람을 묻어 주기 위하여 간 것이지 제가 죽인 것이 아닙니다.”
“그럼 네가 어떻게 새소리를 알아듣는지 증명을 해 보거라.”
판관은 정렴을 죽이려고 제비를 잡아와서 제비가 무엇이라고 하는지 물었다.
“어미 제비가 판관이 잡은 새끼 제비를 살려 달라고 하면서 ‘피불용 육불용 골불용(皮不用 肉不用 骨不用 고기도 못 먹고, 뼈도 못 쓰고, 가죽도 못 쓰고)’이라고 하며 쓸모도 없으니 얼른 돌려달라고 우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판관은 감탄하면서 정렴을 살려 주었다.(한국구비문학대계, 海東異蹟)
(13) 휘파람
정렴은 음률에 조예가 깊어서 휘파람도 아주 불었다.
휘파람은 선도를 오래 하여 깊은 내단의 공력이 있어야 낼 수 있는데 중국은 위진(魏晉) 때의 선인 손등(孫登)이 휘파람의 대가로 알려져 있다.
정렴은 아버지 정순붕(鄭順朋)이 강원감사 시절 금강산에 놀러갔는데 갑자기 계곡을 진동하는 큰 휘파람 소리가 들려서 시중들던 절의 중들이 놀라 용의 울음소리인가 여겼는데 정렴이 불어댄 휘파람소리였다고 한다(오주연문장전산고). 북창집에서는 정렴이 금강산 꼭대기에서 휘파람을 불었더니 온 산이 울려서 중이 피리 소리로 알았다가 뒤에 정렴이 부는 휘파람인 것을 알았다고 한다(연려실기술 명종조의 유일, 동야운집).
(14) 불의 정기를 가진 아이
어떤 사람이 손자를 낳았다. 정렴이 그 아이를 보자 불의 정기(火精)였다.
“여보시오 이 아이를 빨리 강물에 던지시오.”
“무슨 소리요? 남의 아이를 물에 던지라니.”
“이 아이는 불의 정기이므로 주변이 모두 다 타버리게 되오.”
“네 이놈 무슨 헛소리로 남의 아이를 물에 던져 죽이라고 하느냐? 어?”
그 사람은 아이가 갑자기 뜨거워지기 시작하여 안고 있을 수가 없자 반신반의하면서 아기를 강물에 던졌다. 그러자 강물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청장관전서 이목구심서).
(15) 죽을 날을 안 정렴
정렴은 44세가 되자 죽을 때인 것을 알고 주변사람에게 죽을 날짜를 말하고 자기 만사(輓詞)를 다음과 같이 스스로 지었다.
평생에 만 권의 책을 읽고 生讀破萬卷書
하루에 천 잔의 술을 마셨노라 日飮盡千鍾酒
복희씨 이상의 일만 얘기하고 高談伏羲以上事
속된 얘기는 담지도 않았다 俗說從來不卦口
안회는 삼십에 죽었어도 아성(亞聖)이라 불렸는데 顔回三十稱亞聖
선생의 삶은 어찌 그리 길었던가 先生之壽何其久
그가 조용히 앉아서 좌화(坐化)하자 구름을 타고 승천하였다는 백일비승(白日飛昇)의 얘기가 있다(연려실기술 명종조의 유일, 동해이적, 동야운집).
(16) 효자 정렴
정렴의 아버지 정순붕은 불의하였고 정렴은 아버지에게 버림받았으나 정렴은 효심이 깊었다. 정렴은 동네에 애경사가 있으면 가장 먼저 가서 자리 잡고 앉았다. 정렴 아버지는 을사사화를 일으켜서 무고한 사람을 많이 죽이고 음해하여서 사람들이 모이기만 하면 “고약한 놈, 나쁜 놈”하며 욕을 했기 때문이다. 정렴은 학식과 명성이 높아서 자신이 앉아 있으면 사람들이 아버지에 대한 험담을 할 수 없기 때문에 가장 먼저 가서 앉아 있다가 가장 나중에 일어나곤 하였다.
(17) 검단사 설경(黔丹寺 雪景)
山逕無人鳥不回 산길에 사람 없고 새도 날지 않는데
孤村暗淡冷雲堆 외로운 마을 어둑어둑 차가운 구름 쌓이네
院僧踏破琉璃界 산사의 스님 유리판 같은 길따라
江上敲氷汲水來 강으로 나가 얼음 깨고 물 길어 돌아오네
정렴이 살던 현도면 노산리 북창네 서쪽 뒷산을 검단산(黔丹山)이라고 하고, 검단산 옆을 흐르는 깊은 금강 물을 검단이(수영장 자리)라고 한다. 노산리 뒤에는 절이 있었는데 지금은 절터에 새 절이 지어져 있다. 데 정렴은 이곳에 살면서 검단산의 절과 형각강(금강)을 읊은 것이다.
17번도로에서 본 검단산(가운데 산)과 검단이(금강). 뒤쪽(동쪽)은 노산리와 양공공산소.
(18) 정렴 묘갈
부군(府君)은 이름이 렴()이요, 자는 사결(士潔)이며 성은 정씨(鄭氏)로서 본관은 온양(溫陽)이고, 호는 북창(北窓)이다. 시조는 이름이 보천(普天)인데 고려 시대 벼슬이 호부 상서였고 시호는 정신(貞信)이다. 아조(我朝 : 조선)에 들어와서는 득량(得良)이란 분이 있어 판선공감사를 지냈고, 이 분이 포(袍)를 낳으니 고성 군사(高城郡事)였다. 이분께서 충기(忠基)를 낳으니 교리였고, 또 이분이 탁(鐸)을 낳으니 헌납이었고, 이 분이 순붕(順朋)을 낳으니 돌아가셨을 때의 벼슬이 우의정이었다. 이분께서 완산 이씨(完山李氏) 양녕대군(讓寧大君) 제( )의 증손 봉양 도정(鳳陽都正) 종남(終南)의 딸을 부인으로 맞이하여 정덕(正德) 병인년(1506, 중종 원년) 3월 갑신일에 부군을 출생하였다. 부군께서는 정유년(1537, 중종 32)에 진사에 합격하시고 가정(嘉靖) 기유년(1549, 명종 4) 7월 16일에 돌아가시니 양주(楊洲) 사정리(砂井里) 의정공(議政公)의 묘소 아래에서 몇 보 떨어진 북쪽을 등진 언덕에 묘소를 정하였다.
府君諱字士潔姓鄭氏籍溫陽號北窓始祖諱普天高麗戶部尙書諡貞僖入我 朝有諱得良判繕工監事生諱袍高城郡事生諱忠基校理生諱鐸獻納生諱順朋卒官右議政娶完山李氏讓寧大君之曾孫鳳陽都正終南女以正德丙寅三月甲申生府君中丁酉進士歿以嘉靖己酉七月十六日墓在楊州砂井里議政公墓下數步子坐之原配晉州柳氏 贈右贊成文通之孫學生仁傑之女忌辰在七月十二日云東國名臣錄有曰公雅曉音律尤邃於天文醫藥 朝政薦除掌樂院主簿兼觀象監惠民署敎授出爲抱川縣監未久辭還養疾於楊州之掛蘿里又曰公虛高明有上智之姿而以聖學爲主心之本常曰聖人之學以人倫爲重故不言其要竗處仙佛則大同而少異張溪谷維序先生詩集以逸民之中淸中權比之先生與古玉有曰公生而靈異博通三敎其修攝似道悟解類禪而倫常行誼一本吾儒又曰少時隨親覲上國見華人便作華人語遇外國使便作外國語嘗入山攝心數日盡知山下百里間事如目擊焉海嵩尉尹新之之序有曰兒時已聞東國有眞人鄭北窓丁酉之難逢古玉先生於逆旅時先生已老鶴形銀宛如神仙中人胸襟澄澈類有道者自不覺歎息起敬先生曰君乃以我爲眞人耶惜不令君見吾北窓兄也於是日聞所不聞其風神儀表靈異奇驗無不脩悉乃知先生可與爲仙可與爲佛可與爲聖人是之謂眞人者非耶以如是之奇識終不泥仙釋一以吾儒爲本觀其遺訓專務孝悌最以小學近思爲初學蹊逕諄諄戒則斯豈非古今仙眞卓絶罕者哉成判壽益所撰三賢珠玉有曰北窓先生物表神人也嘗赴中國遇琉球使使亦異人一見北窓瞿然大驚不覺下拜搜其出小冊子實記某年月日入中國遇眞人示北窓曰所謂眞人非公而誰耶其人精通易學北窓共處論易不待舌人能爲其國之語老子所謂不出戶而知天下者非虛語也許穆所著記言有淸士傳盛稱府君及古玉事蹟古玉卽府君第四第諱之號也府君有二子一女之復之臨女金潤身之臨只有一女權正己金潤身無後之復取從弟叢桂堂諱之升子諱時爲嗣官察訪又無子取伯氏佐郞 贈判諱晦子諱麟卿爲嗣官承有三子純陽 贈判正陽縣監 贈議一陽 贈議純陽子壽淵縣監 贈判書有三子光殷司書贈判光周郡守光漢判書光殷子昌聖監司昌順大司憲光漢子昌老奉昌耆出爲光周後昌聖子敦始敬始昌順取敬始爲子正陽子壽崑郡守 贈承旨壽崙直長 贈判庶子壽崗察訪壽崑子光謙郡守 贈議光益贈注書光忠大司憲光謙子昌言昌兪郡守 贈判昌師 贈判昌兪子元始監司民始判出昌師後元始子尙弼尙愚壽崙出爲一陽後又無子取光忠爲嗣子昌朝副率昌期佐郞出爲光益後昌朝子萬始壽崗子光彦光運光憲奉事光彦子昌遠光憲子昌後進士出爲光運後嗚呼今去府君之世二百五十有餘年而樵童馬卒尙知鄭北窓三字則傳後悠遠之道願何待乎區區片石而苟無墓道之刻則雖平昔之景慕者亦何以辨夫衣履之藏而致其山仰之誠乎小子竊爲是謹就諸賢所錄中信而有微者撮爲陰記 六代孫正憲大夫禮曺判書兼知 經筵事光漢謹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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