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시(古詩)에서 의식변화의 길을 묻는다
예재호 달성노인대학장, 달성중학교 교장 역임, 달성문협 회원, 유림신문 편집주간
우리 사회는 동방예의지국으로서 위상이 점차 사라져가고, 윤리와 도덕이 무너지는 현상을 보이고 있다. 더구나 인명의 경시, 숭조정신 퇴색, 경로사상 후퇴는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실정이다.
기성세대들은 이미 도덕적인 면에서 자유롭지 못하여 젊은이들을 이끌어 갈 수 있는 동력을 상실한지 오래이고, 이정표 없이 거리를 배회하는 젊은이들은 하루가 다르게 늘어나고 있어 더욱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 같은 현상은 고질적인 문제임에는 틀림이 없으나 치유를 위한 처방은 어느 누구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그만큼 사회는 계층, 빈부, 세대, 남녀, 직업 간의 대립과 갈등이 첨예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는 사회의 많은 지도자들이 “나는 바담풍해도 너는 바람풍하라”는 인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도 한 원인일 수 있다. 이러한 문제는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라 오랫동안 지속되어 왔기 때문에 이를 개선하는 데는 많은 어려움이 따른다.
도덕심과 국민의식에 문제가 있다는 것은 공감하고 있으나 이를 해결하기 위한 실천적이고 실질적인 방안은 쉽게 찾지 못해서 안타깝다. 그러나 사회 구성원 모두가 특단의 의식변화 내지는 인식의 변화가 뒤따른다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의식의 바람직한 변화를 위해서 선인들의 고시(古詩)에서 그 길을 찾는 것도 하나의 방편일 수 있다.
그래서 “한훤당 선생의 노방송, 상촌 선생의 시, 유언호 선생의 임거사결, 추사 선생의 제촌사벽, 이가성 회장의 칠불교, 육불합” 등을 일람해 본다. 이를 통하여 새로운 변화의 길을 찾는데 작은 실마리가 될 것으로 보인다.
“옛것을 익혀 새로운 것을 깨닫는다면 다른 사람의 스승이 될 수 있다.(溫故而知新 可以爲師矣)”고 한 것처럼, 고시(古詩)에 담긴 깊은 의미가 사람들의 의식변화에 도움이 되는 길을 만날 수 있게 될 것이다.
첫째, 김굉필선생의 노방송(路傍松) 시에서 길을 찾는다
한훤당 김굉필(寒暄堂 金宏弼 1454-1504) 선생은 성리학에 통달하였고, 그림에도 능하였으며, 특히 선생은 도학지종(道學之宗), 동방오현 중 수현(首賢)으로 추앙(推仰)받고 있다.
몇 년 전에 필자가 한훤당 김굉필 선생의 29세 김병의 종손으로부터 경현록(景賢錄)을 받아서 읽은 적이 있다. 경헌록을 보면 “선생은 후배를 가르쳐 인도하는 것을 자기의 임무로 삼았다. 멀고 가까운데서 소문을 듣고 모여 온 학도들이 집 안에 차고, 날마다 경서를 가지고 당(堂)에 오르므로 자리가 좁아 다 수용할 수가 없었다.”고 했다. 이는 선생의 높은 학문적 경지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한훤당은 세속과 타협하지 않고 높은 지조로 독행함이 남달랐다. 평거(平居)에도 반드시 의관을 정제하고 인경 소리를 듣고야 자리에 들어 첫닭 소리에 기상하여 손에는 언제나 책을 놓지 않았다.”고 남효온(南孝溫)은 기록하고 있다.
노방송 시에서 선생의 절의가 나타나 있다. 이는 논어의 “해가 추운 연후에 소나무 잣나무가 뒤에 마르는 것을 안다.(歲寒然後 知松栢之後凋)”고 한 것과 맥락을 같이 하고 있다. 세한삼우(歲寒三友) 중의 하나인 “길가에 서 있는 소나무”에게 “변하지 않는 마음을 가진 사람을 몇 명이나 보았느냐”라는 물음에서 선생의 높은 가르침의 경지를 짐작하게 한다. 삶의 바른 길이 어디에 있는지를 다음 노방송(老傍松)시에서 배울 수 있을 것이다.
一老蒼髥任路塵(노송 하나 푸르게 길가에 서 있어)
勞勞迎送往來賓(오가는 길손을 수고로이 맞이한다)
歲寒與爾同心事(추운 겨울 너와 같이 변치 않는 맘가짐을)
經過人中見幾人(지나는 사람 중에 몇 사람이나 보았느냐?)
둘째, 상촌 신흠선생의 시에서 길을 찾는다
상촌 신흠(象村 申欽, 1566-1628) 선생은 이정구, 장유, 이식과 더불어 한학 사대가의 한 사람이다. 선생의 시는 퇴계 선생도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았다고 하니 그 시의 경지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선생의 시는 올 곧은 선비의 지조가 고스란히 묻어나 있다. 오동나무는 아무리 오래되어도 고유의 가락을 지닌다고 하여 선비정신을 강조하고 있다. 우리 사회는 지금 가치관의 혼돈시대에 살고 있어 어떤 것이 옳고 어떤 것이 그릇된 것인지 분별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이 시는 지고지순한 선비정신을 기리고 있다.
‘매화는 아무리 추워도 향기를 팔지 않는다.’는 것은 올곧은 선비정신을 나타내고 있다. 선비는 불의와 부정에 편성하지 않고, 바른 길이 아니면 가지 않으며, 청빈(淸貧)한 삶은 살아야 한다는 의미가 담겨져 있다.
아울러 사람에게는 본성이 주요하다고 했고, 세상은 많이 변화하고 있으나 그 본질은 그대로다. 아무리 고통스러움이 극에 달한다 해도 언젠가는 새로운 모습으로 거듭나게 됨을 설파하고 있다. 이 시에서처럼 올곧은 선비정신의 계승은 바로 의식개혁의 길이 아니겠는가?
桐千年老恒藏曲(오동나무는 천년 늙어도 항상 그 가락을 지니고)
梅一生寒不賣香(매화는 일생이 추워도 향기를 팔지 않는다.)
月到千虧餘本質(달은 천 번을 이지러져도 그 본질은 남아 있고)
柳經百別又新枝(버드나무는 백 번을 꺾여도 새 가지가 돋아난다.
셋째, 유언호선생의 임거사결(林居四訣)에서 길을 묻는다
유언호(兪彦鎬, 1730-1796) 선생은 임거사결에서 달(達), 지(止), 일(逸), 적(適)을 이야기하고 있다. 말년에는 부모공양을 핑계로 사직하고, 1781년에 “전원에 사는 네 가지 비결”에서 삶의 맑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임거사결을 통하여 나는 지금 어디로 가야하는가를 고민하고, 삶의 진정한 기쁨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선생은 임금의 부름을 받고 대궐로 급히 가던 중에 객점에서 아낙네가 앞에 아이를 앉히고 머릿니를 잡는 광경을 보고 “남들의 편안함은 보면서 자신의 고생스러움은 보지 못하고, 남들의 즐거움은 알지만 자신의 근심스러움은 알지 못하니 이는 달관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적고 있다.
달관은 “세상의 모든 구속으로부터 자유에 이르는 길”이라고 했다. 모녀간에 이를 잡고 있는 그 모습이 바로 달관의 경지라고 하였고, 이는 거짓 없는 참다운 정, 인생의 참 즐거움을 누리는 것이라 하여 매우 부러워했다. ‘임거사결’에서 맑은 삶이 의미하는 바를 ‘온고지신’으로 미래의 길을 찾을 수 있다.
전원의 네 가지 비결은 “그 첫째는 달(其一達)이고, 그 두 번째는 지(其二止)이며, 그 세 번째는 일(其三逸)이고, 그 네 번째는 적(其四適)”이라 했고, “달은 상하사방을 통달하는 것을 이른다.”고 서문에 쓰고 있다.
“달(達)은 세상에서 육신이란 꿈과 환각, 거품과 그림자라. 지(止)는 물고기는 연못에 머물고 새는 숲에서 머물러 사는 법. 일(逸)은 육신이 있는 자는 누군들 편안하고 싶지 않겠는가? 적(適)은 없는 것 가운데 있는 것이 있고, 환상 가운데 실상이 있는 법이라.”고 ‘글로 세상을 호령하다.’에서 설명하고 있다.
넷째, 추사 김정희선생의 제촌사벽(題村舍壁)에서 길을 묻는다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1786-1856)는 문신 서화가로 널리 알려져 있고, 추사체를 대성한 명필이고 예서에도 뛰어났다. 아집과 독선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많은 상처를 주고 북청과 제주에서 유배생활을 했다. 북청의 유배지에서 풀려나와 강원도 어느 산골을 지나면서 옥수수 밭에 있는 초가집에서 노부부가 오순도순 행복하게 살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선생은 노부부에게 다가가서 일상을 물었다. 먼저 한양은 가보았느냐 물었으나 가보지 못했다고 했고, 그러면 관가에 가본 적이 있느냐고 물었으나 없다고 했으며, 지금까지 무엇을 먹고 살았느냐고 물으니 70평생을 옥수수만 먹고 살았다고 대답했다. 노부부는 옥수수만을 먹고 평생을 보냈으나 얼굴에는 그늘 한 점 없이 온화하고, 항상 만족하면서 살고 있는 노부부의 모습에서 행복이 어떤 것인지를 깨달았다. 이 같이 볼품없는 노부부의 행복한 모습에서 자신의 삶이 부질없고, 아집에 가득 찬 지난날의 행동을 자책하면서 망연자실(茫然自失)했다. ‘제촌사벽’은 옥촉서풍으로 알려져 있는 시에서 참 나를 돌아볼 수 있는 계기가 되면 의식변화의 길을 찾을 수 있다.
禿柳一株屋數椽(두어 칸 초가집에 대머리 버들 한 그루)
翁婆白髮兩蕭然(노부부의 흰 머리털 둘 다 쓸쓸하구나)
未過三尺溪邊路(석 자도 되지 않는 시냇가 길가에서)
玉蜀西風七十年( 수수로 갈바람에 칠십년을 보냈네)
다섯째, 이가성 회장의 육불합 칠불교(七不交 六不合)에서 길을 묻는다
이가성(李嘉誠) 회장은 홍콩의 기업인으로서 아시아에서 최고의 갑부로 30조원이라는 많은 재산을 소유하고 있다. 이 회장은 평소 생활상을 보면 세탁소 점원에서 출발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성실한 삶을 살고 있다. 특히, 5만 원 이하의 구두와 10만 원 이하의 양복을 입고 다니고, 언제나 검소한 생활을 했으며, 사회에 기부는 매년 3천억 원에 이르고 있어 아시아권에서는 최고의 기부자이기도 한다. 이 회장은 입만 열면 국민을 위한다는 사람들과는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더구나 이가성 회장은 칠불교, 육불합으로 사귀지 말아야 할 사람, 동업을 하지 말아야 할 사람을 구분하여 자신의 어록에 적고 있다. 오늘을 살고 있는 사람들은 이를 좌우명으로 삼아도 좋을 것 같다. 이러한 생활의 수칙을 우리들이 본받게 되면 의식변화에 새로운 이정표를 만들게 될 것이다.
칠불교(七不交)는 불효하는 사람, 사람들에게 각박하게 구는 사람, 시시콜콜 하게 따지는 사람, 받기만 하고 주지 않는 사람, 아부를 잘하는 사람, 권력자 앞에 원칙이 없는 사람, 동정심이 없는 사람과 사귀지 말라는 것이다.
육불합(六不合)은 개인적 욕심이 너무 강한 사람, 사명감이 없는 사람, 인간미가 없는 사람, 부정적인 사람, 인생의 원칙이 없는 사람,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과 동업하지 말라는 것이다.
지금까지 선인들의 시와 어록에서 가야할 길을 더듬어 보았다. 우리 사회는 갈등으로 인하여 많은 혼란을 가져오고 있다. 빈부에 의한 갈등, 세대 간의 갈등, 노사 간의 갈등, 부자지간 갈등, 이념 갈등 등으로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을 정도로 심각한 수준에 이르고 있다. 선비들의 시에서 의식을 개선할 수 있는 원근(遠近)의 길을 찾을 수 있었다. 앞에서 살펴본 선인들의 생활철학에서 내일 우리들이 가야할 길을 아름답게 재정비할 수 있는 방안을 물었다.
우리는 냉철하게 자신의 모습을 돌아봐야 할 때다. 나의 모습이 사람들에게 어떻게 비치고 있는지, 나는 정말 욕심 없는 삶을 살았는지, 나는 봉사하고 배려하는 삶을 살았는지, 나는 작은 이해관계에 목소리를 높이지는 않았는지, 남의 잘못은 현미경으로 바라보면서 자신의 잘못은 돋보기로 보지는 않았는지, 혹시라도 칠불교, 육불합으로 살지는 않았는지, 이러한 삶을 되돌아보는 것만으로도 의식을 바꾸는 첫걸음이 될 것이다. 인생사 모두가 자신에게 열쇠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도덕경에서는 상선약수(上善若水)처럼 사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삶”이라고 했다. 이러한 삶은 인생을 성공으로 이끄는 길이기도 하다. 따라서 지금까지 살펴 본 선인들의 생각은 미래 세대들의 의식을 변화시키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선고(先考)의 세사영(世事詠)에서 온고지신(溫故知新)의 정신을 회상하면서 글을 마무리한다.
七十光陰梳白頭(칠십 세월에 흰머리에 빗질을 하니)
三千箇箇總難收(삼천 개나 되는 것을 거두기가 어렵구나)
風雨西朝來正急(서양의 문물이 분별없이 빠르게 밀려오니)
有誰能繼魯春秋(누가 있어 노나라의 춘추를 이어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