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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학사의 이해
한국역학사
1.삼국-고려시대의 역학사
주역이 우리나라에 전래되어 연구되었던 기록은 삼국시대에서부터 나타난다. 三國史記 高句麗本紀에 소수림왕 2년 太學을 세워 자제를 교육했다고 하고, 周書 및 舊唐書의 列傳에 고구려에 五經 三史 등의 서적이 있었다고 한다. 백제는 사신을 보내 일본에 효경 논어 등과 함께 易經을 전했다고 하며, 신라에서도 國學에서 주역을 가르쳤다고 하고 薛聰은 방언으로 九經을 읽고 가르쳤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나온다. 이상의 기록이외에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지만 대체로 삼국은 모두 주역을 연구했음을 알 수 있다.
이외에 삼국사기에 선덕여왕이 자연의 변화를 가지고 친 占例라든지 풍수지리 사상이 퍼져있었던 사실을 말해주는 기록이 있고 백제 고구려 고분벽화에 등장하는 四神圖등을 보면, 이것이 주역과 직접적인 관계를 가진 것은 아니지만 음양오행사상이 상당한 정도로 전파되어 있었던 것 같다.
고려시대에는 6대 성종 때에 國子監과 經學博士를 설치했고 문종 때에 崔忠은 九經과 三史를 중시했다고 한다. 그리고 고려 말에는 성리학의 전래와 함께 주역에 있어서도 새로운 경향이 수입되었던 것 같다. 가령 우탁선생이 중국에 사신으로 갔는데, 중국황제가 입구에 주역의 내용을 기록한 병풍을 세워놓았다. 고려사신이 들어오자 호병풍을 보았는가하고 묻자, 한 글자도 남김없이 줄줄이 외워서 중국의 조정을 깜짝 놀라게 했고, 뒤에 고려로 돌아오게 되자 우리(중국)의 역이 동쪽으로 간다는(吾易東矣) 뜻의 易東이란 호를 내려주었다는 전설이 있다. 아마 이 전설은 사실이라기보다는 우탁을 중심으로 역학의 새로운 경향이 발생했음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이는 고려사 禹卓列傳에 보면 “우탁은 경서에 통하고 더욱 역학에 깊어 卜筮가 모두 적중하였다. 程傳이 처음 전래되자 동방에 아는 이가 없었는데, 우탁이 문을 닫고 한 달 남짓을 參究하여 해득하고 학생들을 가르치니 理學이 유행하기 시작하였다.”고 하는 언급은 필자의 견해로 바로 이런 뜻을 내포하고 있다고 본다. 또한 高麗史 恭愍王 19년조에 과거시험의 주역 시험에 정자 주자주와 古注로 한다고 한 것을 보면 우탁(1263-1342) 무렵에 伊川易傳이 전래되었고 고려 말 공민왕(1330-1374) 무렵에는 이미 伊川易傳 朱子本義를 비롯하여 宋 이전의 古注들이 충분히 연구되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사실 고려 때까지 어떤 주석이나 판본이 어떤 경로로 전해졌는지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주역에 대한 전문적인 주석 역시 이름만 전할 뿐 실제로 전해지는 책은 없다. 고려시대 윤언이의 주역주가 있었다고 하지만, 현재 전해지지 않고 있다. 아마도 고려시대의 사상적 경향과 중국과의 관계에 비춰본다면 이 당시에는 위 왕필의 注釋과 당 공영달의 疏가 유행했을 것으로 보이며, 윤언이의 주석 역시 이 왕필과 공영달의 注疏本에 의거했거나 관련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전해지는 주역 주석본은 조선시대 이후에서야 확인할 수 있다. 가령 여말선초의 대학자였던 陽村 權近의 五經淺見錄에 들어있는 周易淺見錄은 주역에 관해 전해지는 최초의 전문서적이라고 할 수 있다. 周易淺見錄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은 고려 말에서부터 도입된 정이천의 『역전』과 주자의 『주역본의』등 성리학의 주역철학에 대한 이해가 심화되었음을 보여주는 실례라고 할 것이다.
2. 조선의 역학전통
조선시대에 있어서 주역 연구는 상당히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성리학을 국가이념으로 삼은 조선은 주자학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었다. 세종 원년(1419)에는 性理大全 四書大全 五經大全 등을 수입하여 이학의 연원이니 널리 강구하라는 반포를 내리는 등 조선유학의 발달에 큰 영향을 끼쳤다. 세조의 명으로 易學啓蒙要解라고 하는 역학계몽 해설서가 편찬되었고(1495년) 尹彦?의 易解, 柳斌의 孤山易圖(1576), 退溪의 啓蒙傳疑(1557) 율곡, 李德弘의 周易質疑, 金邦翰(1635-1697)의 周易集解, 旅軒 張顯光(1554-1637)의 易學圖說 經緯說, 보만 徐命膺(1716-1787) 易學啓蒙集箋, 金錫文의 易學圖解(1697), 遊齋 李玄錫(1647-1703)의 易義窺斑, 趙好益 易象說등이 역학 저작이 나왔고 正祖의 周易講議 경연에서 토론한 내용을 엮은 1783. 주로 주자본의와 역학계몽 및 이천역전을 위주로 한 성리학적 입장에서의 주역 해석 및 논의를 기록한 내용으로 되어있고, 이외에 逸? 李元龜의 心性錄, 星湖 李瀷(1681-1763)의 易經疾書, 茶山 丁若鏞의 易學四箋(1808) 易學緖言(1820)등이 성리학적 시각을 비판하며 실용적인 시각에서 새롭게 주역을 이해하려 한 성과로 들 수 있다. 이상의 역학 연구 성과는 최근 『한국경학자료집성』의 역경부분과 『한국역학대계』로 편찬되어 나온 것이 있다.
우리나라의 주역 연구성과 가운데 특이한 부분은 주역에 대한 口訣 吐 작업이다. 주역에 대한 구결작업으로는 이미 신라시대에 설총이 방언으로 구경을 읽고 가르쳤다고 하는 기록에서부터 그 기원을 찾을 수 있으나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고, 현존하는 우리나라 최고의 구결자료는 舊譯仁王經으로 12세기 중엽의 작이다. 고려말에 포은 鄭夢周(1337-1392)가 詩에 구결을 달았고 陽村 權近(1352-1409)은 역에 吐를 달았다고 한다. 이는 주역이 본격적으로 우리의 것으로 소화되고 전수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삼경구결에 잘못이 많다는 지적이 나오고 세종은 경서의 구결사업을 명하여 崔恒 徐居正 등이 참여하였고 세조 12년 주역구결이 완성되어 成均館에 반사되었다. 이후에도 구결작업은 계속되어 趙穆(1524-1606) 李珥(1536-1584) 崔?(1539-1612) 趙穆은 퇴계의 질정을 받아가며 1596년 주역구결을 완성하였고 李珥는 연보에 주역구결을 저술했다는 기록이 보이기는 하는데 經文에 대한 구결인지 傳義에 대한 것인지가 자세하지 않다.
조선 세조는 널리 세종 때 한글 구결토가 완성되고 세조때 현재 전해지는 구결토가 정해졌으며, 선조 때(1585)에 七經에 언해가 완성되었는데 여기에서의 주역언해는 程傳을 위주로 되어있었는데, 선조 때 崔?(1539-1612)이 朱子本義를 위주로 한 周易本義 口訣을 완성하였다.
그리고 주역의 구절을 우리말로 설명한 退溪의 周易釋疑가 있고 이것을 발전시킨 언해 번역사업이 선조 때에 사서삼경언해가 완성 간행되었다. 주역언해는 周易大全에 의거하여 崔? 鄭逑 홍가신 한백겸 등의 참여로 이루어졌다. 여기에는 伊川易傳과 朱子本義가 두 가지로 동시에 언해되었다. 이로써 조선시대의 역학은 이천역전과 주자본의를 중심으로 전개되게 되었다.
조선 후기에 들어와서는 실학의 흐름이 대두되면서, 다소 새로운 경향이 생겨났다. 성호 이익의 역경질서 일수 이원구의 심성록 다산 정약용의 주역사전 등 실학 혹은 고증학에서의 성과가 출현하므로써, 기존의 성리학과 다른 경향의 주역이해가 시도되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그러나 보다 거시적인 관점에서 보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실학이건 성리학이건 간에 이들은 전통유학의 범주 내에 있었고, 중화주의적 세계질서를 중심으로 한 전통적 세계관의 테두리 내에 있었다. 그러다가 서구 제국주의의 침략과 일제의 강점이란 외부적 요인으로 청나라나 조선같은 왕조가 패망하고 전통적 세계질서가 붕괴되면서, 급격한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충격 속에 휩싸이게 되었다. 과연 이런 급변의 사태 속에서 역학은 어떻게 존재하고 있었을까? 혹은 어떻게 이런 혁명적 변화를 이해하고 극복하려 했을까?
한일합방이란 대사건을 통해 조선이란 봉건제국의 멸망은 당시의 지식인들에겐 엄청난 정신적 충격을 주었다. 자주적인 노선을 갖지 못한 채 서구열강의 침탈 앞에 자립능력을 상실한 조선왕조에서 청나라나 러시아 혹은 서구 열강에 의존하려 했던 것은 필연적인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5백년을 지속한 조선왕조가 그것도 수천 년의 역사 속에서 우리보다는 늘 한 수 아래로 치부했던 일본에 의해 패망하리라는 것은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던 대사건이었고, 더구나 하늘같이 의지했던 중국의 청나라조차도 신해혁명으로 망해버리자, 기존의 질서와 구체제가 무너지면서 중화주의 세계관 자체가 붕괴되어버렸다. 이는 당시의 지식인들에게 감당하기 힘든 정신적 아노미 현상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아래에서는 조선 말기 제국주의의 침략과 조선의 패망으로 급격하게 맞게 된 근대시기에 있어서 역학이 전통역학과 어떻게 결별하면서 어떤 변화를 맞게 되었는지를 근대시기의 역학자들 중 커다란 족적을 남긴 3분의 역학가를 선정해서 그들의 생애를 통해서 그 역학사상의 특징을 알아본다.
3. 근대한국역학 사상
동학농민전쟁, 임오군란, 민비시해, 한일합방과 일제의 지배 등 경천동지할 사건들을 목도하면서 역사의식이 각성된 일부의 지성인들은 이를 분석하고 대응하기 위해서 주역학이란 동양의 전통적인 방법론을 택하기도 했다. 당시대의 문제를 역학의 방법을 통해 해결하고자 했던 이 당시의 역학자는 많지만 이런 시대적 문제를 가지고 역학을 연구했던 학자로는 一夫 金恒 (1826~1898) 眞菴 李炳憲(1870-1940) 也山 李達(1889-1958)을 대표적으로 꼽을 수 있다. 이 세분은 각자의 학문적 입장은 다르지만, 조선말(19세기 말)에 태어나 격동의 시기를 살다간 역학자로서 특히 당시대의 사회정치적 문제를 역학을 통해 극복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닌다.
正易으로 널리 알려진 일부 김항의 역학은 그 자신의 원고가 거의 남아있지 않아서 그 전모를 자세하게 알기는 어렵다. 다만 현재 전해지고 있는 正易八卦와 詠歌舞蹈는 새로운 역학을 꿈꾸었던 그리고 역학이론뿐 아니라 역학을 응용한 수련을 강조한 것으로 실천적인 수련적인 성격을 지닌 것이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당연히 이는 기존의 정주 위주의 역학과는 완연히 다른 모습을 띠는 것이었다.
진암 이병헌의 今文 易學은 강유위의 영향을 받아 현실 개혁을 위한 도구로서의 경학을 도모하는 차원에서 주역을 이해한 것이었다. 이는 서구열강의 침탈과 더불어 조선의 패망과 일제강점이란 엄청난 역사적 시련을 겪으면서 당시의 현실인식을 통해 주역을 새롭게 이해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야산 이달이 제창한 洪易學은 기존의 유교경서를 주역중심으로 이해한 것으로, 대학이나 서경 논어 등의 경서를 주역으로 해석하고, 일제강점기와 민족상잔의 전쟁이란 당시 우리의 현실 문제를 가지고 주역의 괘효사를 해석한 독특한 입장을 지닌다. 또한 역학을 曆法으로 응용한 庚元曆이란 새로운 역법을 만들어 새 시대의 도래를 역학적으로 설명했다.
이상 일부 진암 야산의 경우를 통해볼 때 각각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이전의 시대와는 확연히 다른 양상을 보인다. 조선시대를 중심으로 한 한국의 역학은 대개가 정이의 『역전』이나 주희의 『주역본의』 및 『역학계몽』을 중심으로 그 뜻을 정확히 이해하려는 시도로서 정리할 수 있다. 그러나 조선말 일부나 일제강점기의 진암이나 대한민국건국초의 야산의 역학은 이전시기에 비해볼 때 두 가지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 첫째는 새로운 창작을 시도했다는 점이고, 둘째는 程朱라는 기존의 전통과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이들은 정주나 혹은 조선전통의 역학을 답습하는 차원에서 머무른 것이 아니라, 적어도 정이나 주희의 영향에서는 벗어나서 새로운 창작을 시도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들을 통해서 한국의 역학은 새로운 지평을 열수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일부나 야산은 정역팔괘도나 경원력 등의 제정을 통해 중국 상수역학의 영향을 받긴 했지만 한국의 독자적인 역학의 시대를 열므로써, 이제 진정한 의미에서 중국과 다른 독자성과 독창성을 언급할 수 있게 되었다.
3.1 일부 김항(1826-1898)의 정역
4.1.1 김항의 생애
일부 김항의 정역을 연구해서 널리 보급하는데 많은 업적을 남긴 이정호는 일부의 모습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전한다. “선생은 狀貌가 비범하여 키가 훤칠하게 크시고 특히 상체가 높아 두 팔을 드리우면 무릎아래까지 내려왔다고 한다...선생의 눈은 깊고 길어 叡智를 표명하고 코는 四山위에 약간 높아보였다... 인중이 길고 齒長이 一寸이었으며...목청은 鐵聲이어서 영가를 부르면 마치 높은 공중에서 나는 것 같이 멀리 들리고 그 청아한 소리는 듣는 이로 하여금 부지중에 어깨가 들먹이며 춤을 추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하였다.” 다소 신비스럽게 묘사된 느낌은 들지만 세상에 전해진 일부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
영가무도를 전수하면서 정역과 윷판의 관계에 대해 많은 연구를 남긴 박상화는 일부 선생에 대해 그 略傳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선생의 성은 김씨요 본관은 광산이며 휘자는 恒(초명은 在一)이고 자는 道心, 호은 一夫이다. 신라 37 왕손의 후예이며 조선조 광산부원군의 13세손으로 經歷公派이고, 부친 麟魯(자는 元震)와 모당 대구서씨 와의 사이에 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서기 1826년(순조26년) 병술 10월 28일 舊황성향 모곡면 담곡리(현 논산군 양촌면 남산리)에서 탄생하였고, 1898년(광무2년) 무술 11월 25일 황성향 모현리에서 몰세하였으니 향년 만72세이다. 令胤 두현(호 一蓮)이 있었고 현재 令孫 영득(아명 수득)이 있어 계승하고 있다.
선생은 천품이 仁厚하며 德器道骨로 狀貌가 奇偉하고 鶴姿風聲으로 容姿가 비범하였다. 소시부터 호학하여 글짓기에 마음을 두지 않고 깊이 성리학에 침잠하였다. 36세의 나이에 이연담 선생을 뵙자 이연담이 처음보고 특별하게 여겨 사랑하였다. 禮鄕인 연산의 士類가정에 태어났으므로 자연 禮文에 조예가 있었다 한다(김황현 述, ?일부선생행장기에서?).
3.1.2 정역사상
일부는 충남 목천 출신의 역학자 蓮潭 李雲奎 선생에게서 배운 뒤에, 18여 년 간의 노력을 기울여 정역의 체계를 수립했다고 한다. 蓮潭은 조선 후기의 대학자 李書九의 학맥을 계승하였다고 하며, 확인할 수는 없지만 당시의 종교 및 역학계의 거물들인 崔濟愚• 金光華• 金一夫를 가르쳤다고 한다. 蓮潭은 1861년(철종 12) 이 셋을 불러 최제우와 김광화에게는 “너희들은 선도와 불도를 대표하여 이 세상에 나온 것이니 그 일을 잘하라”고 당부했고, 김일부에게는 ‘影動天心月’이란 글을 전하며 이르기를 “그대는 쇠잔해 가는 공자의 도를 이어 장차 크게 天時를 받들 것이라.”고 했다고 한다. 이에 일부는 분발하여 書傳과 周易을 읽고 詠歌舞蹈의 법으로 공부하면서 아침저녁으로 반야산 기슭에 있는 관촉사를 찾아가 恩津미륵을 우러러 간절히 기도하여 54세 되는 기묘(1879)년에 이르러, 눈을 뜨나 감으나 앞이 환하여지고 알 수 없는 卦劃이 끊임없이 눈앞에 어른거렸으나 그 뜻을 알지 못하였다.
1<그림> 김항의 초상화와 정역
<그림 2> 정역팔괘도
그 후 어느 날 周易 說卦傳의 ‘神也者 妙萬物而爲言者也’라는 구절을 읽다가 문득 모든 것이 공자의 예시임을 확연히 깨닫고 이에 새로이 正易八卦를 그리게 되었다. 이것이 抑陰尊陽의 선천 伏羲八卦와 文王八卦에 이은 正陰正陽의 후천 正易八卦라고 한다.
괘를 다 그린 순간 홀연히 공자가 현신하여 “내가 일찍이 하고자 하였으나 이루지 못한 것을 그대가 이루었으니 참으로 장하도다.” 하고 크게 칭찬하며 그를 ‘一夫’라 칭하였는데, 이런 연유로 號를 一夫라 하였다. 1884년 정역의 상편인 ‘十五一言‘无位詩’를 저술하고 뒤이어 을유(1885)년 ‘正易詩’와 ‘布圖詩’를 저술하고, 정역 하편인 ‘十一一言’과 ‘十一吟’을 마침으로써 2년에 걸쳐 정역을 완성했다. 그러자 그간 눈앞에 어른거리던 괘 획들이 사라졌다고 한다.
정역은 한국의 독자적으로 발전한 주역으로 주목을 받았고, 정역의 후천사상은 당시의 혼란상을 설명하는 이론적 틀로서 많이 이용되었다. 특히 정역팔괘는 새 시대를 설명하는 신종교 교리의 기본 구조와 원리로 채택되었다.
유승국은 김일부의 정역이 종전의 한국역학사상과 다른 획기적인 차원을 개창했다고 평가했다. 그는 과거의 가치관과 철학사상이 전근대적 봉건사회로부터 근대사회로의 변혁에 제대로 맞추지 못하는 문제를 안고 있었으나, 정역은 현대와 미래를 전말할 수 있는 포괄적이고 근본적인 원리를 제시해서 인간의 변화를 예견하고 인류의 새로운 방향을 열어놓았다고 보았다. 그래서 천도의 변화로는 360일의 正曆이 도래하며 潮汐의 변화와 水陸의 변동이 온다고 했고, 인간사회의 변화로는 봉건적 상하관계로 예속되지 않는 개개인의 독립된 人極인 皇極을 말하고 抑陰尊陽이 아닌 만민평등의 調陽律陰과 종교 간의 대립과 분열을 지양하는 후천의 원리를 담아 정역팔괘도에 나타냈다는 것이다.
정역팔괘와 더불어 정역의 한 축을 이루는 것이 영가무도이다. 영가무도를 전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던 박상화 선생은 영가의 유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우리나라에 詠歌가 나오기는 一夫선생의 唱導에서 시작된 것이다. 그는 사색 중에 영감을 얻어 무의식적으로 입에서 나오는 소리를 그대로 불렀을 뿐이며 또한 부르지 않고는 못 견딜 만큼 마음의 충동을 받은 것이다. 그리하여 그 독창인 창법으로 무아의 경지에 이르도록 이에 열중했던 것이다. 그의 출생지인 담골(담곡 - 충남 논산군 양촌면 남산리) 풀밭에서 잔디가 사그라지도록 뛰며 노래했던 것이니, 사람들은 그를 미친 사람으로 여겼던 것이다. 그리하다가 얼마 뒤에 그가 정역을 저술하매 비로소 聖學의 참뜻이 세상에 드러나게 된 것이다. 正易에 “미치광이 일부의 육십평생은 自笑 人笑하니 항상 웃음이 많았구나. 웃음 속에 웃음이 있으니 어떠한 웃음일런고. 그 웃음 능히 웃노니, 웃으며 노래하는구나!”라고 한 것으로 보더라도 그가 영가에 얼마나 도취됐던 가를 가히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의 문인들로 하여금 영가무도를 전해오고 있으나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지 않으며 또한 그 창법이 구구하다.
영가무도의 방법에 대해서는 평좌 반가부좌 결가부좌 등으로 앉아서 음 아 어 이 우의 五音을 묵직한 음량으로 아랫배에 힘을 주어 힘차고 길게 부르다가 흥이 나면 저절로 춤을 추는 경지에 들어가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특히 오음은 궁상각치우의 오성 상생의 이치를 활용한 것으로 오장의 순환에 영향을 준다고 하여 , 지금까지도 영가무도를 행하는 단체나 개인연구자들 사이에서 전수되어 오고 있다.
정역사상은 신종교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고, 충남대학교 철학과 등을 중심으로 충청 지역에 여러 학자들이 배출되어 연구하고 있고, 영가무도 역시 수련 및 전수자들이 계속되고 있다.
3.2 진암 이병헌(1870-1940)의 금문역학
3.2.1 이병헌의 시대와 강유위
眞菴 李炳憲(1870-1940)은 19세기말에서 20세기 초 격동의 시대에 유교종교화 운동을 통해 유교의 개혁을 시도한 대표적인 개혁사상가이다. 경상도 함양이 고향으로 자는 子明이고 호는 眞菴 혹은 雲房山人이며, 구한말에서 일제강점기에 유교의 개혁을 시도한 대표적인 개혁사상가이다.
본래 이병헌은 다른 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주자학의 보수적 학풍 속에서 과거공부를 했다. 그러다가 동학란과 을미사변의 격변기를 겪으면서 본격적으로 학문을 닦는 데에 뜻을 두었고, 27세 때에 한말 성리학의 거장인 李震相의 高弟로서 당시 영남 유학자의 대표적 인물인 郭鍾錫(1846-1919)의 문하에 입문하였고, 이후 영호남지역에서 활동하던 당시의 성리학자들과 교류하였다. 그러다가 34세 되던 1903년에 康有爲(1858-1927)가 주도하여 일으켰던 戊戌變法에 관한 『淸國戊戌變法記』라는 책을 읽고 개화론자로 전환하여 혁신적 사상을 갖게 되었다.
<그림 3 강유위>
그는 구한말의 절망적 상황 속에서 기존 성리학의 한계를 절감하고, 강유위의 孔敎 운동을 도입해서 새로운 유교개혁운동을 실천하였다. 그는 당시의 불편한 사정에도 불구하고 45세(1914년)에 중국에 들어가 강유위를 만난 것을 필두로, 이후에도 1916년(47세), 1920년(51세), 1923년(54세), 1925년(56세) 10여 년 동안 모두 다섯 차례에 걸쳐 직접 강유위와 만나 교유하면서, 평생에 걸쳐 유교종교화 운동을 위해 고군분투하였다.
4.2.2 금문역학과 유교개혁 사상
그는 강유위의 영향 하에 지금까지의 주자학이 攘夷斥邪와 訓?詞章만 일삼아 先聖의 神道設敎와 春秋三世論에 전혀 맞지 아니하며, 시대변화의 대세에 상응하지 못하였다고 그 폐단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또한 孔子의 도는 程子?朱子?晦齋?退溪?栗谷 등의 후세 학자를 통해서는 나아갈 수 없다고 성리학의 한계를 지적하고 , 이들의 틀을 넘어서는 새로운 유교개혁운동을 전개했다.
그래서 그는 유교를 종교화하는 방식으로 개혁해야 한다고 하면서 孔敎운동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이병헌은 유교개혁과 종교화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儒敎復原論 에서 중점적으로 밝히고 있다. 그에 의하면 ‘복원’이란 유교의 原狀을 회복하는 것이고 , ‘유교란 공자의 가르침’ 이라고 한다. 그의 언급에 따른다면, 유교의 복원이란 결국 공자의 가르침의 본질과 근거를 조명하는 데에서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공자 가르침의 근원은 무엇인가?
“공자가 敎로 삼은 바는 神道로써 베푼 것이다. 그러므로 孔敎의 大原을 연구할 때 신을 버리고 말미암을 바가 없다.”
<그림 4 이병헌>
이병헌이 볼 때, 공자 가르침의 근거와 근원은 神道에 있다. 그런데 지금의 儒者들은 그 본질을 아지 못하고, 下學의 一端에 치우치고 입으로나 줄줄 외워서 출세의 수단으로 삼는 末習에 빠져있을 뿐, 우주의 眞神이 조화의 주재임을 모르고 있다. 따라서 이 잘못된 폐단을 바로잡고 훼손된 공교의 근본을 연구하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은 바로 ‘神’을 밝히는 것이다.
그는 神을 氣의 한 속성으로 해석하는 성리학적 견해에서 벗어나, 만물을 主宰하는 실체로서의 위상을 정립한다. 이병헌은 유교개혁의 한 방법으로서, 성리학의 존재론적 기본범주인 形.氣.理.神등의 개념을 검토하면서 理氣論 체계 속에 가려졌던 신개념을 위로는 만물의 조화를 주재하는 상제가 되고 아래로는 내 마음의 신명의 주체로서 전면에 부각시켰다. 그렇다면 이병헌이 공교의 근원으로서 유교의 전면에 신을 내세운 이유는 무엇일까? 그 해답은 다음의 인용문에 잘 나타나있다.
“신이란 한 글자는 주역의 핵심이며...신은 종교의 표본이 되고, 천도의 극치가 된다.
그는 이런 관점에서 주역을 새롭게 해석한다. 예를 들면 觀卦의 彖傳에 “聖人神道設敎以天下服矣‘”에서의 ‘敎자는 범연히 볼 수 없고 여기에서의 성인은 평범한 칭호가 아니니, 神道를 設敎하는 성인으로서 구세의 교주가 됨을 알아야 한다고 하였다.
이와같이 이병헌은 신도를 내세워 유교의 종교성을 주장하였다. ‘나라를 망하게 한 종교’라는 비난을 받았던 유교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다른 세계종교와 같은 자격을 지니고 있을 뿐 아니라, 타종교에 비해서 유교가 우월하다는 점을 선전해야할 필요가 있었다. 그는 주역에 대한 주석을 통해 보다 적극적으로 당시 득세하던 천주교와 개신교 등의 타종교들을 능가하는 유교의 차별성과 우월성을 공세적으로 드러내려고 했다.
그는 특히 유교가 우리 민족에게서 나온 종교라는 점을 말하면서 유교의 근원은 복희와 순임금에서 시작되는데, 복희와 순임금이 조선사람이라는 사실을 자세히 논증하였다. 더 나아가 그는
“사람들이 공자가 중국의 성인임을 알고 우리나라의 동족임을 알지 못하고, 공교가 중국의 종교인줄을 알고 우리나라의 종교임을 알지 못하는 것은 아직 생각하지 못한 것이라 하겠다.”
라고 하여, 공자도 우리나라 사람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특히 그는 복희를 백두산 아래서 일어나 서쪽으로 중원에서 제왕이 되었다 하고, 주역에서 말하는 “제왕이 진에서 나왔다”(帝出乎震)는 구절에서 제왕은 복희요, 震은 동방인 우리나라를 가리키는 것이라 해석하고, 이에 근거하여 복희를 우리나라 사람이라 주장하는 등 이전 시기의 역학과는 전연 다르게 주역의 작자와 성인문제를 우리 민족 중심으로 재해석해서 이해하기도 했다.
3.3 也山 李達(1889-1958)의 역학
3.3.1 이달의 생애
也山 李達(1889-1958)은 1889년 9월 16일 慶北 金陵郡 龜城面 上院里의 마들이(馬杜里)에서 출생했다. 관향은 延安이며 본명은 ?永, 字는 汝會다. '達'이란 이름은 自名이고 也山도 自號이다. 어려서부터 영민하여 고향에서는 金時習의 화신이라는 명성을 들었다고 한다. 15세 되던 해에는 대학의 순서가 錯簡되었음을 지적하였는데, 말년에 大學의 錯簡을 考定해서 현재 전해지는 대학의 순서를 고쳐서 바로 잡기도 했다.
15세-19세 무렵에는 숙부의 命으로 三道峰을 중심으로 여러 산을 다니며 修道하였으며 속세로 나왔을 때에는 거짓 미친 척 함으로써 사람들에게 狂人소리를 듣기도 했다. 당시의 일본경찰들도 주역에 미친 사람이란 의미로 야산을 '李周易'이란 별명으로 불렀다고 한다.
19세-20세 무렵에는 甑山先生과 만났다고 한다. 金三一(증산선생의 양외손자)의 말에 의하면, 증산선생이 여러 제자들에게 말하기를 "오는 성인이 있으면 가는 성인도 있는 법이다. 너희들이 앞으로 모르겠거든 야산선생 집의 벼름박(벽)을 보도록 하여라"고 했다 한다. 21세 되던 해에는 母親喪을 당하여 3년을 侍墓하였다. 28세 되던 해(1916)에는 금강산에서 道伴인 최재규, 홍부일, 이세영과 함께 百日공부를 했다. 공부를 마치고 出山하면서 스스로 '達'이라 자명했는데, '달'로 이름 삼은데 대하여 "선천은 양이 주장하고 후천은 음이 주장하니 곧 달로 이름한 뜻이라"고 하였다.
<그림 5 야산선생>
30-35세(1918-1923) 무렵에는 전국을 周遊하면서 수도를 했다. 道伴 최재규와 함께 대부분을 지리산에서 수도하였고 주로 전라도 지역을 여행하며 견문을 넓혔다. 36세되던 해(1924)에는 민족을 구원할 方便으로 "돈을 벌어 조선인 모두에게 혜택이 돌아가게 해서 결국 나라의 독립을 이루겠다."는 誓願을 세우고 대구, 영천, 성주, 무주 등에서 米豆와 金鑛事業을 하기도 했다. 이 자금으로 1929년 41세 때에는 강원도 철원지방에 수십만 평을 매입하여 농장을 크게 짓고 고향 김천에 내려 와서 貧民 20여 호를 이주시키고 5년여 공동생활을 하였다. 1941년 52세 무렵에는 11월 24일 裡里 墨洞으로 이사해서 거짓으로 미친 척하며 생활하였다.
1944년 56세 되던 해 8월 24일에는 庚元歷이란 주역에 기초한 새로운 달력을 만들었다. 1945년 (57세)2월 대둔산 아래 水落里로 이사했고 58세 되던 이듬해부터는 봄에 비어있던 대둔산의 작은 암자 석천암에서 후진을 양성하기 시작했고, 가을에 홍역학회를 창설했다. 이로부터 본격적으로 주역을 강의하기 시작했는데, 석천사에 '石井'이라 내걸고 108명의 제자들에게 주역과 홍범구주를 깊이 연구하게 했고, 12,000명의 회원을 모았다. 1947년 59세 12월 초 瑞山 安眠島로 이사했고, 1948년 60세 되던 해 10월에는 충남지역의 종교를 묶어 자생적 민간조직단체인 太極之下宗敎聯合會를 결성하였다.
1951년 63세 1월 13일 부여 은산으로 이주 「三一學院」을 짓고 남자 64명과 여자 6명의 제자를 가르쳤다. 5월에는 단군을 모신 檀皇陟降碑를 三一壇 위에 세운 뒤에 매년 10월 3일에 大祭를 거행하였다. 1953년 65세 3월 17일 부여읍 구교리로 이주했고, 1954년 66세2월 1일 甲午 申命行事를 거행했다. 이듬해인 1955년 67세 11월 百濟學會 조직했다. 1957년 69세1월 1일에는 그의 최후의 역저라고 할 수 있는 大學의 錯簡을 바로잡고 大學錯簡考正敍記를 지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58년 70세를 일기로 작고했다.
3.3.2 홍역학 사상
야산의 생애를 살펴보면 그는 10대 후반에서부터 주역에 미친 사람이란 소리를 들을 정도로 주역 연구에 몰두해서, 2-30대에는 공부와 수도에 전념했고, 40대에는 현실 속에서 사회사업을 벌이다가, 50대인 해방직전 부터 경원력 제작을 시작으로 해방 무렵부터 주역의 연구와 전수에 전념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서경 홍범편과 주역과 대학을 특히 중시해서, 이 3편의 이름에서 한 글자씩을 따서 洪易學이란 이름으로 자신의 역학사상을 불렀다고 한다. 야산은 많은 저술을 남겨서 현재 『야산선생문집』이 전해지며, 특히 주역에 관한 도판이 상당수 전해지고 있다. 그중에서도 그의 대표작 중의 하나인 경원력은 그의 독특한 역학사상의 정화로 꼽힌다. 경원력과 더불어 그는 지금까지 아무도 설명하지 못했던 선천에서 후천의 변화를 주역의 乾卦 文言傳의 내용에 근거해서 설명한다든지, 주역의 괘효사를 당시의 한국의 현실이나 단군사상이나 우리 전래의 비결 및 당대의 讖謠등과도 연결시켜 우리식으로 설명하는 등 이전과는 판연히 구별되는 독창적인 역학을 수립했다.
한마디로 그는 일제강점기에서 민족상잔의 비극이란 격동기를 겪으면서 後天 즉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역학적으로 설명하면서, 특히 중국이 아닌 우리의 현실을 중심으로 주역을 이해하고 응용하려 한 역학자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중국의 주역을 수입해 와서 程朱를 답습해가면서 알아보자는 조선시대 성리학자들과는 완연히 구별되는 한국역학 혹은 현대역학의 최고봉이라 불러도 무방하리라 생각한다. 그의 역학사상은 그의 제자들에 의해 오늘날 洪易學會(사단법인 동방문화진흥회의 전신) 아산학회 등으로 계승되어 연구되고 있다.
4. 결론
조선시대는 성리학의 시대였다. 성리학에서는 주역과 중용을 그 이론적 원천이라고 여겨서 이들을 매우 중시하였다. 그래서 성리학을 신봉하던 조선시대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주역사상은 하나의 생활규범으로 그들 삶의 일부가 되었다. 그러나 조선왕조의 패망 앞에 유교라는 이데올로기는 그 책임을 면하기 어렵게 되었다. 어떤 경우에는 유림의 고루함과 무기력에 대한 비판이 날카롭게 전개되기도 했다. 일제의 침탈로 인한 조선의 패망은 유교와 유림에 대한 반성을 불러일으켰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사실 유교 자체에서는 자신들의 공과를 체계적으로 반성하지도 못했고, 조선의 패망이나 민족상잔의 전쟁이란 민족적 비극을 제대로 설명하지도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지도 못했다.
조선패망에서 일제강점 나아가 6.25의 민족상잔이란 엄청난 비극을 겪으면서, 유교가 사회에 대해 누리던 권위에 커다란 손상을 당했던 것은 사실이다. 또한 급속한 근대화 서구화의 물결 속에서 유교적 가치는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설득력을 잃은 것도 사실이다. 한편 일본을 비롯하여 한국, 대만, 싱가포르 등 일부 아시아 지역의 경제발전은 기적에 가까운 비약적인 것이었다. 이런 경제발전에 대한 정치 경제 사회 등의 현상에 대한 분석을 통해, 막스베버가 동양의 정체성의 원인으로 지목하였던 유가 사상이 오히려 동아시아적 가치의 원동력으로 순기능을 하는 것으로 재조명되기도 했다. 사실 그간 유교가 지배해왔던 중화문화 2천년의 역사를 살펴본다면 개항이후 100년의 역사가 이들을 다 불식시키지 못한 것은 당연한 사실이다. 그러나 최근 동아시아 각국이 금융위기를 위시한 경제적 어려움을 겪으면서 세계화라는 새로운 조류 속에서 더욱 각자의 전통성이 서구화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조선의 패망과 중화주의의 붕괴 속에서 힘을 잃은 유교/성리학과는 달리, 왜 주역에서만은 새로운 시각과 연구경향이 일어났으며, 독자적인 근대의 한국주역이 흥기했던 것이었을까? 그 이유로는 우선 전통학문체계에서 갖는 주역의 특별한 성격과 중요성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주역은 유가경전으로 일컬어지는 오경의 으뜸이자 십삼경의 최고봉일 뿐 아니라, 더 나아가 동양문명의 근원으로서 칭송된다는 점에서 다른 경서류와는 구별되는 중요성과 위상을 갖고 있다. 이런 점에서 하늘처럼 믿고 따랐던 조선왕조가 붕괴되어 미개한 나라로 멸시해왔던 일본에 병합되는 전무후무한 격변을 주역의 철리를 통해 이해하려고 했었을 것이다. 또 한 가지는 주역이란 책 자체가 갖는 내용적 속성의 문제에서 살펴볼 수 있다. 즉 일반적으로 주역은 天道의 변화를 토대로 人事의 변화에 대처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고 본다. 이런 측면에서 서구 제국주의의 침탈과 조선 및 청나라의 멸망이란 엄청난 변화의 근본원인을 역학적 탐구를 통해 이해하고 극복하는 방안을 찾아보려 했다는 것이다. 그 결과로 일부나 진암 야산과 같은 역학자들이 등장할 수 있었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이렇게 주역을 통해 난세를 극복하려는 이런 경향은 중국이나 일본등지에서 찾아볼 수 없는 조선 역학의 독자적인 흐름과 특징이 되었다. 이런 경향은 근현대에 지속되어서 정주의 역학에서 벗어난 독자적인 역학의 부흥을 맞이할 수 있었다.
일부의 정역은 바로 조선말의 암울한 시기에 새 시대를 역학적으로 알리며 등장한 한국주역의 새로운 지평을 연 것이었다. 진암의 경우 孔敎운동을 전개하면서 유교의 종교적 각성을 주창했다는 점에서 이전 유교와는 구별되는 독특한 위상을 지닌다. 또한 금문경학의 영향을 받아 주역을 통해 새로운 사상을 꿈꾼다든지 단군사상과의 연관관계를 강조한다든지 주역에 있어서 유불선 삼교합일사상이 나타나기도 했다. 야산의 경우에도 단군보다 箕子를 강조하던 이전의 성리학자들과는 달리 민족의 시조이자 새 시대의 표상으로서 단군을 정립하고 천부경을 연구하고 삼일학원이나 삼일단을 건립하는 등에서 단군사상과 주역을 결합시킨 모습을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우리는 근대의 혼란과 전환기에서 특히 주역연구를 통해 위기상황을 이해하고 나아가 그 대안을 역학 속에서 찾았음을 볼 수 있다. 필자의 생각으로 이런 경향은 중국이나 일본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우리나라만의 독특한 현상이었다고 본다.
이 과도기의 시대에 이전의 성리학적 관점과는 다른 새로운 역학을 시도한 학자로는 蓮潭 李雲圭, 창부 김영태(1863-1945), 하상역, 범부 김정설, 석곡 李圭晙(1855-1923), 한 장경, 이태일, 최석기, 한규성 등을 들 수 있다.
한무제가 유학을 국교로 정하자 유교가 국교로서 대두되었고, 경학이 입신출세의 지름길로 크게 성행하게 되었다. 前漢 초에 들어와서 전국말에서 진을 거쳐 한 대에 이르기까지의 오랜 기간의 전란으로 없어진 경전을 옛날의 학자들에게 암송을 시켜 새로이 경전을 만들었는데, 이를 今文이라고 부른다. 그 뒤 後漢때에 공자의 옛집을 수리하다가 발견되었다고 전해지는 경서가 출현함으로써 경학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즉 전한때 만들어진 今文 경전에 대해 후한 때 발견된 경전은 옛글이라 하여 古文이라 불렀는데, 이 금문과 고문의 일부가 같지 않음으로써 학자 간에 금문과 고문사이의 眞僞에 관한 논의가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특히 청대에 今文經學이 부흥하자, 春秋公羊學을 따라서 흥성하였고, 강유위는 청말에 금문경학에 근거하여 서구열강에 맞서기 위한 유교의 변화를 도모했다.
이정호에 관해서는 곽신환, 학산 이정호의 역학사상, 『동양철학』 제26집, 2006. 참조.
이정호, 『學易纂言』, 대한교과서주식회사, 1982.119-120쪽 인용.
박상화, 『정역과 한국』, 공화출판사, 1981. 521쪽 및 이정호, 『學易纂言』, 대한교과서주식회사, 1982. 130쪽 참조.
유승국, 한국역학사상의 특질과 그 문화적 영향, 이정호, 『學易纂言』, 대한교과서주식회사, 1982. 317-319쪽 인용.
박상화, 『정역과 한국』, 공화출판사, 1981. 346쪽 인용.
박상화, 『정역과 한국』, 공화출판사, 1981. 346-355쪽 참조.
금장태, 『유교개혁사상과 이병헌』, 예문서원, 2003, 18-25쪽. 이병헌의 가계와 성장과정에 대해서는 같은 책, 14-18쪽 참조.
康有爲 (1859~1927) 중국 근대 사상가이자 유신운동의 지도자. 어려서는 성리학을 배웠고 서방과학과 진화론의 영향을 받아 자본주의식으로 중국의 사회정치 경제제도를 개혁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 개혁은 유교 전통의 大同사회사상에 근거하여 새로운 서구적인 방식으로의 개혁 사상을 품게 되었다. 중국의 전통적인 철학 사상을 용으로 삼고 서양학문을 용으로 삼아 1898년에 무술변법운동을 전개하였으나 실패하고 망명하였다. 신해혁명 후에는 저작으로 <대동서(大同書)> <신학위경고(新學僞經考)> <공자개제고(孔子改制考)> 등이 있다.
강유위 사상과 접촉한 뒤에 이병헌의 공교사상의 형성과정은 3기로 구분된다. 제1기는 34세(1903년)에서 44세(1913년)까지 문헌을 통해 강유위의 공교사상의 영향을 받던 시기이고, 제2기는 45세(1914년) 56세(1925년) 다섯 번에 걸쳐 강유위와 만나 공교사상을 체계화하고 공교활동을 전개하던 시기이며, 제3기는 57세(1926년) 이후 만년까지 금문경학을 연구 정리하던 시기이다. 금장태, 『유교개혁사상과 이병헌』, 91쪽.
이상성, ?진암 이병헌의 유교개혁론과 공교운동?, 『한국철학논집』 제4집, 한국철학사연구회, 1994. 147쪽.
박미라, 이병헌의 사상과 민족종교의 관계에 관한 연구,
『儒敎復原論』은 1919년 중국 靑島에서 活字本으로 간행되었다. 그후 1925년 필사본이 나왔는데, 뒤에 “天學”편이 부록으로 붙여졌다.
『李炳憲全集-上』, ?儒敎復原論?, “區區之意 則實欲復孔子之原狀而已.”
『李炳憲全集-上』, ?儒敎復原論?, “儒敎者 孔子之敎也.”
『李炳憲全集-上』, ?心與神異名同義論?, “孔子之所以爲敎者 乃以神道設也 故欲究孔敎之大原 舍神未由也.”
『李炳憲全集-上』, ?心與神異名同義論?, “儒者之徒 偏安乎下學之一隅 出入於口耳之末習 或懲西國迷信遺弊 不知宇宙眞神 爲造化之主宰.”
『李炳憲全集-上』, ?心與神異名同義論?, “且就形氣理神名義而論之 於凡天下之間 視之而可見 觸之而可?者 謂之形 以精元之凝聚 而謂之氣 以端緖之條暢 而謂之理. 今以心爲氣 則見玉之溫栗 而是爲心者也 以心爲理 則見玉之文理 而以是爲心者也 烏足以於心之神明主宰之實者哉.”
『李炳憲全集-下』, 27쪽, ?經說•易說?, “神之一字, 爲易總會處,•••神爲宗敎之標本, 天道之極致.”
유승국, 한국역학사상의 특질과 그 문화적 영향, 이정호, 『學易纂言』, 대한교과서주식회사, 1982. 315쪽 인용.
박미라, 이병헌의 孔敎운동에 나타난 神道論 연구-性卽理에서 心卽神으로의 전환, 『동양철학연구』 38집, 동양철학연구회, 2004 참조.
『李炳憲全集-上』, 369쪽, ?歷史正義辨證錄•吾族當奉儒敎論?, 참조.
『李炳憲全集-上』, 254쪽, ?蹈海叢談?, “人知孔子爲支那之聖, 而不知爲東方之族, 知孔敎爲支那之敎, 而不知爲東方之敎, 則殆未之思也.” 이외에도 ?論孔子爲東方之族孔敎爲東方之敎? 에도 같은 내용이 나온다.
박미라, 이병헌의 사상과 민족종교의 관계에 대한 연구- 대종교와 천도교의 교리를 중심으로, 『한국사상과 문화』 24집, 한국사상문화학회, 2004 참조.
『동인』, 홍역학회, 94.4 - 94.9월호 및 김석진 『스승의길 주역의 길』한길사 2001, 499쪽 참조.와 156
이 무렵 권씨가 태백산에서 檀君이 내리신 글이라 하며 '西南得朋 東北喪朋' 八字를 전해준 것이 계기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야산은「檀皇陟降之位」6자 비문을 손수 정으로 쪼아 새겼다고 한다.(동인 95.12 및 김석진 『스승의길 주역의 길』156쪽 참조)
집 마당 가운데에 황토 흙으로 五德地를 새기고 天祭(建正大祭)를 지낸 다음 鼓之舞之하며 神道를 행하였는데 이 행사 중에 선생은 神道로써 五代聖人과 左右日直神을 封하고 기타 歷代의 여러 聖神을 設位하여 告天하는 등 先天事를 매듭지었으며 종전의 井田圖를 개작하였다
100명을 한정하고 會를 조직하여 同病相憐으로 同力相濟하기를 바라며 야산의 거처를 修道의 장소로서 사용되길 바란 것이다. 그러나 백제회에 가입하려는 수가 백명을 넘어서자 야산은 백제학회를 旣濟會라 하고 뒤에 가입한 49명과 부인들만으로 이루어진 458명에 대해 坎離案을 짓고 千濟學會로써 未濟之遐策으로 삼았다.
경원력이란 후천시대의 책력이란 뜻으로, 주역에서 庚甲이 바뀌는 원리에 의해 1944년 8월 24일(음력 7월 6일) 연월일시가 모두 庚申을 이루는 때에 맞춰 창제되었는데, 12달의 역법체계를 天道가 주관하는 6周360易과 地道가 관장하는 天空易(5와 1/4易)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동방문화진흥회 홈페이지 http://www.dongbang.or.kr/ 에 실린 이응문의 경원력 해설 참조.
김학권, 한국에서 주역연구의 회고와 전망, 철학연구 95집, 2005. 53쪽 인용.
당시 유림에 대한 비판은 신용하, ?박은식의 유교구신론?양명학론?대동사상?, 『역사학보』73호, 1977, 200-201쪽에 잘 나타나있다.
이와 관련된 논의로는 로이 호프하인즈, 『동아시아의 도전』, 을유문화사, 1983. 김일곤, 『유교문화권의 질서와 경제』, 한국경제신문사, 1985.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현대신유학 연구』, 동녘, 1994. 아산사회복지사업재단, 『21세기의 도전, 동양의 윤리』, 1998. 등을 보라.
임채우, 도가는 반경제적인가?, 『동아시아의 문화와 사상』제2호, 열화당(동아시아문화포럼), 1999 및 林采佑, 道家是否定經濟???-從其接近方法?實用主義視角來看道家經濟思想之現代含義-, 『延邊大學社會科學學報』, 2006년도 제4기, 中國 延吉: 延邊大學社會科學學報編輯部.참조.
『이병헌선생문집』 및 삼일학원에 삼일단을 짓고 단군비를 세운 것 등이 진암과 야산의 단군사상과 주역을 결합시킨 특징을 볼 수 있다.
동인 및 곽신환, 학산 이정호의 역학사상, 『동양철학』 제26집, 74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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