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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타락 전 예정설 vs 타락 후 예정설
📌단일예정론(single predestination)과 이중예정론(double predestination)
📌예정예지(칼빈주의) vs 예지예정(알마니안)대한 차이
📌절대예정(이것에 대한 인본적 가치관의 거부감웨슬레의 반박)
예정설(豫定說, predestination)
예정설(豫定說)이란 구원과 하나님의 선택에 대한 개신교의 신학 이론을 지칭하는 말이며, 종종 좁은 의미로 개혁주의 즉, 장로교회와 개혁교회의 이중예정론을 의미하기도 한다. 예정설에서는 구원은 인간의 행위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스스로 구원할 능력이 없는 인간을 선택함으로써 이루어진다고 설명함으로써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와 주권을 강조한다.
오늘날에는 예정이라는 용어를 결정론 및 운명론과 구별해서 사용하고 인간의 도덕의지의 자유로운 결정에 종속되는 것으로 보지만, 이 교리는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영원한 섭리에 근거한다고 가르친다. 예정 문제의 근본주제들은 기독교라는 종교만큼이나 보편적인 것이고, 신약성서가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강조함으로써 그리스도교 신학에서 특히 두드러진 쟁점이 되었다.
이제까지 발전되어온 예정교리는 3가지 유형으로 나누어지며, 거기서 여러 가지 변형태들이 나타났다.
반펠라기우스주의, 유명론의 일부 형태들, 아르미니우스주의와 연관된 이론은 예지를 예정의 근거로 삼으며, 하나님이 사람들의 미래의 신앙과 공적을 미리 알고 구원을 예정했다고 가르친다.
이 유형과 반대편 극단에 있는 것은 이중예정(二重豫定) 교리로서, 보통 장 칼뱅이 주장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더욱 정확하게 말하자면 도르트 교회회의가 주장한 것이다. 이 교리는 성 아우구스티누스와 마르틴 루터의 몇몇 저서들과 얀센주의자들의 사상에서도 나타난다.
이 교리에 따르면 하느님은 영원 전부터 사람들이 신앙·사랑·공적 등을 갖든 갖지 못하든 구원할 사람과 멸망시킬 사람을 결정해 놓았다고 한다(→칼뱅주의).
3번째 교리는 성 아우구스티누스와 루터의 저서들, 제2차 오랑주 공의회(529)가 발표한 법령들,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사상에서 나타난다. 이 교리에 따르면, 사람이 구원을 받는 것은 하느님이 값없이 내리는 은총, 따라서 예정에 의한 것이지만, 사람이 멸망당하는 것은 그 사람의 죄와 죄책(罪責)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스도교의 예정 교리들은 롬8:29~30을 해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개혁주의 이중예정론
개혁주의 예정론은 인간의 전적 부패와 구원에 관한 전적 은혜를 그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해를 돕기 위해 간략히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사람에게는 자유로운 선택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범죄로 타락한 까닭에 회개하기를 거부한다는 것이다. (전적 타락: 루터는 이를 보고 '인간의 의지는 죄의 노예'라고 하였다.)
(저항할 수 없는 은혜: 이러한 인간의 거부와 불순종을 바꾸어 놓을 수 있는 것은 인간의 양심이나 노력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 밖에 없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개혁주의 예정론은 하나님께서 천지창조를 하시기 이전, 곧 시간조차 창조되지 않은 하나님의 영역에서, 창조 후 인간의 멸망을 아시사 그 가운데서 일부를 아무 조건 없이 선택하사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다는 것이다. 이는 누구를 방치하실 것인가에 정하셨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이중예정론이라고 불린다.
운명론과의 차이
이중예정론과 운명론의 차이는 운명론의 경우 과거의 어떤 시점에서 미래의 일을 결정지었다는 이론이지만, 이중예정론은 과거-현재-미래라는 시간의 축을 초월한 신의 영역에서의 결정을 이야기하는 것이며, 이렇게 시간을 초월하여 결정된 사실은 시간에 갇혀있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시공간이 창조되기 전에 이루어진 것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게 된다.
신학적인 체계화
이러한 이중예정론은 일찍이 어거스틴이 주장하여 '어거스틴주의'라는 별명이 붙어있다(자세한 것은 어거스틴-펠라기우스 논쟁 참조). 그러나 신학적으로 체계화 된 것은 종교개혁 때 개혁자들에 의해서였다. 특히 마르틴 루터의《노예의지론(Bondage of will)》은 이에 대한 변증서로 유명하다. 그래서 이중예정론은 개혁주의 신학의 한 특징이 되었다. 특히 개혁주의에서 얘기하는 칼뱅주의 5대 강령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이중예정론은 칼뱅주의 5대 강령 중 무조건적인 선택(unconditional election)의 첫 번째 항목에 명문화되어있다. 즉, 구원은 사람의 어떠한 행위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혜로만 받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것이 멸망 받는 사람의 책임을 없애지는 못하는 것은, 예정론은 모든 인류가 멸망 가운데 있는데 하느님께서 그 중 몇몇을 구원하기로 하셨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구원 받은 사람들은 자신의 구원을 자랑하지 못하며, 멸망 받은 사람들은 자신의 죄에 대한 책임을 면하지 못한다. 루터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만일 [구원 받을] 자격 없는 사람에게 상을 베푸시는 하느님이 당신의 마음에 든다면, [구원 받을] 자격 없는 사람을 하느님께서 멸망시키실 때 당신은 불평하면 안 됩니다.”더 자세한 것은 아래“자유의지와 이중예정론”을 보라.
이중예정론에 대한 근거로 개혁주의자들이 내세우는 성경 구절로 다음이 있다:
○공동번역
¶롬9:11 그 아들들이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고, 따라서 선이나 악을 행하기도 전에 하나님께서는 리브가에게 "형이 동생을 섬기게 될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사람의 선행을 보시고 불러주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뜻대로 불러주시며 선택의 원리에 의해서 당신의 계획을 이루십니다.
¶롬9:16 하나님의 선택을 받고 안 받는 것은 인간의 의지나 노력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의 자비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롬9:16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뜻대로 어떤 사람에게는 자비를 베푸시고 또 어떤 사람은 완고하게도 하십니다.
¶엡1:5-6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기로 미리 정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뜻하시고 기뻐하시는 일이었습니다. 사랑하시는 아드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거저 주신 이 영광스러운 은총에 대하여 우리는 하느님을 찬양할 수밖에 없습니다.
¶잠16:4 야훼께서는 모든 것을 각각 쓰임에 맞게 만드셨으니 불의한 사람은 재앙이 내리는 날에 재앙받을 사람으로 만드신 것이다.
○개역개정
¶롬9:10-18
10 그뿐 아니라 또한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는데
11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12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13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14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15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16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17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18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
¶엡1:5-6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잠16:4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쓰임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
자유의지 및 자유선택에 대한 이중예정론의 견해
이중예정론과 관련된 흔한 오해 중 하나는 이중예정론이 인간의 자유로운 선택권을 부정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정론은 인간의 선택권에 대한 이론이 아니라 인간의 영혼의 상태에 대한 이론이다. 즉, 자유로운 선택권은 의심할 나위 없이 인간에게 주어진 것이지만, 원죄로 인하여 타락한 자연인은 하나님을 싫어하는 심성 때문에 자신의 자유로운 선택권을 가지고 하나님을 사랑하려는 선택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며,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심성을 바꾸고 새롭게 만들어 주실 때까지 계속된다는 것이다.
(범죄하기 전 아담에게 주어진 행위 언약과 아담의 범죄 이후 주어진 은혜 언약의 차이를 생각해보자)
다시 말하자면, 자연인은 자신의 자유로운 선택으로 항상 죄의 종노릇 하는 길을 취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이중예정론은
자연인은 자신이 "원하는" 선택을 할 수 있다는 자유선택권을 인정하되
자연인의 "소원하는 바", 즉 그 "의지"는 죄의 지배를 받는다는 노예의지론을 가르친다.
이와 관련하여 기독교 역사에서 크게 두 가지 대척적인 입장이 있어 왔다:
ⓐ합력설(synergism): 하나님이 구원의 길을 마련하시지만, 사람이 그것을 취하느냐의 여부는 인간에게 달려있다. 즉, 구원은 하나님과 사람의 합작이라는 것이다.
ⓑ단독설(monergism): 하나님이 구원의 길을 마련하실 뿐만 아니라, 사람이 그것을 취하는 것도 그리 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해주셔야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즉, 구원은 하나님께만 달려있다는 것이다.
에라스무스는 개혁주의의 단독설에 대해 "그렇다면 누가 노력하며 자기 삶을 개선하려 할 것인가?" 하고 물었다. 이에 대해 루터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 "아무도 없다! 아무도 할 수 없다! 하나님은 당신과 같이 자기개선을 하려는 사람을 대하실 시간이 없는 것은 그들이 위선자이기 때문이다. 선택 받은 자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그들이, 성령에 의해 개선될 것이다. 나머지는 개선되지 못하고 멸망할 것이다". 에라스무스는 또 "누가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랑하신다고 믿겠는가?"하고 물었다. 이에 대해 루터는 "아무도 없다! 아무도 할 수 없다! 오직 택함 받은 자들 만이 믿을 것이다. 그리고 나머지는 믿지 못하고 멸망할 것이다; 당신의 표현처럼, 화를 내며 신성모독하면서."
합력설을 주장하는 신학사상을 넓게는 알미니안주의라고 하며, 단독설을 주장하는 신학사상은 넓게 어거스틴주의라고 한다. 예정론은 물론 어거스틴주의에 해당한다. 오늘날 어거스틴주의를 주장하는 교파는 장로교회와 개혁교회가 있으며, 이 외의 종파들은 대개 알미니안주의를 따르고 있다.
보통 협력설을 주장할 경우 구원이 사람의 결정에 달려 있으므로 한 번 구원을 얻었던 사람도 훗날 구원을 잃어버리거나 취소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단독설을 주장할 경우 구원은 하나님의 선택에 의해 시작하고 또 하나님에 의해 완성되므로 한 번 시작된 구원의 역사가 취소되거나 실패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중예정론과 구원의 방도
개혁주의 예정론의 또 한 가지 특징은 구원에 대한 택정과 유기 외에도 구원의 방도까지 다 예정하셨다는 것이다. 자세한 것은 언약신학을 보라.
역사
처음 합력설과 단독설의 논쟁 교회에서 불거진 사건이 4~5세기에 있었던 어거스틴-펠라기우스 논쟁이다. 어거스틴은 단독설을 주장하였고 펠라기우스는 합력설을 주장하였는데, 카르타고 회의에서 기독교회는 어거스틴의 이론을 채택하였고, 이리하여 단독설에 어거스틴주의라는 별명이 붙게 되었다.
그러나 곧 로마교회는 알미니안주의로 회귀하게 되는데, 다시 어거스틴주의가 등장하게 된 것이 종교개혁자들을 통해서였다. 종교개혁 당시 이러한 어거스틴주의식 원죄론에 반대하고 '사람은 하나님이 심성을 따로 바꾸어 주시지 않아도 스스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한 사람 중 대표적인 사람이 에라스무스다. 여기에 반박하고 '전적 타락'설을 주장한 것이 루터의《노예의지론(Bondage of the Will)》이다. 에라스무스의 주장은 합력설에 해당하며, 루터의 주장은 단독설에 해당된다. 합력설과 단독설의 논쟁은 기독교 초창기에 이미 있었고, 잘 알려진 것이 4~5세기에였 있었던 영국의 신학자인 펠라기우스와 교부 어거스틴 주교와 논쟁이다. 펠라기우스는 합력설을 주장하였다.
종교개혁 이후로는 17세기에 알미니우스를 따르는 알미니안주의자들이 합력설을 주장하였다. 이때 알미니안주의자들의 주장에 반박하면서 도르트 총회에서 작성된 것이 '칼빈주의의 5대 강령'이다.
18세기에는 성공회 사제이자 감리교회 창시자인 웨슬리가 합력설을 주장하였다.
관련된 성서 구절
예정론의 근거로서 자주 인용되는 성서 구절들로 다음이 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 ...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요한복음서 6:37,39,40,44)
위 구절들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믿음을 주시지 않으면 사람이 스스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없다는 것과, 한 번 그리스도를 믿고 나온 자는 구원을 잃어버릴 수 없다는 이론의 근거로 자주 등장한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에베소서 1:4)
위 구절은 하나님의 선택은 세상이 창조되기 전에 이루어진 것이란 이론의 근거로 종종 쓰인다. 이때 "창세 전"이란 시간조차 창조 되기 전, 즉 시간을 초월한 신의 영역에서의 결정이란 뜻으로 주로 해석된다. 그러므로 시간이란 축 위에서 과거의 어떤 시점에 미래의 일이 결정되었다는 운명론과는 차이가 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요한복음 1:12,13)
위 구절은 하나님의 선택은 사람의 의지나 선택에 상관 없이 무조건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란 이론의 근거로 종종 쓰인다.
"주께서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에 관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하심이니" (데살로니가후서 2:13)
[1]¶엡1:4-5
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2]¶렘31:31-33
31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
32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맺은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깨뜨렸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33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 타락 전 예정설 vs 타락 후 예정설
타락 후 예정설은 아담의 타락을 예측하지 못하는 하나님이란 측면에서 하나님의 전지하심에 제한을 준다.
정리
타락전 선택설/ 타락후 선택설
개혁주의 신학 내에서 예정의 순서를 설명하는 두 이론이 바로 타락전선택설과 타락후선택설이다. 두 이론들을 옹호하는 신학자들은 각기 상대편을 심하게 공격하기도 하였지만, 개혁주의 고백서 중에서 어느 한쪽을 편들면서 다른 한쪽을 정죄한 적은 없다. 따라서 이 두 이론은 개혁주의 신학 내에서 모두 용납되고 있다. 수에 있어서, 타락 후 선택설을 옹호하는 입장이 많은 것은 사실이다.
용어의 정리
모든 신학이 그렇지만 용어를 정확하게 정리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타락전 선택설은 Supralapsarianism 타락후 선택설은 Infralapsarianism이다. 이 점에서 한국어 번역은 오해의 소지를 안고 있다. 에베소서의 말대로“하나님은 창세전에 우리를 택하셨다.”그렇다면 논의할 필요없이 타락전 선택설이 맞을 것이다.
하지만, 타락전/후 선택설은 역사적으로 언제(아담의 타락 이전/후에) 예정이 있었는가의 문제가 아니다. 두 설 모두 하나님의 예정은 창조 전, 따라서 타락 전에 있었다는 것을 다 인정한다. 두 설은 창세전 시간이 없었던 영원 속에서 하나님께서 인간을 어떤 순서로 예정하였는가에 관한 것이다.
영어도 시간적인 의미의 ante/post(전/후)라는 구분을 하지 않고 supra/infra(상/하)라는 구분을 하고 있다. 따라서 용어의 혼란을 없애기 위해서 나는 타락상 선택설/ 타락하 선택설이라는 용어를 쓰겠다: 이하 타상설/ 타하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이 두 설은 영원전, 즉 초시간의 상태에서 하나님의 예정이 어떤 논리적인 순서로 이루어졌는가에 관한 논쟁이다. 따라서 타락전 선택설이 논리적인 순서를 따르고, 타락 후 선택설이 시간적인 순서를 따랐다는 견해는 수정이 필요하다. 둘 다 논리, 그것도 인간 이성의 관점에서 본, 논리적 순서이다. 더구나 누구나 인정하듯이 하나님의 예정은 하나님의 의지(will)의 작용이다. 하나님의 의지의 작용은 단회적이며 어떤 순서를 따르지 않는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것을 놓치면 두 이론 사이의 논쟁의 의미를 완전히 놓치게 된다.
논의의 핵심
이 이론은 예정의 순서에 관한 것이기는 하지만, 순서 그 자체가 논의의 핵심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지나치게 예정의 순서에 대해서 지나치게 관심을 가져서 이 논쟁이 순전히 사변적이라는 인상을 가지게 되었다. 타상/하설의 논쟁에 있어서 순서는 부차적인 문제라는 것을 기억해 두도록 하자. 논의 핵심을 놓치면, 두 설이 왜 그렇게 다투었는지 이해가 잘 가지 않게 된다.
논의의 핵심은 예정의 대상이 정확하게 누구인가에 관한 것이다. 이것은 분명히 신학적으로 논의를 해 볼 말한 문제이다. 가장 일반적으로 말해서, 개혁신학은 하나님이 어떤 사람은 영생에 어떤 사람은 영벌에 이르도록 예정하셨다고 믿는다. 문제는 여기서 말하는“어떤 사람”이 과연 어떤 사람인가이다.
다시 말하지만, 여기서 말하는“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예정 속에 있는 아직 실제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사람을 말한다.
타상설의 경우: 어떤 사람은“앞으로 창조될(creabilis) 그리고 타락될(labilis) 인간”이다. 바꾸어 말하면, 아직 창조되지 않았고, 타락되지 않은 인간이 예정의 대상이다.
[창세전에 이미 영원 가운데 존재하는 아들들]
타하설의 경우: 어떤 사람은“이미 창조되었고(creatus) 타락된(laptus) 인간"이다.
[창세전에 존재하지 않으며, 앞으로 존재할 인간]
논의의 진행
이 조그만 차이가 큰 차이를 가지고 오게 된다. 타상설의 경우 하나님의 예정(개혁주의에서는 항상 선택과 유기의 이중 예정을 말한다) 그 자체가 최우선이 된다. 그 결과 인간의 창조와 타락은 예정을 실행하기 위한 수단이 된다.
따라서 타상설에 따르면,
1.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자비와 공의)을 나타내기 위해서, "창조되고 타락될 인간 중" 어떤 사람은 선택하고 어떤 사람은 유기하기로 예정 하셨다.
2. 1에 따라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기로 하셨다.
3. 하나님은 인간이 타락하도록 허용하셨다.
4. 하나님은 택한 자를 그리스도를 통해서 실제로 구하기로 하셨다.
타상설은 예정의 목적과 그것을 이루어 가는 순단들을 논리적으로 명확하게 설명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예정의 순서를 이런 식으로 설명하면,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쉽지 않다. 일단 1번이 정해지면, 나머지는 1번의 필연적인 결과가 된다. 즉, 하나님의 예정에서 조차, 인간은 타락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도록 창조된 것이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은 죄의 조성자란 비난을 피하는 것이 매우 어렵게 된다.
그래서 타락하 선택설이 등장하게 된다. 이 설에 따르면,
1. 하나님의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서, 인간과 교제하기 위해서 인간을 창조하기로 하셨다.
2. 인간이 타락하는 것을 허용하도록 하셨다.
3. 타락한 인간 중에서 어떤 인간은 선택하기로 하셨다.
4. 3을 위해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실제로 구하기로 하셨다.
타하설의 단점은 예정의 목적와 그것을 이루는 수단 사이의 인과관계가 대단히 불명확하다는 것이다. 특히 1번과 2번과의 관계가 모호하다. 예정은 어떤 계획에 관한 것이다. 그렇다면, 그 계획은 서로가 논리적으로 밀접하게 연관이 있어야 한다.
반대로, 타하설의 장점은 하나님의 죄의 조성자라는 비난으로부터 약간 벗어나게 한다. 예정이 창조 이후에 위치하기 때문에 인간의 창조가 반드시 타락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타락은 하나님의 알 수 없는 비밀에 속한다. 그렇다고 해서 타락 후 선택설이 하나님을 죄의 조성자라는 비난을 완전히 피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타락이 하나님의 예정 속에 있는 한, 인간의 타락은 실제 필연적으로 일어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두 이론의 종합
그렇다면, 두 이론을 절충시킬 수는 없을까?
나는 가능하다고 본다. 일단 예정이라는 용어를 좀 더 명확하게 할 필요가 있다. 일반적인 의미에서 예정은 섭리의 한 부분이다. 섭리의 대상은 온 우주 만물이라면, 예정은 인간에 관한 것이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면, 이 예정 안에 또 하나의 예정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앞의 예정은 넒은 의미에서의 예정이고, 뒤의 예정은 넓은 의미의 예정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예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세밀하게 구분할 필요가 있다. 넒은 의미에서 예정은 인간에 대한 모든 것이라면, 좁은 의미에서 예정은 선택과 받을 사람과 유기될 사 람을 정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넓은 의미에서 예정은 인간의 창조, 타락, 구속이 다 포함되지만, 좁은 의미에 있어서 예정은 그것들을 배제한다.
비록 예정 그 자체가 하나님의 단회적인 행위이지만, 인간적인 관점에서 볼 때, 예정을 순서를 가지고 설명할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순서를 정할 것인가? 먼저, 작정의 목적에 있어서 우리는 타상설의 의견을 존중하지 않을 수 없다. 타상설은 예정에 있어서 목적이 수단에 앞선다는 점을 강조한다. 즉 어떤 계획을 실천함에 있어서 수단을 먼저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목적지를 먼저 정해 놓고 갈 수단을 정해야 하지 수단을 먼저 정해 놓고 목적지를 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정의 최종 목적은 무엇인가? 예정의 목적은 타상설이 타하설보다 훨씬 설득력이 있는 것 같다. 인간 창조가 최종 목적이 될 경우 타락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 일반적으로 타하설은 예정의 목적과 수단의 인과관계를 정확하게 설명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우리는 타상설을 따라, 예정의 목적을 가장 일 순위에 놓고자 한다. 하지만, 타상설과 같이 목적 안에 구체적인 방식까지 포함시키지는 않으려고 한다. 따라서
1.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이중적으로 적용시킴으로(선택과 유기) 영광을 받으시기로 하셨다. 주의: 이 때는 영광을 받을 방식만을 정하였다.
2. 1에 따라 하나님은 창조하시고 타락을 허용하셨다.
3. 창조되고 타락된 사람 중에서 하나님은 자신의 선하신 뜻대로 일부는 선택하고 나머지는 유기하시키로 하셨다.
결론: 1의 관점에서 볼 때 이 견해는 타상설이다. 선택이 타락을 앞선다. 하지만, 3의 관점에서 볼 때 이 견해는 근본적으로 타하설이다. 예정의 대상이 이미 창조되고 타락된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견해가 타상설의 견해를 전폭적으로 배제하는 것 은 아닌 것은 이미 밝힌 바와 같다.
논의의 발전
이제까지 타상설과 타하설의 논의를 순전히 인간에 한정시켜서 생각해 보았다. 그런데 이 논의를 천사에게 까지 확대 시키면 어떻게 될까?
정말로 이상하게도 타상설과 타하설이 서로 논쟁함에 있어서 천사를 심층적으로 다룬 적이 없다. 천사의 경우 시간 안에서 창조와 타락만이 존재하고 구속이 없다. 천사는 번식이 불가능한 존재로 여러 종류로 나누어져 있고, 타락도 일부만 했다. 따라서 천사의 경우 타하설은 적용될 수가 없다. 즉, 천사의 경우 타상설만 가능할 뿐이다. 만약 타상설이 천사에게 적용될 수 있다면, 인간에게도 적용되지 않아야 할 법은 없다. 그렇다면, 개혁신학 안에서 타상설은 얼마든지 용납될 수 있는 것이다. 즉, 타상설이 성경의 가르침에 반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타상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하이퍼 칼비니즘 (hyper-Calvinism)이라고 폄하하는 것은 잘못이다.
앞으로 타락전 선택설과 타락 후 선택설을 보다 온전하게 연구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이 부분을 심도있게 다룰 필요가 있다.
논의의 한계
우리는 이 설을 논의함에 있어서 어떤 한계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비록 인간의 계획에 있어서는 목적과 수단이 구분되고, 목적이 수단을 앞서지만, 과연 하나님께 있어서도 그런 구분이 있을까? 누구나가 다 인정하듯이, 하나님의 전 예정은 단회적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예정의 목적과 수단을 동시에 생각하신다고 보아야 한다.
이 두 논의의 본질적인 차이점도 그 다지 발견되지 않는다. 둘 다 예지 예정을 주장하는 알미니안 주장을 철저하게 배제한다. 하나님의 예정은 인간의 어떤 행위도 고려하지 않는다. 선택받은 사람의 숫자가 변하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타상설이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고, 타하설이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한다는 것도 그다지 올바른 견해는 아니다.
※엡1:1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이 구절이 타락 전 선택설의 근거라고 보기 힘들다. 구속자를 정함과 타락을 아심과 택함을 입을 자들을 예정하심은 전부 창세 전에 이뤄진 것이다. 창세 전에 택함을 입을 자들을 정하신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타락을 미리 아시고서 (창세 전에) 택하신 것이다. 둘 다 창세 전이란 것은 동일하나 순서적으로는 타락을 미리 아심이 먼저이다.
만약 택함 입을 자들을 정하심이 먼저라면 어째서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을 입었겠는가. 택함을 입음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뤄진 것이라면 구속자(그리스도)를 정함이 택하심보다 우선이며, 결국 구속자를 정함보다 타락을 미리 아심이 먼저[혹은 동시]이기에 타락을 미리 아심이 택하심보다 우선이라는 것이다.
결국 이러한 올바른 관점은 전형적인 타락 후 선택설의 관점인 것이다.
정리하면 타락을 아심과 구속자를 정하심과 구원받을 자를 택하심은 모두 창세전에 이뤄졌으나 이 셋 중에 가장 나중에 이뤄진 것이 바로 구원받을 자를 택하심이라는 것이다.
📌 단일예정론(single predestination싱글 프리데스티네이션)과 이중예정론(double predestination더블 프리데스티네이션)
칼빈의 예정론(이중 예정론과 타락전 예정설)
칼빈도 어거스틴의 입장을 따라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한다.
칼빈은 어거스틴의 구원받을 자의 예정(single predestination싱글 프리데스티네이션)을 발전시켜 한걸음 더욱 나아가 구원받을 자의 예정과 멸망 받을 자의 예정도 말하는 이중 예정론(double predestination더블 프리데스티네이션)을 말한다. 즉 모든 사람이 동일한 목적으로 창조된 것이 아니고 어떤 이는 영생으로, 어떤 이는 영벌에 이르도록 미리 정해져 있다고 하는 예정론을 주장한다. 영생에 이를 자를 선택된(elected) 자라 부르고, 선택되지 못한 자를 버림받은(reprobated) 자라 한다. 흔히 칼빈의 이중예정론(double predestination)으로 전해지는 예정의 교리는 하나님께서 구원받을 사람과 멸망할 사람을 창세 전부터 구별하여 예정하셨다고 말한다.(타락전 예정설) 영벌로 예정된 죄인들은 멸망받기 위하여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고 이 세상에 태어난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죄인들은 태어나기 전부터 멸망으로 예정되었기에 멸망받기 위하여 태어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구원으로 예정한 사람들에게는 믿음을 주시고 그 마음을 부드럽게 하사 영생에 이를 수 있게 하시며, 유기(遺棄)된 자는 그들의 악함과 강퍅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셔서 영벌에 이르게 하신다고 한다. 이 예정은 하나님의 영원하시고 불변적인 의지에 따라 결정되었기에 인간의 노력이나 의지에 따라 변경될 수 없는 것이라 한다.
📌“예지 예정(알마니안)”vs“예정 예지(칼빈주의)”대한 견해 차이 분별하기
○칼빈주의: 작가의 뜻대로 쓴 각본(시나리오)대로 창조된 세상의 역사가 과정과 결과까지 그대로 이루어진다는 것
○알미니안주의: 작가의 뜻과 의도를 담아 쓴 각본은 있으나 그 시나리오의 과정과 결과대로 세상의 역사가 성취되는 것이 아니다. 알 수 없는 등장인물의 반응과 선택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게 되고, 하나님은 그 예측할 수 없는 결과를 미리보시고 그 결과대로 세상의 역사의 흐름을 수정해 가신다.
📌 필연(예정론:정해진 시나리오) vs 우연(운명론:정해지지 않고 만들어져 가는 시나리오)
운명론이란...
시공간 속에서 발생한 어떤 스토리의 진행 방식이(연속되는 사건의 전개 과정과 결말) 주인공의 자유의지로 예측할 수 없는 선택과 결말이 연속되어 나온 우발적 스토리를 관찰자의 입장에서 바라보았을때
📌 절대예정(and 그것에 대한 인본적 가치관의 거부감웨슬레의 반박)
절대예정(Absolute Predestination앱솔루트 프리데스티네이션)은 하나님의 경륜을 인간의 의지나 노력으로 변경할 수 없다는 주장인데 하나님께서 인간의 구원에 대해 일단 예정하신 일은 그대로 이루어질 뿐 인간의 태도나 의지에 관계가 없이 절대적이라고 하는 주장이다.
웨슬리는 인간 구원에 있어서 무조건적인 선택(Unconditional Election)의 교리가 성경의 교훈에 맞지도 않고,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성품과 배치된다는 것을 지적하며 칼빈의 예정교리를 비판한다. 웨슬리는 예정론이 말하는 바 하나님은 전능하신 폭군(Almighty Tyrant)으로 인간의 의지나 성향에 관계없이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따라 일방적으로 인간의 멸망을 결정하는 신으로 묘사된다고 비판한다. 하나님께서 죄인의 멸망을 일방적으로 결정하신다면 죄인의 멸망이 하나님께 원인이 있게 되며 따라서 하나님은 죄의 근원이 된다고 말하게 되는 모순을 초래하게 된다.
인간의 구원이나 멸망이 하나님의 기쁘신 뜻과 불변의 경륜에 따라 미리 결정되었다는 주장은 복음을 전하거나 전도하는 일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일이 될 것이라 한다. 구원으로 예정된 이는 복음을 듣든지 안 듣든지 마침내 구원에 이르게 될 것이며, 멸망으로 예정된 이는 복음을 들어도 구원에 이를 수 없게 되니 복음을 전하는 일이나 듣는 일이 모두 무의미한 것이 될 뿐이기 때문이다. 구원으로든 멸망으로든 이미 어떤 사람의 운명이 무조건적으로 미리 결정되어 있고 다만 자기가 어느 쪽으로 결정되어 있는지만 모르는 경우라면 이를 바꾸기 위해 인간 편에서 수고하고 노력하는 일은 무의미하게 된다. 즉 어떤 병자의 장래가 낫든지 죽든지 어느 편으로 이미 결정되어 있고, 어떤 사람이 와서 말하기를 너는 약을 먹든지 안 먹든지 살도록 또는 죽도록 예정되어 있다고 한다면 비록 그가 살 것인지 죽을 것인지는 모른다 해도 이미 결정된 자기의 운명을 바꿀 수 없으니 약을 먹는 일이 무의미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예정론의 교리는 죄 많은 세상에서 거룩하게 살기 위해 노력하는 인간의 의지를 포기하게 하는 비성서적 교훈이라 한다.
사람이 자기의 구원에 대하여 확신이 없어서 자기는 유기되도록 예정되었다고 믿거나 또는 그러리라고 두려워하게 되면 종교적인 위안 대신 불안과 근심을 갖게 될 것이니 예정론이 주는 해라고 본다. 또한 선택의 교리에 만족하는 자 역시 그가 선택되었다고 믿는 것이 사실이 아니고 그가 선택된 수에 들지 못했다면 그의 만족과 위로가 헛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선택되었다고 믿지만 멸망으로 예정되었다면 불못으로 거꾸로 던져질 것이기 때문에 그의 선택에 대한 믿음은 헛될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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