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동구민대학 시창작반 야외강의「미당 서정주의 집」
오늘 오전 11시 사당역 6번 출구 앞 공터에서 만나 미장 서정주의 집에서 시창작반 야외수업을 하는 날이다. 필자는 자료를 준비하여 현장에 10분 전 쯤 도착하니 송방자님께서 먼저 오셨다. 그리고 시간이 다되자 참석 회원님들께서 대부분 도착하셨다.
참석예정이셨던 회장님은 갑작스런 회사일로 오시지 못했다. 유병란 총무님과 김옥자님, 김정희님, 김현주님, 김혜정님, 송방자님, 윤효숙님, 이명희님, 최인선님께서 참석하셨다. 모두는 도보로 10여분 걸어서 미당 서정주의 집에 도착하였다. 30년을 사셨던 당시의 문패가 일행을 반겼다. 서울시 영등포구 사당동이었다. 지금은 서울시 관악구 남현동이다.
담당자의 안내로 관람할 수 있었다. 거실과 부엌, 안방, 화장실, 그리고 이층에 마루, 윗방, 집필실과 화장실이 있다. 사셨던 집을 짓기 위해 설계를 손수 하셨고 들어간 자재나 값을 적어 놓으셨다.
안방에는 사용하시던 모자, 지팡이, 넥타이, 입으셨던 의복이 전시되었다. 이층에는 마루에 사용하시던 애장품, 저서와 흉상이 보였다.
윗방에는 모니터에 영상이 선생의 일생에 대한 요약되어 비쳐지고 있었다. 벽에는 평생에 모습이 사진이나 작품으로 붙어있었다.
집필실에는 생활 모습을 담고 있는 책상과 의자, 도자기에서 퍼지는 시인의 음성이 들리는 듯 했다. 창문을 통해 보였던 관악산 풍경도 이젠 새로 지은 건물로 가려 시원하게 보이지 않았다.
거실 바깥 베란다에서 서정주 시인의 내외분 사진과 함께 참석회원의 기념 사진을 찍었다.
미당 서정주 시인은 본관아 달성(達城), 호는 미당(未堂). 1915년 전라북도 고창(高敞) 출생. 고향의 서당에서 공부한 후, 서울 중앙고등보통학교를 거쳐 1936년 중앙불교전문학교를 중퇴. 1936년「동아일보」신춘문예에 시「벽」으로 등단하여 같은 해 김광균(金光均),·김달진(金達鎭)·,김동인(金東仁) 등과 동인지「시인부락(詩人部落)」을 창간하고 주간을 지냈다. 1941년「화사(花蛇)」,「자화상自畵像)」,「문둥이」등 24편의 시를 묶어 첫시집「화사집」을 출간했다.
그러나 1942년 7월 「매일신보」에 다츠시로 시즈오[達城靜雄]라는 이름으로 평론「시의 이야기-주로 국민 시가에 대하여」를 발표하면서 친일 작품을 쓰기 시작하였다. 이후 1944년까지 친일 문학지인「국민문학」과「국민시가」의 편집에 관여하면서 수필「징병 적령기의 아들을 둔 조선의 어머니에게」(1943),「인보(隣保)의 정신」,「스무 살 된 벗에게」(1943)와 일본어로 쓴 시「항공일에」(1943), 단편소설「최제부의 군속 지망」(1943), 시「헌시(獻詩)」(1943),「오장 마쓰이 송가」(1944) 따위의 친일 작품들을 발표했다.
1948년에는 시집「귀촉도」, 1955년에는「서정주 시선」을 출간해 자기 성찰과 달관의 세계를 동양적이고 민족적인 정조로 노래하였고, 이후 불교 사상에 입각해 인간 구원을 시도한「신라초」(1961),「동천」(1969), 토속적·주술적이며 원시적 샤머니즘을 노래한「질마재 신화」(1975)와「떠돌이의 시」(1976) 외에「노래」(1984),「팔할이 바람」(1988),「산시(山詩)」(1991),「늙은 떠돌이의 시」(1993) 등을 출간하였다.
1948년「동아일보」사회부장·문화부장, 문교부 예술국장을 거쳐 1954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 되었다. 이후 조선대학교·서라벌예술대학교 교수, 동국대학교 문리대학 교수(1959~1979)를 지낸 뒤 동국대학교 대학원 종신 명예교수가 되었다. 1971년 현대시인협회 회장, 1972년 불교문학가협회 회장, 1977년 한국문인협회 이사장, 1984년 범세계 한국예술인회의 이사장, 1986년「문학정신」발행인 겸 편집인을 지냈고, 2000년 12월 24일 사망하였다.
저작에는「한국의 현대시」,「시문학원론」,「세계민화집」(전5권) 등이 있으며, 시집에는 위의 시집 외에「흑산호」(1953),「국화 옆에」(1975),「미당 서정주 시전집」(1991) 등이 있다. 대한민국문학상·대한민국예술원상 5·16 민족상, 자유문학상 등을 받았고,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2002년 2월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 모임'이 자체 조사하여 발표한 '일제하 친일 반민족행위자 1차 명단(708명)'에 포함되었다
집 밖으로 나와 봉산산방(쑥과 마늘의 집)을 둘러보고 앞뜰 벤치에 모여 앉아 창작수업을 했다. 대표작「국화 옆에서」를 분석하면서 회원님들의 작품 4편을 공부하였다. 미당 서정주의 집에서 시의 인생을 30년이나 그 분과 함께 했던 공간에서 함께 할 수 있었던 시간을 가졌다는 의미를 지닌 일정을 마무리하며 다시 걸어내려와 점심식사를 죽순 추어탕으로 했다.
다시 인근의 벤 카페를 찾아 시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서정주의「국화 옆에서」전문
이 시에서 특히 주목되는 연은 3연이다. 여기서 국화는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누님에 비유되고 있으며 여기서 '누님'은 방황과 욕망의 젊은 날을 보내고 인생을 관조하는 중년의 원숙한 여인이다. 이러한 누님의 모습은 관능과 욕망의 세계에서 한걸음 물러선 시인의 변화를 상징하는 동시에 앞으로의 변모를 예상하게 한다.
2015년 10월 23일
윤제철
첫댓글 단란한 야외수업 부럽습니다^^
저도요 우리도 이런날이 오겠지요
성동구청 앞 행당동에 살면서
컴퓨터실 회원과 뚝섬 배드민턴
수련생도 하고..그때는
시문학은 모르고 지냇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