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십대의 반란
오남희
사노라면 수시로 바뀌는 게 우리네 이웃이다. 한 복판도 아니고 변두리 산 주변쯤 되면 꼭 시골처럼 이웃의 왕래도 잦게 되고 몆집 건너에 누가 이사를 왔는지도 알게 되고 좀더 나아가면 이사 왔다는 떡도 얻어 먹게 된다. 남편의 성격상 변두리 주택지에서 삼십여 년을 살다가 재개발이 되는 바람에 밀려서 이사를 하게 되어 아파트로 이사를 오게 되었다. 오래 살았던 주택지 골목, 길을 중심으로 양쪽 이십여 가구가 붙어있어 오순도순 살게 된 이웃들이다. 뒤에는 오패산이 있어 매일 아침 산책하기 좋았고 맑은 공기에 시골처럼 까치며 새들의 지저귀는 소리가 청하하여 듣기 좋고 나무들이 차 있어서 변두리 인만큼 우리에게 제공하는 것도 많은 동네이다.
50대 중반 쯤 이었을까 옆집에 이사 온 형아로 인해 그야말로 우리 일상생활에 반란이 일어났다. 우물 안 개구리처럼 살아온 우리들은 그 때 부터 얼마나 많은 알지 못한 세상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오직 남편과 아이들만 알고 살아 왔음을 깨닫게 되고 그 형아로 인해 관광이란 것도 가게 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누리는 여러 일들을 경험하면서 그 형아가 하자는 대로 하는 일들이 우린 너무 재미 있었다. 오십대의 반란이랄까.
. 대문 앞집이 팔리고 이번에 오신 이 분은 우리가 사는 생활과는 차이가 나도 한참 차이가 난 나보다 여섯살이 많은 분이 이사를 왔다. 옷을 맞추어 입는다는 것은 생각도 못했던 어려운 시절이다. 한참 월남치마 월남조끼가 유행하던 시절 기막히게 따숩고 편리한 옷을 이 양반은 한 번도 입는 것을 보지 못했다. 양장점에서 옷을 맞추어 입고 파랑새 처럼 골목이 환하게 나들이를 한다. 싹싹하고 붙임성도 좋아서 금새 우리는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나이 차이가 많았지만 나는 형님이라는 소리가 잘 나오지 않아 형아로 호칭을 하게 되었다. 형아라는 소리는 은근히 정이 가는 호칭이었다. 집 밖에 모르는 우물 안 개구리였던 우리는 이 형아가 이사를 온 뒤부터 세상 재미가 뭔지 알게 되었다. 음악을 좋아한 그 형아는 전축소리가 끝일 날이 없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들의 본부요 아지트가 되었다. 마음이 너그럽고 인정이 많은 형아는 우리가 가면 언제나 푸짐하게 먹거리를 해 주셨다. 날마다 얼굴을 보고 이야기할 수 있는 그 자체가 좋았다. 처음 접해 본 세상이어서 처음엔 낮이 설고
어색했다. 남편도 가까이 가는 것을 경계했지만, 체면에 구애받지 않은 그 형아는 아랑곳이 없었다. 가깝게 지낸 이웃친구 들이 거의 날마다 모이게 되고 쿵쾅대는 음악소리, 흐흐대는 웃음소리, 푸짐한 먹거리 대문 밖이 소란스러워 동네 입들이 말이 많아도 별로 이웃 눈치를 안 보는 형아였다. 제일 가슴조인 사람은 남편이었다.
이런 광경을 처음 접한 이웃친구들도 폭 빠져서 하루라도 우리들의 본부로 제공한 이집을 거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우리는 얼마나 순진하게 세상을 살어 온 사람들인가, 이웃 잘못만나 사람 버리겠다고 남편은 신경을 곤두세우고 이사 가야 한다고 난리였지만 이사 가기가 그리 쉽던가! 그러거나 말거나 놀기 좋아하고 친구 좋아한 이 형아는 아랑 곳 없었고 우리는 그 형아 집에서 매일 모였다. 어느날은 남편 퇴근 시간도 잊어 라면으로 대체하면서 싹싹 빈때도 있었다. 스트레스때문이었을까 웃고 떠드는 재미가 너무 좋았다. 어느 날은 형아가 캬바레 구경을 가보지 않을 꺼냐고 제의를 했다. 우리는 설레었다. 무섭고 떨렸지만 우리들은 대 환영이었다. 정말 한번쯤은 구경하고 싶은 곳 이었다. 어떤 곳일까 ㅎㅎ 빼입고 남이 볼까봐 썬그라스를 끼고 귀거리를 하고 치장을 하고 가슴 조아며 들어섰던 곳. 지금 생각해보면 재미있는 추억이다. 춤을 추자는 제의도 몇 번 받았다. 구경은 재미 있었다. 소설에서나 접했던 자유부인들을 보면서 그 호기심이란 말 할 수가 없었기에 정말 열심히 구경했다. 그런데 생각처럼 그리 난해 보이지 않았다. 남자는 제자리에 서서 손만 움직였고 여자만 바쁘게 도는 것이었다. 남편이 이런곳에 갔다는 것을 알았다면 어떠 했을까. 여자가 이런곳에 간다는 것은 그 여자는 이미 가정주부가 아니고 구제받지 못할 여자라는 것이다. 세 번인가 따라 가호기심은 충족이 되었고 그사람이 알기전에 그만 두어야지 그 뒤로 발을 딱 끓고 지금까지 가보지 않았다. 소설에서만 봤던 그런 경험들을 한번 해보고 싶었었다. 상상 했던 것보다는 그다지 난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어느 날 이 형아는 나를 부추겼다. 남편이 매일 식사를 하고 들어 온다면 좀 수상하게 생각해 봐야 한단다.
순진한 나는 왜 수상하게 생각해야지, 여자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남편은 공무원이다 성격은 꼬들꽁자 하나만 알고 둘도 모르는 외골수 성격이다. 스캔들 많은 여배우가 나온 드라마도 잘 안본 사람이다. 여자가 캬바레를 드나거리면 그 여자는 절대 올바른 여자가 아니라고 펄펄뛰는 성격이다. 그런데 여자라니 말도 안 돼, 그래도 한번 의심을 해보라는 것이다. 남편은 술도 잘 못 먹는 체질이다. 옆도 잘 돌아보지 않고 앞만 보고 걷는 성격이다 이조 선비 타입이라고 동네 사람들이 붙여준 애칭이다 그리고 별 볼 일이 없으면 귀가 시간이 시계였다. 그런데 뒤를 알아보라고? 어느 날 남편이 몇일을 늦게 들어왔다. 약간 취기도 있었다. 나는 어색 했지만 벼개를 툭툭 차면서 뭐야 하고 성질을 내는 척 하고 돌아 스려니 웃음이 나왔다. 입술을 꾹 다물도 화난 표정으로 도대체 왜 밥은 맨날 먹고 들어오고 왜 늦는 날이 많은 거야 수상해 하면서 벼개를 또 차니까 남편이 빙긋이 웃으면서 알았으니 그만 하란다. 그러다가 우리는 서로 바라 보면서 웃고 말았다. 웃음이 나왔다.
‘옆집 그 부인네가 뭐라고 꼬드기든고’ 벼개를 차면서 위협해 보라 하든가!
귀엽다는 표정과 한심스럽다는 남편의 표정 지금도 그 생각은 재미가 있다. 지금도 웃음이 나는 에피소드한 토막이다. 내 평생 처음이고 마지막 강짜였다. 남편이라기보다도 내 핏줄처럼 따뜻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 살았다. 깐깐하고 똥고집을 가진 매사에 빈틈 없는 사람이기도 하지만 인격적인 면을 좋아했다. 친정아버지는 사윗감은 외식 잘 시켜주고 영화구경 자주가고 여행도 즐기는 그런 사윗감을 골라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씀 하셨지만 그와는 정 반대인 사위를 맞았다. 이런 짠돌이, 외식 영화 여행 이런것과는 너무 담을 쌓고 사는 정말 멋대가리 없는 남자다. 결혼 기념일도 별로 찾지 못하고 살아온 나다. 처음에 힘이 들었지만 체념하고 사니 다름 면으로 이 남자가 좋아졌다. 고집이 쎈 편이지만 포괄적인 일면이 좋았는지 모르겠다. 똑바른 길을 가는 진솔한 사람에 속한다 할까. 마누라와의 약속도 함부로 취급하지 않았다. 너무 깐깐해서 가슴 터진 일도 정말 많았지만 그런대로 무난하게 살아 왔다. 연애 한번 못해보고 결혼을 했다. 세상 물정을 너무 모르고 층층시하 조부모의 엄함속에서 살아온 탓도 있을 것이다. 어떤 때는 성격이 하도 고지식하고 답답해 가슴터진 일도 많았지만. 그러나 싸워도 오래가지 못하고 하루 밤을 못 넘긴다. 그래서 칠십 평생을 무난하게 살아 왔는지도 모른다.
형아는 옷을 맞추고 돈이 없으면 이사람 저 사람에게 돈을 꾸기도 한다. 그런 형아가 이해 안갔지만 그러나 마음씨 좋고 베풀기 좋아하고, 우리 동네로 이사 와서 조용하던 그리고 얌전하던 동네 분위기를 나름대로 재미있고 활기찬 분위기로 우리들을 쇄신 시키기도 했던 그 형아를 잊을 수 없다. 그가 이사를 간 후 우리는 다시 옛날 생활로 돌아 왔지만 우리는 많이 달라 졌다. 세월은 꿈 같이 흘러갔다. 한 동네에서 이 삼십년을 살아온 터줏 대감들이 우리 이웃이다. 리더쉽이 강해 주위를 돌아보지 않은 성격 그 형아로 인해서 우물 안 개구리를 벗어 났던 오십대, 우리 마음을 들뜨게 했던 잊을 수 없는 형아와의 세월, 지금도 재미있는 추억으로 남는다. 그 형아는 팔십대 할머니가 되었고 교회에 아주 열심이다. 그때가 꿈같은 가장 발랄한 오십대 청춘이었다.
첫댓글 동네마다 약방에 감초처럼 한분씩 꼭 계시지요. 재미있게 잘읽었어요.
연속극을 본것같아요. 잘 읽었습니다.
여행에서 듣고 읽어보니 더 실감이 납니다. 언니의 발랄했던 오십대의 모습이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