붕우(朋友)는 다른 사람과 의(義)로 결합된 관계이기
때문에, 정해진 명분이 있는 군신(君臣) 관계와는 다르다. 그런데 성인이 붕우를 부자(父子)와 함께 동렬에 놓고 오륜(五倫)으로 삼아 하늘의
질서라고 불렀고 다섯 가지 도리라고 이름 붙였다. 이는 세속의 생각으로 보면 매우 말이 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벗은 오상(五常
인ㆍ의ㆍ예ㆍ지ㆍ신)의 신(信)에 속하고, 신은 토(土)에 속한다. 오행(五行
목ㆍ화ㆍ토ㆍ금ㆍ수)은 토가 아니면 이루어지지 않고, 오상은 신이 아니면 실질이 없다. 그래서 공자는
“벗을 통해 덕(德)에 도움을 받는다.〔友以輔德〕”라고 했고,
자사(子思)는 “어버이에게 순순한 데에는 방법이 있으니, 반드시 벗에게 믿음을 얻어야 한다.”라고
했으며, 증자(曾子)는 문왕(文王)이 공경하여 지극하게 머문 일을 열거하면서, 신을 인(仁)과 자(慈)와 아울러
거론했다.사람은 반드시 자신의 잘못에 대해 듣고 난 뒤에 고칠 수 있지만 벗이 아니면 잘못에 대하여 들을 수 없고,
반드시 학문을 갈고 닦은 뒤에야 덕을 이룰 수 있는데 벗이 아니면 갈고 닦을 수 없다. 그러므로 부자(父子)와 군신(君臣), 형제와 부부가
도탑고 차례가 있는 것은 모두 벗의 힘이다. 벗을 기다려 사륜(四倫)이 도타워지니, 벗이 사륜과 아울러 오륜이 되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벗이
돕고 보태 주어 덕을 이루어 주지 않으면, 부자 사이의 인, 군신 사이의 의(義), 부부 사이의 구별, 장유 사이의 차례 등이 모두 성실하지
못하다. 성실은 신이니, 그 어찌 사행(四行)의 토가 아니겠는가.
그러나 단지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면서 서로 좋아했을 뿐이라면 그저
무리이지 벗이 아니다. 벗이란 것은 반드시 학업으로 교유하여 마음이 통하고 의리로 맺어진 관계이다.
-
원문 빠짐 - 붕우라는 말은 총칭이다. 총칭했으니,
‘붕’은 바로 공자의 “널리 사람들을 사랑한다.〔汎愛衆〕”라는 말이며, ‘우’는 바로 공자의 “그리고 인한 사람과 친해야
한다.〔而親仁〕”라는 말이다. 그렇지만 널리 사랑하는 일도 역시 믿음이 없으면 안 되기 때문에 ‘믿음이 있어야
한다.〔有信〕’고 총괄하여 말한 것이다.
믿는 구석이 있다고 해서 받들어 주기를 좋아하는 자는 벗이 아니며, 친구에게 부러운 점이 있어서
아첨하고 빌붙는 자는 벗이 아니다. 이 두 가지 교유는 벽을 뚫고 담장을 넘는 좀도둑보다도 부끄러운 짓이다. 잘못을 일러 주면 버럭 화내고
노여워하는 자는 벗이 아니며, 선한 사람을 보면 시기하고 샘내는 자는 벗이 아니다. 이 두 가지 교유는 뱀이나 호랑이보다 두려워할 만하다.
좀도둑 같은 벗은 서로 헤진 짚신을 버리듯 할 것이며, 뱀이나 호랑이 같은 벗은 서로 해쳐서 함정에 빠트리고 돌을 던질
것이다.
마음이 같지 않은데도 어깨를 두드리고 소매를 잡으며 친한 척하는 자는 마음의 칼이 오구(吳鉤
굽은 모양의 칼)보다 날카롭고, 덕에 도움이 없는데도 달콤한 말과 뻔뻔한 낯을 하는 자는 정(情)의 끈이
노호(魯縞
얇은 고급 비단)보다도 얇다.
옛날에는 군자가 벗에게 바라던 것이 나에게
과실(過失)을 일러 주고 나를 덕과 의리로 권면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우정이 물처럼 담백하지만 오랠수록 더욱 긴밀함을 깨달았고, 서로에 대한
공경이 손님 같았지만 오랠수록 더욱 보탬이 됨을 깨달았다. 그러므로 벗이 살았을 때는 혈육처럼 미더웠고 벗이 죽었을 때는 애통하기가
수족(手足)을 잃은 듯했다. 이것이 바로 오륜에 들어갈 수 있는 벗이다.
“물고기가 넓은 강과 호수에서는 서로 잊는다.〔魚相忘於江湖〕”라고 했는데, 이는 두 사람의 마음이 맞아
유유자적하다는 뜻이다. 이 한 구절이야말로 벗의 도리에 가장 잘 어울린다. 기미(氣味)가 맞아 마음으로 이해하고 정이 미더우니, 기실 꾸밈없이
자연스럽고 허물이나 의심, 질투가 없다. 벗을 좋아하는 것은 사심이 아니고, 벗을 경책하는 것도 모질지 않다. 내 마음을 다하여 배려하고,
나아갈 길을 양보하여 보탬이 되게 하니, 권세와 이익 때문에 맺은 교유가 서로 이익을 바라면서 마음속이 늘 가로막혀 있는 것과는 다르다. 진정한
벗은 서로 잊은 듯 유유자적하기 때문에 오래가도 손상되지 않으니, 이러한 의리는 오직 도(道)를 아는 사람만이 알 수 있다.
예부터 현명한
자는 적었고 불초한 자는 많았으니, 그 이유는 오직 자신의 잘못에 대해 듣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잘못에 대해 듣기 좋아하면 어리석은
자는 지혜로워지고, 혼미한 자는 밝아지며, 미혹한 자는 변별력을 갖게 된다. 잘못에 대해 듣기를 좋아하지 않았으므로,
요순(堯舜)을 아버지로 두고도 단주(丹朱 요의 아들)와 상균(商均 순의 아들)은 끝내 불초했고, 관룡방(關龍逄)과 비간(比干)을 신하로 두고도 걸주(桀紂)는 끝내 나라가 망하기에 이르렀다. 사람들이
벗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이유는 벗을 통해 자신의 허물을 듣기 때문이다.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아는 성인이 아닌 바에야 누군들 잘못이
없겠는가. 소소한 마음씨의 은미함과 행동의 실수에 대하여 아버지가 자식을 가르칠 수가 없고, 아내가 남편에게 경계할 수가 없다. 오직 벗이 있기
때문에 주의를 주어 그 사특함을 막아 주고 말을 해서 그 잘못을 바로잡으며, 시를 지어 성정(性情)을 착하게 하고 강론을 통해 식견과 지향을
키워 준다. 이렇게 물에 담그듯 향을 쏘이듯, 그렇게 되는 이유도 모르는 사이에 자연스럽게 덕성을 이룬다.
사람이 자신의 잘못에
대해 듣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면 어울리는 사람이 모두 비루하게 아첨이나 하는 저급한 인물일 것이니, 본성이 날이 갈수록 망가지고 덕이 날이
갈수록 낮아져서 끝내 사람다운 사람이 되지 못한다. 일반적으로 저급한 벗은 나의 악행을 조장하고 나의 잘못을 편들어 주어, 나로 하여금 그
잘못을 반복하게 하고 나의 그릇됨을 미화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또한 간사하고 시기심 많은 한 부류는, 말을 듣기 좋게 하고 얼굴빛을
곱게 꾸미며 앞에서는 웃고 뒤에서는 헐뜯으며, 남의 잘못을 엿보며 관찰하다가 들추어내는 것을 정직이라고 생각한다. 밖으로는 선(善)을 하도록
권한다는 명목에 가탁하지만, 안으로는 남을 해치는 독소를 퍼뜨리니, 이런 자들을 두려워해야 한다. 그렇지만 그런 말을 들으면 또 편안히
받아들이고, 화를 내며 따지지 않는 것이 좋다. 편안히 받아들이면 자신에게 해가 없으면서도 내가 스스로 수신(修身)하는 경계에 보탬이 되지만,
화를 내고 따지게 되면 다른 사람에게 거부감을 주고 남의 말을 받아들이는 나의 도량에 방해가 된다.
성인(聖人)이 이미
“자기만 못한 사람을 벗으로 삼지
말라.〔無友不如己〕”라고 했으니, 내가 어리석고 못났다면 현자(賢者)는 반드시 나와 벗하지 않으려고 할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현자와 친해지려는 정성을 더욱 도탑게 하고 잘못을 듣는 기쁨을 더욱 성실히 해야 한다. 이렇게 해서 마음과 지혜가 날로 열리고 덕과 의리가
점차 진보하면, 거칠었던 자로(子路)도 마침내 안연(顔淵)이나 민자건(閔子蹇)의 외우(畏友)가 된다.
또래 벗들이 만나면 매번
농지거리를 일삼고 부모를 범하는 일을 재미로 삼는 자에 대해서는, 반드시 공경하는 태도는 갖되 가까이하지 말아야 한다. 세상 사람들의 이 버릇이
습속이 되어, 농담하지 않으면 좋은 관계를 만들지 못한다. 서로 말을 주고받을 때 내가 남의 부모를 모욕하면 그도 나의 부모를 모욕할 것이니,
이는 스스로 자기 부모를 욕보이는 것과 종이 한 장 차이일 뿐이다. 비루한 습속으로 서로 희롱하는 자는 처첩(妻妾)을 두고 서로 희롱한다.
남녀의 분별은 인간이 넘지 말아야 할 한계이며, 벗의 아내와는 바로 수숙(嫂叔
형제의 아내와 남편의 형제
사이)의 의리가 있으니, 어찌 말로 침해할 수 있겠는가. 더욱 경계해야 할 것이다.
남이 충성을 다하기를 바라고, 남이 호의를 다 바치기를 바라는 것은 온전한 교유에 가장 해가 된다.
소인의 벗이 서로 원수가 되는 이유는 모두 여기에서 비롯된다.
종리매(鍾離昧)가 한신(韓信)에게 귀의하자 한신이 받아들여 살려 주었다가 끝내 죽여서 바쳤으니, 한
가지 일로 붕우와 군신의 의리를 둘 다 잃었다. 종리매가 와서 귀의했으니 한신은 그를 살려 주되 감히 임금을 속여서는 안 된다는 의리를
일러주고, 황제에게 글을 올려 종리매를 보호하고 밝혀 주기를 “항왕(項王
항우)의 신하들은 모두
안에서 반란을 일으켰는데, 유독 종리매만 처음부터 끝까지 두 마음을 갖지 않았습니다. 각각 섬기는 대상은 달랐지만, 제가 폐하를 섬기는 것이나
종리매가 항왕을 섬겼던 것은 그 의리가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저에게 종리매가 귀의하여 왔으나 제가 감히 사사로이 비호할 수 없습니다. 부디
바라건대 그의 죄를 용서하고 사형에 처하지 않으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했다면,
고조(高祖 유방(劉邦))가 계포(季布)를 죽이지 않았던 넓은
도량으로 허락하고 사면하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설사 불행히 고조가 들어주지 않았더라도, 옛 친구의 정으로 보면
불쌍하지만 군신 사이에 감히 의심하고 가릴 수가 있겠는가. 울면서 종리매에게 어쩔 수 없는 뜻을 이야기하고 장안(長安)으로 보내서 종리매가 혹시
자백했다면 더욱 다행이었을 것이다. 또 불행히 죽음을 당하더라도 시신을 거두어 묻어 주고 그 처자식을 구휼해 주었다면, 군신과 붕우의 도리 둘
다 온전하고 흠결이 없었을 것이다. 또 황제가 한신을 의심했던 마음도 이로써 풀리고, 일가가 남김없이 멸족되는 불행을 벗어나는 것도 가능한
일이었다. 의리에 밝지 못하면서 이해관계를 계산하는 자는 일처리가 매번 이와 같으니, 어찌 한신만 그러하겠는가.
재화를 욕심내는
자, 부귀를 부러워하는 자, 권세에 빌붙는 자, 나보다 나은 사람을 시기하는 자, 자신이 잘하는 것을 뽐내는 자, 시대의 풍조를 애써 좇는 자,
잡스러운 사람들과 교유를 맺는 자, 관청에 소송을 즐기는 자, 자신의 잘못을 변명하고 꾸미는 자, 관장(官長)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 언어가
들뜨고 허황된 자, 남에게 아첨하며 기분 좋게 하는 자 등은 모두 벗으로 삼아서는 안 되니, 재앙이 반드시 내 몸에
미친다.
예(禮)는 천리(天理)가 저절로 그렇게 나타나는 절문(節文)이지, 사람이 사사로운 뜻으로 억지로 만든 것이 아니다.
낮고 높은 것이 배열되는 것은 천지(天地)의 예이고, 한 번 가면 한 번 오는 것은 일월(日月)의
예이며, 언덕이 높고 흐름이 깊은 것은 수토(水土)의 예이다. 천지가 차례를 잃으면 하늘이 뒤집히고 땅이 뒤엎어지며, 일월이 차례를 잃으면
일월이 함께 나와 일식, 월식으로 그 빛을 가린다. 언덕과 강물이 차례를 잃으면 거꾸로 흘러 홍수가 진다.
새나 짐승, 초목이나 벌레,
도구에 이르기까지 어떤 사물도 차례가 없는 것이 없다. 차례는 예(禮)이다. 순경(荀卿
순황(荀况)의
자(字))은 단지 받들고 꿇어앉거나, 인사하고 사양하는 것만을 예로 알았기 때문에 예를 허위라고 생각했다. 그가 예의 근본을
이해하지 못한 점은 일단 제쳐 놓고 논의하지 않는다손 치더라도, 받들고 꿇어앉거나 인사하고 사양하는 행동이 없으면 천지자연의 차례가 어긋나서
모든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점을 전혀 몰랐다. 어린 양도 꿇어앉을 줄 알고, 성성이도 인사를 하며, 열지어 다니는 개미도 길을 양보하고,
인솔하는 닭도 쪼기를 양보한다. 이 어찌 모두 허위라는 말인가.
《예기(禮記)》 〈곡례(曲禮)〉ㆍ〈소의(少儀)〉ㆍ〈내칙(內則)〉
등에 적힌 기록은 비록 지나치게 세세하고 번잡한 듯하지만, 어느 하나 천리(天理)가 아닌 것이 없고 성인이 아니면 분명 서술할 수 없는
내용이다. 해설하는 사람들은 매번 《예기》가 한(漢)나라 유학자들이 억지로 끌어다 붙인 내용이라서 깊이 음미하거나 체험하고 연구할 만한 저술이
아니라고 한다. 한나라 유학자로는 동자(董子
동중서(董仲舒))를 으뜸으로 치지만, 동자가 언제
《예기》의 이러한 경지를 엿보았겠는가.
《예기》를 만든 일로 논의해 보자면, 아무리 성인이라도 어떻게 보통 사람들의 사고 밖에 있는 그
자세한 절목을 설명할 수 있겠는가. 《예기》를 실천하는 일로 논의해 보자면, 아무리 총명하더라도 어떻게 일상의 말과 행동에서 그 많고 자세한
절목을 외울 수 있겠는가. 다만 조심성을 가지고 공손하여 공경으로 덕을 이루면 닿는 데마다 저절로 천리에 맞을 것이니, 사색을 기다리지 않고도
세세한 3천 절목을 말할 수 있을 것이며, 외우기를 기다리지 않고도 3천 절목을 실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예를 읽는 사람은
절(節)마다 억지로 노력하지 않더라도 본분과 의리만 이해할 수 있으면 하나로 관통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부모의 가래침과 콧물을 남에게 보이지 않는다.〔父母唾洟不見〕”라는 구절을 읽고서 그 사랑하고 공경하는
실제 이치를 체득하면 사친(事親)에 대한 허다한 절목을 모두 읽기를 기다리지 않고도 저절로 예에 맞게 되는 것과 같다. 또
“남녀가 욕실을 같이 쓰지 않는다.〔男女不共湢浴〕”라는 구절을 읽고서 그 구별과 조심하는 실제 이치를
체득하면 남녀에 대한 허다한 절목을 모두 읽기를 기다리지 않고도 저절로 예에 맞게 되는 것과 같다.
앉아 있는 사람에게 줄 때는 서서 주지 않으니 다른 사람을 대하는 예를 다하는 것이고,
입고 가서 하사한 데 대해 인사하니 임금을 섬기는 예를 다하는 것이다.
매번 《예기》를 읽을
때면, 이 몇몇 편부터 관혼상제(冠婚喪祭)에 관한 편들에 이르기까지 간곡하게 인정(人情)을 다했고 모두가 천리(天理)이며 절목마다 헛되이 빌려온
것이 아니어서, 땀이 흘러 등을 적시지 않는 적이 없었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저절로 나는 사람도 아니라고 탄식했다. 그래서 어린아이에게는 반드시
《소학(小學)》 책을 읽게 했지만, 가르치는 사람은 단지 과거 공부 문장의 용도로만 가르치고, 배우는 사람도 단지 과거 공부 문장의 용도로만
배우니, 언제 조금이나마 사람다운 도리에 보탬이 되겠는가.
그렇지만 마땅히 물욕(物欲)에 아직 흔들리기 전에 숙독해야 하니, 조금이라도
타고난 바탕이 사람에 가까운 자라면 스스로 깨달을 수 있고, 전혀 읽지 않는 자보다는 조금 나을 것이다.
《소학》 한 책은 옛사람이 몸을 닦으면서 공경히 외워서 마치 부모나 신명(神明)처럼 생각했으니, 참으로
그럴 만하다.
예의 절차는, 위의(威儀)는 밖으로 드러나지만 공경은 마음속에서 온전하다. 진실하고 한결같으며 자연스럽기 때문에,
예의 가장 큰 효과는 천지의 질서를 세울 수 있고 만물을 이룰 수 있다는 데 있다. 터럭만큼이라도 사사로운 의도가 있으면 거짓이지 예가 아니니,
공손함이 지나친 공손이 되고, 자긍심이 겉으로만 장중하게 되며, 겸양이 명성을 좋아하게 되고, 몸을 낮춤이
겉만 부드러운 악이 된다. 기쁜 목소리와 공손한 말을 쓰지만 그 속은 반드시 비겁하고, 무릎 꿇고
곡진히 인사하지만 그 속은 반드시 험악하며, 익숙한 의례와 용모를 갖추었지만 그 속은 반드시 해치는 마음이고, 말만 꺼내면 꼭 예를 들먹이지만
그 속은 반드시 어두우니, 예는 이처럼 겉으로만 꾸미고 사람을 속여서는 안 된다. 순경(荀卿)은 바로 예를 허위라고 했으니, 예를 모를 뿐만
아니라 이는 그 마음이 거짓으로 가득하고 시기심이 많으며 엉큼한 자이다. 지금 그의 책을 보면 증험할 수 있으니,
순경이 한 번 더 변하여 이사(李斯)가 나오게 된 것이다.예가 아니면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움직이지도 말라고 했으니, 이는 인(仁)을 실천하는 조목이다. 그렇지만 정(情)을 속이는 사람도 바르지 못한 빛과 바르지 못한 소리를
보거나 듣지 않을 수 있으며, 스스로 뻐기는 사람도 음탕한 말과 조잡한 행동을 말하거나 실제로 하지 않을 수 있지만, 이것이 어찌 인을 실천하는
것이겠는가. 사욕을 이기는 공부가 없으면 일마다 모두 스스로 속이게 되니, 네 가지를 하지 말라고 한 것이 예로 복귀하는 실질은 아니다. 반드시
사사로운 의도를 제거하여, 보고 듣고 말하고 움직이는 것이 천리(天理)의 당연한 이치에 복귀하게 되면 이것이 인의
실천이다.
《서경(書經)》 〈홍범(洪範)〉에, 용모와 말씨, 보고 듣고 생각하는 것은 공경스럽고, 따르고, 밝고, 총명하고,
슬기로워야 한다고 하는데, 공경은 엄숙하게 하고, 따름은 어질게 하며, 밝음은 사리에 명석하게 하고, 총명은 계획성 있게 만들며, 슬기로움은
성인을 만든다. 이것이 극기복례(克己復禮)의 완성된 덕이다. 만일 터럭만큼이라도 사사로운 의도가 있다면 용모가 공손한들 어떻게 엄숙할 수
있겠는가. 그 나머지도 모두 그러하다.
음악은 천지자연의 조화를 소리에 의탁하여 창작한 것이다. 오랜 옛날 사람들은 덕성이 크고
깊었으며 정이나 뜻도 관대하고 평안했기 때문에, 시장(詩章)을 표현하면 성정(性情)과 같았고, 가곡(歌曲)을 읊으면 시장과 같았으며, 음률에
의지하면 가곡과 같았기 때문에 그 음악이 조화롭고 너그러웠다. 사람들의 성정이 점차 옛날과 같지 않아서 음악도 결국 변했다. 흥망(興亡)과
치란(治亂)의 음악에 대해 옛사람들이 이미 상세히 언급했으니, 사사로운 의도나 단순한 억설이 아니라 그 이치가 실제로 그러한
것이다.
기러기가 무리를 지어 날면서 내 세상이다 싶으면 그 소리가 화락하고 느긋하지만, 무리를 떠나 쏘는 화살에 놀라면 그 소리가 슬프고
촉급해진다. 나비와 잠자리가 여유 있게 날아다니며 마음이 편하면 그 춤이 느긋하고 한가롭지만, 놀라 날아서 잠자리채를 피하려고 할 때면 그 춤이
급하고 어지럽다. 짐승이나 벌레의 소리나 춤은 모두 자연의 음악이지만 이렇게 다른 데가 있으니 인간의 음악도 미루어 알 수 있다.
우리나라
세종(世宗)께서 제정한 악률(樂律)은 분명 지극히 좋고 아름다웠을 텐데, 지금은 볼 수가 없다. 전해 들은 것으로 상상하면, 〈여민락(與民樂)〉
같은 종류의 음악은 남아 있는 악보에 따라야 하지만,
〈보허자(步虛子)〉 같은 종류의 음악도 화평한 소리와 비슷했을 것이다. 임진왜란 이전 민간에는 비로소
‘둥둥곡(登登曲)’이
- 음은 둥이다. - 있었는데, 번거롭고 급하여 듣기에 어지럽고
시끄러웠다. 그 뒤 아악(雅俗)이나 속악(俗樂)도 점점 빨라져 옛 맛이 거의 사라졌다.
그렇지만 60년 전 민간의 속악은 그래도 심하게
듣기 싫거나 촉급하지는 않았다. 노래의 경우, 중대엽(中大葉)은
- 듕한닙. 옛날에 악시조(樂時調)인
만대엽(慢大葉)이 있었는데, 중대엽이 더 빠르다. - 평조(平調)나 계면(界面) 종류여서 듣는 사람이 충분히 근심이나 화를 잊고
화평한 마음을 기를 수 있었으며, 춤추는 사람도 몸가짐이 느긋하고 화락하며 마음 상태가 편안하고 한가로웠다.
연주곡으로는
〈영산회상(靈山會上)〉이 있는데, 소리만 있고 가사가 없으며, 그 소리가 끊이지 않고 이어지면서 편안하고 알맞아서 그 리듬에 맞추어 춤을 출 수
있었다. 이른바 이별곡(離別曲)이라는 곡이 만들어지기에 이르러 사람들이 점점 새로운 것을 좋아하고 옛것을 싫어하게 되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함께
유행하면서 번갈아 연주되었다. 근년 이래로 중대엽 이하는 마침내 전부 없어지고 옛 노인들도 다 죽었으며, 그 음악에 대해 말을 하는 사람도
없어져서 세속에서 쓰는 음악이라고는 둥둥곡보다 더 심한 곡들이다.
우리나라 중엽에 나무하고 꼴 베는 아이들이나 행상, 걸인 아이들에게
수혼조(隨魂調)가 있었는데, 장례를 치르며 죽음을 슬퍼하는 소리여서 슬프고 처량하여 듣는 사람은 마음이 흔들리고 눈물이 난다. 또 국가(鞠歌)가
있는데, 머리를 흔들면서 부채로 치며, 리듬이 빠르고 지나치게 음란해서 차마 똑바로 들을 수가 없는 노래이다. 지금은 온 나라가 위아래 할 것
없이 불렀다 하면 이 밖에 다른 노래가 없으며, 칭찬하는 것도 이 음악 외에는 없다. 그 소리에 따라 춤을 추는 사람은 취한 듯, 미친 듯하여
비록
축흠명(祝欽明)의 팔풍무(八風舞)라도 분명 이만큼 추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심지어 광대들의
걸조(乞調)는
- 속언에 덕담(德談)이라고 부른다. - 말할 필요도 없다.
예전에
영산조(靈山調)가 있었는데 길게 끌면서 느릿느릿 춤을 추며, 소리가 맑아 들을 만했다. 무당들의 영신(迎神)ㆍ송신(送神)에는 해살조(解殺調)가
있는데, 맑고 고운 소리로 길게 빼어 불러 또한 그런대로 들을 만했으며, 기녀들의 오장 단창(五章短唱)과 오히려 닮은 데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하나같이 빠르고 정신이 없어 마치 천 개, 백 개의 몽둥이로 그릇가게의 항아리를 때려 부수는 듯하고, 또 모두 수혼조로 마친다.
조금이나마 심성을 본분대로 지니고 있는 사람이라면 들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결단코 차마 들어서도 안 되는 음악인데도 사람들은 모두 아름답고
좋다고 한다. 저 시골 사는 어리석은 백성들이야 오히려 책망할 것도 없지만, 관장(官長)들까지 덩달아 장려하면서 노래채로 내는 돈을 아까워하지
않으니, 아아, 심하도다. 만일 옛날 민간 노래를 채집하던 사람이 보았다면 그것을 뭐라고 했을까.
요즘은 시부(詩賦)가 노래로 불리지는
않지만, 그 근본은 음악이 생기는 원천이다. 문체(文體)가 점차 변하여 수준이 낮아지면서 음악과 마찬가지로 비슷해져 가니, 누가 우리
성조(聖朝)를 위해 옛날로 회복하게 할 것인가. 바닷가에 사는 가난한 선비는 한밤중의 유감을 견딜 수가 없다.
내 나이 10여 세
때 박세절(朴世節)이라는 70세 먹은 노인이 있었는데, 사람이 근후하고 독실했다. 어렸을 때
경보(京譜)를 학습하여 중대엽(中大葉)과 평우조(平羽調)를 잘 불렀다. 그 소리가 느긋하고 장중하여
듣는 사람은 심기가 편안하고 화창해졌다. 아버지에게 들릴 때면 반드시 나를 불러 듣게 하면서 “이것은 옛 가락인데 요즘 사람들은 즐기지 않는다.
이 노인이 세상을 뜬 뒤에는 이 계보도 사라질 것이니 애석하다.”라고 했다. 내가 어려서 비록 음악의 곡조나 리듬은 몰랐지만, 듣고 있으면
지루한 줄을 몰랐다.
박 노인은 술을 좋아하여 더러 술을 주면 더 달라고 했다. 박세절이 죽은 지 이제 50년이니, 그 사이에 소리로
이름난 사람은 매우 많았으나 내가 찾아보니 과연 그 비슷하게나마 전수받은 사람도 없었고 이제 그림자조차 끊어졌다. 고보(古譜)를 거문고로
연주하여 기록하면 얻을 수 있겠지만 지금은 고금(古琴)을 연주할 수 있는 사람이 없으니, 아, 다시는 볼 수 없을 것이다.
박세절은 또
고조(古調)의 〈영산회상(靈山會上)〉을 잘했는데, 근조(近調)에 비해서 무척 느리고 편안했다. 매 5장(章)이 한 곡을 이루는데, 춤추는 사람은
한 곡마다 춤추는 자리를 바꾸고,
- ‘綴’의 음은 ‘졸(拙)’이다. 춤추는 자리이다. - 세
곡을 마치면 춤을 그친다. 그 중대엽은 북을 느리게 치고 춤추는 모습이 더욱 아름답다고 하는데 나는 아직 보지 못했다. 다만 〈영산회상〉은
지금도 그대로 비슷하게 하는 사람이 있는데, 옛 가락에 비하여 열에 셋은 빠르지만 이를 통해서 옛 음악으로 회복하기는 쉬운 듯하다. 내가 매번
종이에 그려서 악보를 만들어 《예기(禮記)》의
노고(魯鼓)나 설고(薛鼔)처럼 만들고자 했으나 틈이 없었다.
-
박세절은 집안이 가난하고 나이가 많아 형편이 어려운 사람이었다. 그 때문에 노래가 원래 악보에 따르더라도 애처로운 정서가 표현되었고, 듣는
사람이 처량하여 자주 눈물을 흘렸다. 그는 술을 마신 뒤에야 소리가 화평해져서 듣는 사람이 흥겹고 마음이 기뻤다. 대개 소리가 슬프면 즐겁지
않다. 요즘 노래하는 사람은 반드시 몹시 슬프고 처량한 노래를 위주로 하고, 듣는 사람도 그 슬픔을 극대화하는 것을 더욱 좋다고 생각하니, 그
이유는 어째서인가. 음악의 악(樂)과 즐거울 낙(樂)은 같은 글자이니, 그 근본을 알 수 있다. -고려(高麗)의
음악은 비록 고증할 수 없지만, 다만 불법(佛法)의 전성기였으므로 불교 음악을 위주로 했으리라는 것은 알 수 있다. 대개 불교는 광대하고 원만한
것을 법문(法門)으로 삼기 때문에 〈어산(魚山)〉이라는 범악(梵樂)은 완만하고 절제가 있으며 원만하고 화창하여 옛 음악의 뜻에 가장 가깝다.
요즘 말하는 〈영산회상〉이란 바로 영산(靈山) 불사(佛事)가 남긴 소리이다. 그 악보대로 가져다가 그 뜻을 취한다면 요즘 음악의 처량하고 촉급한
경향을 구제하고 사람의 성정(性情)을 도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요즘의 불교 음악 역시 예스럽지 않다. 내가 어렸을 때 본 것이 50년
사이에 열에 서넛은 사라졌고, 남은 것도 다른 음악과 마찬가지로 촉급하고 조잘대어 들을 만한 것이 없다.
심(心)은 성(性)과
정(情), 지각(知覺)을 통솔한다. 외물(外物)이 와서 마음과 접촉하면 곧 지각이 생긴다. 지각하게 되면 성이 감응하여 정이 된다.
칠정(七情)의 발동은 위로 성인에서부터 가장 어리석은 사람에 이르기까지 마찬가지이다. 칠정 중에서 희(喜)와 낙(樂)은 애(愛)와 더불어
순경(順境
순조로운 경지)이고, 노(怒)와 애(哀)는 구(懼)와 더불어 역경(逆境)이다. 순조로우면
쉽게 받아들이고, 거스르면 금하기 어렵다. 욕(欲)이 또 사사로움에 치우치면 더욱 절제하기 어렵다. 쉽게 받아들이는 경우는 멋대로 흘러가서
본성을 해치고, 금지하기 어려운 경우에는 어긋나고 상하여 본성을 해치게 되며, 절제하기 어려운 경우에는 빠져서 본성을 잃게 된다.
그래서
신령한 옛 성인이 음악을 만들어 그 성정(性情)을 기르고, 그 지나침을 절제하고 미치지 못한 데를 북돋우어 중화(中和)에 합치하게 했다. 가만히
있을 때는 거문고를 연주하고 걸을 때는 패옥(佩玉)을 찼으며, 수레를 탔을 때는 조화로운 소리를 내는 방울을 달아 때에 어울리는 음악을 통해
즐기고 춤을 추었다. 대개 한시도 음악이 없었던 적이 없었으니, 소리가 사람을 가장 절실하게 감동시키기 때문이다. 〈우서(虞書)〉의
“맏아들을 가르쳐라.”라는 말과 《논어》의
“음악에서 완성한다.”라는 말이 모두 이것이다.
지금은 옛 음악이 전부 사라졌고, 선비들의
거문고나 패옥, 방울도 같이 사라졌다. 오직 역경(逆境)에서나마 노래로 회포를 풀고 있지만, 옛 시와 악보가 역시 사라졌다. 언가(諺歌
한글 노래)라도 내용이 바르고 뜻이 곧은 곡을 가져다 부르는 편이 오히려 안 부르느니보다는 낫지만,
이것도 옛 가락은 사라졌다. 결국 우리들의 평소 사물에 대한 느낌의 경우 역경이 아닌 것이 없으니, 어떻게 적절히 금하고 절제하여 그 본성을
해치지 않겠는가.
오직 성현의 경전(經傳)이 있어서 공경스럽고 장중하게 읽고 외우며 의리를 깊이 탐구하고 숨겨진 오묘함을 꿰뚫어 보면,
자득한 맛에 곧 손발이 춤추는 흥이 일어나니 거문고를 연주하거나 패옥을 찬 것과 진배없다. 그런데 또 이른바 과거 시험공부가 뒤이어 망가뜨렸다.
자구나 모으고 문장이나 뽑으면서 애당초 도덕(道德)이나 인의(仁義)의 본분과 의미를 몰랐으니 어떻게 촌사람을 면하겠는가.
아아, 나만
사람이 아니란 말인가. 안연(顔淵)은 어떤 사람이고, 순(舜)은 어떤 사람인가. 아아, 한 번 천지 사이에 태어나 백 년을 살도록
허락받았는데도, 어리석고 지각이 없어서 배고파 먹으면 지렁이가 흙을 먹듯, 등에가 썩은 음식을 먹듯 하고, 추워서 입으면 오소리가 담요를 까는
듯 돼지가 풀을 까는 듯하며, 입을 열면 새가 지저귀고 벌레가 우는 듯하고, 득의에 차면 까마귀가 날고 원숭이가 춤추듯 한다. 날이 밝으면 보고
해가 지면 눈을 감으니, 아무리 귀해져서 경상(卿相)이 되고 부유해져서 천 종(鍾)의 재산을 가지게 되더라도 그것이 헛된 인생임은 마찬가지이다.
진실로 헛된 인생이라면 그 슬픔이 어찌 통곡하는 데 그칠 뿐이겠는가.
그러니 우리들 3만 6000일 중에 하루 12시(時) 동안 한시도
즐거워할 만한 적이 없다. 어떤 사람은 잠잘 때를 즐겁다고 하지만, 그 꿈이 또 허망하니 1일 96각(刻) 중에 1각도 즐거워할 만한 적이
없다. 아, 어떻게 고금(古琴)을 얻어서 듣겠는가. 이미 고금을 얻을 수가 없으니 어떻게 옛 가락의 노래를 얻어 듣겠는가. 우리 공자가
“〈관저(關雎)〉의 마지막 악장이 아직까지도 아름답고 성대하게 귀에 가득하구나!”라고 말한 데는 참으로
천고에 편치 않은 눈물이 있다고 하겠다.
남자가 태어나면 호(弧
활)를 매달고 화살을
천지 사방에 쏘는 것은 남자가 할 일이 많다는 것을 보이는 것이다. 대개 남자는 양(陽)으로 문채가 나고 밝은 것이 바로 그 본분의 일이니,
여자가 태어나면 수건을 걸 듯이 당연히 학문하는 도구를 걸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활을 거는 것은 왜인가?
덕은 온화하고 공손하며
조심하는 마음을 위주로 하지만, 숨어 살면서 스스로 자신을 지킨다면 오직 자기 한 몸만 선하게 할 뿐이다. 이는 일개 쇠약하고 쓸쓸한 존재에
불과하니 또 어디에 쓰겠는가. 반드시 천지 사방을 자신의 책임으로 삼아 천하를 경륜하는 임무와 만물을 제어하는 공력을 가진 뒤에야 바야흐로
남자인 것이다. 그렇지만 천하에는 선한 자가 적고 드센 자는 많으니, 위엄으로 제어하지 않으면 그 교화를 이룰 수 없다. 곧 공자가 말했던
“문(文)으로 일을 해도, 반드시 무(武)를 갖추어야
한다.”라는 것이고, 《주역》에서 말한
“위엄 있게 하면 길하리라.”라는 도리이다.
문은 양에 속하여 그 본체는 강하고 그 작용은
부드러우며, 무는 음(陰)에 속하여 그 본체는 부드럽고 그 작용은 강하다. 음양이 서로 짝하고 강유(剛柔)가 서로 보완하는 것은 천지의
이치이니, 한쪽으로 치우쳐 다른 쪽을 폐하면 안 된다. 그래서 활쏘기를 남자의 일로 삼았고, 이어서 사례(射禮)를 제정하고 그에 대한 조목을
만들어 사납고 거친 습성을 제어하고 그 자신을 바르게 하는 모습을 관찰하며, 지나치게 속박하는 의례를 느슨하게 하고, 깨끗하고 훤칠한 기운을
펼쳤으니, 그 뜻이 멀고도 크다.
주(周)나라 왕실에서는 문(文)을 숭상하였으니 사군(嗣君)에게 경계하는 말은 의당 문에 관한 일을
첫머리로 삼아야 하는데, 그러지 않고
“육군을 크게 유지하라.”, “너희에게 군대를 경계하라고 이른다.”라고 했던 의미를 알아야 한다. 우리 왕조의 문치(文治)는 주나라
왕조에 부끄럽지 않지만, 문을 치우치게 숭상하는 폐단을 면치 못하여 습속이 문만 귀하게 여기고 무(武)를 천시한다.
그래서 그저 거칠고
힘만 세어 사나운 데다 어리석고 무식한 자들이 무관이 되었으니, 지방의 방비를 맡는 장수나 수령을 시키면 이들이 어떻게 많은 사람들을 통솔하여
승리를 거두고 백성들을 돌보며 임금의 근심을 나눌 것인가. 더구나 청탁(淸濁)이 현저하게 달라서 상하 관원이 완급을 서로 제어하지 못하니 어떻게
일을 성공하겠는가. 반드시 문무를 겸용해야 되겠지만, 커다란 개혁이 있어야 이런 풍조를 바꿀 수 있을 것이니, 시골구석의 선비가 말할 바는
아니다.
과거에는 주군(州郡)의 각 동네에 비록 열 집만 모여 있어도 모두 과녁을 펴 놓고 표적을 맞추었다. 봄가을로 활쏘기 대회를
열어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 활깍지를 끼고 팔소매를 묶고는 활쏘기를 했다. 누구나 활과 화살을 가지고 있어서 활쏘는 법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 없었으니, 옛날의 의미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심지어 사찰에도 모두 사대(射臺)를 세우고 겨울과 여름에는 활쏘기를 연습했는데, 지금은
모두 없어져서 남자 40세 이하로는 활 잡는 법을 아는 사람이 없으니, 또한 작은 일이 아니다.
수레 모는 사람은 수레 위에서 여섯
고삐를 잡고 네 마리 말을 조종하는데, 수레 모는 규범을 잃지 않기가 정말 어렵다.
다섯 가지 수레 모는 일 중에서 과군표(過君表)가 가장 어렵고, 축수곡(逐水曲)이 다음이며, 축금좌(逐禽左)가 다음이다.
무교구(舞交衢)가 다음이며, 명화랑(鳴和鑾)이 가장 쉽지만, 그렇더라도 수법이 익숙하고 공경한 마음이 없는 자는 제대로 할
수 없다. 평탄한 길을 빠르지도 않고 느리지도 않게 달리면 조화로운 방울 소리가 악기의 박자와 같았으니, 참으로 마음을 기쁘게 하고 정서를 기를
수 있었다. 이것이
“수레에 타고 있으면 그 충신(忠信)과 독경(篤敬)이 멍에에 기대고 있는 모습을 본다.”라는
말이다.
중국에서는 어른 아이가 모두 수레를 타는데,
〈전단열전(田單列傳)〉에 보면 남자는 참으로 수레몰기를 배우지 않으면 안 되었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모두 말을 타는데, 남자들이 말타기를 배우는 데 익숙하지 못하니, 또한 남자로서 조금 흠결이 있는 것이다.
《시경》에 여섯 고삐가 윤이 나고 실을 꼰 듯하다고
찬미했는데, 모두 그 수레를 잘 모는 것을 훌륭하게 여긴 것이다. 고삐를 잡고 단정하게 앉아 공경함이 밖으로 드러나고
두리번거리며 돌아보지 않으니 위엄에 찬 모습이 본받을 만하다. 사람은 말발굽 소리에 맡기고, 말은 사람의 손놀림에 따르니, 의복은 높이 날리고
곁말은 춤추며, 방울이 딸랑딸랑 조화롭게 응답한다. 가죽 고삐는 본래 윤이 나지는 않지만 부드러워져서 젖은 듯 까칠하지 않고, 본래 실이
아니지만 실처럼 가지런히 겹쳐져서 꼬이지 않았다. 수레몰이에 능숙한 사람이 아니면 할 수 없는 표현이니, 시인의 표현은 모두 이처럼 언어가
실제에 가까워 의미를 전달할 수 있었다. 그렇기는 하지만 활쏘기나 수레 몰기가 모두 기력이 건장한 사람이 아니면 할 수 없으니, 남자가 병약하고
말랐으면 애당초 같이 의논할 것이 없다.
쇠약하고 못난 사람은 자기 몸을 안장에 걸쳐 놓은 듯하여, 마치 여인이 말을 탄 것과
비슷하다. 아무리 말이 건장해도 필시 앓는 듯하고 갈기와 골격도 문드러진 듯하다. 또한 어떤 무리는 말 달리기를 좋아하여 하인이 고꾸라지고 말이
헐떡이는 것도 헤아리지 않는다. 또 어떤 무리는 아무리 말이 절뚝거리고 지쳐서 넘어질 듯해도 채찍질을 그치지 않으며, 험한 길에서도 내리지
않으면서 “차라리 말의 다리를 수고롭게 할지언정 어찌 내가 걸어가겠는가.”라고 한다.
이들은 모두 사물의 본성을 다하지 못한 자이니, 어찌
인정(人情)을 다하겠는가. 그러므로 이런 사람은 모두 남을 다스릴 수도 없고, 아랫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볼 수도 없다. 또한 어떤 사람은 겨우
말을 타면서도 머리를 끄덕이고 몸을 흔들며 곁을 노려보고 멀리 쳐다보는 등 흡사
안영(晏嬰)의 수레 몰이꾼처럼 행동한다. 이를 어찌 함께 논의할 수 있겠는가. 그러니 수레몰이가 군자의
육예(六藝) 중 하나가 된 것은 참으로 당연하다. 남자라면 알지 않으면 안 된다.
서(書
글자)는 글자를 쓰고 점획을 익히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상고 시대에는 문자가 갖추어지지 않아서 글을 짓는
사람이 마음대로 글자를 만들어 사용했기 때문에 상형(像形)도 있고, 회의(會意)도 있고, 해성(諧聲
형성(形聲))도 있고, 전주(轉注)도 있고, 가차(假借)도 있고, 처사(處事
지사(指事))도 있는데, 가차가 가장 많고, 회의가 다음이며, 전주가 그다음이고, 해성이 그다음인데,
전주(篆籒
대전(大篆))의 글에는 상형이 가장 많다.
가차는 어떤 글자를 빌려 와서 다른 의미를 표현하기 위해 사용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수령(守令)의 ‘영(令)’ 자는
명령(命令)의 ‘영(令)’ 자를 빌린 것이고, 장상(長上)의 ‘장(長)’ 자는 단장(短長)의 ‘장(長)’ 자를 빌린 것이다.
수령은 명령을 내는 사람이고, 장상은 남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이니, 음운(音韻)을 조금 바꾸어 의미를 붙였다. 고문(古文)의 통용자(通用字)나
변용자(變用字)는 모두 가차이니, 일부러 이렇게 구차하게 빌려 온 것이 아니라, 의미가 저절로 구별되는 것이며 본디 자연 이치가 그러한
것이다.
‘구차하게 면하지 말라.〔毋苟免〕’, ‘구차하게 얻지 말라.〔毋苟得〕’는 표현의 경우, 곧장 ‘무(無)’ 자를 쓰면 단지
‘불(不)’ 자의 뜻이지만, 반드시 ‘무(毋)’ 자를 통용한 뒤에야 ‘불’과 ‘물(勿)’의 뜻을 겸하여 그 의미가 더욱 절실해진다.
‘불여제하지무(不如諸夏之亡)’에서 곧장 ‘무(無)’ 자를 썼다면 이는 ‘없다.〔無有〕’가 되지만,
‘무(亡)’ 자를 통용했으니 ‘허(虛)’와 ‘무(無)’의 뜻을 겸하여 그 의미가 더욱 깊어진다. 일반적으로 통용이란 모두 이런
사례이다.
《주역》의 ‘무구(无咎)’에 곧장 ‘무(無)’ 자를 썼다면 그 뜻은 ‘본디 없다.〔自無〕’가 되지만, ‘무(无)’로 변용했으니
뜻이 ‘회개하여 가까스로 벗어났다.〔悔改僅免〕’는 모습을 띠고 있다. 《서경》의 ‘흠약(欽若)’에 곧장 ‘순(順)’ 자를 썼다면 그 의미가
‘순’ 자에 그쳤겠지만, ‘약(若)’ 자로 변용했으니 곧 ‘공을 닦아 이치에 순순하다.〔修功順理〕’는 뜻을 띠었다.
‘방구잔공(方鳩孱功)’에서 곧장 ‘방취견공(方聚見功)’이라고 했다면 그 뜻이 ‘모아서
드러냈다.〔聚見〕’는 데 그쳤을 뿐이지만, ‘구(鳩)’ 자로 변용했으니 곧 ‘바삐 일하면서 쌓고 모았다.〔拮据積聚〕’는 뜻을 띠었고,
‘잔(孱)’ 자로 변용했으니, 곧 ‘간신히 드러내었다.〔艱辛著見〕’는 뜻을 띠었다. 일반적으로 변용이란 모두 이런 사례이다.
《시경》에는
차용한 글자가 더욱 많은데,
‘단피행위(敦彼行葦)’는 ‘단(敦)’ 자를 차용하여 ‘새로 푸른 잎이 돋는다.〔嫩綠抽芽〕’는 모습을
가지고 있고,
‘돈탁기장〔追琢其章〕’은 ‘돈’ 자를 차용하여 ‘공력을 들여 다스린다.〔用功攻治〕’는 뜻을 띠었다.
나머지 글자들도 비슷하게 정리할 수 있다.
회의(會意) 글자들도 자세히 생각하면 대개 이런 뜻이 있다. 그렇지만 만일 천착하게 된다면 왕
형공(王荊公
왕안석(王安石))의 설처럼 무익할 뿐만 아니라 도리어 해가 되는 점도 있다. 다만 그
대의를 알지 않으면 안 되니, 전혀 알지 못하면 문장의 이치에 통달하지 못하는 데가 있게 된다.
전주(轉注)는, 방(傍)이나 변(邊)이
서로 상관있는 글자가 모두 이에 해당된다. 예를 들어 머리에 속하는 것은 모두 ‘항(頁)’ 변을 쓰고, 살〔膚〕에 속하는 것은 모두 ‘육(肉)’
변을
- 관습에 ‘월(月)’을 쓴다. - 쓴다. ‘녹이(綠耳)’의 경우, 이는 말의 이름인데도
색깔로 부른 것인데, ‘마(馬)’ 변에 ‘녹이(騄駬)’라고 쓰는 것이 더욱 좋다. 다른 글자들도 유추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가르칠 ‘교(敎)’
자는 노인이 우변에 자식을 안고 있으면서 좌변에 ‘문(文)’을 두었고, 대야 ‘관(盥)’ 자는 일어서서 두 손으로 물을 푸고, ‘명(皿)’을
아래에 이어서 썼다. 이런 글자들은 회의가 지사(指事)를 겸한 것이다.
해성(諧聲)을 보자. 대개 글자의 십중팔구가 모두 해성이지만, 더러
의심스러운 것은 세속 용법의 오류이다. 대개 글자의 음은 2, 3, 4, 5음이 있는데, 쓰는 의도에 따라 조금 변하기도 하고 많이 변하기도
하며, 또 속음(俗音)에 따라 다른 것이 많다. 그렇지만 모두 번절(翻切
반절(反切))의 사례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만일 의미가 통하지 않는데도 일체 나만 고집하고 다른 사람을 그르다고 하면 고루함을 면치 못한다. 또 예를 들어 ‘좌(左)’
자의 경우 사용 의미는 다르지 않지만, ‘자’ 음으로 읽으면 좋을 데가 있고, 처음 소리에 한 소리를 더하여 ‘좌’ 음으로 읽는 것이 좋을 데가
있으니, 이 역시 자연의 오묘함이다. 다른 글자도 모두 그러하다.
상형(象形)은 ‘일(日)’, ‘월(月)’ 같은 종류인데, 역시 전혀 의미
없이 억지로 그 형상만 취한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조(鳥) 자는 새 같고 마(馬) 자는 말 같으며, 비(飛) 자는 나는 듯하고 소(笑) 자는
웃는 듯하며, 구(懼) 자는 겁내는 듯하고 외(畏) 자는 두려운 듯하다. 하지만 그 안에는 육서(六書)의 의미가 아울러 갖추어져 있으니 모두
자연스러운 이치가 신묘하게 부합한 것이지 사람이 사사로운 의도로 안배한 것은 아니다.
또한 두 글자로 된 말도 육서의 의미가 있다. 예를
들어 방불(彷彿)은 상형이고, 선원(嬋媛
부드러움)이 견권(繾綣
살뜰함)의 뜻이 되는 것은 회의이며, 면만(綿蠻
꾀꼴꾀꼴)이 새
울음소리가 되는 것은 가차이고, 현환(晛晥
맑고 고움)은 회의이다. 《시경》 〈진풍(陳風)
월출(月出)〉에
“근심스러운 생각, 맺힌 시름〔懮受夭紹〕”이라고 한 것은 해성으로 잘된 것이다. 《시경》 중
첩자(疊字)로 된 말도 이 육의(六義)가 있다. 관관(關關)은 가차이고, 목목(穆穆
심원함)은
회의이며, 궤궤(几几
번성한 모양)는 가차가 상형을 겸했고, 장장(牂牂
무성함)은 가차가 해성을 겸했으며, 기기(祁祁
펴지고 느린
모양)는
- 〈소남(召南) 채번(采蘩)〉이다. - 회의가 지사를 겸했으니, 다른
것도 유추할 수 있다. 《시경》을 읽을 때는 이 점을 더욱 알아두지 않으면 안 되니, 언어로 표현되지 않은 무한한 의미를 얻을 수
있다.
어음(語音)은 자음(字音)과 같은 음이다.
초성(初聲) 14개, 중성(中聲) 12개, 종성(終聲) 8개인데, 천하의 음이 모두 같다. 사람의
소리뿐 아니라 바람과 우레, 물과 흙, 쇠나 돌, 초목과 곤충 등 소리가 있는 것은 모두 이 숫자에서 벗어나지 않지만, 청탁(淸濁)에 따라
7음을 분류할 수 있어서 마침내 만 가지로 음이 같지 않게 되었다. 지금 이른바 한음(漢音)은 중원(中原)의 음이다. 중원이기 때문에 귀하다고
생각하지만, 천지 안을 전체적으로 논해 보자면 바로
장주(莊周 장자(莊子)) 같은 사람들이 “누가 그것이 참인 줄 알겠는가.”라고
말했던 그것이다. 그러므로 중원 구주(九州)의 음은 대체로 같으면서 각기 다르다. 서융(西戎)과 북적(北狄), 그리고
남만(南蠻)에서도 그 안의 여러 나라마다 대체는 같으면서 각기 다르다. 우리나라 팔도(八道) 역시 대체는 같으면서 각기 다르다.
음(音)은
소리에서 생기며, 소리는 질(質)에서 생긴다. 각각 토양과 풍습이 천만 가지로 같지 않으니 사람의 힘으로 하나로 통하게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이 때문에
서불(徐市)이 동자들을 데리고 왜국(倭國)에 머물렀더니 그들의 언어가 왜국의 언어로 변했다. 이는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되었던 것이다.
현재 경어(京語)는 바로 한양의 본래 음이지만, 반드시 도읍이라고 해서 바른 음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는
없다. 옛날 신라(新羅)는 영남(嶺南) 지방 음을 경음(京音)으로 삼았고, 백제(百濟)는 호남(湖南) 지방 음을 경음으로 삼았으며,
고구려(高句麗)는 관서(關西) 지방 음을 경음으로 삼았고, 단군(檀君)은 해서(海西) 지방 음을 경음으로 삼았다. 예맥(獩貊)은 관동(關東)
지방 음을 경음으로 삼았고, 옥저(沃沮)는 관북(關北) 지방 음을 경음으로 삼았으니, 언제 도읍을 기준으로 삼아 그곳의 토속을 변화시킨 적이
있었는가. 지금 경음을 가지고 향음(鄕音
지방 사투리)을 놀리고 비웃기 때문에 한양에 다니러 간
시골 사람들은 기필코 경음을 본받으려고 하니 모두 고루한 짓이다.
또한 중원에서는 우리나라의 입성(入聲)이 종성(終聲)을 극단적으로 쓴다고
비웃는데, 역시 이상한 일이다. 두 나무가 서로 부딪히면 ‘ㄱ’의 종성이 극대화하고, 물이 흘러내리면 ‘ㄹ’의 종성이 극대화하며, 두 손으로
손뼉을 치면 ‘ㅂ’의 종성이 극대화하고, 염초(燄硝
화약)에 불이 일어나면 ‘ㅅ’의 종성이
극대화한다. 어찌 굳이 사람의 언어에서만 극대화하여 쓰지 않겠는가.
또 새소리, 개구리 소리는 ‘ㄱ’의 종성을 극대화한 것이고
호란(胡鷰)은 ‘ㄹ’의 종성을 극대화한 것이며, 물고기나 새 종류에는 ‘ㅂ’이나 ‘ㅅ’의 종성을 극대화한 경우가 많다. 어찌 중원의 금수나
곤충이라고 해서 동방의 소리와 다르겠는가. 그러나 한유(韓愈)의
“물이 콸콸 섬돌을 돌아 흐른다.〔水汨㶁循階鳴〕”라는 문장으로 추론하면, ‘콸콸〔汩㶁〕’은 분명히
‘ㄹ’과 ‘ㄱ’의 종성을 극대화하여 사용한 뒤에야 물소리가 된다. 지금 중국 음의 경우에는 물소리가 아니니, 왜 그런지
모르겠다.
한(漢)나라 이후 오랑캐 안에 있던 풍습과 기운이 점차 중원에 들어왔기 때문에 오랑캐가 중원에 침입했다. 만일 남기(南氣
남방의 기운)가 이수(伊水)와 낙수(洛水)에 도달하지 못했다면,
두견이 어떻게 천진(天津)에 이를 수 있겠는가. 이 때문에 풍속과 언어의 경우, 오랑캐 것을 가지고
중국 것을 변화시키기는 쉽고, 중국 것을 가지고 오랑캐 것을 변화시키기는 어렵다.
원위(元魏)의 문제(文帝)가 오랑캐 말을 금지했는데 오래지 않아 다시 옛 풍속으로 돌아갔으니, 반드시
옛것이 그리워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 형세가 저절로 그리되었기 때문에 그런 것일 뿐이다.
그렇지만 오호(五胡) 시대에는 오히려
남조(南朝)가 중국의 반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당(唐)나라가 흥성하여 중원의 문화를 썼지만 그 풍속은 여전히 오랑캐의 것이 섞여 있었다.
원(元)나라 때에 이르러 백 년 동안 중원을 통일했었기 때문에 중화의 풍속이 죄다 없어져 버렸다. 명(明)나라가 일어나 비록 중원 문화를
채택했지만 그 풍속은 태반이 오랑캐 것과 섞여 있었다. 언어의 음 중에서 상음(象音
외국 음)을
쓰는 경우는 거의 열에 둘, 셋이었으니, 요순(堯舜)과 삼대(三代) 언어의 음은 더 이상 전혀 들을 수 없었다. 하물며 그 정치의
교화이겠는가.
어떤 사람은 “요즘은 산골이나 바닷가 촌구석이라도 모두 한양 옷을 입고 한양 말을 쓸 수 있으니, 비루하고 속된
풍속을 바꿀 수 있을 것이다. 이는 기뻐할 만한 일이다.”라고 한다. 나는 기뻐할 만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모든 존재는 바탕이 있은 뒤에
문채를 내고 멀리까지 지속될 수 있다. 요즘 풍속에 유행하는 한양 말과 한양 옷은 백성들의 마음이 불안하여 모두 겉으로 번다하게 꾸미기에 바빠
그 바탕이 전부 손상된 결과이니, 온 세상 애나 어른이나 충후(忠厚)하고 신실(信實)한 사람이 없다. 가죽이 없으면 털이 어디에 붙을 수
있겠는가. 절대 붙일 수가 없다. 그러므로 퇴옹(退翁
이황(李滉))이 영남의 발음을 고치지 않은
것은 참으로 옛 의미가 있다.
《주역》에 “위는 하늘이고 아래는 연못인 것이
이괘(履卦)이니, 군자가 이를 보고서 위아래를 판단하고 백성들의 마음을 안정시킨다.〔上天下澤履 君子以 辨上下 定民志〕”라고
했으니, 그 말이 지극하다.
구수(九數)의 항목은 하나도 빠뜨려서는 안 된다. 정밀하여 마음에 계산이 있는
사람이 아니면 완전히 알 수 없다. 그렇지만 모두
구구행수(九九行數)를 기본으로 하고 있고, 구구셈에 익숙하지 않으면 여러 수를 운용할 수 없다.
그렇지만 실제로는 또 곱셈과 나눗셈에 따를 뿐이다. 배우는 사람이 구구셈에 능숙하게 통달하기만 하면 그 응용 변화를 이루 다 쓸 수 없을
정도이다. 오로지 여기에만 전념하여 그 술수를 탐구한다면 또한 실학(實學)에 방해가 될 것이다. 그렇지만 그
자(稊)ㆍ경(京)ㆍ억(億)ㆍ만(萬)ㆍ호(毫)ㆍ미(微)ㆍ사(絲)ㆍ홀(忽)의 비율 및 서로 곱하고 나누는 법에 지극한 이치가 있어서 유추하여 활용할
수 있으니, 배우는 사람이 알지 못하면 온전한 인재가 될 수 없다.
태을수승(太乙數乘)이라는 것이 있다. 수(數)를 시험하고 지난
것을 추론하여 앞으로 올 것을 아는 방법인데, 그 이치가 오묘하다. 하지만 안다고 해도 보탬이 없고 또 소용도 없다. 미래를 아는 술수는
수뿐만이 아니다. 그 방법을 다 궁구하여 미래를 오차 없이 알아서 인간의 생사와 세상의 치란, 나라의 흥망을 손바닥에서 가리키듯이 한다면,
군자를 권장할 근거가 없고 소인을 징계할 방법이 없어서 인간 세상이 크게 혼란스러워지고 인간의 도리가 끊어질 것이다.
소인은 더욱 알아서는
안 된다. 강절(康節
소옹(邵雍)의 시호)이 명도(明道
정호(程顥))에게 상수학을 전수하려고 했지만, 명도가 받으려고 하지 않았다. 일찍이 혼자서 시험 삼아 계산해
보고는 “요부(堯夫
소옹의 자)의 수(數)는 단지 하나에 하나를 더하여 둘이 되고, 둘에 둘을
더하여 넷이 되게 하는 식의 셈법일 뿐이다.”라고 했는데, 요부가 칭탄을 그치지 않았다. 그 뒤 누가 명도에게 그 방법에 대해 물었더니, 명도는
“나는 이미 잊었다.”라고 했다.
충분히 할 수 있는 재능을 가지고도 당초 이처럼 뜻을 두지 않았으니 그 의도가 좋다. 이것이 참으로
마음을 다하고 본성을 알며 천리를 아는 배움을 실천하는 사람이다.
형서(邢恕)가 요부에게 그 술수를 가르쳐 달라고 청했으나 요부가 가르쳐 주지 않았으니, 그 의도 역시
좋다. 소자(邵子
소옹(邵雍))는 그 술수를 쓸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할
만한다.
선비가 두루 달통한 학자나 온전한 인재가 되기는 참으로 어렵다. 마음에 악이 없고 불선(不善)한 행동을 부끄럽게 여기고
재주가 한 방면에 적용할 만한 뛰어난 장점이 있으면, 모두가 성인에게 버려지지 않을 것이다. 공자 문하의 여러 제자 중에서 안연(顔淵)과
증삼(曾參) 외에 완전히 갖춘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육예(六藝)에 능통했던 72명이라고 하는 이야기가 있다. 그렇지만 3000명이나
되는 제자 중에서 어찌 화락하며 조용히 선을 좋아하고 글을 읽는 사람이 없었겠는가. 그들이 머리에 쓰고 몸에 입은 모자와 옷도 선비들이 입는 큰
옷에 큰 띠였을 것이다. 다만
소자가 말했던 ‘총명한 남자’란 쓸모가 있는 남자라는 의미였다.이 때문에 옛 역사에 순 임금을
칭송하여 이르기를
“요 임금은 그가 총명하다는 말을
들었다.”고 했으니,
- 순의 큰 덕이 있었지만 요가 천거한 것은 총명 때문이다.
- 총명이 아니면 어떤 일을 이룩할 수 있겠는가. 이것이 공자가 말했던
“세 귀퉁이를 반증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칠십 제자 이외에는 비록
팔삭(八索)과 구구(九丘)를 다 읽었더라도 모두 세 귀퉁이로 대답하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이와 같다면
아무리 본심에 악이 없더라도 끝내 극악한 큰 죄에 빠지게 될 수도 있으니 또한 이상할 것이 없다.
또 인간은 만물 중에서 신령스러움을 가진
존재로서 세 귀퉁이로 대답하지 못하면 지극히 어리석은 자이다. 세 귀퉁이로 대답하지 못한다면 시비를 판단하지 못할 것이고, 시비를 판단하지
못하면 한 가지 일도 처리하지 못하고 한 사람의 백성도 다스리지 못할 것이니, 가장 신령스러운들 무엇하겠는가. 십철(十哲)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공자가
원헌(元憲)을 재(宰)로 삼았고, 자고(子羔 고시(高柴))는 계씨(季氏)의 재(宰)가
되었으며, 칠조개(漆雕開)에게 관직에 나가라고 했고, 공서화(公西華 자화(子華))는 소상(小相)에 충분하다고
했으니, 그들의 인물됨을 모두 알 만하다. 예(禮)와 악(樂)에 통달하는 것은 선비의 직무이고, 활쏘기와 수레몰이에 통달하는
것은 남자의 일이며, 서(書)와 수(數)에 통달하는 것은 남자의 기예이다. 이 모두 총민하고 통달하여 빼어난 기운이 남보다 뛰어난 사람이다.
- 한비(馯臂)와 공손룡(公孫龍) 등으로 미루어 보건대, 용렬하고 가벼운 자가 아님을 알 수 있다.
- 만일 요순의 시대를 만났다면 모두
구덕(九德)에 들어갈 만한 수준이었다.
후세 유학자의 경우, 그들이 총민하다고 평가하는 수준은
단지 글귀나 따다가 문장을 짓는 일뿐이다.
퇴지(退之 한유(韓愈))가 장적(張籍)을 이 절동(李浙東)에게 천거하면서 단지
그가 고시(古詩)를 잘한다고만 했으니, 그 고시를 어디에 쓰겠는가. 〈새하곡(塞下曲)〉이나 〈정부사(征婦詞)〉를 날마다 백
편씩 짓더라도 종이와 붓만 낭비할 뿐이고, 그 소리와 음률을 입힌들 다만
상간(桑間) 복상(濮上)의 남은 음악일 뿐이니, 공자가 깎아 낸다면 남는 것이 없을 것이다. 이것이 곧
이른바 “
수를 가지고도 세로로 놓고 가로로 놓을 줄을 모르니, 묶어서 높은 데에 치워 놓고 쓰지 않는다.”라는
경우이다. 더구나 그들이 말하는 시란 이보다 못한 것임에랴. 이 때문에 우활한 유학자, 왜곡하는 유학자, 썩은 유학자라는 이름을 끝내 면치
못한다.
마침내
원(元)나라 세조(世祖)에 이르러 팔창(八娼)ㆍ구유(九儒)ㆍ십개(十丐)라고 헤아려 가며 순서를
매겼으니, 아아, 통탄할 일이다.
- 그 실제를 따져 보면 재예(才藝)가 쓸 만하지만,
사실 광대나 창기보다 못한 자가 많았다. 이 때문에 천하 남자들을 욕되게 했으니 통탄할 일이다. -칠정(七情)은
사람이 본디 가지고 있는 것으로, 가장 훌륭한 성인이나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나 차이가 없다. 기쁨으로 말하면, 부모가 장수하고 안락하면 기뻐할
만하고, 현명한 스승과 보탬이 큰 벗을 얻으면 기뻐할 만하며, 현명한 아내와 자손이 있으면 기뻐할 만하다. 안으로 나의 마음을 반성하여 남에게
말 못할 것이 하나도 없거나 나의 일을 점검하여 의리에 큰 괴리가 없으면 기뻐할 만하니 이것이 정당한 기쁨이다.
그러나 기쁨이 마음에
더해져서 나만 홀로 차지하려는 뜻이 있게 되면 기뻐하는 것이 비록 정당하더라도 곧 사사로운 마음이 되고, 도리어 기쁨이 넘쳐 부정한 데로
흘러간다. 예를 들어 실제가 없는 명성이나 재주가 없는 귀함, 덕이 없는 부유함 등은 사람들이 떠받들어 주고 혹시 이익이 올 수도 있지만 전혀
기뻐해서는 안 된다. 그런 것을 기쁨으로 삼으면 그에 대한 걱정이 곧바로 이를 것이다.
분(忿)과 온(慍)은 모두 노(怒)의
종류이다. 그렇지만 외물이 나의 사사로움과 접촉하여 조급하게 발동하는 것이 분이고, 마음속에 유감을 품고 있으면서 삭이지 못하는 것이 온이다.
조급하게 발동하면 사나워지고, 유감을 품고 있으면 화기를 상하게 된다. 분과 온은 가장 깊이 경계하여 극복하고 제거해야 한다. 분온(忿慍)을
제거하는 방법은 오직 남을 헤아리는 마음일 것이다.
슬픔이란 죽음에서 주로 발동한다. 그렇지만 부모의 상(喪)이나 자손의 죽음은 그 슬픔이
곧 천리(天理)에 지극히 정당한 애통함이지만, 만약 사사로운 정으로 슬퍼했다면 대순(大舜)은 고수(瞽瞍)의 상(喪)에 목숨을 잃었을 것이고,
공자는 백어(伯魚)의 죽음에 실명했을 것이다. 성인은 마음에 천리를 온전히 하니, 상사(喪死)를 당하면 지성으로 측은한 마음이 일어나 슬퍼하려고
하지 않아도 저절로 슬퍼지므로 슬픔을 다하려고 하지 않아도 저절로 슬픔을 다하게 된다. 이 때문에 목숨을 잃지 않더라도 슬픔에 부족하지 않은
것이다.
예(禮)에 “슬픔이 지극하면 곡한다.”라고 했으니, 마음에 슬픔이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에 감정이 쌓이고
성의가 극진하면 슬픔이 지극해진다. 마음속에 성실하여 밖으로 드러나기 때문에 곡을 하니, 이것이 천리가 바른 것이다. 불초한 사람은 마음의 덕이
온전하지 않고 성의가 극진하지 않으므로 그런 사람은 반드시 애써서 이르러야 한다. 애써서 이른다는 것은 슬픔을 생각해서 슬픔에 이르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중용》에서 말한 ‘사성(思誠)’이고 맹자의 ‘회복했다.〔反之〕’는 뜻이다. 거문고를 타다가 소리를 내거나 소리를 못 내거나, 공자가 모두 군자라고 불렀던 것이 이것이다. 사사로운
생각이 슬픔에 더해진 경우, 사사로움에 집착하면 목숨을 잃거나 실명하게 되는 것은 오히려 비슷하기라도 하지만, 사사로움에 얽매어 천성을 잃은
자가 남을 위해 슬퍼하는 것은 스스로를 속이고 하늘을 속이는 짓이다.
오복(五服)의 슬픔은, 슬프다는 점에서는 다 마찬가지이다.
그렇지만 보통 사람의 정은 천리의 당연한 슬픔이 있는 경우가 드무니, 또한 슬픔을 생각해야 한다. 슬픔을 생각하면 감정이 모이며, 감정이 모이는
것이 천리의 본연이다. 감정이 모여 슬픔이 지극해지면 곡을 하니, 슬픔이 지극하지 않은데 곡을 하는 것은 허위이다. 공자는
“이유가 없는 눈물을 싫어한다.”라고 했는데, 성인은 잠깐 사이의 지극히 작은 일에서도 허위가
없었으니, 이것이 성인이 된 이유이다.
공자가 옛 숙소 주인의 상에 곡을 하면서 매우 슬퍼하여 참마(驂馬)를 풀어서 부의했다.
공자는 열국(列國)을 두루 다녔으니 천하 거의 모든 곳에 숙소 주인이 있었던 셈이지만, 반드시 다 곡을 하고 부의를 하지는 않았다. 성인이
한때를 묵더라도 반드시 제대로 된 사람을 선택하여 숙박했으니, 숙소 주인이 현명했다면 그가 죽었을 때 어찌 슬프지 않을 수 있겠는가. 더구나 한
번 숙박한 정에도 잊을 수 없는 것이 있음에랴. 만일 숙소에 슬퍼할 만한 사정이 없었다면 성인이 어찌 허위로 슬퍼했겠는가. 또한 만일 자로가
돌아가 만나 보았더니 지팡이로 대그릇을 메었던 장인(丈人)이 죽었다면
자로의 곡이 어찌 친척을 잃은 슬픔 정도에 그쳤겠는가. 돌아와 공자에게 그 사실을 아뢰었다면, 공자의
슬픈 눈물이 어찌 곡 같은 정도에 그쳤겠는가.
즐거움에도 군자와 소인의 차이가 있다. 군자의 즐거움은 그 이치를 즐거워하는 까닭에 즐거움이
공정하고 넓으며, 소인의 즐거움은 자기 일만 즐거워하는 까닭에 그 즐거워하는 바가 자기 한 사람의 사사로움일 뿐이다.
순 임금이 노래를 지었던 즐거움, 고요(皐陶)가 이어서 노래를 했던 즐거움, 문왕이 훌륭한 여자를 얻은 즐거움, 북과 종소리가 천자에게 들리는 즐거움, 공자와 안연이 고치지 않았던 즐거움이나
벗이 찾아왔던 즐거움, 맹자가 말한 삼락(三樂)의 즐거움 등은 모두 천리의 공정하고 넓은 즐거움이다. 그 때문에 즐거움이
하늘에 닿고 땅에 서렸다가 사람에게서 극진하게 된다.
그러나 소인의 즐거움은 요행히 부귀를 얻어 즐기고, 음식을 먹으며 즐기고, 소리와
여색을 즐기며, 방자하고 교만하며 나태하여 안일하게 놀면서 자기 일신의 환희를 끝까지 누리다가 천지에 거스르고 인정을 어긴다. 그 폐해의 흐름은
걸주(桀紂)가 소처럼 마시고, 불에 달군 쇠기둥을 건너게 했던 즐거움이 되고, 심지어
주찬(朱粲)이나
진종권(秦宗權)의 무리처럼 사람을 잡아먹는 즐거움에 이르게 된다. 천하의 재앙은 자기 일신을 즐겁게
하는 것보다 큰 것이 없으니, 작게는 몸을 망치고 크게는 나라를 망치는 것이 바로 모두 이것이다.
사랑은 천지의 본심이다. 사람이
그 사랑을 받아 태어나기 때문에 사랑은 심덕(心德)의 본체가 되며, 오성(五性) 중에 인(仁)에 속하고, 오륜(五倫) 중에는 부자(父子) 관계에
속한다. 그래서 부자 사이의 친함은 사랑을 주로 하고, 인의 실천은 효(孝)에서 시작한다. 여기서 미루어 우애와 공경이 되고, 미루어 친척까지
화목하게 된다. 더 미루어 고을과 국가에 이르러서는 백성에게 어질게 되며, 또 미루어 만물을 사랑하니, 그 근본은 사랑의 이치일
뿐이다.
그러나 인의 체용(體用)을 궁극적으로 논의해 보면 애(愛) 한 글자로는 비록 감당하기 부족하지만, 사랑이라는 글자를 빼놓고는 따로
인이라고 말할 만한 것을 찾아서도 안 된다. 그러니 사랑의 도(道)가 크다. 그렇지만 사랑이라고 하여 자기 마음에만 더하게 되면 작은 사랑이
되어 완전히 사사로운 의도가 된다. 이 같은 경우에는 도리어 천지인(天地人)의 본심을 해쳐서 크게 재앙이 된다. 만약 처첩을 지나치게 사랑하고,
자녀 사랑에 푹 빠지며, 소인을 무람없이 사랑하면, 몸을 망치고 집안을 망치며 천하를 망친다. 대체로 사랑에 가리는 경우는 모두 사랑 때문에
나쁜 점을 모를 때이다. 사랑하면서도 나쁜 점을 아는 것이야말로 참된 사랑이 되는 방법이다.
부모를 사랑하면서도 그 잘못을 간하지 않으면
큰 불효이다.
하루에 세 마리의 희생을 써서 봉양한다고 해도 오히려 어버이를 해치는 자가 될 것이다. 자손을
사랑하면서 그 잘못을 알지 못하면 핥고 안고 배불리고 따뜻하게 해 주어도 이는 그 자식을 해칠 뿐이다. 더구나 처첩을 사랑하여 그 나쁜 점을
감싸 주는 자는 달기(妲己
은나라 주(紂)의 비)나 포사(褒姒
주나라 유왕(幽王)의 비)를 방 안에서 데리고 사는 자이다. 사람의 마음을 가리어 어둡게 하는 데는 사랑이
가장 심하다.
만약 어버이를 사랑하면서 나의 부모라고 생각해서 사랑한다면 사심이지 효가 아니다. 이는 그저 나를 낳고 길러 주신 수고로운
은혜와 천리의 당연한 법칙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니, 사랑에서 공경심이 생기고 공경심에서 봉양하려는 마음이 생기며, 봉양하는 마음에서 순종하는
마음이 생기고 순종하는 마음에서 효가 완성된다. 사심을 가지고 사랑한다면 효를 끝까지 마치는 경우가 드물 것이다. 사사로움을 중시하는 자는 항상
망할 것이니, 이치와 형세가 반드시 그러한 까닭이다.
자손을 사랑하면서 나의 자손이라고 생각해서 사랑한다면 그 폐해가 더욱 크고 자손이
반드시 불초하게 된다. 오직 천지가 만물을 낳는 이치로 기르고 성취시켜 그 인생에 욕됨이 없게 한 뒤에야 참된 사랑이다. 더구나 처첩은
잠자리에서의 사사로움 때문에 그 사랑이 더욱 친밀해져 천하에 다시는 내 처첩 같은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니 어찌 그 재앙이 끝이
있겠는가. 배우는 사람은 절도에 맞는 사랑을 하려고 해야 하며, 더욱 아집을 없애야 한다.
두려움에는 두려워해서는 안 되는데 두려워하는
경우와 두려워해야 하는데 두려워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 횡역(橫逆)과 참언, 밖으로부터의 재앙과 위세나 무력, 귀신과 괴이한 일을 두려워하는
것은 두려워해서는 안 되는데 두려워하는 경우이다. 몸을 수양하지 않고 행동에 잘못이 있는 것, 배움이 나아가지 않고 이치에 막힘이 있는 것,
육친(六親)에게 불화가 있고 마음과 의지에 불성실한 데가 있는데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두려워해야 하는데 두려워하지 않는 경우이다.
만일
몸을 닦고 행동이 순수하며, 배움이 나아가고 이치가 밝으면, 육친이 화목하고 마음과 의지가 성실해질 것이다. 횡역이나 참언, 위세나 무력은 다른
사람에게 달린 일이니, 내가 왜 남을 대신하여 두려워하는 수고를 하겠는가. 밖으로부터의 재앙은 운명이 있으니 그 바른 운명을 순순히 받을
뿐이며, 귀신과 괴이한 일은 이치가 밝아지고 뜻이 성실해지면 더욱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뿐만 아니라, 본래 두려워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도(道)를 아는 사람은 평생 해야 할 걱정이 있다. 전전긍긍하면서 깊은 연못에 서 있는 듯, 얇은 얼음을 밟는
듯, 망할까 망할까 하면서 죽은 뒤에야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을 안다.
명(命)을 아는 사람은 두려움이 있으니, 나라에서 금지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관청의 명령을 두려워하며, 이유 없이 복(福)이 오는 것을 두려워하고 재주가 없는데도 관직이 높은 것을 두려워하며, 위험한 담장
아래에 서 있는 것을 두려워하고 맨손으로 범에게 덤비고 맨몸으로 황하를 건너는 일을 두려워하니, 자신을 다하고 나서 하늘의 뜻을 기다리는
사람이다.
욕구라는 정(情)은 싫어할
- 오(惡) 자는 거성(去聲)이다. -
대상이 아니다. 욕구는 성현보다 큰 사람이 없다. 천지와 그 덕을 합하려고 하고, 일월(日月)과 그 밝음을 합하려고 하며, 귀신과 더불어 그
길흉을 합하려고 하고, 만물로 하여금 각각 자기 자리에 있게 하려고 하며, 육합(六合) 안이 모두 자신의 덕택을 입게 하려고 하고, 몸과 이름이
우주의 끝까지 이르러도 추락하지 않기를 바란다. 이런 욕구를 가지고 완성한 사람이 있으니, 순 임금은 요 임금의 천하를 받고도 상관하지 않았고,
공자는 거친 밥과 물을 먹고 팔을 베고 자면서도 근심하지 않았으며, 시퍼런 칼날이 눈앞에 있어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런 욕구가 없는 사람이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다.
가장 어리석은 사람의 욕구보다 좋지 못한 것은 없다. 배불리 먹으려고 하고 따뜻하게 입으려고 하며, 미색을
가지려고 하고 편안히 놀려고 하며, 자신이 그르다고 하지 않길 바라고 권력이 자신에게 있기를 바라며, 그 누구도 나를 이기지 못하기를 바라고
노력 없이 행여 부귀가 오기를 바라며, 만복이 다 자신에게 갖추어지기를 바라고 심지(心志)를 다 바치고 이목을 다 동원하여 장생하고자 한다.
고금에 혹시라도 그런 욕구를 채운 자가 있었던가. 그 반만 욕심 부려도 몸을 망치고 집안을 망치며, 그 욕심을 다 채우려고 하면 나라를 망치고
천하를 망쳐서 들창 아래서 목숨을 보전하고 죽음을 맞이한 자가 드물었다.
만에 하나 요행히 면하더라도 만고에 치욕스런 존재가 되어 소
돼지만도 못한데 장차 그 복을 어디에 쓸 것인가. 이 욕심은 재앙을 바라는 것이니, 다름이 아니라 욕구가 마음에 더해져서 형기(形氣)의
사사로움을 따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욕’ 자는 선하게 될 수도 악하게 될 수도 있지만,
마음을 따라 욕심이 되면 어디를 가도 좋을 수가 없고 어떤 경우에 처해도 패망하지 않을 수가 없다.
《서경》에
“인심은 위태롭다.”라고 했는데, 위태롭다는 말은 잠깐 실수하면 골짜기에 떨어지고, 공경하여 잡으면
편안하게 돌아온다는 것이다. 이 말은 욕구는 형기의 마음에서 발동하니, 공경하지 않으면 욕심으로 떨어진다는 뜻이다. 욕심이 추하기로는 똥구덩이나
진흙탕보다 심하며, 욕심이 두렵기로는 만 길 구렁텅이보다 훨씬 심하다. 한번 더럽혀지면 씻을 수 없고, 한번 빠지면 살아나올 수
없다.
천지인(天地人)이 유구하면서 무너지지 않는 까닭은 거기에 당연한 법칙이 있기 때문인데, 당연한 법칙이 바로 이른바
도(道)이다. 도는 형태가 없기 때문에 성인이 설명하여 글에 실었다. 크게는 천지와 일월, 산악과 하해(河海), 세세하게는 금수와 곤충, 초목과
진흙이나 모래먼지까지 경서의 뜻을 벗어난 것이 없다. 인간의 경우, 크게는 치국(治國)ㆍ평천하(平天下)나 삼강오상(三綱五常), 세세하게는 먹고
마시는 일, 말과 웃음, 행동거지, 똥을 싸고 오줌 누는 일, 침을 뱉고 콧물을 흘리는 일까지 경서의 뜻을 벗어난 것이 없으니, 글로써 도를
실었고 천하에 도 밖에 있는 존재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경서를 제대로 읽은 사람은 연구, 사색하여 그 뜻에 통달하며, 도를 인식하고
실천에 통달할 수 있다. 그렇지만 맹자 이후 경서를 제대로 읽은 사람이 1천 5백 년 동안 없었는데, 염락(濂洛
주돈이(周敦頤)와 이정(二程))의 여러 현자가 비로소 맹자의 독법(讀法)을 터득했고, 주자에 이르러 크게
천명(闡明)했다. 그래서 성인의 은미한 말씀과 심오한 뜻이 해와 별처럼 환해졌고, 이때부터 배우는 사람들이 그 학설을 대대로 지켜 오면서 경서를
읽는 법에 대해 알 수 있는 사람이 많아졌다.
지금도 성인의 경전이 여전히 남아 있고 정자와 주자의 학설이 모두 있는데, 배우는 사람은
도대체 누가 막고 있기에 제대로 읽으려고 하지 않는가. 아아, 이상한 일이다. 〈탕고(湯誥)〉에
“상제께서 하민들에게 충(忠)을 내려 주어 그것에 따라서 떳떳한 본성을 갖게 했다.”라고 했으니,
여기서 말한 본성이 어찌 명백하지 않겠는가만, 순경(荀卿)으로부터 한당(漢唐)에 이르기까지 한 사람도 본성을 인식한 사람이 없으니, 〈탕고〉를
잘 읽지 않았기 때문이다.
- 한(漢)나라 이래 《논어》ㆍ《대학》ㆍ《중용》ㆍ《맹자》를 모두 읽고도 여전히
알지 못했으니, 제대로 읽지 않은 것이 더욱 심했다. -《논어》와 《맹자》는 모두 도(道)에 대해 말하고 있지만,
정녕코 지극히 절실한 것은 《중용》에서 다했다. 동자(董子
동중서(董仲舒))는 다만
“도의 큰 근원이 하늘에서
나왔다.〔大原出於天〕”라고 했고, 한자(韓子
한유(韓愈))는 다만
“요 임금이 도를 순에게
전했다.〔堯以是傳之舜〕”라고 했는데, 모두 그 체용(體用)을 상세히 연구하지는 못했다. 유종원(柳宗元) 이하 세 소씨(蘇氏
소순(蘇洵)ㆍ소식(蘇軾)ㆍ소철(蘇轍))에 이르기까지는 도가 무엇인지 전연 몰랐고, 청색도 백색도
아닌 하나의 덩어리가 어딘가에 있는 것을 도라고 부른다고 이해하면서, 자신은 높이 올라가서 도를 얻어 가지고 놀며 스스로 좋아하는 존재라고
생각했다. 그들이 어찌 책을 읽은 사람들이 아니겠는가마는, 모두 신을 신고 가려운 데를 긁고 있으면서 끝까지 연구해 내지 못하였다. 또한 그
마음이 문장이라는 작은 기량에 들뜨고 자만이 넘쳐, 곧 성인의 문장도 이와 같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다시 의심을 갖고 이치를 탐색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그들이 쓴 문장은 기이하고 난삽하지 않으면 허튼 말로 속이고 애매하게 늘어진다. 한 편의 글이나 한 문단의 글도 이치에 통달한 말이
없었으니, 모두 경서를 제대로 읽지 않은 폐해이다.
선비로서 도(道)를 알지 못하면 문장도 아름다움을 다할 수 없다. 고금의
문장가로는 오직 퇴지(退之
한유(韓愈))의 문장을 아름답다고 했고, 시인으로는 오직 자미(子美
두보(杜甫))의 시를 아름답다고 했는데, 자미는 그 자체로 하늘이 내린 자질로 도에 근접했기
때문이다. 그 나머지 시문을 짓는 사람은 일체 그런 자질이 없다고 해야겠지만, 양웅(揚雄) 같은 경우에는 어찌 문재(文才)가 탁월했던 자가
아니겠는가만, 그의 좋지 않은 독서는 더욱 심했다. 《주역》과 《논어》는 마음을 붙이고 100번을 읽어 보면 어찌 의심할 수 있는 문장이겠는가.
그런데도 의심하려고 했으니, 이는 잘못된 독서 때문이다. 그가 말한 태현(大玄)은 더욱 이치가 없으니, 오로지 《주역》을 호로(葫蘆)라고
생각하여 수묵(水墨)으로 모호하게 그려 냈다. 그러나 장(章)을 그리고 구(句)를 그렸지만, 오직 글자는 그리지 못한 격이다.
성인의
경서는 단지 평이한 말만 썼지만 한 글자에 많은 오묘한 뜻이 담겨 있다. 이는 마음에 이치가 밝기 때문에 말을 토해 내면 이렇게 된 것이지,
억지로 의식하고 생각해서 찾아내 쓴 것이 아니다. 양웅은 이치의 유무에 대해 마치 안개 속에서 꽃을 보듯이 대충 살펴보고 평이한 글자를 쓰면
혹시 사람들이 가볍게 볼까 두려워 몽롱한 그림자 속에서 궁극적인 의미를 찾았다. 이 때문에 부득불 난삽한 글자를 써서 옆 사람을 협박했던
것이니, 아이들이 술래잡기를 하거나 전투마가 섶을 끌고 다니는 듯하여, 기실 건조하고 메말라서 단조로운 맛뿐이며 더 이상 여운이 담긴 뜻이
없다.
가령 양웅은 망(罔)ㆍ직(直)ㆍ몽(蒙)ㆍ추(酋)ㆍ명(冥)을 건(乾)ㆍ원(元)ㆍ형(亨)ㆍ이(利)ㆍ정(貞)에 비교하여 지루하게
풀이했다. 하지만 원형이정은 곧 춘하추동(春夏秋冬)과 인의예지(仁義禮智)의 뜻을 포함하고 있고, 사물에 두루 통하며 닿는
데마다 모두 합치되어 주석을 기다리지 않고도 사람들이 다 알 수 있다. 직몽추명(直蒙酋冥)이라는 네 글자는 무슨 의미인가.
찬사(贊辭)에
굳이 ‘측왈(測曰)’을 붙여 ‘상왈(象曰)’을 흉내 냈는데, 《주역》의 ‘상왈’은 공자가 문왕(文王)과 주공(周公)의 글에 주(註)를 단
것이고, 《주역》을 편집한 사람이 ‘상왈’이라고 해서 경문(經文)과 구별한 것임을 양웅은 전혀 몰랐던 것이다. 문왕과 주공이 어찌 일부러
기이하고 간략한 말로 대충 설명하고, 또 따로 ‘상왈’이나 ‘단왈(彖曰)’을 만들어 비로소 다 설명할 수 있도록 했겠는가. 양웅에게 정말 오묘한
뜻이 있었다면 어찌 찬사에서 평이하고 명백히 서술하지 않고, 거지아이가 전대를 두 개 차고는 좁쌀을 따로 싸 두 듯이 굳이 ‘측왈’이라고 한
뒤에야 생각을 다 토해 낸다는 말인가.
《논어》의 문장은 쉬우면서도 엄격하고 간략하면서도 밀도가 있어서, 말은 땅처럼 가깝지만 뜻은
하늘처럼 멀다. 성인이 말하고 성인의 문도가 기록하지 않았다면 결코 그렇게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같은 공자의 말이지만 다른 저서에 흩어져
나오는 말은 순수함과 깊고 정밀함이 모두 같지 않으니 《논어》와 비교하면 알 수 있다. 그러나 양웅이 〈장양부(長揚賦)〉와 〈우렵부(羽獵賦)〉를
만들고 남은 생각을 가지고 《논어》를 흉내 냈으니, 이는 《논어》를 제대로 읽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독서를 잘하는 사람은 그 의미를
취하지 문장을 흉내 내지는 않으니, 의미를 취하면 살고 문장을 흉내 내면 죽는다. 양웅의 문장은 완전히 죽은 문장이며 자구마다
손숙오(孫叔敖)의 흉내를 내고도 전혀 부끄러움이 없었으니, 이것이 그가 망대부(莽大夫
양웅을 왕망(王莽)의 신하라고 빗대는 말)가 된 이유이리라.
독서를 잘못하는 데는 고금이 차이가
없다. 《시경》과 《서경》의 서(序)를 쓴 사람이 어찌 스스로 독서한 사람이라고 일컫지 않았겠는가만,
《서경》에 ‘과형(寡兄)’, ‘짐제(朕弟)’라고 불렀는데도 오히려 성왕(成王)의 글이라고 생각했고,
《시경》에 무왕(武王)의 시호가 있는데도 오히려 무왕의 시라고 판단했다. 천근(淺近)하고 명백한 것도
이와 같은데, 하물며 문장의 뜻이 깊은 경우이겠는가.
육상산(陸象山
육구연(陸九淵))은
이른바 호걸지사(豪傑之士)였다. 그런데 “한번 음으로 한번 양으로 하는 것을 도라고 한다.〔一陰一陽之謂道〕”라는 말을 거론하여 ‘음양은
형이상자(形而上者)’라고 했다. 《주역》에서 만약 “하나의 음과 하나의 양이 도이다.〔一陰一陽謂之道〕”라고 했으면 이는 음양을 가리켜 도라고 한
것이다. 지금 “한번 음으로 한번 양으로 하는 것을 도라고 한다.” 하였으니, 이는 한번 음이고 한번 양이 되는 근거가 도라는 말이다. 문장을
지을 때 어조사를 쓰는 방식에 대해서도 여전히 그 차이를 연구하지 못했는데, 하물며 오묘한 진리이겠는가. 그가 무극(無極)과 태극(太極)의 뜻을
터득하지 못한 것은 괴이할 것조차 없다.
황산곡(黃山谷
황정견(黃庭堅))은 무극과 태극을
이해하지 못했으니, 이 시인은 책할 것도 없다. 왕 감주(王弇州
왕세정(王世貞))의 경우, 그의
자부심이 얼마나 대단하였는가. 그런데도 “‘무극이면서 태극이다.〔無極而太極〕’라는 말은 내가 감히 따를 수 없고 ‘고요하게 되면 음을 낳고
움직이면 양을 낳는다.〔靜而生陰 動而生陽〕’라는 말도 내가 감히 따를 수 없다.”라고 했으니, 그 삶이 참으로 가소로울 뿐이다.
그 방향과
형체가 없는 것을 가리켜 무극(無極)이라고 하고, 그 머리가 되는 것을 가리켜 태극(太極)이라고 하니, 태극 위에 따로 무엇인가의 영역이 있어서
무극이 되거나, 무극 아래에 별도로 무엇인가의 영역이 있어서 태극이 되는 것이 아니다. 다만 무극은 태극이 되는 근거이다. 이른바 태극은 곧
무극이니, 무극이 아니면 태극이 되기에 불충분하고, 태극이 아니면 무극은 모습을 드러낼 수 없다. 그러므로 “무극이면서 태극이다.”라고 했으니,
여기의 ‘이(而)’ 자는 하늘이 만들고 귀신이 주선한 문장의 지극히 묘한 곳이다. 왕 감주가 잘못 읽어 깨닫지 못했으니, 안타깝도다.
가령
주공(周公)을 논찬하는 사람은 “원성(元聖)이면서 총재(冢宰)”라고 했지만, 모르는 사람은 “단지 총재라고 하면 충분하지, 하필 원성을
겹치는가.”라고 한다. 또 모르는 사람은 “원성으로부터 총재가 되었다.”라고 하니, 모두 주공을 논의하기에는 부족한 자이다. 주공이 총재가
되었으면서도 원성이 아니었으면 나라를 안정시켜 백관을 통솔하기에 부족했을 것이고, 원성이 되었지만 총재가 아니었다면 백관을 통솔하여 나라를
안정시킬 수 없었을 것이다. 오직 원성이면서 총재였던 까닭에 주공다웠던 것이다. 총재 위에 따로 원성이 있던 것이 아니고 원성 아래에 따로
총재가 있었던 것이 아니니, 이는 본디 알기 어렵지 않은 내용이다. 모두 읽을 때 끝까지 탐구하지 않기 때문에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생(生)’ 자의 경우, 태극은 하나의 혼륜(混淪
섞이고 희미함)한 존재이고 두
양태〔兩儀
음양〕를 낳는데, 만일 ‘생’이라고 하지 않는다면 다시 무슨 글자를 쓸 것인가.
대체로 태극의 근본을 최대한 미루어 말하면 고요함이 그 근본이고, 고요함이 지극해져서 움직이면 분명히 양(陽)이 생긴다. 어찌 ‘낳는 도’에
대해 ‘낳는다.’라고 말하는 것이 적합하지 않겠는가. 단지 최초의 고요함만 생각하여, 고요할 때 어디에서부터인가 끊어서 도가 사라지고 음을
낳는다고 할 수 있다. 이 ‘생’ 자는 출발점이 없는 듯하지만, 이 문제를 ‘시작이 없다.’고 표현할 수조차 없는 데까지 미루어 올라가면 바로
고요함과 움직임이 서로 낳는다. 본래는 고요함뿐이다가 천황(天皇) 첫해부터 끊어서 갑자기 움직여 양을 낳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다만 움직임을
상대로 해서만 “고요하면 음이 생긴다.”라고 말할 수 있다. 저 이른바 “음을 낳고 양을 낳는다.”라는 말이 곧 “하늘을 낳고 땅을
낳는다.”라는 것이다. 하늘을 낳고 땅을 낳는데 ‘낳는다.’라고 표현하지 않는다면, 다시 어떤 글자를 쓰겠는가.
육상산 같은 무리는 제대로
읽어서 이치에 통달하여 자득하려고 노력하지 않고, 매번 일찍 일가를 이룬 문호(門戶)만 세우려고 한다. 한결같이 먼저 선입견을 가진 서투른
안목을 위주로 하면서 의심하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끝내 도에 들어갈 날이 없는 것이다.
“동네 이름이 ‘어머니를 이긴다.〔勝母〕’여서 증자(曾子)가 들어가지 않았다.”라고 했다. 어떤 사람은
이를 의심하지만 여기에는 본디 실제 그럴 만한 이치가 있다. 승모(勝母)라는 이름은 말하자니 통탄스럽고 듣자니 놀라운 일이므로, 이런 이름을
가진 동네에 사는 사람은 인심이 없음을 알 수 있다. 내가 단 하루를 묵는 것도 오히려 편치 않을 뿐 아니라, 이런 동네에 사는 사람이 어찌
군자가 묵을 집 주인이 될 수 있겠는가.
자리가 바르지 않으면 앉지 않고, 잠시도 떠날 수 없다는 이치가 또한 여기에 있다. 이 의미를 깊이 체득하면 그럭저럭 구차하게 답습하는
폐단을 면할 수 있을 것이다.
가난을 한탄하면서 부유해지고자 하는 것은, 사람이 어버이를 섬기고 처자식을 양육하며 다른 사람을
접대하는 일 모두 재물이 없으면 기쁠 수 없기 때문에 부유해지고자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부유해지기를 도모하다가 부유해지면 몸을 갈라 옥구슬을
감추니, 부유하기 위해 제 몸을 바치게 된다.
천함을 싫어하며 귀하게 되려고 하는 것은, 사람이 관직에 나가 재주를 시험하고 나랏일과
백성을 다스리며, 임금을 위해 도(道)를 펴고 세상을 위해 업적을 쌓아 이 세상에서 헛된 삶을 살지 않고 후세에 성대한 명성을 떨치기 위해서는
귀하지 않으면 할 수 없기 때문에 귀하게 되려는 것이다. 그렇지만 귀하게 되려고 도모하다가 귀하게 되면 몸을 잊고
무덤 사이에서 빌어먹으며 귀하기 위해 몸을 바친다. 이를 두고 본심을 잃지 않았다고 말하면
되겠는가.
장부의 지기(志氣)를 가진 사람이 과거에 급제하여 9품관이 된 뒤, 한 가지 일이라도 잘 처리하고 한 가지 재능이라도 잘
조치하여 장차 헛되이 녹봉을 받지 않겠다는 마음을 가지면 앞으로 백성과 나라의 일 중 자연히 이룩할 바가 있을 것이다. 처음부터 어떻게 하면
나에게 이로울까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서, 무안한 마음에 남들에게는 “나라의 은혜가 망극하다.”라고 한다면, 어찌 하늘에 두렵지 않고 남에게
부끄럽지 않겠는가.
한 고조(漢高祖)는 어찌 어른이 아니겠는가. 후세에 자만했던 무리와 비교하면 삼대(三代) 이후 오직 한 사람일
뿐이라는 말로도 부족하다. 다만 〈대풍가(大風歌)〉에
“위엄이 해내에 더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네.〔威加海內歸故鄕〕”라고 했는데, 이는 그가 마음속으로 귀한 것은 천자이고 큰 즐거움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미 천자
자리를 즐거워하는 마음을 가졌으니, 다른 것은 더 이상 볼 것이 없다. 위대하구나, 요의 임금다움이여! 천하를 소유하고도 상관하지 않았으니,
아아, 이런 사람이 아니면 내가 누구와 함께 돌아가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