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대룡문중(大龍門中)은 남원양씨(南原梁氏) 병부공(兵部公)·문양공(文襄公)·평창공(平昌公)파의 후손으 로서, 19세 조한(漢漢) 정랑공(正郞公)께서 조정에 입조하시던 시기부터 현재의 ‘부산광역시 금정구 노포 동 일대(옛 작장마을)’에 터전을 마련하여 세거(世居)해 온 유서 깊은 문중이다.
이로써 동 지역에는 종족 을 중심으로 한 집단 거주 형태가 형성되었으며, 이는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대룡문중의 공간적·혈연적 기반이 되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시행된 강제적 창씨개명 정책은 가문의 성씨와 족보 체계를 훼손하였고, 그로 인해 종친 간의 유대와 문중의 정체성 또한 크게 약화되는 시련을 겪게 되었다.
광복 이후 이러한 상처를 극복하고자 하는 움직임 속에서 전통 유교 윤리가 재조명되었고, 혈연과 뿌리를 다시 잇고자 하 는 종친들의 공감대가 형성되면서, 1970년대에 이르러 문중 계(契) 모임이 본격적으로 활성화되기에 이 르렀다.
이러한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여, 당시 (현 청룡초등)옆 조일여관에 종친들이 모여 문중의 재건과 향후 방 향에 대해 숙의하였으며, 그 중심에는
”양경모(32세)의 부친 양도용(31세)“
”양종준(33세)의 부친 양수근(32세)“
”양주호(31세)의 부친 양상홍(30세)“
그리고 양종순(33세), 양성룡(32세)종친 등이 계셨다.
이 회합을 통해 종친들은 문중의 범위와 결속을 명확히 하고자, 21세 부하(敷河) 조부를 기준으로 그 이 하 10대(寸)까지를 회원 자격으로 인정하기로 뜻을 모았으며, 종친 상호 간의 화합과 인격 수양, 가문의 발전을 도모하고자 향상회(向上會)를 조직하였다. 향상회는 이후 시대의 변화와 함께 점차 그 규모와 역할을 확장하였고, 문중의 대표 조직으로서의 위상 을 갖추게 되어, 마침내 오늘날의 대룡문중(大龍門中)로 확대 개편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