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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man Alpinist 신영철의 휴먼 알피니스트
글 신영철 편집이사
사진 정종원 기자
전설의 산사나이, 마부가 되다 손칠규
착하게 살아야한다.
칙칙폭폭 12열차가 밤새 부산서 서울로 달리던 때가 엊그제인데 지금은 고속열차가 3시간 남짓해 남한을 종단한다.
그렇게 좁아진 탓에 한 다리 건너면 누구나 인연이 연결되는 시대다. 전국이 반나절 생활권이라는 한국만 좁아진 게 아니다.
세계 역시 좁아졌다. 과학 기술은 세계를 일일 생활권으로 묶어버렸다.
한 다리 건너면 누구나 안다는 공식은 이제 세계 버전으로 확장된다. 좁은 산악계는 더 그렇다.
히말라야나 알프스로 등반 여행을 떠났다면 누군가 당신을 알고 있다는 걸 명심하시길.
지구촌도 아닌 협소한 공동체가 산동네이니까. 그래서 착하게 살아야한다.
그렇게 착하게 살고 있는 사람을 만나러 갔다. 산악계에서는 산악인보다 전설, 혹은 기인으로 더 알려진 손칠규씨.
삶의 동선이 엄청 크고 다양했던 그가 이젠 돌아와 얌전한 마부가 되었다.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두일리 792번지 ‘행복한 말 공원(Happy Horse Park).’
영동고속국도 속사나들목에서 진부로 방향을 틀자, 이내 검은 말 한 마리가 그려진 상두일길 입구가 나타났다.
그가 경영하는 행복한 말의 공원이라는 목장 이름도, 하다못해 전국에서 제일 큰 규모의 개인 종마장이란 안내판도 없다.
고개를 넘어서니 녹색이 묻어날 것처럼 낮은 산이 울타리로 감싸 안은 해발 700미터 분지에 너른 방목장이 이곳저곳 보였다.
수 만평 경주마 생산목장엔 벌써 고추잠자리가 날고 있다. 여름이 절정인데 자연은 벌써 가을을 예비하고 있었다.
대문이 없는 손칠규씨의 집 벽엔 마사회장이 보낸 ‘최우수 경주마 생산목장’이라는 동판이 붙어있었다.
매해 7조원이 넘는 매출을 기록하는 마사회의 수입은 당연히 경마산업이다.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말을 수입하고 훈련시키고 기르는 박 터지는 경쟁에서 1등을 한 말을 이곳에서 생산해 냈다니 대단하다.
그것도 산악인 출신이.
형식에 포로가 되는 인생은 없다
구렛나루에 중절모가 어울리는 손씨가 손님용 응접실로 안내한다.
거실 겸 음악실로 사용하는 그 방에서 만난 흑백사진. 고상돈, 박훈규씨 등과 함께 찍은 젊은 날의 손씨가 환하게 웃고 있다.
72년, 77원정대 설악훈련 때의 사진이었다. 또 그 방엔 공간을 달리해 색소폰도 가지런히 놓여 있다.
사진첩엔 고노무현 전 대통령과 권양숙 여사 그리고 맘고생 심하게 했던 강금원 창신섬유 회장 얼굴도 보인다.
“손님이 끊이질 않아요. 오는 사람은 한번이지만 맞는 사람은 매일이지요.
여름이면 거의 매일 밤마다 인사불성이 되는데, 오늘 역시 예감이 그렇군요.”
불감청이언정 고소원이라, 역시 선수는 선수를 알아본다.
이 그림 같은 녹색목장에서 술 없는 밤을 보낸다는 건 자연에 대한 모독이고 산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창밖 즐비한 마구간에서도 내 말이 맞다는 듯 말들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을 터. 그래도 일이 우선이다.
“꼭 만나야 할 이유가 세 가지 있었습니다. 릭 리지웨이, 휴먼원정대, 그리고 김영도 선생님 때문이지요.”
“그래요? 두 가지는 알 것 같은데 릭 리지웨이는 누굽니까? 처음 들어보는 이름인데.”
“이본 취나드는 아나요?”
“그럼요. 인수봉 취나드 A와 B코스를 오르내릴 때, 이런 등반선을 만들어 준 취나드가 존경스러웠지요.
감사하다고 생각할 정도로. 그가 만든 귀한 취나드표 장비도 애용했었고.”
“리지웨이는 지금 이본 취나드의 회사 부사장입니다. 유명한 산악인이자 산악문학가이고요.
이 꼭지에 두 사람을 인터뷰 한 적이 있어요. 손칠규씨는 그들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가 그럴 리 없다는 듯 놀란다. 이제 그 설명을 해 줄 시간이다.
미국에서 그들을 만났을 때 그들의 입에서 손칠규라는 이름이 나왔다. 정확히 말하면 이름이 아니라 ‘미친 한국인’이하고 했다.
말만으로 그친 게 아니다. 리지웨이는 책에도 썼다. 자신이 모두 썼지만 돈을 댄 그의 고객인 재벌 딕 베스와의 공저
<불가능한 꿈은 없다·Seven Summits>가 그것. 베스트셀러가 된 그 책에서도 미친 한국인을 언급했다.
‘아콩카구아 베이스캠프에서 미친 한국인을 만났다. 운동화를 신고 장비도 없이 정상에 가겠다는 넋 나간 사람.
그걸 이본 취나드에게 전하니, 구조대를 만들어야 하는 거 아니냐? 고 말했다.
그 한국인이 정상으로 홀로 오르는 모습을 보았지만 이후 그를 본 적이 없다. 그는 산에서 실종된 게 틀림없다.’
그 책에 손칠규라는 이름은 없지만 한국 산악인이라면 그 미친 등반가가 누군지 다 안다.
1982년 남미 최고봉 아콩카쿠아에서 벌어진 그 사건은 이미 전설이 되었으니까.
그러나 리지웨이의 ‘실종’된 것이 틀림없다는 말은 틀렸다. 지금 눈앞에 그 실종자가 멀쩡하게 살아 있다.
“읽지는 안았지만 그런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인정머리라고는 없는 인간들! 우리하고는 정서가 달라요.
커다란 돔 텐트에 의자, 탁자까지 준비한 미국 팀이었어요.”
손씨도 그 이야기를 들었던 모양이었으나 제대로 된 전달이 아닌 것 같다. 적어도 그 책 행간에서 내가 읽은 느낀 대로라면.
“많은 미국 등반가들이 와인을 마시며 나를 문둥이 보듯 멀건이 바라보더군요. 우리 한국 원정대와는 인심이 다르더라고요.
우린 국적을 떠나 누가 베이스캠프를 찾아오면 여러 편의를 봐주는 게 상식 아닙니까?”
여기서 딕 베스라는 인물 이야기가 빠질 수 없다. 그가 창조해 낸 게 바로 7대륙 최고봉을 모두 오르는 ‘세븐 서밋’이다.
솔직히 의미 부여를 할 만큼 대단한 등반도 아니지만 어찌 되었던 그가 인류 최초로 해냈다.
딕 배스는 산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었는데 그에게 영화제국 <워너 브러더스>를 이끌던 사장 프랭크 웰스가 합류했다.
딕 배스는 미국에서 석유회사와 미국 최대 규모의 스키리조트를 소유한 재력가였고 웰스 역시 엄청 부자였다.
그러나 세븐 서밋은 초보 산악인 딕 베스가 혼자 할 수 있는 과업은 아니었다.
당연히 가이드가 필요했고 거기에 ‘릭 리지웨이’가 선택되었다.
미국인 최초로 K2를 무산소로 오른 리지웨이는 또 이본 취나드를 끌어들였고.
그러니까 손칠규씨가 82년 아콩카구아에서 그 팀을 만난 건 그 세븐 서밋 일환으로 등반에 나선 때였다.
두, 돈 많은 재력가들이 만든 베이스캠프가 호화판이었던 건 불문가지.
그렇게 대규모 원정대를 만들어 노심초사 정상을 노리고 있는데
죽장에 삿갓 쓴 ‘손삿갓’처럼, 노란 황인종 하나가 걸망 하나 메고 찾아 들었으니 약도 올랐겠다.
당대의 등반가 이본 취나드와 리지웨이를 대동한 대규모 원정인데,
겁 없는 한국의 등반가가 홀로 보따리를 메고 정상으로 가니 소위 ‘쪽팔린’ 것이다.
대포로 파리 잡겠다는 자신들이 부끄러웠던 거다.
“저런 ‘또라이’들 때문에 어쩌면 우리가 구조를 나서야하는 건 아닌지 몰라”하는 자신들의 합리화.
고객인 딕 베스와 웰스 앞에서 할 수 있는 일종의 과장법이었던 것이다.
웰스가 만든 영화 인디애나 존스에서 자객 두 명이 칼을 들고 설칠 때,
그 깨춤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해리슨 포드가 총을 꺼내 간단히 쏴 죽이는 장면의 코미디가 연상되어 웃음이 났다.
“그랬군요. 통 몰랐지요. 당시는 그 사람들이 누군지 알 수도 없었고요.
아콩카구아를 가야하는데 그때는 여권 얻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다 단수여권이라 귀국하면 다시 만들어야 했지요.
칠레에서 열린 국제산악연맹 회의에 참가한다고 여권을 발급받았습니다.”
회의는 무슨 회의! 산으로 튀었다. 물 만난 손씨는 아콩카구아로 곧바로 간 것이 아니라 북·남미 지역의 산을 무수하게 떠돌다
들어갔다. 엉덩이 헤진 추리닝 차림으로 입성한 아콩카구아. 미국 팀 눈에 이상하게 보이지 않았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일 터였다.
“낡고 해진 배낭이지만 그래도 그 속엔 있을 건 다 있었습니다. 소시지 등 음식. 버너, 장비 …
남벽이 내 목표였고 단독으로 그리로 올라 이쪽으로 내려 올 심산이었기에 정상 가까이 짐을 올려놓고 내려왔어요.
내려오며 보니 미국인들은 와인 마시고 자고 있더군요.”
손씨의 방랑벽은 유별났다. 81년부터 인도, 시킴, 캐시미르, 네팔을 쿨리(coolie)처럼 떠돌았다.
남루해진 옷과 먹어야 살기에 손씨는 시간이 지나면 현지인들과 구별이 없어졌다.
그런 손씨가 이상한 차림을 하고 분명히 정상으로 갔는데 내려 온 걸 못 보았으니
“미친 한국인이 결국 아콩카구아에서 등반 중 사라졌다”는 말이 나올 수밖에.
아콩카구아의 ‘미친 한국인’손씨는 남벽의 플라자 프란씨아에 텐트 한 동을 쳤다. 베이스캠프였다.
“송림제화에서 만든 티롤리안 이중화였습니다. 그들 말대로 운동화는 아니었고요. 베이스캠프에서는 남벽이 한 눈에 보였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난이도 있는 등반을 기대했는데, 이건 울릉도 송곳바위보다도 못한 거예요.
낙석만은 굉장하더군요.”한낮에는 얼음이 녹아 낙석이 심하므로 위험한 구간은 새벽이나 어스름에 올랐다.
“5일 정도 걸려 정상을 올랐습니다. 정상에 쇠로 만든 십자가 표시가 있기에 거기에 태극기 묶어 놓았지요.
그러던 순간 갑자기 화이트 아웃이 몰려왔습니다. 내 발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눈보라가 짙었어요.
등반 중 먹은 게 별로 없어 배도 고프고 춥기도 하고…. 노말 루트 쪽 리지를 따라가며 데포 시켜 둔 내 배낭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자신이 가져다 놓은 배낭을 필사적으로 찾아 헤맸지만 그게 보이지 않았다.
“그거 못 찾으면 큰일이다 싶어 눈안개 속을 걷다가 그만 눈처마를 디딘 겁니다. 어~어~ 할 새도 없이 순식간에 추락한 거지요. 나중에 알았지만 재수 없게도 맨도사 쪽 노말 루트나 내가 올라온 남벽 쪽이 아닌,
전혀 다른 전인미답의 산 후앙 쪽으로 떨어진 겁니다.”
그때부터 손씨에게 지옥문이 열렸다. 공연한 수사가 아니라 말 그대로 지옥이었다.
손씨가 사경을 헤매고 있을 때 노말 루트로 올라 온 스페인 팀은 정상의 작은 십자가에 매달린 태극기를 발견했다.
그것을 가지고 내려오므로 손씨의 정상 등정은 확인되었고 더불어 자신들도 정상에 선 것을 증명하였다.
그래서 릭 리지웨이의 미국 팀은 그 노란 황인종이 ‘미친 한국인’이며 결국 실종되었다고 믿게 되는 것이다.
“추락하면서 다행히 몸은 다치지 않았어요. 다시 올라갈 힘도 없고 어디가 어딘지 분간이 안 돼 그대로 하산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또 눈사태를 만났어요.
수백 미터를 날아가면서 이젠 끝났구나! 했지요. 그 짧은 순간 영화필름 넘어가듯 온갖 생각이 다 떠오르더군요.”
추락 속도가 빨라서인지 손씨는 눈사태에 파묻히지 않고 또 베르그슈른트(빙하와 산이 만나는 곳)에도 빠지지 않았다.
그곳으로 빠졌다면 이렇게 만날 수도 없을 터. 그러나 살아 난 것이 다행이라는 말은 맞지 않는다.
그때부터 산채로 경험하는 진짜 지옥을 만났으므로.
“배는 고프지요 설맹은 걸렸지요, 이명에 환청까지 나타나지요, 살아 있어도 산 것이 아니었습니다.
얼음 속의 밤은 얼마나 춥습니까? 긴 밤 비박으로 지새우며 잠들까봐 1000까지 세고 거꾸로도 세고…
너무 고통스러워 죽는 게 낫다 싶을 정도로 하느님을 원망했습니다.”
손씨는 미션 계열인 계명대학교에 진학하자 산악부를 창립했다.
일요일 예배 안 보고 산에 가는 걸 기독교학교에서 이해할 리 없기에 산악부 창립 허가를 해주지 않았다.
그러나 뚝심으로 밀고 나가 성사시켰지만 이번엔 학장이 손씨를 설득하고 나섰다.
위험한 산에 가지 말고 교회 나오라고. 그 말을 듣지 않은 게 후회가 되었다.
어디가 어딘지도 모르는 빙하 미로 속에서 하산 길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그래서 하느님을 엄청 욕했다.
죽이려면 빨리 죽이라고. 빨리 결딴내어 이 고통을 벗어나게 해 달라고.
죽을 만하면 살려내어 형극의 길을 계속 가게 만드는 그 이유가 뭐냐고.
“며칠 하산하다 깊은 협곡을 만났어요. 위에서는 폭포가 떨어지고 폭이 한 2미터쯤 될까? 그런 계곡을 만난 거지요.
아득한 계곡이니 물론 추락하면 모든 게 끝나겠지요. 건너편엔 어긋난 크랙이 보였고 약간 경사진 턱이 보이더라고요.”
그걸 건너뛰어야 하는데 도저히 용기가 나지 않았다. 평지 같으면 간단한 일이었는데 고도감 때문이었다. 그러나 방법이 없었다. 우선 배낭을 건너편에 던져 놓았다. 큰 맘 내어 점프를 하려다,
죽음처럼 깊은 계곡의 바닥을 보면 다시 주저 않기를 하루.
죽여 달라는 신에게의 투정도 막상 현실로 다가서자 생존본능은 그를 움츠리게 만들었다.
“돌로미테 이중화를 벗었지요. 건너편도 물기가 있으니 미끄럽잖아요.
그래 안의 내피만 신었어요. 이래 죽나 저래 죽나 나도 모르겠다, 하고 뛰었는데 무사히 안착했어요.
그 대신 바위에 부딪쳐 이빨이 왕창 나간 겁니다.
부러진 이빨과 피를 뱉어내면서 얼마나 통쾌하던지 누운 채 피거품을 뿜어내며 한참 웃었습니다.”
살아도 산 것이 아닌 8일간의 생지옥
식량이 없기에 닷새 동안 굶은 채 걷고 넘어지고 기었다. 그래도 사람 흔적이 없었다.
“그럴 줄 알았어. 별종답게 죽어도 지구 반대편까지 가서 죽는구나. 울고 있는 아내와 까불더니 결국 그렇게 갔구나,
하며 내 초상집에서 술 퍼먹을 친구들 생각이 나데요. 그 놈들 즐겁게 해 줄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자 또 기었습니다.”
그러다 손씨는 결국 설선 아래로 내려왔다. 물 흐르는 계곡을 만나 배가 볼록하도록 마셨다.
석회석 섞인 물맛은 기가 막혔지만 일주일을 굶은 배는 부르지 않았다.
“개미를 잡아먹었어요, 7일 만에 처음 먹는 것이었지요. 그 이튿날은 새끼 새가 보이기에 털을 뜯어내고 날 것으로 먹었습니다.
힘이 없어 바위에 누워 있는데 작은 뱀을 발견했어요. 행
여 놓칠까봐 그랬는지 손가락 두 개로 꽉 찍어 잡으니까 목이 으스러지데요.”
그랬겠다. 굶어 죽지 않으려면 잡아먹어야 했으니까. 으스러진 뱀 머리를 잡고 껍질을 벗겼더니 껍질과 내장이 분리되었다.
“뱀도 한 건하고 따듯한 바위에서 해바라기를 하던 참이었던 모양입니다. 내장 속엔 카멜레온 한 마리가 들어 있더군요.
처음엔 살덩이만 먹고 버렸는데 껍질이랑 창자 속의 카멜레온이 아까워 다시 주워 먹었어요. 뱀 껍질이 얼마나 질기던지…
하루 종일 씹다가 그냥 꿀컥 삼켰습니다. 무언가 목젖을 타고 뭉툭한 게 넘어가는 느낌이랄까, 그랬지요.”
뱀을 먹어 허기를 채운 대가는 혹독했다. 다음날부터 뱀독이 올라 온 전신이 붓기 시작한 것이다.
고통도 느끼지도 못할 만큼 손씨는 완전히 탈진했다.
“헛것이 보이고 동공이 풀리는 걸 알게 됩디다. 오줌이 질질 새 나와도 제어가 안 되었어요.
만년설을 벗어나 겨우 땅까지 내려왔는데 이렇게 죽는구나 하고 생각하니 말라버린 눈물이 나더군요.
이번에는 그렇게 욕을 해 댔던 신에게 싹싹 빌었습니다. 제발 살려 달라고. 그러면 열심히 하느님 믿겠다고.”
그런 생사가 걸린 와중에도 손씨는 일기와 사진촬영은 놓지 않았다.
자신이 어떻게 죽어갔으며 어떻게 살려고 발버둥 쳤는지 산악계 선후배들에게 흔적을 남기고 싶었다.
“지금 통하는 말처럼 셀카로 매일 최후를 찍은 거지요.
일기와 미녹스 카메라로 스스로 찍은 필름을 챙긴 후 여권 사본에 유서를 썼습니다.
나는 한국인 손칠규다. 누군가 나를 발견하면 이 카메라 절대 열지 말고 한국대사관으로 보내라.
그러면 그대는 카메라 값보다 더 큰 보상을 받을 것이라고요.”
사람 목숨은 그가 씹었던 뱀 껍질만큼 질겼다. 손씨는 결국 살았다.
지옥에서의 탈출 8일 만에 남미에만 사는 야생 ‘라마’ 사냥꾼을 만난 것이다.
그가 끓여준 감자와 고기를 넣은 스튜 한 냄비를 다 먹고 체면 없이 뻗어 버렸다.
누워있으니 먹은 음식이 입가로 넘쳐 나왔다. 힘이 없어 일어나지도 못하는 몽롱한 의식 속에서도 손씨는 그게 아까웠다.
사냥꾼의 보살핌으로 하루를 쉬고 다시 걸어 밤 12시경 군인 초소를 만났다. 손씨를 보자 그들은 괴물을 만난 것처럼 놀랐다.
얼굴은 굳어 버린 빵조각처럼 갈라지고 온통 고름 투성이 입술에,
이미 해진 내피 신발을 옷을 찢어 묶은 귀신같은 몰골이었으니까.
“죽을 줄 알고 그랬는지 군인들이 나를 마구간에 재우더군요. 이튿날 말을 타고 하루거리인 본부로 내려가 조사를 받았습니다.
거기서 의사에게 비로소 동상과 입안 치료를 받았고 맨도사로 나올 수 있었던 거죠.”
그의 불가사의한 생환 소식은 삽시간 알려져 현지 신문들이 대서특필했다. AP, UPI 통신 등 언론을 타고 전 세계에 타전되었다. 한국도 발칵 뒤집혔다.
음(音)·악(岳)·말(馬) 그리고 다시 산
말 이름이 실버였다. 이제 목장에 정착하여 착한 마부가 된 손씨가, 말 이름처럼 백마를 타는 사진을 먼저 찍기로 했다.
“이 녀석이 3살 때 내게로 왔고 지금 19살이니까 벌써 16년째 나와 한 몸이네요.”
말안장을 묶으며 손씨가 지나가듯 말한다. 승마복으로 갈아입은 차림이 폼 난다.
“눈앞에 보이는 산야 거의가 우리 목장에 속한 곳이고 이곳선 안 보이지만 저 골짜기와 능선 넘어 한 십여 만평이 더 있지요.
말 공원인 이곳에 외국 유명 승마학교 분교도 만들 계획입니다.
늘어가는 승마 마니아들을 위한 공간도 만들고 분양도 할 생각이고요.
저 건물 3층엔 와인 바 같은 걸 만들어 공연도 하고 즐길 시설이 들어설 예정입니다.”
‘실버’를 타고 오르는 길을 경계로 방목장과 채소밭이 양쪽으로 보인다.
“채소밭은 말똥이 만든 유기농 작물입니다. 말똥이 퇴비가 된 밭이 되니까요.
말도 먹고 사람도 먹는 채소밭은 2년에 한번 정도 방목장을 바꾸면 간단히 유기농장이 되지요.”
가장 위쪽에 있는 방목장에 들어 선 손씨가 반가운 듯 말들이 다가선다. 경주마라 그런지 모두 잘 생겼다.
이제 종마 산업은 평창군의 주력산업이 됐다. 그 중심에 손씨가 있다.
그가 능숙하게 말을 다루며 달렸다. 바람처럼 달리는 모습에서 평생 그렇게 살아 온 자유로운 영혼을 보는듯했다.
주변 풍경과 어우러져 그림이 아주 보기 좋았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땐 천막치고 몇 년을 살았습니다. 대구에서 이삿짐을 옮기는데 7년이 걸렸어요.
지금은 교통이 수월해졌지만 그때는 임도도 없었으니까요. 이삿짐 트럭을 트랙터로 끌며 들어 온 버려진 땅이었습니다.
25년 전인가, 소문을 듣고 내 천막을 찾아 온 어느 산 친구가 그렇게 말해요. 너는 계속 허황된 꿈만 꾼다고.”
그 말도 맞을 것이다. 보통사람들 눈으로 보면 손씨의 행동과 생각은 한참을 앞선 상상력이었으니까.
그러나 그 말은 틀렸다. 지금, 이렇게 엄청난 목장이 되어 있지 않은가.
“경주마의 육종은 말 그대로 백년대계입니다. 임신기간이 330일쯤 걸리니까요.
그걸 키우고 훈련시켜 검증 받은 후 좋은 유전자만 뽑아내어 종마를 만들어 내야지요.
종국엔 한국형 경마를 만들어 세계를 제패하는 게 내 꿈이자 내 후배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한국 종마는 세계 속에 우뚝 설 것이다.
그러나 산이 많은 한국적 지형에서 과연 세계적 경주마가 탄생할 수 있을까?
“방목이라는 것은 말에게 자유를 준다는 것처럼 들리지만 결국 방치한다는 말입니다.
노동과 운동이 다른 개념이듯 현대의 경마는 만들어 집니다. 백두대간은 우수한 경주 말을 생각하는 데 최적이라고 믿고 있어요. 경사각이 있어야 근력도 살고 심폐기능도 좋아집니다. 이 정부의 콘셉트가 ‘녹색성장’ 아닙니까?
말 육성은 그 철학에 딱 들어맞는 겁니다. 사육, 조련 등 사람이 많이 필요하니 녹색일자리 창출도 되고요.”
이 목장 출신 말이 찰나를 다투는 경마에서 우승도 했다는 게 백두대간이 말 키우기에 좋다는 증명이 된다.
티베트에서 본 눈가에 파리 떼가 붙은 말이 생각났다. 말 팔자 역시 알 수 없다.
손씨 같은 목장주를 만나면 목욕에 빗질까지 호강을 하니까.
“드럼통 두드려 조립했던 시절을 겪으며 지금 세계 5위 자동차 생산국이자 성능을 인정받는 나라가 한국 아닙니까?
해발 2000미터도 안 되는 나라에서 14개 고봉을 모두 오른 완등자 4명을 보유한 것도 사실이고요.
특히 여자 최초의 완등자를 만들어 낸 것처럼 내가 꿈꾸는 말 역시 그렇습니다.”
그때 처음 알았다. 이곳의 종마는 몇 억 원짜리도 있다는 것을.
“놀러 온 엄홍길이 그 종마를 타고 싶다는 겁니다. 말렸지만 결국 올라타더군요. 하하.”
700평이 넘는 국제 규격 실내 승마장으로 이동한 손씨가 사진을 위해 ‘실버’와 전력 질주하고 있다.
한국에서 말을 제일 잘 다룬다는 손씨의 말이 새삼스럽다.
“가장 진화가 완벽한 동물로 말을 꼽을 수 있어요. 보세요, 어느 한군데 버릴 것 없는 몸매는 예술성마저 지녔지요.
말은 감성적 동물입니다. 사람처럼. 그러나 사람은 자연에 대하여 온갖 못된 짓을 하지만 말은 달라요.”
실내 마장에서 이동한 다른 방목장에는 어미와 새끼가 있었다.
태어 난지 3개월 되었다는 새끼는 앙증스럽지만 뼈대 있는 종마답게 내 키보다 크고 늘씬했다.
“이 놈도 출산할 때 내가 받은 겁니다. 사람의 아기는 산부인과에서 기구를 사용하여 양수를 빼내지만
난 입으로 이 녀석 양수를 빨아냈어요. 세상에 나올 때 가만히 끌어안으면 이 녀석들 장래가 보입니다.
심장의 박동소리로 그걸 감별하지요. 경주마의 운명인지 올림픽 장애물 경기에 나설 새끼인지.”
언젠가 본 다큐에서 난태생 새끼들은 부화할 때 제일 먼저 본 것을 어미로 생각한다는 게 떠올랐다. 그걸 각인순치라 한다고 했다.
“내분비 계통의 호르몬을 이놈들은 냄새로 기억해요. 사람은 인격을 포장한 위선이 있지만 말은 그걸 냄새로 알아요.
이놈들은 저보다 크면 좀 불안해해요. 그러니 이렇게 자세를 낮추고 조용히 있으면 가까이 와 스킨십을 합니다.”
그렇게 익숙한 체취 때문일까. 말 새끼들은 손씨를 경계하지 않았다.
미소를 띠우며 조용히 앉아 있는 손씨에게 다가서더니 입을 맞춘다. 손씨가 착하다는 감동적 퍼포먼스였다.
그의 ‘행복한 말들의 목장’
어스름이 깔리자 손씨의 아내 정영자씨가 성당에서 돌아오는 길에 양조장에서 막걸리 한말을 받아왔다.
별난 남편과 정영자씨 사이에는 2녀 1남이 있다.
이름 하여 비나, 바나, 자일. 그 이름 앞에 손씨를 붙이니 투박스러운 산 장비가 아니라 세련되고 예쁜 이름이다.
그 딸 비나가 지금은 대한산악연맹 국제분과위원으로 있는 화가이며, 바나는 수의과학 검역원의 공무원으로 재직중이고,
막내 자일은 홍대 대학원을 졸업하고 지금은 중견 조각가로 활동중이다.
“남을 의식하지 않고 내 시계대로 살아 온 세월이었지요. 젊은 날, 원도 한도 없이 산에 빠져 봤고
이젠 말 나라를 꿈꾸며 30년을 이 땅에 내 그림을 그려왔어요. 환갑이 되고 보니 자연이 원하는 바를 어렴풋이 알 것 같아요.”
목장을 조성한다고 계곡을 바꾸고 복토를 해 놓아도 큰 물 한번 지면 원래대로 돌아가는 걸 보며
그게 자연의 이법이고 순리라는 생각이 요즘 든다는 말이다.
직선에서 곡선으로, 날카로움에서 부드러움으로 방향이 전환되기 위해 손씨가 보낸 시간은 충분했던 것일까.
“인생 한판 잘 놀았습니다. 이 목장을 보며 사람들은 땅 부자라고들 하지만, 땅은 그저 땅일 뿐이죠.
죽을 때 한 평이라도 가지고 갑니까? 잠시 보관 관리했을 뿐이지요.”
손씨의 취미는 광폭이다. 클라이밍, 스키, 승마, 스킨스쿠버, 산악자전거가 동적인 취미라면
어릴 적부터 가지고 놀았다는 고가의 장난감 핫셀브라드로 찍는 사진.
거기에 테너, 알토, 소프라노 색소폰을 연주하는 음악가. 그리고 듣는 사람 정신을 쏙 빼놓는 박학다변.
동적인 취미가 거의 이빨 빠지는 격렬한 것이라서 그의 이는 거의 의치다.
다만 이빨과 바꾼 그 운동량은 그의 몸매를 군살 없이 건강하게 만들어 놓았다.
“책을 끝까지 읽은 게 별로 없다”는 겸양과는 다르게 서재에는 책이 빼곡했다.
어릴 때는 음악에 미쳤다가 청년 때는 산에 미치고, 이젠 말에 미쳐있는 막신일호(莫神一好)의 삼세판.
색소폰을 연주하는 손씨의 과거가 떠올랐다. 서독 가는 박정희 대통령을 수행할 만큼 손씨의 아버님은 대구지역 재력가였다.
7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난 아들을 위하여 그 당시로는 파격인 프랑스제 셀마 색소폰을 사다 줄 정도였다.
손씨의 아버지는 냉동 공장도 소유하고 있었다.
판매용 사각 얼음을 쌓고 호스로 물을 뿌려 오버행 빙벽부터 여러 가지 동선이 나오는 빙장을 손씨는 만들었다.
혼자만의 빙장이었고 지금 우이동의 오투월드보다 한참이나 앞선 70년대의 일이다.
“중학교 때 키가 작으니 그 테너 색소폰이 질질 끌렸어요.
다음엔 덩치가 작은 알토 색소폰을 선물하셨고요. 테너 색소폰은 1843년생이니 이젠 골동품이죠.
딸 아이가 프랑스 가는 길에 본사에 수리를 하러 갔더니 해마다 신형이 나오면 보내 줄 테니 기증하라고 하더래요.
박물관에 전시하겠다고. 안되지요. 아버지의 유품인데.”
어릴 때부터 피아노를 친 영향으로 그가 음대에서 작곡을 전공한 계기였는지 모른다.
산을 알자마자 그 피아노 팔아 당시 산악인들이 오매불망 가지고 싶어 했던 피켈, 이중화, 아이젠, 버그하우스 오버트라우저 등
외제 일색의 등반 장비를 마련했다. 피아노 하나라도 기죽이기 딱 알맞은 시절, 시몽 피켈 한 자루만 있어도 보물 1호였던 때,
손씨는 가난한 산쟁이 기를 죽이다 못해 독사 약 올리는 동선을 보인 거다. 그 장비를 자랑하고 싶은 것은 인지상정.
가와사키 350cc 오토바이를 타고 팔공산에 갔다가 “이 산에서 그런 장비는 필요 없다”고 선배들에게 흠씬 두들겨 맞았다.
“나는 선배들 가치기준에서 벗어난 못난 오리새끼였는지도 몰라요.
실력, 장비, 어떤 것도 뒤지지 않는다는 생각을 했던 때였으니까요.
철철 넘쳐났던 자신감이라고나 할까. 77에베레스트 훈련은 1,2,3차 빼놓지 않고 참가했습니다.
겨울에도 창문 열어 놓고 해먹에서 자고 에베레스트는 그때 또 내 청춘의 전부였습니다. 그런데 탈락이더군요.”
앞서가는 사람의 심정을 보수적인 산악계에선 몰랐다.
코드가 다른 그것이 손씨로 하여금 단독 등반을 즐기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손씨는 송곳바위 등 울릉도 암벽에 무수히 초등을 이뤄낸다.
맞춤 제작한 것이기에 손칠규라는 영문 이니셜이 새겨진 녹슨 하켄은 지금도 발견된다는 것이다.
처음이지 싶어 올라가 보면 하강 지점에 꼭 그 하켄이 보였다고. 울릉도 토박이 산꾼들은 증언하고 있다.
“74년인가? 마지막 설악산 훈련 때도 김영도 대장님 따까리를 했어요.
지금도 내게는 대장입니다만 40년 만에 작년 발왕산 스키대회 때 만나 여기서 하룻밤 모시고 지냈지요.
나에게서 얽히고 설킨 산에 대한 실타래를 풀어내려 하셨어요.
숨어있으면 직무유기니 산으로 나오라고. 산을 언제 떠난 적이 있나요?
결혼하면 처녀 때 연애한 남자친구 이야기를 다 할 필요 없듯, 산은 언제나 내 속에 있어요. 다만 앞장서지 않았을 뿐이지요.”
비유가 좋다. 말 그대로 시집갔으면 연애시절 남자는 가슴에 묻어 놓아야 한다.
산에 대한 열정과 짝사랑 역시 추억으로 남기고 말을 아껴야 한다는 말로 들린다.
꼭 증언을 들어야 할 부분이 생각났다. 2004년 5월. 초모랑마에서는 대참사가 일어났다.
계명대 개교 50주년 등반에 나섰던 후배 백준호, 박무택, 장민이 떼죽음을 당했다.
동계 훈련 때면 대선배인 손씨 목장에서 늘 훈련을 마무리하던 분신 같은 후배들이었다.
2005년 손씨를 원정대장으로 엄홍길을 등반대장으로 삼은 ‘휴먼원정대’가 초모랑마로 떠났다.
라마제를 지내는 날 손 대장은 절규했다.
“준호야, 무택아, 민아! 이제 집에 가자!”
그 영상을 봤던 수많은 시청자들, 특히 산악인들은 참 많이 울었다.
결국 원정대는 등반로 곁에 있는 박무택의 시신을 거둬 돌무덤을 만들어 놓았다.
“다 친동생 같은 후배들이었어요. 특히 무택이는 1996년 내가 대장으로 갔던 가셔브롬Ⅱ도 함께 했습니다.
그런 대원들을 차디찬 에베레스트에 남겨둔 시간은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니었지요.
그들을 찾아나서야 하는 것은 우리의 숙명이었습니다.”
죽은 대원들은 손씨의 목장에 자주 왔었다.
계명대 OB는 재학생들이 장기 동계훈련을 끝낼 때 쯤 합류해 산행을 손씨 목장에서 마친다.
백여 명이 될 때도 있다. 그만큼 계명대의 산악부 결속이 단단한데 아내 정영자씨는 그들을 모조리 챙긴다.
술 먹이고 고기 먹이고 돌아 갈 때는 김장 김치 듬뿍 싸준다.
당연히 영화에서 조폭 형님에게 바치는 충성처럼,
후배들은 산악부의 태조 손씨와 그의 아내를 황후처럼 지금도 그렇게 모시고 있다.
“건전하게 살지 말자”는 농담 같은 인생관
“결혼요? 설악산을 헤매고 있을 때 집에서 사람이 찾아왔어요.
대구로 빨리 돌아오라는 전갈에 서둘러 가니 결혼식 날짜가 잡혀 있더군요.
집안 어른끼리 정혼을 약속한 사이였지만 데이트 한번 못해봤지요. 겨울이었는데 신혼여행은 한라산 적설등산으로 대신했고요.”
그렇게 지금의 아내 정영자와 결혼한 손씨는 대구에 신혼 아내를 두고
설악산 토왕성 빙벽으로 가서 윤대표와 한국 3등을 기록하며 오른다.
“인생의 가치기준이라, 그거 참 어렵네요.
건강하게는 살아야하지만 건전하게는 살지 말자라고 농담처럼 말합니다. 인생 뭐 별거 있습니까?
응접실에 있는 사진첩에서 38개국에서 온 늘씬한 모델들에 쌓인 손씨의 웃음이 떠오른다.
그 바쁜 와중에도 손씨는 영남대 대학원에서 경제학을 건국대 대학원에서 축산학을 전공했다.
바비큐와 막걸리와 색소폰에 적당히 취한 밤이 깊어지자 추었다.
세상에! 서울 같으면 잠 못 들 열대야가 분명한데 이곳은 선선하다 못해 춥다.
더운 여름밤을 시원하게 보내는, 그렇게 행복한 말들의 공원은 밤이 깊어 갔다.
출처: 사람과 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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