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충남 아산군 송암면 외암리의 외암(巍巖)마을이다.
외암마을은 광덕산에 북쪽으로 뻗은 맥인 설화산(雪華山 447m)을 주산으로 한다.
멀리 남서쪽에 위치한 봉수산(鳳水山 535m)을 조산(朝山)으로 한다.
마을 사람들은 외암리의 내맥을 회룡고조(回龍顧祖) 형국이라고 본다.
외암마을은 앞으로 작은 시내물이 합수되어 마을을 감싸주고 있어
전형적인 배산임수(背山臨水)의 풍수적으로 대단한 명당마을이다.
설화산은 그 봉우리가 뾰족하여 붓 모양을 한다. 그래서 필봉(筆峰)이다.
가운데 봉우리가 우뚝하여 봉황이 날개를 편 모습으로 보이기도 한다.
또 선인이 독서를 하는 모습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 봉우리가 5개라 오봉산이라고도 부른다.
외암마을은 물을 건너야 들어갈 수가 있다.
풍수에서는 계수즉지(界水則止)라 하여 산이 물을 만나야 기운이 멎고 음양이 조화가 된다고 한다.
설화산에서 이어진 용맥이 물을 만나 멈추고 물길이 마을을 감싸고 도니
풍수적으로는 산관인정(山官人丁) 수관재물(水官財物)의 완벽한 길지이다.

마을의 모양은 길죽한 타원형으로 마을 중앙으로 동서축의 길이 있다.
동고서저(東高西低)의 지형의 마을은 좌우측으로 작은 샛길이 있어 집들이 배치되었다.
중앙의 길은 나무의 줄기가 되고 작은 샛길은 나무의 가지가 되어 가지마다 열매가 맺는 마을의 배치가 되었다.
마을의 길은 나지막한 돌담길로 계속 이어지는데 돌담길의 정취가 특별하고 밖으로부터 바람도 잘 갈무리 된다.
북서쪽으로는 북서풍에 대비하여 소나무 방풍림도 조성되었다.
주산과 안산의 조응을 보면 주산인 설화산이 높고 안산인 면잠산(眠蠶山)이 낮아 주와 객의 관계가 분명하다.
설화산의 봉우리가 뾰족하고, 화의 기운이 강하여 마을안으로 인공수로를 만들어 집집마다 물길을 연결하였다.
물은 연못에 물도 담고 빨래터도 되며, 화재시에는 방화수의 역할도 한다.

외암마을은 입구를 가로 질러 흘러가는 개천으로 안과 밖이 명확히 구분된다.
개천의 다리를 건넘으로써 마을로 들어간다. 다리를 건너지 않으면 아직 마을은 아니다.
마을 밖에 있다는 의미이다. 이 개천은 마을의 경계를 알려주는 중요한 요소이다.

신성한 공간을 보호하여 주는 금천교(禁川橋)가 있다.
궁궐이나 왕릉 사찰 서원 향교 등에는 성스러운 영역을 보호하여 주는 금천교를 둔다.
이 다리 개천을 건너서 조성한 외암마을은 대단히 성스러운 공간이다.
이 다리는 각종 사특한 무리로부터 이 마을을 보호하여 주는 금천교 기능을 한다.

외암마을 입구에 있는 반석과 석각도 자랑거리다. 물레방아와 정자 아래 개천 바닥에 반석이 깔려 있다.
마을쪽으로 ‘외암동천(巍巖洞天)’과 ‘동화수석(東華水石)’이란 글이 새겨진 석각이 있다.
외암동천 석각은 높이 52센티미터 너비 175센티미터 크기로 외암 이간의 직계 후손인 이용찬이 썼다.
동화수석 석각은 높이 50센티미터 너비 2미터 크기로 역시 예안이씨인 이백선이 썼다.

외암마을을 지켜주는 수호신 장승 솟대가 세워져 있다.
마을 입구를 상징하는 표시 역할을 하는 것과 동시에 마을의 안녕과 질서를 지켜주는 신앙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기도 하다.

예부터 외암마을을 삼다(三多)마을이라고 했다.
첫째. 돌이 많아 석다(石多) 둘째. 말이 많다 언다(言多)
셋째. 양반이 많아 반다(班多) 그래서 삼다마을으로 불렀다.
석다(石多)는 벼루형 풍수인테리어상이 이유고, 언다(言多)는 고사독서하니 글읽는 소리이다.
반다(班多)는 문방사우 외암마을 선비들이 벼슬길에 문전성시를 이루었다는 것에 비유될 수도 있다.

퇴호 이정렬(1868~1950)은 조선말기에 이조참판을 지낸 인물로 고종으로부터 퇴호거사(退湖居士)라는 호를 받았다.
이정렬의 할머니가 명성황후의 이모였다. 명성황후는 이정렬을 매우 아끼어 필묵과 첨지를 내려주기도 하였다.
그는 17세 되던해 명성황후에게 당시 일본의 한반도에 대한 음모가 꾸며지고 있음을 지적하기도 하였다.
이 집 대문으로 가는 담장 모서리에는 한옥에서 보기 드믄 남근석이 지킴이로 서 있어 눈길을 끌었다.

24세 되던 해 과거에 급제하고 관직생활을 시작하여 이조참판에까지 이르렀다.
34세때 일본이 강제로 통상조약과 사법권이양을 요구하니 이에 통분을 이기지 못하고
고종황제에게 상소를 올려 당시의 책임인 외부대신을 탄핵시킬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공의 뜻이 조정에 받아들여지지 않자 자신은 나라를 팔아먹는 조정의 신하가 될 수 없다며
관직을 포기하고 낙향하였다.
관직에서 물러나 송악으로 낙향한 그해 11월 칠은계를 조직하여 충남일대의 항일운동에 영향을 미쳤다.
'참판댁'이라 부르는 퇴호 이정렬이 살던 집에는 지금도 유품이 많이 남아있다.
퇴호거사의 편액은 고종이 지었고 글은 영친왕이 쓴 것이다.

고종의 하사품으로 지어진 참판댁이다.
이 집은 창덕궁의 낙선재를 본 따 지은 집이다.
솟을대문을 통하여 밖을 내다보면 마을의 안산인 면잠산이 노적봉의 모양으로 정확히 들어온다.
안채에서 앉아서 밖을 보면 안산이 눈높이 보다 높아서 솟을대문을 정면이 아닌 비스듬하게 배치했다.
이는 풍수지리상으로 불견(不見)처리했다고 한다.
물이 좌에서 우로 감싸돌고 주산과 안산을 축으로 하여 안채와 사랑채 솟을대문을 배치하였다.
앞으로는 문전옥답이 펼쳐지는 부자명당이다.

참판댁 며느리 안동 권씨가 남편 예안 이씨 용덕씨와 함께 묻혀 있는 무덤이다.
권씨는 13살 때 이용덕씨에게 시집을 왔다. 불행하게 남편 이용덕씨가 다음 해 요절한다.
청상과부가 된 권씨는 늙은 시어머니를 봉양하면서 가사를 이끌다 86세 돌아가신다.
1978년 정부에서는 권씨의 효행을 기려 표창을 하고 마을 입구에 정려각을 세운다.
참판댁 대문 앞 담장 끝에 남근석을 세운 것도 이와 깊은 관련이 있다고 전한다.



이 인공수로를 풍수에서 '염승(厭勝)'이라고 한다.
전통 오행(五行)사상에서 화(火), 물(水)은 서로 상극이다.
이 마을에서 주산인 설화산(雪火山)의 발음이 불을 상징하는 '화산(火山)'과 같다.
이 때문에 옛 사람들은 마을에 그 '화'의 기운이 미칠 수 있다고 생각하여
마을내부에 화와 상극하는 '물(水)'을 끌어들여 '화'의 기를 제압하려고 했던 것이다.
자연에 순응하고 자연에 스스럼없이 적응해 나가기 위한 선조들의 빼어난 착상이라고 생각된다.
이처럼 외암리 마을에서는 자연적인 건축요소를 활용하는데 있어 하나는 그대로 둠으로서 자연을 살리고,
다른 한편으로 이것을 인위적으로 이용함으로서 자연과의 조화를 이루려 하였던 것이다.

외암마을은 예안이씨의 집성촌이다.
예안 이씨가 처음 들어와 살게 된 것은 조선 명종 때 장사랑(將仕郞) 벼슬을 지내 이정 때이다.
예안 이씨를 빛낸 인물은 이정의 6대손인 외암 이간(李柬, 1677~1727)선생이다.
이간의 호인 외암(巍巖)이 마을의 이름이 되었다.
이간 선생은 조선후기의 문신으로 율곡-사계-우암-수암-외암으로 이어지는 성리학자다.
정조대왕이 이조 참판을, 순조대왕이 이조판서를 증직하고 문정이라는 시호를 하사했다.
이간이 태어난 곳은 현재의 아산 건재고택이다.

추사 김정희의 처가로도 유명하다.
건재고택은 추사가 첫 부인과 사별하고 22살에 재혼한 예안 이씨(이간의 손녀)의 처가마을이다.
추사는 15살 때 동갑내기인 한산 이씨와 결혼했지만 안타깝게도 5년 후 상처한다.
23살 때 예안 이씨와 재혼한다.
슬하에 자녀가 없었던 추사는 양자를 들여 ‘육십이 돼서야 부모 소리를 들었다’고 기뻐했다.
‘아내가 예쁘면 처갓집 말뚝 보고도 절을 한다’는 속담은 추사를 두고 한 말이다.
우리나라 전통정원 10선에 뽑힐 정도로 정원이 아름다운 건재고택으로
외암민속마을에서도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충남 아산의 외암민속마을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재고택은 추사가 쓴 주련이 주렁주렁 걸려있다.
사랑채, 안채, 문간채 등으로 이루어진 건재고택의 기둥에는 주련들이 주렁주렁 걸려 있다.
하늘을 날아갈 듯 획이 수려하고 파격적인 조형미를 보이는 주련의 필체는 추사의 글씨.
예안 이씨와 재혼한 추사가 처가에 써준 글씨들이다.

건재고택은 설화산의 주봉을 배산으로 하고 있다.
그 설화산에서 내려온 자그마한 용맥이 연결된 한 마을의 중앙에 건재고택이 있다.
이 집 가운데 큰 소나무가 눈에 든다.
이 소나무는 설화산에서 거세게 치닫고 있는 악기를 막아내기 위해 심은 것이다.
주산 설화산에서 사탁한 기(氣)가 기세좋게 공격해 들어 오고 있다.
이 소나무는 사특한 기를 끊어 땅 밑으로 묻어버려 맥을 못 쓰게 만든다는 것이다.
소나무는 거센 바람이나 악기 등으로 부터 마을 등을 보호하여 주는 비보책으로 종종 배치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