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식에서 억압되어 이루어진 개인적 무의식의 내용으로서의
그림자는 이른바 크게 해롭지 않고 의식화하여
분화된 태도로 변화할 수 있는 상대악이다.
그러나 절대악이라 부를 만한 집단적 무의식의 원형적 그림자는
다른 원형과 마찬가지로 의식이 그것을
수용하기가 결코 쉽지 않다. 그만큼 엄청난 파괴력과 무자비함과
충격적인 반응을 일으킬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원형층이 인간 무의식의 원천을 이루고
살아 있는 것인 이상 우리가 원형적 그림자를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무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언제나 개인적.사회적 재앙은 우리 안에 무서운 것이 존재하느냐
존재하지 않느냐를 따지는 일에 달려 있지 않고
그것을 인식하느냐 인식하지 않느냐에 달려 있다.
그 성질과 그 실체를 용감하게 직면하는 것- 그럴 때
인간은 세계를 위해 무엇인가 기여하는 것이라고
융은 말한다.
그림자는 살아 있는 부분이므로 우리는 그것을 내쫓을 수도 없고
순진하게 그것에 대해 궤변을 농할 수도 없다.
그것은 어떤 형태로든 우리와 함께 살고자 한다.
열등한 인격부분이 우리와 함께 살고자 한다면 그래서
자기가 그것을 받아들여야 한다면
여기에는 말할 수 없는 갈등과 주저가 따를 것이다.
그림자의 인식이란 곧 그러한 살아 있으며 함께 살고자 하는
마음의 부분을 인식한다는 것이며
인식이란 이 경우 받아들이는 것,
의식의 일부로 소화하는 것,
'의식화' 이다.
비록 매우 더디고 오랜 세월이 필요하다 하더라도
한 사람 한 사람의 자기실현은 오늘날과 같은 집단유행,
집단정신의 흐름에 전염되지 않는 면역성을
그 사람에게 확실히 부여한다.
그런 개인이 모일 때 그 집단은 성숙한 집단이 될 수 있다.
자기의 잘못을 남의 탓으로 돌리지 않고 자기의 책임으로
걸머질 수 있는 용기있는 시민의 집단이 된다.
한 사람 한 사람의 그림자의 의식화는
결국 집단의 성숙에 이바지하고 그 튼튼한 기반을 마련한다.
개인의 통찰 없는 제도상의 어떠한 개혁도, 어떠한 집단운동도
그 실효를 거두기 어렵고 오래 지탱하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