湖南의 亭子文化
1. 亭子와 文化
예부터 선현들은 풍광 좋은 곳을 찾아 몸과 마음을 닦아 왔다. 좋은 경치에서 자연과 벗하며, 그 속에서 유유자적하는 모습이 가장 인간다운 모습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생각은 도가사상의 무위자연관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래도 풍광 좋은 곳을 찾는 것은 인간의 본성 중의 하나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정자만큼 친숙한 공간도 드물다. 전국 어디를 가나 경치가 아름다운 곳과 마을에는 으레 정자가 있다. 지방자치제가 실현된 1990년 이후로는 동네마다 주민들의 쉼터인 정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들어서고 있다. 도시의 아파트단지에도 숱한 정자가 건립됐다.
같은 정자라도 건림목적이 크게 차이가 있다. 조선시대 사대부들에 의해 세워진 정자는 수양을 위한 은수처와 교육공간인 경우가 많다. 그러나 최근에 건립된 마을과 아파트단지의 정자는 놀이와 휴식을 위한 공간일 뿐이다. 여기서 다루고자하는 정자는 조선시대의 정자이다. <필자 주>
1) 정자의 유래
누정은 수(隋)나라의 양제(煬帝) 때부터 시작된다. 양제는 낙양에 동궁을 지으면서 매월 200만명을 동원했다. 양제는 서원(西苑)에 화려한 정자와 누정을 지었다. 이처럼 궁실을 위한 원림(園林)의 조성과 더불어 군신의 휴식처로 만들어지기 시작하면서 조선과 일본 왕가에도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보인다.
누정은 신라 소지왕이 488년 정월에 천천정(天泉亭)에 행차했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에서 처음 보인다. 천천정은 연못을 갖춘 정자였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구전(口傳)이나 삼국사기의 다른 기록으로 볼 때 천천정은 물론 5세기 이전 누정 축조의 역사는 알기 어렵다. 다만 호남에서의 누정이 처음 등장한 것은 고려가 망한 후 낙남한 전신민(全信民)의 독수정(獨守亭)이 효시가 아닐까 싶다.
따라서 정자의 주된 목적은 놀기 위함이 먼저일 것이다. 이러한 정자문화는 아마도 삼국시대부터 있었으리라 추측은 되지만, 확인할 길은 없다. 다만 부여의 궁남지나 경주의 월지궁(안압지)의 흔적으로 그 존재와 모양을 추측할 뿐이다. 그러니 제사와 교육이 주된 목적인 서원과는 차이가 있는 것이다.
누정을 짓는 목적은 우선 유흥상경(遊興賞景)의 기능을 들 수 있다. 명승지나 경관이 좋은 곳에 있는 누정은 산수의 아름다움 승경을 감상하고 그 흥취를 즐기고 놀았던 것이 1차 기능임은 당연할 것이다. 조선 중기 이후 누정은 주로 학문을 가르치고 수양하며, 인륜의 도를 가르치는 역할을 담당하는 기능했다.
이러한 정자는 선비들이 마음을 닦기 위해 찾아 온 곳이기도 하고, 글을 읽기 위해 찾아온 곳이기도 하며 때로는 오랜 벗들과 수창하며 술 한 잔으로 친분을 두터이 쌓기도 한 곳이다. 곧 수양과 독서와 사교 등의 공간이다. 정자라는 단어자체가 ‘풍경 좋은 곳에 놀기 위해 지은 집‘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2) 종류와 명칭
정자의 명칭을 저마다 다르다. 남아있는 정자를 보면 같은 정자임에도 부르는 이름이 제각각일 때가 많고, 세워진 장소에 따라 이름도 다르고, 세워지는 위치 역시 지방마다 다르다. 관동팔경에 세워진 정자들을 보노라면 경포대, 의상대, 청간정, 월송정, 망양정, 죽서루니, 이름 뒤에 대(臺), 정(亭), 루(樓)가 붙는다.
대․정․루 등의 특징은 무엇인가. 사방을 바라볼 수 있도록 마룻바닥을 지면에서 한층 높게 하고, 벽이 없게 지은 집으로 누정(樓亭)은 누각(樓閣)과 정자(亭子)를 함께 일컫는 이름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누각과 정자를 비롯해 당(堂), 대(臺), 헌(軒) 등을 포함해 일컫는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다.
첫 번째, 경포대나 의상대처럼 뒷부분에 대(臺)가 붙는 경우는 높은 언덕 위에 세워진 정자를 말하는데, 정확한 단어로는 ‘높은 언덕 위에 지어졌다. 대가 붙는 경우는 정자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아마도 후대에 정자가 지어졌을 확률이 높은데, 정자가 없는 대표적인 예는 부산의 해운대, 정선의 몰운대 등이 있다.
두 번째, 청간정, 월송정, 망양정처럼 정(亭)자가 붙는 경우는 정자의 원래 뜻 그대로 풍경 좋은 곳에서 놀기 위해서 지은 집이 된다. 호남의 대표적인 정자 밀집지역인 담양의 창평과 고서 및 남면지역에 분포하고 있는 대부분 정자가 이에 속하고, 영남의 대표적인 정자 밀집지역인 함양의 정자들도 이에 속한다.
세 번째로 죽서루처럼 루(樓)자가 붙는 것은 넓은 마루를 가진 집을 말하고 있는데, 정자의 의미보다는 승경을 보기 위한 마루 집으로 볼 수 있다. 그래서 절집에서도 대웅전 중정 앞에도 루자가 붙는데, 강진백련사의 만경루(萬景樓) 완주 화암사의 우화루(雨花樓), 해남 대흥사의 침계루, 부석사의 안양루 등이 있다.
또한 조선시대 서원에서도 같은 건축양식으로 이름이 붙여졌다. 안동의 병산서원의 만대루(晩對樓)나 장성 필암서원의 곽연루(廓然樓)등이 있다. 이렇게 부르는 이름이 장소와 목적에 따라 달리 부르기는 경우에 해당된다. 하지만, 지역에 따라서는 정자가 지어지는 위치 또한 다르기에 보편성은 없다고 볼 수 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호남 가사문학의 중심지였던 무등산 북쪽자락, 담양의 여러 정자들과 영남 선비들의 웅거지였던 함양을 비교해 볼 때, 가장 극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호남의 정자들이 대개는 작은 언덕위에 지어져 조망권을 중시한 반면, 영남의 정자들은 물과 가까이 붙어있어 소리를 중시했던 착상으로 보인다.
그래서 호남지역의 정자 가운데 일부의 정자에 앉으면 전망은 탁 트여 들녘 전체가 조망은 되지만, 자연소리는 바람소리뿐 계곡 물소리는 들리질 않는다. 반면 영남 정자에 앉으면 어느 정도 밀폐된 공간속에서 전망이 이루어지지만 물과 가까이 있어 바람소리보다는 물소리가 더 크게 들리는 것이 특징이다.
이는 지역의 자연과도 밀접하게 관련되어있겠지만 그래도 선호도를 보았을 때, 영남 정자들이 계곡의 반석과 물 떨어지는 폭포처럼 어느 정도의 폐쇄된 자연공간이 정자의 영역이 되는 것을 선호했기 때문이고, 호남의 정자들은 들과 산이 어우러진 전망, 즉 흐르는 물보다는 호수를 더 선호했다고 볼 수 있겠다.
이렇게 지역에 따라 다른 조건 때문에 선비들의 문화도 달랐다고 볼 수 있다. 보통 호남의 정자문화에서는 문학적인 측면 즉 예술과 관련되어 발전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가사문학이다. 면앙정의 송순, 송강정의 정철, 식영정의 임억령, 환벽당의 김윤제, 등은 모두 언덕과 계천을 아우른 정자이다.
반면 경남 함양 정자들은 물과 가깝다. 말 그대로 놀기 좋은 곳이니, 시문학이 발달했고, 중앙정치의 토론이 더 많이 이루어졌다. 그래서인지 위치도 최대한 물과 가깝다. 지리산과 덕유산이 맞닿아있는 화림동계곡에 줄지어있는 정자를 보노라면 당장 올여름 장마가 시작되면 물에 쓸려갈 듯 가까이 있다.
조선시대 전시숙이 지은 거연정은 계곡의 울퉁불퉁한 바위위에 높이가 서로 다른 추춧돌로 높이를 맞추어 지은 정자이고, 그 아랫 계곡의 동호정 역시 물가에 지어졌다. 계곡 맨 아랫 쪽의 농월정은 산을 등지고, 바로 물과 닿아 있는데, 몇 번 홍수에 떠내려간 적이 있음에도 역시 그 자리에 다시금 복원이 되어 왔다.
그런데 영남의 정자들에는 호남의 정자처럼 특별하게 알려진 인물이나 새로운 문학이 싹트지 못한 듯 알려진 이는 별로 없고, 군자정은 정여창이 시를 읆은 후에 붙여졌다는 설이 있다. 다만 농월정(弄月亭)앞의 반석인 달 바위, 동호정 앞의 차일암에서 수없이 많은 음주가무에 관련된 기록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그래서 그런지 아직까지도 함양 정자주변에는 민박집과 음식점이 흥하여 마치 정자가 이들 집의 부속건물처럼 보이고 있다. 옛 선인들의 자연에 적은 정취가 사라진듯하여 안타깝기 그지없다. 이처럼 정자는 부르는 이름이 각기 다르고, 세워지는 위치가 다를지라도 옛 선비들의 목적은 똑같이 하나였던 것이다.
세상사를 잊고, 자연에 묻혀 살기를 원했거나, 벗들과 교우하며 나랏일을 걱정하는 공간, 혹은 제자를 모아 글과 그림을 가르치면서 후학을 기르기 위한 목적의 공간으로 정자는 지어졌다. 이는 정계에서 벼슬을 하다가 은퇴한 선비들의 공통된 모습으로 마냥 음주가무만을 위한 공간은 결코 아니었던 것이다.
3) 건립의 주체
서원은 제사와 교육을 위해 지역유림들의 공동출연 등으로 건립하는 경우가 많다. 반면 정자는 개인의 사재를 출연해 건설하는 경우가 많다. 또한 규모나 위치에 따라 지명도나 출입하는 선비들의 수도 다르다. 수많은 누정 중에서 무엇을 기준으로 어느 누정을 다룰 것인지 결정하는 것도 쉽지 않은 문제다.
한학자 이갑규씨(대구대 겸임교수)와 누정연구가 오용원씨(동국대 한문학과 강사)의 자문을 받아 경상도 지방의 누정 중 학맥이나 문중을 대표할 수 있는 누정을 중심으로 다루고자 한다. 따라서 해당 누정의 주인공을 비롯해 그 주인공과 관련된 학맥과 문중 이야기를 풀어가는 것을 큰 흐름으로 삼고자 한다. 이런 기준으로 다루지 못한 누정은 건립 목적이나 용도 등을 기준으로 해서 다룰 계획이다.
누정마다 전문가와 함께 현장을 찾아 누정기나 각종 현판을 채록해서·해석하고, 누정과 관련된 후손을 인터뷰하면서 해당 누정에 담긴 선비들의 삶과 정신을 되살리고자 한다. 현존하는 우리나라 옛 목조건물 가운데 가장 많은 것이 누정(樓亭)이다. 그 중에서도 정자가 제일 많은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4) 정자의 전국 분포도
이러한 누정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지역은 영남이다. 누정 건물 자체보다 거기에 담겨진 선비들의 삶과 정신이 더 소중한 자산이지만, 그 보물들은 아직까지 대부분 어둠 속에 묻혀 있다. 영남과 호남의 누정에 남겨진 기록 등을 통해 선조들의 소중한 정신과 풍류, 지혜를 조금이나마 더듬어 보려는 것이다.
문헌으로 전하는 자료에 의하면 누정 가운데 경상도와 전라도가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1929년에 편찬된 '환여승람'에 따르면 경상도가 1천295개로 가장 많고 전라도(1천70개), 충청도(219개), 강원도(174개), 제주도(6개) 순이다. 경상도 중에서는 안동(97개), 산청(83개), 예천(79개), 거창(69개) 등 순이다.
일제강점기에 발행된 조선환여승람보다 앞선 기록인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전국의 누정 수가 885개로 돼 있다. 경상도가 263개로 가장 많다. 전라도(170개), 평안도(100개), 충청도(80개) 등이 뒤를 잇고 있다. 여기에 수록돼 있는 누정 중에는 소실된 누정도 있고, 이후에 신축한 누정도 적지 않을 것이다. 안동 지방에 있는 누정 가운데는 안동댐과 임하댐의 건설로 이전한 것도 상당수에 이른다.
누정은 지리적 환경과 누정을 건립할 수 있는 경제적 기반을 갖춘 사람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누정문화를 향유할 수 있는 학자나 묵객(墨客)들의 출입이 있어야 가능한 것이다. 안동을 중심으로 한 경상도는 어느 지역보다 퇴계 문인을 비롯해 많은 사숙문인(私淑門人)들이 많이 배출된 지역이라 할 수 있다.
조선시대에서 학풍을 이끈 본거지가 경상도인 만큼 학자들이 머문 곳이 많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이다. 그러니 누정도 많을 수밖에 없다. 경상도는 이처럼 누정이 건립되거나 경영될 수 있는 제반 여건을 갖춘 곳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여건을 갖춘 정당성이나 조건은 별도로 역사를 거슬러 따져봐야 할 사항이다.
한편 경상도의 누정 중에는 소박한 초당의 정자가 많다. 반대로 전라도지역은 경제적인 형편이 좋아 풍류를 즐기기 위해 지은 정자가 많다고 한다. 그러나 경상도는 서원에서 교학이 이루어진 반면 정자에서는 뚜렸한 결과가 없다. 반면 전라도의 정자는 시단을 형성하고 주옥같은 문학작품을 산출한 곳이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