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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서 제일 큰 모래섬
-프레이져 아일랜드(Fraser Island)
나의 여행이 시작되는 시점은 항상 섣달 중순 쯤이었다. 우리나라가 겨울일 때 여름인 나라를 가본다는 것은 아주 흥미로운 일이었고. 세상이 좁은 것 같지만 넓다는 걸 실감하는 기회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생각은 동화적인 발상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여행에서 돌아온 후엔 항상 사진을 CD로 굽는 작업과 기행문을 남기는 일이었다.
사실 기행문을 쓴다는 것은 진부한 일이다. 해외 출국이 어려웠던 시기에는 글을 읽는 사람이 대리체험을 할 수 있다는 것 때문에 관심이 있을 수 있는 일이었지만, 이젠 개도 소도 마음만 먹으면 어느 곳이나 갈 수가 있고, 또 메스컴에서 다큐멘터리로 오지의 풍경까지 가본 것 보다 더 선명하게 보여 주고 있으니, 기행문이야말로 구세대 유물 같은 존재일 것이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요, 손끝에 만져지는 것만이 체험의 전부가 아니기에, 내 감정이 머물렀던 곳이면, 그 당시의 감정을 글로 옮겨 보는 것이다.
여행을 계획하여 출발할 시점이 되면, 젊은 시절에 이성을 만나는 것보다 더 긴장을 하게 되고 호기심이 발동하여 잠을 설치기 일수다.
호주에서 꼭 가보고 싶은 곳을 꼽으라면 세계에서 단일 바위로는 세계에서 제일 큰 울룰루(Uluru)와 호주 서부 사막 도시인 퍼스, 호주의 아웃사이드라 칭하는 다윈, 그리고 월시림이 그대로 보존된 타스메니아, 그리고 또 하나를 더 꼽으라면 프레이져 아일랜드일 것이다.
근 십여 년 동안 일 년에 두세 달 동안은 호주에 머물곤 하였다. 어찌하다보니 호주의 3대 도시인 시드니, 멜버른, 브리즈번에 머물게 되었었다. 그 중 브르즈번엘 많이 가게 되었는데, 브르즈번은 인구 160만 정도의 도시이지만 호주에서 기후가 제일 좋은 곳이며 쾌적한 도시 중의 하나일 것이다.
브리즈번을 조망할 수 있는 마운트쿠사(Mt.coot-tha)에 올라 브르즈번 시내를 바라보면 숲에 에워쌓인 도시가 요정의 도시처럼 아늑하고 평화롭기 그지없다. 더울만큼 덥고, 서늘할 만큼 서늘하고, 무엇보다 한적하고, 사람들이 가장 여유를 누리며 사는 곳이 브리즈번이 아닌가 싶다.
브리즈번이 하도 좋아, 가끔 이런 생각을 했다. 내 친구 중 두 명만 나와 뜻을 같이한다면 말년을 이곳에서 마치고 싶다고... 물론 이런 생각은 같이 갈 친구가 있다는 것을 전재로 한 희망사항이지만...
2007년 1월 브리즈번엘 세 번째 가게 되었을 때, 한국을 떠나면서 프레이져 아일랜드에 가서 며칠 쉬고 올 계획을 세웠었다.
프레이져 아일랜드는 세계에서 제일 큰 모래섬이다. 섬 전체가 모래로만 이루어진 섬이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기에 호기심과 관심이 더욱 많았다.
모래로만 된 섬이 어떻게 남태평양 한 가운데 떠 있을 수 있다는 것인지? 어린아이 같은 생각을 해 보았다. 모래만으로 된 섬이라면 어찌하여 파도에 쓸려나가지 않을까?
섬은 긴 고구마 모양 같이 생겼는데, 길이가 123km이며 넓이는 184,000헥트라르라 한다.
하얀 설탕가루 같이 고운 모래로부터 밀가를 같은 분말의 모래로 이루어진 섬이기에 배에서 내려 섬에 발을 디디는 순간 감탄을 하게 된다고 했다.
우리나라엔 바위로만 된 바위섬이 있고, 또 지구상에는 모래로 된 섬이 수 없이 많다. 또는 섬이었다가 어느 날 사라지는 섬도 부지기수다.
그러나 프레이져 아일랜드는 여느 모래섬과는 차원이 다르다고 했. 규모는 물론 그 생성 과정부터가 눈물겨운 자연의 산물이라는 점이다.
선 안에는 크고 작은 호수가 200여개가 된다고 한다. 호수 주위에는 자갈 하나 없는 모래이고, 호수 바닥도 전부 고운모래라 마치 투명한 거울을 보는 느낌이라고 했다. 호수로 흘러 들어가는 물줄기 그 밑바닥도 전부 모래라 했다. 어디를 둘러봐도 돌 조각 하나 눈에 띄질 않는다니, 우리의 상식과 체험을 초월한 곳이기에 흥미를 끄는 곳이다.
사십 대까지만 해도, 단독으로 사막횡단을 하는 여행도 두렵지 않았고, 원시림이나 열대 우림, 혹은 산악 지대를 가도 그리 두렵지 않았지만, 육순을 넘은 후로는 혼자 길 떠나기가 싫어졌다.
한국을 떠나면서 집사람에게 프레이져 아일랜드의 아름다음을 각인시켜 주었다. 집사람과 동행하고 싶은 마음을 먹었기 때문이었다.
브리즈번에 도착하여 딸에게 모래섬 이야기를 하니, 마침 딸도 한 번 가보고 싶은 곳이라며 호응을 했고, 결국 딸과 사위, 그리고 손자와 손녀까지 여행에 동참하기로 하였다.
오랜만에 식솔을 거느리고 여행길에 오르게 되니 부자가 된 듯, 마음이 흐뭇했다.
브리즈번을 출발하여, 프레이져 아일랜드에 가기까지 몇 군데 관광을 했다. 부호들의 휴양지인 누사를 지났다. 눈부신 파도와 호화롭기보다는 자연친화적인 저택들,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는 요트들, 자연의 정복이 아니라 자연에 순응하는 그들의 삶이 향기롭게 보이는 마을 구경을 하며, 행복하게 산다는 것이 무엇이며, 진정한 부자들의 삶은 어떤 것인가, 삶의 여유와 삶의 향기가 어떤 것인가를 느끼며 목적지로 가고 있었다.
아침 9시에 출발하여 여장을 푼 때는 오후 6시에 프레이져 아일랜드로 갈 수 있는 관문인 레인보우 비치, 인스킵 포인트(Inskip Point)에 도착했다. 인터넷으로 예약을 해 놓은 모텔을 찾았다.
호주의 모텔은 한국의 모텔과는 전혀 달랐다.
차도 쉬고, 사람도 쉬고, 가족도 쉬는 곳이 모텔이었다.
취사도구가 있고, 식구들이 즐길 오락기구가 있고, 수영장도 있고, 피로를 풀 수 있는 곳이 모텔이기에, 모텔에 입실하면, 저녁 무렵이면 투숙객들이 상견례도 하고, 환담을 나누기도 하였다. 그런 곳이 모텔이었다.
침실이 세 개, 거실이 하나, 화장실이 둘, 조리실이 하나...
커텐을 열면 바다로 가는 길이 보였고,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이웃집의 가교가 보였고, 바람의 통로가 보였고, 커피냄새가 오가는 이웃의 베랜다가 보였다.
짐을 풀었다. 손자와 손녀에게 한국에서 가져 간 라면과 김, 인스탄트 자장면 김이 전부였지만 손자와 손녀는 손뼉을 치며 좋아 했다.
아무리 외국에서 태어나고, 외국 교육을 받아도, 흐르는 피 속에는 한국의 흙냄새가 스며 있는 것 같아 마음이 훈훈했다.
손자와 손녀들에게 모래섬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아무래도 내 설명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사위는,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영어로 손자 손녀에게 무엇인가를 열심히 설명하고 있었다.
나는 못 본 척, 헛기침을 하며 문을 나서고 있었다.
그렇다, 사실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아무리 손자와 손녀에게 유익한 얘기를 한들 , 그것이 디지털 세대의 교육이 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사실 나도 1990년대, 286컴퓨터를 사용하던 때부터 인터넷을 개설한 사람이었으니, 한국에서는 선구자라 wwkcld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젠 구시대의 역사책으로 바뀌었다는 생각이 든다. 마음이 우울하였다.
모래섬으로 가기 위해 바디선에 올랐다.
모래섬으로 가는 바디선은 우리 나라의 섬을 왕래하는 배와 별로 다를 바 없었다. 자동차를 이십 여대의 차량을 탑재할 수 있고, 백여 명의 사람이 탈 수 있는 정도의 배였다.
내가 기억으로는 강화도에서 보문사로 가는 배를 탄 느낌 정도의 배였다. 배 주위엔 갈매기가 날지 않았다. 우리 나라의 배에 탄 사람들처럼 먹을 거리를 주지 않기 때문에 갈매기아 날아올 이유가 없는 것 같았다. 부두를 출발하여 15분 후 섬의 선착장에 도착했다. 말이 선착장이지 모래 언덕이 선착장이란다. 선착장에는 몇 대의 버스가 대기하고 있었다. 차량을 바디선에 싣고 사람들은 직접 운전을 하여 바디선에서 섬으로 진입을 했다. 차량을 직접 몰고 온 사람들은 모두 사전에 예약을 한 사람들이었으면, 모두 사륜구동의 짚차였다. 우리는 차를 가지고 가지 않았기 때문에 예약한 버스에 올랐다. 우리네 상식을 벗어난 모양의 버스였다. 바퀴가 우리나라의 시멘트 원료를 캐는 광산용 트럭 바퀴같은 그런 버스였다. 내가 1미터 172cm의 키인데, 내 키 두 배정도의 바퀴가 달린 버스가 인상적이었다.
프레이저 섬에 출입 하려면 버스든 그냥 차든 반드시 4륜 이어야 하는군요...
특히, 4륜구동 버스는 신기했습니다.
개인 짚차를 가져 온 사람 중에는 미리 출발은 하였으나, 모래에 바퀴가 묻혀 진땀을 흘리는 모습도 보였다. 버스를 타고 섬의 반대쪽 해변으로 이동을 한다고 했다. 서투른 영어 실력인데, 안내 방송은 내 귀의 두 배 이상 빨라 흘러갔다.
대충 40여분 정도 갈 것이라는 얘기였다. 나중에 딸이 사위에게 들키지 않으려 듯 귓속말로 자세한 얘기를 해 주었다. 옆에 있던 사위는 웃고 있었다. 이젠 한국말을 어느 정도 알아 듣기에...
모래 위에 나무가 없는 곳이 길이다. 나무는 인공적으로 심은 것이 아니라 육지에서 날아온 씨앗이 바람에 날아와 번식한 것이라 했는데, 그 종도 다양했다. 종을 퍼뜨리려는 식물의 노력과 바람의 힘을 실감했다. 길은 내 키의 두 배정도의 바퀴가 빠지지 않을 정도로 패여 있었다.
관광객을 실은 버스는 힘겹게 모래를 헤치고 나갔다. 이십 여분 갔을 때, 앞에 가던 버스가 멈춰섰다. 간밤에 세찬 바람이 불어 큰 나무가 쓰러져서 길을 막은 때문이었다. 운전기사는 종종 있는 일이라는 듯, 도끼와 톱을 꺼내들고 안내 방송을 했다. 젊은이들이 우루루 버스에서 내렸다. - 바람에 의해 나무가 쓰러졌으니 젊은 분이 나와서 도와 달라는 내용-
그런 말도 나중에 딸에게서 들은 얘기다.
20여명이 내려 톱과 도끼로 나무를 잘라냈다. 자른 나무를 옮길 때는 버스에 탄 남녀노소가 총동원되어 노동력을 보태야 했다. 땀을 흘리면서도 모두 웃고 있었다. 시멘트나 아스팔트로 길을 포장하지 않은 이유는 오랫 동안 이 섬의 아름다움을 간직하려는 의도라 했다.
모래섬은 모래로 보존하자는 깊은 뜻인 듯 했다.
섬 안에 호수가 100여개가 있다기에 호수를 가보기로 했다. 가는 도중에 해변에 위치한 샴페인 풀을 볼 수 있었다. 바위 틈새로 바닷물이 빠졌다가 들어오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나란히 두 개의 풀이 있었는데, 하나는 깊고 하나는 얕아 깊은 쪽에는 어른들이 놀고 조금 얕은 쪽에는 가족을 동반한 관광객들이 수영을 하고 있었다. 바닷물이 밀려 들어와 가품을 일으키는 것이 마치 샴페인을 터뜨리는 모양새였다. 풀 밖은 남태평양이라 바다로 나가고 싶었지만, 파도보다 더 날카로운 상어들이 들끓어 파도에 몸을 담그는 것은 꿈도 꿀 수 얿었다.
사실 꿈과 현실은 언제나 달랐다. 섬으로 들어오기 전 허부베이(Herver Bay)에 흑등고래와 험프백 고래 관광이 일품이라는 얘기를 듣고 눈이 빠지게 바다를 바라보았지만, 고래 지는러미도 보질 못했었다. 여기서도 해변에서 수영도 하고 썬텐도 하려고 마음 먹었는데, 그것도 뜻한 바대로 되질 못했다. 정해진 스케쥴 때문이었다. 썬텐 얘기를 하자 딸은 나에게 “아빠는 아프리카 흑인처럼 까만데 썬텐은 무슨 썬데... 무안만 당했다.
제일 유명하다는 맥킨리 호수(Mckenzie Lake)를 보기로 했다.
젊은 시절 내가 좋아하던 서양 여배우의 눈동자처럼 푸른빛의 호수다. 어린 시절 구술치기를 할 때, 푸른 유리알 속에서 반짝이던 햇빛 같이 투명하다. 첫사랑의 여인을 만난 듯 꿈만 같았다. 물론 호수 주위는 무서울 정도로 고운 하얀 모래뿐이다. 마음씨 고운 여류 시인이 여기에 온다면 눈물로 모래를 적실만한 곳이다. 그야말로 감동적이다. 그림으로는 표현이 가능할지 모르지만 글로는 표현하기 힘든 감동의 경관이다. 물 속으로 뛰어 들었다. 마음 같아서는 알몸으로 뛰어 들어 몸에 염색을 하고 싶었지만, 그야 어찌...
그래도 시간여 동안 수영을 하며 가슴에 푸르스름한 물을 들인 후 다시 길을 재촉했다.
살아가면서 작은 것을 놓치는 수가 많다. 가난한 사람은 가난하였던 추억을 사랑하지만 부유한 사람은 가난했을 때의 기억을 잊으려 한다. 그러나 호주 사람들은 예외였다. 물론 그네들이 나라를 세운 역사가 짧음 때뭄도 이유의 하나가 될 수 있지만, 지난 역사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 씀씀이가 우리네와는 다르기 때문일거라고 생각을 해본다. 섬의 동쪽 고구마 같이 생긴 중간부분에 가면 녹이 쓰러 황혼빛깔을 띈 폐선 한 적이 눈길을 끈다.
속설에 의하면 일본으로 출항하던 배인데 좌초되어 밀려온 것이라 했다.
그 폐선의 함선 위에는 아침 햇살도 걸려 있고 저녁 노을도 사람들의 추억처럼 빛난다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파도에 밀려 갈 것 같지만, 무엇인가 남기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지, 프레이져 아일랜드를 떠나지 않고 있다. 어쩌면 슬픈 기억을 말하고 싶은지 모를 일이다.
당시 배를 지키던 선장도, 일등항해사도, 갑판장도 우리는 기억하지 않으려 한다. 그저 일본으로 출항하던 배가 좌초 되었다는 단순한 사실만을 떠올릴 뿐이다. 우리네의 흔적 바라보기처럼...
섬의 북쪽, 머리부분으로 가면 유일하게 붉으레한 사암층이 있다. 바위도 아니고, 모래도 아닌 그런 골짜기가 눈길을 끈다. 모래가 굳어가고 있는 것인지, 바위가 모래로 변해가고 있는지 잘 구분이 안가는 모양새인데, 어쨋던 경관이 우리나라의 험준한 산맥을 연상케 한다. 그것도 분명 모래라는데...
모래만으로 이루어진 섬이라는 것에 대하여 의구심을 품게 하는 골짜기...
나는 손자와 손녀의 손을 잡고 몇 장의 사진을 찍었다.
섬의 곳곳에는 캠핑을 할 수 있는 야영장이 있었다. 대부분 젊은이들은 야영을 즐겼다. 몰론 섬 안에는 킹피셔(King Fisher)리조트와 유롱(Uurong)리조트가 있긴 하였으나 1일 500불 정도의 비싼 요금이었다. 호텔보다는 텐트를 치고 지내도 모래가 백색에 가까워 어둡지 않을 것 같았다. 섬에서는 지켜야 할 규칙이 참으로 많다. 물론 자연 보호에 관한 것이지만, 아무리 성능이 좋은 차도 시속 80km를 넘을 수 없으며, 섬에 들어오기전 캠핑허가증을 받은 사람만이 캠핑이 가능한 것이다.
1인당 100불을 내면 약 10분 동안 경비행기를 타고 섬을 일주할 수 있다. 비행기 활주로는 해변의 모랫사장이었다.
아내와 나는 섬의 중앙 부근에 이르러 감탄을 햇다.
맑은 물이 어디서 솟아났는지 작은 개울을 이루어 흘러가고 있는데, 개울 밑바닥을 보니 한길 정도의 물밑이 여인의 속살처럼 고운 모래다. 그 개울은 족히 4km는 됨직한데, 그 개울 옆으로 온통 고사리밭이다. 살이 통통하게 오른 고사리가 어느 농부가 농사를 짖기 위해 심어 놓은 듯 눈에 아득하게 펼쳐저 있다. 다행히 이곳에는 한국 사람들이 아직 많이 오지 않은 탓이지, “고사리를 꺾지 마시오”란 팻말이 없었다. 시드니 해변에 갔을 때 한글로 된 “전복을 잡지 마시오”란 팻말을 상기하며 개울에 발을 담가 보았다.
과연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될만한 곳이라는 걸 실감하며 계속 발을 옮겼다.
75마일의 비치를 언제 다닐지 모른다. 그러나 걷고 또 걸으며 모래에 뿌리를 내린 울창한 숲과 내 사랑하던 여인의 순결처럼 하얀 모래 위에 발도장을 찍고 싶었다.
야생 딩고(호주에 서식하는 최상위의 포식동물- 들개)를 만나도 무서울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의 계획은 프레이져 아일랜드를 2일 머물지만 숙소는 섬 밖 허브베이에 예약을 해 놓았기 때문에 섬을 탈출했다가 익일 아침 다시 와야만 한다고 했다.
마음 같아서는 섬 모래 위, 아니면 매켄지 호수 가에서 노숙을 했으면 싶었지만, 지금은 가족 동반 여행이기 때문에 야성의 근성을 접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