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치료법의 요체를 간단하게 요약하면 "고통이 아무리 크더라도 의미를 찾아낸다면 이겨낼 수 있다" 정도이다. 빅터 프랭클은 이미 나치의 수용소 생활을 하면서 심리학자로서 사람들의 대처와 반응을 관찰했고, 그 자신 역시 인간다움을 잃지 않기 위해 처절하리만치 노력하였다.
그에 따르면, 수용소에서 생의 의미를 찾지 못한 사람들은 생을 쉽게 포기하거나, 짐승과 다를 바 없이 행동하거나, 완전히 폐인이 되어버리곤 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생의 의미를 찾으려고 애썼던 사람들은 일말의 생존의 가능성을 놓지 않았으며, 이것 하나가 그들이 마지막까지 존엄한 인간으로 살아남을 수 있게 만들었다. 실제로 그를 비롯한 일부 수용자들은 하루에 한 잔씩 배급되는 가짜 커피 한 잔 중 반을 마시고, 나머지는 옷깃을 찢어 적셔 고양이 세수 및 목욕을 하고, 유리조각으로 면도를 했다. 사실상 세면을 안한 거나 다름없었지만, SS 대원들은 그런 사람들은 잘 건드리지 않고, 생의 의미를 완전히 잃어버리고 그냥 짐승과 같은 몰골과 본능만 남아있는 수용자부터 처리했다. 그들은 유대인은 하등생물이라 세뇌당했지만 그렇게 엉터리 세면이라도 하는 사람은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려 했기 때문에 최소한의 인간으로 보였고, 그 인간을 죽임으로서 얻는 심리적 고통을 얻기 꺼렸다. 따라서 본능적으로 그 커피를 다 마셔버리고 몸을 닦지 않는 사람은 짐승과 같은 본능과 몰골로 보였기에, 죽이면서 얻는 죄책감이 덜했기 때문에 먼저 학살한 것이다.
그렇기에 특히 의미치료는 사소한 기분부전이나 소소한 고민들보다는, 그야말로 한 인간을 완전히 구렁텅이에 빠뜨릴 수 있고 압도할 수 있는 거대한 고통과 충격 앞에서 효과적이다. 다시 말해, 한 인간이 자신의 실존적 존재 자체가 위협받을 만한 가공할 고통, 즉 실존주의 치료에서 말하는 죽음, 고독, 무의미함, 자유와 같은 이슈가 자신을 덮쳐오는 상황을 가정하고 있다. 애초에 바로 그런 극단적인 상황 속에 내팽개쳐진 한 심리학자가 고민하다가 만들어낸 게 의미치료이니...
그래서, 많은 심리치료들이 고통을 단지 회피하거나 긍정적인 정서를 최대한 많이 경험할 수 있도록 돕지만, 의미치료는 접근 자체가 다르다. 의미치료는 고통을 주어진 것으로 간주한다. 다른 치료법들이 고통을 피하도록 돕는다면, 의미치료는 고통 앞에 당당히 마주해서 그것을 꿋꿋이 버텨내도록 만드는 게 목표다. 치료사든 내담자든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최악의 고통 앞에 마주할 가능성은 엄연히 존재하기에, 누가 누구를 교정해 주고 격려해 주고 그런 거 없다. 그저 똑같은 처지의 인간끼리 만나서, 압도적인 고통 앞에 마주한 채, 그 고통이 가져다 줄 의미를 탐구하는 것뿐이다. 고통을 피해 도망친다는 선택지는 없다. 한 번, 두 번, 세 번 정도는 고통을 피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런 사람들은 진정한 최악의 고통이 닥쳐왔을 때 속절없이 무너져 버릴 것이다.[2]
빅터 프랭클의 주요 저서 중 하나인 죽음의 수용소에서의 원제는 trotzdem Ja zum Leben sagen. Ein Psychologe erlebt das Konzentrationslager.[3]인데, 처음엔 홀로코스트 생존자 증언록으로 쓰였지만, 이 경험을 통해 의미치료를 고안한 데다 당장 독자들부터가 관련 내용을 원해서 개정을 통해 의미치료를 소개하는 학술서적에 가까운 책이다. 그러나 보다시피 국내 제목에서는 그런 느낌이 전혀 나지 않도록 번역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