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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동학농민혁명의 인물과 사건, 그리고 장소
위 의 환(장흥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지도위원)
1. 서론
우리나라의 동학농민혁명사를 관조(觀照) 및 연구하는 방법으로 크게 종교사(宗敎史)인 동학사(東學史)를 主로 하면서 농민의 혁명사(革命史) 다루는 방법과 그 반대로 농민의 혁명사를 主로 하면서 동학의 종교사를 다루는 방법이 있었다. 이 방법은 조선의 성리학사에서 주리론(主理論)과 주기론(主氣論)의 입장과 비슷하다고 보면 되겠다. 그러나 조선의 성리학사에서도 이러한 이분법적인 방법을 탈피하면서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과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 등이 나왔듯이 동학의 종교사와 혁명사는 동전의 양면, 새의 좌우 날개, 손바닥과 손등처럼 서로 때려야 땔 수 없는 문제로 보지만 갑오년의 동학농민혁명의 대미(大尾)는 일본군이 지휘했던 진압군에 대항하는 전투이기 때문에 혁명사가 큰 비중을 차지할 수밖에 없다.
당시대에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한 사람들도 동학의 교리인 인내천(人乃天), 후천개벽(後天開闢), 광제창생(廣濟蒼生), 척양척왜(斥洋斥倭), 제폭구민(除暴救民), 보국안민(輔國安民), 교조신원(敎祖伸寃) 등의 기치에 충실했던 동학교단파보다는 동학 교리의 기치를 받아들으면서도 척양척왜(斥洋斥倭), 제폭구민(除暴救民), 보국안민(輔國安民) 등의 혁명에 더 충실하려는 혁명파가 점차 혁명의 주도권을 잡아나가자 증산교 교주인 강증산은 동학의 교리와 혁명으로는 후천개벽(後天開闢), 광제창생(廣濟蒼生) 등을 이룰 수 없다면서 2차기포 도중 추종자들을 거느리고 대열을 이탈하면서 증산교를 수립한다. 또한 강증산의 대열에서 오늘날의 원불교 세력이 떨어져 나온다.
동학의 제3대 교주인 손병희에 의해 천도교(天道敎)로 개명되고, 1906년 종교 자유화에 힘입어 동학농민혁명 정신이 천도교에 계승되지만 교단은 신파, 구파, 친일파, 신 종단창단 등의 소용돌이와 일제의 감시 등으로 인해 갑오년의 혁명대의는 큰 물결을 일으키지 못한 항일운동으로 전락한다. 그러나 장흥의 천도교 곧 장흥동학농민혁명의 토벌에서 살아남은 자와 그들의 후예는 이와는 달리 혁명 이후 해방 전후사의 공간까지 50여 년 동안 항일운동에 큰 물결을 계속 유지했다는 평가를 내리고 싶다.
때문에 본고에서 다룰 “장흥동학농민혁명의 인물과 사건, 그리고 장소” 등에서는 갑오년과 을미년의 대패배로 마무리된 실패한 혁명사에 국한하여 살펴 볼 문제가 아니라 토벌에서 살아남은 자에 의해 다시 부활하여 그들의 후예가 벌인 적어도 50년 동안의 혁명사와 종교사를 동시에 살펴볼 필요가 있다. 다만 본고에서는 지면의 제약과 오늘의 워크숍이라는 시간적인 제약 때문에 1894년으로 제한하여 살펴보기로 하고 후일을 기약해 보고 싶다.
2. 장흥동학농민혁명 참여자와 지도부의 인물 소고(小考)
2-1. 혁명참여 제 姓氏간의 연원(淵源)
필자는 현재 장흥동학농민혁명 참여자의 515명에 대해 엑셀 프로그램으로 작성한 간략한 database를 가지고 있다. 이 database는 향후 연구를 통해 더 수정‧보완되겠지만 전국에서 500명이 넘는 참여자 database를 가지고 있는 지역은 장흥뿐이다.
장흥동학농민혁명 참여자와 지도부에 대한 소고(小考)는 이 database를 통해 충분히 살펴볼 수 있기에 전적으로 필자가 작성한 database에 의존하여 전개한다.
먼저 참여자의 성씨(姓氏) 관향(貫鄕)인 본관(本貫)을 생략한 성씨(姓氏)에 따른 참여자 수의 분류는 다음과 같다. 姜(11명), 高(10), 郭(2), 具(2), 權(1), 金(129), 羅(2), 盧(5), 段(1), 馬(4), 文(21), 朴(55), 方(2), 房(1), 裵(2), 白(20), 邊(6), 徐(2), 宣(2), 孫(16), 申(10), 安(16), 梁(3), 吳(4), 魏(18), 劉(6), 尹(10), 李(74), 任(5), 林(4), 임(1), 張(4), 全(1), 田(1), 鄭(12), 曺(2), 趙(3), 조(2), 朱(1), 蔡(2), 千(2), 崔(17), 韓(3), 許(1), 玄(1), 호(1), 洪(11), 黃(5), 皇甫(1) 등으로 총 47개 姓氏가 참여했다.
이중 지도부로 분류할 수 있는 이방언(李芳彦), 이인환(李仁煥), 이사경(李士京)은 仁川李氏, 문남택(文南澤)은 南平文氏, 김학삼(金學三)은 金海金氏, 백인명(白仁命), 백재인(白在寅), 백좌인(白佐寅)은 水原白氏, 구교철(具敎徹)은 綾城具氏, 강일오(姜日五)는 晉州姜氏, 박광오(朴光五)는 順天朴氏(사육신 박팽년의 후손으로 古實朴氏라고도 부른다)로 이들 지도부 상호간에는 상고(詳考)가 불가능한 구교철을 제외하고는 모두 혈연, 지연, 학연, 혼인 등으로 인한 동학 특유의 연원(淵源)이 연결되고, 모두 상당한 수준의 한학(漢學)을 연마한 재지(在地) 선비층으로 분류된다.
간략히 소개하면 이방언과 김학삼은 재고종간 친척이고, 김학삼은 처가가 방촌으로 魏氏와 연결되는데, 김학삼의 처가는 또한 이방언 장군과 친근한 벗으로 학문으로 연결된다. 이와 같은 학문으로 인한 인연은 長興高氏와도 연결이 되어 철종 임술장흥민란의 지도자인 高濟煥 군수의 후손(고영완家)과도 연결되어 식량 등의 물자를 공급받는다. 또한 이방언家와 박팽년의 후손인 순천박씨(古實朴氏)家와도 친척이다. 동학농민혁명에서 살아남은 사람이 가장 많은 덕도(德島: 당시 諸島面)의 金氏는 18명이 확인되는데, 金海金氏 공간공파(恭簡公派)로 이는 김학삼과 같은 派이다.
장흥에서 1,000년 이상의 토착세력으로 재지사족 및 토호세력으로 분류될 수 있는 長興魏氏는 동학농민혁명에 18명이 참여하는데, 이사경의 할아버지 이석년(李錫年), 백인명, 김학삼의 처가로 이는 혼인으로 인한 연원이며, 이방언家와 魏門의 친교 등으로 長興魏氏가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거나 식량 등을 지원한다.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한 장흥의 제 姓氏간의 혈연, 지연, 학연, 혼인 등으로 인한 연원(淵源)을 밝혀내는 것만으로도 한편의 논문을 쓰고도 남을 일이다.
종합하면 장흥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한 제 姓氏간에는 동학 특유의 연원(淵源)에 의해 거미줄처럼 상호 얽혀 있고, 지도부는 당시 다른 지역과는 달리 상당한 학문을 습득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강력한 지도부의 리더십이 발휘될 수 있었고, 혁명의 물자공급을 다른 지역과는 달리 민간 약탈에 의존하지 않을 수 있었다고 본다.
2-2. 장흥동학농민혁명 지도부의 인물사(人物史)
장흥동학농민혁명 지도부는 걸출한 인물이 너무 많아서 탈이고, 이들에 대한 열전(列傳)을 어떻게 기록해야 할지 고민이다. 1차기포에서 지방군을 상대로 싸워 이긴 황토현의 전투에 장흥농민군의 참여여부는 분명하지 않지만 경군을 상대로 크게 이긴 장성의 황룡강 전투는 장흥의 부대가 주력이 되어 곧 원정에서 승리한 전투이다. 또한 전주성 전투에서 80여세의 노구를 이끌고 군민을 선동했다는 일본측의 기록이 있는 이야(李爺) 등의 활약도 원정에서 활약이다.
장흥동학농민혁명은 1차기포의 원정보다 몇 곱절 의미가 있는 것은 2차기포로 막바지 패배가 예견된 마당에서 11월 21일 구교철의 웅치기포, 11월 25일 이인환의 대흥기포, 12월 1일 북진에 참여했던 이방언 장군이 이끄는 부대와 장흥으로 지원나온 금구의 김방서 부대, 현지기포 세력인 이인환‧구교철의 부대가 합류한 12월 1일 장평면의 사창에서 수만명의 세력을 이룬 후 12월 4일 벽사역 함락, 12월 5일 장흥부 함락, 12월 7일 강진현 함락, 12월 10일 병영성 함락 등 일련의 승리한 전투와 12월 12일부터 시작된 한일연합 토벌군과 벌인 이른바 우리나라 동학농민혁명사의 최후‧최대전투는 유치면 조양촌 전투, 건산전투, 유앵동전투, 석대전투, 자울재 전투, 고읍읍 옥산촌 전투, 대흥면 월정 전투까지 6일간 상호 교전을 한다.
12월 18일부터 다음해 1월 13일까지는 일본군 후비보병 19대대 및 경군의 교도중대, 통위영(좌선봉진), 장위영 부대(이두황의 우선봉진), 일본군 부산수비대, 여수의 좌수영군이 주축이 되고, 여기에 병영성, 장흥부, 벽사역 등이 보조하는 일방적인 토벌이 이루어진다. 1월 8일 이두황의 우선봉진이 나주로 떠나자 일본군 후비보병 19대대장 남소사랑(南小四郞)은 영목안민(鈴木安民)의 부산수대대를 1월 13일까지 주둔시켜, 지방군의 토벌을 돕게 한다. 부산수비대가 장흥을 떠난 이후로는 병영성, 벽사역, 장흥부 수성군 등이 토벌을 맡는다.
이러한 일련의 승리한 전투와 패배한 전투 등의 과정에서 이방언, 이인환, 이사경, 구교철, 문남택, 김학삼, 문공진, 이득춘, 여동학 이소사, 소년 장수 최신동(최동, 최동린) 등이 지도부의 중심으로 활약한다. 이들 지도부의 활약상은 “장흥동학농민혁명 역사콘텐츠 개발방향”과 관련하여 “사건과 장소”편에서 함께 언급하고자 한다.
여기서는 다만 장흥을 대표하는 동학농민혁명의 최고 지도자는 이방언 장군이기 때문에 이방언 장군에 대해서는 몇 마디를 하고자 한다. 그 동안 이방언 장군에 대해 대접주, 장태장군, 남도장군, 관산(장흥의 별호)장군 등으로 호칭되었지만 <우선봉일기> 12월 27일조 장군의 동학내의 직책이 처음으로 등장한다. 동학에서는 대접주 산하에 일종의 교구(敎區)와 같은 포(包)를 두어 접(接)을 관장했는데, 포(包)에는 행정기구로 육임제(六任制)로 교장(敎長), 교수(敎授), 도집(都執), 집강(執綱), 대정(大正), 중정(中正) 등의 여섯 가지 부서를 두고 운영하였다.
육임제(六任制)의 역할과 운영에 대해서는 <장흥지방동학농민혁명사>를 쓴 박맹수 교수는 그의 박사학위논문에서 이렇게 정의했다. 교장(敎長)은 바탕이 진실하고 신망이 두터운 사람. 교수(敎授)는 다른 사람들에게 교리를 전하고 가르칠만한 사람. 도집(都執)은 기강을 밝히고 경계를 아는 사람. 집강(執綱)은 시비를 가릴 줄 아는 사람. 대정(大正)은 근후한 사람. 중정(中正)은 강직한 사람이라고 했다.
이방언 장군의 직책 중 교장(敎長)은 그가 혁명당시 57세였고, 지역에서 신망 받는 거물 유학자 출신에다 바탕이 진실하고 신망이 두터운 사람이어서 문자 그대로 교장이라는 직책과 그는 잘 어울린다. 삼남(三南)은 충청, 전라, 경상도를 뜻한다. 이제 이방언 장군의 직책의 위상을 살펴보자 우리나라 전체 동학농민혁명군 조직체계에서 충청, 전라, 경상의 삼남(三南)에서 바탕이 진실하고 신망이 두터운 사람인 교장(敎長) 중의 으뜸(都)이라는 삼남도교장(三南都敎長)이라는 엄청난 직책이다. 그는 이 직책에 걸맞게 황룡강 장태전투, 장흥․강진 전투를 이끌어 냈다고 보면 허튼소리가 아닐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직책이 있었기 때문에 그 동안 학계에는 알려지지 않은 남접과 북접이 갈등을 빚을 때 장내회의(帳內會議)에 참여하여 양측의 갈등을 조정할 수 있었다고 본다.
필자는 장군의 후손으로부터 평전(評傳)을 오래전에 청탁받아 그 동안 200자 원고지 400매 정도를 작업해 둔 분량이 있기 때문에 이를 미리 세상에 공개하고 싶지 않지만 여기서는 이방언 장군의 집안에 대해 알 수 있는 호산(壺山) 위하조(魏河祚)의 漢詩 하나를 소개하는 것으로 끝내고자 한다.
次默菴李重吉原韻
愼而守口本乎心, 克述淸江尙德音.
신이수구본호심, 극술청강상덕음.
有是聖經箴戒近, 無爲天道化誠深.
유시성경잠계근, 무위천도화성심.
高堂甘旨思曾孝, 晩境中庸惜禹陰.
고당감지사증효, 만경중용석우음.
卜築幽廬安靜好, 一般意味明月林.
복축유려안정호, 일반의미명월림. (出處: 魏氏世稿 人編)
삼가고 입조심(守口)하여 본래의 마음으로
정돈된 글을 지으면 맑게 흐르는 강물처럼 오히려 도리에 맞는 말이로세.
그 말은 聖經(유가경전)의 깨우쳐 훈계함과 가까워
천도(天道)의 무위(無爲)로써 화육(化育)함이 참으로 깊도다.
고당(高堂: 부모님)에 맛 좋은 음식으로 일찍이 효를 사모하기를
늘그막에도 중용(中庸)으로 우(禹)임금처럼 촌음(寸陰)을 아끼셨네.
살만한 곳을 가려 그윽한 집(幽廬)을 지어
안정을 좋아함이 한결같은 의미가 명월림(明月林)이로세.
이 시는 호산(壺山) 위하조(魏河祚) 선생께서 당신보다 12살 연배가 높은 東學의 남도장군 이방언(李芳彦)의 부친 묵암(黙庵) 이중길(李重吉)의 下平聲 侵韻目의 心, 音, 深, 陰, 林의 韻으로 된 어떤 七言律詩를 차운(次韻)하여 묵암(黙庵)의 덕을 노래한 시이다.
묵암(默菴) 이중길(李重吉)의 字는 贊文으로 정조 21년 丁巳年(1797년)에 이석계(李碩啓)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인천이씨 대동보에 “班衣奉親(색동옷 입고 부모를 섬김)하며 白首讀書(늙어서까지 독서)하다. 세칭 中庸李孝子. 己丑年 12월 7일 卒. 향년 80세.”로 기록되어 늙어서도 노래자(老萊子)처럼 부모를 섬김이 들러났다.
묵암의 부친 이석계(李碩啓)는 영조 52년 丙申年(1776년)에 출생하여 고종 12년 乙亥年(1875년)에 卒하였으니 족보의 기록이 맞는다면 歲首 100세로 장수한 분이다.
족보에 묵암의 사망연대를 己丑年 향년 80세라 했는데 이는 교정이 필요하다. 己丑年은 1889년으로 묵암이 향년 80세를 살았다면 정조 21년 丁巳年(1797년)에 출생하였으니 高宗 13년 丙子年(1876)이 80세 되는 해로 아마도 丁丑年(1877년)이 己丑年으로 잘못 표기되거나 己丑年(1889년)에 사망하였다면 향년 93세로 수정하여야 할 것이다.
호산(壺山) 위하조(魏河祚) 선생은 순조 9년 己巳年(1809년)에 소암(素菴) 위영우(魏榮禹)의 장남으로 태어나 字는 찬빈(贊賓)이다. 장흥위씨 대동보에 호산(壺山) 선생을 “품성이 厚重하고, 事親至孝(어버이를 섬기는데 지극 효성)하고, 持身勤飭(제 몸의 처신을 힘써 경계)하며, 不喜流俗(세속의 풍속에 기뻐하지 않고)하고, 연암공(蓮菴公) 영경(榮璟)과 더불어 매산(梅山) 홍문경공(洪文敬公)을 지견(贄見: 폐백하며 찾아뵘)하니 선생이 一見에 문득 아름다운 선비(佳士)라 칭하다. 질의와 辯難(옳고 그름을 따짐)에 자주 장후(獎詡: 장려하고 추켜 줌)를 입으니 充然有得하다. 自後로 과거를 폐하고 林泉(은사의 거처)에서 높은 뜻을 기르고 알아주지 아니하여도 성내지 아니하니 세칭 남쪽고을의 높은 선비(南州高士)라 하다. 고종 辛巳年(1881년) 2월 25일 終.”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호산(壺山)의 “事親至孝(어버이를 섬기는데 지극 효성)하고 持身勤飭(제 몸의 처신을 힘써 경계)하며”와 “과거를 폐하고 林泉(은사의 거처)에서 높은 뜻을 기르고 알아주지 아니하여도 성내지 아니하니 세칭 南州高士라 하다.”에서 묵암(黙庵)의 “班衣奉親(색동옷 입고 부모를 섬김)하며 白首讀書(늙어서까지 독서)하다. 세칭 中庸李孝子.”와 통함으로 보아 호산 선생이 생전에 묵암의 덕을 본받음과 두 집안의 친밀함이 잘 드러난 시이다.
3. 장흥동학농민혁명의 사건과 장소
3-1. 서론
일부 학자들은 장흥의 농민군이 2차기포에서 북진대열에 합류하지 않았고, 구교철‧이인환의 기포가 우리나라의 동학농민혁명 막바지에서 기포한 점을 들어 혹 남접이 아닌 북접과 밀접하지 않을까 예단했지만 사실이 아니다. 장흥의 기포는 세 갈래의 기포로 정리되는데 첫째는 이방언 장군의 북진기포이고, 둘째는 정완석 부대의 김개남 부대에 합류하는 독자기포이며, 셋째는 이인환‧구교철에 의한 현지기포이다. 정완석의 김개남 부대 합류는 자기노선에 따른 독자행동으로 보여 논외로 치고, 이방언의 북진세력과 이인환‧구교철의 현지기포 세력은 상호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삼남도교장인 이방언 장군은 대덕의 강일오 세력 등을 대동하고 분명히 북진대열에 합류하여 삼남도교장이란 직분에 맞는 역할을 하였다. 박헌양 부사가 부임하면서 동학에 대한 탄압과 회유가 극도로 치달을 때 이방언 장군은 동지들과 밀약하여 귀순하는 척 하면서 부사를 안심시켜놓고, 정작 2차기포가 터졌을 때는 城안(장흥부)에 없었음이 장흥 유생이 쓴 <영회단> 문서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다.
[부사가] 이방언을 불렸을 때 그는 귀화하고자 하여 방언은 글을 올려 귀순하여 읍에 머물려 있겠다고 하였으며, 그를 따르는 나머지 무리(餘徒)는 점차 수그러져 갔으나 구교철과 이사경은 끝내 귀순함을 듣지 않고 혹 인근의 경내로 도망하여 혹 창궐하여 기포하였다. (중략) 이방언은 성밖으로 나가 숨어 있었는데, 이방언은 낮에는 귀화하고, 밤에는 흉악함을 품음을 사특하게 감싸 남을 해하려는 마음을 감추고서 그 망측함이 극에 달했다.
이방언 장군은 우금치 전투 패배 후 잔류 농민군을 대거 이끌고(전주출신 김동진도 포함되어 있음) 남하할 때 장흥과 긴밀한 연락을 취하여 이미 오래전부터 약속해 둔 계획인 숙계(宿計)에 의해 우리나라 동학농민혁명의 최후‧최대의 전투가 벌어지게 된다.
본고에서는 장흥동학농민혁명군의 1차기포의 원정전투인 장성 황룡강 전투와 전주성 함락 전투 및 2차기포에서 이방언 장군의 북진 또한 생략한다. 다만 장흥일대에서 벌어진 2차기포의 현지기포, 출정행군, 승리한 전투, 패배한 전투 등을 향후 역사콘텐츠 개발과 관련하여 스토리텔링으로 제시하여 향후 장흥동학농민혁명 유적지 답사코스 개발과 아울러 유적지 보존방향 등을 고민해 볼 수 있는 방안으로 활용될 수 있 수 있도록 날짜순으로 기술하고자 한다.
3-2. 흑석장터
흑석장터는 현 장평면 봉림리 버스정류장, 주유소, 농협창고, 봉림삼거리 등의 주변으로 유치면 조양촌과 함께 북쪽의 관문에 해당하는 곳이다. 장흥도호부의 장택면과 유치면, 화순의 능주로 통하는 교통 중심지이기에 장시(場市)가 열렸던 곳이다.
장흥동학농민혁명에서는 북쪽과 통로하는 곳으로는 강진 병영을 거친 통로, 유치에서 나주 봉황을 거친 통로가 더 있지만 병영 통로는 전라도 육군이 지키고 있는 곳이고, 봉황 통로는 1차기포에서 농민군이 함락하지 못한 나주목이 지키고 있는 곳이어서 통행이 원활하지 않기 때문에 2차기포에서 북쪽과 통하는 유일한 통로는 흑석장터를 경유한 통로라고 보면 되기 때문에 장흥농민군으로서는 흑석장터를 장악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진지구축이었다.
<일사> 기록에 의하면 10월 16일에 장평면의 사창(司倉: 장평면 소재지 농협창고 일대) 농민군 천여명이 모여 있었는데, <박후의적>에 의하면 11월 어느 날 부평면(장평면 임리일대)에서 “아군은 점점 떨치고 적도는 축소되었다. 전번의 부평면 적괴는 음회(陰懷)하고 이상한 사고를 당해 비밀리에 각처의 주변 적도에게 알리어 입성하는 거사를 기약했지만 범죄의 실정의 기미를 알지를 못했다. 곧 땅을 뒤집는 법(반역)이기 때문에 적은 더욱 혹독함을 품었다.”에서처럼 농민군은 사연을 알 수 없는 어떤 사고를 당해 곤경에 처해 있었다. 이러한 일이 한 원인이 되어 농민군은 사창에서 11월 7일 이전에 흑석장터로 옮긴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금구 접주 김방서 부대와 이방언 장군의 북진세력 등을 맞이하고, 박헌양 부사의 동학도 탄압에 대응하기 위한 조치이며, 11월 21일의 구교철의 웅치기포를 돕기 위해 장흥부의 시선을 흑석장터로 집중시키기 위한 전략으로 보인다.
3-3. 구교철의 웅치면기포
박헌양 부사의 시선이 흑석장터에 집중되어 있을 때 11월 21일 웅치면에서 구교철의 기포가 일어난다. 웅치면의 농민군이 장차 장흥읍을 침범한다는 소식을 듣고 놀란 박헌양 부사는 강진 병영성에 급보를 보내 별포군 500명과 조총 2백자루를 요청했으나 병영은 모두 응하지 않았다. 장흥부에는 장흥부에 소속된 군대가 있고, 벽사역의 역졸 등이 있지만 병영성에 별포군 500명을 요청하는 것으로 보아 구교철의 기포 규모를 헤아려 볼 수 있다.
11월 22일 다시 장흥에서 급보가 와 병영에서는 저녁에 도총장 윤권중 수성별장 박관숙이 2백의 민군을 인솔하여 강진읍군 2백과 함께 장흥으로 진격한다. 11월 23일에는 웅치농민군이 병영의 군대와 장흥의 수성군이 진격해 옴을 알고 길을 지나던 의심스런 세 사람을 죽이고, 깊은 곳(활성산)으로 물러나 진을 치고 병영군과 장흥 수성군과 대치하는 긴박한 상황으로 변화하지만 11월 25일 이인환이 대흥면에서 출정 기포하여 대군을 이끌고 와서 전세는 완전히 역전되었다.
구교철이란 인물을 고증하기 위해 웅치면에서 具氏를 찾으면 아무런 단서도 나오지 않는다. <웅치면지>에서는 “우선 웅치의 성촌사(成村史)와 입향조(入鄕祖), 성씨(姓氏) 유래를 살펴볼 때 웅치에는 과거에도 구씨(具氏)가 살았던 사실이 없고, 지금도 웅치에는 구씨(具氏) 성씨를 가진 사람은 없다.”고 하였지만 현 웅치면 강산리(웃강산), 보성읍 강산리(아래강산)와 지근거리에 있었던 당시 옥암면(玉岩面) 구동(龜洞)은 같은 생활권으로 구동(龜洞)에는 구교철(具敎徹)과 이름이 비슷한 같은 항렬인 구교준(具敎準)이 살고 있음이 <사료총서> 10권 <선유방문병동도상서소지등서(宣諭榜文竝東徒上書所志謄書)>의 “소지등서책(所志謄書冊)” 갑오 12월 초 9일조에 “一 寶城 玉岩 龜洞 柳龍煥 具敎準 等 呈以不染東徒事 題: 迨此無染 可見士習向事(하나, 보성 옥암 구동(龜洞)의 유용환(柳龍煥)과 구교준(具敎準) 등이 동학에 물들지 않는 것이 드려난 일에 대하여, 답변에 바라건대 이에 [동학에] 물들지 않았으니 선비로서 [학문을] 익히는 것을 볼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에서 확인되어 전혀 웅치면과 상관이 없는 것이 아니다.
구교철의 웅치면 기포는 관군의 눈을 웅치면으로 집중시켜 11월 25일 이인환의 대흥면 출정기포를 쉽게 성공시킬 수 있는 큰 밑거름이 되었다.
3-4. 이인환의 대흥면 기포와 회령진성 무혈입성
3-4-1. 이인환은 누구인가
장흥농민군이 장흥‧강진‧흥양 등에서 승리한 일련의 전투는 모두 이인환의 탁월한 야전능력과 11월 25일 대흥면에서 기포한 후 회령진성에 무혈입성하여 획득한 다수의 무기와 식량 등이 큰 밑거름이 되었다.
장흥동학농민혁명사에서 이인환(李仁煥) 대흥대접주는 여동학 이소사(李召史), 웅치접주 구교철(具敎徹)과 함께 가장 미스터리한 인물이다. 장흥에서 이인환을 인천이씨(仁川李氏)로 보는 것에 대해 이견은 없지만 장흥에 거주하는 공도공(恭度公)파는 그 지파로 수의부위공파(회천), 통훈공파(부산면), 승의부의공파(용산면)를 구성하고 있다. 이인환은 장흥의 인천이씨 무슨 파와 인연이 있어 언제 나주 남평에서 장흥으로 이사를 왔는지도 알 수 없는 인물이다.
인친이씨 대동보 갑인년(2004년 12월)판(12권 및 색인부)에는 다행히 부록으로 이름을 검색할 수 있는 색인부(索引簿)가 있는데, 인환(仁煥)으로 이름한 사람을 모두 검색했으나 원하는 갑오년의 대접주 이인환(李仁煥)은 찾지 못했다. 아마도 인환(仁煥)은 본명이 아니라 자(字)일 것이다. 이방언(본명: 민석), 이사경(본명: 관근), 김학삼(본명: 상휴)도 모두 본명(本名)이 아니라 자(字)이기 때문에 우리가 이인환(李仁煥)이라고 했을 때는 본명이 아니라 字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인천이씨 대동보 색인부에서 字로는 검색되지 않아 출신을 확인하지 못했다.
이인환에 대한 기록은 <우선봉일기>, <오하기문>, <동학사>, <영회단>, <순무선봉진등록>, <천도교월회보>, <일사> 등에 이름 석자가 전하지만 모두 짧은 기사로 어떤 인물이었는지 상고(詳考)가 불가능하다.
이인환에 대해 가장 많은 분량의 내용이 등장하는 문헌은 천도교 장흥교구에서 일제시대에 제작한 <갑오동학혁명혈사>이다. 천도교 장흥교구에는 일제시대의 정본을 영구보존하기 위해 1973년 부본(副本)을 제작했는데, 현재 세상에 유통되고 있는 것은 부본(副本)으로 양면지에 가로판으로 써져 있고, 일제시대 정본은 양면지에 세로판으로 쓰여 있다. 또한 갑오년 당시 일곱 살이던 성암 김재계 선생이 남긴 기록에도 상당한 분량의 이인환 대접주의 기록이 보인다. 먼저 <갑오동학혁명혈사>의 기록을 살펴보면 정본과 부본에는 약간의 문자이동이 있지만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갑오동학혁명혈사의 내용은 생략함)
이인환 대접주는 출신은 남평현이지만 장흥에서 그의 가족은 물론 처가의 식구들도 대동하여 정착하고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그가 무기와 화약을 잘 다루었고 병법(兵法)이 탁월했다는 구전을 토대로 검토하여 보면 혹 회진 만호진(萬戶鎭)에 한때 군관으로 근무했던 사람이 아닌지 의심이 되기도 한다. 또한 이인환은 무기와 화약을 잘 다루었다는 구전 외에도 생약초 등의 약재상을 하면서 많은 사람을 접촉했다는 구전이 있다. 만약 약재상을 했다면 생약초 등의 약재를 매개체로 하여 동학 포교에 힘쓰지 않았을까 추정할 수 있다.
이인환의 처남 유창오(劉昌五)는 장흥의 동학혁명에 참전하여 다행히 생명을 부지한 것 까지는 확인이 된다. 위의 <갑오동학혁명혈사>에서 “[이인환을] 석방의 암의(暗意)가 있는 그의 심지(心志)를 안 氏(이인환)는 석방이유 및 의복과 지뢰(指耒: 손발싸개), 서류를 氏의 처남 유창오(劉昌五)에게 보냈더니, [유창오와] 가까운 마을(도청)에 거주한 방수장 김(金多汝)은 그 서류의 속 내용을 찾아내어”로 보아 이인환의 처남 유창오도 대흥면 도청리에서 가까운 마을에 정착하고 살았던 것으로 확인된다. 그에 대한 구전으로는 일제시대 관산읍 수동의 작은 저수옆에서 덕도(德島)를 잇는 노두길 옆 주막에 한때 유씨(劉氏) 성을 가진 사람이 살았는데, 그는 주막에 사는 사람치고 이치가 분명하고 범접하기 어려운 사람으로 그가 혹 이인환의 처남 유창오(劉昌五)가 아닌지 의심이 되기도 하지만 현재 장흥에서는 이인환(李仁煥)家와 그의 처가 유창오(劉昌五)家를 찾을 수 없으니 매우 안타까울 뿐이다.
3-4-2. 대흥면 기포와 회령진성 무혈입성
커져가는 동학의 불씨를 되살리기 위해 이인환과 구교철은 북진했던 이방언 장군과 긴밀히 연락하여 숙계(宿計: 오래전부터 생각해온 계획)에 의해 11월 20일을 전후하여 철저하게 웅치면과 대흥면에서 장흥의 기포를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인환의 대흥면 출정기포를 완벽하게 성공하키기 위하여 11월 21일 구교철이 먼저 웅치에서 기포하여 장흥부사의 이목을 웅치로 집중시킨다. 웅치 동학농민군을 진압시키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던 장흥부사는 이인환의 대흥면 출정기포에 그만 허를 찔리고 만다.
필자는 <장흥동학농민혁명 사료총서>의 “장흥의 세 갈래의 기포”편에서 이인환의 11월 25일의 기포를 출정기포라고 정의했다. 출정기포 이전의 모임과 “대장 깃발이 펄펄 휘날리며 머리에 석자 황명주 수건을 두르고 무릎에도 황명주 수건을 두룬 동학군이 총을 든 사람 창을 든 사람이 연습차로 자주 벌판에 모이곤 하였다.”의 기포를 현지기포로 정의했다.
이인환의 대흥면에서 출정기포 날짜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먼저 <임태희추기(任泰希推記)>에는 “11월 23일 본부(本府) 대흥면에서 적괴가 크게 일어나 적병 천여 명이 곧바로 밀어젖히어(直抵) 인근의 고읍면을 위협하여 군사를 일으킨 다음 새의 날개 치는 소리처럼 연달아 남상면 등을 공격하여 강제로 겁을 주어 군사를 일으킨 다음 본부(本府) 회령면에 가서 진을 쳤다.”고 하여 이인환의 대흥면 출정기포가 11월 23일이라고 전하고 있다.
강진 박기현의 <일사>에서는 11월 25일조부터 연달아 이인환의 대흥면 기포소식을 전하는데, 11월 25일조에 “전하여 들으니 동학접주 이인환이 대흥면에서 기포하여 웅치 동학과 모였다고 한다.” 11월26일조에 “밤에 장흥부사가 호장(戶長)을 거느리고 병영에 와서 군대를 요청하였다. 대흥동학의 기포를 보고 군대를 보내 토벌하려고 하는데, 그 형세가 대단히 급박하여 문서로써 군대를 요청한 것이다. 그 문서는 형세가 이와 같이 급박하니 즉시 군대를 징발하여 도와 달라는 내용이었다. 장흥부사가 그 글을 보이고 밤에 즉시 돌아갔다.”
<일사> 11월 28일조에 “(사촌동생 지삼이) 보성읍에 도착해보니 군대를 모아 바야흐로 장흥경계로 내려가려고 하였다. 그 이유를 물으니 장흥읍에서 대흥면 동학이 귀 읍으로 넘어가려 하니 귀 읍에서는 마땅히 군대를 징발하여 막으라는 뜻의 비밀 연락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다고 한다.” 11월 29일조에 “장흥 소식을 들으니 병영의 군대가 세 사람의 동학의 목을 베고, 한 개는 병영에 결박하였으며, 장차 웅치를 넘어 동학을 토벌하려고 한다고 했다.” 11월 30일조에 “보성 소식을 들으니 민군 수백 명이 단지 죽창을 들고 적을 막는데 적도를 보고 모두 물러나 돌아왔다고 한다.”고 전한다.
한편 <오하기문>에는 “11월 26일 장흥의 적 이방언(李方彦), 이사경(李士京), 이인환(李仁煥), 백인명(白仁命), 구교철(具敎徹) 등이 회령진(會寧鎭)을 점거하였는데 그 무리는 수만이다. 장흥부의 군사 천여 명이 나가 싸웠으나 참패하고 돌아왔다. 병영에 구원을 요청하여 병사 서병무(徐丙懋)는 총수 300, 무사 100명을 보냈다. 29일에는 벽사역 부근에서 농민군 3명을 참하고, 웅치까지 추격하였으나 농민군은 이미 보성으로 물러났다. 30일에는 보성경계에 까지 추격하였으나 농민군을 발견하지 못해 군대의 추격을 멈추고 돌아왔다.”고 전한다.
장흥 백영직의 <육우재유고(六有齋遺稿)>의 「박후의적(朴侯義蹟)」에 “강진 감영으로 가서 원군을 청하여 같이 토멸하려 할 때에 적도들이 웅치면에 아주 주둔하여 살상과 약탈을 일삼는다 하므로 즉시 명을 내려 성을 지키던 별장인 임창남에게 쫓아가 토벌케 하였더니 승첩을 거두었으나 적도들은 더욱 그 흉계가 극도에 다다라 대흥지방의 적도 천여 명이 여러 차례 곧바로 고읍 땅과 남면 등지를 공격해 왔고, 또 남면에서 곧 바로 회령(會寧)땅을 공격하여 왔으므로 다시 수성별장에게 출격을 명을 내려 공격케 하였으나 저들은 무리들이 많고 우리는 적어서 적괴를 체포하지 못하고 돌아왔다.”고 전한다.
보성의 문재국씨 소장 동학문서 <영회단>에도 “(대흥에서 기포하자) 여기에 웅치 농민군이 합류하여 천여 명의 농민군이 고읍(古邑)으로 직향하여 관군을 협박하고 남면을 거쳐 회령(會寧)으로 달려갔다.”고 전한다.
위에서 전하는 말들이 모두 약간의 차이가 있고, 그리고 날짜에도 출입이 있다. 특히 회령진(會寧鎭)을 점거하였다는 기사를 놓고, 갑오년 당시 수군 만호(萬戶)가 주둔했던 지금의 회진면의 회령진인가 아니면 이조 성종 때에 폐진(閉鎭)되었던 당시 장흥부에 속했던 회령면의 옛 회령진인가의 문제는 필히 정리하고 넘어가야할 문제이다.
그 동안 학계에서는 이인환의 대흥접이 11월 25일 기포하자 곧장 웅치접과 결합하여 <오하기문>에 따라 11월 26일에는 현 보성군 회천면으로 갔다고 해석했다.
먼저 이인환의 대흥면 출정기포 날짜에 대해서는 작자가 장흥사람으로 추정되는 11월 23일설(임태희 추기)과 강진 병영사람인 박기현의 11월 25일설(일사)에 대해 고찰하여 보면 <임태희 추기>에 기록된 11월 23일이 외형상 더 신빙성이 있을 것으로 보이나 이 기록은 갑오년 11월 당시의 기록이 아니라 이두황을 전 양주목사로 표현한 것으로 보아 아마도 을미사변(1895년 10월 8일) 전후에 기록된 문서로, 기록에서 이두황의 장흥입성을 12월 16일로 적고, 옥산전투를 12월 21일로 전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고, 오히려 <일사>는 그날그날의 일기로 적었기 때문에 11월 25일이 더 신빙성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11월 25일에 기포를 하였다고 하더라도 김재계의 <갑오년 동학이야기>에서처럼 “하루는 들리는 말이 접주 이인환씨가 거정리 벌판에서 동학도 모임을 한다고 한다.”와 “대장 깃발이 펄펄 휘날리며 머리에 석자 황명주 수건을 두르고 무릎에도 황명주 수건을 두룬 동학군이 총을 든 사람 창을 든 사람이 연습차로 자주 벌판에 모이곤 하였다.”에서 처럼 11월 23일은 출정기포 이전의 현지기포 때에 연습차 모였던 날짜가 아닌가 의심된다. 또한 기왕 기포를 하여 출정을 하려면 11월 25일 대흥면 장날을 기해 기포의 당당한 모습을 보여주는 시위효과로 본다면 11월 25일을 출정기포 날짜로 보는 것이 더 좋을 것 같다.
<오하기문>에 전하는 “11월 26일 장흥의 적 이방언(李方彦), 이사경(李士京), 이인환(李仁煥), 백인명(白仁命), 구교철(具敎徹) 등이 회령진(會寧鎭)을 점거하였는데 그 무리는 수만이다.”의 기록을 그 동안 학계에서는 회진의 회령진이 아니라 회천면의 옛 회령진으로 해석하여 11월 25일 대흥면에서 기포하자마자 회진의 회령진을 거치지 않고, 곧장 60km 이상을 내달려 다음날 회천면의 회령진으로 간 것으로 보았다.
대흥면의 동학농민군의 분포를 살펴보면 거정리와 그 지근거리인 도청․연지리에도 많지만 주로 외곽지역에 더 많이 분포한다. 멀리로는 강진군 대구면의 윤세현씨의 세력, 약산․금당도의 섬, 대리․신상의 섬, 서편으로 신리․옹암․분토 등으로부터 거정리에 모이는 거리가 4~15km가 넘는 거리에 있다. 이날은 또한 대흥면 장날이다. 많은 장꾼 앞에서 무언가 거대한 동학의 출정식을 보여주지 않으리 없다. 아무튼 거정리에서 모여 일찍 출발하였다 하여도 12km를 북상하여 고읍(관산읍)으로 가서 여기서 군대를 일으켜 다시 10km 정도를 북상하여 남면(용산면)으로 가서 여기서 군대를 일으켜 다시 10km 정도를 북상하여 안양면으로 여기서 다시 20km 정도를 더 동진하여야 회천면의 옛날 회령진터에 이르게 된다. 그런데다가 여러 기록이 모두 고읍면과 남상면에서서 군사를 일으켜 동행시켰고, 이 과정에서 <박후의적(朴侯義蹟)>에서 “대흥지방의 적도 천여 명이 여러 차례 곧바로 고읍 땅과 남면 등지를 공격해 왔고, 또 남면에서 곧 바로 회령(會寧)땅을 공격하여 왔으므로 다시 수성별장에게 출격을 명을 내려 공격케 하였으나 저들은 무리들이 많고 우리는 적어서 적괴를 체포하지 못하고 돌아왔다.”는 것으로 보아 어느 정도 수성군과 충돌이 있었기에 11월 25일 대흥면에서 출정 기포하여 곧바로 11월 26일 회천면의 회령진 점거는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이두황의 우선봉 군대도 말(馬) 90필이 있어도 하루 행군이 60里인 24km를 넘지 않았는데, 고읍면에 들려 군사를 일으키고, 남상면에 또 들려 군사를 일으키는 과정에서 수성군과 어느 정도 충돌이 있는데다 많은 인원이 하루 세끼 식사 등을 해결하면서 단 하루 만에 도달하기란 도저히 불가능한 거리이다.
그래서 11월 25일 대흥면 거정리에서 출정기포를 하여 대열을 갖춘 후 11월 25일이나 11월 26일 경에 회진의 회령진에 무혈 입성하여 많은 무기와 식량을 확보한 후 북상하여 고읍면에서 군대를 일으키고, 또 북상하여 남상면에서 군대를 일으켜 많은 무리를 대열에 합류시켜 위로 치고 올라온다.
이를 지켜본 장흥부사가 위급함을 느껴 <일사>의 11월 27일조의 “밤에 장흥부사가 호장(戶長)을 거느리고 와서 군대를 요청하였다. 대흥면(大興面) 동학의 기포를 보고 군대를 보내 토벌하려고 하는데, 그 형세가 대단히 급박하여 문서로써 군대를 요청한 것이다. 그 문서는 형세가 이와 같이 급박하니 즉시 군대를 징발하여 도와 달라는 내용이었다. 장흥부사가 그 글을 보이고 밤에 즉시 돌아갔다.”와 연결시켜 보면 다음과 같다.
11월 25일 이인환이 대흥면에서 출정 기포하였다는 소식을 접한 장흥부사는 적어도 11월 27일 낮까지의 시간에 장흥부의 수성군을 출동시켜 대흥면의 동학이 고읍면 남상면을 거쳐 북상하는 것을 막으려고 노력했지만 <영회단>에서 전한 것처럼 “여기에 웅치 농민군이 합류하여 천여 명의 농민군이 고읍(古邑)으로 직향하여 관군을 협박하고 남면을 거쳐 회령(會寧)으로 달려갔다.”에서처럼 대흥면 동학이 회진의 회령진에서 막대한 무장력을 갖추어 수성군보다 월등한 무장력에다 웅치의 구교철이 지원사격을 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장흥부사는 앞으로 장흥부로 쳐들어올 것이 명약관화하고, 장흥부 수성군으로는 열세이기 때문에 27일 밤 병영성에 직접 가서 문서로 군대를 요청했던 것이다.
이리하여 <일사> 11월 28일조의 “아침을 먹은 뒤에 도총장 윤권중(尹權仲)이 군대 수백 명을 거느리고 장흥으로 갔다.”와 연결이 잘 된다. 또한 이와 같은 상황은 <박후의적>에 다음과 같이 잘 나타난다.
부사가 분노를 이겨내지 못하여 이때 죄인을 찾아 쫓아가 잡으려고 친히 강진 병영으로 찾아가서 구원병을 청해 함께 토벌하려는 사이에 적들은 오히려 웅치면에 진을 치고서 목숨과 재물을 약탈하고 있었다. 곧 수성별장 임창남(任昶南)에게 명하여 가서 토벌하여 적들을 체포하게 하였다. [적들은] 더욱 방자하게 흉계를 꾸며 대흥면의 적 1,000여명이 고읍면에서 곧바로 남면 등지를 짓이기고 남면에서 곧바로 회령면의 땅으로 내달렸다. 다시 수성별장에 출격을 명령하였으나 적들은 많고 아군은 적어 적괴를 체포하지 못하고 돌아왔다.
이인환의 대흥접이 출정기포 하여 장흥읍이 아닌 구교철과 합류하여 회천면의 옛 회령진으로 진격했던 것은 어느 날 갑자기 하루 만에 이루어진 일이 아니라 사전에 구교철, 이방언 장군과 숙계(宿計)가 있었다고 했다.
다시 결론지어 <오하기문>의 회령진 점거에 대해 말하면 이인환의 대흥접이 회진의 회령진에서 먼저 양측에 모두 피 한 방울 흘리지 않는 무혈입성(無血入城)을 하여 점거한 것도 사실이고, 대흥면의 동학농민군이 현 보성군 회천면인 옛 회령진으로 이동한 것도 사실이다. 다시 김재계의 “갑오년 동학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아래 ①, ②의 상황은 현지기포를 전하는 것이고, ③의 상황은 출정기포를 전한 상황이다.
① 하루는 들리는 말이 접주 이인환씨가 거정리(현 대덕읍 소재지) 벌판에서 동학도가 모임을 한다고 한다. 어른은 물론이거니와 부인 어린이까지도 구경을 간다고 한다. 아버지도 가시고 삼촌도 가시고 할머니도 가신다고 한다. 나도 가겠다고 선두에 나섰다. 아버지 삼촌 할머니는 어린애들이 가면 사람 많은 속에 큰일 난다고 절대로 만류하셨다. 그래도 가겠다고 몸부림을 치다가 삼촌에게 불호령을 듣고 어머니의 손에 붙들려서 다시 돌아왔다.
② (전략) 날마다 사람이 구름 모인듯하였다. 이런 소리 저런 소리가 끊어질 날이 없었다. 또 한편에서는 소를 잡고 돼지를 잡고 술을 마시고 참으로 동학의 기분은 굉장하였다. 얼마 후에 접주 이인환씨가 기포령을 내리였다. 이 기포령이 한 번 내리자 어쩐 일인지 사람들이 물 끓는 듯하였다. 대장 깃발이 펄펄 휘날리며 머리에 석자 황명주 수건을 두르고 무릎에도 황명주 수건을 두룬 동학군이 총을 든 사람 창을 든 사람이 연습차로 자주 벌판에 모이곤 하였다. 우리 일가 어른이신 김수봉씨가 본래 장사로 유명한 분으로 대장기를 들고 춤을 추며 횡행하던 것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③ 어느 날 정착 기포가 되었는데, 우리 아버지도 행군 중에 같이 가시게 되었고 삼촌도 가시게 되었다. 대장기 아래 청수를 모시고 주문을 세 번 고성대독하니 그 웅장한 소리는 저절로 강산초목이 움직이는 것 같다. 식이 끝나자 나팔소리를 따라 대군은 움직인다. 저 건너편에서 이인환 본접 행군이 나팔을 불고 서로 응성하여 나간다. 나는 어쩐지 한결같이 가고 싶었다. 오리만큼 따라갔다가 또 아버지 삼촌 할머니가 야단하는 바람에 할머니를 따라서 집으로 다시 돌아올 적에 퍽 섭섭하였다.
위에서 김재계는 날짜를 명기하지 않았지만 ①은 장흥전투를 앞두고 대흥면에서 11월 25일 출정기포하기 전에 동학도들이 자주 모임을 가졌다는 이야기이다. ②는 본격적인 회진의 회령진 점령을 준비하기 위한 출정기포 전 단계의 이야기로 회령진 점령을 위해 연습차로 자주 벌판에 모였다는 것이다. 갑오년 당시 김재계는 어린 나이였고, 그가 살고 있는 덕도는 회진 회령진 앞의 가까운 섬이었다. ③의 전반부는 당시 총칭해서 내덕도(來德島: 덕산․장산․대리․신상․노력)라는 섬에서 코앞의 회령진성을 점령하기 위해 출발하는 모습이고, 후반부 “저 건너편에서 이인환 본접 행군이 나팔을 불고 서로 응성하여 나간다.” 이하는 대흥면 본대의 농민군과 내덕도(來德島)의 농민군이 회진의 회령진에서 결합한 모습을 회령진 건너편의 덕도에서 바라본 모습을 회상한 이야기이다.
곧 대흥면의 이인환접이 본격적인 장흥전투를 위하여 대흥면 본대와 내덕도(來德島) 농민군의 양진영이 결합하여 회진의 회령진에서 무기획득을 위해 회령진을 점령한 후 이곳에서부터 북상하였다는 추론을 할 수 있다. 여기서 대흥면의 이인환접이 회진의 회령진으로 갔던 중요한 추론이 나온다.
대흥면의 이인환접이 기포를 하여 처음부터 행군 방향이 현 회천면이라면 굳이 회진의 회령진성으로 들어갈 필요가 없다. 갑오년 당시는 현 대덕면 연평리 삼거리 인근 학무등(현 포항저수지) 앞에 까지가 바다였기에 현재처럼 회진면 덕흥에서 관산읍 외동으로 가는 길이 없다. 때문에 다시 학무등 쪽의 삼거리까지 돌아 나와야 한다. 내덕도 농민군과 합세하여 회천면으로 가려고 했다면 내덕도 농민군이 학무등의 삼거리 쪽으로 나와 같이 가거나 아니면 썰물시 고읍면(관산읍) 수동과 삼산사이에 있는 노두길로 나가면 된다. 여기서 내덕도 농민군이 노두길을 이용해서 곧장 고읍면 쪽으로 나갈 수도 있음을 상상해 볼 수 있다. 하지만 김재계가 전하는 “대장기 아래 청수를 모시고 주문을 세 번 고성대독하니 그 웅장한 소리는 저절로 강산초목이 움직이는 것 같다. 식이 끝나자 나팔소리를 따라 대군은 움직인다. 저 건너편에서 이인환 본접 행군이 나팔을 불고 서로 응성하여 나간다.”는 너무나 가까이서 살펴본 생생한 모습이기 때문에 내덕도 노두길에서 바라본 건너편의 고읍면 노두길 너머의 모습은 아닐 것이다.
회진의 회령진성을 내덕도 농민군과 함께 점령할 목적이 있었기 때문에 대흥면의 농민군이 회진의 회령진성으로 간 것이다. 이렇게 하여 회령진성을 점령한 후 이인환 대접주이자 장흥전투의 야전사령관인 그가 이끌고 온 대흥접과 내덕도 농민군이 합진하여 고읍면과 남상면을 거쳐 안양면으로 북상을 하여 다시 동진하여 웅치 농민군과 결합하여 회천면의 옛 회령진터로 갔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면 내덕도 농민군은 어떻게 회령진으로 건너갔을까? 배를 타고 간다고 가정하면 수많은 사람들이 조그마한 배로 건너려면 수차례 반복해야 하지만 추론건대 내덕도와 회령진 사이에 있는 노두길을 이용했을 것이다. 1872년 정부에서 만든 현 규장각 소장 회령진 지도에 덕도에서 수동으로 이어지는 노두길(石橋)외에도 덕도에서 회진으로 이어지는 노두길이 표시되어 있어 썰물시 노두길(石橋)을 이용했을 것이다. 때문에 김재계의 증언이 생생하게 나올 수 있는 것이다.(회령진성 지도 참조)
<임태희추기>에서는 “11월 23일 본부(本府) 대흥면에서 적괴가 크게 일어나 적병 천여 명이 곧바로 밀어젖히어(直抵) 인근의 고읍면을 위협하여 군사를 일으킨 다음 새의 날개 치는 소리처럼 연달아 남상면 등을 공격하여 강제로 겁을 주어 군사를 일으켰다.”고 했다. 그러나 고읍면은 김학삼이 단단히 동학의 세력을 틀고 있는 곳이고, 남상면은 이방언 장군의 근거지인데 이곳에서 강제로 군사를 일으켰다는 것은 어불성설(語不成說)이고 수성군의 방해가 있었기 때문에 수성군의 방해 속에서 군사를 회동시키는 데는 다소 시간이 걸렸을 것이라고 판단된다.
그러나 학계에서는 <오하기문>에서 말하는 “거회령진, 기중수만(據會寧鎭, 其衆數萬)”을 “농민군 수만 명이 [회천면의] 회령진(會寧鎭)에 웅거하다”로 해석하여 단 한 곳의 회령진에서 한 차례 웅거한 것으로 해석했다. 그 동안 학계에서는 동학농민혁명군이 장흥․강진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는 원동력을 풀어나가는데 있어서 밑거름이 된 농민군의 막강한 무장력을 간과하였다. 그 무장력은 바로 회진의 회령진성에서 나온 것이다.
아직까지 갑오년 당시의 문헌에는 이인환이 회진의 회령진을 점령하여 무기를 탈취했다는 기록은 없다. 피아(彼我)간에 피를 흘리지 않는 사건이라서 제대로 상부로 보고가 되지 않았거나 입을 다물고 쉬쉬했을 것이다. 그러나 대덕․회진에서 구전으로만 떠돌던 동학농민군의 회령진성 점령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동학 100주년을 맞이하여 특집으로 엮어진 무등일보의 기사이다. <대덕읍지> 601쪽에서는 이를 무등일보 동학백주년기념특집의 글에서 다음과 같이 재인용하여 도청리 농민군을 중심으로 한 동학농민군 전투기라는 기사를 실었다.
대흥면 연지에서 1894년 9월 10일 기포한 강일오 접주가 인솔한 대열에 참가하여 우금치 전투에 참가하고, 그후 남도접주 이방언이 지휘한 1만여 대부대에 합류하여 12월 10일 강진관아와 병영성을 함락하고, 사기충천하여 차기 전투를 대비 중 이 소식을 들은 관군이 영암, 강진, 장흥의 3개 방면에서 진격해 오므로(이것이 강진 장흥의 급보) 12월 14일 석대에서 혈전을 하였으나 패하고 강일오(姜日五)는 전사하였으며, 이윤창(李允昌), 황보성(皇甫聖), 박태지(朴台之)는 대흥면 선자동에서 완도로 피신준비 중 관군에 체포되어 군동면과 장흥경계 하천변에서 화형 당했다 한다. 이 소식을 들은 후손들은 시신을 거두려고 현지를 가 보았으나 시체를 구별할 수 없어 초혼장으로 장례를 치렀다고 전한다. 아울러 회진 만호진에서 탈취한 무기는 관군에 의하여 만호에 반환되었다고 전한다.
또한 회령진 무혈입성에 대한 기록이 “동학농민혁명참여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이하 명예회복심의위)”에도 다수 제출되었다.(등록신청서 내용 생략)
이들은 현재 명예회복심의위에서 모두 동학농민혁명 참전자로 인정받았다. 명예회복심의위에는 대덕의 김봉주씨만 회령진성 무혈입성 시기를 12월이라 했고, 나머지는 모두 11월이라 했다. 회진의 회령진 입성의 증언은 또 있다. 당시 16세의 소년 사공으로 수많은 농민군을 구원해 낸 윤성도(尹成道)가 그의 손자 윤병추에게 생전에 들려 준 후일담에도 등장한다.
이인환이 대흥면에서 거행한 출정기포로 인해 장흥동학농민혁명군은 결론부터 말하면 다른 지역의 농민군에 비해 막강한 무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러한 무장력이었다면 공주전투에서도 패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이유는 대흥면에서 이인환 접주를 중심으로 기포하여 곧 바로 회령진성(회진)에 무혈 입성하여 수군(水軍)의 많은 무기를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대흥면의 이인환접의 군세는 대구면의 윤세현의 세력이 합세하였고, 지형적으로도 회령진성(회진)을 사방에서 포위하고 있는 형국이었다. 현 대덕읍의 연지, 도청, 신월, 신리 등의 주력 농민군과 회령진의 바로 지근거리 왼쪽에는 덕흥에도 황씨 일가를 중심으로 농민군이 있었고, 바로 정면에는 당시 섬이었던 덕산, 장산, 대리, 신상, 노력 등의 농민군 또한 주력 농민군이 있었으며, 오른쪽 바다로 빠져 나갈려도 이인환 접주의 영향권에 있었던 현 완도군의 금당도와 약산면의 농민군이 있었다. 또한 대흥면과 가까운 거리에는 고읍접이 있었다.
어떻게 장흥동학농민군이 수군 종4품의 만호가 주둔하고 있는 회령진성에 그것도 피 한 방울 흘리지 않는 무혈입성에 성공할 수 있었단 말인가? 그러면 회령진의 만호는 농민군에 호의적이어서 그냥 성문을 열어주고 무기를 내주었단 말인가? 그럴 가능성도 약간은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두황이 일본군 토벌대장 남소사랑(南小四郞)에게 보낸 보고에 의하면 “회령진과 마도진 등지는 적의 종적이 없다고 합니다.”에서 알 수 있듯이 회진의 수군이 농민군을 토벌했다는 기록이 현재까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더 객관적으로 검토해 보면 동학농민군과 대적하여 싸울 군사가 회령진성에 없었기 때문에 쉽게 성을 내줄 수밖에 없는 것으로 보인다.
회령진의 설치는 세종 4년(1422년) 지금의 회천면 회령포에 군선을 정박토록 결정한 것이 시초이다. 회령진의 처음 위치는 현재의 보성군 회천면이다. 그러나 중간에 지금의 장흥군 회진면으로 옮겼는데, 명칭은 그대로 회령진이라 불렸다. 그 이유는 아마 나주 다시면에 이미 설치되어 있는 수군 회진성과 같은 이름을 피하기 위해서인 것 같다.
회령진은 전라좌도(좌수영)에 속하기도 하고 전라우도(우수영)에 속하기도 하였다. 이는 전라좌도와 우도의 경계 상에 위치하는 특성 때문이었다. 지금 회진면 회령진성의 연혁은 성종21년(1490년) 4월에 축조된 만호진성으로 초기에는 병력이 대거 주둔했지만 이후 역할이 조정되어 남해안에 출몰하는 왜군을 방어하고 소탕하는 후방 병참기지였다.
참고로 수군 만호진의 업무는 기본적으로 왜군의 침략을 막는 군사업무를 수행하지만 그 지역적 특색에 따라 나라에서 주어지는 수행업무가 달리 부여되었음을 다음 사례를 통해 알 수 있다.
해남에 설치된 이진성(북평면)의 역할을 보면 해남읍지에 전선 1척, 병선 1척, 사후선(伺候船) 2척, 만호 1명, 대변군관 12명, 진리(鎭吏) 18명, 사령 6명, 군뢰 2명, 방군 271명으로 왜군침입 방지와 제주도 출입통제 및 제주도 군마(軍馬)와 사마(私馬)를 수송하는 곳의 역할이었다.
무안에 설치된 다경진(多慶鎭)은 다경진지(多慶鎭誌)를 보면 수군만호 1명을 포함, 장교 19명, 진무(鎭撫) 13명, 도인(道引) 5명 등 총 193명이 배치되었다. 영산창(榮山倉)에서 출발한 세공선단(稅貢船團)이 다경진 관할을 통해야만 했기에 나주 역도(歷島)에서 영광 소약도(小若島)까지 호송을 책임 맡았다.
회진면의 회령진이 후방병참기지라는 것은 회령진의 병선과 관원의 현황을 보면 알 수 있다. 처음 세종실록지리지 151조 전라도 관반(關防)조에 수록된 수군편제에는 전라좌도 도만호진(都萬戶鎭)인 여도(呂島)관하에 회령진에는 중선(中船) 4척, 별선(別船) 4척. 군사 472명, 초공(梢工) 4명이 주둔했다. 그러나 세조때 개편을 거쳐 정비된 수군체제 아래에서는 대맹선(大猛船) 1척, 중맹선(中猛船) 1척, 소맹선(小猛船) 2척, 무군소맹선(無軍小猛船) 4척으로 편재가 바뀌었다.
경국대전에는 주둔하는 관원수의 현황이 나타나지 않지만, 장흥읍지에는 전선 1척, 병선 1척, 사후선(伺候船) 1척, 만호 1명, 군관 20명, 장교 6명, 진무(鎭撫) 30명, 통인(通引) 10명, 사령(司令) 16명으로 나타난다. 또한 여지도서(輿地圖書)에는 병선 현황은 나타나지 않지만 만호 1명, 군관 15명, 吏 20명, 지인(知印: 잔심부름을 하던 구실아치) 6명, 사령 12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장흥의 성곽> 2004년. 71쪽에는 “회령진지(會寧鎭誌)에는 열자전선(列字戰船) 1척, 병선(兵船) 1척, 사후선(伺候船) 2척, 만호(萬戶) 1명, 군관 2명, 기패관(旗牌官) 3명, 진무(鎭撫) 15명이다.”로 되어 있다. 1895년 규각장 도서번호 제12188호에 수록된 <호남진지(湖南鎭誌)> 중 “회령진지 사례성책”을 보면 1895년 회령진이 폐쇄되기 직전의 상황을 알려주는 내용들인데, 당시 진사(鎭師)의 상황은 만호(萬戶) 1명, 계청군관(啓請軍官) 1인, 장교(將校) 8인, 진무(鎭撫) 8인뿐이다.
따라서 처음 회령진은 설진할 때는 수군병졸들이 472명이나 주둔하는 대진(大鎭)이었으나, 이후 업무가 조정되어 만호 휘하에는 군관과 군리(軍吏)만 있었고, 수군병졸은 없는 것으로 파악된다. 회령진의 평상시 기본업무는 수군만호와 그 휘하는 방어를 위한 해상 수색업무와 유사시에는 하번선군(下番船軍)이 집결하는 장소의 기지업무를 수행하는 곳이었다. 대개 수군은 병선과 병력이 머무른 곳을 진영(鎭營)으로 삼고 있으나 회령진에는 수군병졸들은 평상시 주둔하지 않고, 군량과 군기를 쌓아두고 있었을 뿐이다. 회령진은 군졸이 없는 병선을 보유하고 있어서, 유사시 하번선군(下番船軍)이 집결하는 장소로 활용됐으며, 또 평상시에는 해상작전을 하는 병선의 기항지인 동시에 보급기지 역할을 수행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장흥동학농민군이 회령진성에 입성할 때 이를 방어할 병력이 없어 농민군은 큰 저항을 받지 않고 쉽게 무혈입성 할 수 있었다고 본다. 그리고 병선 기항지로써 군량과 군기를 쌓아두는 보급기지였기 때문에 많은 무기를 쉽게 확보할 수 있었다고 본다. 만약 회령진(회진)에 수군 병력이 다른 만호진처럼 다수 주둔하고 있었다면 병영, 벽사역, 장흥부에서 보는 바와 같이 그 동안 농민군에 대한 탄압사례가 나왔을 것이다. 또한 석대패전 이후 농민군들이 회령진 수군에 의해 대흥면에서 조사받거나 많이 처형당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기록이나 구전이 없기 때문에 회령진성에 군관과 군리(軍吏)는 있어도 실제로 전투에 나서고 농민군을 체포할 병졸이 없음이 확인된다.
수군(水軍)의 무기는 함포사격이 주를 이루기 때문에 육군의 무기보다 화력면에서는 더 월등하다고 본다. 그래서 당시 병영성의 육군이 보유하고 있는 대포와 화력보다 더 성능이 좋은 대포와 기타 화력 및 군량을 이곳에서 다량으로 확보한 것이 장흥․강진전투 승리의 시금석이 될 수 있었다고 본다.
실제로 농민군이 대포를 보유하고 있었다는 증거는 <장흥군향토지>에서 “부산면 금자리 자라번지 부산동초등학교 뒤뜰에서 최근 경지정리를 할 때 길이 1.5m 구경 15cm의 대포가 출토되어 그때의 전상을 회상시키고 있다.”고 했듯이 이 대포는 농민군이 일본군과 관군에 의해 진압될 때 우선 증거를 없애고 훗날을 도모하려고 묻어 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농민군이 보유한 대포 등의 화력은 김방서 부대나 광주, 나주, 화순, 능주 등에서 장흥으로 내려온 부대가 가지고 온 것으로 가정할 수도 있지만 패전하여 쫓기는 부대나 멀리서 이동하는 부대가 추격과 감시의 눈을 피해 장거리를 별다른 운반수단이 없이 농민군이 맨몸으로 대형무기를 소지하고 이동하기란 매우 곤란할 것이다.
흔히 동학농민군하면 죽창으로 무장한 군대로 생각한다. 장흥농민군의 무장에 대해 <장흥군향토지> 83쪽에서도 그렇게 기술하고 있다.
수성군은 탐진강에 걸린 죽교(竹橋)를 파괴하고 성을 고수하였으며, 이 동학군은 붕어창과 기능이 둔한 화승총 죽창 등의 허술한 무장이었으나 사기는 충천하였다. (중략) 죽창 휘두른 소리를 신호로 3방면에서 총공격을 하였다.
우윤 교수는 위의 <장흥군향토지> 기사를 인용하여 농민군의 장녕성 함락을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아래의 문헌을 보면 장흥동학농민혁명군이 벽사역, 장녕성 등을 함락할 때 죽창을 휘둘려 함락시킨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① 12월 4일 적도들이 방화를 하고 대포를 쏘아 벽사역의 공해(公廨)와 민가의 가옥(民舍)에 불을 지르고 들어왔다. 재와 불탄 끄트러기와 연기와 불덩이가 하늘과 성에 가득 넘쳐났다. 모든 사람들의 얼굴빛에 혼백이 달아남이 없지 않았다.
② 다음 날(12월 5일) 새벽에 부사가 다시 문의 누각에 올라 적진을 바라보니 한방의 대포소리가 들린 다음 적들이 곧바로 북문을 넘었고, 나머지 적들은 사면으로 난입하니 온 성안이 불길에 휩싸이었다.
③ 문공진(文公辰)을 체포하였습니다. 이놈은 장흥부사가 변을 당할 때 포를 쏜 거괴(巨魁)로써 당장 효수하여 경계할 수 있도록 지시를 내려 제멋대로 할 수 없도록 하여 주십시오.
④ 남상면의 김춘배(金春盃), 김영삼(金永三), 이치선(李治先), 고읍면의 손인태(孫仁太) 등 네 놈의 허물은 민인들이 체포하여 바친 자로 울면서 청하기를 원수를 갚게 해 달라고 하여 이놈들은 모두 접사(接司), 성찰(省察), 도포수(都砲手) 등으로 현지에서 타살하여 양민의 원한을 씻어 주었습니다.
이상의 기록에서 보듯이 장흥농민군은 대포 및 다량의 무장을 갖추고 있었고, 대포를 쏘았던 사람이 실명(實名)으로 출전한다. 때문에 <오하기문>에서 “장흥부의 군사 천여 명이 나가 싸웠으나 참패하고 돌아왔다.”고 하여 장흥부의 병력과 병영에서 총 300정과 병력 100명을 보내서도 웅치․회천에서 진압을 하지 못했던 것으로 사료된다.
대략 11월 27일쯤에는 웅치․회천․흥양 경계에서 농민군이 진을 치고 있었던 것은 사실로 보인다. 그런데 이 부대는 박기현의 <일사> 11월 28일조부터 30일조에 의하면 적어도 11월 29일까지는 장평면의 흑석장터나 사창으로 넘어가지 않고, 장흥․보성․고흥의 접경인 회천근방에서 머무르고 있었음이 확인된다.
3-4-3. 이인환의 흥양성 점령과 인부(印符)․병부(兵符) 탈취
장흥․보성․고흥의 접경지역인 현 보성군 회천지역에 진을 치고 있던 이인환이 지휘하는 장흥농민군은 장흥부의 병력과 병영의 병력, 보성 민군의 병력을 물리침이 드러났지만 적어도 11월 27일~11월 30일까지 4일 간은 소규모 접전 외에는 들러나지 않는다. 하지만 강력한 무장을 한 대규모의 농민군 병력이 단지 상대가 되지 않는 병력에 대한 소극적으로 방어만 하면서 3일 이상을 보내고 있었다고 하기에는 무언가 적절하지 못하다.
그렇다고 이 3일 동안 무언가 적극적인 활동을 했다고 드러난 자료가 없고, 단지 황현의 <오하기문>에 “11월 30일에는 보성경계에 까지 추격하였으나 농민군을 발견하지 못해 군대의 추격을 멈추고 돌아왔다.”는 것뿐이다. 그러나 여기서 바로 ‘귀신이 곡할 노릇’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왜 흥양(興陽: 고흥)현의 인부(印符)와 병부(兵符)가 장흥 농민군 수중에 있었는가 하는 실마리가 그것을 풀어 줄 수 있다고 본다.
흥양(興陽) 동학농민혁명사에 관한 그간의 기록 어디에고 인부와 병부를 장흥농민군에 탈취 당했다는 기록을 <우선봉일기> 외에는 찾을 수가 없다. 장흥부의 인부는 12월 5일 장흥부가 함락 당하면서 인부가 사라졌다는 것은 그 당시부터 곧바로 관에서도 파악하고 있었다. 때문에 관군은 인부를 찾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 장흥의 인부에 대해 최초의 정보를 탐색한 사람은 12월 24일 소모관 백낙중으로 웅치접주 김창환(金昌煥)과 남면접주 고응삼(高應三)을 취조하는 과정에서 장흥읍의 인부 위치가 단지 감옥에 있는 죄인에게 있다는 형세를 탐지해 내고, 이를 즉각 이두황에게 보고했다.
그런데 12월 28일 장흥뿐만 아니라 흥양의 인부까지도 장흥의 이인환이 탈취해갔다는 사실을 밝혀내고 찾도록 하여 단지 장흥과 흥양의 병부만을 찾아내고 인부는 찾지 못했지만 흥양의 병부는 곧바로 흥양으로 돌려 보내주었다. 농민군 김희도(金希道)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장흥과 흥양의 인부가 용계면(부산면) 용반 이정실(李正實)의 집에 숨겨져 있는 사실을 밝혀내고 12월 29일 장흥과 흥양의 인부를 찾아냈다. 곧바로 흥양의 인부는 흥양으로 돌려주었다. 흥양의 인부와 병부가 제 발로 걸어 장흥으로 오거나 흥양의 관리들이 농민군에게 손수 바쳤을 리 만무하기에 이 흥양의 인부와 병부가 어떻게 이인환에게 탈취 당하여 한 달 정도 장흥 농민군의 수중에 있게 되었는가는 그냥 넘어갈 수가 없는 문제이다.
흥양에 대한 동학농민혁명사는 <전남동학농민혁명사>에서 두 쪽 분량을 넘지 못하며, 1894~1895년에 10여 차례에 걸쳐 농민군이 쳐들어 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전남도지> 6권 201~202쪽에서 10줄밖에 나오지 않는다. 그리고 당시 진압기록인 <동학난기록> 상권 653~654쪽, 677~680쪽, 689쪽에 조금 나온다. <우선봉일기>에서는 흥양 농민군 토벌에 대한 상세한 보고가 흥양으로부터 늘 접수되어 기록되지만 어떻게 해서 흥양의 인부와 병부가 장흥농민군에게 탈취당하여 넘어오게 되었는가에 대한 기록이 없다. 단지 장흥과 흥양의 인부를 빼앗아 간 사람이 체포된 온갖 농민군을 취조하여 이인환이라는 조사결과만 기록되어 있다.
<전남동학농민혁명사>에서는 “1895년 음력 정월 초 농민군 지도자 유복만이 대거 1천여 명의 농민군을 인솔하고서 성밖의 동북쪽 두 개의 산에 진을 쳤다. 이에 수성군이 산 아래에 내달아 포위하려 하자, 농민군은 곧바로 해산하고 말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사료총서 15권에 영인된 <우선봉일기> 251쪽에는 “금월(12월) 4일 동도 천여 명이 본현 동북 2개 산을 나누어 점거하여 성을 넘보고 있는 형세여서 서문과 북문을 닫고 남문을 열어 포병을 인솔하고 산 아래로 군대를 나눠 울타리를 설치하자 토벌하려는 기미를 알고 해산하였다.”는 기록으로 앞의 기록과 거의 일치하지만 날짜가 틀리는데 <우선봉일기>의 날짜가 맞을 것이다. 음력으로 1월에는 흥양의 농민군 토벌이 이미 다 끝난 상태가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선봉일기>에서 흥양현이 어떻게 장흥의 농민군에게 인부와 병부를 빼앗겼다는 기록은 없다. 그렇지만 흥양의 인부와 병부가 이인환이 빼앗아 갔다는 소모관의 조사에 의해 사실로 밝혀졌다.
이 병부와 인부를 장흥에서 찾아낸 사람은 백미 2석의 포상을 받았으며, 흥양현에서는 병부와 인부를 잘 수령했다는 보고를 이두황에게 올린 기록으로 봐서는 인부와 병부를 장흥농민군에게 탈취당한 것은 사실이다. 장흥에서 흥양현의 인부와 병부를 찾아낸 이 불가사의한 사건으로 인해 곧 이인환의 흥양성 점령이 자연스럽게 도출될 수밖에 없다.
이 사건은 현재 흥양의 인부와 병부가 장흥의 이인환에게 넘어갔다는 결론에 의해 추론해 낼 수밖에 없지만 이인환의 대흥접을 주축으로 한 웅치접에 흥양접 등이 가세하여 어떠한 이유에서인지는 모르지만 농민군이 적어도 흥양성을 일시적으로 함락하여 관아의 인부와 병부를 빼앗았다. 이인환은 그곳에 오래 머무르지 않고 곧바로 장흥으로 돌아 왔는데, 이후 흥양의 농민군이 또다시 수성군에게 성을 내주었다는 가설 정도는 충분히 세울 수 있다.
이 부분은 향후 심층적인 연구가 필요하지만 결론은 동학농민혁명사에서 새롭게 등장한 확실한 역사적 사건이다. 때문에 <우선봉일기> 을미년 1월 29일조에 토벌을 끝내고 서울을 향해 귀대하던 이두황에게 군무아문이 “죽산에서 보발이 와서 군무아문 제사(題辭) 4개를 바쳤는데, 장흥․흥양의 인신(印信)을 조사하여 찾아낸 것에 대한 제사(題辭) 내에 적의 우두머리를 차례를 체포하고, 양 읍의 인부(印符)를 또한 조사하여 찾아낸 것은 극히 다행스럽고 기쁜 일이라고 운운했다.”라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본고는 장흥을 중심으로 한 전개이기 때문에 흥양의 동학농민혁명사를 심도 있게 다루지 못하지만 흥양은 8월부터 아전을 중심으로 한 여도(呂島), 녹도(鹿島), 발포(鉢浦), 사도진(蛇渡鎭) 등의 고흥관내에 주둔하는 수군들이 일부 지원 나와서 수성을 하고 있었을 것으로 사료된다. 따라서 흥양성은 그 동안 강력한 군사력에 의해 방어되었던 곳인데, 이인환의 대흥접에게 일시적으로 무너지고 만 것이다. 그러면 언제 이인환이 흥양성을 점령하여 인부를 빼앗아다는 것인가? 이는 위의 흥양농민군의 12월 4일 흥양성 진입 시도 때는 분명 아닐 것이다. 이날은 장흥에서 벽사역을 점령하는 날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인환이 흥양성 관아를 점령한 날은 장흥․보성․고흥 경계에 있을 때인 즉 11월 27일에서 30일 사이일 것이다.
필자가 추정하기로는 이인환이 흥양현을 점령하기 위해 도선을 한 장소는 회천에서 도선하기 보다는 현 보성군 득량면 해평리의 해창산 인근에 있는 보성관아 소속 해창의 관선 등을 이용하여 도선한 것으로 보인다. 12월 19일 부산수비대가 웅치의 구교철 부대를 해창산에서 토벌하는 기록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1월 14일(음력: 12월 19일) 어젯밤에 얻은 정보에 따라 중대(4분대 나머지를 이끌고 해창산으로 갔는데 동학도는 이미 아군이 오는 것을 알고 이날 밤 사방으로 흩어져 있지 않고, 겨우 11명의 잔당을 잡았다. 그러나 산상에서 바로 준공직전의 가옥 네 채를 발견하였다. 어쩌면 동학도가 모여 살기 위한 것으로, 이에 후일을 생각하여 모두 부숴버렸다.(출처: 二六新報; 동학당토벌공보)
해창산은 높지는 않지만 천혜의 요새와 같은 험준한 산으로 일본군이 “준공직전의 가옥 네 채를 발견”하였다는 것은 이미 이전에 상당히 공사를 해 놓았다는 뜻으로 이 준공직전의 가옥 네 채는 아마 이인환이 흥양현을 점령할 당시 혹 진지로 사용하기 위해 지은 집이 아닌가 의심된다.
흥양성을 한때 점령하여 관아의 인부와 병부를 빼앗은 이인환은 곧바로 회천․웅치로 돌아와 웅치면의 윗 강산리와 보성읍의 아래 강산리 사이의 재를 넘어 12월 1일 장평 사창으로 집결했다. 이 과정에서 흥양의 농민군 일부도 합류하였을 가능성도 있지만 천여 명의 흥양농민군은 12월 4일 즉 장흥의 농민군이 벽사역을 함락할 때, 흥양성 입성을 시도한 것으로 보아 그후 장흥성이 함락 당하자 대거 장흥으로 합류했을 것으로 보인다.
본고에서 강조하는 것은 이인환과 관련하여서 새롭게 제기하는 문제는 곧 11월 25일 대흥면에서 출정기포한 후, 이후 회진의 회령진성에 무혈 입성하여 여기서 다량의 무기와 군량을 확보한다. 이후 웅치의 구교철과 합세하여 회천면의 옛 회령진성에서 회진면의 회령진성에서 확보한 다량의 화력 좋은 무기와 사기충천한 농민군의 결연한 의지를 바탕으로 하여 장흥부 병력, 병영의 병력, 보성의 민병 등의 공습을 가볍게 물리쳤다.
또한 11월 27일서 30일 사이에 흥양성을 일시적으로 함락하여 인부와 병부를 빼앗아 돌아와 강산리의 재를 넘어 다시 이방언 장군이 이끌고 온 광주․화순․능주․금구 등의 부대와 장평면 사창에서 12월 1일 합류한다. 이어 장흥읍으로 진격하여 12월 3일 장흥부의 사면을 포위하는 진을 친 후, 벽사역․장녕성․강진현․병영성 전투를 모두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인데, 흥양현․벽사역․장녕성․강진현․병영성 전투 승리의 밑거름은 회진의 회령진성에서 확보한 다량의 무기라는 것이다.
이인환이 이러한 거물이기에 그의 부인도 벽사역에 체포당하였고, 그를 검거한 기형군관(譏詗軍官) 김범기(金範基)는 백미 3석을 포상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인환은 이두황의 지시로 1895년 1월 14일 밤에 보이지 않게 묶여 나주 일본군 대대로 압송당한 후 1895년 3월 3일 나주에서 장흥의 동지 최신동, 문공진, 이득춘과 함께 처형당한 것이다. 이러한 이인환 대접주야 말로 대접주를 넘어 삼국지로 말하면 이방언 장군이 유비라면 그는 청룡도를 휘두르는 관우나 재갈공명(諸葛孔明)이였던 것이다.
3-4. 농민군 수만명 장평면 사창에 집결
이인환 구교철의 농민군은 흥양현을 점령한 다음 회천‧웅치를 거처 강산리의 재를 넘어 12월 1일에는 장평면 사창으로 옮긴다. 이와 관련하여 문재국씨의 소장문서 <영회단>에서 구교철의 웅치면의 기포와 대흥면에서 이인환의 기포가 즉자적(卽自的)인 기포가 아니라 군사를 일으켜 장차 나주로 향하고, 강진으로 향하기로 이방언, 이인환, 구교철 등과는 오래전부터 생각해온 계획이었음을 이방언 장군의 입을 통해 말해주는 중요한 문서이다.
12월 1일 적도들이 보성으로부터와 사창등지에 주둔하였는데, 대접(大接)은 만여 명이고, 소접(小接)은 2~3천명으로 금구 거괴 김방서(金方瑞), 화순 괴수 김수근(金秀根), 능주 괴수 조종순(趙鍾純)이 함께 군대를 통솔하고 당도했다. 이때 이방언이 급하게 군대를 일으킨 [연유를] 말하기를 “장차 나주로 향하고, 강진으로 향하기로 이인환 구교철 등과 더불어 숙계(宿計: 오래전부터 생각해온 계획)를 이미 도모하였다.”고 하여 박후(朴侯: 박헌양)를 고통스럽게 했다. 구교철의 역명(逆命)과 이방언의 흉계로 인해 수성의 절개가 날로 더욱 증가하였고, 이로 인해 날마다 성을 경계하는 노고가 따랐지만 장졸들의 인화(仁化: 인덕의 감화)가 베풀어져, 읍촌의 백성들은 감격 분발하여 일전(一戰)을 펼쳐 충성을 받치려는 생각이 일어났다.
이상을 결론지어 정리하면 이인환과 구교철은 이방언 장군과 오래전부터 긴밀한 연락 속에 숙계(宿計)를 통해 꺼져가는 동학농민혁명의 불씨를 되살리고, 그 동안의 농민군의 무기 열세로 인한 패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무장력이 필요함을 실감하기 때문에 회진의 회령진을 점령하였던 것이다. 또한 이인환의 차분한 대흥면 기포를 돕기 위해 장흥부사의 이목을 집중시키기 위해 구교철은 11월 21일 미리 웅치면에서 수천 명을 모아 기포하여 장흥부사와 강진 병영군으로부터 한때는 곤욕을 치렀지만 이인환의 기포를 완벽하게 성공시키는데 큰 일조를 한다.
이인환이 대흥면에서 출정기포한 후 구교철의 웅치농민군과 합세하여 곧장 장흥부로 가지 않고 보성과 가까운 장흥의 외곽인 회천면에서 1차로 진을 친 것은 평가하자면 탁월한 전략이다. 보성군은 많은 군대가 없고, 보성군수 유원규(柳遠奎)는 1차기포에서부터 일본군과 경군이 진압을 하려 내려오기 전까지 동학농민군에 우호적이었다. 하지만 진압군이 내려오면서부터는 돌변하여 농민군 탄압과 진압에 솔선했지만 농민군에 협조했다는 죄목으로 경성까지 끌러가는 재판에서 무죄 방면된 전력이 있는 사람으로 이때까지는 농민군 진압에 소극적이었기 때문에 지리적인 전략상 회천면에서 웅치면과 보성군을 통해 장평면으로 넘나드는 것은 매우 쉬운 일이었다.
만약 이방언 장군이 나주․광주 전투 후 이끌고 온 금구의 김방서 부대, 화순의 김수근 부대, 능주의 조종순 부대 등과 합류하지 않고, 곧장 장흥부로 진로를 선택했다면 장흥부의 수성군과 병영의 연합부대와의 초반전부터 대충돌이 불가피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인환은 장흥의 외곽과 흥양현을 점령한 후 다시 김방서 등의 구원부대와 특히 북진했던 이방언 장군이 나주, 광주, 화순, 동복 등에서 패배한 잔류부대를 수습하여 내려오는 시기에 맞추어 12월 1일 장평면 사창에서 이들을 맞이하여 12월 3일에는 장흥읍 평화, 건산 후등, 벽사역 뒤 평원, 행원 일대에 진을 치고 본격적으로 장흥부 공격을 위해 사방을 포위하고 있었다.
12월 1일 장평면 사창에서 이방언 장군과 금구, 화순, 능주 등의 지원부대를 맞아들어 장흥동학농민군은 대부대를 이룬다. 이방언 장군의 총지휘 아래 이인환의 야전(野戰)지휘 체계를 갖추어 최후의 격전을 벌이게 될 장흥동학농민군은 12월 3일에는 장흥읍 건산, 평화 일대에 진출하여 진을 치고 본격적으로 장흥부 공격을 위해 사방을 포위하면서 일전(一戰)의 전운이 감돌고 있었다.
4. 장흥농민군이 대승리한 최후전투
4-1. 서론
12월 1일부터 장흥의 동학농민군은 지원부대의 합류로 대부대의 진영을 갖춘 후 지휘체계 및 치밀한 전략과 전술을 갖추어 12월 3일 남도의 웅도 장흥부를 사방에서 포위하여 12월 4일 벽사역, 12월 5일 장흥부, 12월 7일 강진현, 12월 10일 병영성 등을 차례로 점령했던 1주일간의 갑오년 당시의 정부의 진압기록이 너무나 빈약하다. 반면 구례의 황현, 장흥유생들의 기록 등은 비교적 풍부한 편이다. 관련기록 등을 종합하여 장흥농민군의 최후전투 승리를 요약하여 재구성하면 다음과 같다.
4-2. 사창에서 장흥읍으로 이동 중 충돌(12월 2일)
12월 1일 장평면 사창에서 농민군이 집결하여 12월 3일 장흥읍으로 입성했다는 기록은 위에서 봇물처럼 쏟아졌지만 그 사이인 12월 2일의 상황을 전하는 기록이 전혀 없었다. 박헌양 부사의 성격으로 보아 그냥 보고 넘어가지는 않을 것 같은데 기록이 없었으니, 농민군은 무탈하게 장흥읍으로 입성한 것으로 볼 수 있지만 그렇지는 않았다.
12월 2일 어느 곳인지는 확인되지 않지만 장흥부의 수성군과 출동했다는 실마리를 찾을 수 있는 기록이 <우선봉일기> 12월 19일조에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장흥에 거주하는 죄인(罪人) 백낙인(白樂寅) 백회인(白會寅)이 우선봉에게 올린 글에서 “소생의 부친은 장흥부 수성패장(守成牌將)직을 수행하다 금월 초 2일 동학도에게 살해되었습니다.” 등을 수록하여 달려와 빌며 복걸하였다. 답하기를 “글을 읽어보았다. 장차 사람의 아들로 거친 슬픔을 이기지 못하며, 이미 종군하여 복수를 원하니 금일 특별히 향도(鄕導)의 임무를 허락하니 공을 세우도록 하라.”고 했다.
수성패장(守成牌將)직을 수행했다는 것은 동학당 토벌업무를 수행했다는 것이고, 12월 2일 동학도에게 살해되었다는 것은 농민군이 사창에서 장흥읍으로 넘어올 때 수성패장이 이를 토벌 하다가 오히려 죽음을 당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패장(牌將)이란 본래 관아(官衙)나 일터의 일꾼을 거느리는 사람을 말하는 것으로 일명 패두(牌頭)라고도 한다. 때문에 백낙인(白樂寅) 백회인(白會寅)의 아버지는 휘하의 수성군을 거느리고 사창에서 장흥읍으로 넘어오는 농민군을 어느 곳에서 저지하거나 토벌하려다가 당연히 상대가 되지 않아 죽음을 면치 못한 것이고, 패장(牌將)이 죽었다면 혼자서 죽지 않고 그를 따랐던 수성군 또한 희생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12월 2일의 수성패장의 죽음 곧 패배로 인해 12월 3일 농민군이 장흥읍을 사방에서 에워싸고 있어도 <박후의적>이 전하는 “부사가 동문 위 누대에 올라가 적도들을 바라보니, 불꽃이 더욱 세어지기에 좌우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적들이 저러하는데도 일전에 병영에 군사를 청했지만 당도하지 않는 일은 어떻게 해볼 수가 없구나.’하면서 탄식이 일어남이 그치지 않았으며, 좌우 또한 분노를 느껴 눈물을 흐르지 않음이 없었다.”의 상황에 이른 것이다.
4-3. 장흥전투 출정전야(12월 3일)
이른바 우리 역사에 동학농민혁명 최후의 전투라 불리는 장흥전투는 어느 날 몇 사람에 의해 하루 이틀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농민군은 삼남도교장 이방언 장군을 총대장으로 대흥대접주 이인환을 야전지휘 사령관으로 삼아 장흥부의 동서남북을 에워 쌀 수 있게 크게 4개의 부대로 대진(大陣)을 꾸린다.
보부도 당당하게 대장기(隊長旗), 접기(接旗), 구국항왜(救國抗倭), 제폭구민(除暴救民), 보국안민(輔國安民), 광제창생(廣濟蒼生) 등의 깃발 등을 휘날리며 장흥읍으로 입성하는 도중 장흥부의 수성패장(守成牌將)의 제지를 가볍게 물리치고 12월 3일 장흥읍으로 입성한 기록을 살펴보자.
- <박후의적>: 적도의 무리가 봉기하여 혹 평화와 송정등(松亭磴)에 주둔하고, 혹 건산의 모정등(茅征嶝)에 주둔하고, 혹 벽사 뒤의 평원에 주둔하고, 혹 행원 앞의 평원 주둔하고 있었다. 이는 이른바 [장흥부의] 국면의 형세가 사방이 약하기 때문에 사면(四面)을 적이 쓰고 있는 것이다. 이때 부사가 동문 위 누대에 올라가 적도들을 바라보니, 불꽃이 더욱 세어지기에 좌우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적들이 저러하는데도 일전에 병영에 군사를 청했지만 당도하지 않는 일은 어떻게 해볼 수가 없구나.”하면서 탄식이 일어남이 그치지 않았으며, 좌우 또한 분노를 느껴 눈물을 흐르지 않음이 없었다.
- <영회단>: 많은 적들이 곧바로 성밖으로 이르렀다. 이방언은 평화 송정등(松亭磴)에 진을 치고, 이인환과 구교철은 건산 후등에 진을 치고, 김방서 등은 벽사 뒤 평원에 진을 치고, 이사경 등은 행원 앞 평원에 진을 치고 있었다. 그 세력이 바람과 천둥소리와 같아 [관군은] 장차 싸움에 져서 흩어져 달아날 것 같았다. 이때 박헌양 부사는 동문위에 올라 적의 형세를 바라보면서 심히 가득히 좌우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적의 세력이 이와 같아 저쪽 이웃(병영)에 구원을 청했는데 도달하지 않아 적을 무찔러 죽여 없앤 다음에 막아내기가 어렵게 됐구나. 맹세코 이 적들과 함께하지 않을 것이다.”고 하며, 하늘의 해를 머리에 이고 한 숨을 쉬며 탄식을 일으키니, 좌우에서도 분노를 느껴 눈물을 흐르지 않음이 없었다.
- <임태희추기>: 금구, 태인, 고부, 남원 등 열읍(列邑)에 흩어진 동학당을 소집하여 한 부대는 본부 건산(巾山)에 진을 치고, 한 부대는 평화(平化)에 진을 치고서 가까운 읍의 적도들이 또한 상응하여 본부 사방에서 결진을 하여 적병은 수 만 명이고, 관군의 대열은 오히려 2,000명 미만이었다.
12월 3일의 모습을 가장 생생하게 전한 <영회단>의 기록처럼 이방언 장군은 평화 송정등(松亭磴)에 진을 치고, 이인환과 구교철은 건산 후등에 진을 치고, 김방서 등은 벽사 뒤 평원에 진을 치고, 이사경 등은 행원 앞 평원에 진을 쳐 장흥읍을 사면(四面)으로 포위하고 있었다. 이때 양측의 형세는 농민군은 벌써 수 만 명이었고, 관군의 대열은 2,000명 미만이라고 <임태희추기>는 전한다.
동문 위 누대에 올라 적도들을 바라보는 부사의 심정이 <박후의적>과 <영회단>에 너무나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사방에서 피어내는 농민군의 불꽃만으로도 수성군의 입장에서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을 수밖에 없었고, 부사의 한 숨과 탄식은 좌우에서 눈물을 흐르게 했다. 장흥농민군은 장흥전투의 전야를 맞기까지 11월 21일부터 13일간을 수 백리를 행군하면서 풍찬노숙(風餐露宿)을 하였으니, 일전의 결전 의지가 수성군과는 정반대로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4-4. 벽사역 함락(12월 4일)
2,000여명 이상의 관원, 역리, 역졸, 역노비 등이 있는 벽사역이라지만 지난 3월 이용태 부사의 고부 안핵사 만행사건에 800여명의 역졸들이 출정하여 지은 죄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두려움에 떨 수밖에 없었다. 장흥부처럼 장녕성(長寧城)이라는 성곽이 없는 벽사역으로서는 의지할 곳이 없어 농민군이 벽사역으로 쳐들어오기도 전에 벽사역을 비워놓고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이때 벽사역 찰방 김일원이 벽사역을 방어하는 모습은 문헌에 전하지 않지만 김일원이 병영과 나주로 가서 구원을 청하는 모습이 <순무선봉진등록> 12월 8일조와 9일조에 거의 비슷하게 다음과 같이 전한다.
행벽사도찰방(行碧沙道察訪)이 보고합니다. 동비 1,000여 명이 장흥(長興) 사창 등지에 모였다가 이달 초 4일 진시(辰時: 오전7~9시) 경에 이르러 곧바로 벽사역(碧沙驛)으로 침입하여 관아와 여염집에 모두 불을 지르고 장흥부(長興府)로 향하였습니다. 거주하는 백성들은 흩어지고 우관(郵官)의 힘으로는 막을 계책이 없어, 어쩔 수 없이 찰방이 병영(兵營)으로 말을 달려가 대면하여 [동학농민군을] 토벌할 수 있는 방법을 사유를 갖추어 요청하였습니다.
그랬더니 병사(兵使) 사또가 분부한 내용에 “비류가 영문(營門) 가까이까지 닥쳤음에도 방어하는 군사를 진영에서 풀어내기가 매우 어려우니 지금 이러한 사유를 가지고 나주 초토영에 가서 고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초토영에 가서 역시 답답함을 고하니 분부하는 내용에 “나주의 군대를 일으킬 계획이니 역시 이런 사유를 가지고 주력 부대로 가서 여쭈어라.”고 하셨습니다. 이에 찰방인 제가 이미 면대하여 여쭈었거니와 비류가 장흥성(長興城)으로 침입하여 점거하고 부사를 핍박하니 그의 목숨이 조석에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동학농민군이] 함부로 날뛰며 겁탈하고 노략질하여 역에 사는 백성들이 도망가고 사방으로 흩어져서 400여 호가 텅 비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어찌 한심하지 않겠습니까?
만약 장군 월하(鉞下)의 군병이 아니라면 과감하게 [동학농민군을] 토벌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답답하고 절박한 사정을 외람되이 보고하니, 특별히 처분을 내려주셔서 경군 몇 100명을 출동하여 읍과 역의 놀라서 흩어진 백성들로 하여금 전처럼 안도하게 해 주십시오.
답변에 이러한 소식을 들으니 매우 경악스러워 잠시도 머뭇거릴 수가 없다. 마땅히 각처로 파견한 휘하의 군대를 즉시 수습하여 출동하겠다.
<박후의적>과 <영회단>에서 4일 벽사역이 함락된 모습을 다음과 같이 전한다.
<박후의적>: 적도들이 먼저 벽사역의 공해(公廨)와 민가의 가옥(廬舍)에 일부러 불을 질려 없앤 후 들어왔다. 재와 불탄 끄트러기가 성에 가득했다. 모든 사람들이 이 광경을 지켜보고, 얼굴빛에 혼백이 달아남이 없지 않았다.
<영회단>: 적도들이 방화를 하고 대포를 쏘아 벽사역의 공해(公廨)와 민가의 가옥(民舍)에 불을 지르고 들어왔다. 재와 불탄 끄트러기와 연기와 불덩이가 하늘과 성에 가득 넘쳐났다. 모든 사람들의 얼굴빛에 혼백이 달아남이 없지 않았다.
장흥읍 사방을 수 만 여명 이상의 농민군이 포위하고 있었지만 4일 새벽 벽사역을 치기 위해 동원된 농민군은 고작 1,000여명으로 그 부대가 어느 부대인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아마 <영회단>에서 “이인환과 구교철은 건산 후등에 진을 치고, 김방서 등은 벽사 뒤 평원에 진을 치고”로 보아 이 부대에서 일부가 출정에 나선 것으로 보인다.
12월 4일 진시(辰時: 오전 7시~9시) 경에 그동안 기세 높았던 벽사역이 무너지는 모습은 참으로 싱겁다. <박후의적>은 “적도들이 먼저 벽사역의 공해(公廨)와 민가의 가옥(廬舍)에 일부러 불을 질려 없앤 후 들어왔다. 재와 불탄 끄트러기가 성에 가득했다. 모든 사람들이 이 광경을 지켜보고, 얼굴빛에 혼백이 달아남이 없지 않았다.”고 전한다.
<영회단>은 “적도들이 방화를 하고 대포를 쏘아 벽사역의 공해(公廨)와 민가의 가옥(民舍)에 불을 지르고 들어왔다. 재와 불탄 끄트러기와 연기와 불덩이가 하늘과 성에 가득 넘쳐났다. 모든 사람들의 얼굴빛에 혼백이 달아남이 없지 않았다.”로 전한다.
또한 <우선봉일기> 12월 20일조에서는 “벽사역은 절반 이상이 불에 타버렸다. 벽사 찰방 김일원(金日遠)이 현지에서 아뢰기를 찰방의 아들은 16살인데, 적도에게 해침을 당했다고 한다. 벽사역에서 머물러 묵으려고 했으나, 불타고 남은 집들이 협소하고 음식물을 조달하는 것이 실제로 어려웠다.”에서 보듯 <순무선봉진등록>에서 김일원이 말한 “관아와 여염집에 모두 불을 지르고”는 사실이 과장되었다.
농민군은 힘들이지 않고, 벽사역을 단숨에 쓰러버려 지난 3월 벽사역졸 800여명의 고부만행에서부터 농민군이 장흥읍으로 들어오기 전까지의 벽사역의 농민군 탄압을 유감없이 응징한 것이다.
농민군과 싸워보지도 못하고 벽사역을 일방적으로 내준 벽사찰방(碧沙察訪) 김일원은 12월 3일 농민군이 장흥읍의 사방을 포위하면서 진을 치고 있을 때 이미 놀라 그는 벽사역을 버려두고 구차하게 곧장 장녕성으로 피신을 했다. <박후의적>은 “이때 벽사역의 찰방 김일원도 역시 와서 성을 지키고 있었는데, 병영으로 구원을 요청하려 간다면서 아침 일찍 성문을 나갔기 때문에 자신은 구차하게 화를 면함을 얻었다 (중략) 찰방의 처자들도 역시 몸이 장흥부의 성안에 있었다.”라고 전하다. <영회단>은 “벽사 찰방 김일원도 역시 같은 시간에 수성을 하면서 병영에 구원병을 청하는 일로 아침 일찍 성을 벗어나 나가면서 그 처자를 성 안에 두었다.”라고 전한다.
이렇게 구차하게 4일 아침 일찍 장녕성을 빠져나간 김일원은 병영의 병사 나주의 초토사를 면대하고 이어서 토벌부대를 찾아가 구원을 요청한 후 그는 소모관 백낙중과 함께 조일(朝日)연합군의 장흥토벌 길을 안내하는 역할을 맡아 장흥으로 토벌군을 안내했다는 공로로 후에 “겸임행벽사도 찰방 김후일원 청사(請師)불망비”라는 비(碑)를 얻어 지금은 영회당 위편에 쓸쓸히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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