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은 무엇으로 사는가?
유심 26호 글 윤제학 2006.9.10 / 유태근
<전문>
http://yousim.co.kr/news/quickViewArticleView.html?idxno=205
이 글을 읽으니
애경백화점 문화센터 시창작 교실과
선생님께서 수업할 때 발표한 작품이 <유심>에 나왔다며 일일이 살펴주시고
취재한 작가가 시인과 헤어진 다음 바라본 애경백화점이
더 높아보였다는 이야기도 소개해주시며
시인으로서 자긍심을 가지라고 말씀해주시던 일이 생각납니다.
시인은 무엇으로 사는가?
정공채 시인 |
7월 19일 12시 10분. 서울시 지하철 1호선 구로역을 벗어나 애경백화점으로 뛰었다. 70년대 분위기가 물씬한 전철역에서 최신식 백화점으로 들어서는 데는 1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다른 두 시간의 기묘한 공존. '문학의 종말'이 유행가 가사만큼 흔하게 입 밖을 떠도는 세상에, 시인을 만나러 백화점으로 가는 야릇한 심사가 이질감의 부피를 키웠는지도 모르겠다.
정공채 시인을 애경백화점 문화센터 시창작 교실에서 만났다. 인천에 살고 있는 시인은 먼 길을 찾아오는 수고를 들어주겠다며 이곳으로 약속 장소를 정했다. 시인이 7년째 시창작 강의를 하고 있는 곳이다.
백화점 진열창을 가로질러 문화센터로 향하는 동안, 몇 가지 궁금증이 머릿속을 헤집었다. 어떻게 요즘 같은 세상에도 백화점 문화센터에 '시창작' 강좌가 건재할 수 있을까? 배우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신춘문예 지망생들? 젊은 시절의 문학 열병이 덧난 사람들? 아니면 '먹고 사는 일'로부터 해방된 사람들?
문화센터 로비에서 시인을 기다렸다. 한번도 뵌 적이 없지만 단박에 알아볼 자신이 있었다. 그건 시인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우리는 금방 서로를 알아봤고 곧장 강의실로 들어갔다. 여섯 명의 수강생들이 자리를 하고 있었다.(두 명이 조금 늦게 와서 곧 8명이 됐음.) 30대에서 60대까지 연령층은 다양했다.
뜻밖에도 남자 분도 한 명 있었다. 60대 부부가 함께 공부를 하고 있었다. 보통 10명 안팎이 모인다고 했다. 대부분 문예지를 통해 등단한 분들로 몇 년째 계속 공부를 한다고 했다. 일종의 동인 비슷한 강좌인 셈이다. 주식투자, 요가, 다이어트 같은 강좌와는 다른 형태였다. '돈 안 되는(?)' 시창작 교실이 건재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자판기 커피와 수강생들의 자작시 복사본을 한 부씩 돌리고 간단히 인사를 나눈 다음, 낭송과 시평에 들어갔다. 강의는, 시를 쓴 사람이 낭송을 한 다음 정공채 시인이 평을 하는 형식으로 진행됐다. 그 과정에서 시학 이론과 국내외의 시인들이 거명됐다. 릴케가 호출되었고, 모더니즘과 쉬르리얼리즘, 이미지즘과 알레고리, 메타포가 거론되었다. 뜨거운 열정과 불꽃 튀는 논쟁은 없었지만 진지했다.
정공채 시인은 강의 도중 손수 화이트보드에 쓸 펜을 가지러 밖으로 나갔다. 학생(?)들이 가져다 드리겠다고 만류했지만 극구 사양했다. 이들의 관계가 지속되는 이유를 알 듯했다. 시인의 목소리는 일흔셋의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정정했다. 그리고 자상했다. 시평을 하면서도 부정적 어휘는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이건 이래서 안 좋다'가 아니라 '이렇게 하면 더 좋지 않을까' 하는 식이었다. 이들 사이에 흐르는 신뢰의 결은 단정해 보였다. 그 관계의 밑변은 '시 사랑'으로 충만했다. 나로선 이들 작품의 문학적 질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말할 능력도 자격도 없다. 그 사랑의 일단을 그냥 옮겨 본다. 전문을 옮기지 못하는 결례는 용서해 주리라 믿는다.
창가에 빗소리 그치자/ 왼종일/ 수군거리는 텔레비전// (중략) 빗물에 쓸려 주인 잃은/ 집 한 채/ 다리 밑에서 울고 있다. (오옥수, <실종> 부분)
빗소리에 창문을 닫는다// (중략) 먹어도 먹어도 마냥 헛헛하다/ 비 오는 날의 점심은 (신현순, <비오는 날의 점심> 부분)
시간 지난 막차를 기다리는 한 사람/ 시계만 보고 또 보고// (중략) 누구를 기다리나/ 어디로 떠나려나/ 젓은 어둠/ 처진 어깨에 내린다 (이문자, <비오는 정류장> 부분)
이밖에 김나연, 김은자, 민문자, 석경자, 이덕영 님의 시는 아쉽게도 오후 1시 50분까지 강의실의 비워 줘야 하는 관계로 들어 볼 수 없었다. 늦은 점심을 먹으러 식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정공채 시인의 이력은 특이하다. 58년, 현대문학에 시 추천이 완료되어 문단에 나온 후 이듬해 제5회 현대문학상을 받았다. 그 다음 해인 1960년, 이승만의 3 15부정 선거에 항거하는 마산 시민 시위 중 최루탄을 맞고 숨진 김주열 학생이 4월 11일 마산 앞바다에서 시체로 떠오른다.
이 사건은 곧 4 19의 도화선이 됐는데, 정공채 시인은 김주열의 죽음을 보고 격분하여 '하늘이여'라는 시를 써서 당시 작가 이병주 씨가 편집국장으로 재직하던 국제신보(현 국제신문)으로 간다. 이병주 씨는 사설란을 비우고 이 시를 싣는다. "지금 하늘이여/ 총을 맞은 이 땅의 봄이 마산에서/ 마산에서 핏빛으로 안타깝게 타고 있습니다//(첫 연) 아아/ 전쟁에서도 죽음으로 조국을 지킨/ 용감한 이 땅 백성들을 불쌍히 여기소서(마지막 연)" 이 시는 현재 마산시의 3 15 성역공원 안에 시비로 새겨져 있다.
이어서 1963년에는 '현대문학'지에 장시 '미8군의 차'를 발표한다. 자본주의에 유린되는 정신의 문제를 다룬 이 시는 일본에서 '제3세계 문학' 작품으로 주목을 받는다. 덕분에 시인은 반미주의자로 몰려 중앙정부부에 끌려가 한동안 고초를 겪었다. 시인다운 행보였다. 그러나 시인은 등단한 지 20년이 넘어서야 첫 시집을 낸다. 제목은 '정공채 시집 있습니까'. 약간의 자조와 그만큼의 오기가 담긴 제목이라 하겠다.
그런데 정작 시인을 유명하게 한 것은 1986년에 쓴 역사소설 '초한지'(전3권)가 베스트셀러가 되면서다. 하지만 이런 이력을 두고 특이하다고 한 것은 아니다. 시인은 부산일보와 민족일보 기자를 지냈다. 문화방송의 공채 PD 1기로 방송계에 입문하기도 했다. 이후 조선맥주 홍보부장 자리에 앉지만 길지는 않았다. 자유로운 몸으로 시(詩)를 쓰고 싶기 때문이었다는 것이 지인들의 전언이다. 시인의 문단 후배인 강준용 씨의 말 대로 '정공채 시인은 시를 쓰지 않았다면 엄청난 부와 지위를 누렸을 것'이다. 그런데 왜 가난한 시인의 길을 택했을까?
강의실에서 식당으로 자리를 옮긴 일행은 가족과 같았다. 실제로 시로 맺은 또 다른 가족이었다. 그들 모두는 '시마(詩魔)' 들린 사람들이었다. 그렇다. 두보나 이백, 릴케나 미당 같은 사람들만 시마에 들리라는 법은 없다.
밥상 위에는 자연스럽게 안동 소주가 올라왔다. 인터뷰의 격식 같은 건 밥상 밑으로 물러났다. 시인은 불콰해진 얼굴로 소년처럼 말했다.
"나에게는 시가 애인입니다. 시가 나를 지키는 힘이지요."
시인은 특유의 호방한 목소리로 말했지만 슬퍼보였다. 시인에겐 슬픔도 힘인 듯했다.
"주지시를 쓴다 할지라도 시인에겐 페이소스가 있어야 해요. 엘리어트를 보세요."
시인은 T.S. 엘리엇의 '황무지' 첫 4행을 노래하듯 읊조렸다.
4월은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추억과 욕망을 뒤섞고
잠든 뿌리를 봄비로 뒤흔든다.
T.S. 엘리엇에게 그랬듯이, 모든 시인에게 세상은 늘 암울하지 않았을까? 전쟁이 그들로 하여금 평화를 노래하게 했을 것이고, 세상의 아귀다툼이 또한 그들로 하여금 자연을 노래하게 하지 않았을까? 어쩌면 시인은 세상에 대한 면역 기능이 가장 약한 사람이고 또한 가장 강한 사람들인지도 모른다. 개별자로서 이러한 시인이 과연 몇 명이나 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시와 시인이라는 존재가 그렇다는 얘기다.
시인이라고 해서 가난이 훈장인 시대는 아니다. 그렇다고 '한낱 남루에 지나지 않는다'고 일소에 부칠 수 있는 때도 아니다. 생활고가 '시의 샘마저 고갈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문예진흥원 같은 곳에서는 넉넉하지 못한 원로 문인들에게 금전적 지원을 하기도 한다.
"얼마 전에 원로 문인 지원 프로그램의 수혜 대상자로 선정된 적이 있어요. 안 받았어요. 자존심 같은 것 때문이 아니라 나보다 더 어려운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이에요. 누구라고 밝힐 수는 없지만, 딱한 후배한테 주라고 그랬어요. 오래 전에 '전설의 고향'이라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의 대본을 쓴 적이 있어요. 그것도 호구책이라고 부러워하는 후배가 있더라고요. 한때는 이름만 들으면 다 아는 작가였어요. 그래서 그 친구한테 물려주고 말았죠."
술김에 하는 무용담 같은 얘기로 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스스로에 대한 기품을 잃지 않기 위해 쓰는 안간힘으로 비쳤다. 그것은 당신의 시작(詩作) 태도와도 관련이 있었다.
"시인은 시로 말해야 합니다. 시가 수단시되는 것을 원치 않아요. 시류와 인기에 영합하는 건 체질에 맞지 않죠. 제가 좋아하는 말 중의 하나가 관류(貫流)예요. 시(詩) 외적인 일로 시가 과대평가되는 일은 옳지 않다고 봐요."
정공채 시인은 분명한 목적시를 쓰기도 했다. 앞서 말한 대로 1960년 4월 14일 국제신문에 발표한 '하늘이시여'는 김주열의 죽음에 대한 비분을 담은 시로, 4 19관련 최초의 항거시라고 알려져 있다. 미국에 대한 거부정서도 숨기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이른 바 민중시인의 계열에 몸을 세우지 않았다. 순수니 참여니 하는 이분법적 문제 때문만은 아닌 듯했다.
"시인은 유니크(독자적)해야 해요. 작품 이외의 행보로 이름만 드높은 시인을 보면 안타까워요. 외화(外華)를 원한 적은 없었어요."
시인은 이 얘기 끝에, 시류만 쫒는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연작시를 쓰고 있다며 한 구절을 소개했다.
"해바라기야/ 이제는 집으로 들자/ 그렇게 한 여름 빛났으면/ 이제는/ 집으로 들 줄도 알자"
이렇게 노래하는 시인에게는 어느 때가 '빛나는 한 여름'이었을까?
"한 10여 년 전 인천으로 이사 오기 전 수유리에 산 적이 있었어요. 그 때가 가장 건강하고 행복한 시절이었어요. 현대시인협회 회장이었던 이원섭 선생님과 한양대 윤재근 교수, 정무수 시인과 함께 매주 북한산을 오르곤 했어요. 나중에 문인산악회의 모태가 됐었는데…. 인천으로 온 이후로는 단절이 됐어요."
설렁탕 한 그릇에 소주 한 병이면 마냥 행복했던 그 시절이 소주잔에 고인 걸까. 단숨에 털어 넣는다. 끝내 밥공기의 뚜껑은 열리지 않았다.
얘기는 밤을 새도 끝날 것 같지가 않았다. 슬그머니 특별히 가까이 지내는 지인은 누구인지를 물었다. 직업 근성이 발동한 것이다. 다음 번에 만날 분을 소개 받아야 했으니까. 이원섭 선생과의 인연, 시인과 평론가로서 윤재근 교수와 나눈 우정, 이어령 선생과 가깝게 지내던 젊은 시절로 종횡하다가, 문득 화제가 태평양을 건넜다. 몇년 전 김남조 시인과 함께 재미한국시인협회의 초청으로 L.A.에서 강연을 한 적이 있는데, 그 때 만난 한 사람과는 요즘도 연락을 주고받는다 했다. 귓속이 환해졌다. 사실 나는 정공채 시인을 만난 다음날부터 10일 간 미국 여행을 계획하고 있었다. 미국에 사는 한 어른이 바람이나 쐬고 가라며 비행기 표를 보내준 터였다. 나는 노골적으로 내심을 털어놓고 만나 뵐 수 있기를 청했다.
"김문희 씨라고 김남조 시인의 애제자예요. 시를 쓰는 사람인데 교육 사업으로도 성공을 했어요. 많은 한국 문인들이 그분과 인연으로 미국에서 강연과 여행을 하곤 했어요. 재미 한국 문인들과 모국 문인들 간의 가교 역할을 하는 분인데, 참으로 마음결이 곱고 깊은 분이에요. 사무치게 모국어를 사랑하는 사람이지요."
아이쿠, 또 시인? 벌써 몇 번짼데, 아무리 인간관계의 친소가 직업이나 성향에 따라 결정된다고 하지만 이건 너무한 게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어쩔 것인가. 애당초 이 일에서 나는 만나야 할 사람을 선택할 자격이 없는 것으로 시작하지 않았던가.
한 걱정을 든 나는 내일 10시간 넘게 비행기를 타야 한다는 것도 잠시 잊기로 하고 소주잔을 비우는 일에 열중했다. 정공채 시인의 얼굴도 더 밝아져 있었다.
과연 시인은 무엇으로 사는가?
"시인은 시 정신으로 삽니다. 심혼(心魂)! 사실 난 시 쓰기가 얼마나 싫은지 몰라요. 그렇게 힘이 들어요. 한 편 쓰는데 3~4년이 걸리는 때도 있어요. 마음에 안 차서 애만 태우는 거죠. 그렇지만 하룻밤에 3~4편을 쓸 때도 있어요. 이렇게 양극을 달리는 게 문학 아닐까요? 만약 내게 문학이 없었다면 '타락'했을 거예요. 신문사를 그만 두고 '학원사'에서 일을 할 때였어요. 당시 '소년세계'에는 이원수, '새벗'에는 강소천 같은 분들이 버티고 있을 때였지요. 그 무렵, 수없이 신춘문예에 떨어졌죠. 그러면서도 나는 '시인'이 될 거라고 굳게 믿었어요."
시인과 헤어진 다음 바라본 애경백화점은 더 높아보였다. 시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어 보이는 백화점의 그림자가 시인의 뒷모습을 지운다.
갈증을 느끼는 물고기를 본 적이 있다. 수면 위로 입을 내밀고 뻐끔거리는 물고기를. 하지만 그 물고기는 명이 다하는 날까지 물고기로 살았을 것이다.
문학에 '덜미' 잡힌 삶의 건강성 _
김문희(시인/ LA 퍼스트 프레스쿨 교장)
7월 27일 미국 LA 코리아 타운 갤러리아 백화점. 과연 이곳이 미국인가 하는 착각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간간히 백인과 히스패닉계의 종업원들이 눈에 띌 뿐 거의 한국인 일색이다. 이곳에 오는 미국인들에게는 한국말로 욕을 해도 다 알아듣는다는 말이 농담은 아닌 듯했다.
로비에 전시된 현대자동차의 날씬한 모습은 '마음 놓고 한국말을 해도 된다'는 사인으로 보였다. 아주 편한 마음으로 약속 장소인 커피숍을 향해 에스컬레이터에 몸을 싣는다. 커피숍 창에 붙은 '팥빙수'라는 세 글자가 또한 나를 반긴다.
그린 듯이 앉아 있던 김문희 시인이 성큼 다가서는 나를 보고 자리에서 일어선다.
"저…, 김문희 선생님?"
"아, 네. 안녕하세요."
더 이상 의례적인 인사는 필요 없었다. 그럴 시간도 없었다. 빨리 많은 얘기를 듣고 싶었다. 그냥 우리말로 떠들기만 해도 즐거울 판국에 문학 얘기라니. 하지만 그 얘기에 앞서 김문희 시인의 근작시 한 편을 읽어 드리고자 한다. 고국을 떠나 살면서도 한국인으로서 정체성을 잃지 않고 산다는 것이, 그것도 모국어에 윤기를 더하며 산다는 것이 어떤 일인지를 알게 해 주기 때문이다.
타향에선 봄비도 인색했다.
이 봄이 다 가도록 잠시 성글게 뿌리는 봄비
그 틈에 사막에서 겨우 몸을 적신 파피꽃들이 다투어 핀다.
이른 일요일 아침, 드라이브로 나와 본
사막의 들녘은 울어서 후련한 마음처럼 젖은 능선들이 싱그럽다.
인색한 봄비 속에
아침 햇빛처럼 웃음으로 피어나는 파피꽃들
사는 일이 모두
사막을 건너는 길인 걸 아는 사람들은
능선을 자욱히 덮은 파피꽃들을
기쁨으로만 보지 못한다.
이렇게 잠시 꽃피기 위해
오랜 갈증을 넘어온 세월
이 기쁨들 환상처럼 지고 나면
또 목마름으로 살아야 하겠지
하여 천지에 가득한 파피꽃 속에서도
이다지 쓸쓸한 것인가.
봄비 지난 사막 언덕에서
벌써 목이 마른 사람들이 있다.
봄비도 인색한 타향의
눈물 비 한 자락 스쳐간 언덕에 서서
어쩌리
젖어서 피는 자욱한 슬픔도 있다.
<사막의 파피꽃들> 전문(파피꽃poppy: 양귀비꽃으로 미국 캘리포니아 사막 지역에서 드물게 비가 올 때 종족 번식을 위해 한꺼번에 피어난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미국 교포 사회에선 2, 3세들에게 한국어를 적극 가르치지 않았다고 한다. 어쩌면 그것은 하루빨리 벗어버려야 할 굴레 같은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피부색도 다른데 말까지 서툴러서야 어떻게 현지에 뿌리를 내릴 수 있었겠는가. 한국말을 안 쓰게 하는 일에 부모로선 강박적으로 매달렸을 법도 하다. 이런 상황에서 김문희 시인은 미주문인협회 창립을 주도했고, 한국 아이들을 위한 한글학교를 열었다.
"83년에 LA지역에서 미주문인협회, 크리스천문인협회 창립 멤버로 참가했어요. 84년에 미당 선생님 시화전 산파역을 했고요. 그리고 88년부터 해변문학회를 개최해서 올해 19회 째를 맞기까지 한 번도 빼 놓지 않고 해요. 벤추라(LA에서 한 시간 정도 떨어진 곳) 해변의 호텔에서 하는데, 처음에는 회원들이 새벽같이 일어나 직접 음식 준비하고 그랬어요. 먹고 살기도 힘든데 웬 호텔을 빌려서 난리냐고 하는 소리도 있었죠. 정신력으로 버텼어요.
90년도에는 조병화 선생님을 비롯하여 154명의 한국 문인들과 현지에서 200여 명 정도가 모여 세미나를 열었어요. 이렇게 오늘에 이르렀는데 올해는 (이틀 뒤) 시에 허영만, 소설에 유현종, 수필에 유혜자, 평론에 이명재 선생님을 모시고 장르별로 강의와 토론 시간을 가질 겁니다. 그동안 이곳을 다녀간 한국의 중견 원로 문인들을 합치면 200여 분이 넘어요. 김남조, 이어령, 오세영, 이근배, 정진규, 유안진, 문정희, 나태주 선생님 같은 분들이 다 다녀가셨죠. 이런 분들을 모심으로써 이름만 듣던 분들을 직접 만나고 하니까, 현지 문인들도 더 분발하고 즐거이 모이기 시작했어요. 해변문학회를 모태로 많은 문학 동호회가 생겼고 등단한 사람들도 여럿 나왔어요."
이곳 문인들의 활동 방식은 한국의 직업적 문인들과는 다르다. 고료를 주면서 청탁을 하는 매체도 없다. 대부분 자기 돈을 써 가면서 활동을 한다. 그렇다면 오로지 자기만족을 위한 행위일 뿐일까?
"92년 LA 흑인 폭동으로 실의에 빠져 있을 때였어요. 준비하던 학술대회를 취소하고 당시 문화부 장관이던 이어령 선생님과 인제대학교 김열규 교수님을 초청하여 강연회를 열었어요. 이런 때일수록 한국인의 뿌리의식을 고취해야겠다는 생각에서였죠. 엄청난 반응을 보였죠. 모금 파티를 겸했는데 그날 7만 5천불을 모금했어요."
한글학교도 이런 취지에서 시작했을 것이다.
"18년 간 한글학교 교장을 했어요. 한글이라고는 한 마디도 못하고 한 자도 쓸 줄 모르던 아이들이 엄마 아빠한테 편지를 쓰고 할 때, 보람 이상이죠. 한 1천명쯤 배출했는데, 결혼한 아이들도 있어요. 이 아이들 중에는 2중 3중 언어를 구사하는 아이들도 많아요. 가족 언어로 한국어를 사용하는 게 경쟁력이 있다는 것을 이제는 대부분 인식해요."
김문희 시인은 86년에 미국으로 유학을 갔다. 산호세 주립대학에서 아동교육학을 전공한 후 곧 어린이교육 사업을 시작했다. 대학 전공도 불문학이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길을 걷게 된 걸까.
"문학이 나를 구원했어요. 너무 힘들 때마다 문학이 나를 새로이 해 줬어요. 한번 문학에 덜미를 잡히면, 그것을 위해서도 다른 일에 충실할 수밖에 없어요."
그 구원의 형태는 어떤 것일까?
"최희섭 선수가 LA다저스로 왔을 때 한글 신문에서 제 시의 한 부분을 인용했더군요.
'허리 잘라 떠나온 이민/ 그 험한 칼질에서도/ 열매가 열리는 것을…."
김문희 시인은 숙명여대 재학 시절 문학에 덜미를 잡혔다. 불문학과 학생이 국문학과의 김남조 선생의 수업을 들었다. 다방 빌려서 하는 시화전에도 열심이었다. 그때부터 김남조 선생의 애제자가 되었다. 87년에는 《시문학》으로 등단을 했다. 시집도 세 권이나 냈다. 98년에 낸 시집 《깊어지는 마음》(문학세계사)을 손 가는 대로 펴 본다. 대부분 시편들이 화장기 없이 아름답다.
아침 늦잠에 빠져 있다.
혼곤한 게으름
아침새는 벌써 입을 다물고
햇볕은 나무 뿌리까지 내려와 있다
〈요즘〉 부분
미국 교포 사회 문단의 작품 유통 경로는 한국과 많이 다르다. 작품의 우열과 관계없이 돈이 되지도 않는다. 문학이 출판 산업에 종속되기 전 단계에서 머물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그 대신 자유롭다. 순수하다. 그렇다고 상업적 작품 활동이 순수하지 않다는 말은 절대 아니다. 경우가 다르다는 얘기다. 한편으론 부럽기도 하다. 그들의 문학적 관심사는 어떤 것들일까?
"초창기에는 망향가 위주였어요. 하지만 지금은 달라요. 현지의 삶에 기반을 둔 작품을 만들자는 공감대가 형성돼 있어요. 현재 우리의 터전 위에 한국 정신의 뿌리를 내리되, 한국의 시단을 (풍토나 경향을) 답습하지는 말자는 것이지요."
이렇게 하여 한국 문학의 외연은 넓어진다. 이런 작품을 지향한다면 현지 미국 시인들과 교류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
"미국 시인들도 활발하지 못해요. 시인이면서 교수나 돼야지, 아니면 책도 못 내요. 시드니 셀든 같은 유명 작가나 저택에 살죠. 시인은 그러지 못하죠. 미국 시인들의 모임에 가 보면 한 20편 정도 모아서 시집이라고 묶어내고 그래요. 하지만 대단히 진지하죠. 하루 종일 낭송하고 토론하고. 포에틱 댄싱이라고, 시를 무용으로 풀어내는 퍼포먼스 같은 것도 하죠. 캘리포니아 시인 협회의 정기 모임에 가곤 했는데, 우리 시를 보면 감성이 대단히 깊다고 해요. 물론 처음부터 영역을 해서 들려주지는 않죠. 시의 내용과 시어의 의미를 말로 해 주면 즉석에서 영역을 해서 리딩을 해요. 역시 달라요. 시는 시인이 번역을 하는 게 가장 좋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내년에 오하이오주에서 세계시인대회를 하는데, 다음 시집은 영한 대역으로 내 볼까 해요. 번역은 조금 전에 말씀드린 그런 방식으로."
한국식당에서, 한국에서도 먹어보지 못한 은대구조림으로 늦은 점심을 먹었다. 한국보다 훨씬 한국적인 분위기의 식당이었지만 식당에는 외국인이 많았다. 한국 문화는 한반도라는 영역에 고정돼 있는 것이 아니었다.
점심 식사 후 김문희 시인은 자신이 운영하는 학교를 구경시켜 주었다. 한국의 유치원에 해당하는 로스 엔젤레스 퍼스트 프레스쿨은 주 정부로부터 위탁 받은 교육시설로 한국 아이들 비중이 20%정도고, 서부 몬테소리 학교는 그 반대였다. 그 학교 담장 옆에 무궁화가 활짝 피어 있었다. '과연 살까? 하고 걱정하면서 심었는데 잘 살아요' 하면서 활짝 웃는다. 다시 코리아 타운 갤러리아 백화점으로 돌아와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한번 문학에 덜미를 잡히면, 그것을 위해서도 다른 일에 충실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 아직도 귓가에 생생하다.
"'지고지선'을 추구하지는 맙시다" _
서시주(언론인, 전 연합뉴스 편집상무)
서시주 |
요즘 우리 사회에서는 가까운 사람 만나기도 두렵다. 분명한 정치적 입장을 가지고, 무조건 그것을 관철하겠다는 전투 의지로 무장하지 않으면 더욱 그렇다. 과거, 민주 대 반민주라는 비교적 단순한 대립 구도일 때보다 훨씬 복잡하다.
그렇다고 우리 사회가 그만큼 다양화됐다거나 소수자들도 당당히 제 목소리를 내는 분위기여서 그런 것이 아니다. 분열은 다양화, 첨예화, 파편화됐다. 북한 핵이나 미사일 발사 문제를 전제해 보자. 대북 지원은 지지하지만, 북한의 핵무장은 반대한다는 입장을 가진 사람은 설자리가 없다.
전시작통권문제에 대해, 미국의 패권주의는 반대하지만 전시 작통권의 조기환수는 반대한다는 의견도 마찬가지다. 보수언론의 자사이기주의는 혐오하지만 어떤 논조는 동의한다거나, 현 정부의 집권 당위성은 인정하지만 대통령의 철학이나 통치 스타일은 반대한다는 정도의 의견도 마찬가지다.
어느 쪽으로부터도 최소한의 인정조차 받기 힘들다. 왜 우리 사회가 갈수록 흑백논리의 수렁에 더 깊이 빠지고 있을까, 하고 고민을 하는 순간, 다들 하는 고민 나까지 보탤 것 없다 싶어 집밖 출입을 자제하기로 했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미국에서 전화가 왔다. 김문희 시인이었다. 서시주 선생을 만나 보라는 것이었다. 까닭인즉, 연합통신 LA 특파원으로 있을 때 알게 된 사이인데, 평생 언론인으로 사신 분으로 자신의 일에 투철하고 처신에 흐트러짐이 없는 분이라는 것이다. 우리 사회의 어지럼증에 대한 언론의 책임과 역할에 관한 얘기를 들어 봐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며칠 전 우연히 텔레비전 채널을 돌리다가 'TV 책을 말하다'는 프로그램을 보게 되었다. 《한국 현대사 산책》이라는 책에 대한 토론이 벌어지고 있었다. 거의 끝나가는 참이었다. 저자는 강준만 교수였다. 방청객으로부터 질문을 받고 대답을 하는 중이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듣는 숨통 틔는 얘기를 하고 있었다. 똑같지는 않겠지만 기억을 되살려 요지를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우리 현대사를 바라보는 시각으로 '음양론(陰陽論)'을 제시하고 싶다. 일관되게 음과 양이 공존했다. 그런데 이 둘은 분리 불가능한 것이다. 그림자의 이면에도 분명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 그 역도 마찬가지다. 이것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
서시주 선생이 사는 아파트로 찾아갔다. 집의 규모와 분위기는, 더도 덜도 없이 평생 언론계에 종사했던 분으로 누릴 만한 딱 그만큼이었다. 손수 타 주시는 냉커피를 마시며 얘기를 시작했다.
하나 마나 한 얘기가 되겠지만, 한 나라의 국민이 누릴 수 있는 정치 수준은 민도에 비례한다. 언론의 수준도 수용자의 그것과 동전의 양면 관계를 이룬다. 그러나 나는 언론의 수준만큼은 주체적 수용을 통한 고급화가 가능할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
특히 방송의 전파 낭비에 가까운 저급성과 저질성은 시청자보다 한참 떨어진다는 판단에서다. 너무 수동적인 수용 태도에 의한 길들여지기가 문제인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이 문제에 관한 의견을 집중적으로 듣고 싶었다. 하지만 나의 희망 사항일 뿐이었다. 선생께서는 프로였다. 이미 머릿속에 정리를 끝내두고 있었다. 나는 그저 받아 적기만 하면 됐다. 이 글을 정리하면서 나는 위에서 밝힌 강준만 교수의 태도를 취하기로 했다.
서시주 선생이 연합 통신에 근무한 기간은 1968~1998년까지로 한국의 근대화~민주화 기간과 거의 일치한다. 그리고 대부분 사회부와 정치부, 그리고 북한 전문 기자로 활동했다. 선생께서는 이러한 당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하여 연대기 순으로 얘기를 풀어갔다.
"대학 시절은 6 3 한일 굴욕외교 반대 학생운동으로 시작했어요. 연세대 사회문제연구소라는 단체에서 활동하며 앞장을 섰지요. 그러다가 졸업을 하고 보니까, 마땅히 취직할 곳이 없어요. 동양통신(나중에 합동통신과 함께 연합통신으로 통폐합)에 입사를 했어요. 사회부, 정치부 기자를 했는데, 4년 8개월 간 청와대 출입을 했어요. 정치적으로 박정희 정권에 반대하면서 청와대를 출입한 거죠. 그러나 나중에는 박정희에 매료됐어요. 국가와 국민을 사랑하는 태도와 철저한 안보관에 매력을 느낀 겁니다.
박정희가 즐겨 쓴 휘호가 '자주국방'이었어요. 현정부에서 말하는 자주국방과는 다른 차원이었습니다. 스스로 일어서자는 구체적 실천을 했어요. 미국 몰래 M16 공장을 만들면서(나중에 밝혀져서 합의하에 진행되지만) 내실을 다졌어요. 미국에서 미사일 전문가 데려다가 태안반도서 시험발사를 했습니다. 미국에 대해서 굴욕을 감수해 가며 실리를 챙긴 겁니다. 그런데 노 대통령은 하지 않아도 될 말을 합니다. 4대 강국의 틈바구니에서 자주국방을 하려면 천문학적 돈이 필요해요. 그런데 그 돈을 대통령이 내는 게 아닙니다.
지금 한국이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대한제국 말기 같아요. 국제 정치에서는 힘이 정의에요. 강한 자만 살아남습니다. 4강 역학 구도에서는 '우리 민족끼리'만으로 안전 보장이 되는 게 아닙니다. 남북통일 또한 남북의 문제가 아니라 국제 문제예요. 친중국 외교도 필요합니다. 국민소득으로 볼 게 아니라 13억 인구에 부존자원과 군사력을 보세요. 미국요? 세계 경제의 4분의 1, 군사력의 3분의 1을 가지고 있는 나라예요. 속으로는 몰라도 겉으로는 반대하지 말아야죠. 안방에서는 얼마든지 반미를 외치되 스피커에 대고 반미를 외칠 건 아닙니다. 지도자가 감정적 자기도취에 빠지는 건 잘못이에요. 실리적 차원에서 보면 반미 구호는 공허한 외침이에요."
김시주 선생의 이러한 말은 결국 젊은이들한테 하고 싶은 말이었다.
"지금 우리 젊은이들이 해야 할 일은 안창호 선생의 말대로 '무실역행(務實力行)'이에요. 미국에 굴종하느냐고 외칠 게 아니라 실력을 키워야 할 때에요. 앞으로 젊은이들의 세상이 오면 실력으로 살아남아야 해요. 땅덩어리가 좁다 해도 스위스보다는 넓어요. 안보가 튼튼하고 잘 살아야 문학, 음악, 미술도 발전시킬 수 있는 겁니다. 이스라엘과 레바논의 싸움을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해요. 무고한 죽음을 보세요. 종교의 폐해이자 힘의 열세에서 오는 불행이에요. 진실로 굴종하지 않으려면 힘을 키워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첨예한 갈등으로 힘이 양분되고 있다.
"중용지도(中庸之道)까지는 아니어도 이분법적 사고에서는 벗어나야 합니다. 흑백논리는 미분화 사회나 저개발 국가에나 있는 겁니다. 그런데 몇 년 전부터 우리나라에서는 '누구 때문'이라고 말하는 게 유행이에요. 노사, 계층, 보혁으로 나뉘어 갈등뿐이에요. 그런데 이 둘을 아우를 일을 해야 할 언론도 갈라져 있어요. 가장 중립적이어야 할 공영 방송은 친노, 메이저 신문은 반노, 마이너 신문은 적당히 친노예요. 언론도 반성을 해야죠. 권력에 아부하고 독자들의 박수소리나 의식하는 글로 휘발유만 끼얹으면 남는 게 아무 것도 없어요. 민족의 장래를 생각하며 긴 안목으로 사물을 바라 봐야 합니다."
김시주 선생은 연합통신에서 북한부장과 북한취재본부장을 역임했다. 김일성과 김정일을 어떻게 바라볼까?
"90년 10월 13일 남한 기자로는 최초로 김일성 공식 인터뷰를 했어요. 제2차 남북평양고위회담 때 당시 강영훈 총리가 수석대표로, 저는 기자단장으로 참여를 했어요. 당시는 신문에 김일성 사진도 못 싣고 혹 달린 캐리커처만 싣던 때였는데, 제가 기사 풀을 하면서 조선인민민주주의공화국 주석이라는 공식 직함을 썼어요.
그런데 김일성을 만나보니까, 완강한 독재자의 인상은 느껴지지 않았어요. 오히려 다정다감한 촌로나 인자한 아버지 같은 느낌이었죠. '기자 선생, 통일합시다' 하고 말을 걸어올 때는 만감이 교차하더군요. 기자로서 냉정해지자는 생각이 퍼뜩 들더라고요.
김일성은 전형적인 정치인이었어요. 호락호락한 인간이 아니에요. 나이스 가이 같은 자기 연출을 할 줄 아는 노회한 인물이었어요. 이에 비해 김정일은 훨씬 위험한 인물이에요. 통이 큰 것처럼 구는 과시벽이 체질화돼 있어요. 7살 때 어머니를 잃은 이후 피해 의식 때문인지 대단히 괴팍해요. 건강문제 때문에 둘째 부인 아들에게 권력 승계 작업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 42년생이니까 우리 나이로 65살이에요. 언제 죽을지도 모르죠. 언제든지 불장난을 할 수 있는 인물입니다. 북한 미사일만 해도 그래요. 어디를 조준하겠어요. 일본, 중국, 미국? 천만의 말씀이에요. 남한이에요. 그래서 미국의 안보 우산을 이용해야 한다는 것이고, 전시 작통권의 중요성은 전시가 아니라 '전쟁 억지력'에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합니다."
마침내 화제를 언론으로 돌렸다. 현재 언론의 문제점과 바람직한 지향점을 찾기 위해서는 먼저 근 현대사에서 언론의 주요 기능이 어떻게 이동됐는가를 살펴야 할 것 같았다.
"아주 단순화시켜 말하면, 일제 때는 일본에 대한 항거와 민족 주체성의 고양이 주였다고 봐야겠지요. 애국자적, 지사적 기자정신이 요구됐지요. 건국 이후에서 박정희 때까지는 반공주의가 시대적 가치였어요. 이에 대한 여론을 조성하고 국민을 계몽하는 것이 중심 기능이었고요. 박정권 하에서는 민주화와 산업화에 치중했고, 박정희 이후에는 민주화와 인권에 중심을 뒀지요."
시대에 따라 언론의 주된 기능도 변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어떤 시대에도 간과할 수 없는 가치는 권력에 대한 감시와 국민의 알 권리를 지키는 일일 것이다.
"언론은 역시 권력에 맞서야 합니다. 제4부로서 국민의 눈과 귀가 돼야지요. 그러려면 권력과 맞서는 수밖에 없어요. 권력은 속성상 알권리를 제한하려 하거든요. 그런데 최근 언론의 흐름은 권력에 맞서는 것보다는 엔터테인먼트 쪽으로 치중하고 있어요. 흥행사업으로 변질돼 가는 겁니다.
특히 인터넷이 뜨면서 젊은이들의 입맛에 맞게 감각적으로 바뀌어 가고 있어요. 특히 방송 매체가 심해요. 시청자의 입맛에 끌려 다녀요. 어떤 면에서 보면 독자의 요구에 부응하는 것인데, 실은 그게 아니죠. 시청자의 입맛을 고급화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시청자는 PD나 작가의 머리를 못 벗어나는 것이죠. 그래서 TV를 바보상자라 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결국 독자와 시청자가 똑똑해지는 것만이 대안이라는 얘기다.
"프로그램은 시청자 수준에 따라가는 겁니다. 매체는 따라갈 뿐이지 시청자의 수준을 높이려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 국민들은 교육 수준은 높고, 특정 분야에는 똑똑하지만 시대정신은 취약해요. 이런 상황에서는 매체 간 비판과 견제를 통해 수용자의 질을 끌어올려야 언론도 크는데, 일정 선 이상은 넘지 않습니다. 결국은 수용자가 자신들이 농락당하고 있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소비자의 수준이 이것밖에 안 되니까 이것만큼 준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특히 시청료를 받는 KBS가 권력의 나팔수가 되는 일은 시청자가 막아야지요. KBS의 주인은 권력이 아니라 국민이에요."
쉬운 일이 아니다. 사람은 쉽게 바뀌는 동물이 아니다. 한 개인도 그러한데 집단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럼 더 시급한 문제, 즉 언론 본연의 사명을 무디게 하는 가장 큰 요인은 무엇일까? 권력일까, 금력일까?
"권력 자체라기보다는 금력을 통한 권력의 통제지요. 지금 대부분 신문사는 적자예요. 권력에 휘둘릴 수밖에 없어요. 돈 때문에 권력과 '딜'을 하는 겁니다. 그 순간 권력의 언론 핸들링이 시작되는 거지요. 기업으로서 언론은 이중성을 띨 수밖에 없어요. 경영 마인드와 기자정신은 충돌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지점에서 타협이 필요한 겁니다. 타협은 결탁이나 야합이 아닙니다.
극단적인 대립은 싸움만 조장해요. 변증적 결합을 할 수 없습니다. 정상적인 기업 활동으로서 언론사의 이윤 추구는 인정이 돼야죠. 이것까지 부정하는 지고지선의 추구는 위선이거나 허구입니다. 그런데 만약 언론 기업의 사주가 권력이나 금력의 부당한 압력에 무릎을 꿇거나, 권력이나 금력과 결탁하여 부당한 이익을 추구할 때, 혹은 국민의 알권리를 제한할 때는 '써야'합니다. 그것이 기자의 사명입니다. 그리고 평소 유혹에 노출되지 않는 자기관리에 철저해야 합니다."
우리 사회가 진정한 민주화와 선진화를 위해 가야 할 길은 아직 멀고 험난한 것 같다. 그 도정에서 적어도 상대를 조금도 인정하지 않는 이분법적 대립은 내려놓아야 하지 않을까. 무엇이 우리로부터 최소한의 관용과 여유도 갖지 못하게 하는 걸까. 타협도 할 줄 모르면서 상생을 말하는 위선 때문은 아닐까? 상대를 인정하지 않기 위해, 자신도 지킬 수 없는 '지고지선'의 가치를 내세우는 '자기기만' 때문은 아닐까?
윤제학
전 현대불교 취재부장, 현재 프리랜서 작가로 활동하며 월간 <산>에 백두대간 종주기를 연재하고 있다. 저서로 <산은 사람을 기른다>《자연과 사람 사이 절》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