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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테랑 깎신’ 주세혁(36·삼성생명)은 리우올림픽을 준비하는 탁구 대표팀의 ‘맏형’이자 ‘기둥’이다. 한국탁구의 세대교체기였던 지난 4년간, 그는 묵묵히 ‘징검다리’ 역할을 수행해왔다. 2012년 런던올림픽에서 ‘선배’ 오상은, ‘후배’ 유승민과 함께 단체전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2016년, 20대 후배들과 함께 마지막 올림픽에 도전하게 됐다. 대한민국이 자랑하는 ‘월드클래스 수비수’ 주세혁의 존재는 생애 첫 올림픽에 나서는 후배들의 든든한 버팀목이자 선배와 후배, 선수와 코칭스태프를 잇는 ‘징검다리’다.
세상의 모든 드라이브를 깎아내는 ‘깎신’
“세혁이가 있어서 정말 좋다.” ‘백전노장’ 강문수 대표팀 총감독은 ‘애제자’ 주세혁 이야기만 나오면 미소 짓는다. “주세혁은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림 없이 제몫을 하는 선수, 이겨야할 선수에겐 무조건 이기는 선수”라고 했다. 런던올림픽 직후 대표팀 은퇴를 고심하던 그를 설득해 돌려세운 이유다.
코칭스태프는 주세혁을 통해 선수단에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에둘러 전한다. 후배들은 실력 있고 겸손한 선배, 주세혁을 마음으로 따른다. 후배들에게 군림하는 ‘꼰대’가 아니다. 후배들은 행동으로 솔선수범하는 선배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7살 차 수비전형’ 후배 서효원도 스스럼없이 다가서서 격의 없는 농담을 주고받는다. 지난 연말 전국남녀종합탁구선수권에선 승부욕에 불타 결례한 ‘후배’ 장우진을 “난 그 나이 때 더했다”는 한마디로 감쌌다.
주세혁은 밖에서 더욱 빛나는 에이스다. 전 세계 톱랭커들이 여전히 한국을 두려워하는 이유이자, 중국 슈퍼리그에서 함께 뛴 ‘세계 최강’ 마롱, 장지커가 인정하는 ‘월드클래스’다. 세계선수권, 올림픽 현장에선 전 세계 탁구 팬들의 사인 공세가 줄을 잇는다. 팬들은 세상의 모든 공을 깎아내는 그의 플레이를 사랑한다. 세상의 모든 드라이브를 무력화시키는 철벽, 공격의지를 깎아버리는 질식수비, 허를 찌르는 초강력 드라이브까지 그는 자타공인 세계 최강 수비수다.
세 번째 올림픽, “단체전 메달, 정말 간절하다”
플라스틱공 시대, 그는 엄살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았다. “나도 의외였다”며 슬몃 발을 뺀다. “플라스틱공은 회전량이 떨어지기 때문에 임팩트를 강하게 줘야 한다. 회전이 많이 들어가게 하려면 체력 소모가 크다. 이제는 적응했다.”
2003년 파리세계선수권 단식 준우승 이후 지난 13년간 단 한 번도 정상권에서 내려온 적이 없다. “내가 중학교 때만 해도 수비전형이 국가대표가 된다는 건 월드컵 4강보다 힘든 일이었다”고 털어놨다. 가장 오래, 가장 잘하는 수비수로 살아남았다. 2004년 아테네올림픽은 그의 첫 올림픽이었다. 단․복식 16강에 만족해야 했다. 2012년 런던올림픽에선 오상은, 유승민 등 ‘베테랑 삼총사’가 단체전 은메달의 역사를 썼다. 런던 이후엔 유일한 현역으로 남았다. 2014년 도쿄세계선수권, 2015년 쑤저우세계선수권에서 오롯한 중심을 잡았다. 지난해 7월 코리아오픈에선 일본의 니와 고키 등 에이스들을 줄줄이 물리치고 남자단식에서 준우승했고, 12월 전국남녀종합선수권에서도 4강에 오르며 녹슬지 않은 실력을 과시했다.
그의 말대로 “리우는 마지막 올림픽”이다. “단체전 메달과 아름다운 마무리.” 올림픽의 목표는 분명했다. “메달 색깔과 상관없이 후배들과 메달을 목에 걸 수 있다면 행복하게 마무리 할 수 있다”고 했다. 개인전 욕심은 감췄다. 아테네올림픽 남자단식에선 16강부터 중국 에이스 왕리친을 만나 졌다. 런던에선 32강 첫 경기부터 벌어진 남북대결에서 김혁봉에게 졌다. “올림픽 개인전에서 다 형편없이 졌다. 질 때 지더라도 이번만큼은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모두 보여주고, 납득할 만한 성적을 내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
▲ 4강에 오르지 못했던 도쿄 세계선수권대회가 ‘트라우마’로 남았었다. 월간탁구DB(ⓒ안성호). |
▲ 2년 뒤 쿠알라룸푸르에서 주세혁은 기어이 대한민국을 다시 4강에 올려놓았다. 8강전 맹활약으로 트라우마를 털어냈다. 월간탁구DB(ⓒ안성호). |
후배들과 함께 도전하는 단체전 메달의 꿈은 어느 때보다 간절하다. 2014년 도쿄세계선수권 타이완과의 단체전 8강, 그는 다 잡은 경기에서 패한 후 분루를 삼켰다. “정신을 꼿꼿이 세우지 못했다”고 자책했다. 이어진 인천아시안게임 4강전에서 타이완을 3대 1로 누르고 패배를 설욕했지만 ‘트라우마’는 남았다. 2004년 이후 여섯 번의 세계선수권 단체전에서, 대한민국 남자탁구가 4강에 들지 못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2014년 처음으로 4강을 놓쳤다. “선수는 마무리가 중요하다. 후배들의 무대에 괜히 끼어들었다는 이야기를 듣지 않도록, 꼭 함께 메달을 따야 한다”고 거듭 다짐했다. “다른 목표는 없다. 나는 그것만 하면 된다. 다른 것 다 잘해도 그걸 못하면 안 된다. 다른 걸 다 못해도 그것만 해내면 된다. 그래야 행복한 마무리를 할 수 있다.”
(그리고 며칠 전 막을 내린 2016년 쿠알라룸푸르 세계탁구선수권, 주세혁은 기어이 대한민국을 다시 4강에 올려놓았다. ‘난적’ 포르투갈과의 8강전에서 2, 4단식을 모두 잡아내는 맹활약으로 2년 전 8강 ‘트라우마’를 털어냈다. 올림픽에서 함께 뛸 후배들과 힘을 합쳐 이뤄낸 성과여서 더 만족스럽다. ‘행복한 마무리’를 향해 갈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알려진 대로 그는 수년째 자가면역질환인 희귀병 ‘베체트병’을 견디고 있다. 4년 전 런던올림픽 직전 찾아온 기분 나쁜 발목 통증, 피곤하거나 면역력이 떨어지면 불쑥 찾아드는 불청객이다. 리우올림픽을 앞두고 가장 중요한 변수는 건강이다. 훈련량을 늘리면 피로가 쌓인다. 그렇다고 훈련랑을 줄일 수도 없다. “언제 어떻게 올지 모르기 때문에 컨디션 조절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