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곡 이이 일화
① 자기 임종 말년에 조선이 곧 망할 것을 알고 조정에 다시 진입을 하는데 ‘상수학’ 으로 보니까 반드시 10년 안에 일본이 침략을 한다는 것을 알고, 그 유명한 "10만 양병설"도 상수역학으로 미래를 보는 혜안에서 나왔다. 조정에서 있었던 이야기다. 율곡이 경연에서 아뢰기를, "국력의 쇠약함이 심한지라 10년도 가서 반드시 나라가 무너지는 큰 화가 있을 것이니 10만 병졸을 미리 양성하여 도성에 2만, 각 도에 1만씩을 두어 그들의 조세를 덜어주고 무재(武才)를 훈련시켜 6개월로 나누어 교대로 도성을 지키게 하였다가 변란이 있으면 10만명을 합쳐서 지키게 하여 위급할 때 방비를 삼으소서." 라고 하였다. 이에 유성룡이 반대의견을 말하면서 아뢰기를 "무사할 때에 군사를 양성하는 것은 사회적 혼란만을 양성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이리하여 율곡의 말을 지나친 염려라 하여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다.
율곡은 물러나와 유성룡에게 "속유(俗儒: 식견이나 행실이 변변치 못한 선비)들이야 진실로 이것의 적절함을 알지 못한다 해도 공이 어찌 그런 말을 하는가?"라며 이어 오랫동안 수심에 잠겨있었다. 그리고 임진왜란이 있을 것을 예상하고 임금의 피난길을 돕고자 ‘화석정(花石亭)’을 지었다. 유래는 다음과 같다. 파주시 파평면 율곡리 산100-1에는 이이가 국사의 여가와 관직에서 물러난 후에 매양 들러 시를 짓고 명상을 하며 학문을 연구하던 ‘화석정’이 임진강이 굽어보이는 강가의 벼랑 위에 위치하고 있다.
이이가 세상을 떠난 8년 뒤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화석정은 선조 임금이 임진강을 건너 의주로 피난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급히 서울을 빠져 나와 임진나루에 도착한 선조 일행은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도무지 뱃길을 잡을 수가 없었다. 이때 갑자기 ‘화석정’이 불에 타며 밝혀준 불빛을 뒤로하고 무사히 강을 건너 개경 평양 의주에 이를 수 있었던 것이다.
파주에서는 율곡 이이가 임종하면서 유언을 했다고 한다. 화석정 곳곳에 기름칠을 잘 해두었다가 모년 모월 모일에 불을 지르라고 유언을 하였다. 그날이 바로 선조가 도강한 날로, 율곡은 선조의 몽진을 이미 8년 전에 예언했다는 이야기다.
② 이순신과의 대면에 대한 일화도 있다. 이순신을 보고 그 미래를 알고 향후 대책과 할 일을 자세히 알려 주었다.
율곡은 이 순신(李舜臣)과 서로 만났을 때, "그 글귀가 쓸 날이 있으리니 부디 잊지 말라."하였다. "월흑안비고(月黑雁飛高)"라 함은 "달은 어두운데 기러기가 높이 난다" 함이요, "독룡잠처수편청(毒龍潛處水偏靑)"이라 함은 "독한 용이 잠긴 곳에 물이 편벽되이 푸르다" 함이니, 이 두 글귀는 그 후 충무공(忠武公)이 대진(對陣)하였다가 써서 승전(勝戰)한 구절이다.
후일 이 순신이 임진왜란 때 노량에서 왜병을 맞아 대전하는데, 물빛이 맑아 율곡의 말을 생각하여 왜병이 올 것을 짐작하고, 군사들로 하여금 밤새 칼로 뱃전을 두드리게 하였는데, 아침이 되어 보니 왜병들의 손가락이 배 안에 가득했고, 바닷물은 피로 물들어 있었다고 한다. 이로써 이 순신이 크게 승리하였다. 또 임진왜란에서 가장 크게 무찌른 세계 해전사에 길이 남을 한산대첩과 명량해전에서 나온 쌍학익진법을 보면 그 답을 미리 제시를 해 준다. 너무나 유명한 한산섬 달 밝은 밤, 이이가 이순신에게 미리 위급한 상황이 되거든 기러기를 생각하라는 힌트를 준다.
그 유명한 쌍학익진전법을 써서 크게 무찌른 대목이 나온다. 미리 신신당부를 한 내용이 나온다. 또 율곡은 병조판서로 있을 때 어느 날 조회를 마치고 나오다가 멀리서 내금위의 하급 관리(종8품 정도)로 있는 이 순신이 지나가는 것을 보고, 도승지 유성룡에게 천거하여 말하기를 "장차 삼한을 구할 인물이니, 후일 기회가 있으면 조정에 천거하여 등용하라"고 일러두기도 했다.
율곡은 자신이 오래 살지 못할 것을 알고 다가올 미래의 일을 담당할 사람을 만나고 그 사람으로 하여금 일에 대한 역할까지 어떤 방법을 써야하는지 까지 간접적으로 자세히 알려주는 신인의 경지를 보여준다. 당사자가 스스로 선택하고 행동할 수 있게끔 했음을 엿볼 수 있다.
③ 율곡은 49세 되는 해 정월 16일 새벽에 세상을 떠났는데, 바로 그 전 보름날 밤이었다. 서울 어떤 선비가 강릉 지방으로 여행하는 길이었는데, 해는 어두워지고 길을 잘못 들어 깊은 산 속으로 들어섰는데, 어떤 나무꾼에게 길을 물었더니 이 언덕을 넘어가면 어떤 양반의 집이 하나 있으니 거기 가서 쉬고 가라는 것이었다. 선비는 나무꾼의 말대로 그 언덕을 넘어갔더니 과연 거기에는 집 한 채가 있었다. 그리고 다른 집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외딴 집이었다. 문을 두드리니 동자가 나와 맞는 것이었다.
동자는 선비와 문답한 뒤에 안으로 들어가더니 얼마 후에 도로 나와 선비에게 들어오라고 했다. 선비가 안으로 들어갔더니 방에는 어떤 늙은이가 다 떨어진 의관을 바로잡으며 "오늘밤에 무슨 긴요한 일이 있어 여러 가지 서로 불편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이 밤중에 어떻게 할 수도 없어 부득이 손님을 머무르게 할 수밖에 없소. 그런 줄 알고, 얼마 뒤에 이 방에서 우리가 어떤 일을 하든지 손님은 입 한 번 떼지 말고 조용히 앉아 있기만 하시오."하는 것이었다. 선비는 참으로 이상한 생각을 안 가질 수 없었다.
이윽고 어떤 중 한 분과 또 다른 촌학구 한 분이 방문을 열고 들어서는 것이었다.
세 사람이 만나 역시 서로 말 한 마디 나누지 않고, 다만 주인이 동자를 시켜 정화수 맑은 물 한 그릇을 떠오게 하여 소반 위에 놓고, 서로 둘러앉아 무엇인지 주문을 외우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약 한 시간 동안이나 주문을 외우며 정성을 드린 뒤에 주인이 다시 동자를 밖으로 내어보내어 하늘에서 무슨 이상한 일이 있나 없나를 지켜보게 하였다.
이윽고 동자가 밖으로부터 들어오더니 "이제 막 동쪽에 있는 큰 별 하나가 빛을 내면서 땅으로 떨어졌습니다." 하고, 하늘에 이상이 있는 것을 보고하는 것이었다.
이 말을 들은 세 사람은 서로 놀라 탄식하며 "천수(天壽)가 다한 것을 어찌할 방법이 없군!"하더니 두 사람은 실색한 얼굴로 일어서 어디론지 가 버리고 주인도 슬픈 생각을 금치 못하는 것이었다.
손님은 비로소 주인에게 그 까닭을 물었다. 주인은 그제야 손님을 향해서 "다른 것이 아니라, 서울에 계신 율곡 선생을 위해서 다만 몇 해 몇 달이나마 수를 좀 연장시켜 보려고 경문을 읽고 기도를 올린 것이나, 별이 떨어지고야 말았으니 이 시각에 아마 서울에서는 율곡 선생이 세상을 떠나셨을 것이오."하는 것이었다. 그 때의 주인과 촌학구가 누구였는지는 알 길이 없고, 다만 그 중은 금단대사였다고 한다.
선비는 하룻밤 동안 참으로 이상한 집에서, 이상한 사람들을 만나, 이상한 광경을 구경하고 서울로 돌아왔더니, 과연 그 날 16일 새벽에 율곡이 세상을 떠났던 것을 알 수 있었다. (이 원명의 동야휘집(東野彙輯))
④ 율곡이 벼슬을 사양하고, 잠깐 파주로 물러나 있을 무렵이었다. 어느 날 최 황이란 이가 율곡을 방문하여 겸상을 차려서 밥을 먹는데, 반찬이 너무도 빈약하기 때문에 최 황은 젓가락을 들고 머뭇거리기만 하다가 마침내 한 마디 했다. "이렇게 곤궁하게 지낼 수가 있습니까? 반찬도 없이 진지를 잡숫는대서야..."이 말을 들은 율곡은 웃으며 "나중에 해가 지고 난 뒤에 먹으면 맛이 있네!" 하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최 준의 창랑우언(滄浪寓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