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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묘교회”(Church of the Holy Sepulchre,聖墓敎會)
요한복음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묘가 십자가형이 집행된 장소에서 그리 멀지 않은곳에 위치하고 있음을 밝혀준다.(마태복음27:33,요한복음19:41~42) 이러한 점을 모토로 성묘교회는 골고다(영문명,갈보리) 언덕과 예수님의 무덤을 모두 포함하는 규모로 건축되었다. 예루살렘 올드시티 북서지역에 위치한 성묘교회는 “부활교회”(동방교회)라고도 불리운다. 성묘교회가 위치한 지역을 “뮤리스탄”(Muristan)이라고 말한다. 뮤리스탄은 페르시아어로 “병원”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십자군 당시 성묘교회터는 병원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예루살렘 성지순례객이 올드시티를 찾았을 때, 가이드는 골고다 언덕이 2개 지역으로 여전히 논쟁중임을 알려준다. 전통적으로 인정된 구교측의 장소와 현재의 위치에 건립된 지역으로 매년 부활절 시기가 되면 이 논쟁은 수면위로 올라온다. 그러나 대부분의 기독교 학계에서는 지역의 정확성보다 영적인 부분을 강조한다.
이스라엘은 주변 강대국들에 의해 원하지 않는 비극의 역사를 갖고 있다. 로마제국의 식민지국가였던 이스라엘은 AD. 66년, 독립의 결의를 세우며 항쟁을 하였다. AD.70년, 로마제국 “타이투스” 장군은 6개월만에 유대를 점령하고 마지막 남은 “마사다”를 점령하기 위해 1만5천명의 로마기병대를 파병했다. 1주일 안에 끝날 것 같았던 전쟁은 무려 3년의 시간을 보내고 급기야 성벽에 토담을 쌓아야만 정복이 가능했다. 수십만명의 이스라엘을 점령하는데는 6개월밖에 걸리지 않았다. 그러나 1천명에 불과한 마사다를 점령하는데는 3년6개월의 기간이 걸린데다가 로마군인이 죽인 유대인은 단 한명도 없었다. 살아남은 유대인들이 모두 자살해 버렸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2천년 동안 나라를 잃은 유대인들은 “디아스포라”(Diaspora)가 되었다.
로마정부는 로마황제를 숭배하지 않는 기독교인을 박해하고 예루살렘 지명을 “아리아 카피톨리 나”(Aelia Capitoliria)로 개명했다. AD.135년, 로마황제 “하드리아누스”는 유대폭동을 진압하고 예루살렘 지명을 개명한 후 골고다 언덕을 중심으로 “아프로디테”(그리스명,비너스)신전과 “제우스”신전을 건립하였다. 그러나 60명도 되지 않았던 기독교의 작은 불꽃은 되살아나기 시작했고, 수많은 박해속에서도 진리의 생명은 죽지 않았다. 300년후인 AD. 313년, 마침내 “콘스탄틴”황제는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하였다. 독실한 신앙의 소유자로서 콘스탄틴 황제의 어머니인 황태후 “헬레나”(Helena)가 326년, 기독교의 성지인 예루살렘을 방문하였다. 그녀는 성직자들과 로마군인들에게 “골고다” 언덕을 찾을 것을 명령하였고, 당시 십자가로 사용되었던 목재를 발견하는 등 골고다 언덕으로 특정되는 지역에 10년간에 걸쳐 거대한 “성묘교회”를 건축하였다. 콘스탄틴 황제는 336년, 성묘교회를 완공하는 부활절예배에서 이곳을 “지구의 중심”이라고 선언하였다.
그러나 성묘교회는 예루살렘을 성지로 여기는 이슬람과 유대교에 의해 수많은 파괴와 재건을 거듭해야 했다. 예루살렘을 어느 종교가 지배하는가에 따라 성묘교회의 운명도 결정되었기 때문이다. 614년 성묘교회는 패르시아제국 “호스로 2세”에 의해 완전 전소되었다. 그후 테오도시우스 수도원 대원장인 “모데스투스”(616~626년)에 의해 재건축 되었으나 1009년, 이집트 파티마 왕조인 “칼리프 알 하킴 비아므르 알라”에 의해 다시 파괴되었다. 그후 1048년, 다시 로마교황과 분쟁을 일으켰던 비잔틴 황제 “콘스탄티누스 모노마쿠스”에 의해 다시 복원되었다. 1149년, 십자군은 성묘교회를 대대적으로 개축하고 보수와 복원을 거듭하였다. 그러나 1291년 이슬람의 “살라딘”이 이곳을 다시 점령하였을 때 그는 성묘교회를 파괴하지 않았다. 대신 교회장악의 상징으로 오른쪽 출입문을 막아버렸다. 그후로 성묘교회의 출입문 열쇠는 이슬람의 두 가문에게 맡겨졌다. 성묘교회 관리인직을 맡았던 “누쎄이베흐”가문은 문지기의 지위를 갖고, “조우데흐”가문은 출입문의 열쇠를 맡았는데 이것은 오늘날까지 그대로 이어져 오고 있다. 1555년, 프란치스코회 수도사들과 정교회가 성묘교회의 사용권을 놓고 분쟁에 휘말렸다. 그후 1808년, 화재로 인하여 일부가 소실되었으나 1810년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완성되었다.
그러나 성묘교회의 정치적, 종교적 영향과 별도로 기독교계 내에서의 분열도 성묘교회를 분열시키는 요소가 되었다. 로마카톨릭, 정교회, 아르메니아사도교회, 시리아 정교회, 콥트 정교회, 이디오피아 테와히도 정교회, 그리스도교 등 6개 종파는 각각 그들 교단의 성지로서 성묘교회의 권리를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분열을 마감한 것은 오스만터키 제국이다. 1852년, 당시 오스만터키 제국 “술탄”은 예루살렘을 통치하고 있었다. 예루살렘의 종교를 통제하던 술탄은 성묘교회안에서 일어나는 교회분쟁과 관련하여 “현상유지”(status quo-remain forever) 칙령을 반포하고 이들 6개 종파에 관한 각각의 소유권에 관한 구역을 설정하였다. 그러나 출입문에 관한 이슬람의 권한은 그대로 유지시켰으며, 지금까지 성묘교회와 관련한 이러한 규칙은 이스라엘 정부도 변경할 수 없도록 항구적인 제도가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한 바윗돌 하나를 놓고 교회들이 보여주는 오랜 논쟁과 이기심은 결국 교회의 분쟁으로 이어졌고, 아이러니하게도 그 분쟁을 종식시키는 것은 이슬람이 되었다.
교회내의 원칙을 정한 현상유지 칙령에도 불구하고 성묘교회는 거룩한 날이 없었다. 2002년, 폭염속에 콥트교회 수사가 지정된 장소에서 그늘 위치로 그의 좌석을 옮겼다는 이유로 이디오피아인들의 분노를 자극했고 이 일로 11명이 입원하는 폭력사태가 발생했다. 2004년, 정교회가 성십자가 고양의식을 거행하는 시간에 프란치스코회 성당문이 개방되었다는 이유로 폭력행위가 일어났고 그중 일부가 경찰에 체포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2008년에는 그리스 수사가 경쟁종파에 의해 성묘교회서 퇴출되었고, 11월 성십자가 공경의식중에도 아르메니아수사와 그리스수사들 사이에 폭력사태가 발생하는 등 성직자들의 폭력사태는 끊임없는 추태로 이어졌다.
교회정면 외벽 2층 우측 아치창앞에 오랜 사다리 하나가 외벽에 걸쳐져 있다. 의아스럽게 보이는 사다리 하나를 치우는데 종파간 합의도출이 되지 않아 1854년부터 지금까지 150여년의 세월동안 그 자리 그대로 남아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사다리를 “부동의 사다리”(Immovable Ladder)라고 부른다. 내부는 각 교회마다 지정영역이 있어서 보수와 수리하는데 많은 절차를 필요로 하고 합의가 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실 때 자신이 사용한 바윗돌이 중요하다고 말씀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 예수님의 말씀은 분열과 이기심이 아니라 양보와 희생과 배려와 사랑임에도 불구하고 한치의 양보와 배려가 없는 교회들의 분쟁이 오히려 예수님의 말씀에 위배되고 있다는 사실은 전혀 모르고 있는 것이다.
성묘교회는 무슬림가문이 통제하는 출입구를 중심으로 입구 정면에는 광장으로 이루어진“성유석”(聖油石,The Stone of Anointing,The Stone of Unction)이 위치하고 있다. 입구 바로 우측에는 “골고다”(Rock of Calvary)로서 “십자가에 못박힌 제단”(Nails of the Cross Altar)과 “어머니 마리아가 서있는 제단”(Stabat Mater Altar), 그리고 “십자가형 집행제단”(Crucifixion Altar)이 있다. 두 개의 돔형으로 구성된 성묘교회 좌측 맨 안쪽 중앙에는 아리마대 사람이며 공회원인 “요셉의 무덤”(Joseph of Arimathea Tomb)이 위치하고 있다. 그 우측 안쪽에는 “로툰다”(Rotunda)와 중앙에는 “이디큘”(Aedicule)이 있다. 그 우측 안쪽면에는 “성모 마리아 아치”(Arches of the Virgin Mary)가 있고, 중앙에는 “카톨리콘”(Catholicom)이 성유석옆에 나란히 있다. 그 우측 안쪽면이면서 성모 마리아 아치옆에는 “감옥”(Holy Prison)이 있고, 커다란 돔 우측 끝에는 “앰뷸라토리”(Ambulatory)가 있는데 이곳에는 “롱기누스 채플”(Longinus Chapel)과 “의복분할 채플”(Chapel of the Division of Holy Robes)과 “비웃음 채플”(Derision Chapel)이 각각 위치해 있다. 커다란 돔형을 건너 우측에는 작은 돔형 건물이 연결되어 있는데 첫 번째 만나는 곳이 “성헬레나 교회”(St.Helena Chapel)다. 그리고 “성십자가 발견교회”(Chapel of the Invention of the Cross)와 “성바탄 교회”(St.Vartan Chapel)가 삼격형 구도를 이루며 각각 들어서 있다.
1. 성묘교회 광장(Facade)
성묘교회 입구 광장은 본래 현재보다 두배 이상의 규모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7세기에 예루살렘을 정복한 “칼리파 우마르”가 알라에게 예배드린 것을 기념하여 10세기에 무슬림들이 좌측광장에 거대한 “모스크”를 건축하였다. 현재 모스크는 외벽에 확성기를 설치하여 매회 예배 실황을 중계하며 성묘교회의 주인임을 과시하고 있다.
성묘교회는 두 개의 문이 있었다. 그러나 1291년 이슬람의 “살라딘”이 이곳을 점령하였을 때 그는 다른 이슬람 지도자와 달리 성묘교회를 보존하였다. 대신 교회장악의 상징으로 오른쪽 출입문을 막아 버리고, 왼쪽 출입문의 열쇠 또한 최측근인 이슬람의 두 가문인 “누쎄이베흐”(출입문)와 “조우데흐”(열쇠)에게 맡겼다. 이로서 1291년 이후 성묘교회의 출입은 이슬람이 맡는 아이러니가 계속 되었다. 이슬람이 막아버린 오른쪽 출입문은 십자군 시대 군주들의 무덤이 있는 지하실로 통하는 문이었다는 점에서 십자군과 이슬람의 대립관계가 얼마나 혹독했는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가 되고 있다.
2. 성유석(聖油石,The Stone of Anointing),도유석(塗油石,The Stone of Unction)
출입구를 통과하면 정면 바닥면에 붉은색 대리석이 놓여 있다. 이것은 예수님의 시신을 십자가에서 내려 이곳에 눕혀 놓고 향유를 바른 성유석이다. 성유석은 기름부음을 받은 성스러운 돌이라는 의미로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님의 무덤을 위해 준비한 것이라고 알려졌다. 성유석 배경에는 이러한 내용이 모자이크 성화로 그려져 있다. 성유석의 사각 모퉁이에는 4개의 촛대가 세워져 있고, 윗부분에는 8개의 등잔(조명)이 걸려 있는데 이것은 아르메니아사도교회, 콥트정교회, 정교회, 로마카톨릭에서 봉헌한 것이다. 현재의 성유석은 예수님 당시의 것이 아니라 1810년에 만든 것이다. 또한 이곳에서 예수님의 염을 했다는 전승 또한 십자군 전쟁이후에 나타난 것으로 실제라는 증거는 그 어느곳에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적이고 영적인 의미로 인하여 수많은 순례객들이 성유와 손수건을 구입해 가져 가려는 낯선 움직임이 쇄도하고 있다. 성유석은 “비아돌로로사”(Via Dolorosa) 13길이다.
3. 골고다(Rock of Calvary)(Golgotha,영문명,갈보리Calvary)
예루살렘 성벽 외부에 위치한 언덕으로 골고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의 현장이다. 골고다는 사실 정확한 위치가 없다. 단지 성묘교회가 골고다 언덕위에 세워졌다는 전승에 의해 지금까지 이곳을 골고다로 인정하는데 논란은 여전하다. 우리말로 “해골”이라는 의미의 골고다는 그리스어 “크라니온”(Κρανίου)에서 유래하였다. 이곳은 정교회가 관할하는 십자가 못 제대인 “십자가에 못박힌 제단”(Nails of the Cross Altar)이 있고, 바닥에는 십자가가 세워졌다는 홈이 있다. 골고다 바위는 비아돌로로사 12길로서 그리스정교회 관할이다. 바위의 우측면에는 프란치스코회 관할인 십자기에 못박히신 예수님의 묵상처인 “십자가형 집행제단”(Crucifixion Altar)이 있는데 비아돌로로사 11길이다. 좌측면에는 놀라운 일을 행하는 성모 마리아상이 있는데 “어머니 마리아가 서있는 제단”(Stabat Mater Altar)이다.
전승에 의하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신 장소가 아담의 두개골이 묻힌 곳이라고 전한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실때에 지진이 일어났는데 그때 땅의 갈라지 틈으로 십자가상의 보혈이 흘렀고, 이것을 통해 아담의 죄로부터 속죄함을 입었다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곳에는 그것을 기념하는 “아담의 채플”(Chapel of Adam)이 있다. 또다른 전승에 의하면 헬레나가 예루살렘에서 골고다를 찾았을 때 예수 그리스도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지역 인근 저수지에서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떨어져 나간 파편들을 발견하였는데 이것은 수세기에 걸쳐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유물이었다. AD.614년, 페르시아의 침공으로 유물이 탈취되었으나 631년의 협상을 통해 유물은 안전하게 보존되어 633년 콘스탄티노플로 귀환하였다. 그후 예루살렘으로 귀속된 유물은 러시아피터대제의 칼과 교황의 선물과 함께 그리스정교회 관할, 아담의 채플에 보관되어 있다고 전해진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는 예수님과 어머니 마리아가 있다. 외로운 죽음뒤에 서 있는 어머니의 마음은 자녀에 대한 목숨과 같은 기도와 헌신이 중단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증언한다. 골고다의 위치는 기독교에서 매우 중요하다. 그곳에서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자체가 복음은 아니다. 그것은 단지 하나의 상징적 요소일 뿐이다. 십자가 보혈의 피가 새겨진 곳에서 교회간의 알력과 다툼은 순례자들의 관광과 관련된 비즈니스때문인지도 모를 일이다.
4. 요셉의 무덤(Joseph of Arimathea Tomb)
성묘교회는 두 개의 돔으로 구성되어 있다. 예수님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우측 돔은 크기가 좌측보다 두배이상의 규모다. 출입구를 기준으로 맨 좌측 중앙에 공회원이면서 아리마대 사람인 요셉의 무덤이 위치하고 있다. 누가복음에 의하면 요셉은 “공회원으로 선하고 의로운 사람이며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고 전한다.(누가복음23:50~51) 예수님이 체포되고 사형이 집행되었을 때 제자들은 흩어졌고 유대인을 두려워 하여 은둔생활을 하고 있었다.(요한복음19:38) 당시 십자가형을 당한 죄수는 무덤에 묻힐 권리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시신을 수습하는자도 없었다. 이러한 때에 공회원 요셉이 시신인수서를 요청한 것이다. 그리고 유대의 원칙에 따라 미리 준비한 자신의 무덤을 예수님께 헌신하였다.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은 그렇게 예수님의 무덤이 되었지만 예수께서는 그곳에 묻히지 않았다. 3일만에 살아나셨고 부활하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많은 순례객들이 방문하였을때도 그곳은 빈무덤일 수 밖에 없었다.
5. 로툰다(Rotunda)
요셉의 무덤의 우측면 안쪽에는 “주님의 무덤성당”인 로툰다가 있다. 로툰다는 고대건축에서 원형 돔의 내부공간을 말한다. 이곳에서 순례객들은 예배를 드리며 슬픔에 빠진다. 로툰다는 로툰다의 배경이 되는 이디큘옆에 위치하고 있다. 순례객들은 이디큘을 바라보며 예수님의 무덤을 찾았던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를 생각했을 것이다. 로툰다내에 있는 철재격자의 제대는 콥트교회의 소유이다. 로툰다 동남방향이며 예수님의 무덤 우측편에는 “발현성당”이 있는데 로마카톨릭교회가 관할하고 있다.
6. 이디큘(Aedicule)
이디큘은 요셉의 무덤 우측에 위치하고 있는데 그곳에는 두 개의 방이 있다. 1번방에는 “천사의 돌”이 있다. 예수님의 시신이 안치된 후 무덤위에 돌의 조각을 놓은 것이다. 천사의 방은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예수님의 무덤을 찾았을 때 천사가 서 있던 자리이다. 2번방은 예수님의 무덤과 부활하신 장소로 동방정교회, 로마카톨릭교회, 아르메니아사도교회가 모든 권한을 갖고 성찬예배와 미사성제를 주관한다. 이디큘의 북방향에는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을 만난 장소로 추정되는 “마리아 막달레나 성당”이 있다.
7. 성모 마리아 아치(Arches of the Virgin Mary)
로툰다 우측면인 동시에 예수님의 감옥 좌측에는 성모마리아 아치가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무덤과 감옥사이에서 떠날 수 없는 어머니 마리아의 아치는 무덤과 감옥을 오가는 심경을 보여 준다. 순례객들은 여기에 서서 어머니의 마음을 생각한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예수님의 어머니로서 마리아의 마음은 수백년동안 돔을 지탱해온 무게감처럼 복잡하다.
8. 카톨리콘(Catholicom)
요셉의 무덤과 이디큘과 나란히 하는 우측에는 카톨리콘이 있다. 카톨리콘은 본래 동방정교회의 수도원과 교구 주요성당을 의미하며 영어로는 대성당을 의미하기도 한다. 로툰다 맞은편 동향에는 그리스정교회가 관할하는 십자군 형상이 있다. 세상의 중심으로 알려진 옴팔로스가 위치한 성가대석과 북방향에는 그리스정교회 안디옥 총대주교좌와 예루살렘 총대주교좌가 있으며 그 앞에는 정교회의 지성소를 구별하는 성화벽이 위치하고 있다.
9. 감옥(Holy Prison)
프란치스코회는 이곳에 예수께서 수감되었다고 증언한다. 그리스정교회도 실제 수감되었던 장소라고 믿고 있다. 그러나 아르메니아 사도교회는 비아돌로로사 2길의 채찍질수도원을 감옥이라고 주장한다. 성묘교회의 다양한 특성상 이 안에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된 모든 것을 담으려는 의식에서 기인한 것일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성모 마리아 아치를 연결하는 무덤과 감옥에서 예수님과 마리아의 헌신적인 사랑이 승화되고 있슴은 분명해 보인다.
10. 앰뷸라토리(Ambulatory)
요셉의 무덤과 이디큘과 카톨리콘과 나란히 하는 우측에는 앰뷸라토리가 있다. 이곳에는 “롱기누스 채플”(Longinus Chapel)과 “의복분할 채플”(Chapel of the Division of Holy Robes)과 “비웃음 채플”(Derision Chapel)이 각각 위치해 있다.
앰뷸라토리에는 병사이면서 천주교의 성인을 기념하는 “롱기누스 채플”이 있다. 롱기누스는 예수를 창으로 찌른 로마병사의 이름에서 유래하였다. 요한3서에는 롱기누스가 예수님의 죽음을 확인하기 위해 옆구리를 창으로 찔렀고 그 즉시 눈이 멀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눈이 멀어버린 롱기누스가 어떠한 연유에서였는지 알수 없으나 예수님의 피를 눈에 바르자 다시 앞을 볼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그 후로 롱기누스의 창에는 치유의 특은이 있다는 전승이 전해졌고 이로 인하여 그 창은 성창이 되었다. 이러한 전승이 로마카톨릭과 전승에서는 하나의 사실처럼 받아들여졌고 카톨리콘 내의 한 부분을 차지하게 된 것이다. “의복분할 채플”은 아르메니아 옷 나눔 성당으로 예수님의 옷을 벗긴후 십자가에 못박을 준비를 한 곳이다. “비웃음 채플”은 그리스 비웃음 성당 유보장(산책로)에서 남측에 위치하고 있는 성당이다.
11. 성 헬레나 교회(St.Helena Chapel)
카톨리콘이 커다란 돔의 마지막 부분에 있다면 성헬레나 교회는 좌측 작은돔의 첫 번째 중앙에 위치하고 있다. 아르메니아 사도교회 관할의 계단을 지나면 성 헬레나 성당이 위치하고 있다. 성당 앞쪽에는 헬레나가 십자가를 발견한 장소에서 자신이 십자가를 지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다. 성당 바닥은 각종 동물모양의 고대 모자이크가 그려져 있다. 헬레나는 콘스탄틴 황제의 어머니로서 독실한 신앙인이었다. 콘스탄틴 황제가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하는데 가장 영향력있는 인물로서 그녀는 예루살렘 순례를 하는 가운데 골고다를 찾아야 한다는 사명감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성직자와 로마군인들에게 골고다의 위치를 정확히 파악해 줄 것을 명했고 그곳에 성묘교회를 건축하게 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12. 성 십자가 발견교회”(Chapel of the Invention of the Cross)
성 헬레나 성당에서 22계단을 지하로 내려가면 헬레나가 당시의 십자가를 발견한 곳으로 알려진 지역이 있다. 그곳을 기념하여 로마 카톨릭은 성십자가 발견교회를 세웠다. 헬레나가 현재의 위치를 골고다 언덕으로 확신하게 되는 가장 큰 원인으로 그녀가 이곳에서 십자가 나무목판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헬레나는 십자가 목판을 안고 한없이 울었다고 전한다.
13. 성 바탄 교회(St.Vartan Chapel)
성 헬레나 성당 북방향에 위치한 성바탄교회는 채석장 전경을 바라 볼수 있는 모형포대가 있다. 성바탄교회에는 하드리아누스의 신전과 콘스탄틴 바실리카의 고고학적 유물들이 함께 보존되어 있어서 출입구에는 연철문이 있고 평소에는 잠겨져 있다. AD. 301년, 아르메니아는 기독교를 국교로 규정한 세계 최초의 기독교 국가였다. 450년 페르시아가 아르메니아를 점령했을 때 그들은 조로아스터교로 개종할 것을 강요했다. 당시 종교적 위협에 굴복하지 않은 “바탄 마미고니안”(Vartan Mamigonian)은 페르시아를 상대로 “아바라이르 전투”(Battle of Avarayr)를 하였다. 전투에서 패배한 아르메니아는 그후에도 30년동안 투쟁을 계속하여 484년 승리를 이루게 됨으로 기독교를 지키게 되었다. 이날을 기념하여 “성 바탄의 날”(St. Vartan’s Day)을 제정하고 국가 공휴일로 지정하였다. 성 바탄교회는 이러한 최초의 기독교국가로서 그 위상과 이단에 맞서서 생명을 바친 바탄을 기념하여 성묘교회내의 한 부분을 차지하게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