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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제주도와 인천의 섬 원문보기 글쓴이: 천심
누가
오늘 일을 묻는가
죽었다가 잘아난 신동
효봉스님은 이 땅에 일제가 한창 극성을 부리던 서기 1888년 5월28일 평안남도 양덕군 쌍룡면 반성리 금성동에서 태어났다. 효봉스님의 아버지 이병억(李炳億)은 5남매 중 유달리 영민한 셋째 아들 이찬형(燦亨)이를 귀여워했다. 찬형이를 귀여워하기는 할아버지가 더했다. 할아버지는 한학자였으므로 손자가 겨우
말을 배우차 무릎에 앉히고 천자문을 가르쳤다.
“하늘천 따지, 검을 현 누르황”
“하늘천 따지, 검을 현 누르황”
“하늘은 검고, 땅은 누렇다.”
“하늘은 파량고, 땅은. 땅은…”
이제 갓 다섯살 난 어린 손자는 할아버지가 풀이해 주는 글 뜻을 곧이곧대로 따라하지 않고 제가 생각하고 있는 대로 말했다. 이제 겨우 더듬거리며 말을 배운 다섯살박이 찬형의 눈에는 하늘이 검지 않고 파랬다. 그래서 “하늘은 파랗고, 땅은, 땅은…” 하며 더듬거렸던 것이다. 말을 더듬은 것은 땅이 누렇다고 해야 할지 붉다고 해야 할지 검다고 해야 할지 몰라서 망설인 것이다. 어린 찬형이의 눈에 비친 땅은 붉은 색깔을 띤 흙도 있고 검은 색깔을 띤 흙도 있고 누런 색깔을 띤 흙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때 할아버지가 손자가 잘못 말한 줄 알고 “찬형아 ! 하늘은 검고 땅은 누렇다고 해야 한다.”
라고 다시 가르쳐주었다. 그러나 찬형이는
“할아버지, 틀렸어요. 하늘은 검지 않고 파랗지 않아요?”
라고 말하며 초롱초롱한 눈을 들어 할아버지를 쳐다보았다. 그제야 할아버지는 한동안 손자를 내려다보고는
“오, 그렇구나. 네 말이 맞다. 하하하”
할아버지가 언뜻 생각해도 하늘은 검다기보다 파랗다고 해야 옳을 듯싶었다. 이제까지 서당에서 아이들에게 천자문을 가르치면서 습관적으로 반복하던 내 용이었고, 다른 아이들은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고 순순히 따라하기만 했는데 나이 어린 손자가 이의를 제기했고, 그 이의에 대해 할아버지는 틀렸다고 말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열두 살에 사서삼경 통달
할아버지는 어린 손자의 생각이 남다름을 발견하고는 여간 기쁘지 않았다. 찬형이의 영특함은 이런 문제만이 아니라 여기저기서 발견되었다. 그래서 이웃간에 부를 때는 찬형이라는 이름 대신 ‘재동(才童)이’또는 ‘신동(神童)이’라고 부르기를 마다하지 않았고, 마치 자기 집의 손자나 되는 듯 자랑스러워했다. 이 소문은 쌍룡면 일대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올 정도였다.
신동이 이찬형은 열두 살이 될 때까지 사서삼경을 모두 통달하였다. 할아버지에게 한문을 배우러 온 사람들은 대부분 찬형이보다 훨씬 나이가 많 은사람들이었다. 찬형이는 자기보다 나이 많은 학동들 틈에 끼어서 글을 읽었으나 글귀를 암기하는 데는 항상 나이든 어른보다 빨랐고, 어려운 글의 풀이도 먼저 깨달았으므로 신동이라고 소문이 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학문의 세계에서는 어른보다 앞서 갔으나 나이는 아직 어려서 놀 때에는 제 또래의 아이들과 어울려서 기마전도 하고 연날리기도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뜻하지 않은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열세 살 되던 해의 정월 대보름날 친구들이랑 밖에서 연날리기를 하다가 뛰어들어온 찬형이는 마침 할머니와 어머니가 인절미 만드는 것을 보고 거듭 세 개를 먹어치웠다. 네 개 째 입으로 가져가던 찬형이는 “컥!”하면서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얘야, 그러길래 물부터 마시고 천천히 먹으래두.”
할머니가 이 말을 했을 때 찬형이의 얼굴은 이미 백짓장처럼 하얗게 질려 있었고 이윽고 푸른 빛으로 변해버렸다. 놀란 어머니는 부엌으로 달려가 물을 떠오고 할머니는 등을 두드리며 손자의 이름을 불렀으나 찬형이는 괴로운 듯 “킥! 킥!” 소리만 낼 뿐이었다. 할머니는 손자의 입을 벌리고 손가락을 디밀어 목에 걸린 떡 조각을 파냈으나 손자의 몸은 이내 축 쳐져 늘어지고 말았다.
순식간에 찬형이가 혼절하고 쓰러지자 온 집안이 발칵 뒤집혔다. 의원을 급히 불러왔으나 진맥을 한 의원은 고개를 화우로 저었다. 마지막으로 정수리에 침을 놓고 쑥으로 뜸질을 했다. 그러나 소생의 기미가 없자 이불을 말아서 윗목에 치워두고 할머니와 어머니는 통곡을 했다.
이를 보다가 참지 못한 할아버지는 그 길로 집을 나가 주막에 가서 술을 퍼마셔댔다. 얼마나 애지중지하던 손자인가. 더구나 남달리 영리해서 뒷날에 반드시 큰 인물이 될 것을 기대하고 무럭무럭 자라는 손자를 보는 것이 즐거움이었던 할아버지는 홧김에 폭음을 한 것이다. 이번에는 갑자기 폭음을 한 할아버지마저 몸을 가누지 못하고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그리고는 영영 다시 일어날 기색이 없었다.
열네 살에 백일장에서 장원
졸지에 손자와 영감을 잃은 할머니는 너무 기가 막혀서 울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손차를 홑이불에 말아서 윗못에 치워둔 채 정신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밤을 꼬박 새웠다. 날이 밝자 이 소식을 전해들은 찬형이의 삼촌이 헐레벌떡 뛰어들어 왔다. 아버지의 시신 앞에서 통곡을 한 찬형이의 삼촌은 마지막으로 조카인 찬형이 얼굴이나 보겠다면서 이불을 헤쳤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찬형이의 얼굴은 죽은 사람의 창백한 얼굴이 아니었다. 볼에 핏기가 돌고 옹기가 있었다. 얼른 손목을 참아보니 맥이 뛰었다. 죽은 지 하루가 다 된 시간이었다.
“나는 아무래도 할아버지의 운명을 대신 받고 살아난 것 같아.”
뒷날 효봉스님은 이 사실을 회상하면서 가끔 이런 말을 하곤 했다.
손자 대신 할아버지가 저승사자를 따라갔다는 생각이 들자 찬형이는 할머니와 부모님에게 더욱 효성을 다했다. 그것만이 자기를 대신해 돌아가신 할아버지에게 은혜를 갚는 길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효봉스님의 정수리에는 그때 침을 놓고 쑥으로 뜬 자리가 흉터로 남아서 그 흉터를 만지며 할아버지의 얼굴을 떠올리는 버릇이 생겼다.
할아버지의 명을 이어받아서 다시 살아난 찬형이는 할아버지를 여윈 슬픔을 이기기 위해서 밤새워 책을 읽었다. 그리하여 이듬해인 열네 살 되던 때에 그 동안 할아버지에게서 배운 학문을 평가받을 기회가 왔다. 연례적으로 평양감사가 베푸는 백일장에서 장원을 한 것이다.
평양감영에서 평양감사 주최로 열리는 백일장은 한양에서 열리는 과거시험을 빼놓고는 당시 조선에서 가장 권위가 있는 과거였다. 그래서 전국 각처에서 그 동안 갈고 닦은 글재주를 겨루기 위해서 내로라 하는 수재들은 모두 이 백일장으로 모여들었다.
시제(詩題)가 동헌에 내걸렸다.
<出門見張子方하고, 問今日事知何오>
그 당시 효봉스님이 답을 어떻게 썼는지는 확인할 수 없으나 뒷날 기억하기를,
〈子方子方吾子方 天地天地難天地〉로 시작하는 답안을 작성했다 한다.
결국 찬형의 답안지가 장원으로 뽑혔다. 만약 할아버지가 살아계셔서 손자의 백일장 장원을 보셨더라면 얼마나 기뻐하셨을까를 생각하니 기쁨 한켠에 슬픔이 복받쳐 오름을 억누를 수 없었다.
이 세상은 내가 머물 곳이 아니다
찬형이는 열네 살이라는 어린나이에 사서삼경을 통달하고 백일장에서 장원을 할 만큼 학문이 성숙했다. 그런데 문제는 학업을 계속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예전 같으면 지방의 향시(鄕試)에서 합격하면 서울의 성균관에 입학할 자격이 주어졌으나 갑오경장으로 한낱 종이쪽지에 불과한 무용지물이었다.
그동안에는 할아버지가 계셔서 사서삼경을 읽었으나 할아버지가 안 계시고 보니 다른 곳의 서당에 간다해도 기껏 사서삼경을 가르치는 정도 였으므로 이미 사서삼경을 마친 그가 갈 만한 곳을 찾기 어려웠다. 그래서 찬형이는 아버지께 신학문을 배우겠다고 말했다.
신학문이란 고종 23년(1894년)에 있었던 갑신정변 이래 세력을 잃었던 개화파가 1896년 갑오경장을 일으켜 일본의 힘으로 재래의 문물제도를 서구식으로 바꾸고 서양의 학문을 가르치면서 시작된 학문이다. 개혁의 바람은 정치 경제는 물론 교육 분야에도 몰아닥쳐 지금까지의 인재 동용문인 과거제도가 폐지되었다. 과거제도가 폐지되니까 자연히 서울의 성균관과 사학 지방의 향교와 서당 등 재래의 교육기관은 쇠퇴하고, 이들 교육기관을 담당하던 예조는 학무아문으로 개편되었다. 고종은 홍범 14조 중 제11조에 “나라의 총명한 자제를 널리 외국에 파견하여 학술과 기예를 배워 전하는 일”이라고 교육에 대한 관심을 표명하고 제도를 개혁하였다. 그리하여 교육소칙을 내리고 보통 학교령, 중학교령 등을 공포하고 서양식 학교를 세워서 운영하였다.
지방에는 고을마다 오늘날 국민학교에 해당하는 소학교가 섰으나 중학교와 고등학교에 해당하는 고등보통학교는 서울의 경성고등보통학교와 평양의 평양고둥보통학교 뿐이었다. 평양에는 관립평양고등보통학교가 설립되어서 새로운 학문을 배우려는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과거제도가 폐지되고 벼슬길에 나갈 수 있는 길은 신학문을 배우는 길밖에
없었으므로 처음에는 별로 지원자가 없었으나 나중에는 경쟁률이 치열해졌다.
국민학교 거치지 않고 바로 평양고보에
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려면 소학교를 마치고 성적이 우수하여 도지사의 추천을 받거나, 추천을 받지 못하면 시험을 치러야 했다. 찬형이는 한학을 하면서 소학교를 다니지 않았으므로 바로 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찬형이는 곰곰 궁리한 끝에 다짜고짜 평양고보로 교장선생님을 찾아가서 입학을 허가해 달라고 졸랐다.
처음에는 말도 붙이지 못하게 하던 일인 교장은 좀체 일어나서 나갈 것 같지 않은 찬형이에게 말을 붙였다. 얼굴은 보지도 않고 무엇인가 책상에 앉아서 열심히 글씨를 쓰면서 물었다.
“그래 한학을 했다고 하는데 어디까지 했느냐?”
“사서삼경은 떼었습니다.”
“네 나이가 겨우 열다섯이라고 조금 전에 말하지 않았느냐? 그런데 사서삼경을 마쳤다는 거냐?”
“예, 그렇습니다. 작년 평양감사 백일장에서 장원을 했습니다.”
옛날 같으면 백일장은 과거시험이 아니던가. 거기에서 장원을 했다면 그 실력은 인정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제야 교장은 하던 일을 잠시 멈추고 비로소 찬형이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음, 그래?”
교장은 입학을 검토해 볼 테니 일단 집으로 돌아가서 기다리라고 했다. 집으로 돌아온 찬형이는 입학허가가 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던 어느 날 드디어 입학을 허락한다는 통지를 받았다.
학교에 입학한 찬형이는 소학교를 다니지 않은 관계로 산술과 음악 체조 같은 과목이 낯설어서 처음에는 다소 성적이 뒤떨어졌으나 얼마 되지 않아서 항상 선두를 지켰다. 일인(日人)선생들은 칭찬을 아끼지 않았고 평양고보를 졸업한 뒤 더 공부를 하고 싶으면 유학을 알선해 줄 테니 유학을 가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당시 일인들이 가르친 교육 수준은 실업교육이 중심이 되었으므로 높은 수준은 못 되었다. 일본어만은 일본인 중학교에서 만든 교과서를 썼으나 수학이나 영어는 기초적인 것만 가르치고 그것도 등사하여 만든 교재로 가르쳤다. 그래서 찬형이는 기회가 되면 외국 유학을 하여 더 넓은 세계와 학문올 접해보고 싶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다행히 평양고보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으므로 총독부에서 추천하는 관비유학생으로 뽑히게 되었다.
입학할 때 시골소년이었던 이찬형은 졸업할 때는 어느덧 건장한 청년이 되어 청운의 꿈을 안고 일본와세다대학 법학부 유학생이 되었다. 현해탄을 건너면서 가슴은 터질듯 부풀어 있었다.
일본 와세다대학 법학부 입학
그가 일본 유학을 하기로 마음먹은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으나 그 중에서도 가장 큰 이유는 일본이 당시 세계문물의 집산지일 뿐 아니라 일본을 통해서 세계의 문화를 접해보고 싶어서였다. 그리고 일본에서 특히 법률공부를 택한 것은 일본에게 수탈당하는 우리 나라 백성들의 억울함을 풀어주는 것이 무엇보다 급선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그 동안 일본은 법을 앞세워서 무지한 우리 농민들을 교묘하게 수탈해 갔다. 동양척식주식회사를 세우고 합법을 가장한 측량을 하여서 땅을 빼앗고, 치안유지라는 명목으로 집회를 못하게 하고 우리의 언어와 문화와 종교 정신을 차츰차츰 말살해 가기 시작했다.
일본에 유학 온 조선학생들은 민족적인 차별을 감수해야 했다. 그리고 조선에서 고등보통학교를 다니며 배운 것이 기껏 실업 중심의 수업이었으므로 원서 가지고 강의하는 영어 같은 과목은 정말 따라가기가 힘들었다. 그러니 학교에서 돌아와 저녁밥을 먹은 후에는 밤을 꼬박 새면서 영어 단어를 찾는 데 공부시간의 대부분을 할애해야 했다. 졸음이 오면 찬물로 세수를 하거나 수건올 머리에 동여매고 졸음을 쫓았다. 이를 악물고 코피를 쏟으며 달라붙은 결과 일 년쯤 지났을 때에야 여유를 좀 찾을 수 있었다.
약 1년쯤 지나서 학교생활에 적응이 되고 성적도 차츰 향상되기 시작하여 3학년이 되었을 때는 비로소 일본 학생을 따라잡고 선두에 나설 수 있게 되었다. 처음에는 차별대우하던 일본 학생들도 찬형의 실력 앞에는 고개를 숙이게 되고 교수들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진 듯 싶었다. 그러나 찬형의 머리 속에는 고등고시에 통과하여 법관이 되는 것만이 최종 목표였다.
찬형의 나이 스물 여섯 되던 해인 서기 1913년 마침내 와세다대학을 졸업하는 날을 맞았다. 그러나 당장 귀국올 결심할 수가 없었다. 집에서는 좋은 혼처가 났으니 일단 귀국하라는 편지가 두 번씩이나 와 있었다. 일본에 머물면서 시험준비를 하고 싶었으나 졸업을 했으므로 관비유학생 장학금 지급도 끊어지고 하숙비도 걱정이었다. 관비로 유학을 시켰으므로 정부에서 취업을 알선해 주어야 마땅하지만 자기보다 성적이 낮게 졸업한 일본 학생들은 모두 취직을 알선해 주면서도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맞아주는 곳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찬형이는 귀국을 결심하고 관부연락선에 몸을 실었다.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찬형은 귀국하던 해 경성에서 치른 법관시험에 응시하여 합격의 영광을 안았다. 그 당시 법관이 되는 법관시험이란 그야말로 하늘의 별따기보다 더 어렵다는 시험이었다. 그것도 일본인과 조선인을 차별대우하는 시기였으므로 조선인이 고시에 합격하기란 하늘의 별따기가 아니라 하늘에 별달기보다 어려운 시험이었다.
그러나 성적이 월등히 우수하였으므로 조선인이라 할지라도 저들로서는 합격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조선인으로 처음 법관시험 합격
찬형의 합격은 조선인으로서는 최초의 합격이었고 따라서 최초로 조선인 판사가 배출된 것이었다. 이 당시 사회의 반응은 놀라웠다. 조선인 판사가 배출된다는 사실은 항상 억울한 재판을 받아오던 이 나라 백성들에게는 그야말로 구세주라도 나타난 듯이 기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가 법관시험에 합격한 서기 1914년의 국내외 사정은 어떠했던가. 일제는 3월에 조선기병대를 해산하고, 5월에 한국인의 토지소유 전매와 조차(租借)금지법안을 통과시켜 식민지배의 마수를 강화할 때였다. 이에 대항해 미국에서는 조국광복운동 단체로서 흥사단이 조직되었다. 그 후 5년 뒤인 서기 1918년에는 조선총독부에서 토지조사사업을 완료함으로써 국토마저 빼앗을 장치를 마련하였다. 그 이듬해인 서기 l919년은 민족정기를 떨쳐 일어난 3·l운동이 있었고, 만주에서는 독립군이 청산리싸움에서 일군을 대파하는 기개를 과시했다. 그럴수록 일제의 감시는 더욱 삼엄해서 숨통을 조이는 탄압이 더할 뿐이었다. 일본에서 관동대지진이 일어나자, 유언비어를 유포하여 한국교포를 무자비하게 학살한 것은 그가 법관이 되어 10년 되던 해의 일이었다.
찬형이 총독부의 지휘체계 아래에서 동포를 위해 일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다. 찬형은 서울과 함흥의 지방법원에서 근무하였으나 처음부터 판사에 임명된 것은 아니었다. 법원에서도 그가 하는 일이란 겨우 재판에 계류된 사건을 정리한다거나 고참 판사들을 도와주는 보조자의 역할밖에 시키지 않았다. 찬형은 몇 번씩이나 그만두고 싶었으나
그래도 언젠가는 뜻있는 할 일이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걸고 참고 참았다.
그가 판사발령을 받은 것은 서기 1919년이 저물고 새해를 맞아 평양의 복심법원(지금의 고등법원)으로 발령을 받으면서 부터이다. 이때는 이미 일제가 식민정책의 이빨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3월1일 기미만세사건으로 전국이 삼엄한 경계 속에서 꽁꽁 얼어붙은 시기였다. 3 ·1만세사건이 실패로 끝나고 독립지사들이 만주로 상해로 망명길에 올랐으나 아직도 탈출하지 못한 애국지사들을 사상범으로 몰아 색출하려고 혈안이 되어있을 때이다.
판사 생활은 화려한 지옥의 나날이었다. 남들은 판사라 하면 호화로운 생활과 권세로 남부러울 것이 없다는 듯이 동경의 대상으로 삼았으나 찬형의 경우는 전혀 달랐다. 식민지의 판사로서 그것도 정의감에 불타고 혈기가 왕성한 갓 서른을 넘긴 그가 일본의 정책과 지시에 따라서 제 나라 제 동포를 재판해야 한다는 것은 차라리 고문과 같은 것이었다.
감당할 수 없는 고뇌를 떨쳐버리려고 퇴근을 하면 술집에 들러 정신을 잃을 만큼 술을 퍼마셨다. 차라리 술에 취해 인사불성이 되는 편이 편했기 때문이다. 그를 지탱시킬 수 있는 또 하나 구실을 찾는다면 미력하나마 거대한 괴물과 대항하여 제 동포를 감싸고 구하는 역할을 한다고 자위를 하는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운명은 그가 더 이상 붙들고 인내할 만큼의 한 오라기 실낱같은 구실도 찾아볼 수 없는 막다른 골목으로 내몰았다.
사형선고.
그렇다. 이 당시 사상범은 엄하게 다스리라는 총독부의 서릿발같은 명령이 매일 하달되고 있었다. 검사의 논고는 빈틈없었다. 일본 정부에서는 의도적으로 사상범과 같은 중대한 재판은 초선인 판사 이찬형에게 맡겼다. 제 동족을 제 동족의 판사가 재판하게 하여 일본에 대한 적개심을 덜어보려는 수작이었다.
찬형은 판사라는 직책과 법과 양심과 거기에다가 식민지 백성이라는 의미까지 한데 뒤엉켜서 풀어낼 수 없는 실뭉치 마냥 그의 앞에 내던져져 있는 사건을 두고 몇 날 며칠을 고심해야 했다. 그러나 운명의 신은 그를 옥죄며 판결을 재촉했다.
인간이 인간을 살리고 죽일 수 있는가. 신이 아닌 내가 어떻게 인간을 심판하고 벌할 수 있는가. 신이 언제 나에게 절대의 권능을 빌려주었는가. 신이 권능을 빌려주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빌린 것에 불과한 것이지 본래 나의 권능은 아니지 않은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태어났는가. 나도 언젠가는 죽을 것인즉 죽음은 무엇인가. 태어남은 무엇이고, 죽음은 무엇인가. 어떻게 사는 것이 참된 인간으로 살아가는 것인가. 이것은 무엇인가. 참으로 이것은 무엇인가. 무엇인가.
커다란 의문의 덩어리가 찬형의 뇌리를 꽉 채워버렸다. 사형을 언도하기까지 괴로워했던 갈등은 이미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이 큰 의문의 덩어리에 비하면 한 조각 파편에 불과했다.
마치 인생의 전부로 여겨지던 지난 날의 꿈, 선망의 대상인 판사도 일순간에 사라지는 물거품이 되었다. 그것은 한낱 호화로운 지옥에 불과했다. 오로지 무한한 공간과 시간 위에 하나 점으로 떠서 그는 사흘 낮과 밤을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한 채 자기 스스로를 응시할 뿐이었다.
“이 세상은 내가 머물 곳이 아니다. 나의 길은 따로 있다.”
엿장수의 팔도강산
더 지체할 수 없었다. 한번 결심이 서자 그는 그 길로 가출을 결행했다. 꼬박 사흘 밤을 새웠는데도 피로하지 않았다. 아침 출근시간이 되자 여느 때처럼 이제 막 보통학교에 입학한 큰아들 영발이와 재롱동이 작은 아들과 겨우 걸음마를 배우는 막내딸이 고사리 같은 손을 흔들며 대문 밖까지 따라나와서 재롱을 피웠다.
“아빠 ! 오늘 일찍 들어와야 해.”
막내딸이 오늘따라 아버지의 마음을 꿰뚫어보기라도 한다는 듯이 유별나게 고사리 손을 흔들었다. 찬형이는 차마 정면으로 볼 용기가 없어서 얼굴을 외면한 채 건성으로 인사를 받고 대문을 나섰다. 어머니에게도 아내에게도 작별인사를 할 수가 없었다. 어디로 간다는 기약도 언제 돌아온다는 기약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직장에 사표를 낼 마음의 여유도 없었다. 일분 일초라도 빨리 이 세상을 떠나는 것이 급했다. 그가 사형선고를 한 순간 그 사형선고는 자기 자신에게 내린 사형선고나 다름이 없었다. 이찬형이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조선인의 한계 느껴 법 복 벗고 가출
입은 옷 그대로 집을 나섰으나 그의 발걸음이 향하는 곳은 어제와 달랐다. 집을, 고뇌의 집을 벗어난 그는 날듯이 홀가분했다. 어디든 날아가는 곳은 닿지 못할 곳이 없을 듯 가벼웠다. 그는 그야말로 발길 닿는 대로 바람 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마음이 가고자 하는 곳은 어디나 갈 수 있었다. 어제의 부귀와 영화 고난과 갈등 모두 헌신짝처럼 내팽개치고 비로소 오롯이 자신의 삶을 찾은 듯 기뻤다.
찬형은 서울로 올라와서 남대문시장을 기웃거리며 걷고 있었다. 저자거리 풍경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찬형에게 남대문시장의 저자거리는 예전의 저자거리가 아니었다. 웬지 모를 활기가 넘쳐흘렀다. 찬형은 걸치고 있던 양복과 구두를 벗어서 팔고 그 돈으로 허름한 바지저고리 한 벌과 엿판을 바꾸었다.
엿판을 지고 그는 길을 떠났다. 그가 가고자 하는 곳이 그가 가는 곳이었다. 더러는 사람이 싫어 사람을 피해서 산길을 가기도 하고, 똑똑한 체하는 사람 앞에서는 바보짓도 해보이고, 아무 목적도 없이 하루에 백리 이백리 길을 무작정 걷기도 했다. 시집가는 새색시의 이바지 짐을 밤새워서 져다주고 푸짐한 대접을 받아 주린 배를 채우기도 했고, 추운 겨울길을 걷기가 어려우면 시골 서당에 들러 시골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쳐주기도 했다.
어느해 겨울 경상도 통영(충무)을 지날 때였다. 통영 부두에서 건너편 섬으로 해저 터널을 뚫는 공사가 벌어지고 있었다. 바다 밑으로 굴을 뚫는다는 일은 흥미로운 일이어서 구경꾼이 많았다. 찬형이도 공사판 구경을 하다가 날이 저물어 어느 집 대문을 밀치고 들어가 하룻밤 묵어가기를 청했다.
이 무렵은 아직 인심이 후할 때라서 나그네가 길을 가다가 날이 저물면 아무 집이나 들어가 잠자리를 청했다. 그러면 잠자리는 물론 식사까지 대접을 하던 세상이었다. 나그네들은 대개 그 마을에 들어가면 그래도 대문이 번듯하고 용마루가 큰 집을 골라야 대접을 받고 묵어갈 수 있었기 때문에 찬형이도 우선 그럴듯해 보이는 기와집을 골랐다. 마침. 사랑방이 있어서 하룻밤 쉬어갈 수 있었다.
저녁상을 물리자 바깥주인 되는 영감이 사랑으로 나와서 말을 붙였다. 주인영감은 오랜만에 외지사람을 만나서 무료함을 달래려는 듯 자꾸 말을 걸어왔다. 그 사랑방은 사랑 겸 마을 아이들의 서당으로 쓰고 있는 방이었다. 벽에는 주희(朱熹)의 ‘少年易老學難成一寸光陰不可輕’(소년은 늙기 쉽고 학문은 이루기 어렵다. 아무리 짧은 시간도 가벼이 여기지 마라)이라는 싯귀도 한 구절 붙여져 있고 짧은 경구(警句)도 서툰 글씨로 한두 줄 적혀 있었다.
주인영감은 글줄이나 읽은 듯 엿장수 행색의 찬형을 보자 알아듣기나 하겠느냐는 투로 문자를 써가며 말을 걸었다. 찬형으로 말하면 일찌기 열네 살에 사서삼경을 독파한 터요, 일본에서 최고학부까지 마쳤으니 신구학문에 두루 통했으므로 어찌 상대가 되랴. 그러나 찬형은 일부로 내색을 않고 말동무를 해주었다.
“엿판을 지고 동서남북을 돌아다녔을 테니 여기저기서 보고들은 세상 풍속이나 좀 말해 주겠는가?”
이야기가 길어지면서 결국 찬형의 언변이 보통이 아님을 알고 주인영감은 새삼스럽게 물었다.
“젊은이, 행색은 엿장수로되 그냥 엿장수가 아닌 듯하오.”
어느덧 말투도 바뀌어 있었다.
“엿장수면 엿장수지 그냥 엿장수는 또 무슨 엿장수랍니까? ”
“아니요, 내가 보는 것이 옳을 것이오. 그렇지요? 글은 얼마나 읽었소?”
“웬걸요, 어려서 겨우 통감이나 본 걸요.”
주인영감은 자기의 예감이 적중해서 신바람이 난 듯 밤이 깊도록 자리를 뜨지 않았다. 결국 찬형은 이튿날도 영감이 붙드는 바람에 묵어가게 되고, 서당에 온 아이들 글공부하는데 자연히 끼어들게 되어서 열흘 남짓 그 집에서 머물게 되었다.
통영에서 열흘 남짓 지낸 찬형은 남해의 겨울풍경이 그가 자란 평안도의 겨울풍경과는 사뭇 다른 것에 취해서 바다를 따라 남해안을 돌아 남국의 정취에 젖기도 했다. 그가 가진 입성이라고는 겨우 한 벌 옷밖에 없어서 겨울에 추운 북쪽지방을 돌아다니는 것보다는 남쪽지방을 돌아다니기에 훨씬 지내기가 좋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가 한수 이북의 평양지방으로부터 될 수 있으면 멀리 떨어져 온 것은 사람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온다간다 말 한마디 없이 훌쩍 집을 떠나왔으니 가족들은 또 얼마나 찾고 있을 것인가.
그 또한 고향에 두고 온 식구들이 보고 싶을 때도 있었다. 뒷날 그가 스님이 되어서 읊은 게송(偈頌)에 이런 것이 있다. 물론 게송에서 말하고자 한 속뜻은 은유적인 표현을 빌어서 부처님이 가르친 참의 세계를 보여주고자 한 것이겠으나, 그 게송의 겉으로 드러나는 언어표현에서 인간 찬형의 고향을 그리는 심정을 엿볼 수도 있지 않을까.
그의 방랑생활은 1년이 지나면서 차츰 고생이 덜했으나 처음에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행이었다. 말이 엿장수지 엿장수를 해서 이득을 보고자 하는 것도 아니어서 엿을 팔고 나면 본전에서 밑지는 경우도 있었다.
찬형은 방랑생활을 하다가 문득문득 자신이 무엇 때문에 이런 생활을 하고 있는가를 되묻기도 했다. 인생의 포기인가, 도피인가, 참회인가…. 스스로 선택한 고행이건만 때로는 자신을 가누기가 힘겨웠다.
이 고행의 목적은 무엇인가? 언제까지 지속해야 하는가? 무작정 떠돌며 고행한다고 참 인생의 의미를 깨달을 것인가? 사형수에 대한 참회는 되는 것인가? 인생을 잘못 살아왔다면 언제부터 올바른 인생길을 가게 된다는 말인가? 이런저런 생각으로 어떤 집 사랑방에서 뜬눈으로 밤을 새우기도 하고, 차라리 강물에 몸을 던져 목숨을 끊어 버릴까도 생각해 보았다.
무엇보다도 사형언도를 내렸을 때의 광경이 머리 속에 너무 생생하게 남아서 괴롭혔다. 독립운동을 하다가 잡혀온 중년의 남자는 두 눈을 부릅뜨고 당당하게 소리를 질렀다.
“너 이놈 ! 너도 같은 조선놈으로 일본의 녹을 먹고도 조선사람이라 말하겠느냐? 네 몸뚱아리에는 조선의 붉은 피가 흐르지 않고 왜놈의 피가 흐른단 말이냐? 내가 이승에서는 네 손에 죽는다만 저승에 가서는 네 사지를 갈기갈기 찢어서 삼킬 것이다.”
결국 자기가 집을 나와서 정처없이 떠돌아다니게 된 결정적인 단서는 이 사건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이 사건으로부터 도피하려는 자신을 발견하였다.
이렇게 2년이 넘게 방량을 하던 어느해 여름 강원도 대관령 부근의 시골을 지날 때였다. 날씨가 무더워 한낮에는 걸어다니기가 힘들었다. 이날도 한여름 땡볕을 피해가려고 고갯마루 나무그늘에서 쉬고 있을 때 저만큼아래에서 노스님 한분이 허위허위 올라오고 있었다. 그런데 노스님은 나무그늘을 몇 발자국 남겨놓고 문득 제자리에 서서 꼼짝도 하지 않는 것이었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스님, 볕이 따가우니 이 그늘로 들어서시지요.”
“알았네. 지금 나는 보시를 하고 있는 참이네.”
“예 ? 보시라구요?”
엿장수인 찬형은 스님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아마 불교에 그런 관행도 있나보구나.’
땡볕에 서있던 노스님은 한참 후에 그늘 아래로 들어섰다. 나무그늘에 들어선 스님은 수건으로 땀을 훔치고 자리를 잡고 앉았다. 스님의 몸은 깡말랐으나 어딘지 모르게 겉으로 풍기는 기색은 위엄이 있어 보였다. 오랜 수행을 한 듯 얼굴 표정이 맑고 밝았다. 이 세상 온갖 물정도 상관없는 듯 편안해 보이는 자세가 찬형의 마음을 끌었다. 한동안 침묵이 흐른 뒤 찬형은 입을 열었다.
“스님, 스님은 어디로 가시는 길이신지요?”
“허허허, 오는 곳이 없으니 가는 곳도 없다네.”
“예 ? 뭐라구요?”찬형은 스님이 하는 말을 분명히 알아듣지 못해서 귀를 의심했다.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뭐라고 말을 이어야 할지 몰라서 망설이고 있을 때 다시 스님이 입을 열었다.
“젊은이는 어디 가야 할 데가 있는가? 내가 보기엔 그대도 마땅히 정해서 가는 곳이 없을 듯한데, 그런 면에서 보면 그대와 나는 도반(道件)이구만, 껄껄껄.”
마치 천둥소리와도 같은 스님의 말을 다시 새겨보는 동안에 스님은 어느덧 바랑을 짊어지고 일어서서 나무그늘을 벗어나고 있었다.
천둥소리. 그렇다. 그것은 천둥소리보다 더 큰 충격적인 말이었다. 이제까지 그가 느껴보지 못한 새로운 세계의 비밀을 저 늙은 스님은 알고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와 들뜸이 정신을 번쩍 들게 했다. 찬형은 얼른 엿판을 지고 스님의 뒤를 따라나섰다.
스님은 뒤를 따라온 엿장수를 흘끔 뒤돌아보더니 말없이 걷기만 했다. 한동안 걷기만 하던 스님은 엿장수가 자기를 따라나선 것을 눈치채고 말했다.
“마땅히 묵어갈 곳이 없으면 누추하지만 내가 거처하는 토굴로 가서 하룻밤 묵어 가시게.”
“노장스님 ! 그렇게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내가 허락하기 전에 그대는 벌써 따라나섰질 않았는가?”
“------”스님이 어느새 자기의 의중을 간파했다고 생각하니 한편 쑥스럽고 한편 신비스런 도승처럼 보였다.
찬형은 길에서 만난 노장스님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산길을 걸어서 토굴로 오는 동안 대화를 통해서 불가의 깊은 뜻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불가에 대해서 신비함과 아울러 호기심이 더 크게 일었다.
노장스님의 토굴은 산중턱 양지바른 곳에 커다란 석벽이 있고, 그 석벽에 잇대어서 지어져 있었다. 토굴은 말이 토굴이지 자연석을 의지하여 거기에 나무토막을 얼기설기 얽어서 비바람을 가릴 정도의 엉성한 움막이었다. 토굴의 문을 열고 스님이 들어갔다. 찬형이 뒤따라 들어갈 수도 그렇다고 그냥 서있기도 민망해서 어찌할 줄 몰라 서성저릴
때 토굴 문을 삐끔 열고 스님이 머리를 내밀었다.
“언제까지 그렇게 서있을 참인가? 들어오시게. 비록 누추하기는 하네만 하룻밤 묵어갈 자리야 안 되겠나.”
찬형은 엿판을 벗어놓고 토굴 안으로 들어갔다. 토굴 안은 곁에서 보기와는 달리 석벽의 안쪽으로 꽤 깊숙이 파여져 있어서 방이 커보였다. 찬형은 아랫마을에서 엿과 바느질 도구를 팔고 받은 쌀을 꺼내 밥을 지어 스님과 함께 간단한 저녁식사를 마쳤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마주앉은 스님은 처음 만나는 사람끼리 으레 묻게 되는 고향이며 가족사항 같은 것을 묻지 않았다. 퍽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그가 길을 가면서 하룻밤 묵어가기를 청했을 때 집주인이나 사랑방의 손님들은 열에 아홉은 고향이며 가족에 대해 묻는 것이 통례였기 때문에 스님도 또 그런 질문을 하면 어떻게 하나 조바심을 내던 참이었다. 찬형은 스님과 밤이 깊도록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나 이제까지 세상에서 듣던 이야기와는 전혀 다른 세계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찬형은 참으로 오랜만에 속이 후련했다. 참삶의 길을 찾아서, 인생의 참뜻을 찾아서 지난 2년 남짓 떠돌며 지나온 길이 긴 터널과 같은 기간이었다면 이제 그 터널의 끝이 저만큼 앞에서 한점 빛으로 다가오듯 회망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스님과 작별하고 토굴을 떠나올 때 찬형의 머리 속에 남은 말은 ‘금강산 도인’ 이라는 말이었다. 선재동자가 도를 구하고자 쉰세명의 선지식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먼저 지혜의 으뜸인 문수보살로부터 가르침을 받고 격려되어서 구도의 길을 떠나듯 찬형에게 토굴 속의 노인은 이를테면 문수보살과 같은 존재였다.
노스님이 일러준 대로 그는 이때부터 금강산 도인(道人)이 있다는 말만 머리 속에 담고 금강산을 향해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한가지 뚜렷한 목표가 서있었다.
‘여기에 내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참길이 있었구나. 나도 불문에 들어 스님이 되리라.’
금강산 도안을 찾아서
금강산은 우리 민족에게 불교성지의 하나로 여겨졌다. 민요 ‘강원도 아리랑’에도 나오듯 강원도 금강산은 일만이천봉 팔만구암자라 했다. 금강산의 골짜기마다, 봉우리 마다에는 절과 불보살의 설화가 얽히어 있다.
그러나 찬형은 토굴의 노스님으로부터 금강산에 ‘도인’이 이 있다는 말만 듣고 왔을 뿐 그 스님이 어느 골짜기 어떤 절에 거처하는지도, 스님의 이름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채 금강산에 온 것이었다. 금강산 일만이천봉 팔만구암자라 했으니 어느 세월에 그 많은 봉우리와 암자를 찾아다니며 도인을 찾는단 말인가.
엿장수 찬형이 찾아간 절 유점사는 금강산 4대 사찰답게 53불을 모신 능인전을 중심으로 하여 전면과 좌우로 승방(僧房) 선당사(禪堂寺) 육전(六殿) 3당1문(三堂一門) 3루(三樓)가 웅자를 보였다.
날이 저물어 객방에서 하룻밤 묵어가기를 청하면서 찬형은 한 젊은 스님에게 물었다.
“제가 듣기로는 금강산에 도인스님 계시다는데 그 도인스님이 혹시 유점사에 계십니까?”
“도인스님이라구요? 도인이라는 스님은 이 절에 안 계시는데요.”
“이름이 도인이 아니고 도가 높으신 스님 말입니다.”
“도가 높으신 스님이라… 아, 그럼 석두(石頭) 노장스님 말씀이시죠? 도인스님이라면 석두 노장스님을 이르는 듯한데 그 스님은 얼마 전에 신계사로 가셨습니다.”
찬형은 다시 신계사로 향했다. 신계사는 유점사처럼 스님이 많지는 않은 듯 스님의 자취가 얼른 눈에 띄지 않았다. 헛기침을 두어번 하여 인기척을 내니 열 살을 넘을까 말까 한 어린 행자가 문을 열고 나왔다.
“이 절에 석두스님이 계시느냐?”
“노장스님은 여기 안 계시고 보운암에 계십니다.”
“보운암이 여기서 얼마나 되느냐?” “저기 저기 보이는 개울을 건너 산모퉁이를 돌아가면 보운암입니다. 제가 모셔다 드리겠으니 저를 따라오십시오.”
스님들의 다소 놀라는 듯한 태도에 찬형도 멈칫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석두스님을 찾아봐러 왔습니다.”
스님들 가운데 풍채가 좋은 노장스님이 물었다.
“누구를 찾아왔다고 하였는가?”
“석두스님을 뵙고자 합니다.”
“어디서 왔는가?”
“유점사에서 왔습니다.”
이 대답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번쩍이는 섬광과 같은 질문이 머리를 내리쳤다.
“그러면 장안사에서 보운암을 올 적에 몇 걸음에 오셨는고?”
“예?”의외의 질문에 당황한 찬형은 귀를 의심했다. 잠시 멈칫거리는 순간 재차 질문이 떨어졌다.
“유점사에서 예까지 몇 걸음에 왔느냐고 물었네.”
엿장수 찬형은 순간 자기도 모르게 엿판을 벗어서 마루에 놓고 방으로 들어가 두 손을 공손히 마주잡고 세 스님이 앉아 있는 큰 방을 성큼성큼 한바퀴 빙 돌아서 앉았다.
“이렇게 왔습니다.”
질문을 한 스님은 고개를 끄덕였고 나머지 두 스님은 껄껄껄 웃었다.
“십년 공부한 수좌보다 낫네 그려.”
“암, 그렇다마다. 껄껄껄”이심전심(以心傳心). 만약 이 경우 몇 걸음에 왔노라고 걸음 숫자로 헤아려 대답한다면 그는 눈먼 나그네요 이미 몇 천리 몇만 리 밖에 있는 것이다. 찬형이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한바퀴 돌고 앉아서 이렇게 왔다고 한 것은 보통사람을 뛰어넘는 비범함이며 불교적인 표현을 빌면 그는 전생에 많은 수행을 해 온 선근(善根)이 있다는 것이다.
삭발하고 출가입산 허락 받다
스승과 제자는 이렇게 만났다. 사람은 태어나서 수없이 많은 사람을 만나고 헤어진다. 그 가운데는 옷깃만을 스치는 만남도 있을 수 있으나 필연적인 만남도 있는 것이다 만나서는 안 될 만남이 있는가 하면 만나야만 하는 만남도 있으니 찬형과 석두스님과의 만남은 만나야만 하는 만남이었다.
두 사람은 더 이상 말이 없었어도 이미 오래 전부터 잘 알고 지내온 사이처럼 눈빛만으로도 서로의 마음을 알 수 있었다. 참회와 회의와 연민으로 뒤범벅이었던 찬형의 머리는 석두스님을 만나고 나서부터 이상하리만큼 언제 그랬느냐는 듯 말끔히 씻겨졌다. 그리고 투명한 유리처럼 상쾌했다. 천근 만근이나 되는 무겁게 짓누르던 짐을 훌훌 헐어버린 듯 가뿐했다.
“그래, 무슨 일로 나를 찾았는고?”
“스님의 가르침을 받고자 합니다.”
“가르침이라… 무슨 가르침을 받고자 날 찾았단 말이던고?”
“예, 스님. 사람이 나고 죽는 이치를 알고자 합니다.”
“그럼, 머리를 깎고 먹물옷 입은 중이 되겠다는 말인가?”
“그러하옵니다. 소생이 불민하오나 거두어 주신다면 신영을 다해 이 길을 가고자 합니다.”
“중노릇이란 보기처럼 그렇게 쉽지는 않으니 한번 머리를 깎고 먹물옷을 입으면 부모처자도 버려야 하고 비단옷에 좋은 음식도 잊어야 하네. 중노릇한다고 해서 생사고뇌의 진리를 깨닫는다는 보장도 없는 것.중노릇 할 용기를 가지면 세상에서 어떤 고통도 견딜 수 있을 것이요, 남부럽지 않게 살 수 있으니 엿장수도 마음자리만 제대로 찾으면 그게 곧 부처님 자리가 될 걸세.”
“부처님 자리가 벼랑이든 가시밭길이든 세상 사는 고통보다 열배 스무배 험한 길이라도 그 길을 결단코 가고자 하오니 노장스님께오서 허락만 하여 주십시오.”
“그리 급할 게 없으니 오늘은 이만 가서 쉬게.”
찬형은 어린 행자의 안내로 큰절로 내려와 판도방에서 하룻밤을 지냈다. 산사의 밤은 웬지 더 정신을 맑게 하고 외로움을 느끼게 하였다.
찬형은 새벽 도량석 목탁소리에 잠이 꼈다. 세상은 오직 고요히 잠들어 있을 시간, 새벽 세시. 도량석 하는 스님의 염불소리와 목탁소리가 신계사 맞은편 석벽에 부딪쳐 온 산에 메아리쳤다. 밖은 아직도 어둠에 싸여 있는 시간에 스님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세수하고 단정한 차림으로 예불을 올리고 참선을 하거나 불경을 공부하는 것이다. 찬형은 처음 맞는 사원의 이같은 생활에 놀랐다.
지금 이 시간 온 나라의 사원은 모두 새벽 예불과 공부로 시간을 보낼 것이다. 이 땅의 불교가 유학자들의 탄압을 받으면서도 이날까지 지탱해온 것은 스님들이 하루 중에서도 가장 맑고 신선한 새벽의 기운을 받고 수행 정진하는 데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나름대로 해 보기도 했다. 이와 같은 스님들의 수도 정진이 계속되는 한 이 땅의 불교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며, 나아가서 조선의 정신도 영원할 것이라는 마연한 생각을 하면서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 문창살이 번하게 밝아올 무렵 문 밖에서 어린 행자의 부르는 소리가 났다.
“엿장수 아저씨! 큰스님께서 부르십니다.”
찬형은 석두화상 앞에 나아가서 큰절을 하였다.
“여봐라, 시자 밖에 있더냐?”
“예, 여기 있습니다.”
“너는 가서 삭도(削刀)를 가져오너라.”
서기 1925년 음력 칠월초하루. 마침내 이날 세상에서 촉망받던 판사이찬형은 금강산 신계사 보운암에서 석두화상으로부터 삭발하고 출가입산을 허락받게 되었다.
오늘이 내 생일이야
이날 머리를 깎고 오계(五戒)를 받은 찬형은 이제 세간의 찬형이 아니라 출세간에 갓태어난 사문이 되었다. 석두스님은 새로 태어난 스님에게 운봉(雲峰)이라는 법명을 지어주었다. 석두스님이 운봉이라는 법명에 대해서 해설은 해주지 않았으나 엿장수의 방랑생활을 운수행각에 비유해서 지어준 것일까. 아니면 구름에 감싸일 정도로 우뚝한 봉우리가 되라는 뜻에서 지어준 이름일까. 일반적으로 알려진 효봉(曉峰)은 뒷날 송광사에서 꿈속에 보조국사의 16세 법손(法孫) 고봉(高峰)국사로부터 받은 법명이고 학눌(學訥)이라는 법호는 보조국사 지눌(知訥)을 배운다는 뜻에서 스스로 지은 것이다.
이제부터 우리는 가장 널리 불리는 효봉이라는 이름으로 스님을 부르기로 한다.
스님은 매년 이날이 되면 새 옷을 갈아입었다. 늘 검소하여서 옷을 자주 갈아입지 않는 스님이 여느때 같으면 아직 갈아입을 때가 되지 않았음에도 옷올 갈아입는 것을 보고 제자들이 그 까닭을 물으면, “오늘이 내 생일이야” 하며 빙그레 웃었다.
절 내외 꽃은 일 도맡아 하며
화려했던 판사생활도, 속가에 두고 온 부모처자도 이제 모두 망각의 뒤안길에 묻어 버리고 이날 스님은 세간의 인연을 끊고 출세간에 새로 태어난 것이다.
효봉스님이 머리를 깎을 때 나이가 서른 여덟. 불가에서는 이렇게 늦게 머리를 깎고 출가한 경우를 일러서 ‘늦깎이’라고 부른다. 늦깎이 스님 효봉. 효봉스님인들 남보다 늦게 출가한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그래서 그의 용맹정진은 남달랐다.
효봉스님은 늘 석두화상이 계를 주며 한 말을 가슴깊이 간직했다.
“내가 그 동안 자네의 모습을 쭉 보아하니 자네가 엿장수라고 한 말은 사실이 아닌 것 같은데·--정말, 엿장수뿐이었는가?” 효봉스님은 속으로 흠칮 놀랐으나 공손히 머리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정말이옵니다. 소승의 말을 믿어주십시오.”
“자네가 엿장수만 했다면 글을 모를 텐데 화엄경을 읽을 정도라면 글공부도 웬만큼 한 것이 아니지 않겠나?” 그렇다. 효봉스님은 속가에서 사서삼경을 읽은 까닭에 불가의 공부는 체계적으로는 하지 못했으나 어떤 경전이라도 손에 잡고 읽으면 그 깊은 뜻이야 모르되 그 문맥과 의미는 알 수 있었다. 그래서 허드렛일이 끝나고 잠자리에 들기 전
절에 소장되어 있는 대장경을 읽으며 환희심에 젖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이런 사실을 아는 것은 한방에 거처하는 나이 어린 행자밖에 없었으므로 석두스님이 안다는 것은 행자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전해들은 이야기임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스님이 직접 본 것은 아닐 테니 끝까지 우겨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것은 옛날 머슴살던 집에서 주인집 도령님 공부하는 어깨 너머로 몇 글자 배워서 아는 것일 뿐 글공부는 정말 못했습니다.”
“음…, 어깨 너머 공부라… 아무튼 글을 안다면 숨어서 책을 볼게 아니라 오늘부터는 선방에 들어서 공부를 제대로 해보게.”
“감사하옵니다, 스님. 분부대로 거행하겠습니다.”
이날부터 효봉스님은 조바심을 내며 숨어서 책을 보지 않아도 되었다. 그리고 석두스님이 일러주는 대로 참선공부도 체계적으로 할 수 있었다. 효봉스님의 진도는 남달리 빨랐다. 석두스님은 효봉스님의 진도가 남다른 것을 보고 그가 엿장수라고 우겨대는 것은 거짓말임을 확신했으나 더 이상 그 곡절에 대해서는 입에 올리지 않았다.
체계적으로 공부하며 정진에 돌입
그해 겨울 동안거(쪽安居)를 하는 동안에 효봉스님이 독파한 불경은 보통 행자로 들어와서 수행승이 5년 읽어야 할 분량의 경전을 읽어냈다. 함께 수행하는 스님들도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스님이 한번 자리에 앉아서 책을 손에 들면 다음 끼니때가 되어야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이 다반사였다. 효봉스님은 대중이 함께 하는 시간 외에는 꼬빡 자리에 앉아서 눈을 책에서 떼지 않았던 것이다.
효봉스님은 스스로 약속한 대로 꼬박 석달을 하판(아랫목) 뜨거운 자리에 앉아서 다만 하루에 두 끼니 아침 죽과 사시공양 드는 일을 위해서 잠시 자리에서 일어설 뿐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 용맹정진에 들었다.
겨울의 금강산은 예로부터 개골산이라 불렀다. 한겨울 금강산에 눈이 쌓이면 산봉우리와 골짜기가 구별할 수 없을 만큼 모두 봉우리요 모두 골짜기인 듯 보였다. 눈 덮인 금강산에 눈보라가 몰아치며 매서운 추위가 몰아닥치면 산짐승도 발자취가 끊기고 스님들도 장작불을 지펴서 절절 끓는 선방에 틀어박혀 가끔 조는 사람을 깨우려는 죽비소리만 들려올 뿐이다.
엉덩이가 짓물러 터지도록 좌선에 용맹정진
선방의 규율은 아주 엄해서 나이가 많든 적든 출가한 순서대로 선방의 윗목에서부터 아랫목으로 자리를 정해서 차례로 앉도록 되어있다. 윗목을 상판이라 하고 아랫목을 하판이라 하는데 산중의 선방은 땔감 걱정이 없으니 온돌방의 아랫목은 절절 끓고 윗목은 냉기가 돌기 일쑤다. 그러니 하판은 졸음이 올 뿐 아니라 뜨겁기초차 해서 견뎌내기가 더욱 어려운 법이다. 효봉스님은 나이가 비록 많다고는 하더라도 가장늦게 출가했으므로 가장 아랫목 신세를 질 수밖에 없어서 얇은 방석 하나를 깔고 앉아서 졸음과 뜨거움을 견뎌내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사시공양시간이 되었다. 모두들 점심공양을 들기 위해 선방에서 나갔다. 그러나 효봉스님은 식당으로 가는 것도 잊은 채 결가부좌하고 참선삼매에 빠져있었다. 처음에는 함께 좌선하더니 수좌들이 식사시간이 되었음을 환기시켜 주었으나 나중에는 좌선을 방해하는 것이나 아닐까 해서 공양시간에 말없이 다녀오기도 했다.
공양을 마치고 방으로 들어온 수좌들은 방에서 나는 이상한 냄새에 코를 콩콩거렸다. 방안에 갇혀 있을 때는 냄새를 맡지 못했으나 밖에 나가서 신선한 공기를 마시고 난 뒤라서 금방 냄새를 느꼈다.
“이 무슨 냄새가 이리 고약할까? ”“글쎄 말이야. 나도 아침부터 좀 이상한 냄새가 나는 듯해서 물어보려던 참이었네.”
“뭐가 썩는 냄새 같기도 하고 고름 냄새 같기도 하고 말이야…” 방안 구석구석으로 냄새를 맡고 다니던 수좌들은 그 냄새의 진원지가 효봉스님임을 알아내게 되었다. 그리고 수군거렸다.
“저 운봉수좌한테서 나는 냄새 같다.”
“저 사람, 앉아서 똥을 싸고도 모르는 게 아닌가? ”그러나 스님은 그러한 소리가 귀에 들어올 리 없었다. 마침내 수화들이 효봉스님의 어깨를 흔들었다.
“여보게, 운봉수좌! 자네 이거 앉아서 옷에다실례한 것 아닌가? 일어나보게. 냄새가 나서 견딜 수가 없어.”
그제야 스님은 좌선에서 깨어났다. 그리고 자기에게 무슨 문제가 발생했음을 깨달았다. 스님은 앉았던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엉덩이에 방석이 달라붙었다가 떨어졌다. 바지의 엉덩이 부분에 시뻘건 피고름이 배어나와 엉겨불어 있는 것이 아닌가.
“이 사람, 이거 피고름이 아닌가?”
“예? 피고름이라구요? ?”
“이것올 좀 보게. 이게 피고름이 아니고 무엇인가?”뒤를 돌아본 효봉스님은 한편 부끄럽기도 하고 한편 이상하기도 해서 손으로 떼어내려 하였다. 그러나 바지는 엉덩이 살에 달라붙어서 쉽게 떨어지지를 않았다. 몇 날 며칠을 앉아있는 동안 엉덩이가 짓무르고 상처가 생겨 피고름이 나서 냄새를 풍겼던 것이다.
효봉스님은 겨울 석달 동안 이렇게 한번 가부좌를 틀고 앉으면 좀체로 자리에서 일어날 줄을 모르고 절구통처럼 앉아 있기만 한다고 해서 ‘절구통 수좌’라는 별명을 얻었다. 또 이때 생긴 엉덩이의 상처가 탈 없이 아물기는 했어도 뒷날까지 상처로 남아 있었다.
입문 4년 만에 도 깨치러 토굴정진 시작
석두스님이 화두를 내리며 일러준 설법 내용이 머리 속을 떠나지 않고 더욱 짓눌렀다.
스님은 무자 화두를 깨치기 위해서 금강산의 이곳저곳에 있는 암자에서 용맹정진도 해보고, 선지식을 두루 찾아서 운수행각도 해보았으나 그것이 그렇게 쉽게 보이지를 않아서 초조하기만 했다. 자신의 두터운 속세의 업장(業障)과 무능함을 한탄했다. 효봉스님은 비장한 각오를 하고 석두스님을 찾아뵈었다.
“스님께 한 가지 청이 있어서 왔습니다.”
“청이라니 ? 그게 무언가 일러보아라.”
“예, 소승이 반야에 인연이 짧은 데다가 업장이 두터운지라 도무지 화두가 열리지 아니하옵니다. 하여서 스님, 다름이 아니옵고 토굴을 짓고 그 속에 들어가 사생결단을 하고자 하옵니다.”
“사생결단?”석두스님은 문득 눈을 크게 뜨고 효봉스님을 쳐다보았다.
“스님! 토굴에 들어가 무자 화두를 깨칠 때까지는 바깥 세상에 나오지 않을 생각입니다. 허락하여 주십시오, 스님!”
“토굴에 들어가 깨닫지 못하면 나오지 않겠다?”
“예, 결단코 바깥 세상에 나오지 않겠습니다.”
실로 놀라운 각오였다. 석두스님은 효봉스님의 얼굴빛에서 이미 그 각오를 읽었다.
“알았네. 자네의 각오가 정이 그러하다면 허락할 터인즉 바깥 걱정은 말고 들어가게. 부처님도 설산에서 6년 고행을 하셨고, 달마조사께서도 소림굴에서 9년 면벽 끝에 크게 깨달았으니 그대도 꼭 한 소식을 얻어오게.”
그런데 효봉스님이 토굴에 들어가 있는 동안 시봉을 들어줄 스님이 필요했다. 석두스님은 대중을 모아놓고 누가 효봉스님의 시봉을 들어주겠느냐고 물었다. 그러나 대중은 침묵을 지킬 뿐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자가의 참선수행을 위해서 금강산까지 왔는데 남의 시봉이나 들면서 기약도 없이 몇 날 며칠을 허송세월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기 때문이다.
석두스님은 보문암과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비구니 도량인 법기암으로 갔다. 이때 마침 다행스럽게도 효봉스님의 시봉을 들어주겠다는 젊은 스님 한 사람이 자원을 했다. 법기암 원주인 대원(大願)스님이었다.
효봉스님이 머리를 깎고 불문에 들어온지 4년. 그의 세속 나이 마흔 세살 되던 서기1930년 초봄. 깨닫기 전에는 절대로 바깥세상에 나오지 않으리라는 굳은 결심으로 토굴로 들어갔다. 토굴은 겨우 방 한 칸에 뒤쪽으로 용변을 볼 수 있게 구멍 하나를 뚫고, 앞쪽으로는 겨우 밥그릇 하나 들락거릴 만한 창구멍 하나를 역시 남겨두고는 드나들 수 없도록 사방벽을 밖에서 봉해 버렸다. 토굴 안에는 겨우 입은 옷 한 벌과 방석 석장뿐 아무것도 가지고 들어가지 않았다.
“운봉수좌님! 금강산의 추위는 이른 겨울부터 늦겨울까지 살을 파고드는 추위옵니다. 옷가지랑 이불을 더 가지고 들어가시지요.”
“내 잠을 자러 들어가는 것이 아니요, 장좌불와(長坐不臥)를 할 것이므로 이불은 필요 없고, 안에만 있을 것이므로 갈아입을 옷도 필요 없을 것이네. 다만 하루 한번 군불이나 지펴주면 고맙겠네.”
“그래도 필요한 것이 있으면 말씀 주십시요, 스님.”
“되었네. 밥은 하루에 한끼만 먹을 터이니 창구멍 앞에 가져다두고 가시게.”
“정말 필요한 것이 없겠습니까” 제가 매일 들를 테니 언제라도 말씀만 주시면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앞으로 말 대답은 일체 하지 않을 테니 여기 와서 아무 말도 하지 마시게.”
“묵언(默言)정진까지 하신다구요 ? 잘 알겠습니다. 그럼 소승 이만 물러갑니다.”
효봉스님의 토굴정진은 결사적인 각오였다. 일체 인간세상과는 절연된 무념무상의 상태였다.
무더위가 가시고 찬바람에 단풍이 드는가 하더니 어느새 눈발이 휘날리기 시작하는 금강산의 겨울은 동해의 파도 바람이 유난히 매서웠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부터 내리던 눈이 하루종일 그치지 않고 그 이튿날도 또 그 이튿날도 내려 쌓여서 꼬박 사흘 밤낮을 내렸다. 눈은 사람의 키를 넘어버렸다. 방문 앞에서 법당으로 통하는 길과 해우소(변소)가는 길만 겨우 터널처럼 굴을 뚫어서 다닐 뿐 외부세계와는 완전히 두절된 상태였다.
효봉스님에게 아침 공양을 나르기 위해 토굴로 향했던 시봉은 불과 몇 걸음도 나아가지 못하고 되돌아오고 말았다. 평소에 다니던 길마저도 혼적조차 찾을 수 없을 지경이었다. 더구나 법기암에는 비구니스님들만 있었으므로 큰절인 신계사는 물론 석두스님이 있는 보운암으로도 연락이 두절되어서 구원을 요청할 수도 없었다. 스님들은 생각다 못해 법기암쪽으로 눈을 헤집고 굴을 뚫으면서 나갔다. 그러나 눈 속에 굴을 뚫으면서 나가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부지런히 눈을 헤집고 나가는데도 사흘 동안 겨우 200미터를 조금 넘게 나아갔을 뿐이었다. 토굴까지는 아직도 200미터도 넘는 거리였다.
이때 큰절에서 젊은 스님들과 함께 눈을 헤치고 석두화상이 법기암에 나타났다.
“토굴스님은 어찌 되었느냐? ”
“길이 막혀서 사흘이나 공양을 나르지 못했습니다. 군불도 지펴드리지 못했습니다.”
“나무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을 부르고 난 석두화상은 어이가 없어서 목청을 높였다.
“토굴 속의 스님은 하루 한끼밖에 먹지 못하는데 사흘씩이나 공양을 나르지 않았다면 어찌 목숨을 부지하란 말이던고! 우리는 토굴에 들어간 스님과 약조를 했었다. 하루 한끼 공양과 군불을 지펴주겠다고 말이다. 그런데 그 약조를 깬대서야 어찌 수행인의 취할 태도라 하겠느냐? 그러고도 너는 네 목구멍으로 밥이 넘어가더냐!”
“스님, 저희들이 눈 속을 헤집고 나갔으나 토굴까지 당도하지 못했습니다.”
석두스님이 화를 내기는 했으되 어쩔 수 없는 사태라는 걸 모르는 바 아니었다. 더 이상 꾸지람을 한다고 지나간 과거가 바로 되는 것도 아니었다. 일분 일초라도 서둘러 토굴로 가는 일이 급했다. 석두스님과 젊은 스님들은 힘을 배가하여 눈 속을 헤치고 앞으로 전진하였다.
다행히 눈은 그치고 천지가 온 은세계를 이루어 바람조차 멎은 금강산은 새소리조차 끊어지고 적막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다만 간밤에 내린 눈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는 소나무가지가 부러지는 소리가 간간이 찌렁찌렁 산골짜기를 울릴 뿐이었다.
영하의 날씨 속에서 꼬박사흘 동안 물 한 모금 먹지 못한 효봉스님은 어떻게 되었을까. 더구나 제대로 지은 집도 아닌 토굴 속에서 스님은 온전할까. 토굴에 다다른 일행은 우선 스님이 성한지 어떤지가 궁금했다.
“스님 ! 스님! 괜찮으셔요, 스님?”
“------”안에서는 아무런 인기척도 없었다. 한 수좌가 급한 나머지 공양그릇을 들여보내고 빈 그릇을 받아내는 창구멍의 덧문을 열고 속문을 통해서 안을 들여다보았다. 스님은 방 한가운데에 결가부좌를 튼 채 절구통처럼 그대로 앉아 있었다. 살아있음을 비로소 확인한 수좌가 여러 대중에게 이 사실을 알렸을 때 대중들의 업에서는 일제히 “나무관세음보살”이 한숨에 터져나왔다.
그러나 효봉스님은 이때 심한 동상에 걸렸다. 창구멍을 통해서 안을 들여다본 수좌는 스님이 결가부좌한 것만 보았지 몸이 퉁퉁 부어 있었던 사실은 발견하지 못했다. 이윽고 부엌에 군불을 너무 뜨겁게 지펴서 갑자기 더워지자 스님의 몸이 녹으면서 온몸이 가려워 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동상의 후유증은 너무 켰다. 일단 부었던 몸은 다시 빠졌으나 발가락과 귓바퀴에 박힌 얼음은 쉽게 빠지지를 않아서 토굴을 나온 뒤에도 해마다 겨울이 되면 동상이 재발하여 고생을 해야 했다.
이렇게 효봉스님은 토굴 속에서 겨울을 견뎌냈다. 자연의 순환은 어김없어서 얼어 붙었던 시냇물이 졸졸졸 녹아 흐르고 지난해 피었던 가지에 또 노란 꽃망울을 맺게 했다. 이 지순한 순환의 진리를 우리는 해마다 보면서 살아간다. 그러나 토굴 속의 효봉스님은 이 자연의 순환법칙조차도 잊은 것일까, 아니면 순환조차 빚은 것일까. 토굴을 감싸고도는 공기는 그저 묵묵할 뿐이었다.
그러던 여름 어느 날.
참으로 놀라운 사건이 벌어졌다. 공양을 날라간 시봉스님은 깜짝 놀랐다. 어제 창구멍으로 들여보낸 공양그릇이 그대로 있었기 때문이다. 창구멍으로 매일 들여보내는 공양그릇이 이튿날 비어 있는 것으로 바깥에서 생사를 확인하였는데 그날은 공양그릇이 그래도 있지를 않는가! 공양을 날라간 시봉스님은 털컥 가슴이 내려앉았다. 문득 불길한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스님! 스님! 왜 공양을 드시지 않으셨어요? 어디 편찮으셔요?”
“스님! 스님! 어찌된 일이옵니까, 스님!”
“------”안에서는 언제나 그랬듯이 아무런 대꾸도 없었다.
시봉스님은 공양을 들여보내는 창구에 귀를 대고 숨소리를 찾았다. 그러나 숨소리는 커녕 선뜩 무서움이 그 창구멍으로 와락 쏟아져 나왔다.
시봉스님은 두려움으로 머리카락이 곤두섰다. 온몸이 긴장하여 발걸음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부엌문을 막 나서려는 찰나,
“험! 험!”
하는 기침소리가 들렸다. 시봉스님은 다시 한번 놀라서 가슴이 뛰었다. 효봉스님의 헛기침은 시봉의 근심스럽고 두려운 마음을 다 안다는 듯, 그래서 안정시키기 위해서 하는 기침이 틀림없었다.
효봉스님도 처음 시봉스님이 와서 외쳤을 때 비로소 어제의 공양이 창구에 그대로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러니까 그 전날부터 공양이 온 줄도 모르고 선정삼매(輝禪定三昧)에 빠져있었던 것이다.
무문토굴을 박차고
효봉스님이 사생결단의 각오로 금강산 법기암 뒤에 무문(無門)토굴을 짓고 무자 화두를 둔 채 용맹정진에 들어간 지 꼬박 1년하고도 6개월이 흘러갔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이 바뀌고, 서기 1931년 초가을 어느 비개인 날 아침. 청명한 가을햇살을 받은 나뭇잎들이 싱그러운 내음을 풍기면서 반짝거리고 있었다.
지난밤 하늘이라도 무너져 내릴 듯이 으르렁대던 천둥소리도 말끔히 걷힌 날 아침. 토굴에서 놀라운 사건이 벌어졌다. 효봉스님은 홀연히 발로 벽을 박차고 토굴 밖으로 나오고야 말았다.
드디어 무자 화두를 깨치고 한 소식을 얻은 것이다. 과거와 현재 또 미래의 무수히 많은 수행자들이 오로지 이 소식을 듣기 위해서 뼈를 깎고 피를 말리는 정진을 하는 것이 아니던가. 지리한 장마가 걷히고 간밤의 천둥소리가 몇은 뒤 밝은 햇살이 온 우주를 비추듯 뼈를 깎고 피를 말리는 정진 끝에는 반드시 한 소식이 있는 법.
탄로난 전직 판사
효봉스님은 용맹정진 끝에 오도를 했으나 그의 무자(無字) 화두를 들고 참선하는 일은 절대로 게을리하지 않았다. 효봉스님은 그해 겨울 유점사로 갔다.
유점사에는 마하연 선원에 만공스님이 눈푸른 납자(納子)들을 데리고 수행을 지도하고 있었다. 청담, 고암 같은 뒷날의 큰스님들도 이때 여기서 참선수행을 하였다.
만공스님은 효봉스님에게 입승(立繩)의 소임을 맡겼다. 입승이란 절집안의 규율을 맡은 스님을 말한다. 효봉스님은 다른 수행승의 규율을 감찰하는 입승의 소임을 맡았으되 스스로 수행의 모법을 보였다. 꼬박 칠일 동안 결가부좌한 채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화선을 하기도 했다.
효봉스님이 유점사 마하연 선원에서 참선수행을 하고 있던 어느 가을날이었다. 가을의 금강을 풍악(楓岳)이라 부를 만큼 금강산은 온통 타오르는 불꽃처럼 단풍으로 활활 타고 있어서 마주선 사람의 얼굴 조차 붉을 지경이었다. 단풍놀이를 하기 위해서 매일 금강산을 찾는사람들은 으레 유점사를 들르게 마련이다. 그러니 일일이 관광객에게 신경 쓸 겨를이 없고 관광객들도 옆의 사람보다 단풍에 정신이 팔려서 그저 옷깃을 스치고 지나갈 뿐이었다.
효봉스님은 엿판을 지고 유점사와 장안사를 거쳐 신계사에서 머리를 깎은 까닭에 한때는‘엿장수수좌’로 불렸다. 다른 수화들이 처음에는 의심하였으나 효봉스님의 말을 믿고 처음에 가졌던 의심을 잊어버리게 되었다. 그러자 효봉스님도 자연히 신분을 속이는 경계심을 잊어버리고 지내게되었다.
그러던 어느날 문뜩 관광객 가운데 한 중년의 사나이가 아는 체 하면서 다가오는 것이 아닌가.
“여보시오, 스님 혹시 저를 모르시겠소?”
“뉘신지요…? 잘모르겠습니다만.”
“혹시 이찬형판사가 아니오? 저 평양 복심법원에서 근무하지 않았던가요?”
이찬형.
이미 잊은 지 오래인 이름이었다. 몇 년 만인가 그 이름을 귀로 듣는 것이. 그러나 스님은 이 이름을 듣자 무슨 못된 짓이라도 하다가 들킨 것처럼 갑자기 가슴이 뛰고 얼굴이 굳어졌다.
효봉스님은 그제야 그 사나이가 평양의 복심법원에서 함께 근무한 일이 있는 일본인인 것을 알았다. 그 순간 스님은 와락 사나이의 옷소매를 잡아끌고 인적이 없는 법당의 뒤안으로 갔다.
“이보시오. 내가 판사를 지냈다는 사실을 여기서는 비밀로 하고 있으니 제발 입밖에 내지 말아주시오. 부탁이요. 약속해 주시오.”
“아, 알았소. 그건 그렇고, 어찌된 일이오? 온다간다 말 한마디 없이 바람처럼 사라졌던 판사 이찬형이 이렇게 스님이 되어 있다니...”
“그 까닭은 어찌 일일이 다 말하겠소. 어찌되었건 내 과거 신분에 대해서 발설하지 않는다고 약속부터 해주시오. 이 절에서는 그저 내가 떠돌이 엿장수라는 사실밖에는 모르오!”
“당신이 떠돌이 엿장수였다고?”
“그렇소, 떠돌이 엿장수, 그게 나요.”
일인 판사는 떠돌이 엿장수라는 말이 그의 생각을 어지럽혀서 무엇이 무엇인지 더욱 모르게 되었다. 7년 전 평양의 복심법원에서 함께 근무하던 이찬형판사가 행방불명이 되어서 일대를 발칵 뒤집어 놓았는데, 이제 그가 승려가 되어 있다는 사실이 일본인 판사에게는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 듯했다. 더구나 과거의 신분을 숨겨달라고 간구하는 스님의 표정이 너무나 진지했기 때문이다.
“난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소이다. 그 누구보다도 장래가 촉망되던 판사가 어느 날 갑자기 일언반구도 없이 종적을 감추다니 누가 그걸 이해하겠소? 그럼 평양의 가족들은 당신이 입산하여 승려가 된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
“모릅니다. 가족들한테도 어디로 간다는 말 한마디 없이 나와서 그 길로 엿판을 지고 팔도강산을 떠돌아 다녔으니 아마 어디서 죽은 줄로만 알고 있을 테지요.”
그렇다. 하루아침에 훌연 자취를 감춘 아들의 소식을 기다리던 어머니, 남편의 소식을 고대하던 아내, 그리고 아버지를 기다리던 어린 아들과 딸은 하루 이틀 사흘이 지나고 3년이 지나자 돌아오지 않을 사람으로 알고 나간 날을 제삿날로 정해서 매년 제사를 지내고 있었다.
그런데 효봉스님의 그토록 간절한 부탁에도 불구하고 일인 판사는 유점사를 떠나기 전 주지스님을 만나 효봉스님이 판사였다는 사실을 이야기하고야 말았다. 이 말을 들은 주지스님은 깜짝 놀라 눈이 휘둥그래졌다.
“아니, 엿장수라고 하던 운봉수화가 평양 복심법원에서 판사를 지냈단 말이 정녕 사실입니까? ”
“그렇습니다. 누구보다도 장래가 촉망되는 판사였는데 어느 날 온다간다 말 한마디 없이 종적을 감추고 말았지요. 오늘 유점사에서 이판사를 만났는데 판사였던 사실을 비밀로 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허나 그저 엿장수 출신으로만 알고 소홀히 대할까 염려되어서 내가 주지스님께 말씀드리니 그리 알아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우리 절집안 풍속에는 세간의 신분이 어쨌건 묻지를 않으니 그럴리야 있겠습니까? 아무튼 이제야 운봉수좌에 대한 의문이 풀렸습니다. 어쩐지 엿장수를 했다는 사람답지 않게 학식도 넓고 구변도 좋아서 의문을 했었죠. 남다른 데가 많았으니까요.”
일본인 판사가 효봉스님과의 약속을 깨고 판사였던 사실을 탄로낸 것은 순수한 동기에서 효봉스님을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속인으로서의 우정일 뿐 효봉스님에게는 오히려 큰 부담이 되는 처사가 아닐 수 없었다.
이날로부터 효봉스님에게는 또 하나의 별명이 생겼으니 그것은 ‘엿장수 중’ ‘절구통수좌’에 이어 ‘판사 중’이라는 것이었다.
판사스님의 진가는 세간법(世間法)에 대처하는 데에서 발휘되었다. 마침 유점사에서 소유한 임야관계로 소송이 벌어져서 일심(一審)에서 사찰측이 패소하게 된 사건이 있었던 것이다. 일제는 동양척식회사를 세운 뒤 전 국토를 측량하고 측량술을 잘 모르는 조선인의 전답과 임야 등 부동산을 가로채갔다. 특히 광대한 면적의 토지를 가진 사찰은 저들의 주요 수탈 대상이 되었다. 오대산 월정사, 설악산 신흥사, 금강산 건봉사와 장안사 등 전국 31본산의 사찰 소유임야와 전답은 이때 거의 수탈당하고 말았다. 스님은 이러한 사실을 잘 알기 때문에 일심의 재판 기록을 가지고 오게 하여 판결문을 검토했다. 그리고 변호사의 변론이 잘못된 부분을 지적해 주고 새로이 변론할 방향도 일러주었다.
스님으로부터 변론의 요령을 들은 변호사는 그대로 변론을 하여 마침내 이심(二審)에서는 승소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했다. 그러니 아무리 속간에서는 과거사를 묻지 않는다는 절집안 풍속이라 하더라도 판사였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동료 스님들의 대하는 태도가 이전보다 달라짐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그것이 효봉스님에게는 여간 불편하지 않았다.
효봉스님은 예전과 다른 대중들의 눈길이 부담스러워서 유점사를 떠나 일단 여여원(如如院)으로 옮겨앉았다. 여여원은 독립투사 일허(一虛)거사가 일경의 눈을 피하기 위해 과수원으로 위장하고, 그 안에 암자를 세우고 암자 뒤편에 토굴을 지어서 독립투사들이 몸을 숨기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여여원 선원은 관리인 입구에서 수상한 사람들의 출입을 통제하고 있었다.
여름 하안거 참선은 차라리 겨울 동안거보다 더 어려웠다. 우선 무더위로 등줄기에서 흘러내리는 땀도 땀이려니와 밀려오는 졸음을 참는 일이 또한 여간 어렵지 않았다. 금강산은 산속이라서 시원한 바람이 가끔은 불어왔어도 삼복이면 선방의 문을 있는 대로 활짝 열어젖히고 좌선을 해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오후 늦은 시간, 젊은 남녀 한 쌍의 여행객이 마침 과수원을 관리하는 처사와 함께 법당 뜰을 들어서는 것이 효봉스님의 눈에 들어왔다.
무의식중에 일행을 본 효봉스님은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하였다. 그 여행객 중에 젊은 남자는 속가에 두고 온 아들 영발이가 틀림없었기 때문이다. 꼭 10년 전 아직 코흘리개 어린아이였던 영발이는 이제 건장한 청년이 되어 있다. 그러나 어릴 적 모습은 그대로 남아서 첫눈에 알아볼 수 있었던 것이다.
신분 탄로나자 유점사를 떠나
아들 영발이임을 확인한 효봉스님은 순간적으로 몸을 돌려서 돌아앉았다. 한번 가부좌를 틀고 선방에 앉으면 좀체로 고개도 까딱하지 않는다하여 절구통수좌라는 별명을 얻은 효봉스님이 웬일인지 문 쪽을 향하고 앉았던 가부좌를 풀고 돌연 등 뒤의 벽쪽을 향하여 돌아앉은 까닭을 다른 스님들은 알 리가 없었다.
영발이가 과수원 밖으로 빠져나가고 나서야 효봉스님은 다시 돌아앉았다. 그리고 눈길이 과수원 밖으로 자꾸 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인정이었다. 불가에서 수행하는 납자들 사이에 ‘인정(人情)이 짙으면 도심(道心)이 성글다’는 말이 있는데 아들의 영상이 머리 속에서 맴도는 것은 도심이 성글기 때문인가. 떨치려고 떨치려고 해도 아들의 영상이 떠나지를 않았다. 더불어 어머니와, 아내, 둘째아들 영실이와 집을 떠날 때 한창 재롱을 피우던 막내딸의 얼굴이 영화의 장면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효봉스님은 정진이 다 끝난 시간에 아들 영발이를 안내한 관리인을 조용히 불렀다.
“부르셨습니까, 스님?”
“응, 내가 불렀네.”
“무슨 분부라도 계시온지요?”
“아닐세, 별다른 일이 아니라 아까 낮에 길을 묻던 젊은이들 생각이 나나?”
“아, 예, 신혼부부라고 하던 그 젊은이들 말이지요? 금강산으로 신혼여행을 왔다면서 과수원 안에 있는 절을 굳이 구경하겠다기에 수상한 듯 하지는 않아서 제가 직접 안내를 했습니다. 제가 혹시 실수라도 저질렀습니까?”
“아닐세, 아무것도 아니니 그만 가서 일보시게.”
이것이 출가득도한 이후 세속의 인연을 먼빛으로나마 만난 처음이자마지막이었다.
구름따라 흘러흘러 천년고찰 송광사에
스님의 앞에는 다시 정처없이 떠나가는 행운유수(行雲流水)의 길이 남쪽으로 열려 있었다. 금강산을 떠나 남쪽으로 방향을 잡으니 마땅히 정한 곳은 없으나 자연히 동해안을 따라서 설악산에 발길이 머물렀다.
그후 오대산에서 한암(漢岩)스님을 뵈옵고 덕숭산(정혜사)에서는 만공선사로부터 선옹(船翁)이라는 호(號)를 받았다.
조계종의종지가시작된송광사전경.송광사는
효봉스님이 그의 생애 중 가장 오래 머문 곳이었으며
그가 효봉이란 법호를 받은 곳이기도 하다.
만공선사와 이별하고 호봉스님은 남으로 남으로 길을 걸었다. 그리하여 발길이 닿은 곳이 천년사찰 송광사.
보조국사의 품안에서
송광사는 우리 나라 삼보(三寶)사찰 중 승보사찰로 유명하다.
삼보란 무엇인가. ‘세 가지 보물’이란 뜻이다. 산스크리트어로 라트나트라야(Rama-traya) 또는 트리라트나(Tri-ratna)라 한다. 그것은 첫째가 진리를 깨달은 붓다(Buddha), 둘째가 붓다가 깨달은 진리, 곧 다르마(Dharma), 그리고 그 가르침을 신봉하며 수행하는 사람들의 집단인 상가(Sangha)를 말한다. 붓다를 불(佛), 다르마를 법(法), 상가를 승(層)이라 번역하여 불 · 법 · 승 셋을 합하여 삼보라 한다. 우리 나라는 부처님의 진신 사리를 모신 통도사를 불보사찰, 불설대장경이 간직된 해인사를 법보사찰, 16국사를 배출한 송광사를 승보사찰이라 하여 보물로 여기게 되었다. 그래서 이 세 절을 삼보사찰이라 부른다.
송광사는 전남 승주군 조계산 자락에 아늑하게 자리하고 있으면서 일찌기 여기서 선풍(禪風)이 일어나 오늘날 한국불교 조계종 종지(宗旨)의 발상지가 되었다. 고려 말 원(元)의 침략으로 퇴폐한 시대를 맞아 불교는 기복제액(祈福除厄)으로 흘러서 본지를 벗어나고 있을 때 보조지눌국사가정혜결사(定慧結社)운동을 벌여서 기복불교를 버리고 불교를 중흥하는 역사적인 위업을 달성한 것이다. 정혜결사의 요체인 정과 혜는 계와 더불어 삼학으로 불도 수행의 근본 이념이 아니던가. 그때 보조국사가 정혜결사를 결성하게 되는 고고한 외침에 잠깐 귀를 기울여보자.
마땅히 명리를 버리고 산림에 깃들어 항상 정(定)을 익히고 혜(慧)를 고름으로써 업무를 삼으며, 부처님께 예배하고 경전을 읽으며, 맡은 업무에 이르러서도 각각 그 소임을 따라 경영하여, 이같이 연(緣)을 따라 심성을 수양하면서 평생을 진인달사(眞人達土)의 고행(苦行)을 쫓아가면 어찌 유쾌하지 않으랴.
송광사는 보조국사 이후 열여섯 명의 국사를 배출했으나 가히 승보사찰이라는 이름이 부끄럽지 않다. 효봉스님이 또한 송광사에서 l0년 동안 머물며 이 나라 불교의 중흥에 몸바쳤으니 송보사찰이라는 이름이 다시 그 빛을 더한다. 그러면 어찌하여 운수행각을 방편으로 삼는 스님이 10년씩이나 한곳에 머물게 되었던가. 여기에는 예사로이 보아 넘기지 못할 숙연과도 같은 한 토막 이야기가 있다.
꿈속의 고봉화상으로부터 ‘효봉’법호 받아
효봉스님은 예산 덕숭산 만공선사의 선풍에 흠뻑 취한 채 구름처럼 바람결에 실려 발길을 조계산으로 향했다. 조계산 어구에 다다랐을 때 효봉스님의 업에서는 누구 듣는 이도 없는데 이런 말이 저절로 흘러나왔다.
“그것 참 이상한 일도 다 있구나. 내 일찌기 이곳에 한번도 와본 일이 없건만 어찌하여 산모퉁이 길이며 돌뿌리 하나하나가 마치 고향집같이 느껴지는 걸까.”
스님은 가던 걸음을 멈추고 낯익은 듯한 주위를 휘휘 둘러보고는 다시 걸음을 떼어놓았다. 스님이 태어난 곳은 평안도 지방이므로 성장하여 일본유학을 마칠 때까지 고향을 떠나 본 적이 없었고 판사를 그만두고 엿장수 행각을 벌일 때도 산천을 두루 돌아다녔으나 이곳까지는 와보지 않았었다. 분명히 처음 오는 곳인데도 낯설지 않다면 전생에 무슨 인연이 있었단 말이던가. 어쩌면 이절에서 전생에 오래살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울 하며 송광사의 경내로 들어섰다.
이름 그래도 소나무가 빽빽이 들어선 산자락에 새둥지처럼 송광사는 아늑해 보인다. 지금은 이름이 조계산이지만 신라 말 혜린선사가 처음 절을 짓고 길상사라 할 때는 이 산의 이름이 소나무가 많다하여 송광산(松廣山)이라 했다. 그러니 절이름을 산에서 빌리고 산이름을 이 절의 종지에서 빌려간 셈이다. 절과 산이 서로 이름을 주고 받으며 바꾸어 달고 있는 것도 깊은 인연이 아닐 수 없다.
한편, 이 산에서 열여덟 분의 국사가 배출되어 세상을 널리 제도할 지세라서 십팔공(十八公)의 파자(破字)인 송(松)자와 넓을 광(廣)자를 따서 송광사라 불렀다는 전설도
있다.
밤이 되자 송광사는 저녁연기가 자욱이 깔려서 한폭의 동양화같이 침묵 속으로 가라앉았다. 저녁예불 드리는 염불소리가 청아하게 하늘로 닿았다. 그러나 우리 나라에서 건물이 가장 많고 도인이 가장 많이 배출되고 성보(聖寶) 문화재를 가장 많이 보존하고 있다 해서 삼다사(三多寺)라 자랑했던 승보사찰 송광사 비가와도 비 한 방울 맞지 않고
다닐 수 있다던 장엄한 도량의 모습이었으나 공부하는 스님들이 많지 않았으니 황량하기만 했다.
일본 불교의 영향이 이곳 승보의 도량에도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효봉스님이 처음 송광사에 당도한 서기 1937년 송광사에는 사판(事判)스님들은 많았으나 여법(如法)하게 수행하는 수행스님들은 많지 않았다.
“내 이 절을 다시 일으켜 세우리라. 나를 여기에 오게 한 것은 전생부터의 인연인지도 모르지.”
그러나 떠돌아 온 객승의 입장에서 당장 이러니 저러니 남의 앞장을 서서 주장을 내세울 형편도 못되어서 1년 남짓 묵묵히 참선수행에만 전념했다.
그러던 어느날 새벽 효봉스님이 결가부좌하고 참선삼매에 빠져 있는데 노스님 한 분이 빙그레 웃으며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래, 정진(精進)은 여일(如一)한가?”
“이제까지 한번도보지 못한 노장스님이었다. 효봉스님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스님께 합장하고 머리를 조아렸다. 흑시 산내 조그만 암자에 기거하고 계시는 스님이라면 여기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으니 모를 수도 있었다.
“스님께선 누구시옵니까? 한번도 봐온 적이 없사온데 어느 암자에 기거하고 계시온지요?”
“나는 보조국사의 16세 법손(法孫) 고봉(高峰)이라네.”
“네? 고려의 마지막 법손이신 고봉화상이시라고요?”
“그러하다네. 내 이제 그대에게 효봉(曉峰)이라는 법호를 내리고 게송을 전할 것이니 잘 지녀가지고 이 도량을 더욱 빛나게 해주게, 알겠는가?” “예, 스님 ! 명심하여 듣고
지니겠습니다.”
효봉스님은 두 손을 합장하고 엎드려서 고봉화상에게 절을 하였다. 절을 마치고 두 무릎을 꿇고 앉으니 고봉화상은 다음과 같은 게송을 주었다.
번뇌가 다할 때 생사가 끊어지고
미세히 흐르는 망상 영원히 없어지네.
원각의 큰 지혜 항상‘ 뚜렷이 드러나니
그것은 곧 백억의 화신불 나타남이네.
(煩惱盡時生死絶
微細流注永斷滅
圓覺大智常獨存
卽現百憶化身佛)
게송을 듣고 일어나 다시 절을 올리고 나서 보니 고봉화상은 어느 순간에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눈앞에는 오직 동잔불만이 숨죽인 듯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것은 꿈이었다. 꿈속에 고봉화상이 나타나서 게송을 준 것이었다. 효봉스님은 정신을 가다듬고 꿈속의 일을 돌이켜 보았으나 아직도 생생하게 고봉화상의 목소리가 귓가에 쟁쟁하게 들려오는 듯했다. 그것은 꿈이면서 꿈이 아니었다. 효봉화상은 지필묵을 펴서 방금 고봉화상이 준 게송을 그대로 옮겨적었다.
인재 양성과 사찰 보수에 쏟은 정성
효봉이라는 이름은 이때부터 나왔고 효봉스님도 다른 이름보다 이 이름을 즐겨 썼다. 그러나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한 일은 효봉스님이 이제까지 방관자적인 입장에서 송광사의 일에 관심을 덜 가졌던 태도를 일변하여 적극적으로 송광사의 중흥에 힘을 쏟은 일이다. 그뿐 아니라 승적을 금강산 신계사에서 이곳 조계산 송광사로 옮겨 본사(本寺)로 삼은 일이며 뒷날 후학들에게 제2정혜결사운동올 발원하고 중창불사를 하게 한 원동력이 된 것이다.
효봉스님이 이 절에서 10년이라는 세월 동안 머문 것도 한 절에서 가장 오래 머문 기간이며, 절을 중창하고 많은 후손을 길러낸 것은 바로 이러한 사건이 일어난 뒤의 일이었다. 그래서 우선 절을 일으키기 위해서 대중을 불러모아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계정혜(歲定慧) 삼학(三學)으로 무장한 절의 법도를 가다듬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효봉스님은 스스로 수행에 한치의 어그러짐이 없도록 수범을 보였다.
송광사 삼일암
도인스님으로의 명 망 높아져
이 무렵 서른을 갓 넘을까 말까한 청년이 찾아왔다.
“어디서 무슨 일로 이 중을 찾아오셨는가?”
“예, 저는 전라도 남원에서 온 소봉호라고 합니다. 송광사에 도인스님이 게시다기에
효봉스님이 송광사 삼일암 조실에 머무는 동안 수좌들은 물론 신도들 사이에서 어느덧 도인스님으로 통하고 있었다. 효봉스님은 젊은이의 이 대답에 얼굴 표정이 굳어지며 두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도인이 되겠다고? 더구나 생사를 벗어난 도인이?”
“예,그러하옵니다. 스님, 허락하여 주십시오.”
효봉스님은 젊은이의 말을 듣자 옛날 금강산으로 도인을 찾아서 엿판을 지고간 자신의 모습이 언뜻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효봉스님은 지그시 눈을 감고 엿판을 진 자신의 모습을 다시 보았다.
“그래, 무슨 까닭으로 중이 되려하는가?”
“소생은 남원에서 이발관을 경영하고 있었는데 신병(폐결핵)을 앓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진주에 산다는 하처사(河處士)라는 분이 병 나을 수 있는 방법을 일러주었습니다.
’하늘에 해는 언제나 밝게 비추련만 구름이 끼어서 햇빛을 가리니 비바람이 부는 이치를 아시오? 이처럼 본래 사람마다 갖춘 자성자리는청정한법이니 잃어버린 자성자리를 찾으면 병이 나을 것이오. 구름으로 말하면 전생의 업이요, 전생의 업을 소멸시켜야 병이 나을 것이오. 천수관음(千手觀音)기도를 하시오. 100일 기도를 마치면 병이 나을 것이오.’ 이렇게 일러주어서 남원 영원사를 찾아가 100일 동안 천수관음 기도를 마쳐 소생은 관세음보살 은덕으로 목숨을 건졌기에 그 은덕을 갚고자 중이 되려 합니다.
이 말을 듣고 효봉스님의 표정은 일순간 굳어지며 언성이 높아졌다.
“그런 일이라면 잘못 오셨네. 이 늙은중에게는 그런 신통력이 없으니 그만 돌아가게.”
“스님! 제발 소생을 바른길로 인도하여 주십시오. 스님!”
“어허, 안된대도 그러는구먼. 중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닐세. 더구나자네는 불교를 고행을 해야하는 종교인 즉 젊은이의 생각은 천리만리 멀리 떨어져있는 게야. 그러니 어서 돌아가서 농사나 열심히 짓게. 일심으로 농사를 짓는 것도 남을 이롭게 하는 것이며 관세음보살의 은덕을 갚는 일이 될걸세.”
“저는 집에 돌아가야 농사지을 땅도 없습니다. 다시 이발소에서 이발가위를 들기는 더욱 싫습니다. 제가 폐병에 걸린 것은 이발관에서 일한 때문입니다.”
젊은이가 이발사였다는 사실에서 효봉스님의 머리 속을 섬광처럼 스치고 지나가는 이름이 떠올랐다.
우바리 존자.
“이발사라? 그대가 정녕 이발사를 했단 말이지?” 효봉스님은 젊은이가 이발사였다는 사실에 정색을 하고 되물었다. 왜냐하면 부처님의 10대 제자 가운데 우바리 존자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우바리 존자는 부처님의 10대제자 가운데 계행을 가장 잘 지킨 제자다. 우바리 존자 역시 이발사 출신이었으므로 남원 청년이 이발사였다는 말을 듣고 이상한 예감이 들었던 것이다.
부처님 당시에 인도는 철저한 계급사회였다. 범신(楚神)의 후예를 자처하는 브라만(승려), 그들의 하수인 크샤트리아(무사 · 왕족) 바이샤(평민 · 농공상인)가 있고 그 아래에 슈드라라는 노예계급이 있었는데 이발사는 노예계급이었다. 브라만은 이찰 사성(四姓)계급의 조상이 신분에 따라 태어나는 방법도 다르다고 주장했다. 브라만은 범신의 입으로 낳고, 크샤트리아는 범신의 옆구리로 낳고, 바이샤는 배로, 슈드라는 발뒤꿈치로 각각 태어났다는 설화를 지어서 믿게 했다. 그러므로 브라만계급은 소, 말, 양, 사람을 희생하여 신에게 제사하고 도덕적 교훈과 계율적 규칙을 가지고 다른 계급을 지배했다. 만일 슈드라가 경전을 펴보거나 찬가를 부르면 눈을 빼고 귀를 막는 엄격한 벌을 가하였다.
인간과 천상에 큰 복밭을 갈고자 해인사로
이러한 사실을 떠올린 효봉스님은 다시 한번 젊은이이게 물었다.
“자네가 정말 이발사였단 말인가?”
“예, 그러하옵니다만 이발사는 출가를 할 수 없습니까?”
“그런 것이 아니고 중이 되면 고향도 버리고, 부모처자도 버리고, 나처렴 먹물 누더기를 걸치고, 거친 밥에 잠을 참으면서 고행을 해야하나니 아무나하는 것이 아닐세. 세상에서 하는 일이 아무리 어렵다 해도 중노릇하는 것보다는 쉬울 것이요. 중노릇하는 만큼만 세상에서 고생을 하면 남부럽지 않게 부자로 잘 살 수 있을 것이야.”
“저는 이미 마음에 결심한 바가 있습니다. 스님께서 머리를 깎아 주지 않으신다 해도 저는 이 절에서 떠나지 않겠습니다.”
“젊은이는 집으로 가서 다시 한번 생각하시게. 더구나 천수관음기도를 했다 하니 천수관음기도를 부르는 놈이 누군가 참구하고 그놈을 알겠거든 다시 오게.”
남원청년 소봉호는 효봉스님과 대화를 통해서 일단 집으로 가서 관옴기도를 하면서 출가를 생각하는 것이 타당하리라 판단되어서 집으로가서 관음기도를 계속했다. 그러나 이끌어주는 사람 없이하는 기도에는 더 이상의 진전이 없었다. 그럴수록 머리 속에서는 효봉스님의 인자한 얼굴이 떠나지를 않았다. 소봉호는 집안일을 정리하고 다시 송광사로 떠났다.
“스님, 문안 올립니다.”
“누구시던가?”
“석달 전에 찾아뵈었던 이발사이옵니다.”
“옳지! 그랬구만. 그동안 기도를 잘하고 있는가?”
“집에 가서 100날 동안 기도를 했으나 아무래도 기도가 진전이 없어서 스님의 인도를 받고자 왔습니다. 저를 이끌어주십시오, 스님!”
그로부터 일 년이 지난 이듬해 초파일날 효봉스님은 삼일암에서 소봉호의 머리를 깎아주고 수련(秀蓮)이라는 법명을 내렸다.
“내가 오늘 부처님 오신 날에 그대에게 사미계를 줄 것이니 열 가지 계율을 잘 지켜서 수행에 한치의 차질이 있어서는 아니될 것이니라. 그 첫째는 살생하지 말 것이며, 둘째는 도둑질하지 말 것이며, 셋째는 음행하지 말 것이며, 넷째는 거짓말하지 말 것이며, 다섯째는 술 마시지 말 것이며, 여섯째는 때가 아닐 때 먹지 말 것이며, 일곱째는 춤과 노래를 보거나 듣지 말 것이며, 여덟째는 향수를 바르고 몸단장을 하지 말 것이며, 아홉째는 높고 큰 자리에 앉지 말 것이며, 열째는 금은 보물을 지니지 말 것이니라. 이 열 가지 계율을 잘 지키고 마음 공부에 힘쓰면 반드시 깨달음이 있어서 번뇌망상을 벗어날 것이니라.”
효봉스님으로부터 머리를 깎고 십계를 받은 남원청년 이발사 소봉호는 수련 사미(沙彌)가 되어서 효봉스님의 계행을 본받아 뒷날 또한 효봉문하의 제일 제자가 되었으니 바로 유명한 구산(九山)스님이다. 효봉스님이 예견한 대로 구산스님은 우바리 존자가 된 셈이다.
그러는 가운데 8 ·15광복을 맞이하게 되었고 불교계도 자성의 소리가 높아져서 인재를 양성해야 한다는 소리가 높아졌다. 그래서 가야산해인사에 가야총림을 열고 인재 양성을 위한 구체적인 일들이 진행되었다. 총림이란 선(禪)이나 교(敎)에 치우치지 아니하고 염불에 이르기까지를 가르치는 학림(學林)을 말함이니 그야말로 불교의 중흥을 위한
총체적인 종합수도원이다.
불교계에서는 가야산 해인사에 가야총림을 열고 그 총림을 맡아서 지도할 최고의 지도자를 찾은 결과 중론이 효봉스님으로 모아졌다. 당시의 고승으로는 덕숭산에 만공선사, 오대산에 한암선사, 영취산에 용성선사 등 큰스님이 계시지 않는 것은 아니었으나 이 분들은 고령(高齡)이라서 활기찬 총림의 기틀을 마련하려면 추진력이 있는 다음 세대가 맡아야 한다는 결론이었다.
효봉스님은 가야총림의 방장화상으로 추대되었으나 극구 사양하고 조계산을 떠날 뜻이 없음을 알렸다. 그러나 불교 중흥을 위해서 인재를 양성해야 한다는 교계의 뜻이 소중함을 알고 막무가내로 우겨댈 수만도 없었다. 그래서 결국 서기 1946년 가을, 스님은 10년간 머물었던 송광사를 떠나야 했다.
가야총림은 삼보사찰 가운데에서도 8만4천 법문의 장경각이 있어서 법보사찰로 유명하다. 해인사를 품고 있는 가야산은 산이 깊을수록 삼림은 울창하고 물이 맑아 골짜기마다 절경이요, 물굽이마다 선경을 이룬다. 가야산 동구에서 무릉교를 건너 해인사에 이르는 산길 십리 길은 길옆에 늘어선 기암괴석 속살처럼 흰 반석 위로 흐르는 옥같은 물결, 물소리 솔바람소리 새소리 어느 것 하나 가야산의 아름다움을 위해 빼놓을 수 없는 것들이다.
해 안사 가야총렴 에 온 뜻은
천년고찰 해인사는 신라 40대 애장왕 3년(서기 802년)에 순웅(順應), 이정(利貞) 두 스님이 창건하였다. 그런데 《삼국유사》에는 의상조사가 신라 문무왕16년(서기 676년)에 창건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어쨌든 해인사 창건에는 신라왕실의 특별한 배려가 있었음이 틀림없고, 그 이름에서 화엄도량임이 또한 분명하다.
해인사 창건의 참뜻은 해인(海印)이라는 이 절의 이름에 그대로 응결되어 었다. 해인이란 「대방광불 화엄경」에 나오는 해인삼매(海印三昧)에서 유래한 말이다.
한없이 깊고 넓으며 아무런 걸림이 없는 바다가 파도를 멈추고 고요해졌을 때 거기에 우주의 온갖 참된 모습 해와 달과 산과 구름과 풀과 나무가 그대로 비추니 이것이 해인이다. 마찬가지로 온갖 번뇌와 파도치는 우리들의 마음이 고요히 가라앉았을 때 비로소 우주의 본모습을 그대로 비추어 볼 수 있는 것이다. 파도를 일으키는 무명(無明)의 바람을 멈추게 하는 것이 수행이요, 무명의 바람이 멈추면 거기에 맑고 깨끗한 지혜의 바다가 펼쳐지고, 거기에 일체의 모든 것이 참모습을 나타내게 되는 것이다.
선인들이 절을 짓고 해인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뒷날 황량한 대지에서 사나운 흙먼지로 빛을 가리고 어둠을 몰아오는 무명을 걷어내고 밝은 지혜로 마음을 고요히 하고 세상을 바로 보라는 뜻이 아니겠는가. 이곳에 가야총림을 이룩하고 효봉스님을 방장으로 초빙한 것도 한국불교가 이제 해인삼매의 참뜻을 이 땅에 실현하고자 함이었다.
가야총림 방장으로 한치의 흐트러짐 안보여
효봉스님이 송광사에서 해인사 가야총림의 방장을 수락한 것은 많은 인재를 길러내어서 쇠약해 가는 이 땅의 불교를 다시 일으켜 세워보자는 일념뿐이었다. 스님은 총림의 학인들이 수행에 지장없이 정진하려면 무엇보다 법도를 엄히 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계 · 정· 혜 삼학의 근본이념을 철두철미하게 실천에 옮기도록 지도했다. 스님 스스로도 학인들 못지 않게 한치의 흐트러짐을 보이지 않으려고 학인들과 꼭같이 생활했다.
10년 아니라 20년을 수도해도 이렇다 할 소득이 없는 것은 무언가 크게 잘못되어 있기 때문이다. 많은 수행자들이 당초의 서슬푸른 기상과는 달리 시들한 직업승으로 가사나 걸치고 이 절 저 절 기웃거리는 것은 간절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스님은 이 점을 깨우치도록 설법을 기도했다.
“좋은 의사는 병을 다스릴 때 먼저 근본을 진단하는 법이다.
그 병의 근본을 알게 되면 무슨 병이든 고철 수 있다.
해인사 전경
우리 형제들 가운데에는 주장자를 가로 메고 풀을 헤치고 바람을 거스르면서 10년 20년을 돈독히 믿고 한결같이 닦으면서 생사를 밝히지 못하는 이가 허다하다. 거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으니 첫째는 그 근본을 찾아내지 못한 데 있다.
너와 나라는 분별은 바로 생사의 뿌리요 생사는 너와 나라는 분별의 가지이다. 이 가지를 없애려면 그 뿌리를 없애야 하는 것이니 뿌리가 없는데 어떻게 가지가 있을 수 있겠는가.
둘째는 하나의 큰 보배 창고가 그 속에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는 데 있다.
이 보배 창고는 남에게서 얻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자기의 믿음에서 찾아내야 한다. 그것을 믿으면 큰 실수가 없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여러 겁올 지내더라도 끝내 얻지 못할 것이다.”
효봉스님은 학인들이 언제 어디서나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질문하는 것을 기꺼이 받아서 친절히 일러주었다. 스님은 질문하는 사람의 정도에 따라서 알아듣도록 자상하게 법을 설하였다. 이 무렵 해인사에는 송광사 도인스님이 가야총림의 방장으로 오셨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인근 경상도 일대의 신도들이 매일 몰려들어서 법문을 청했다. 스님은 학인들을 돌보는 외에 신도들의 법문에도 기꺼이 응했다.
절의 살림은 정말 빠듯하였다. 가야총림을 설립할 때 해인사의 전답 가운데 절반을 총림몫으로 내놓기는 했어도 좋지 않은 논과 밭이 대부분이었다. 당시 해인사 역시 대처승들이 재정권을 장악하고 있었으므로 비구승은 대처승들의 처분만을 바랄 뿐이었다. 식솔은 오고가는 객송들이 있어서 매일 일정하지 않았으나 고정적으로 총림에서 수행하는 학인들 80여명과 판도방에서 뒷바라지하는 처사 공양주를 합하면 항상 100명이 훨씬 넘는 식구였다. 그러니 그 많은 입을 배불리 먹이기는커녕 겨우 풀칠만 하는 데도 하루하루가 걱정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젊은이가 방장스님을 찾아왔다.
“방장스님, 문안올립니다.”
“누구시던가?”
“에, 저 법홍이옵니다.”
“법흥이? 법홍이가 일본서 학교 다니다가 장가갔다는 말을 들었는데 법홍이가 둘이더냐? ”
“법홍이 둘로 보면 둘이고 하나로 보면 하나이옵니다.”
“하하하, 그럼 정말 법홍이가 왔구나 ! ”
효봉스님은 금강산 마하연 선원에서 열다섯 살 적에 본 법홍이가 서른 두살의 장성한 청년이 되어 온 것올 보고 한껏 기쁨에 넘쳤다. 법홍은 금강산에서 효봉스님이 떠나간 뒤 일본으로 유학을 갔었고, 스님이 송광사에 주석할 때 여름방학에 귀국하여 2,3주 머물렀다 간 적도 있었다.
법홍은 해인사에서 다시 머리를 깎고 하안거에 참여했다.
“법홍이 네가 오늘부터 원주를 맡거라. 그리고 구산이는 도감을 맡고.”
이리하여 법홍수좌는 총림에 머물며 살림을 맡고 구산수화는 도감을 맡고 입승은 청담수화가 맡아 새로운 각오로 총림을 지켜나가기로 결심하였다.
한편 주지 최범술스님은 신익희선생과 함께 효자동에 국민대학을 설립하고 해인사 재산을 모두 학교의 재단으로 편입하여 인가를 받았다. 학장인 신익희선생은 해인사 측에서 학교 운영에 필요한 경비가 출연되지 않자 학장직을 사임하고 최범술스님은 마포에서 변호사를 하던 정윤환씨를 학장으로 추대했다. 정윤환씨가 재단설립의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해인사를 찾아왔다.
이러한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구산스님은 아직 해인사 재산이 국민대학 재단으로 등기가 나지 않은 사실을 알고 원로스님들에게 의논을 드렸다. 원로스님들은 해인사 재산을 가야총립의 재단으로 삼을 것을 합의하고 ‘재단법인 가야총림’을 설립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효봉스님은 재단설립에 필요한 절차를 갖추도록 지시하였다. 효봉스님이 법학을 전공했으므로 법절차에 대한 사항은 빈틈없이 갖추었다.
재단설립에 필요한 서류가 갖추어지자 효봉스님은 법홍수좌에게 준비된 서류를 가지고 서울로 가서 재단 등록을 하라고 시켰다. 법홍수좌는 해인사에서 김천까지 걸아가서 서울행 기차를 탔다. 기차는 발디딜 틈도 없이 만원이었다. 만원 기차는 하루 종일 달려서 해거름 무렵에 안양에 도착했다. 그런데 멎었던 기차는 좀처럼 떠날 줄을 몰랐다.
이런 때를 당하여 안심처를 얻어야 하리
6월25일 바로 6 ·25사변이 터진 날이었다. 기차는 더 이상 가지 않는다는 안내방송이 나왔다. 오히려 영둥포쪽에서 오는 기차에 피난민들이 기차의 지붕까지 올라타고 있다가 우루루 몰려들었다. 법홍수좌가 탄 기차도 수원으로 후퇴하였다. 법홍수좌는 기차에서 내려 수원 용주사서 그날밤을 묵었다
이튿날 다시 피난 열차를 타고 내려왔다. 법홍수좌가 해인사로 돌아온 것은 7월2일이었다. 7월 보름 하안거 결제가 끝나려면 아직도 보름이나 남았다. 법홍수화는 효봉스님에게 미리 해제할 것을 건의했다. 전세가 불리하여 언제 해인사까지 인민군이 몰아닥칠지 모르는 형국이었기 때문이다. 효봉스님도 입승을 불러 상의한 다음 서둘러 하안거 해제를 했다.
효봉스님은 남은 학인들을 불러모으게 했다. 그리고 법상에 올라 한동안 침묵하시더니 주장자를 크게 세번 “땅! 땅! 땅!”울렸다.
인민군의 군화 발길 밀려들어
스님은 설법을 하고 법상에서 내려왔다. 이 설법이 가야산 해인사 가야총림 방장으로서 한 마지막 설법이 될 줄이야. 그러나 스님은 이미 그 일을 알고 계신듯 지금까지의 어떤 설법보다도 힘 있었고, 대중은 비록 많이 줄었으나 지금까지의 어떤 법좌(法座)보다도 훨씬 장엄한 설법이었다.
효봉스님은 구산수좌를 불렀다.
“학인들이 뿔뿔이 흩어져 떠나가려면 여비가 필요할 게야. 그러니 금융조합에 저축한 돈을 찾아다가 나누어 주시게.”
금융조합에는 50만환이 저축되어 있었다. 그러나 전쟁 중이라며 예금 50만환 중에서 30만환만 내주었다. 이 돈을 가지고 와서 떠나가는 수좌들에게 고루 여비를 나누어주었다. 수좌들은 양식도 조금씩 나누어서 바랑에 지고 하나씩 둘씩 가야총림을 떠났다. 해인사에는 총림학인 100여명과 큰절 대처승 스님과 가족을 합하여 250여명이 있었다.
하루는 산문 밖으로 동정을 탐색하러간 구산수좌가 돌아왔다.
“방장스님, 소승 구산이옵니다. 공산당이 서울을 함락하고 계속 남쪽으로 쳐내려 온다 합니다. 저놈들이 언제 해인사까지도 밀어 닥칠지 모릅니다. 아랫마을에서는 모두들 피난떠날 채비를 서두른다 합니다. 스님께서도 잠시 몸을 피하는 것이 옳은 듯합니다.
스님은 잠시 눈을 감고 ’나무관세음보살’을 외웠다. 한참 뒤에야 눈을 뜨고 비로소 입을 열었다.
“피난을 간들 어디로 가겠으며, 또 피난을 가면 부처님 시봉은 누가들겠느냐? 더구나 이 절에는 팔만사천 법보가 있거늘 어찌 내버리고 간단 말이냐? 나는 늙었으니 인민군인들 어찌 하지 못할 것인즉, 여기 남아서 부처님을 모실 터이니 젊은 너희들이나 몸을 피했다가 기회를 보는 것이 좋을 듯하구나.”
“아니되옵니다, 스님. 잠시 산을 떠났다가 난리가 평정되면 다시 돌아오는 것이 안전할 것입니다.”
‘일제 36년간의 압제에서 해방되었으나 이 나라는 아직도 혼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특히 민족의 지도자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저마다 자기의 명예와 이익을 챙기려고 당을 만들고, 외세를 끌어들여서 입지를 확고히 하려고 옛날의 동지를 배반하고 제거하려고 권모술수를 동원하고 있었다.
셋이 모이면 무슨 애국단체가 하내 생겨나고, 넷이 모이면 당이 생겨났다. 이런 와중에서 남과 북이 갈리고 마침내 올 것이 왔다. 이 민족 4천년의 최대 비극인 민족분단의 띠 38선이 생겨났고 38선을 넘어 공산당이 쳐들어왔으니 삼천리 방방곡곡 피해를 입지 않은 곳이 있을까만 특히 산 속에 있는 불교가 입은 피해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지
경이었다.
하안거 결제를 서둘러 해제하고 절을 떠난 스님들 중 일부는 남방으로 떠나지 않고 산내 암자로 가서 머물고 있다가 7월 열나흔 날이 되자 모여들었다. 하안거는 조기에 해제했으나 원래는 내일이 해제일이니 방장스님의 설법도 듣고 떡도 해먹자는 공론이 돌았던 모양이다. 대중은 쌀을 관리하는 미감에게 가서 쌀을 구해가지고 쌀 닷 말로 떡을 쪘다.
이때였다. 막 떡을 져서 부처님께 올리려 하는데 산문 밖에서 총소리가 콩복듯이 들려왔다. 이어서 인민군들이 개미떼처럼 밀려들었다. 자그마치 800명이 넘는 인민군이 해인사를 접수하기 위해 밀려든 것이다. 인민군들은 절이나 학교 같은 넓은 공간과 법당이 취침처로 적격이었으므로 주로 절을 이용했다. 더욱이 절은 산중에 있으므로 작전하기에 유리했다.
인민군은 스님들을 관음전으로 집합시켰다. 그리고 젊은 스님들은 격리시켜 인민군복을 입히고 따발총을 들려 데리고 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구산수좌가 인민군이 잠깐 자리를 비운 틈을 타서 원명, 보성, 의현, 태일 등 젊은 수좌들에게 일러주었다.
“너회들은 승복 위에다 인민군복을 입어라. 기회를 보아서 탈출할 것이고, 만약 탈출이 어려우면 공습 때는 군대가 흩어질 것이니 그때 군복을 벗고 승복채로 민가에 숨어들면 생명을 부지할 수 있을 것이다.”
인민군은 파죽지세로 낙동강까지 밀고 내려왔다. 해인사로 들어왔던 800명이 넘는 인민군을 사흘째 되는 날 작전지시를 받고 떠났다. 그러나 젊은 승려 30여명이 인민군에 끌려가고 말았다.
“방장스님, 아이들이 인민군에 끌려갔습니다.”
“나무관세음보살”
효봉스님은 아무말도 없이 나무관세음보살만 찾았다.
그런데 그날 밤 밤이 깊어 삼경인 때 방장스님의 문이 스르르 열렸다. 스님은 어둠 속에서 사람의 그림자를 확인하고 흠칫 놀랐다.
“누구더냐?”
“방장스님, 저 보성이옵니다.”
“네가 살아왔구나. 다른 아이들은 어찌 되었느냐?”
“원명, 의현, 명성이는 도망쳤는데 태일이는 그만…”
“나무관세음보살…”
“인민군은 진군을 하다가 날이 저물어 어떤 국민학교에서 진을 쳤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공중폭격을 당하여 어지러운 틈을 타서 도망하다가 태일수좌가 총상을 입고 절명하였습니다.”
“나무관세음보살···”
공습을 틈타 도망온 숭려는 모두 열두 명이었다. 나머지 몇 명의 학인들 행방은 알 수 없었다. 이들이 살아온 것은 구산수화의 지시가 주효한 셈이었다. 열두 명의 수화들은 산내 암자의 토굴 속에 숨어서 지내게 하였다. 인공치하라서 수시로 인민군이 나타나 쌀을 요구하고 행패를 부렸다. 절에 남아 있던 노장스님들은 디딜방아로 보리를 찧어서 감자를 섞어 밥을 지어 연명하며 토굴에 숨어지내는 젊은 학인들에게도 양식을 날라 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랫마을로 소식을 염탐하러 갔던 구산수화가 돌아와서 방장스님에게 아뢰었다. 효봉스님은 원당암으로 옮기고 구산수좌가 시봉올 들고 있었다.
“방장스님 ! 아무래도 잠시 피난을 떠나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 아랫마을에서는 양식을 빼앗기고 벌써 여러 명이 붙들려 가서 생사조차 모른다고 합니다.”
“난리가 잠잠해질 때까지 나는 여기 남아 있을 테니 구산이 자네는 아이들을 데리고 날이 어둡기 전에 떠나게.”
“아니됩니다, 방장스님. 스님이 가시지 않으면 저회들도 함께 여기를 떠나지 않겠습니다.”
“어허! 괜한 고집을 부리는구나. 자고로 난리 통에 늙은이는 해를 입지 않으나 젊은이는 항상 해를 입는 법. 너희 젊은 것들이 여기 남아 있으면 성하지 못할 것인즉 어서 피하래두 그러는구나.”
“스님께서 가시지 않으면 저회도 여기를 떠날 수 없습니다. 어찌 부모님을 버려두고 자식들만 살겠다고 도망을 가겠습니까?”
가야총림 5년만에 문닫아
이때 문밖에서 총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너희들은 몸을 피하라. 어서!”
수좌들이 잽싸게 뒷문으로 빠져나가자마자 인민군들이 험악한 표정을 지으며 대웅전 플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들어왔다.
이미 해는 져서 땅거미가 질 무렵이었으므로 몇 명인지는 분명하지 않았으나 대여섯 명은 넘는 듯했다. 인민군은 마당에 들어서자마자 또 공포부터 쏘며 소리를 고래고래 질러댔다.
가부화를 틀고 태연히 앉아 있는 스님을 본 인민군 하나가 소리를 질렀다.
“저기 영감 중이 하나 있구만. 이보라우요 할아바이 중동무! 이 절에 중들은 다 어데 가고 혼자 있습네! 우리는 배가 고프니 먹을 것을 내놓으시라요.”
“험! 험! 이것 보시게 젊은이. 이 절에는 보다시피 모두 떠나고 이 늙은 중이 혼자 남아 있지 않은가? 탁발해서 먹고 사는 절집에 먹을 것이 있을 리 없으니 그냥 돌아가시게.”
“이 늙은 중동무가 맛을 봐야 알기요? 순순히 내놓지 않으면 싹 죽일테다. 아랫마을에서 들으니 이 절에 중이 100명도 넘게 있었다는데 감추어둔 양식을 내놓으시라요.”
“이 절에 스님이 100명이 넘게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지난번 자네들이 800명이나 넘게 와서 모두 빼앗아 갔으니 양식이 남아 있을 리 없지 않은가?”
“그럼, 이 절에 소도 여러 마리 있다던데 어디에 감추어 두었읍지비 ?”
해인사에는 사찰답이 많았고 사찰답을 일부는 소작으로 주기도 했으나 절 가까이 있는 논은 스님들이 직접 농사를 지었으므로 소가 여러 마리 있었다. 이러한 사정을 인민군들은 아랫마을에서 들을 모양이었다. 그래서 소를 내놓으라며 공포를 쏘면서 우겨댔다.
“이 밤중에 밭 갈고 논 가는 소는 무엇 때문에 찾으시는가?”
“우리 인민 해방전사들이 굶주리고 있으니 소라도 잡아먹고 배가 불러야 남조선을 해방시킬 게 아니오?”
“허허, 저런. 쯧쯧! 그래, 김일성이가 남쪽에 가면 인민을 약탈하라고 시키던가?”
인민군은 ‘김일성장군’이라 하지 않고 ‘김일성이가’라고 한다면서 험악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효봉스님은 태연히 말을 이었다.
“더구나 이 해인사에는 이 나라의 국보요 세계의 보물인 팔만대장경이 있는 것쯤은 알고 있올 테지? 일찌기 자네의 말대로 김일성장군이 나더러 보물인 팔만대장경을 지키는 일은 비밀리에 부탁했거늘, 만약 너희가 계속해서 행패를 부리면 김일성장군한테 보고할 것이니라!”
이 말을 듣고 그들의 태도는 다소 부드러워지는 듯햇다. 그러나 이 말은 스님 자신도 모르게 얼떨결에 나온 거짓말이었다. 그것은 부처님이 시킨 말임이 분명했다.
태도가 부드러워지기는 했으나 그래도 인민군은 물러갈 기세를 보이지는 않고 저들의 행위를 정당화시키려 하였다.
“우리 해방전사들은 남조선 인민을 해방시키려고 이렇게 고생을 하고 있질 아니하오! 소를 가져가는 것은 다 해방전사들의 주린 배를 채우려는 거이니 죄가 되질 않소!”
“이 늙은 중은 소먹이는 소임이 아니니 소를 어디에 매어 두었는지 모르네.”
“소 있는 데를 바로 대지 않으면 늙은 중동무를 총살시키고 말겠으니 어서 말하기요!”
“‘허허! 모른다고 그러질 않나.”
인민군이 이번에는 정말로 방아쇠를 당길 기세로 총을 효봉스님에게 겨누었다.
이때였다. 절 뒤 산중턱 으슥한 곳에 몰래 숨겨둔 소가 “음매!”하고 울지를 않는가. 소라는 짐승은 밤에는 좀체로 울지를 않는 법인데 총을 겨누는 찰나에 효봉스님의 목숨을 대신하겠다는 듯 울었다. 인민군들은 스님에게 겨누었던 총을 거두고 소울음 소리가 나는 곳으로 달려갔다.
“나무관세음보살”
인민군들이 끌고가는 소는 산문을 나서면서도 구슬프게 울었다. 스님은 사라져가는 소들의 뒷모습을 보면서 무수히 관세음보살을 외었다
그날밤 효봉스님은 뜬눈으로 밤을 지셨다. 멀리서 가끔씩 대포소리가 가물가물 들려오기도 했다. 구산수좌는 물론 다른 행자들도 자리에 누워서 편히 눈을 붙일 수가 없었다.
이튿날 날이 밝자 효봉스님은 구산수화에게 행장을 꾸리라고 일렀다.
“이 늙은이야 죽든 살든 괜찮다만 나 때문에 공연히 너희들이 다치겠구나.”
이 나라 불교의 인재를 양성하고자 가야산 해인사에 열었던 가야총립은 뜻하지 않은 6 ·25동란으로 5년만에 문을 닫아야 했다. 학인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효봉스님을 모시고 있던 구산, 일각, 법홍, 보성, 원명, 명성, 광유 둥 마지막 남았던 수좌들 10명이 떠나니 가야산 구중심처의 해인사는 더욱 무거운 고요 속에 잠기고 말았다. 일주문을 나서면서 효봉스님은 가던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서 한동안 떠날 줄을 몰랐다
효봉스님 일행은 산문을 나섰으나 오라는 곳도 가야 할 곳도 정해지지 않은 채였다. 그야말로 집도 절도 없는 처량한 신세가 되었다. 그러나 일단 방향을 남쪽지방으로 잡고 걸었다.
초겨울 날씨는 을씨년스러워 집도 절도 없는 스님일행은 더욱 처량했다. 전쟁통에 인심도 예전같지 않아서 어느 집 헛간에서 자기도 하고 하루종일 주먹밥 한 개로 허기를 때우며 걷고 걸었다. 석양이 되자 가을걷이를 한 들판은 더욱 쓸쓸했다. 생각다 못한 보성수좌가 입을 열었다.
“방장스님요, 여기가 성주땅이니 깨네 쪼깨만 더 가문 저의 속가가 있심니더. 마 누추하겠지만서도 잠시 머물렀다 가는 것이 어떠하을지요.”
“그랬던가? 맞았어. 보성수좌의 속가가 성주골이라 했었지? 한번 인연을 끊고 속가로 떠났으면 승속이 분명하건만 부처님 법에는 승속을 분별하는 것도 차별상이 아니던가? 하하하”일행은 성주군 가천면 창천동보성수좌의 속가에 당도하여 모처럼만에 저녁다운 저녁식사를 대접받았다. 해인사를 떠나 여기까지 걸어서 오는 동안에 한번도 끼니를 챙기지 못했으니 저녁밥을 배불리 먹은 후 모두 잠에 곯아떨어졌다.
으뜸제자 구산수좌의 오도송을 받고
이튿날 날이 밝자 효봉스님은 구산수좌에게 길 떠날 채비를 차리라고 재촉했다.
“하온데, 방장스님…”
“왜 그러는가?”
“보성수좌의 형수께서 한이틀 더 묵었다가라고 간곡히 만류합니다. 어떻게 할까요?”
“안될 소리! 어젯밤은 부득불 속가 신세를 졌으나 오늘까지 묵어간다면 그것은 출가한 사람의 취할 도리가 아닌게야. 그러니 어서 행장을 꾸려 떠나세.”
스님의 태도는 단호해서 더 이상 말을 불일 엄두를 내지 못할 지경이었다. 보성수좌는 일찍이 부모님을 여의어서 형수 손에서 자라났다. 맏형과의 나이 차이가 20년도 넘어서 장조카가 오히려 보성수좌보다 나이가 많으니 형수는 어머니나 다를 바 없었다. 보성수좌가 집을 떠나 스님이 된다고 했을 때 처음에는 무척 섭섭하게 생각하였고 또 오해도 했었다.
그런데 이제 집을 떠난 지 3년 만에 돌아온 시동생을 보고나니 지난날의 오해는 풀어졌다. 더구나 효봉노스님의 온화한 인품을 보고나니 가슴에 맺혔던 섭섭함도 모두 눈녹듯 녹아내렸다. 형수는 그래도 떠나갈 시동생이 염려되어서 가다가 먹을 주먹밥과 노자까지 마련해주면서 효봉스님에게 보성수좌를 당부하였다.
“보성이 도련님이 이제 부처님의 품에 있으니께네 부처님의 아들이지예. 그라이 큰시님께서 그저 잘 인도하여 주시이소. 부탁드립니더.”
“보성수좌가 이제 속가를 떠났으니 출가외인이라할 것이나 부처님 법으로 보면 속가가 불가요 불가가 속가이니 두 아들의 노릇을 하는 셈이지요.”
효봉스님 일행이 보성수좌의 속가를 떠나 며칠을 또 걸어서 당도한 곳은 부산 금정산 아래 온천동에 있는 금정사(金井寺)였다.
금정사는 조그만 절이었으나 마침 해인사에서 공부한 석주스님이 주지직을 맡고 있어서 효봉스님 일행을 맞아주었다. 그러나 서로 지내기가 불편했다. 그리고 금정사에서는 수행정진하기에도 어려운 점이 많았다. 그래서 법홍수화와 구산수좌는 입 하나라도 덜어볼 심산으로 금정사를 떠나기로 했다. 또한 금정사는 오래 머물 곳이 되지 못한다고 판단이 되어서 법홍수좌는 새로이 머물 곳을 물색하기 위해서 통영으로 떠나고 구산수좌는 진주로 떠나기로 하였다.
“방장스님! 저회들이 스님께 한 가지 청이 있습니다.”
“응웅, 어디 말해 보시게.”
“저희가 스님 문하에서 나름대로는 수행한다고 열심히 했습니다만 업장이 두렵고 선근이 얕아서 아직도 공부에 진전이 없습니다. 소승 이제 스스로 길을 찾아 가고자 하오니 허락하여 주십시오.”
“알지, 알아! 그동안 내 뒷바라지 하느라고 송광사에서 해인사로 또 예까지 따라 왔으니 한가히 공부할 틈을 주지 못한 내 죄가 크고말고.”
“방장스님, 그런 뜻이 아니오라…” “잘 생각했네. 그렇지 않아도 자네를 한가하게 공부할 곳으로 보내려고 궁리를 하던 참이었네.”
“방장스님! 감사하옵니다.”
이리하여 구산수좌는 진주 응석사(凝石寺)로 가서 그곳에서 용맹정진에 들어갔다.
그로부터 석달이 지난 어느 날 한 객승이 금정사로 들러서 구산수좌의 편지를 전해 주었다. 편지를 받아든 효봉스님은 조용히 읽어나갔다.
대지 위의 온갖 현상은 본래 공한 것손을 들어 허공을 가리키나 어찌 뜻이 있으리오.
고목나무는 반석 위에서서 계절이 없는데 봄이 오니 꽃이 피고 가을오니 열매 맺도다.
편지를 다 읽고 난 스님은 마치 구산수좌를 보기라도 한듯 기쁨이 얼굴에 가득 넘치게 웃었다.
“마침내 구산이가 한 소식을 했구나! 장한지고! 암, 그래야지!”
서산대사가 주석했던 대흥사로 가기로
효봉스님은 제자가 깨우침을 얻어 전법게를 내리는 날은 마치 춤이라도 덩실덩실 출듯이 기뻐하였다. 특히 스님은 늦깍이였으므로 비록 세수는 환갑을 지났어도 구산수좌는 효봉 문하에서 인가한 첫 제자이고 보니 그 기쁨이야 이루 형언할 수 없이 컸던 것이다.
이 무렵 통영으로 간 법홍수좌가 돌아왔다. 법홍수좌는 통영 용화사로 가서 주지스님을 만났다. 주지스님은 해인사에서 잠시 머문 적이 있던 영재(靈才)스님이었다. 나이 많은 대처승이었으나 가족이 없는 홀몸이었다.
“노장스님, 난리통에 가야총림이 산산이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지금 효봉스님이 금정사에 계시니 이곳 용화사에 선방을 여는 것이 어떠하올지요? ”
“그것 좋은 생각이구만. 마침 저 건너 도솔암이 비어있으니 그곳에 효봉스님을 모시고 선방을 열면 좋겠네.”
법홍수좌는 통영 용화사 주지스님으로부터 도솔암에 선방을 약속받고 금정사로 왔다. 그러나 효봉스님의 의중이 어떤지 알 수 없어서 법홍수좌는 쉽게 말을 꺼내지 못했다.
“방장스님, 이곳은 임시로 머물 곳밖에 되지 못할 듯합니다. 피난민들이 북새통을 이루어 참선수행 하기에는 적당하지 아니하니 다른 곳으로 옮기시는 것이 어떠하올는지요?”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참일세. 해남 대홍사가 어떨까 생각중이야.”
스님께서 이미 대흥사를 마음에 두고 있는 것을 알고 법홍수좌는 도솔암을 구해 두기는 했으나 선방으로 쓰기에는 너무 협소한 느낌이 들어서 입밖에 꺼내지 않았다. 봄이 되어 날씨가 풀리자 원명, 보성, 법홍, 광유를 불러앉히고 금정사를 떠날 것이니 행장을 차리라고 분부하였다.
“여봐라, 보성아! 구산수좌에게는 편지를 보내 우리가 가는 곳을 일러주어라.”
“방장스님요, 어데로 가실라카는데요?”
“글쎄, 딱히 정해둔 곳은 없으나 내 생각에는 해남 두륜산 대홍사로 가보는 것이 좋을 듯하구나. 대흥사는 일찌기 선 · 교 양종의 본산으로서 임진왜란 당시 서산대사께서 승병을 지휘한 곳이기도 하거니와, 초의(艸衣)선사와 추사(秋史)선생께서 시서(詩書)와 선다(禪茶)로 교유하던 곳이 아니던가. 또한 이곳은 바깥의 환란을 한번도 당하지 않은 천혜의 가람이니, 선현들의 선다향(禪茶香)에 흠뻑 취해보는 것도 좋지 않겠느냐?”
미록산에 구름처럼 모여드는 선객들
어딘가로 떠난다는 것은 즐거운 것이다. 그것도 난생 처음 가보는곳일수록 그 설레임은 더한다. 광유동자는 이른 새벽부터 스님의 바리때며 가사 장삼과 속옷을 챙겨두고 벌써 몇 번씩이나 일주문 밖으로 나갔다가 오곤 했다. 부산의 생활이 가야산 해인사처럼 조용하고 맑은 것도 아니고, 피난살이 살림으로 찌든 사람들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어린 소견이지마는 마음이 편치 않았던 것이다.
이리하여 스님은 원명, 보성, 법홍수좌와 광유동자를 데리고 대흥사로 가기 위해서 부산항에서 여수행 연락선을 탔다. 대흥사를 가려면 여수에서 배를 내려 다시 육로로 해남읍까지 가서 30리 길을 걸어가야 한다.
일행이 부산항에서 몸을 실은 연락선온 그다지 크지 않은 배였다. 이 배는 남해안을 따라 한려수도를 지나 여수항을 거쳐 목포까지 가는 여객선이었으므로 선실은 정기적으로 오가는 장사꾼과 여행객들로 꽉 갔다.
그날따라 바람이 심해서 파도가 높아 배는 항구를 떠나면서부터 심하게 요동올 쳤다. 배 안의 손님들은 이리 휩쓸리고 저리 휩쓸리고 하면서 배멀미를 하기 시작했고 마침내 뱃바닥은 토해놓은 오물로 뒤범벅이 되어버렸다.
효봉스님은 일찍이 일본유학을 하였으므로 배를 처음 타보는 것은 아니었으나 관부연락선인 1만톤급의 큰 배라서 그다지 배멀미를 하지않았었는데 이번만은 달랐다. 특히 배를 처음 타보는 보성 원명 광유 세 사람은 어지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다른 사람들처럼 토하지는 않았어도 남이 토해놓은 오물에서 나는 냄새는 특히 육식을 하지 않고 담백한 음식만을 먹어온 스님들한테는 정말 견디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배는 파도를 헤치고 한 시간 남짓 달려가서 잠시 손님을 내려놓기 위해서 통영의 항구에 정박했다. 법홍수좌는 이 틈을 타서 효봉스님에게 잠시 용화사에 들어 쉬어 가자고 청했다.
용화사 효봉스님 사리탑
“방장스님, 저 건너 산이 미륵산인데 그 산에 용화사라는 절이 있습니다. 그 절에 해인사에 계시던 영재 노장스님이 주지로 계십니다. 잠시 쉬었다 가시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그래! 그게 좋겠다. 여기서 걸망을 챙겨 내리는 게 좋겠어.”
통영이라면 스님이 판사직을 버리고 엿장수로 떠돌던 어느 해 겨울 한철을 서당에서 주인집 아들을 가르쳐달라는 청에 못이겨 지낸 곳이기도 했다. 그때 바다 밑으로 굴을 뚫어서 길을 낸다며 공사를 하던 해저터널은 이미 완성되어서 사람들이 왕래하고 있었다. 스님은 터널 입구에서 잠시 옛날의 감회에 짖었다.
“스님,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시옵니까?”
“응?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스님은 옛날의 회상에서 돌아와 바다 건너 산을 가리켰다.
“저기 저 바다 건너 산이 아마 미륵산이라 했던가?”
“예, 미륵산이라고도 합니다.”
“저 산이 미륵산인걸 보면 미래에 미륵부처님이 오실 불국정토가 아닌가?”
그랬다. 미록산용화사는 미륵보살을 모시는 신라의 고찰이었다. 용화사는 깎아지른듯 가파른 산허리를 돌아서 올라가면 뜻밖에 새의 둥지처럼 아늑한 평지에 자리잡고 있었다. 마침 한줄기 소나기가 개인 뒤라서 운무가 산이마를 가리니 신비함을 더해주었다.
일행이 법당 뜰에 들어서자 주지스님이 나와서 반겼다.
“효봉스님이 아니시오?”
“그간 별고 없으십니까, 노장스님. 하룻밤 신세를 질까 하고 찾아 들었습니다.”
“하룻밤신세라니요. 범홍수좌가 다녀간 뒤로 한동안 소식이 없어서 궁금하게 기다리고 있던 참입니다. 도솔암을 비웠뒀으니 그곳에서 다시 동방제일선원을 열어 선풍을 일으키셔야지요.”
“동방제일선원이라니요?”
“효봉스님이 선방을 연다기에 제가 이름을 그렇게 붙여본 것입니다.”
효봉스님은 의외의 말에 다소 당황하는 듯했다. 이때 법홍수좌가 얼른 나서며 말을 받았다.
“방장스님, 기실은 지난 겨울 방장스님 모실 곳을 찾아다니다가 이곳에 왔던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선방으로 삼기에는 다소 좁은 듯하기에 제가 자신있게 말씀 드리지 못했습니다.”
그제서야 의문이 풀린 효봉스님은 제자의 갸륵한 마음씨에 흐뭇해했다.
대흥사 가던 길 꺾어 도솔암에 선방 열어
효봉스님이 대흥사로 가던 행장을 멈추고 미륵산 도솔암에 머문다는 소문이 퍼져 나가자 통영의 불교신자들이 모여들었다.
“효봉스님 같은 큰스님이 우리 고장을 찾아주셨으니 더없이 좋은 기회야. 이런 때를 당하여 우리가 스님을 모시고 부처님 공부를 제대로 할 좋은 기회가 아닌가?”
“암, 그렇다마다. 어떻게 해서든 큰스님이 통영에 머무르시도록 강구해 보자고.”
이리하여 신도들의 간청과 협력으로 어렵던 도솔암의 형편이 펴지게 되었다.
여름부터 그 이듬해 여름까지 효봉스님은 도솔암에서 안거했다.
한편 스님의 법력에 이끌려 그 문하에서 공부를 하려는 청안(靑眼)납자들의 수도 점점 늘어 죽비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해인사 가야총림에서 수행을 하던 납자들도 어떻게 소문을 듣고 다시 모여들기 시작했다. 뿐만아니라 스님의 법문을 듣고 불교를 공부하려는 재가불자(在家佛子)들도 날마다 몰려들었다. 스님은 일일이 이들을 기쁘게 맞아주었다.
스님은 많은 재가불자들에게 기꺼이 설법을 해주었다. 법명을 지어주며 세상 살아가는 이치를 담은 게송을 일일이 화선지에 적어주었다.
다시 토굴 짖고 수행 정진키로
한편 가끔 먼 데서 선승들이 찾아와서 선문답을 화답하기도 했다. 월산스님, 경산스님, 경운스님, 탄허스님, 성수스님 등 당대의 선승들이 먼 길도 마다않고 찾아왔으니 일개 무명의 조그만 도솔암은 갑자기 밝은 빛이 한곳으로 쏠려 세상에 환하게 드러나게 되었다.
이곳의 이름 그대로 ‘동방제일선원’의 값을 톡톡히 해내고 있었다.
삼복 더위가 숨을 턱턱 막는 무더운 어느날 강원도 월경사에서 패기에 찬 눈푸른 탄호수좌가 땀을 빨빨 흘리며 가파른 미륵산 도솔암을 찾아왔다.
“소승 문안드립니다.”
“그대가 고향으로부터 오니 고향의 일을 알리라.”
“대중 스님네와 미륵산이 생기기 전에 모든 것이 이미 다 구족해 있습니다.”
“하하하”
탄허스님을 보자 대뜸 그 그릇을 알고 효봉스님은 동문을 던졌고 탄허는 서답을 했다. 이어서 효봉스님은 모처럼만에 선객을 만나 환심에 젖어 다음과 같은 게송을 읊었다.
용화산은 용을 타고 달아나는데
저 바다의 진흙소 달 물고 오네
우뚝이 홀로 드러난 곳에 걸으니
봄나무에 눈독이 격밖에 피었네.
탄허스님은 이렇게 하여 효봉스님을 만나 참선의 오묘한 경지를 이곳 도솔암에서 맛볼 수 있었다. 탄허수좌를 처음 만남에도 불구하고 효봉스님은 이미 이심전심의 전법으로 십년지기나 되는 것처럼 격의 없이 나이도 취향도 지식도 뛰어넘어서 한데 용해되어 버렸다.
효봉스님은 마음에 맞는 수좌를 만나면 언제나 나이도 쉽게 잊은 채 함께 선에 취하여 인도하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이렇게 지내던 어느 날 효봉스님이 구산수좌를 불렀다.
구산수화는 진주 응석사에서 정진한 뒤 효봉스님이 계시는 용화사로 와서 시봉을 들고 있었다.
“스님, 부르셨습니까?”
“응, 내가 불렀네. 이 산이 미륵부처님과 인연이 깊어서 미륵산이니, 내 여기서 정진을 좀 하고 싶네. 어떤가 조그만 토굴을 하나 지어 주겠는가?”
“토굴을 말씀입니까요, 스님?”
“그래, 조용히 정진 좀 하고 싶어. 찾아오는 사람도 많고 해서 조용히 좀 지내고 싶네 그려.”
“방장스님, 건강도 생각하셔야지요.”
“내 건강이 어때서? 난 괜찮아. 수행인이 수행을 게을리하면 밥이나 축내는 밥버러지에 불과한 게야. 내가 그동안 너무 본분사(本分事)에 게을리한 것 같아.”
스님의 나이 이때 65세였고, 그동안 수도정진에만 힘쓸 뿐 몸을 돌보지 않은 탓으로 나이보다는 훨씬 더 늙어보였다. 은사의 건강을 걱정하는 제자들에게 몸으로 보여주려는 스승의 궁행정신(躬行精神)이 교감하는 순간이었다.
스님이 한번 마음으로 결정하면 절대로 물러서지 않음을 구산수좌는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염려하지 마십시오. 저희들이 좋은 토굴을 짓도록 힘써 보겠습니다.”
“아닐세, 좋은 토굴은 소용없어. 정진에 필요한 방 한 칸에 군불지필 아궁이만 있으면 족하니 거창하게 공사를 벌일 생각은 마시게.”
“알겠습니다. 분부대로 거행하겠습니다, 방장스님.”
구산수좌는 토굴을 짓기 위해서 먼저 용화사에서 일하는 처사와 의논했다.
“처사님, 인부를 몇 사람 모아주십시오.”
“인부는 어디에 쓰시게요, 스님?”
“방장스님께서 정진하실 토굴을 하나 지어야겠어요. 그러니 알아서 목수도 한 사람 구해보면 좋겠지요. 토굴이라 해도 나무가 전혀 안 들어가는 것은 아니니까요.”
“마침 아랫마을에 헌집을 팔려고 내 논 것이 하나 있으니, 그것을 사서 헐어다가 지으면 어떨까요? 아마 헐값으로 살 수 있을 겁니다.”
“그게 좋겠군요. 그럼 가서 그 집을 얼마에 팔 것인지 알아보고 오시지요.”
집은 어떤 사람이 별장을 겸해서 지은 방 두 칸에 부엌이 딸린 초가였다. 집값은 아주 쌌다. 집을 팔겠다는 사람은 불교신자는 아니었으나 절에서 사서 헐어다가 토굴을 짓는다 하니 처음에는 값을 쳐서 받으려 하지 않았다. 구산수화가 우겨서 쌀 두 말을 떠맡기고 집을 헐어왔다.
토굴은 용화사 뒤 산중턱의 펑퍼짐한 평지에 지었다. 말이 토굴이지 조출한 초가삼감이 지어진 셈이다.
그러나 다 지은 토굴을 스님께서 보고는 그다지 달가워하지 않는 눈치였다.
아마 상상하고 있던 토굴, 말하자면 금강산 신계사 뒤에서 득도할 때 절반은 땅 속에 묻힌 그런 토굴을 연상했던 것이다. 또한 제자들이 당신 때문에 공연히 많은 공력을 들인 것이 미안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기왕에 힘들여 지어놓은 집이라서 내 쓰기는 하겠으나 공연한 수고들을 했구먼··.”
참대밭에서 참대가 난다
스님은65세 되던 서기 1952년 겨울부터 이 토굴에 안거하면서 용맹정진하였다. 수화를 보내서 수발을 들어주겠다는 것도 한사코 뿌리쳤다.
“수행이란 편하면 되지 않을 뿐 아니라 옆에 시자(侍者)가 있으면 신경이 쓰이고 부담스러워서 정진이 잘 되지도 않을 게야. 그러니 내가 물 긷고 밥 지어 먹으면서 혼자 있겠네. 그동안 양식이나 좀 보태주시게.”
“방장스님, 그것만은 안 됩니다. 이 겨울에 밥 짓고 불 때기란 저희같은 젊은 것들도 힘들 터인데 스님께서 손수 하신다는 것은 불가합니다. 또 밥 짓고 불 때다가 보면 참선하시는 데도 지장이 있을 것입니다.”
“선이란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앉으나 서나 눕거나 길을 걷거나 가리지 않으니 어디에 있건 상관이 없는 법. 열심히 밥 짓고 불 때는 것도 참선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저희들 생각도 좀 해주셔야지요. 아마도 방장스님께서 혼자 게시겠다고 계속 우기시면 대신 저희들이 마음놓고 수행할 수 없을 것이옵니다.”
“옴-그도 그럴듯 하구만. 그러면 군불 때는 일과 하루 한 끼 공양을 아랫절에서 날라오는 일만 좀 부탁하겠네.”
스님은 하루종일 묵언(默言)으로 일관하는 날이 많았다. 하루가 아니라 이틀 사흘 몇날 며칠을 말 한마디 없이 지날 때도 있었다. 사람이 말을 많이 하게 되면 정신이 산란해진다. 마음이 들뜨고 제 말에 제가 취해서 실없는 말도 하게 되며 꾸며낸 이야기도 하게 되고 남의 험담도 하게 되는 법이다.
그래서 수행하는 이 가운데는 천일 또는 삼천일 기한을 정해두고 묵언수행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일반으로 기한을 정해두지 않는다 하더라도 수행하는 수좌나 큰스님들은 말수가 자연히 적어질 수밖에 없다.화두를 참구하다보면 오로지 그 한 가지에만 몰두하고 바깥세계에 관심이 덜해지기 때문이다.
스님이 묵언하실 때는 하안거나 동안거의 반산림법문을 글로 대신 하는 경우도 많았다. 용화사 뒤 토굴에서 하안거 할 때 일이다. 스님이 묵언중임을 알기에 구산수화가 아침 일찍 문안을 드리고 여쭈었다.
“방장스님, 오늘이 반산림인데 수좌들을 모이게 할까요?”
“------”대답 대신 문이 조용히 열리더니 화선지에 적은 법문을 내밀었다. 구산수좌는 스님이 내민 법문을 받아들고 예를 올렸다. 묵언하시는 스님의 뜻을 아는지라 구산수화 역시 묵언으로 예를 올리고 나왔다.
제자들이 스님 위해 새로 미래사 지어
토굴에서 정진을 마친 스님은 이듬해 여름에는 용화사의 반대편 미록산 중턱에 있는 미래사로 옮겼다. 미래사는 제자들이 스님을 위해 지은 절이다. 효봉스님을 찾는 전국의 선송과 눈푸른 납자는 말할 것도 없고, 스님의 법문을 듣고자 하는 신도들을 도솔암과 토굴로서는 도저히 수용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생각다 못한 제자들은 좀 넓은 절을 지을 연구를 했다.
구산스님은 제자들과 함께 절 지을 터를 고르기 위해 미륵봉으로 올라갔다. 미륵봉에서 내려다보니 멀리 통영 앞바다가 눈에 들어왔다. 통영에서 바다를 건너 곧바로 올라오면 용화사가 있고, 용화사의 반대편에 울창한 삼나무 숲이 있었다. 숲 가운데에 산골 논이 두어 마지기는 됨직하게 있고 그 자리가 마치 닭의 둥우리처럼 눈에 들어왔다. 구산수좌가 함께 간 제자들에게 말했다.
“저기 저 삼나무숲 가운데 논을 좀 보게.”
“예, 보입니다. 거기 웬 연못도 하나 있는 듯합니다.”
“맞았어. 이 산에서 가람터로서는 더 없지 싶으네. 저 논이 누구 것인지 알아보게.”
그 논은 산아래 마을 영운리 송씨의 소유였다. 구산스님은 신도 가운데 대원해 보살과 형제보살로 통하는 묘각심 보살을 통해서 그 논을 사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묘각심 보살은 그 언니와 함께 효봉스님을 따르며 불사에 남달리 앞장을 서는 신심이 깊은 김씨성을 가진 형제였다. 그래서 효봉스님은 이 두 보살을 형제보살이라고 불렀다. 형제보살은 송씨를 찾아갔다.
“송씨요! 효봉 노장시님께서 도실암이 비좁아 불편이 많으시거덩예. 그래서 뭐꼬 새 절을 하나 이루고 싶다카는기라. 영운리 뒷산에 송씨네 논을 마음에 들어하시네예. 잘 알다시피 스님네가 무신 돈이 있는기요. 그래가지고 우리 신도들이 돈을 모아서리 절터를 구해드리고 싶어예. 효봉시님 같이로 큰시님이 우리 곁에 계신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인연이 되겠어예. 그라이 송씨도 부처님께 보시한다꼬 생각하고 허락해 주이소 그만.”
송씨는 헐값으로 선선히 논을 내놓았다. 그리고 논을 매입하는 돈은 신도들이 모아서 지불했다. 그 다음은 집을 짓는 일인데 새로 나무를 베어서 짓는다는 일이 보통 일이 아니었다. 논값보다 집짓는데 훨씬 많은 예산이 필요했다. 그래서 묘안을 짜낸 것이 헌집을 사서 헐어다가 짓는 방안이 모색되었다. 용화사 뒤에 토굴을 지을 때 헌집을 사다가 지은 경험이 있었다.
그러나 통영에는 절을 지을 만큼 큰 집을 살 수 없었다. 수소문 끝에 고성에서 팔려고 내놓은 집을 발견했다. 대가집의 사랑채였으나 여염집보다 규모가 훨씬 커서 그 집을 사서 헐어오기로 하였다. 절을 짓는 일은 순조로이 진행되었다. 마을 사람들도 집을 헐어서 배에 싣고 산까지 져 올리는 일에 앞장서서 협조해 주었다.
그런데 절을 짓다보니 두마지기 논은 협소한 느낌이 들었다. 논주위의 땅은 삼나무가 빽빽이 들어선 일본인 소유의 적산 임야였다. 해방 뒤에 적산가옥이나 임야 또는 전답은 무주공산이 되어 있어서 정부에서는 연고권이 있는 사람에게 불하를 해주었다. 그러나 반드시 그렇지만도 않아서 연고권이 없는 경우는 힘깨나 쓰고 말발이나 뻔지르르하게 하는 사람이 먼저 차지하면 그만인 세상이었다.
구산스님은 적산 임야를 불하받을 방법을 찾았다. 마침 이 임야는 아직 불하되지 않은 채 통영 산림계에서 관리하고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통영 산림계 소장은 환속한 전직 승려 출신의 윤대영이라는 처사였다. 묘각심 형제보살이 다시 윤처사를 찾아가서 사정이야기를 하였다.
“윤처사님요! 효봉시님께서 영운리 뒷산에 절을 짓는데 땅이 비좁다카던데요. 그라이 그 적산 임야라 카더나, 그 삼나무 들어선 산을 쪼매 샀이면 카는데 윤처사님이 사도록 주선해주이소..” “그래예? 잘 됐구마. 시님들이 산을 사모 아무래도 산림보호도 잘 될끼고, 서로 서로 좋은기라. 내사마 상부에 연락캐서 허락을 맡아 볼끼니깨내 걱정마이소.”
그러나 이러한 소식이 마을에 전해지자 마을 사람들이 반대하고 나섰다. 그 임야는 마을 공동의 소유로 해주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마을 사람들이 이 임야의 연고권을 주장하는 일면에는 그 동안 땔나무를 제대로하지 못하게 막아서 불편했던 점도 작용했다.
일인들이 소유한 땅에서 만약 나무가지 하나라도 꺾으면 산림법으로 엄히 다스렸으므로 해방 뒤 일인들이 소유했던 산은 급속도로 벌거숭이 산이 되고 말았다. 영운리의 산도 마찬가지였다. 이 임야의 소유권이 확정되지 않은 실정이라서 주민들이 막무가내로 나무를 베어가서 벌써 벌거숭이로 변해가고 있었다.
이 사실을 늦게야 알게 된 효봉스님은 원명수좌를 불렀다.
“원명아! 너 이 편지를 가지고 서울에 가서 전하고 오너라.”
“서울 누구한테 전하는 서찰이옵니까요?”
“여기에 주소와 전화번호를 적었다. 우선 선학원에 가서 자고 전화를 한 다음 직접 찾아가보면 무슨 답이 있을게야.”
편지의 겉봉에는 여자의 이름과 주소가 적혀있었다. 효봉스님을 찾아오는 신도나 보살들은 웬만큼 알고 있었는데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방장스님, 이 보살님의 성함은 처음 듣는 분인데 누구신지요?”
“건설부장관의 부인이다. 내가 금강산 여여원에 있을 적에 한달포 요양을 하고 간 적이 있었느니라. 너도 선학원에 있을 적에 보지 않았더냐?”원명수좌의 머리에 그제야 모습이 떠올랐다. 불교정화의 일로 선학원에 머물 때 가끔 찾아오던 귀부인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 부인은 처녀적에 건강이 나빠서 금강산 여여원에서 여름 한달을 요양하고 간 적이 있었다. 그때 효봉스님도 여여원에서 참선하고 있을 때라서 서로 알고 있었는데 효봉스님이 서울에 온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찾아오곤 했었다. 그 처녀는 뒷날 장관의 부인이 되어 있었고, 효봉스님이 정화불사로 선학원에 머물 때 찾아온 일이 있어서 원명수좌도 기억하고 있었다.
그 부인은 친정이 불교를 믿어서 금강산에서 요양도 했으나 시집간 후에는 시집의 종교가 기독교여서 교회에 나가고 있었다. 종교가 다름에도 불구하고 효봉스님을 찾아와 도와드릴 것이 없느냐고 묻기도 했다.
“스님! 제가 금강산에서 스님께 신세를 많이 져서 이렇게 건강해졌는데 그 은혜를 어떻게 갚을지 모르겠어요. 힘자라는 데까지 도와드리고 싶어요. 제 바깥양반도 스님께 감사하고 있어요.”
“늙은 내가 필요한 게 무엇이 있을꼬? 누더기 옷을 걸쳤을망정 맨 살이 드러나지 않으면 될 것이고, 하루 한 끼 주먹밥이라도 배고프지 않으면 되는 게지.”
“스님도 어쩌면 그렇게 무심하셔요? 제가 절에 다니지 않는다고 싫어하는 뜻이지요? ”
“인생이란 다 근기따라 살아가는 법. 종교가 무엇이든 상관할 바가 못되여. 정이 그렇게 도와주고 싶거들랑 내가 시봉을 데리고와 있으니 이 늙은이 양식값이나 좀 보태줘.”
“고마워요, 스님!” 부인은 나중에 비서를 시켜서 제법 두툼한 봉투를 보내왔다. 스님은 그 봉투를 열어보지도 않은 채 주지스님한테 가져다 주라고 시자에게 시켰다. 선학원 주지스님은 그 봉투를 받을 수 없다고 되돌려 보냈다. 이번에는 직접 스님이 봉투를 가지고 주지스님에게 갔다.
“이보시게, 주지스님! 내가 여기 시봉드는 아이까지 데리고 와서 양식을 축내고 있으니 염치가 없네. 이거라도 받아줘야 마음 편히 밥을 먹을 게 아니겠나?”
“방장스님도 별 말씀을 다 하십니다요. 이것은 스님께 드린 것이니 잘 간직하였다가 요긴하게 쓰셔야지요. 저희들이야 큰스님 모시는 것만으로도 큰 복인걸요.”
“허허! 그렇게 버티면 나는 오늘 저녁부터 밥을 굶겠네.”
주지스님은 할 수 없이 그 봉투를 받았다.
원명수화는 효봉스님이 불교정화에 관여할 때 선학원에서 시봉하면서 보았던 이 정경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스님의 편지를 가지고 원명수화는 서울로 올라가서 그 주소를 찾아가서 부인을 만났다.
그 이튿날 장관의 비서관이 선학원으로 찾아와서 원명수좌는 차를 타고 어떤 사무실로 안내되었다. 자초지종을 듣고 난 비서관은 그 자리에서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전화의 요지는 마을 가까운 쪽은 마을사람들에게 주고 절 가까운 쪽은 절에 주라는 내용이었다.
한국의 산림은 고찰 주변에 잘 보존되어 있으니 절에 주는 것이 산림보호를 위해서 더 합당하다는 논리였다.
비서관은 원명수화에게 내려가서 기다리면 조치가 있을 것이라고 말해 주었다. 원명수화가 통영으로 내려와서 사흘 후에 산림계에서 연락이 왔다. 결국 절의 주변 임야를 매입하게 되었다.
은사스님 미래사로 모셔와 입종 지켜
그리하여 임야를 둘러싼 실랑이는 승소로 끝이 나고 마침내 아담한 절이 이루어져 미래사의 상량을 얹는 날이 되었다. 효봉스님은 기쁨에 넘쳐 상량문을 손수 지었다.
미래사 상량식을 올리고 오래지 않아서 법당이 준공되어 회향을 마친 날 효봉스님은 제자들을 불러모으고 아주 어렵게 업을 여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보지 못하던 망설임의 표정이었다.
“내가 이 말을 해야 할지 안해야 할지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네만 여러 수좌들이 혹 내 생각과 다르거든 거리낌없이 말해주시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어서 말씀을 하시지요.”
“음, 내 염치불구하고 말하겠네. 내가 송광사에서 해인사로 떠난 뒤로는 배은망덕하게도 은사이신 석두노스님을 가까이 모시지 못했다네. 이제 석두노스님께서 노환으로 거동이 불편하다는 기별을 받았네. 노장스님 연세도 연세이니만큼 이 세상에는 오래 머무르시지 못할 것 같으이. 해서, 그날까지라도 내가 모시고 싶은데 그렇게 되면 결국은 또 자네들한테 짐올 지우는 꼴이 되질 않겠나?”
“방장스님 ! 그런 염려는 아예 하지도 마십시오. 석두노장스님으로 말하면 저희들한테는 친할아버지 뻘인 노스님이 되는데 노후를 편히 모시는 것 또한 저희들이 해야할 도리인 줄 아옵니다.”
“정말 그렇게들 생각하는가? 고맙네. 내가 이제 한 시름을 잊게 되었네!” 이리하여 노환으로 누워계시던 석두화상을 통영 미륵산 미래사로 모셔오게 되었다. 효봉스님은 몸소 석두노스님의 병수발을 들었다. 그러나 석두화상은 너무 고령이어서 미래사에 온 지 채 한 달도 안 되어서 입적하고 말았다. 그날이 서기 1954년 음력4월24일.
효봉스님의 은사스님에 대한 효성은 제자들에게 또 다른 감동을 주었다. 몸소 대소변을 받아내고, 혹 수좌들이 대신하려 하면 매우 나무라며 근접도 못하게 했던 것이다. 속담에 ’참대밭에서 참대가 난다’는 것은 이런 경우를 두고 이름인가.
효봉스님의 문하에서는 효봉스님의 가풍을 따르는 빼어난 제자들이 효심이 지극한 구산스님을 비롯하여 속속 배출되어 한국불교의 도도한 흐름에 한 줄기를 점하고 있는 것이다.
효봉스님이 통영 미륵산 미래사에서 주석하고 있던 서기 1954년, 스님의 세속나이 67세 되던 8월 어느 날 서울에서 한 통의 편지가 왔다.
“방장스님, 서울에서 서찰이 왔습니다.”
“서울에서 서찰이 왔다고? 어디 펼쳐서 읽어보아라.”
이 서찰은 왜색으로 타락된 한국불교를 다시 일으켜 세울 불교정화를 벌일 것을 의논하고자 하니 속히 상경하라는 동산스님과 청담스님의 간곡한 말이 적힌 편지였다.
미래사 대웅전
편지를 다 듣고난 스님은,
“여보게, 구산. 아무래도 서울로 가봐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제가 방장스님을 모시고 가겠습니다.”
“그래 주겠는가? 그럼 이곳 절살림은 보성이한테 맡기고 구산이 자네는 나랑 함께 떠나세. 일관(一觀)이 너도 함께 갈 것이니 바랑을 꾸려라.”
일관이는 도솔암에서 머리를 깎은 갓 들어온 시자다.
“당장 말입니까요?”
“당장 내일이라도 떠나야지. 서울서 모두 기다리고 있다지 않더냐? 중들이 제대로 중노릇을 하지 아니하고 싸움질만 하다가는 이 나라 불교가 뿌리째 뽑혀 나갈 판국인데 이러고 앉아 있을 수만은 없지 않겠느냐?”
서기 1954년 5월21일 이승만대통령은 ‘불교정화’ 유시를 통해서 왜색불교의 유풍인 처자 있는 대처승들은 사찰 밖으로 물러가고, 한국 고유의 승풍인 불조(佛祖)의 혜명(慧命)올 잇기 위해 독신승(비구승)이 사찰을 지키게 하라는 담화문을 발표하였다. 이승만은 특히 반일정신이 강해서 왜색불교의 흔적인 대처승불교를 혐오했다.
그러나 그에 앞서서 이러한 정화운동이 일어나게 되는 원인을 캐자면 그 발단이 1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본제국주의가 한국불교를 말살하기 위해서 친일파 승려 이희광을 앞세워서 일본 조동종(曺洞宗)과 합종(合宗)하는 연합조약을 체결한데서부터 발단된다. 박한영, 한용운스님의 한국불교의 주체를 확립하려는 운동은 서기 1911년 6월 조선총독부 ‘사찰령’에 의해서 일단 주춤했으나 해방이 되자 다시 일제의 잔재를 없애려는 시도가 일기 시작했다.
서기 1948년 박한영스님의 업적으로 송만암스님이 종정에 취임하고 종헌을 바꿔서 스님들을 교화승(대처승)과 수행승(비구승)으로 구분하는 조치를 취했다. 이리하여 비구측과 대처측은 통도사, 해인사, 송광사 등지로 옮겨가면서 연석회의를 열었으나 서로 이해가 상반되어 결론이 나지 않았다. 마침내 비구측은 서기 1954년 8월24일 선학원에서
전국 비구승 대표자회의를 열어 별도의 종단을 구성하기에 이르렀다. 이승만대통령의 유시는 비구승측에 힘을 주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불교정화운동은 활기를 띠고 동산, 효봉, 청담, 금오스님에 의해서 주도되었으며, 청담스님은 특히 젊은 스님으로서 완전 정화를 주장하는 강경한 입장을 표명하여 점진적으로 정화하자는 효봉스님과는 의견을
달리하기도 하였다.
서기 1956년 새로 구성된 종단은 종정에 만암스님, 부종정에 동산스님, 종회의 장에 효봉스님, 총무원장에 청담스님, 감찰원장에 금오스님을 선출하였다. 만암스님이 종조(宗祖)의 문제로 종정직을 사임하자 석우스님이 종정을 맡았고, 2년 뒤에 석우스님의 입적으로 효봉스님이 종정에 취임하였다가 6년 뒤 서기 1962년 4월11일에 통합종단을 구성하고 초대종정으로 추대되었다.
종단정화운동은 오늘날 불교의 현대화, 대중화 운동에도 한몫을 했다. 승단정화를 통해서 왜색불교의 잔재를 청산하고, 불교의 정통성을 회복함은 물론 우수한 도제(徒弟)의 양성, 어려운 불경의 번역, 대중포교의 활성화 등 오늘날 한국불교의 위상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말할 수 있다.
불교정화운동 동참 위해 서울로
효봉스님은 이러한 불교정화운동의 깃발을 들기 위해서 통영 미래사에 머물며 수행하던 일을 잠시 멈추고 그해 8월17일 상경하기에 이르렀다.
스님은 서울에 올라와서 안국동 선학원에서 머물게 되었다.
선학원에 머물게 되었다는 소문이 어느덧 문밖에 나가자 문안을 드리고자 찾아오는 스님들과 재가불자들로 선학원도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스님은 안국동 선학원에서 일년 동안 주석하며 종단정화에 매달렸다.
서기 1954년 8월24일 선학원에서는 천국 비구송 대회가 열렸다. 이 대회의 법문을 통해 스님은 이렇게 사자후(獅子喉)를 토했다.
오늘 나는 묘고산(妙高山)에 올라가 사방을 둘러보았다.
안에는 사상(四相)의 산이 둘러있고 밖에는 생사의 바다가 둘러있으니, 어떻게 하면 그 사상의 산을 넘고 생사의 바다를 건널 수 있겠는가?
스님은 출가 입산한 뒤로 시정에 발딛기를 그토록 꺼려했으나 한동안 어지러운 종단일을 수습하기 위해서 번다한 일로 시간을 보내야 하는 것이 달갑지 않았다. 그래서 무자 화두를 외던 스님의 입에서는 서울에 머무르는 동안 ‘망할 놈의 자식들’이라는 말이 대신 흘러나왔다. 수도인과 시정인의 차이만큼이나 거리가 먼 두 말이었다.
옆에서 시봉을 들던 수좌들이 누가 망할 놈의 자식이냐고 물으면,
“너희는 알 것 없어!”
하며 말길을 끊었다.
그때 스님은 종단정화의 방법문제를 두고 다른 스님들과 의견을 달리했다. 급진적인 스님들은 한꺼번에 대처승이 소유한 절을 모두 장악하지 않으면 후일에 화근이 된다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일을 순리적으로 풀어가야 한다는 것이 스님의 주장이었다. 숫적으로 열세인 비구승은 숫자도 적을 뿐 아니라, 본분이 수도에 있으니 이판(理判 : 불경의 연구와 참선에만 열중하는 일)에는 능할지 몰라도 사판(事判 : 절의 재무와 살림을 꾸려가는 일)에는 서투르므로, 통도사, 해인사, 송광사 등 삼보사찰만 맡아가지고 거기서 착실히 수행하면서 힘따라 서서히 정화하자는 주장이었다.
“쥐도 도망갈 구멍을 두고 쫓으랬는데 대처승을 일시에 몰아내려한다면 문제가 커지고 말 것이오. 그 사람들이 앉아서 가만히 당할 리는 만무할 것인즉, 반드시 절뺏기와 주지 싸움, 나아가서 종권다툼으로 발전하여 악순환을 거듭하게 될 것이오. 더구나 대처승은 가족까지 거느리고 있으니 더 필사적으로 저항할 것이오.”
스님의 예견은 들어맞았다. 정화불사는 애초의 의도와는 달리 엉뚱한 데로 흘러가 한국불교에 치명적인 상처만을 더 크게 남기고 말았다.
누가 날 찾거든 어 디로 갔는지 모른다고 하게
스님은 종단정화불사가 단시일에 끝나지 않을 것을 예견하고 다시 통영 미래사로 내려왔다. 그해가 서기 1955년 겨울. 스님은 제자들을 불렀다.
“부르셨습니까, 방장스님?”
“응, 염치가 없구만. 내 자네들한테 한 가지 청이 또 있어서.”
“염치가 없다니요, 스님. 제게 무엇이든 말씀하세요. 힘자라는데까지 스님을 모시는 게 저희들 도리인걸요.”
“고마우이. 자네들도 알다시피 지난 일 년 동안 서울에 가서 정화네 뭐네 하면서 공부를 게올리했으니 그동안 못한 공부를 해야 할까봐.”
“방장스님, 외람된 말씀일지 모르지만 건강도 좀 생각하셔야지요.”
“아니야, 난 이렇게 건강하지 않은가? 머리 깎은 중이 공부는 하지 않고 게으름을 핀다면 죄를 면하지 못할 거야. 내가 여기에 온 줄 알면 또 사람들이 몰려들테니 토굴을 하나 묻어야겠어.”
“그러면 분부대로 거행하겠습니다, 방장스님.”
제자들은 일단 대답을 하고 나오기는 했으나 효봉스님의 건강이 염려되었다. 방장스님의 성격으로 미루어 뜻을 거스르지 않는 것이 효도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일단 토굴을 지어드리기로 결론을 내렸다. 토굴은 미래사 입구에서 왼쪽으로 산중턱을 타고 가다가 커다란 바위가 있었는데 그 바위 밑이 사람 7,8명은 피할 만한 곳이어서 그곳의 천연조건을 이용하여 토굴을 짓기로 하였다. 효봉스님이 토굴로 자리를 옮겨앉았으나 스님을 뵙고자 하는 신도는 물론 사방에서 눈푸른 납자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여 미래사는 늘 무슨 잔치집같이 붐볐다.
그때 토굴에서의 시봉은 법정(法頂)수좌가 머물면서 하였다. 법정수좌는 효봉스님이 서울 선학원에서 종단정화의 일로 주석하고 있던 서기 1954년 겨울 출가를 허락한 신참이었다.
법정은 한창 감수성이 예민하던 나이에 6 ·25를 지켜보면서 인간존재에 대한 회의로 밤잠을 이루지 못하며 큰 의문을 가지고 고뇌와 방황의 학창시절을 보냈다. 마침내 24세 때 입산 출가를 결심하고 초겨울 강원도 오대산 월정사로 가기 위해 서울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밤차로 서울에 내려 강원도 행 버스를 타려 했으나 봉익동 대각사에서 만난 월정사의 한 스님이 말하기를 오대산에 눈이 많이 내려서 교통이 두절되어 한동안 가지 못활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그런데 대각사에 있던 한 스님이 선학원에 효봉스님이라는 도인스님이 머물러 계신다고 일러주었다. 그 길로 안국동 선학원을 찾아가서 그동안 가졌던 인간존재에 대한 의문과 출가할 결심을 말하였다. 한마디 말도 없이 이야기를 다 듣고 난 효봉스님은 한동안 목포에서 왔다는 청년의 얼굴을 쳐다보고 비로소 입을 열었다.
“생년월일은 언제던고?” 스님을 찾아와서 출가하겠다는 사람이 있으면 먼저 생년 월일을 묻고는 조용히 간지를 깊어보고 출가 여부를 결정하는 습관을 효봉스님은 가지고 있었다.
“중노릇이라는 게 무슨 벼슬하는 것도 아니고, 잘 먹고 잘 살려고 하는 것이 아니야. 법란(法亂)이 심할 때는 신심이 금강같이 굳지 않고서는 견뎌내기가 힘드는 법이지. 수도생활이란 오로지 고행의 가시밭길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일세. 대저 한번 출가를 하면 사자의 힘줄과 코끼리의 힘으로 인정을 끊어야 하고, 일구월심으로 부처님의 출가한 뜻을 알아 부처의 행동을 지녀야 한다.”
이리하여 법정은 효봉스님의 허락을 받아 출가하였다.
효봉스님은 법정수좌를 곁에 두고 불교집안의 법도를 몸에 익히도록 지도했다. 스님은 법정뿐 아니라 처음 머리를 깎는 수좌가 생기면 누구나 곁에 두고 마치 속가에서 할아버지가 가문의 내력과 법도를 일러주듯 그렇게 절집안의 여러가지 수행법과 불교의 이치에 대해서 깨우쳐주고 타일렀다. 처음 머릴 깎은 수좌들도 젊은 사형(師兄)들 밑에서 주눅들어 생활하는 것보다 훨씬 편안한 마음으로 절집안 풍속에 익숙할 수 있었다.
효봉스님은 미래사 토굴에서 참선삼매에 들어 하루 한 끼의 공양만 들 뿐 오후에는 불식하는 정진을 또 시작했다. 스님은 털끝만큼도 계율에 어긋나는 일은 하지 않았고, 그러기에 제자들에게도 엄한 채찍을 들 수 있었던 것이다. 그해 겨울 미래사 토굴에서 동안거를 마치고 해제를 하는 날 스님은 법정에게 사미계를 주고난 후 제자들을 불렀다.
“이보시게, 구산.”
“예.”
“내 법정사미를 데리고 인적이 끊어진 선방에 가서 당분간 지내고 싶구만. 지리산 쌍계사로 갈 것이니 누가 날 찾거든 어디로 갔는지 모른다고 해주게.”
철저한 절약정신, 은연중 제자들에게도
스님은 새로 출가한 법정사미만을 데리고 지리산 쌍계사 탑전(搭嚴)으로 가서 참선삼매에 몰입하곤 했다. 미래사 토굴에서 안거를 하고자 했으나 마무리되지 않은 종단정화 등의 일로 부득불 만나야하는 내방객들 때문에 제대로 정진을 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지리산 쌍계사 탑전에서 법정사미와 단둘이만 거처하면서도 스님은 계행을 철두철미하게 지켰다. 무더운 삼복더위에도 가사와 장삼을 벗지 않았다. 공양을 들 때도 항상 대중이 있는 것처럼 죽비를 치고 심경(心經) : 식당작법)을 외운 뒤 엄숙하게 앉아서 음식을 먹었다.
그해 여름 어느 날이었다. 법정사미가동구 밖으로 찬거리를 구하러 내려갔는데 도중에 소나기를 만났다. 그래서 남의 집 처마 밑에서 잠시 비를 피했다가 오느라고 저녁 공양 지을 시간에 대지를 못했다. 늦은 시간은 단 10분. 그러나 스님은 법정사미를 불러 호되게 꾸짖었다.
“오늘은 저녁 공양을 짓지 말아라. 단식이다. 수행한다는 사람이 그렇게 시간관념이 없어서야 되겠느냐?”
“도중에 소나기를 만나서…”
“그것은 구실에 지나지 않는 변명. 수행에는 소나기보다 어려운 난관이 얼마든지 있는 법. 도를 닦는 사람이 그까짓 소나기가 무서워 피한대서야 어찌 더한 장애물을 넘겠는고?”
이날 준엄하게 시간에 대한 교훈을 얻은 법정스님은 시간관념이 뺏속깊이 박혔다.
그뿐 아니라 스님은 시주 들어온 물건에 대해서 인색할 만큼 아끼고 절약했다. 어느 날 아침 공양 후 우물가에서 설거지를 마치고 막 들어와 앉자마자 스님이 우물가에서 불렀다.
“얘, 법정아.”
“예, 방장스님.”
“빈 그릇하고 젓가락을 가져오너라.”
“빈 그릇은 어디에 쓰시게요 ? ”
“아, 인석아! 가져오라면 가져올 것이지 웬 토는 달아?”
스님의 목소리에 뻣뻣한 가시가 돋쳐 있었다. 법정사미는 숨을 죽이고 그릇과 젓가락을 가지고 우물가로 갔다. 스님은 우물가에 쪼그리고 앉더니 설거지 하면서 버려진 밥알과 된장국에 넣었던 시래기 줄기를 젓가락으로 주어담기 시작했다. 밥알은 겨우 l0개도 넘지 않았다. 스님은 그 밥알과 시래기 줄기를 물로 한번 행군 후훌쩍 한 입에 들이마셨다.
촛불을 켜고 불경을 읽을 때도 초심지가 다 타서 내려앉기 전에는 초를 갈아끼우지 못하게 했다. 행장을 챙겨드리다 보면 쓰다가만 비누조각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금강산 시절, 그러니까 30년 전에 쓰던 비누조각이었다. 이름이 비누이지 이미 향기가 다 빠져나가 때를 제대로 씻어낼 수 없을 정도였다.
옷은 실오라기가 닳고 닳아서 살이 비칠 정도가 되어야 바꾸었다. 솜옷도 세탁을 해야 할 경우 솜먼지 하나라도 나르지 않게 하면서 손수 한 올 한 올 실밥을 뜸어서 내주었다. 그 까닭을 물으면 솜과 옷감을 분리하면서 혹시 찢어질까 염려해서 그런다는 것이다. 이렇게 아껴쓰는 습관은 스님을 모시는 제자들에게도 은연중 몸에 배게되었다. 다 쓰고 못쓰게 된 물건을 버리는 경우에는 반드시 보고하고 확인을 얻은 다음에 버려야지 그렇지 않고 마음대로 버렸다가는 혼줄이 났다.
불교대회 참가 후 세계로 눈을 돌려
쌍계사 탑전에서 법정사미와 단둘이 수행정진을 하고 있던 그해 10월 말경 미래사의 구산스님이 문득 찾아왔다.
“구산 문안올립니다.”
“그래, 대중들은 다 잘 있는가?”
“예, 모두 열심히 정진하고 있습니다.”
“암, 그래야지. 그래야 하고 말고. 그런데 자네는 무슨 일로 왔는가?”
“서울에서 전갈이 와서 스님께 여쭙고자 왔습니다. 이번 네팔에서 제4차 세계불교도우의회를 연다고 합니다. 그 회의에 한국대표로 방장스님이 참석하시도록 결정이 되었다 합니다.”
이때 그러니까 서기 1956년 11월에 한국은 세계불교도우의회에 가입을 하게 되었고 한국불교가 국제적으로 처음 소개되었다. 이 회의에 한국의 대표로는 동산스님, 효봉스님, 청담스님이 참석하였다. 세 스님은 네팔의 국제회의에 참석한 후에 부처님의 나라 인도 성지를 두루 살펴보고 동남아 불교국을 시찰하기로 계획을 세우고 여행길에 나섰다.
그런데 인도에서 문제가 생겼다. 세 스님들을 안내하기로 했던 안내인이 그만 도중에 잠적해 버린 것이다. 통역이 없으니 꼼짝없이 손발이 묶인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여간 낭패가 아니었다. 손짓발짓을 해가며 호텔로 돌아온 스님들은 호텔 프론트에서 일본말이 귀에 들리자 번쩍 귀가 뜨였다.
일본의 어느 대학교수라고 하는 일본이 두 사람은 스님들의 이야기를 듣자 마침 자기들도 버마와 태국을 거쳐서 동남아의 불교문화를 시찰하는 중이니 자기들을 따라올 의향이 있으면 따라오라는 거이었다. 그들은 서양말을 제법 잘하는 듯 거리에서도 아무 불편없이 다녔고 스님들에게도 어느 정도 예절을 지키면서 대해주었다. 일제 36년의 피맺힌 한을 생각하면 대면조차 하기 싫은 일인들이었으나 낯선 이국땅에서 손발이 잘린 것이나 다름없는 처지고 보니 민족감정보다 부끄러움과 반가움이 교차하는 순간이었다.
세계불교도우의회에 참석하러 가서 고생을 하고 온 동산, 효봉, 청담세 스님은 공통으로 느끼는 바가 있었다. 그것은 우리도 세계로 눈을 돌리고 젊은 인재를 해외에 많이 보내서 공부를 시켜 우물안 개구리와 같은 처지를 탈피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귀국 후에 효봉스님은 미래사에서 수행하고 있던 제자 중에서 나이가 가장 어린 박완일, 곧 일관(一觀)사미를 동국대학에 진학시켰다. 일관사미는 고등학교 때 충무로 이순신장군 유적지에 수학여행을 왔다가 효봉스님을 만난 뒤 도인이 되는 공부를 하겠다면서 부모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담을 넘어서 출가한 이제 갓 스물되는 영리한 학인이었다.
중의 벼슬은 닭의 벼슬만도 못한 거야
세계불교우의회와 동남아 불교국을 순방하고 돌아온 스님은 인도에서 충격을 받았음인지 생각에 다소의 변화를 가져와서 그동안 그렇게 꺼리던 시정 출입도 자주 하는 편이었다. 더구나 아직도 종단정화가 마무리되지 못한 터라서 그 일도 두고만 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종회의장에 추대되자 사양하지 않고 수락했고, 이듬해인 서기 1957년에는 칠십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총무원장직을 맡았다. 그러나 스님은 늘 이렇게 말하였다.
“중의 벼슬은 닭의 벼슬만도 못한 게야.”
특히 불교정화의 문제가 매듭되지 않은 때라서 그야말로 날마다 편할 날이 없었다. 그래서 스님은 다음과 같은 불교정화불사송을 손수 써서 걸어두고 대중들이 마음에 새기도록 하였다.
큰집이 무너지려 하니
여렷이 힘으로 붙들어라.
(大厦將崩 家力扶持)
총무원장직을 맡은 지 일 년이 막 지난 2월에 종정으로 있던 석우 대선사가 입적하였다. 효봉스님은 이렇게 조사를 지어 종정스님의 열반한 뜻을 전했다.
백설이 어지러이 흩날려도 산천은 겨울이 아닙니다.
이제 종정 석우대선사께서 열반상올 보이시니 이는 백설의 의지입니까, 산천의 웅자(雄姿)입니까. 오실 때도 상(相)이 없이 오셨고, 가실 때 또한 그러시니 이날 종정의 면목은 어디서 찾으오리까.
산은 첩첩하고 물은 잔잔합니다. 시절인연은 바야흐로 교황(敎況)이 왕양(汪洋)하여 정화성업이 본궤에 오른 때에 홀연히 무상대법문(無常大法門)을 보이시니 영광이 독요(獨耀)하여 하늘을 가리고 땅을 덮습니다.
천지를 거두어 세상 밖에 내던지고 일월을 움켜 소매 속에 간직하니 이 무슨 도리이며, 종소리 떨어지는 곳에 뜬구름 흩어지고 만송이 푸른 산이 바로 석양이니 이 무슨 말씀입니까. 선사는 뜬구름이 아니시며 때는 석양이 아닙니다.
조계종 종정으로 추대되어
종정 석우대선사가 입적하자 종단에서는 효봉스님을 새 종정으로 추대하였다. 이때 세속나이 일흔한 살. 종정이 되었으나 그동안 직접 관련한 종단정화사업과 불교중흥을 위해서 서울에서 가까운 양주 흥국사에 주석하였다.
흥국사에 주석하고 있던 무렵 이승만대통령의 생일에 종단대표로 참석하게 되었다. 오늘날 청와대인 대통령 관저 경무대에는 고관대작과 각계각층의 인사들이 벌써부터 와서 대기하고 있었다. 이승만대통령이 등장하여 자리에 앉자 차례로 줄을 서서 축하 인사를 올리며 그 앞을 지나가게 되어 있었다. 스님도 줄을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자리에 앉은 채 고개를 끄덕여서 생일축하 인사를 받았다. 그러다가 스님의 차례가 되었다.
“대통령의 생신을 축하드립니다.”
이승만대통령은 자리에서 얼른 일어나 앞으로 걸어나오며 스님의 두 손을 마주잡고 앉을 자리를 권했다.
“도인스님께서 이렇게 와주셔서 정말 고맙습네다. 스님의 생일은 언제입네까? 스님 생일에 나도 꼭 초대해 주시오.”
“생불사 사불사(生不死 死不死)라. 살아도 산 것이 아니고 죽어도 죽은 것이 아년데,
늙은 중한테 무슨 생일이 따로 있겠습니까?”
“생불사 사불사 생불사 사불사…”
이대통령은 정색을 하고 이 말을 입속으로 되뇌이더니
“우리나라에 스님같은 큰 도인이 많이 나오게 해주시오.”
하면서 다시 스님의 손을 꼭 잡았다.
스님은 그동안 총무원장과 종정으로 있으면서 체질에 맞지 않는 세속의 일에 너무 마음을 썼던지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서기 1958년 겨울 대구 팔공산 동화사 금당선원(金堂禪院)으로 내려와 잠시 지친 몸을 쉬고 있었다. 동화사에 머물게 된 것은 건강진단도 받고 신병치료를 하기 위해 대구와 가까운 절을 물색하다보니 임시 거처로 정한 것이다. 비록 건강은 약화되었으나 스님은 여전히 엄한 계행을 고수하였다. 학인들을 위해서 법문도 거르지 않았다.
그리운 미래사로 다시 돌아와
팔공산에서 신병치료를 위해 겨울을 보낸 스님은 통영 미래사가 그리워졌다. 생, 노, 병, 사, 병이야 언젠가는 오게 되는 것. 부처님께서도 육신을 수레에 비유하여 수레도 오래 쓰면 낡게 된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육신이 무상하므로 더욱 마음의 안식처가 그려워진 것일까. 부쩍 미래사를 둘러싸고 있는 아늑한 산자락과 울울창창한 삼나무 숲과 멀리 보이는 푸른 파도와 뱃고동 소리초차도 꿈속에서 자주 만났다. 그곳에 있는 제자들이 더욱 보고 싶었다.
스님은 동화사 금당선원에서 행장을 꾸려 미래사로 왔다.
“모두들 방장스님의 분부대로 여법하게 수행하고 있습니다.”
“암, 그래야지. 그래야 하고 말고.”
스님은 제자들이 수행에 몰두하고 있음을 확인하고는 기쁨을 이기지 못했다.
어느 날 아침 공양을 들고난 스님은 구산스님을 찾았다. “얘 호랑아. 너의 스승 좀 오시라고 해라.”
현호스님의 연락을 받고 구산스님이 달려왔다.
“방장스님, 불러계시옵니까?”
“응, 내가 찾았네. 나 밀양 표충사 서래각(西來關)으로 가고 싶으니 그리 데려다 줄 텐가?”
구산스님은 짚이는 데가 있었다. 서래각은 바로 서방정토(西方淨士)를 상징적으로 나타낸 말이 아니던가.
“예, 방장스님 좋으실 대로하시지요.”
구산스님은 통도사에 있는 석정(石鼎)스님을 서둘러 표충사 주시로 취임케 하고 효봉스님을 모시게 했다.
서기 1966년 5월 동화사에서 표충사 서래각으로 옮기자 효봉스님은 주위 환경이 바뀐 탓인지 건강이 조금 회복되는 듯하다가 다시 기울어 이 세상 인연을 하나하나 끊는 듯 했다. 이때 세속의 나이 79세.
너 이 놈, 어 디서 내 이름을 알았는고?
그런데 참으로 충격적인 사건이 돌연 일어났다. 표충사 서래각으로 옮긴 지 넉 달 쯤 지났을 무렵인 서기 1966년 9월29일 조선일보에 ‘병상(病皮)의 효봉스님’이라는 제하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사회면에 크게 실렸다.
한국불교 조계종 통합종단 종정인 이효봉(79)스님이 노환에 못이겨 중태에 빠져있다. 이 소식이 퍼지자 이효봉스님이 누워있는 밀양의 표충사엔 안부를 묻는 기별이 잇닿고 있다. 비구측이나 대처측이나 다같이 정신적인 지도자로 떠받들던 한국불교계의 최고 원로인 이효봉스님이 입산한 것은 43년 전 그의 호된 고행은 불도들의 사표가 되어왔다.
이와 같은 머릿기사에 이어서 스님이 서기 1888년 평양에서 태어나 판사를 지낸 일까지의 이력을 비교적 상세히 소개하는 기사를 싣고 있다.
그런데 이 기사가 나간 지 일주일쯤 지난 어느 날 효봉스님 앞으로 묘한 편지 한 통이 배달되었다. 시봉을 들고 있던 시자들이 그 편지를 읽고나서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편지는 효봉스님의 손자한테서 온 것이 틀림없었다.
제례(除禮)하옵고,
생면부지의 사람으로 부터 서신을 받게 되어 의아하게 생각하실 것입니다. 다망중이라 사려하와 요건만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9월29일자 조선일보에 보도된 ‘병상의 효봉스님’을 원고 소생의 조부님과 일치하는 점이 있어 아뢰오니 다음 사실을 참고하셔서 확인해주시면 대행(大幸)이겠습니다.
1. 효봉스님께서 43년 전에 두고 떠났다는 두 아들의 성명이 이영발 (장남) 이영실
(차남)이 아닌지요?
2. 소생의 본관이 황해도 수안(透安)입니다.
3. 이병억(李炳憶)씨는 소생의 증조부이시며 효봉스님이 이병억씨의 5남매 중의 3남이라 하셨는데 혹 5형제 중의 3남이 아니신지요?
4. 효봉스님의 속명이 이찬형씨가 아닌지요?
5. 이영발씨(지금 일본에 있음)는 소생의 부친이며, 어렸을 때 기사 내용과 같은 조부님의 말을 자주 들었습니다.
6. 평양복심법원에 계셨다는 말도 일치합니다.
7. 조모님은 3년 전 별세하셨는데 금년 81세가 되며 이름은 박현(朴 賢)입니다.
이상 참고로 말씀드리오며 사실이기를 희망하는 소생의 마음 초조하오니 힘써 도와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서울에서
소생 이인목(小生 李仁鐘)
1966년 10월4일
표충사 석봉(石峰)스님 尊下
편지의 끝에 효봉(曉峰)스님 대신 석봉(石峰)스님 존하라고 쓴 것은 착오를 일으킨 듯하다. 그리고 함께 동봉된 편지의 다른 쪽에는 스님의 부친 이병억씨로 부터 이찬형 그리고 아틀 이영발, 이영실, 막내딸과 이영발의 아들 이인목(36세), 이선목의 가계도(家系圖)를 것들였다.
편지를 다 읽은 시자는 표충서원에 있는 은사 구사스님에게로 달려갔다. 편지를 받아서 읽고 난 구산스님은 보성수좌를 급히 서울로 보내 손자에게 연락하였다.
효봉스님은 이러한 사실도 모르고 누운 채로 눈을 감고 여전히 무자 화두를 참구하는 일만은 쉬지 않았다. 그래서 가끔 외마디 소리를 지르기도 하였다.
“무라! 무라! …”
시자들은 효봉스님의 옆에 앉아서 그 모습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만감이 교차하면서 효봉스님이 웬지 새삼스럽게 낯선 사람처럼, 그러나 먼 길에서 오랜만에 문득 돌아온 가장(家長)처럼 정겹게 느껴졌다.
시자들은 충격적인 질문을 어떻게 해야 충격을 받지 않을까 궁리했다. 그래서 신문지에 큼직하게 ‘李 燦 亨’이라고 써서 두 손으로 펴들었다.
“방장스님요! 이 사람 알지요?”
감았던 눈을 뜬 스님은 잘 보이지 않는지 눈을 가늘게 떠서 보려고 애썼다.
시자가 소리를 크게 내서 읽어주었다.
“방장스님, 빛날 찬자, 형통할 형자가 누구의 함자인가요”
“뭐, 뭣이라고?”
“이영발이, 이영실이도 알지요?”
이때 스님은 감았던 눈을 번쩍 댔다.
“아니, 너 이놈! 무슨 소리를 하는 게야. 네놈이 어디서 그걸 알아냈는고?”
무서워, 정이란 무서운 것이야
효봉스님은 금강산 신계사에서 머리를 깎으면서부터 이날 이때까지 한 번도 자신의 본명과 속가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입밖에 낸 적이 없는데, 찬형이라는 본명과 두 아들 영발이와 영실이의 이름까지를 대자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찬형이라는 본명은 혹 알 수 있다 하더라도 두 아들의 이름까지를 부르는 데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녀석들이 무슨 도깨비 같은 말들을 하고 있는 게야. 대체 내게 무슨 손자가 있다고 그러는 게야.”
“방장스님의 큰 자제분 영발이가 지금 서울에 살고 있다고 해서 보성수좌가 급히 데리러 갔습니다. 하오니 조만간 만나보게 될 것이옵니다, 스님.”
그러나 효봉스님은 순간 표정을 바꾸며 모든 것을 부인했다.
“그런 잠꼬대는 그만 해라. 다 지난밤 꿈같은 전생(前生)의 일, 꿈을 깨야지. 꿈을…”
효봉스님은 돌아눕더니 다시 눈을 감고 무자화두를 거듭거듭외었다. 제자들은 스님이 판사를 하다가 늦깎이로 출가했으므로 세간에 아들과 딸이 었다는 사실은 알았으나 그 이름 ’이찬형’은 몰랐다. 호적이 있기는 했으나 거기에 적힌 이름은 이원명(李元明)이었으므로 그 이름이 속가의 이름인 줄로 알고 있었다.
이원명을 호적에 올리게 된 것은 금강산 여여원에 있올 때이다. 여여원에 양로원을 설립할 때 고성 면장이 찾아와서 효봉스님에게 이사로 취임해 달라고 부탁했다. 이사로 등록하려면 호적이 필요했다. 그러나 호적을 요구하자 그 자리에서 이사에 취임할 수 없다고 거절하였다. 고성면장이 생각다 못해 호적을 만들어주면서 도장을 달라했다. 스님은 이때 이원명이라 새긴 도장을 주어 호적에 올리고 주소는 평양에서 고등보통학교를 다닐 때의 하숙집 주소를 적어주었다.
그러나 스님의 부인하는 태도는 수도인의 의지를 보인 것일 뿐 내심으로는 혈육의 정을 끊지 못하는 가장 인간다운 모습을 보이기도 했었다. 미래사에 있을 때 하루는 해인사 주지를 지낸 금담(錦潭)스님이 문안을 왔다. 두 노장스님은 오랜만에 만나서 그동안에 쌓였던 회포를 풀면서 밤이 깊은 줄도 몰랐다. 법담은 세간에서 출출세간으로 또 출세간으로 넘나들다가 원효대사를 만나고 있었다.
“방장스님, 설총은 효성이 지극해서 아버지 영각에 초하루 보름으로 한 번도 거르지 않고 참배를 했다면서요?”
“그런 말이 있지. 설총이 원효대사 영각의 문을 열고 들어가면 아들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는 거야.”
“도인도 혈육은 못 속이는 모양이지요?”
“제가 듣기로는 방장스님도 속가에 아들을 두고 왔다던데 아들 보고싶지 않으세요?”
“응, 보고싶어. 할멈은 안 보고 싶어도 아들은 보고 싶어.”
이 대답이 떨어지자마자 금담스님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효봉스님에게 큰절을 올렸다.
“방장스님, 저에게 도의 끝을 보여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스님!” 대개 이러한 질문을 받으면 모든 것을 초탈한도인인 체하며 거짓말을 하는 것이 상례인데 효봉스님이 솔직히 말해주자 금담스님은 진리의 모습을 보여준 것에 감사하여 큰절을 올렸던 것이다. 그런데 왜 이번에는 마음 속을 솔직히 열어보이지 않고 전생(前生)의 일이니 잠꼬대 하지 말라며 돌아누운 것일까. 스님이 지금 보이는 도의 끝은 과연 무슨 의미일까.
서울로 가족을 만나러간 보성스님이 손자 이인목과 손자며느리, 증손자를 데리고 표충사에 내려온 것은 그로부터 사흘 뒤였다. 그러나 스님이 속가에 대해 비밀을 지키려고 애써왔고, 속명이 탄로났음에도 혈손에 대해 무심한 태도를 제자들은 굳이 들추어내고 싶지 않았다. 그것은 남에게 보이기 싫은 상혼과도 같은 것이었는지 모른다. 그래서 가족을 대면시킬 때도 세심한 배려를 했다. 마치 스님을 존경하는 표충사 신도의 가족이 병문안 온 것처럼 가장을 하기로 약속을 했다.
그러나 피는 속이지 못하는 것일까. 손자 이인목은 스님을 보는 순간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할아버지! 제가 손자 인목이옵니다.”
효봉스님은 큰절을 올리는 낯선 젊은이가 혈육인 줄 알면서도 마음에 동요를 일으키지 않고 아주 담담하게 말했다.
“뭐 ? 영발이의 아들이라고?”
그리고는 고개를 돌리고 돌아누워버렸다.
“아버지는 지금 일본에 출장 가 있습니다. 그리고 할머니는 전라도 광주에서 사시다가 2년 전에 세상을 뜨셨습니다.”
인목이의 할머니, 바로 세속에서 인연을 맺은 부인이 2년 전에 작고했다는 말을 듣자 스님은 눈을 감았다. 실로 운명은 기구했다. 부인이 살았다는 광주와 송광사는 같은 전라도 땅이고, 그것도 바로 이웃이 아니던가. 그렇게 애타게 기다리던 남편이 차로 불과 한 시간 남짓 달려가면 되는 송광사에 스님이 되어 있었다니….
얼마나 한맺힌 삶이었을까. 하루아침에 온다간다 말 한마디 없이 훌쩍 떠나가버린 남편. 작은 아들은 이제 겨우 걸음마를 할 때였고, 큰아들도 코흘리개 철부지였으니 전쟁 통에 남편도 없이 두 아들과 딸을 키우면서 얼마나 많은 날을 한숨과 눈물로 지셨던가.
부인은 가끔 기대가 섞인 목소리로 “너희 아버지가 어딘가 살아계시기는 하실 터인데…”
하며 눈시울을 적셨다.
행여나 행여나 하며 기다리다가 하는 수 없이 집 떠난 날을 제삿날로 잡아 제사는 지내면서도 문득 남편이 사립문을 밀치고 들어오는 환상을 얼마나 그렸던가. 이러한 부인의 마음이 통했던 것일까. 스님은 어느 해부턴가 집을 떠나온 날은 해마다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 스님이 날짜를 챙겨서 새 옷으로 갈아입는 날은 머리를 깎고 스님으로 태어난 날과 이 날이었다. 시자들은 이 날을 무슨 날인지 궁금했다.
“방장스님, 오늘이 무슨 날인데 새 옷을 갈아입으십니까?”
“응, 내가 속가를 떠나온 날. 꿈을 꾸었는데 내가 속가에를 갔더라구나. 가서 보니 커다란 상에 음식을 골고루 장만했어. 대접을 잘 받고 왔지. 아마 내가 떠난 날을 잡아 제사를 지내는 모양이야.”
이렇게도 세속 인연은 질긴 것인가. 손자를 눈앞에 두고 돌아누운 효봉스님의 마음은 어떠할까. 인생무상을 절감하는 것일까. 오랜 수행을 했으니 모든 것을 초월해서 마음에 아무런 물결도 일지 않을까. 스님은 ‘무라, 무라’만을 부를 뿐 그 이상 입을 닫고 말을 하지 않았다.
손자며느리는 서울에서 내려오며 스님에게 잠옷을 만들어주려고 융으로 싼 옷감을 가지고 왔다. 몸의 크기를 모르니 재어보고 만들어 주려는 생각이었다. 이 당시 융은 보드랍고 따뜻해서 스님도 솜옷의 안쪽에 융을 댄 옷을 즐겨 입었다. 손자며느리는 그날밤 꼬박 밤을 새워서 잠옷을 지었다.
손자와 손자며느리 그리고 증손자가 떠나고 난 뒤에도 스님은 아무런 말 한마디도 없어 부쩍 무자 화두를 쉬지 않았다. 그러나 기력은 마지막 꺼져가는 촛불처럼 아물거렸다.
때가 되면 가야지
“스님, 이제 곧 큰아들도 만나보게 될 것입니다. 일본으로 급히 연락을 했습니다. 기력을 회복하셔야지요, 방장스님!”
“공연한 소리들 하는구나. 때가 되면 가야지…”
“방장스님, 가시기 전에 한 말씀 남기셔야죠.”
“나는 그런 군더더기 소리 안 할란다. 지금껏 한 말들도 다 그런 소린데….”
스님의 표정이 밝아지며 어린아이같은 맑은 웃음이 잔잔히 입가에 돌았다. 그리고 이렇게 읊었다.
내가 말한 모든 법
그거다 군더더기
누가 오늘 일을 묻는가
달이 일천강에 비치리
이것이 스님의 마지막 열반송(涅盤頌)이다
“나 오늘 갈란다.”
서기 1966년 10월 15일 음력으로는 9월 초이틀 새벽 세시. 예불모실 시각에 스님은 이승과 저승의 문턱에 서 있었다.
“얘! 거기 누구 없느냐 ? 나 좀·일으켜다오.”
밤새 곁에 었던 시자가 부축해서 일으켜드리니 평소에 정진하던 자세로 가부좌를 툴고 앉았다. 그리고는 구산스님을 찾았다.
“나 오늘 갈란다.”
지긋이 눈을 감고 바른손에는 손때묻은 호두알을 천천히 굴렸다.
따르록, 따르록, 따르록…~
호두알 굴리는 소리와 화두드는 소리가 엇갈리기도 하고 서로 겹치기도 하였다.
“무라, 무라, 무라…”이렇게 시간은 무겁게 흘렀다. 스승과 제자의 문답이 오고갔다.
날이 밝아 아침이 되어서도 가부좌를 튼 자세는 그대로 흐트러지지 않았다. 오전 열시. 문득 호두알 굴리던 소리가 멈추었다. 그리고 표정이 굳어졌다.
열반.
효봉스님은 이렇게 열반에 들었다. 세속의 나이 일흔 아홉, 법랍 42년.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신 것일까. 천황산 골짜기에서 108번의 열반종소리가 하늘로 은은히 울려퍼졌다.
이날따라 사명대사의 추제(秋祭)가 있는 날이어서 밀양 읍내는 물론 원근의 많은 신도들과 유지들, 그리고 학생들이 표충사 추제를 시작하는 종소리로 알았으나 효봉스님의 열반종소리임을 뒤늦게 알고 모두 합장을 하고 고개를 숙여 묵념을 올렸다.
시인 이은상은 효봉스님의 열반을 이렇게 슬퍼했다.
오늘아침 한조각 구름
서쪽으로 날으더니
굴리던 염주소리 문득 끊어지고
티끌 속 팔십년 인연 그 인연 다해 가시는구려.
마지막 다만 한마디
‘무’라는 말씀 남겨놓고
가부좌 하신 채로 어디로 가시는고
천지에 바람소리만 불어오고 불어갑니다.
불일(佛日)이 꺼진 양하여
어둡다만 하오리까
한가닥 푸른 연기 그마저 사라지고
동산에 달이 오르네
어허, 강물마다 비치리로다.
-효봉스님 가신 날, 이은상-
꺼지지 않는 등불
손자 인목이가 표충사에서 서울에 와보니 일본에서 전보가 와 있었다. 아버지가 서울에 도착한다는 날짜는 바로 내일이었다.
아버지가 내일 오면 모레는 표충사로 갈 생각으로 기다리던 손자는 조간신문에 ‘종정효봉스님 표충사에서 입적’이라는 활자를 보고 깜짝 놀랐다. 믿어지지 않았다. 신문을 읽어내려가던 손자는 다시 한번 놀랐다. 겉으로 보기에는 남다를게 하나도 없던 죽음을 눈앞에 둔 병석의 늙은, 할아버지가 그렇게 훌륭한 분이었던가 하고 놀랐다. 신문마다 사진과 함께 효봉스님의 입적기사를 주먹만한 글씨로 보도했다. 방송은 방송대로 특집보도를 내보냈다.
스님의 장례식 문제가 또 한번 화제거리로 신문지상에 오르내렸다. 문도들은 표충사에서 장례를 치르고 다비식을 올려야 한다고 주장했고 종단에서는 종정이므로 종단장으로 서울에서 장례식을 올려야 한다고 맞섰다. 장레식을 어디서 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세상에 살아남은 사람들의 부질없는 망상일 뿐이다.
결국 스님의 장례식은 종단장으로 결정되었다. 스님의 법구가 운구되는 길목은 한강에서 조계사까지 길 양옆으로 사람들의 행렬이 길다랗게 끈을 이루었다. 조계사 앞은 물론 종로 거리는 인파들로 붐벼서 차도와 인도의 구분이 되지 않았다. 몇 년 전 이씨 왕조의 마지막 왕비인 윤비의 장례 역시 장관을 이루었으나 이처럼 많은 인파가 모여들지는 않았었다.
무엇인가. 이토록 많은 인파를 모이게 한 것은 이 시대의 황량한 사막에서 사람들의 가슴에 스님이 따라주던 감로수 때문이었을까. 그러나 이제 스님은 자취도 없이 서쪽으로 불어간 한 줄기 바람처럼 묵언의 설법을 하고 있는 것을.
다비식은 화계사에서 있었다. 다비를 하고 남은 잿속에서 스님의 자취를 붙들려는 사람들의 마음에 대답이라도 하듯 사리 53과가 영롱하게 빛났다. 사리는 송광사, 표충사, 미래사, 용화사의 사리탑에 봉안되어 뒷날 길을 잃고 방황하는 사람들에게 대답해 줄 것이다.
누가 오늘 일을 묻는가
달이 일천강에 비치리
효봉 연보
서기 1888년 5월28일 평안남도 양덕군 쌍룡면 반성리 금성동에서 수 안(逢安)이씨 병억(炳應)과 어머니 김씨 사이에 서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름을 찬형(燦亨)이라고 하였다.
1892년(5살) : 조부로 부터 한문을 배우기 시작하여 인근 마을사람들 이 신동이라고 불렀다.
1901년(13살) : 한문을 가르쳐주던 조부가, 찬형이 인절미를 먹다가 혼절하자 홧김에 마신 술로 인해 돌아가셨다. 이때까 지 사서삼경을 통달했다.
1902년(14살) : 평양감영에서 실시한 백일장(예전의 과거시험)에서 장 원을 하였다.
그러나 과거제도가 폐지된 이후의 백일장이라서 성균 관에 입학할 자격은 주어지지 않았다.
1903년(15살) : 햇수는 정확하지 않으나 이 무렵 평양고등보통학교를 찾아가서 일인 교장에게 입학시켜줄 것을 부탁하여 입학이 허락되었다.
1909년(21살) : 결혼한 햇수는 알 수 없으나 이해에 장남 이영발이 태 어났다. 이어서 차남 이영실과 막내딸을 낳았으나 이 들이 태어난 햇수는 알 수 없다.
1911년(23살) : 일본 와세다대학 법학부에 유학하였다.
1914년(26살) : 일본 와세다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귀국하여 경성에 서 실시한 고등고시(사법시험)에 합격하였다.
1915년(28살) : 서울과 함흥의 지방법원 펑양의 복심법원(고동법원)에 서 이후 10년간 법관생활을 하였다.
1923년(36세) : 독립운동을 하다 붙잡힌 조선인에게 법이 정한 규정에 의하여 사형 언도를 하지 않으면 안 될 입장에 처하 였다. 일인들은 조선인들의 민족감정에 반발을 일으 키지 못하도록 조선인 판사 이찬형에게 이 재판을 맡 겼다. 사형언도를 하고 난 이찬형은 갈등을 이기지 못하고 가족들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집을 나와 3년 간 방랑생활을 하였다. 이 기간 중 삶에 대한 회의와 사형수에 대한 참회로 자아에 대한 큰 의문을 품고 엿장수 행세를 하며 팔도강산을 떠돌다가 민족에 대 한 자각으로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만주로 갔다. 그 러나 장작림의 암살사건을 보고 민족정기를 떨칠 인 재가 되는 길을 찾으려면 진인을 만나서 자아완성부터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진인을 찾아나섰다.
1925년(38세) : 금강산 신계사 보운암에서 석두화상을 은사로 머리를 깎고 불문에 귀의하였다. 운봉(雲峰)이라는 법명을 받 았다.
1926년(39세) : 여름, 선지식을 찾아나섰다. 통도사 내원암에 게시는 용성화상을 친견하고 하안거를 마쳤다. 겨울에 다시 수월화상을 친견키 위해서 간도까지 행각을 하였다.
1927년(40살) : 깨달음이 밖에 있지 아니하고 자기 스스로의 자성에 있음을 알고 금강산으로 다시 돌아왔다. 여름부터 이 듬해 여름까지 신계사 미륵암에서 수행하였다.
1928년(41살) : 겨울부터 이듬해 여름까지 신계사 보운암에서 장좌불 와의 용맹정진을 하였다.
1929년(42살) : 겨울, 금강산 온정리 여여원 선방에서 안거하며 역시 장좌불와의 용맹전진올 하였다.
1930년(43살) : 봄부터 이듬해 여름까지 1년6개월 동안 법기암 뒤에 토굴을 짓고 하루 한 끼의 공양만 들면서 장좌불와의 용맹전진에 돌입하여 개오(開悟)하고, 바다 밑 제비 집에 사슴이 알을 품고 타는 불속 거미집에 고기가 차 달이네 이 집안 소식을 뉘라서 알랴 흰구름은 서 쪽으로 달은 동쪽으로라는 오도송을 읊었다.
1931년(44살) : 겨울부터 이듬해 겨울까지 유점사 선원에서 안거하며 입승(立繩)의 소임을 맡았다.
1932년(45살) : 여름, 여여원에서 안거하였다. 이후부터 오후에는 불 식하면서 정진하였다. 겨울에는 마하연 선원에서 동 안거를 마쳤다.
1934년(47살) : 여름 여여원 토굴에서 안거하고 겨울에는 신계사 미륵 암에서 안거했다.
1935년(48살) : 여름에 금강산을 떠나 설악산 봉정암 적멸보궁에서 안 거하고 겨울에는 오대산 상원사에서 한암스님을 친견 하고 수행하였다.
1936년(49살) : 여름 태백산 정암사에서 안거하고 겨울에는 덕승산 정 혜사에서 만공스님을 친견하고 동안거를 마쳤다.
1937년(50살) : 이해 여름 송광사에 와서 1946년까지 10년 동안 보 조국사의 정헤결사정신을 이어받아 인재 양성과 사찰 부흥에 진력하였다.
1946년(59살) : 이해 겨울 1950년 여름까지 해인사 가야총림의 방장 화상으로 도제(徒弟)양성에 진력하였다.
1950년(63살) : 6·25동란을 만나 부산 온천동 금정사로 피난하여 동 안거를 마쳤다.
1951년(64살) : 여름부터 이듬해 여름까지 통영 용화사 도솔암에서 동 방제일선원을 열었다. 각지의 선객들이 구름처럼 모여 들어 수행정진을 하였다.
1952년(65살) : 겨울부터 1954년 3월까지 용화사 뒤에 토굴을 짓고 수행정진 하였다.
1954년(67살) : 여름에 제자 구산이 미래사를 지어 미래사에서 안거하 였다. 이해 4월24일 은사 석두화상이 입적하였다. 8 월17일 종단정화 준비위원으로 상경하여 이듬해 9월 까지 정화불사의 일로 서울 선학원에 주석하였다.
1955년(68살) : 정화불사의 일이 쉽게 마무리 지어지지 않자 통영 미 래사로 내려와 오후불식하며 정진하였다.
1956년(69살) : 여름에 지리산 쌍계산 탑전에서 안거하였다. 이해 11 월 세계불교도우의회 제4차대회에 한국 대표로, 동산 ·청담스님과 함께 참석하였다.
회의가 끝나고 인도와 네팔 동남아의 불교국을 순방 하였다. 귀국하여 종회의장에 취임하였다.
1957년(70살) : 1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총무원장으로 재직하며 종단 의 중흥을 위해 힘썼다.
1958년(71살) : 종정으로 추대되었다. 여름에 양주 흥국사에서 주석하 고 겨울부터 이듬해 겨울까지 대구 팔공산 동화사 금 당선원에서 안거하였다.
1960년(73살) : 여름부터 1963년 9월까지 미래사에서 안거하였다.
1962년(75살) : 4월11일 통합종단의 초대종정으로 추대되었다.
1963년(76살) : 10월에 병환으로 인하여 동화사로 옮겨 주석하였다.
1966년(79살) : 5월14일 밀양 표충사 서래각으로 옮겨 주석하였다. 10월15일(음력9월2일) : 오전 열시에 입적하였다 .이때세 수는 79세 요, 법랍은 42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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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제주도와 인천의 섬 원문보기 글쓴이: 천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