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번 강의에서, 한국문학사에서 가장 오래된 수필의 성격을 띤 작품으로 설총의 「화왕계」와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에 관해 소개 한 바 있다. )
*한국문학에 나타난 문학적 수필
최승범 교수는 현전하는 신라시대 유일한 수필집으로 최치원(857~?)의 『계원필경 桂苑筆耕』을 든다. 최치원은 868년에 12세에 입당하여 874년 예부시랑(禮部侍郞) 배찬(裵瓚)이 주관한 빈공과(賓貢科)에 합격, 많은 글을 썼으나 현재는 전하지 않는다. 그는 876년에 지금의 江蘇省 南京市) 현위(縣尉)로 관직에 오른 이래, 885년 귀국하기까지 당 나라에서 17년 동안 머무르며 저명한 문인인 나은(羅隱, 833~909) 등과 친교를 맺으며 많은 명문장가와 저술가로 문명(文名)을 떨쳤다. 최치원이 저술한 책 <사륙집(四六集)>과 <계원필경(桂苑筆耕)>은 『당서唐書』‘예문지(藝文志)’에 기록되어 있다.
「토황소격문 討黃巢檄文」은 중국에서 황소의 난이 일어났을 때 그 토벌총사령관 고변(高騈)의 휘하에서 종군하던 최치원이 황소에게 보낸 격문이다. 이 글은 『계원필경』과 『동문선』에 실려 있다.
「격 황소서 擊 黃巢書」
광명(廣明) 2년 7월8일에, 제도도통검교태위(諸道都統檢校太尉) 모(某)는 황소(黃巢)에게 고한다. 대범 바른 것을 지키고 떳떳함을 행하는 것을 도(道)라 하는 것이요, 위험한 때를 당하여 변통할 줄을 아는 것을 권(權)이라 한다. 지혜 있는 이는 시기에 순응하는 데서 성공하게 되고, 어리석은 자는 이치를 거슬리는 데서 패하게 되는 것이다. 비록 백 년(百年)의 생명에 죽고 사는 것은 기약할 수가 없는 것이나, 만사(萬事)는 마음이 주장된 것이매, 옳고 그른 것은 가히 분별 할 수가 있는 것이다
- (중략)-
다만 살리기를 좋아하고 죽임을 싫어하는 것은 상제(上帝)의 깊으신 인자(仁慈)함이요, 법을 굴하여 은혜를 펴려는 것은 큰 조정의 어진 제도다. 나라의 도적을 정복하는 이는 사사로운 분(憤)을 생각지 않는 것이요, 어둔 길에 헤매는 자를 일깨우는 데는 진실로 바른 말를 하여 주어야 한다. 나의 한 장 편지로써 너의 거꾸로 매달린 듯한 다급한 것을 풀어주려는 것이니, 고집을 하지 말고 일의 기회를 잘 알아서 스스로 계책을 잘하여 허물 짓다가도 고치라.
- (중략 )-
만일 미쳐 덤비는 도당에 견제(牽制)되어 취한 잠이 깨지 못하고 여전히 당랑(螳螂)이 수렛바퀴를 항거하기를 고집하다면, 그제는 곰을 잡고 표범을 잡는 군사로 한 번 휘둘러 없애버릴 것이니, 까마귀처럼 모여 소리개 같이 덤비던 군중은 사방으로 흩어져 도망갈 것이다. 몸은 도끼에 기름 바르게 될 것이요, 뼈는 융거(戎車-군용차) 밑에 가루가 되며 처자도 잡혀 죽으려니와 종족들도 베임을 당할 것이다. 생각건대 동탁(董卓)의 배에 불로 태울 때에 반드시 배꼽을 물어뜯어도 할 수 없게 될 것이다. 너는 모름지기 진퇴를 참작하고 잘된 일인가 못된 일인가 분별하라. 배반하여 멸망되기보다 어찌 귀순하여 영화롭게 됨과 같으랴. 다만 바라는 것은 반드시 그렇게 하라, 장사(壯士)의 하는 짓을 택하여 갑자기 변할 것을 결정할 것이요, 어리석은 사람의 생각으로 여우처럼 의심만 하지 말라.
최치원이 고병의 종사관으로 황소를 토벌하기 전에 먼저 써서 보낸 檄文의 내용은 먼저 황소를 도의로서 설득하고, 다음에 황소가 불칙한 마음으로 도성과 궁궐을 더럽힌 잘못을 지적하며, 역사적으로 불충불의 했던 자들이 겪어야 했었던 재앙을 예로 들며 회개할 것을 요구한다. .....(중략)....... 『토황소격문』은 공적인 문장이지만 문장 전체에 『도덕경』,『춘추전』등에 나온 고사를 인용하면서 상대방의 기세를 제압하고 설득하려고 한다.
삼국시대 우리 문학에 나타난 초기수필의 모습은 고려 시대부터 서설(書說),증서(贈書), 잡기(雜記), 찬송(贊頌), 논변( 論辨) 등의 문장에서 수필적인 성향을 짙게 드러내기 시작한다.
이런 수필적 성향의 글들은 고려조의 이제현, 이규보, 서거정 이인노, 최자 등 무수히 많은 문인의 글에서 보이나 이들은 이후 한국수필문학사에서 다루기로 한다.
한국문헌에서 수필이란 명칭이 언제부터 어떤 의미로 사용되었는지를 찾아보기로 한다.
* 한국문헌에 나타난 수필이라는 명칭:
한국문헌에서 현재까지 찾을 수 있는 ‘隨筆’이란 명칭은 조선조에 윤흔(尹昕, 1564~1638)의 『도재수필陶齋隨筆』, 이민구(李敏求 1589~1670)의 『독사수필 讀史隨筆』이다. 안정복(安鼎福,1712~1791)의『상헌수필 橡軒隨筆』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들의 문학적 수필과는 전혀 관계없는 역사서 이거나 책을 읽고 느낀 것들, 일상생활에서의 보고 들은 느낌들을 적은 것이다 .
수필이라는 제목을 가지고 수필다운 글을 쓴 작품집으로 다가온 것은 1688년에 지어진 현종 때의 사람 조성건(趙性乾)의 『한거수필 閑居隨筆』이다. 이 수필집에서 그는 먼저 「歸晩說」의 제목 아래 자신이 살고 있는 동리의 이름, 자신의 호를 ‘귀만’으로 짓게 된 내력과 자신이 살게 있는 누옥을 ‘귀만정사’로 짓게 된 내력을 풀어나간다. 그리고 ‘귀만정사’에서 그가 누리는 삶의 한유로움을 전해준다.
「귀만설」
나는 지난 무진년에 처음으로 봉수봉이라는 산봉우리 밑에 집을 짓고 살았다. 그곳 마을 이름은 ‘구만(九萬)이라고 했다. 그러나 나는 이 구만이라는 마을 이름에 대해서 아무런 깊은 의의를 가지고 있지 않다. 또한 이 구만이라는 마을은 지적도에 실려 있는 것도 아니다.
여기에서 나는 이 마을 이름을 고쳐도 무방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엉뚱한 딴 이름을 지을 수는 없다. ‘구만’과 음이라도 비슷한 것으로 고쳐야 한다. 그래서 나는 ‘귀만 歸晩’이라는 이름을 생각해 내어 이것으로 고치고 말았다.
이 ‘귀만’이란 이름이 나는 몹시 마음에 들었다. 나는 혼자 마음속으로 생각해 본다. 이 ‘귀만’이란 이름은 정말 내게 맞는 이름이로구나. 가만히 보면, 물고기는 깊은 못으로 모이고, 새들은 언덕을 찾아 깃든다. 이러한 미물(微物)들도 돌아갈 곳을 아는데, 나는 애써봐야 별 도리가 없이, 늙어갈 수록 더욱 못난이 행세를 하고, 동쪽으로 가도 서쪽으로 가도 방 한 칸, 집 한 채가 없었구나.
그러다가 나이 60이 넘은 지금에서야 비로소 돌아갈 곳을 얻었으니 이것은 돌아가기가 늦은 것이 아닌가? 또 나는 들으니 살아서는 무엇인가 의지해 살다가 죽으면 돌아가는 것이라 한다. 그러나 나는 이제 이 험난한 세상에 태어나서 온 몸이 화액(禍厄) 속에 싸인 채 무한한 고통을 겪어왔고, 무한한 괴로운 세월을 지내왔으니 마땅히 움직일 줄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도 아직껏 돌아갈 줄을 모르고 있으니, 앞으로 70, 80이 된대도 내 일을 어떻게 장담할 수가 있겠는가? 그렇다면 나의 돌아옴은 역시 늦은 것이다. 결국 이 ‘귀만’이란 이름이 어찌 나에게 알맞지 않은가?
이에 나는 한 묶음 띠를 모아 지붕을 해 잇고 나서 커다란 글씨로 ‘歸晩精舍’란 네 글자를 써서 벽에 걸고, 아침저녁으로 쳐다보고 마음 흐뭇하게 여긴다. 이것은 깊이 생각하면, 옛날 군자(君子)들이 그 사는 땅의 이름을 따서 집 이름을 짓던 뜻과도 부합되는 일이니. 함부로 이런 이름을 지었다고 그 누가 책망하랴?
더구나 이곳은 갈대와 쑥이 눈앞에 가득하고, 가시나무가 덩굴을 이루어, 농부들도 당이 메마르다고 밭을 일구지도 않고, 놀러 다는 사람들도 궁벽한 곳이라고 와 보지도 않는다. 이렇게 비어 있어 사람들에게 버려진 채 몇 해가 되었는지 알 수가 엇다.
-(후략) -
위의 글에 비해 「귀만정사 歸晩精舍에서 씀」이라는 제목 아래서는 기(記 )의 형식을 채용, 제 3자가 ‘귀만정사 ’의 주인 조공(趙公)과 더불어 초당에 걸려 있는 편액(扁額)‘귀만정사’에서 ‘귀만’의 의미에 대해 자못 철학적 담론을 하는 형식을 취한다. 제3자는 조공이야 말로 이치에 통달한 군자라고 감탄한다. 왜냐하면 조공은 마침내 돌아가서 쉴 곳을 알았고, 그 돌아감의 때를 늦게나마 얻었으니 이는 비록 현성(賢聖)이라도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후 뒷부분은 의리(義理)에 대한 탐구를 보여준다. 세상이 쇠퇴하고 풍속이 저속해지자 의리를 잃고 살아가는 사람이 많아짐을 통탄하며 의리를 지키지 않는 세속 사람들을 비판하고 경계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정리한다.....(중략).... 앞에서 보았던 『도재수필』『독사수필』과는 차원이 다른, 문학적 기품과 예술성을 갖춘 본격적인 수필이라 하겠다.
다음으로 역시 수필문학의 문학성을 갖춘, ‘수필’이란 어휘가 들어간 작품은 연암 박지원(燕巖 朴趾源,1737~1805)의 『열하일기(熱河日記』26편 중 3번째에 들어 있는 『일신수필(馹迅隨筆)』이 있다.
『열하일기』는 박지원이 1780년 그의 삼종형 금성위 박명원(朴明源)의 수행원으로 중국에 들어가 성경(盛京)· 북평(北平)·열하(熱河) 등지를 돌아보고 와서 엮은 것이다. 특히 『일신수필』은 1780년 7월15~23일(음력)까지 9일간의 여행을 기록한 것이다. 이 『일신수필』에서의 여정은 신광녕(新廣寧)으로부터 산해관(山海關)에 이르며 여기에는 거제(車制)· 희대(戱臺 )· 시사(市肆) ·점사(店舍)· 교량(橋梁) 등에 대한 설명이 이채롭다. 박지원은 특히 거제- 수레에 관심을 갖고 수레 자체의 구조에 주목 한다. 바퀴의 높이와 바퀴살의 수, 바퀴테의 재목, 바퀴 위에 올려놓은 가마의 모양 등, 나아가 수레의 종류와 기능, 수레의 규모에 이르기까지 상세하게 묘사한다. 그는 여기서 더 나아가 수레를 만들 때의 지켜야 할 규약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 수레를 만들 때는 무엇보다도 궤도를 똑같이 해야 한다네. 그게 무슨 말인고 하니, 양쪽 바퀴 사이 굴대의 길이를 똑같이 해야하는 거지. 이 양쪽 바퀴 사이에 정해진 거리만 어기지 않으면, 수레 만 대가 지나가도 그 바퀴 자국은 하나로 이어질 것이야. ‘수레의 궤도를 똑 같이 한다는’ 거동궤(車同軌)란 말이 바로 이걸 두고 하는 말일세. 만일 양쪽 바퀴 사이로 제멋대로 넓히거나 좁힌다면 길에 난 바퀴 자국이 어찌 한 궤도를 그릴 수 있겠는가”.
지금까지 천 리 길을 오면서 날마다 수없이 많은 수레를 보았지만, 앞 수레와 뒤 수레는 언제나 같은 바퀴 자국만을 따라간다. 그렇게 애쓰지 않고 도 똑 같아지는 것을 ‘일철(一轍)’이라 하고, 뒷사람이 앞사람을 그대로 따르는 것을 ‘전철(前轍)이라 한다. 성 문턱에 수레바퀴 자국이 움푹 매어 홈통을 이루니, 이른바 성문지궤(城門之軌)가 바로 이것이다.
우리나라에도 수레가 없지는 않으나 바퀴가 완전히 둥글지 않고 바퀴 자국이 한 궤도를 그리지 못하니, 수레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늘 “우리나라는 마을이 험준하여 수레를 쓸 수 없다”고 말하곤 한다. 대체 이게 무슨 말인가. 나라에서 수레를 사용하지 않으니까 길이 닥이지 않았을 뿐이다. 수레가 다니게 되면 길이야 저절로 닦일 터. 어찌하여 길거리의 좁음과 산길의 험준함만 걱정한단 말인가. 『중용』에 나오는 바,“ 배와 수레가 이르는 곳, 서리와 이슬이 내리는 곳”이란 말은 수레는 아무리 먼 곳이라도 가지 못하는 데가 없다는 뜻이다.
『일신수필』7월 15일 조에서 박지원은 그가 지켜본 중국의 수레가 한결같이 거동궤(車同軌)임을 주목하고, 그것이 바로 중국의 국력과 국부(國富)에 직결되었음을, 중국을 받들면서도 좋은 문명의 이기를 받아드리지 못하고 국토가 좁고 산세가 험한 것만을 탓하는 조선인들의 답답함을 걱정한다.
....(중략)..........
우리 문헌에서 수필이란 이름으로 나타난 작품집 가운데 수필다운 수필의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한거수필』그리고 『일신수필』에서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상은 『수필과 비평』 2014, 3호 수록 「수필의 발견」에서 발췌한 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