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고래사냥>
1. 80년대 젊은이들이 지녔을 막연한 꿈과 도전 그리고 좌절과 희망을 그린 영화다. 평소 ‘고래’를 잡고 싶었던 의기소침하고 나약한 성격의 ‘병태’(김수철)는 실연 때문에 더욱 큰 절망에 빠진다. 우연한 기회에 만난 왕초(안성기)의 격려로 용기를 내지만 결국은 말썽만 일으키고 고통은 더욱 깊어진다. 위로해 주기 위해 왕초가 이끈 사창가에서 병태는 순박한 벙어리 여인 춘자(이미숙)와 만나게 되고 그녀와 하룻밤을 보내게 된다.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춘자의 소망을 알게 된 병태는 왕초와 함께 춘자 탈출 프로젝트를 감행한다. 실패로 반복되는 삶이지만 병태는 새로운 도전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2, 영화는 이후 춘자를 동해안 섬 우도로 데려가기 위한 고생스럽고 우스꽝스러운 여정을 그린다. 가진 것 없는 무일푼의 일행은 차를 훔치기도 하고, 검문을 당해 파출소로 끌려가기도 하며, 배고픔에 시달리면서도 돈이 없어 식당에서 쫓겨나기도 하는 것이다. 더욱 귀향을 힘들게 만드는 것은 탈출한 춘자를 잡기 위해 추적하는 사창가의 깡패들이다. 이들의 추적으로 귀향 프로젝트는 가난과 배고픔의 고통 뿐 아니라 폭력의 공포까지 동반한 긴장된 과정으로 일관된다. 하지만 이러한 위기와 도전은 병태를 성장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소침하고 의존적인 병태는 점차 책임감있고 용기를 가진 청년으로 변모한다. 특히 배고픔과 추격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춘자가 몸을 팔려고 했을 때, 이를 묵인했던 왕초에 대한 분노는 춘자에 대한 절대적인 책임을 강화시킨다. 비록 그것은 능력을 갖추지 못한 책임감이었지만 병태의 변화는 분명 획기적인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3. 로드 무비적인 <고래사냥>의 전개는 영화의 흥미를 더해준다. 개인적으로 가장 관심을 갖고 보았던 80년대의 영상물들은 대부분 로드 무비적 성격을 지녔다. <만다라>의 수행하는 승려들의 모습도, <삼포가는 길>의 우연한 일행들의 귀향에서도, <철쭉제>의 아버지의 시신을 찾기 위한 추적도, 모두가 목표를 향해 걷는 과정이었다. 멀리 설정된 목표를 향하여 묵묵히, 때론 긴장된 상태로 걷고 또 걷는 일정은 그것의 고단함과 더불어 보이는 풍경의 절절함에 마음을 빼앗기게 된다. 80년대에 당시에는 국토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었다면, 이제 보는 영화는 사라진 과거의 풍경을 재현하고 있는 것이다. 엄청나게 바뀌고 있는 대한민국의 변화 속에서 과거의 로드 무비는 사라졌지만 아련한 우리의 아름다움을 다시금 만나게 해주는 기쁨을 선사한다. 영화 자체의 흥미를 넘어선 영화 속에 남겨진 과거 우리의 땅과 강 그리고 바다의 귀한 얼굴들이다.
4. 과거 영화를 보면 최근 급격하게 변화하고 있는 ‘페미니즘’ 시각에서 볼 때 부적절한 장면이 많이 등장한다. 남성다움을 과시하기 위해 여성의 따귀를 때린다거나, 여성과의 애정을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는 없다.’와 같이 여성들의 태도와는 무관하게 다만 남성적 도전으로 인식하는 점은 남성 중심적인 사고의 전형인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행동이 과거에는 실제로 남성적 매력으로 인식되었는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폭력 끝에 애정이 성공하면 과거의 잘못은 모두가 선의로 해석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사랑에 실패한 젊은 남성들의 욕구를 해소하는 장면에 등장하는 호스테스나 창녀들의 모습은 여성들을 특정한 등급으로 규정하고 대상화하고 있던 당시의 관점을 보여주고 있다. ‘호스테스나 창녀’들은 욕망을 분출시키는 대상이었을 뿐 아니라 동정이자 낭만적인 사랑의 대상으로 포장되는 것이다.
5. 영화는 철저하게 낭만적인 시선으로 전개된다. 그런 점이 현실의 냉혹한 상황을 은폐하는 시선을 제공하며 영화를 가볍게 접근하게 하는 반면에 또 다른 효과인 내면 속에 존재하는 연민이나 용기를 다른 방식으로 북돋우는 효과를 주고 있었다. 영화 속 돈키호테와 같은 병태의 용기에 동질감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다. 젊은이의 치기를 과장시키고 고통받은 사람의 구원 속에 참여시키는 영화 속 메시지는 현실에 대한 참여보다는 추상적인 상황을 통하여 내면의 가치를 되새김질 시키고 있었다. 이것은 지금 바로 현실적 문제에 참여할 수는 없을지라도 현실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져야 할 가치가 있음을 자각하게 하는 것이다. 비록 이러한 태도는 현실을 왜곡시키는 부작용을 동반하지만 그럼에도 현실 속 고통에 대하여 시선을 회피하지 않게 해준다. 지금 곧바로는 아닐지라도 언젠가는 도발할 수 있는 힘을 축적하게 해줄 수 있는 것이다. 정의와 사랑을 진실로 깨달은 사람은 결코 그것을 잊지 않는다.
6. 영화 <고래사냥>은 영화 속 메시지나 내용과는 별개로 영화 속 등장하는 인물들의 개성적인 매력이 돋보이는 영화이다. 소심하며 맹목적인 병태를 연기한 김수철은 자신의 특징을 최대한 보여주었으며, 자유롭고 배려심 있으며 유쾌한 왕초의 안성기는 80년대 다른 영화 속 냉혹한 모습보다 더욱 안성기의 장점을 살리고 있다. 춘자 역의 이미숙은 당시 어떤 문학가의 에세이에서 볼 수 있듯이 최고의 여성적 매력을 뿜어내고 있다. 청순하면서도 강인한 이미지의 이미숙의 연기는 80년대 개성적인 여배우 중에서도 가장 여성적인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80년대 초반 정윤희가 은퇴하며 사라진 청순미의 상징을 이미숙은 대표하고 있다. 이 영화의 또 다른 매력은 사창가 깡패두목 역을 맡은 이대근이다. 이대근은 춘자를 괴롭히고 이들을 쫓는 사악한 존재감을 드러내지만 마지막 장면에서 춘자를 향한 병태의 지극한 사랑에 감동하여 춘자를 놓아준다. 시크하게 춘자를 놓아주며 던지는 이대근의 대사는 영화 속 가장 멋진 대사이며 영화를 본질적으로 변화시킨 장면이다. 아무리 인간들이 노력하고 최선을 다하더라도 그러한 행위를 이해할 수 있는 힘이 존재하지 않는 한 문제의 해결이 어렵다는 현실적인 모습을 영화 속 이대근의 낭만적인 행동을 통해서 보여준다.
7. 영화의 또 다른 매력은 영화 속을 흐르는 김수철의 음악이다. 김수철의 낭만적인 음악을 화면과 함께 즐기고 싶은 사람들에게 영화 <고래사냥>은 제격이다. 김수철은 애상적인 음악의 인기를 바탕으로 벌어들인 수입을 곧바로 자신의 하고 싶은 한국적 음악에 쏟아부었다. 결과는 그다지 성공적이라고 할 수 없었다. 개인적으로도 김수철 음악에서 매력을 느끼는 것은 그가 초기에 만든 낭만적인 노래들이다. 그것은 젊음의 쓸쓸함과 외로움을 절실하게 표현하고 있다. 어쩌면 그가 진정으로 느낀 젊은 날의 고뇌였을 것이며 그의 진실함이 배여있는 노래들일 것이다. 하고 싶은 것과 자연스럽게 나타난 것, 그것의 매력적 차이는 어쩌면 ‘자연스러움’이라는 기준에 의해서 평가되고 있는지 모른다.
첫댓글 과거의 회상은 로드 무비의 꿈처럼 재현되는 것일지도...
흩어지는 나에 대한 아쉬움에 절로 읊조리게 되는 김수철의 노래!
모르겠네 정말
도대체 무슨 생각하는지
왜 찾으려고 하니
왜 잡으려고 하니
왜 가지려고 하니
또또또 그러면 어떡하니?
정신차려 이 친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