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가(退溪家)의 사람들과 의성
퇴계는 선성현(예안, 안동 온계)의 노송정에서 1501년 출생하여 1570년 졸하였다. 야은 길재 이후 조광조에 이르기까지 면면히 이어 내려온 사림파의 정신을 계승하여 조선의 성리학을 완성시킨 사람이다. 당시에는 남명 조식과 함께 영남 사림을 반분하여 이끌었으며, 후에 그의 후인들은 율곡 이이의 서인 학맥과 더불어 남인 학맥의 중심을 형성함으로써 조선 후기 사상계를 반분하여 이끌었다.
퇴계의 큰아들인 준(寯)은 자가 정수(廷秀)이고, 1523년에 태어나 1583년에 졸했다. 1555년(명종 10) 천거(薦擧)로 제용감 참봉(濟用監參奉)에 제수(除授)되고 집경전 참봉(集慶殿參奉)을 지냈고, 1569년(선조 5) 9월 봉화현감(奉化縣監)에 제수되어 1570년(선조 3) 겨울 퇴계 선생(退溪先生)이 졸(卒)하기 까지 관내 아전과 백성들을 사랑으로 다스렸고, 탈상(脫喪) 후에 통례원 인의(通禮院引儀)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573년(선조 6) 의흥 현감(義興縣監)으로 도임(到任)하여 1578년(선조 11) 임기가 끝나 평시서 령(平市署令)으로 승진하여 군기시 첨정(軍器寺僉正)으로 이배(移拜)되었다가 1579년(선조 12) 의성 현령(義城縣令)으로 도임(到任)하여 봉화•의흥현감 재임 시와 같이 의성고을을 잘 다스린 지 5년이 지난 1583년(선조 16)년 질환으로 의성현 관사(官舍)에서 졸(卒)하니 향년 61세이다.
숙인(淑人) 봉화금씨와 안도(安道), 순도(純道), 영도(詠道) 등 세 아들을 낳았다. 준의 묘는 죽동에 있고, 배위인 봉화금씨의 묘는 이황 퇴계의 묘 바로 아래에 있다. 황의 둘째아들 채는 1527년에 태어나 1548년에 졸했다. 묘는 의령군 소야동에 있으며, 자손은 없다. 황의 셋째 아들 적은 자가 정지(靜之)이고 1531년 태어나 1608년에 졸했다. 묘는 죽동에 있다. 나주박씨와 사이에 경도(敬道) 등 네 아들을 두었다.
준의 큰아들 안도는 자가 봉원(逢原)이고, 호가 몽재(蒙齋)이며, 1541년에 태어나 1584년에 졸했다. 생원이며 직장(直長)이었다. 조부인 퇴계의 문하에서 촉망받던 인물이었다. 묘는 계상의 묘지동(妙枝洞)에 있다. 배위는 안동권씨인데 정려문을 받았다. 자식이 없어서 영도의 둘째 아들 억(嶷)이 양자로 들어와 후사를 이었다. 묘는 죽동에 있다. 창령성씨와의 사이에 명철(命哲), 성철(誠哲), 신철(信哲), 윤철(允哲) 등을 낳았다.
명철은 자손이 없었으므로 성철의 장자 고(杲)가 양자로 들어와 후사를 이었다. 이 상계종파는 고(杲, 예천군수)에서 수겸(守謙, 현감) - 세덕(世德, 현령) 이어지고, 8대 봉사손 구응(龜應 )은 1729년 태어나 1756년(영조 32) 공릉 참봉(恭陵參奉)을 제수(除授) 받은 후 1757년(영조 33) 동몽교관(童蒙敎官), 1760년(영조 36) 사복시 주부(司僕寺主簿), 감찰(監察), 1761년(영조 37) 하양현감(河陽縣監)으로 나가 청렴과 간결함으로 고을 행정을 돌보아 어사가 장계를 올려 표리를 하사받았다.
1766년(영조 42) 통례원 인의(通禮院引儀), 1769년(영조 45) 부사과(副司果), 1771(영조 47) 남부도사(南部都事), 1772년(영조 48) 1월 영덕 현령(盈德縣令)으로 제수가 되었을 때, 임금이 특별히 명하여 입시하였다. 임금이 “너는 대현의 봉사손으로 하양현감 때 치적이 가장 우수하여 매우 가상하게 여겼노라.”고 하였다.
1775년(영조 51) 백천 군수(白川郡守), 1779년(정조 3) 군자감 판관(軍資監判官)을 지내고 1781년(정조 5) 정산 현감(定山縣監), 1783년(정조 7) 사복시 주부(司僕寺主簿)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말년을 보내다가 같은 해 6월에 비안 현감(比安縣監)으로 도임하여 쌍천교 다리를 놓는데 녹봉 600량을 선듯 내놓아 백성들이 칭송하며 공적비를 세웠다. 1785년(정조 9) 10월에 그만 두었다.
9대 봉사손은 지순(志淳,현령) 이고, 휘령(彙寧, 장악원정) - 만희(晩憙, 진사) - 중경(中慶) - 충호(忠鎬, 장릉참봉) - 원각(源慤) - 동은(東恩, 15대) - 근필(根必, 16대)로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