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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 *
우리나라 남한 각지에서 산재해 발견되고 있는 청동기시대의 고인돌이 태안읍 장산리 등지에서 7기가 발견된 바 있다. 태안 일원에서는 많은 토기가 발견되고 있는데 이는 대부분 백제시대 것으로 보인다.이 지역은 삼한의 마한 50여 개 국 중 신소도국(臣蘇塗國)에 해당되며, 현 태안읍 동문리, 즉 백화산 산기슭의 남향 저지대(일명 샘골)의 전답지대가 그 중심지대로 추정된다. 삼한시대에 천군(天君)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성역이었던 소도(蘇塗)의 칭호가 전해온 것으로 보아, 이 고장은 당시 제천의식의 중심이 된 부족국가였음을 알 수 있다.그 뒤 마한권을 정복해 명실공히 백제가 고대국가로 크게 발전하게 된 근초고왕 때 태안은 백제권에 들어갔고 성대혜현(省大兮縣)이 되었다. 통일신라시대에 들어와 757년(경덕왕 16) 기군(基郡)이 부성군(富城郡)으로 고쳐질 무렵 성대혜현은 소태현(蘇泰縣, 또는 蘇州)이 되었다. 이 무렵의 유적으로 추정되는 마애불이 태안의 백화산 중턱에 위치한 거암의 자연석에 새겨져 있다.1018년(현종 9) 지금의 태안인 소태현은 부성군의 속현에서 운주(運州)주 01)에 속하게 되었다. 충렬왕 때에 이르러 소태현 출신인 환관(宦官) 이대순(李大順)이 원나라의 은총을 입어 지금의 이름인 태안으로 고쳐져 지군사(知郡事)로 승격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곳은 처음 병마절제도위(兵馬節制都尉)가 수령을 겸임하다 뒤에 부사(副使)가 방어사(防禦使)를 겸임하고 병마(兵馬)의 실권을 장악하였다.신라 때부터 조선 초기까지 존재했던 향·소·부곡이 고려 때에도 지방행정구역의 하나로 군현의 하부조직에 속해 있었는데, 이 군에도 복평향(福平鄕)·오산소(吳山所)·양골소(梁骨所)·안면소(安眠所) 등이 있었다.또한 고려시대 삼남(三南)의 조곡(租穀)을 모두 서해를 통해 개경의 서강(예성강 하류)에 집중시켰던 바, 태안반도의 일각인 안흥정(安興亭) 부근의 심한 암초와 풍랑으로 멀리 우회하는 수로를 택하게 되자, 인종과 의종 때 태안의 동쪽 지협인 굴포에 운하를 개착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당시로서는 난공사로 10여 리밖에 굴착하지 못하고 그 뒤 조선시대까지 여러 번 완공을 시도했으나 끝내 실패하고 말았다.고려 말 왜구의 침탈이 혹심해질 때 이 군은 서산 지방과 같이 많은 피해를 입게 되었다. 따라서 한동안 행정이 마비되어 당시 수령이 겨우 두 명의 아전을 데리고 서산군에 속했다가 다시 예산군으로 옮겼다고 한다.1413년(태종 13) 대폭 개편된 군현제도로 충청도는 4목(牧) 14군(郡) 34현(縣)이 되었는데, 이 군은 고려 말과 같이 태안군으로 소근포(所斤浦)와 더불어 충청도 서쪽의 변두리가 되었다.1895년(고종 32) 해미(海美)가 서산군에서 승격, 분리해 군이 되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이 군과 함께 다시 서산군에 통합되었다. 일제강점기 때는 안면읍 승언리 출신인 이종헌(李鍾憲)이 독립투사로서 일제에 항거해 큰 공을 세웠다.1950년 6·25전쟁 때 북의 많은 피난민들이 이곳에 내려와 간척사업을 벌이고 인삼 재배 등을 하며 정착하게 되었다. 1972년 9월 1일 안면면에 고남(古南)출장소가 설치되었으며, 1973년 7월 1일에는 태안면이 읍으로 승격되고, 이북면 청산리·마산리가 원북면에, 안면면 간월도리가 부석면에 편입되었다.1980년 12월 1일 안면면이 읍으로 승격되었으며, 보령군 오천면 삽시도리 일부가 안면읍에 편입되었다. 1986년 4월 10일안면읍의 고남출장소가 면으로 승격되었다. 1987년 1월 1일 이북면을 이원면으로 명칭을 변경했다. 1989년 1월 1일에는 태안읍·안면읍 등 2개 읍, 6개 면이 서산군에서 분군(分郡)되어 태안군이 설치되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태안군(泰安郡))]
* 자연환경 *
태안반도의 서쪽에 자리 잡은 이 군에는 동쪽 서산시 일대의 가야산지(伽倻山地)에서 서쪽으로 전개되는 구릉성 산지가 있으며, 그 가운데 백화산(白華山, 284m)이 있다. 이곳에서부터 산지가 사방으로 뻗치면서 침식되어 많은 만입(灣入)과 반도, 대소의 섬들을 형성하고 있는데, 남쪽으로 남면반도와 안면도, 서쪽으로 소원반도와 근흥반도, 북쪽으로 이원반도 등으로 갈라져 있다.전체적으로는 100∼300m 높이의 저산성 산지들이 곳곳에 분포해 완사면 및 구릉지들이 점철하고 있을 뿐, 하천과 퇴적평야의 발달은 미약하다. 해안지형은 해안선이 길고 복잡한 리아스식 해안이며, 연안의 수심이 얕고 조차가 커서 간석지가 넓게 발달하였다.기반암은 대부분 선캄브리아기의 서산군층에 속하는 편암, 경기편마암콤플렉스에 속하는 화강암질편마암의 변성암류와 중생대 쥐라기의 대보화강암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군의 지형은 대체로 이들 암석의 분포와 깊은 관계가 있다.따라서 이 군 일대의 지형은 화강암류로 구성된 지역 중 해안 일대의 일부 지역, 화강암질편마암으로 구성된 소원 일대의 지역이 산지 내지 구릉성 산지를 나타낼 뿐 나머지 전 지역은 높이가 낮고 평탄한 지형면으로 구성되어 있다.대부분은 120m 이하의 기복량을 나타내고, 5° 이하의 완경사 지형이기 때문에 규모가 큰 하천이 발달하지 못했다.또한 산악지와 산사면 등 지형적으로 취락이 발달하기에 부적당한 곳을 제외한 저기복 구릉지의 토양은 강한 산성 내지는 약한 산성을 띠는 적황색토가 대부분이다.연평균 기온 12.4℃, 1월 평균기온 0.2℃, 8월 평균기온 25.3℃이며, 연 강수량은 1,471.10㎜이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태안군(泰安郡))]
* 유적·유물 *
태안읍 장산리, 고남면 고남리 일대에는 남방식 고인돌이 남아 있고, 안면읍 신야리와 근흥면 신진도리에는 조개무지[貝塚]가 각각 발견되고 석기류가 출토되었다.산성으로는 1514년(중종 9)에 축성된 소원면 소근리의 태안 소근진성(泰安所斤鎭城, 충청남도 기념물 제93호), 1655년(효종 6)에 쌓은 군사적 요충지로서 명나라 사신을 맞기 위한 호화주택을 건립하기도 한 근흥면 정죽리의 안흥성(安興城, 일명 安興鎭城, 충청남도 기념물 제11호)이 있다.그리고 근흥면의 수룡리 산성(水龍里山城)·두야리 산성(斗也里山城), 조선 태종 때 왜구를 막기 위해 쌓은 태안읍 동문리의 백화산성(白華山城,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212호)과 남문리의 태안읍성(泰安邑城), 그리고 장산리의 한의산성(漢衣山城)·서방현성(西方峴城) 등이 있다.봉수로는 태안읍 동문리에 백화산봉수(白華山烽燧)가 있어 동쪽으로는 서산의 북산(北山), 남쪽으로는 도비산(都飛山)에 호응하였다. 안흥성 내의 태국사(泰國寺) 옆에는 망해루(望海樓)라는 누각이 있어 해상의 절경을 조망하고 해구(海寇)의 출몰까지도 감시했다고 한다.불교문화재로는 태안읍 동문리의 태안 동문리 마애삼존불입상(국보 제307호)과 태안 동문리 석탑, 태안 남문리 오층석탑(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201호)이 있다. 그리고 상옥리의 흥주사 만세루(興住寺萬歲樓,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33호)·흥주사 삼층석탑(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28호), 남면의 몽산리 석가여래좌상(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22호), 해남사지(海南寺址)·안파사지(安波寺址) 등이 있다.유교문화재로는 태안읍 동문리에 태안향교(충청남도 기념물 제139호)와 남면 양잠리에 숭의사(崇義祠,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 300호)가 있다.그 밖에 남문리의 태안 목애당(泰安牧愛堂,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38호), 근흥면 안기리의 안양사, 원북면 반계리의 이종일선생 생가지(李鍾一先生生家址, 충청남도 기념물 제85호)와 태안읍의 태안 상옥리 최씨댁이 있다.그리고 중국 사신들이 안흥항으로 들어올 때 쉬어가기도 한 태안읍 동문리의 경이정(憬夷亭,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23호)이 있다.황도리에는 황도붕기풍어제(黃島―豊漁祭, 충청남도 무형문화재 제12호), 소원면 소근리에는 태안 설위설경(說位說經, 충청남도 무형문화재 제24호)이 전승되고 있다.한편, 안면읍 승언리에는 안면도의 모감주나무 군락(천연기념물 제138호)·태안 내파수도(內波水島, 충청남도 기념물 제64호)·안면읍의 태안 승언리 상여(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315호)가 있다. 근흥면의 난도 일원에는 태안 난도 괭이갈매기 번식지(천연기념물 제334호)가 있다. 원북면 신두리에는 신두리사구(천연기념물 제431호)가 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태안군(泰安郡))]
*교육·문화*
이 군에는 고려 말엽부터 교육기관이 설치된 것을 알 수 있다. 『태안군신학기(泰安郡新學記)』에 따르면 1350년(충정왕 2) 왜구의 침입으로 학당(學堂)이 소실되었다고 하여, 그 이전에 이미 교육기관이 설치되어 있었음을 단적으로 입증해 준다. 그 뒤 1390년(공양왕 2)에 다시 학당을 설치했으나 본래의 모습대로 복구되지는 못했다.이어 1407년(태종 7)에 문묘·양무(兩廡)·강당 등을 짓고 학생을 교육했다고 하는데, 이것이 오늘의 태안향교(泰安鄕校)로서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이 내려질 때까지 많은 유생을 배출하였다.20세기 초엽 기울어가는 나라의 명운을 바로잡기 위해 뜻있는 인사들의 구국운동이 열화같이 일어날 때 이 군에서도 새로운 근대 교육기관이 설치되었다. 1906년 안면읍의 유지들이 모여 구국운동에 앞장설 것을 결의하고, 그 실천방법으로 우선 학교를 세워 남녀 청소년들에게 신교육을 하기로 다짐했다. 이 결의에 따라 김병년(金炳秊 )을 중심으로 안면읍에 광영학교(廣英學校)를 세워 이것이 태안군 내 근대학교 설립의 효시가 되었다.사학 광영학교와 태안에 화양의숙(華陽義塾) 등이 설립되었다. 광영학교는 10여 년간 많은 인재를 육성하다 일제의 탄압으로 안면국민학교로 개편되었다. 1907년에 설립된 화양의숙은 당시 서산군수였던 이기상(李基祥)이 자기 고향인 태안읍 남문리에 세우고 영어·일본어·산수 등의 신학문을 가르쳤다. 그러나 1920년에 폐교되어 태안군에 설립된 사학교육기관은 공립학교로 흡수·개편되거나 폐교되어 완전히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최초의 공립학교는 1911년의 태안초등학교이며 광복 이전까지 13개교가 설립되었다. 1945년 광복 후 초등학교가 36개교 증설되었다. 2015년 현재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19개교, 중학교 8개교, 고등학교 4개교가 있다.문화공간으로는 일반 공연장과 실내체육관이 있다.1979년에 설립된 태안향토문화연구소는 각종 문화재를 조사·발굴·연구함으로써 지역사회 발전에 크게 공헌하고 있으며, 군민의날 행사에는 태안문화제를 열어 군민 화합을 다지기도 한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태안군(泰安郡))]
* 민속 *
이 고장의 민속놀이로는 볏가리놀이, 꼬대각시놀이, 안면읍 황도리의 붕기풍어놀이 등이 있다. 볏가리놀이는 이 고장의 여러 마을에서 현행되고 있는 놀이이다. 붕기풍어놀이는 동제의 한 과정에서 이뤄지는 놀이 또는 의식이다.꼬대각시놀이는 주로 정월에 많이 행해지는 여인들의 방안놀이이다. 놀이방법은 여인들 가운데 한 사람을 술래로 정해놓고 그 여인을 향해 나머지 사람들이 「꼬대각시노래」를 부른다.「꼬대각시노래」의 가사에는 축원의 의미가 깃들여 있기 때문에, 이 노래를 술래에게 집중적으로 들려줌으로써 술래는 신이 붙게 된다.신이 붙은 술래는 춤을 추고 펄펄 뛰기도 한다. 그러면 여인들은 신이 붙은 술래에게 신수를 묻거나 점을 친다. 다만, 이 놀이에서 술래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며, 신이 붙을 수 있는 특별한 사람이 선정된다.이 고장에서 비교적 역사가 오래되고 규모가 큰 동제로는 안면읍 황도리의 당제가 있다. 신격으로는 원래 진대서낭(구렁이)을 모시나, 당 내부에는 성주·사해군왕장군·오방장군·삼불제석·용궁장군 등의 화상이 걸려 있고, 그 옆 산제당에는 산신할아버지와 산신할머니의 화상이 걸려 있다.이 당제는 1월 2·3일 이틀 동안 지내는데, 지금도 황소 한 마리를 잡아 제물로 쓰고 있다. 특히 당제가 있는 날 각 배의 선주와 선원들이 자기 배의 기를 각기 앞세우고 「붕기타령」을 부르면서 당으로 향하는 당맞이가 장관이다. 이 붕기놀이는 1977년 10월 제18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한 바 있다.고남면 고남리 옷점[衣店]마을에서는 섣달 그믐날 자정에 당산에서 당제를 지낸다. 그보다 이른 시각에는 당주 일행을 제외한 마을사람들이 바닷가에서 조개나 김을 부르는 ‘홍합제’를 지낸다. 홍합제는 바닷물이 나간 썰물 때 장벌에서 지낸다.밥 세 그릇, 삼색실과 술 등을 차려놓고 “ㅇㅇ포 조개요, 조개 오너라.”라고 제관이 다른 지방의 홍합을 부른다. 그러면 참석한 마을주민들은 “우∼우∼”하며 홍합이 몰려드는 소리를 낸다. 똑같은 방법으로 제관이 김을 부르면 마을 사람들은 제관의 소리를 받아 다시 “우∼우∼”하며 김이 몰려드는 소리를 낸다.이때를 맞추어 풍물패들은 풍물을 친다. 이렇게 홍합제를 지내면 새해에 조개와 김이 풍성해진다고 한다. 이 밖에 근흥면 신진도리의 당제, 가의도리의 산당제, 소원면 파도리의 산제 등이 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태안군(泰安郡))]
* 설화·민요 *
이 고장의 설화 가운데는 효자·효녀전설, 역사적 영웅전설 등도 있지만 지명에 얽힌 전설이 단연 많다. 소원면 파도리·가의도리의 지명유래담, 고남면 옷점의 지명유래담, 남면거아도의 지명유래담, 이원면 포지리의 지명유래담 등이 그것이다.가의도 지명은 이 섬에 귀양 온 중국인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이라 한다. 옛날 중국의 가의(賈誼)라는 충신이 “세상이 어지러워 곧 난리가 날 것이니 준비해야 한다.”고 했다가 거짓말을 발설한 죄로 이 곳 무인도에 귀양 오게 되었다. 그러나 몇 년 후 난리가 나서 그의 말이 들어맞자 그는 귀양살이에서 풀려나게 되었다. 그가 중국으로 돌아간 뒤 사람들은 그의 이름을 따 그가 머물렀던 섬을 가의도라 불렀다 한다.남면 앞바다에 있는 거아도는 귀양 온 사람들이 많이 살았는데, 그들은 상투를 틀지 않고 머리를 길게 땋아 내렸다. 그리하여 그 앞을 지나다니는 배에서 보면 항상 아이들만 사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뱃사람들은 그 섬의 이름을 아이들만 사는 섬, 즉 거아도(居兒島)라 불렀다고 한다.거아도 사람들은 섬 크기에 비해 빈한한 생활을 하고 있다. 이것은 이 섬이 곡창지대인 남쪽에 등을 돌린 형국을 하고 있으며, 걸인이 바랑을 지고 북쪽으로 가는 형상을 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안면읍 일대에는 안면도가 섬이 된 내력의 설화가 전한다. 예전에 안면도는 남면과 붙어 있는 육지였다고 한다. 지형상으로 이곳은 큰 인물이 날 지세를 갖추고 있었는데, 중국의 이여송(李如松)이 와서 보고 큰 인물이 나지 않도록 지맥을 끊으려고 판목을 자르자 자른 곳에서 많은 피가 흘렀고 그때부터 이곳은 섬이 되었다고 한다.원북면 방갈리 2구에는 학 모양의 바위가 있는데, 학암포해수욕장의 명칭도 여기에서 유래한 것이라 한다. 학바위 밑에는 용이 나와 하늘로 올라갔다는 용굴이 있다. 예전에는 용이 그 속에서 살았으며 굴 안에는 용이 베고 잔 용베갯돌이 있다. 그 굴은 대방이섬까지 뚫려 있으며, 가끔 용이 굴에서 나와 하늘로 올라갔다고 한다. 그런데 임경업(林慶業)장군이 학바위 근처에 진을 치고 용과 싸운 뒤로는 용이 승천하지 않는다고 전한다.이 고장은 바닷가에 접해 있으면서도 뭍에서는 논농사를 지으며, 여러 마을에서 모시 베를 짜왔다. 그런 관계로 「모찌는노래」·「모심기노래」·「논매기노래」·「베틀노래」등 기능요가 다수 전한다.“출렁 출렁 모 한때 쪘네/ 그 말끔 땅에 떨어지기 전에/ 또 한짐 쪘네……”로 이어지는 「모찌는 노래」나 “매구 감세 얼카뎅이/ 얼카덩어리 얼카뎅이/ 여기도 찍구 얼카뎅이/ 저기두 찍구 얼카뎅이/ 잘도 매네 얼카뎅이……”로 이어지는 「호미뎅이」(논매기노래)는 고된 노동의 피로를 잊게 하고 일의 능률을 올려주며, 또한 흥을 불어넣는 기능을 한다.한편, 겨울철에 부녀자들이 즐겨 부르던 「꼬대각시요」가 있다. 꼬대각시는 ‘고자의 각시’를 뜻한다. 이 각시가 고자와 혼인해 평생을 고적하게 산 애달픈 사연을 노래한 것이 「꼬대각시요」이다.“한살 먹어서 어머니 죽고/ 두살 먹어서 아버지 죽고/ 세살 먹어서 말을 배우고/ 네살 먹어서 걸음 배워/ 다섯살 먹어서 삼촌의 집에 가니/ 삼촌의 댁은 남의 살붙이라고/ 십리만큼 내어치고/ 아이고 설움 공밥이야/ 아이고 설움 답답해요/ 그럭저럭 이십살을 먹고나니/ 중신애비 들락날락/ 삼촌의 댁이 허는 말이/ 저놈의 지지배 때문에/ 우리 대문특(턱)이 다 닳는구나……”로 이어지는 「꼬대각시요」는 한 여인의 애처로운 삶을 서사적으로 표현했으며, 이 지방에 널리 전한다.이처럼 비운의 삶을 담은 노래와는 달리 한량이나 총각들이 즐겨 부르던 연가도 전한다. “덤벙덤벙 세 모래 강변에 마전하는 저 큰아기/ 누구의 간장을 녹이려고 저다지 곱게두 태어났나/ 반달같은 고운얼굴 구름같은 검은머리/ 동백기름 슬쩍발러 황초댕기/ 사방둘러 끝만올려 슬쩍매고/ 젖 옷고름 찍어달아 겨드랑 밑에 슬쩍매고/ 한손에는 방망이들고 또한손에는 마전들고/ 또드락 똑닥 방맹이소리 보는 이의 간장을 다 녹인다……”이 서정요는 그 가사가 매우 세련되고 묘사 또한 뛰어난 연정가이다. 젊은 처녀가 마전하고 있는 노동의 현장이 관찰자에 의해 환상처럼 아름답게 그려지고 있다. 이 밖에도 이 고장에는 「뱃노래」·「방아노래」·「물레노래」·「그네노래」·「숫자풀이노래」·「상엿소리」등이 전한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태안군(泰安郡))]
* 관광 *
이 군은 태안해안국립공원에 속해 있어 해안 경관이 수려하고, 여러 해수욕장들과 많은 역사적 유물·유적들이 있어 연중 많은 관광객이 다녀가고 있다. 관광코스로는 태안읍 코스, 남면·안면읍 코스, 소원면 코스, 근흥면 코스, 원북면 코스 등이 있다.태안읍 코스는 동문리의 백화산(백화산성·봉수대·마애삼존불입상·홍주사 원통전·삼층석탑·태을암)―동문리의 경이정―동문리의 태안향교―인평리의 안흥량굴포운하개착지―남문리의 탑골오층석탑 등으로 연결된다.남면·안면읍 코스는 남면 동산리의 몽산포해수욕장―안면읍 창기리연륙교 일대의 자연경관―승언리 일대의 솔밭―승언리 일대 방포해안의 모감주나무 군락 등으로 연결된다. 안면읍 일대에는 곳곳의 삼림에 기러기·황새 도래지가 있고, 해안의 암초도 볼 만하다. 또한 안면읍의 삼림에서는 소사나무·굴참나무·갈참나무·노린재나무·왕머루·새머루·인동덩굴·칡 등이 많이 자라고 있다.소원면 코스는 소근리의 소근포진성―의항리의 운하개착지―모항·의항리의 만리포·천리포해수욕장으로 연결된다. 근흥면 코스는 도황리의 연포해수욕장―정죽리의 안흥항·태국사·망해루터 등으로 연결된다. 원북면 코스에는 방갈리의 학암포해수욕장 등이 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태안군(泰安郡))]
첫댓글 흥미있고 유익한 글이네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