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이맘때쯤 늘상 찾아오는 꽃샘추위! 그러나 나의 마이크로기행은 멈출수 없지요!ㅎ
2019년10월 대전사이언스페스티발 구경하러 방문한 후 오랜만에 하는 대전기행입니다!
역사탐방을 하다보면 조선시대 건축물의 이름에 다양한 의미가 담겨 있어서 꽤 흥미롭습니다.
건물에도 격이 있어서 전(殿)-당(堂)-합(閤)-각(閣)-제(齊)-헌(軒)-루(樓)-정(亭)순서로 구분함.
(참고)
*전(殿) : 왕,왕비,대비 등이 지내는 곳으로 주로 공적인 활동공간
*당(堂) : 전보다 한단계 낮은 건물로 사적인공간이나 관리의 업무공간
*합(閤)과 각(閣) : 전이나 당의 부속건물이거나 혹은 독립된 건물
*제(齊)와 헌(軒) : 왕실가족이나 궁궐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이 주로 쓰는 기거 및 활동공간
헌은 대청마루를 두고 공적인 업무에 주로 사용
제는 생활공간이나 독서공간으로 주로 사용
*루(樓) : 바닥이 지면에서 사람 한길높이 정도의 마루로 되어있는 건물
2층건물일 경우 1층은 각, 2층은 루라고 부름
*정(亭) : 흔히 정자라고 하는데 연못,개울,산속의 경관이 좋은 곳에 휴식이나 유희공간으로 쓰는 집
(기행코스)
동춘당역사공원~송애당 및 쌍청당~박팽년유허~우암사적공원
1.동춘당(同春堂)역사공원(대전광역시 대덕구 동춘당로 90(송촌동))
동춘당은 보물제209호로써 송이창이 세웠던 건물을 아들인 동춘당 송준길이 1643년에 지금의 자리에
옮겨지은 별당입니다.
건물앞에 걸려있는 "同春堂"이란 현판은 송준길의 사후에 우암 송시열이 쓴 것으로, 동춘이란 "만물과
더불어 봄을 함께 한다"는 뜻입니다.
동춘당은 단아하면서도 균형감이 좋고 우아한 지붕의 곡선 등에서 조선시대의 별당건축양식을 잘 나타내고
있으며 온돌방측면에 구멍을 내어 굴뚝을 대신한 것은 "따뜻함"이라는 본래의 기능보다 어려운 백성을 의식한
겸양의 덕목을 지키려 한 모습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1)안내도
2)공원풍경들
*공원전경
*꽃창포원(현재는 꽃피기 전이라서 흡사 갈대밭 같네요!ㅋ)
6~7월에 꽃이 피는 붓꽃과 식물로 원줄기 또는 가지끝에 적자색꽃이 달리며 열매는 9월에 맺음
*동춘당 모형으로 스테인리스강 주물로 제작된 1/20크기
*호연재 김씨 시비와 소개문
3)동춘당종택
국가민속문화재 제289호로 송준길의 5대조 송요년이 15세기후반에 지었다고 전하는데 이후 몇차례 옮겨
지었고 현재의 종택은 1835년에 중건한 모습으로 사랑채,안채,별당,별묘,가묘 등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사랑채는 일자형으로 규모가 크고 큰사랑방과 작은 사랑방에 따로 마루방이 있고 안채는 ㄷ자형 평면으로
대청을 중심으로 서쪽에는 부엌,안방,골방을 배치하였고, 동쪽에는 안쪽부터 건넌방,부엌,행랑방이 있습니다.
안마당과 사랑채사이에 내외담을 두어 내외를 구분하였고 별묘에는 송준길의 신위를 모셨고 가묘에는 제사를
받드는 4대의 신위를 모셨습니다.
동춘당종택은 호화롭지 않고 검소하며 자연과 조화를 이루고, 공간배치가 넉넉한 기호지방 양반집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4)동춘당
5)소대헌과 호연재고택
국가민속문화재 제290호로 동춘당 송준길의 둘째손자 송병하(1646~1697)가 분가하여 거주한 건물로 대문을
들어서면 왼편에는 가장이 독서나 손님맞이할때 사용하였던 큰 사랑채가 있고, 오른편에는 부모나 장성한 자녀의 거처로 사용하였던 작은 사랑채가 나란히 배치되어 있습니다.
작은 사랑채 왼쪽의 중문을 들어서면 안주인의 생활공간인 ㄱ자 모양의 안채가 있고, 안채 뒤뜰엔 "송씨가묘"
(宋氏家廟)라고 쓴 사당이 있으며 안채와 큰 사랑채,작은 사랑채,사당 등이 남아있어 조선시대 양반집의 구조를 잘 살펴 볼수있는 고택입니다.
2.송애당과 쌍청당
1)송애당(松崖堂 : 대전광역시 대덕구 중리동 115)
유형문화재 제8호로 조선 효종때 충청도관찰사를 지낸 송애당 김경여(1597~1653)선생이 병자호란후 벼슬을
버리고 돌아와 인조18년(1640)에 지은 별당으로 "송애"는 눈서리를 맞아도 변치않는 소나무의 굳은 절개와
우뚝선 언덕의 굳센 기상을 마음에 간직하겠다는 뜻으로 선생의 높은 기개와 충성심을 마음에 담고자 건물이름으로 삼은 것입니다.
건물의 크기는 앞면3칸, 옆면2칸에 팔작지붕을 올렸으며 이곳에서 당시 유명한 학자들과 함께 학문을 닥았으며 이 고장 별당의 건축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2)쌍청당(雙淸堂 : 대전광역시 대덕구 계족로 574번길 51)
유형문화재 제2호로 조선전기 학자인 쌍청당 송유(1389~1446)선생이 지은 별당으로 건물이름은 선생의 호인
쌍청을 따다 붙였는데 청풍과 명월의 맑은 기상을 마음에 담고자 한 것이라고 합니다.
조선 세종14년(1432)에 지은 후로 여러차례에 걸쳐 고쳐 지었지만 원래의 모습을 잘 보존하고 있습니다.
건물은 앞면3칸, 옆면2칸규모로 왼쪽1칸은 온돌방, 오른쪽2칸은 대청마루로 꾸몄는데 조선전기의 건축양식을
살펴볼수있는 건물로 다른 건축물에서는 볼수없는 단청이 되어있어 특이하며 근처에 남아있는 이와 비슷한
별당건물 가운데 가장먼저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중요한 문화유적이라 할수 있습니다.
3.박팽년유허(朴彭年遺墟 : 대전광역시 동구 우암로 326번길 28) 대전광역시 문화재자료 제8호
사육신의 한사람인 박팽년이 태어나서 성장한 회덕현 흥농촌 왕대벌(현재 동구 가양동)에 있는 집터안에 있는
유허비인데 박팽년은 조선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순천,자는 인수,호는 취금헌,시호는 충정입니다.
형조판서를 지낸 박중림의 5남1녀중 장남으로 태어나 세종16년(1434)에 알성문과에 을과로 급제하고 집현전
부제학, 충청도관찰사, 형조참판을 거쳐 중추원부사를 지냈으며 세조2년(1456) 성삼문 등과 함께 단종복위를
도모했으나 김질과 그의 장인인 정창손의 고발로 발각되어 국문을 받은 후 옥중에서 사망했습니다.
현종9년(1668)4월에 송시열이 회덕 박선생유허비에 그의 생가터가 황폐되어 알아볼수 없고 정자 주춧돌만
논 가운데 남아있다고 기술하였고 1672년에 유림들이 박팽년을 추모하고자 회덕현의 물자지원을 얻어 정자를
복구하고 장절정(壯節亭)이라 이름붙이고 동쪽으로 100보 떨어진 지점에 직절당(直節堂)이라는 재실을 지어
제관들이 재결하는 장소로 삼았으며 현재의 비각은 한국전쟁때 파괴된 것을 16대손 박상동이 고쳐지었음.
4.우암사적공원(尤庵史蹟公園 : 대전광역시 동구 충정로 53일원)
조선시대 대유학자인 우암 송시열(1607~1689)선생이 흥농서당과 남간정사를 세워 많은 제자들과 함께 학문을 연구하며 병자호란때의 치욕을 씻기 위한 북벌정책을 강구하였던 곳으로, 정절서원과 우암선생을 추모하기
위한 종회사가 있던 곳이기도 하며 인조때 생원시험에 합격한 이후 이조판서 등을 거쳐 우의정과 좌의정을
지냈으며 시호는 문정이고 문묘에 배향되었고 현재 이곳에는 남간정사와 소제동에서 옮겨온 기국정 등이 남아
있고 선생의 문집인 "송자대전"목판이 보관되어 있으며 선생의 높은 뜻을 기리고자 이곳에 남간사를 다시 세우고 주변을 새롭게 정비하여 1991~1997년까지 공사하여 1998년4월17일 우암사적공원을 개장함.
1)안내도
2)우암사적공원 정문
3)기국정(杞菊亭)
우암 송시열이 소제동 소제방죽옆에 세웠던 건물로 소제에 연꽃을 심고 건물주변에는 국화와 구기자를 심었
는데 연꽃은 군자를, 국화는 세상을 피하여 사는 것을, 구기자는 가족의 단란함을 각각 의미한다고 합니다.
선생은 이곳을 찾는 손님들과 학문을 논하며 지냈는데 선비들이 구기자와 국화의 무성함을 보고 건물이름을
기국정이라 불렀으며 건물이 본래 초가지붕이었으나 선생의 큰손자가 기와지붕으로 수리하였고 그후 소제가
메워지면서 건물도 차츰 허물어지게 되자 1927년 현재의 장소로 옮김.
4)기국정앞에 있는 연못
5)남간정사(南澗精舍)
조선 숙종때인 1683년에 송시열이 흥농동(현재 가양동)에 세운 서재 능인암 아래에 건립한 서당으로, 만년에
후학들과 강론했던 곳이며, "남간"은 양지바른 곳에 흐르는 개울을 뜻하는데 주자를 사모하는 마음에서 주자
의 시 "운곡남간"에서 따 왔다고 하며 건물은 여러차례의 중수를 거쳐 현재에 이르고 있음.
남간정사는 정면4칸, 측면2칸의 전체 8칸규모로 가운데 4칸은 대청마루이고 서쪽 2칸은 온돌방이며 동쪽에
있는 2칸중 앞쪽의 대청과 연결된 누마루는 대청보다 높게하여 그밑에 함실을 두었고, 누마루 뒤쪽에는 온돌방
있으며 대청마루의 앞뒤와 동편 창호는 모두 띠살문으로 된 들어열개로 되어 있습니다.
기단은 자연지반위에 돌을 깔아 구축하였으며 대청마루를 제외한 다른 부분은 모두 토단위에 초석을 얹었는데
주초석은 자연석과 8각으로 가공한 초석이 함께 사용되었고 모서리 추녀끝에는 활주를 세웠습니다.
전면의 반석위에 연못을 조성하여 출입은 전면이 아닌 후면으로 하도록 되어있는 독특한 구조로 후면의 샘물과, 대청마루밑으로 흐르는 물, 동쪽의 계곡에서 흘러들어오는 물이 만나 연못을 이루도록 하였습니다.
연못가운데는 섬을 하나 두었는데 이는 신선이 사는 봉래산을 의미하는 전통조경의 정형이기도 합니다.
6)유물관(송시열선생을 위시한 은진송씨일가의 각종 유물들을 모아 전시한 곳)
*유물관 전경
*쌍청당제영 및 수옹일기
*화양서원 복원조감도
화양서원은 숙종22년(1696) 송시열선생을 제향하기 위해 세운 서원(소재지 : 충북 괴산군)으로 고종8년(1870)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건물들이 헐렸으나 해방후 다시 복원됨(국가사적 제417호)
주요시설로는, 만동묘,서원,증반청,존사청,풍천재,유의재,거인재,일치당,서원고직,제주기고,대전판각,초당,
열천재,소양재,황묘고직 등이 있습니다.
*송시열 글씨
부끄러울 "치(恥)"자로 병자호란과 정묘호란을 통해 오랑캐라 여겨왔던 청에게 두번이나 치욕적인 패배를
당한 조선의 참담한 심정을 담은 글씨
*송시열 영정
*우암집
송시열 문집은 가장먼저 권상하가 편찬하여 발간한 황강본이 있으며, 그 이후 숙종43년(1717) 이희조, 민진우
등의 건의에 따라 왕명에 의하여 교서관에서 167권의 철활자로 간행하였음.
7)홍살문
8)우암사적공원 조성기록
9)이직당(以直堂)
명정문으로 들어가 정면에 보이는 건물로 "마음을 곧게 쓰는 집"이라는 뜻을 가진 사우를 위한 강당으로
우암선생의 직(直)사상을 담고있음
10)명숙각明淑閣)
이직당 전면 우측에 있는 반누각형식의 건물로 "모든 일을 명확하게 하고 마음을 밝고 맑게 하라"는 뜻을 가진 선비들의 공부방
11)인함각(忍含閣)
이직당 전면의 좌측에 있는 반누각형식 건물로 "모든 괴로움을 참고 또 참아야 한다"는 뜻의 선비들 공부방
12)견뢰재(堅牢齋)
이직당과 남간사 사이에 있는 좌측 건물로 "우암선생의 마지막 교훈을 받들고 선현의 가르침을 굳게 지키라"
는 뜻의 선비들 공부방
13)심결재(審決齋)
이직당과 남간사 사이에 있는 우측 건물로 "매사를 심사숙고하여 결정하라"는 뜻의 선비들 공부방
14)남간사(南澗祠)
우암 송시열, 수암 권상하, 석곡 송상민 세분을 모시는 사당으로 매년 봄과 가을에 제향을 지냄.
15)덕포루(德布樓)
"덕을 널리 베푼다"는 뜻의 누각
*정면에서 바라본 덕포루
*덕포루 내부전경
*덕포루에서 바라본 연못전경
16)우암자료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