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정(栗亭) 박서생[ 朴瑞生 ]
조선 전기 의성 출신의 문신으로 본관은 병산(屛山)[비안(比安)]. 호는 율정(栗亭), 시호는 문충(文忠). 고려 문화시중을 역임하고 벽상공신으로 병산군(屛山君)에 봉해졌던 박우(朴瑀)는 병산 박씨의 1세가 되는 중시조이다. 고조할아버지는 판도사 판서(版圖司 判書)를 지낸 박계오(朴繼五)이고, 증조할아버지는 직장(直長) 박종주(朴宗柱)이고, 할아버지는 예부 낭중(禮部 郎中) 박윤보(朴允甫)이고, 아버지는 박점(朴漸)이다. 손자 박효원(朴孝元)은 춘추관 기사관(春秋館 記事官)으로 『세조실록(世祖實錄)』을 편찬에 참여하였고, 장령(掌令), 사간(司諫)을 역임하였다.
박서생(朴瑞生)[?~?]은 문과 중시에 급제하여 좌정언에 제수될 정도로 학문이 뛰어 났다. 이후 사헌부 집의, 대사성, 대사헌, 집현전 부제학, 공조 참의, 안동 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태종 대에는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특히 1428년(세종 10) 조선 최초의 통신사 정사로 일본에 다녀와서, 일본의 제도와 풍습을 소개하면서 좋은 점을 차용할 것을 건의하였다. 수차와 화폐사용, 교량과 역원(驛院)의 정비, 상가의 진열장 및 간판 정비, 사탕수수 재배, 각종 염색이나 은박지 제조법 소개 등 매우 실용적이고 시대를 앞서가는 건의 내용이 있다. 박서생의 관력이나 시무책 건의는 『조선왕조실록』에 실려 있다.
박서생은 세종 대의 분위기에 걸맞는 실용적 경세론을 갖고 있었으나, 애석하게도 그와 관련된 자료가 임진왜란 당시에 소실되어 생몰년조차 확인할 수 없다. 다만 1898년에 건립된 박서생 사적비가 경상북도 의성군 비안면 용천리 417-1에 자리하고 있어 박서생의 삶을 복원하는 데 도움을 주고 있다.
1714년 유림 공의로 세워진 의성군 구천면 산구동 구천 서원(龜川 書院)에 박의중(朴宜中), 이우(李瑀), 김효정(金孝貞), 정휘(鄭輝)와 함께 배향되었다. 1868년 흥선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의거 훼철되었다. 1898년에 박서생 사적비가 건립되었다. 사적비 전면에 ‘유명조선 가선대부 이조 참판 율정 박서생 사적비(有明朝鮮嘉善大夫吏曹參判栗亭朴瑞生事蹟碑)’라고 새겼고, 측면에 ‘대한광무이년무술사월삼일(大韓光武二年戊戌四月三日)’에 비를 세웠고 춘추관 기주관 정하묵(丁河黙)이 찬하고, 비안군 초대 군수 김용배(金容培)가 썼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비문에는 박서생의 학풍, 야은 길재와의 관계 등 박서생의 일생이 기록되어 있는데 중간 중간에 마모가 심하여 육안으로 글자를 판독할 수 없는 부분은 탁본을 해서 판독해야 할 정도이다.
참고문헌